―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에 실린 에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정치적 폭력의 심리〉만을 옮긴다.


정치적 폭력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하기도 하다. 만약 정치적 폭력행위를 이해한다는 식으로 다루면 당장 폭력을 찬양했다고 비난을 받게 된다. 만약 《암살자ATTENTATER》 같은 반체제 집단의 뜻에 동조한다고 하면 공범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지적 이해력과 심정적 동조 없이 어떻게 인간 고통의 근원에 근접할 수 있으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야할 궁극적 길을 어떻게 가리킬 수 있겠는가.

원시인은 자연의 힘을 제대로 알지 못해 그 힘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피하였다.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나서도 인간은 자연의 힘이 생명을 죽이고 엄청난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피했다. 진지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삶에 누적된 힘, 그 힘의 결정판인 정치적 폭력이 폭풍우나 번개와 같은 자연현상의 공포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런 견해를 제대로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멸스러운 우리 사회의 비리에 대해 가슴 깊이 느껴야 한다. 삶 자체가 고통으로 요동치고, 수많은 사람의 슬픔과 절망이 매일같이 지속된다. 우리 자신이 참된 인류의 동반자가 되지 않으면 인간 영혼에 축적도니 분노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이 분노는 높이 솟구치는 뜨거운 감정으로 엄청난 폭풍우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무지한 대중은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항한 폭력적 저항을 잔인하고 가슴도 없는 괴물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 야수가 자신들의 기쁨과 생명을 파괴하고 피를 뿌리게 한다고 생각하고 기껏해야 무책임한 미치광이 정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다. 사실 폭력적 저항을 행사하는 이들의 성격이나 인품을 연구하고 그들과 밀접하게 사귀어본 사람은 이들이 부정과 비리에 대해 너무나 민감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들은 자기 주변의 부정과 비리 때문에 그런 사회적 범죄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정치적 폭력행사자의 심리를 연구하고 토론한 저명한 작가와 시인들은 이들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낸다. 작가와 시인들이 폭력을 교사하고 폭력행위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겠는가? 그건 확실히 아닐 것이다. 폭력행사는 사회적인 관심이 많은 젊은 학생들의 전형적인 태도일 것이다. 모든 폭력적 행위 이면에는 어떤 분명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아는 비욘슨(Bjørnstjerne Bjørnson)은 그의 작품 『인간 권력을 넘어서Beyond Human Power』 제2부에서 강조하기를 현대에 자기 신념 때문에 피를 흘리며 순교한 사람들은 아나키스트라고 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자기의 순교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웃으면서 죽음을 맞았다.

프랑스 소설가 코페(François Coppée)는 폭력을 행사하는 혁명가의 심리와 관련해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바이양(Marie Édouard Vaillant)(파리 의사당에 폭탄을 던진 아나키스트 -역자 주)의 처형에 관한 상세한 글을 읽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상상하건대 그는 밧줄에 묶인 채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걷고, 자기 의지를 확고히 다지고, 모든 힘을 집중한 다음, 눈을 칼에 고정시키고서는 마침내 사회를 향해 자신의 저주를 던졌을 것이다. 다른 구경꾼들이 내 마음 속에서 갑자기 등장했다.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직사각형 서커스 공연 마당 한가운데 서로 밀치며 나타났다. 수많은 눈들이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가 나타나자 거대한 원형극장 계단에서 공포스러운 비명이 울린다. ‘사자다! 야수를 가두었던 우리의 문이 열렸다!’

나는 처형이 행해질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초범을 처형한 예도 없었고, 더구나 실패한 범죄자를 처형하지 않는 것은 오랜 관습이었다. 그런데, 이 범죄는, 끔찍하기는 하지만, 사심과는 무관하게 어떤 추상적인 사상으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그 사람의 과거, 사람들이 포기한 유년시절, 고난의 삶은 그가 스스로 기꺼이 선택한 것이었다. 신문에서는 그의 행동에 대해 너그러운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고 웅변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주장을 ‘순진하고 문학적인 주장’으로 치부하며 경멸할 것도 못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단두대에서 자신의 저주를 한 번 더 표현하는 것은 사상가로서의 명예였던 것이다.“

졸라도 그의 작품 『제르미날Germinal』과 『파리Paris』에서 사회 체제에 대해 격렬히 반발하면서 자기 삶을 마감하는 사형수의 인간적 고통에 대해 깊이 동정하면서 그 마음에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폭력적 혁명가의 심리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으로 해몬(M. Hamon)이 있다. 이 사람은 뛰어난 저술 『심리학Une Psychologie』과 『직업 전사Militaire Professionel』의 저자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전형적인 아나키스트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확실한 방법이 있다. 아나키스트의 심리상태는 그들의 공통된 특성의 총합니다. 아나키스트라면 누구나 전형적인 아나키스트의 마음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과 구별된다. 전형적인 아나키스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반란의 정신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 형태란 반대, 꼬치꼬치 따지기, 비판, 혁신의 정신이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자아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자유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또 호기심이 강해 뭐든지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이런 특성들에다 타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고도로 발달한 도덕적 감수성, 정의에 대한 예민한 감각, 그리고 사명의식에 불타는 열정이라는 특성이 더해진다.”

이런 특성에다 샌본(Alvin F. Sanborn)은 다음과 같은 성질도 확실히 추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성질이란 동물에 대한 흔치 않은 사랑, 일상적 생활의 모든 평범한 관계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특출한 따뜻함, 예외적일 정도로 절제된 행동, 검소하고 규칙적이고, 금욕적인 생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기를 말한다. 다음은 폭력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단순히 아나키스트를 욕하거나 파리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이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이치를 사람들은 잊기 일쑤다. 분명한 사실은 살인과 같은 엄청난 일은 너무나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하거나 절망에 빠진 계급이나 개인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결국 공격을 하는 상황이든 받는 상황이든 상관없이 폭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는 숨을 쉬고 생명을 부지하려는 인간 본성이 격화되어 최후의 발악으로 나타나는 투쟁이다. 이 절망적 행위를 하게 되는 동기는 어떤 특별한 신념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깊은 인간 본성 그 자체에서 나온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보면 이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지난 50년의 역사에서 폭력을 촉발한 가장 악명 높은 정치 집단들의 사례 세 가지를 들라면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의 ‘마치니 추종자들Mazzinians’, 아일랜드의 ‘페니언Fenians’(아일랜드 독립을 목적으로 재미 아일랜드인들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 결사체 -역자 주), 그리고 러시아 테러리스트가 있다. 이들이 아나키스트였는가? 그렇지 않다. 마치니 추종자들은 공화주의자들이었고 페니언들은 정치적 분리주의자들이었고,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은 사회민주주의자 내지 입헌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절망적인 환경 때문에 이런 가혹한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은 행동을 개인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회적 행태에 격렬히 반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놀랄 지경이다.

이제 아나키즘은 사회에서 활기찬 세력을 구축했고, 아나키스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때때로 반사회적 행동을 한다.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평화의 정신과 인도적인 정신을 수용하지 않는 새로운 신념은 없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지 않고, 칼을 가져왔다. 그것은 아나키즘 이론 자체에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점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나키즘이라는 새롭고 창조적 이념에 인간의 마음이 유례없이 격동하였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이라는 개념은 한편으로는 모든 기득권을 위협했고, 기존의 잘못된 관행에 대항한 투쟁을 통해 자유롭고 고귀한 삶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아나키즘은 기존의 모든 억압적인 세력에 대항한 가장 격렬한 저항을 유발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비참한 상황일지라도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불행이 견디기 힘들어도 자신의 문명을 개척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애쓰는데도 아무런 효과도 없고 비참함만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절망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현 사회에서 착취를 당하고 있는 임금노동자는 그 지겨운 일상적 삶과 자기 존재의 치졸함으로 인해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심지어 꾸준히 자기 일에 최선을 지속하려는 마음과 의지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새로운 이상이 사회에 실현되어 더 좋은 시대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며 그 이상을 전파하겠다면 그 사실 자체로 고용주와 갈등하게 된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사회주의자들도 오직 자기가 지닌 신념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심지어는 아예 일할 기회조차 상실하게 된다. 나는 만약 그 사람이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열정적인 선전선동가라면 그것이 영원한 일자리가 되길 바란다. 새로운 이념을 수용하여 머리를 활발하게 쓴다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밝아올 것으로 생각한다. 아나키스트는 자신의 고통과 주변 사람들의 고난이 그 사람의 잔인한 운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부정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이 굶어죽는 것을 볼 때 자신이 굶어죽게 될 때와 같은 기분을 갖게 된다. 곤경에 처하게 되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전혀 민감하지 않더라도 폭력적으로 되고 자신의 폭력이 사회적인 것이며 전혀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아나키스트는 언제 어떻게 파업을 해야 할지도 알고 자신이 아닌 인간을 위해 파업을 한다. 즉 고통 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가 큰 곤경에 처하지 않았다고 해서 영웅적 아나키스트들의 희생을 그냥 냉담하게 서서 구경만 해서 되겠는가? 영웅적인 헌신과 희생을 치르면서 저항에 나선 사람들은 사악한 자라고 비난해야겠는가? 사회적 의식이 덜 발달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부정과 불의에 비굴하게 굴복할 때 영웅적 투사는 앞장서 저항하는 것이다. 투사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조화롭고 평화롭게 유지되는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겠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교수형이나 폭격에는 냉담하게 묵인하고 대량학살에 대해서 불합리하게 과장하여 변명을 늘어놓는 가증스런 살인자를 증오한다. 이처럼 우리는 직접적인 가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면제해주는 잔혹한 부정의 살인이나 살해시도를 반대한다. 이 살인의 책임은 의도적으로 혹은 냉담한 무관심에 의해 인류를 절망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조건을 존속시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즉 자기 목숨을 걸로 주변 사람들의 잘못에 저항하는 사람은, 잔인하고 부정한 사회상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존속시키는 자와 비교할 때, 가히 성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저항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타인의 목숨도 앗아갈 수도 있다. 이 사람에게 죄가 없는 자가 있다면 먼저 돌을 던져라.”[1]

정치적 폭력행위 자체는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 역시 아나키스트들이 폭력적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자본주의 언론 때문이다. 혹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경찰들이 이런 사실을 은근히 퍼뜨렸다고 할 수 있다.

오래도록 많은 폭력행위가 스페인에서 발생했다. 이 폭력행위들의 책임이 아나키스트들에게 있다고 하여 아나키스트들을 야생동물처럼 잡아 감옥에 처넣었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아나키스트들이 폭력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경찰들이 자행한 일이었다. 이 사실이 널리 퍼져 나가자 당시 보수적인 스페인 언론들은 갱 두목 후안 룰(Juan Rull)을 체포해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룰은 사형 당했다.

이 재판 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난 사실은 오랫동안 자행된 폭력행위가 아나키스트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경찰들이 옷을 벗었고, 그 중에는 트레솔스(Tressols)라는 경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자는 자신이 해고되자 복수심에서, 경찰에 폭탄을 투척한 갱들 뒤에는 고위급 경찰들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고위 경찰들이 갱들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아나키스트들이 사건에 공모자로 엮이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수많은 예들 중 하나이다.

미국의 경찰 역시 유럽의 경찰 못지않게 무자비하고 위증을 일삼으며 교활하다는 사실이 여러 사건에서 입증되었다. ‘헤이마켓 폭동Haymarket Riot’으로 알려진 1887년 11월 11일의 비극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아나키스트들이 이미 시카고에서 합법적으로 살해되고 거짓말의 희생자로 죽어간 상황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피에 굶주린 언론과 잔인한 경찰이 공모한 사건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판사였던 개리(Gary) 스스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헤이마켓을 폭파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에 재판을 받는 것이오.”

주지사 알트겔드(Altgeld)는 미국의 수치스런 이 사건을 공정하고 철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여 판사 개리의 말이 사실임을 밝혀냈다. 알트겔드 주지사는 세 명의 아나키스트를 사면했다. 이로 인해 알트겔드는 이 세계의 모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존경을 받게 되었다.

1901년 9월 6일에 발생한 비극(미국 25대 대통령 맥킨리가 버팔로에서 레온 촐고츠에게 암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엠마 골드만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역자 주)을 살펴보면 정치적 폭력행위를 어떻게 사회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아나키스트인 레온 촐고츠(Leon Czolgosz)는 엠마 골드만에게 선동되어 폭력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죽어도 그러한 선동을 한 적이 없다. 아나키스트에게는 모든 누명이 허용된다.

이 비극적 사건이 지난 지 9년이 된 지금, 이 사건은 나와 전혀 관계없다는 것이 골백번도 더 입증되었다. 촐고츠가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말했다는 증거도 전혀 없다. 역시 경찰이 거짓말을 조작했고 언론이 이를 공표했다. 그 누구도 촐고츠가 자신이 아나키스트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없고, 이 소년이 아나키스트로 비난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도 없다. 오직 무지와 미친 히스테리만이 있었고,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단순한 문제의 인과관계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자유 공화국의 대통령이 죽었다 하자! 그렇다고 해도 폭력적 혁명론자가 암살을 한 것이지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다. 그 스스로 대통령을 암살하는 행동을 하도록 선동된 것이다.

자유 공화국! 이 얼마나 신화 같은 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 말로 기만하고 속이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자행하며 지식인들을 눈멀게 하는가! 자유 공화국! 3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한줌의 기생충 같은 자들이 미국민의 호주머니를 성공적으로 털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근본적인 원칙들을 짓밟아버렸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원칙은 남녀노소에게 ‘삶과 자유와 행복추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소수의 도적들은 30년 동안 수많은 노동자 대중들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증대해갔다. 그 결과 실업자와 굶주리는 자와 집이 없는 자와 인간애 넘치는 우애를 상실한 자가 늘어갔다.

이들은 동부에서 서부로, 북부에서 남부로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오랜 세월 동안 집은 어린 것들의 손에 맡겨졌고, 늙은 부모는 약간의 수당을 받으면서 생명과 힘을 소진하였다. 30년 동안 미국의 강인한 아들들은 산업이라는 전장에서 희생되었고 딸들은 부패한 노동환경에 무방비상태로 팽개쳐졌다.

지겹도록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미국민의 건강과 열정과 자긍심을 갉아먹는 과정이 계속되었고, 이 억압적이고 착취당하는 상황에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성공과 승리로 반쯤 미친 이 ‘자유로운 땅’의 돈을 거머쥔 권력자는 점점 더 뻔ᄈᅠᆫ스럽게 무자비하고 잔인해져서 유럽의 부패하고 썩은 압제자들과 힘의 우위를 놓고 한바탕 경쟁을 벌였다.

거짓을 일삼는 언론은 레온 촐고츠를 외국인이라고 사리에 맞지도 않는 비난을 했다. 이 소년은 우리가 사는 자유로운 미국의 토박이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었던 것이다.

나의 조국이자 나의 그대,

달콤한 자유의 땅.

이 미국 어린이는 미국이 사망에 이르렀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때조차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영광스럽게 경축했다. 이 소년 역시 자기 조국과 조국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싸웠다. 그런데 자기가 일하여 생산한 것을 모두 착취당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더 이상 자신이 속한 조국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젊은이가 꿈꾸던 자유와 독립은 한낱 웃기는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불쌍한 레온 촐고츠의 범죄는 너무나 민감한 자신의 사회의식 때문이리라. 이상도 없고 생각도 없는 미국의 다른 남자애들과는 달리 촐고츠의 이상은 드높았다.

여기서 경찰이 조작한 아나키스트의 음모 중 최근의 예 하나를 살펴보자. 피로 얼룩진 도시 시카고에서 경찰서장 쉬피(Shippy)가 애버부치(Aberbuch)라는 이름의 한 젊은이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 직후 애버부치가 아나키스트라는 소문이 전 세계로 퍼졌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이 아나키스트들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아나키스트 이념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밀착 감시를 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당했으며, 아나키스트 그룹의 도서관은 몰수당했고, 모든 집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나 엠마 골드만에게 누명이 씌워졌다. 경찰은 나에게 무슨 마술 같은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대했다. 나는 애버부치를 알지 못했다. 사실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그 사람과 공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 무슨 신비술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논리나 정의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경찰은 오로지 목표물을 추적했다. 인과관계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경찰행동의 심리가 얼마나 무지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애버부치는 아나키스트였는가? 이에 대한 긍정적인 증거는 없다. 애버부치는 미국에 3개월 동안 머물렀고, 영어도 할 줄 몰랐다. 내가 확실히 아는 바로는 시카고의 아나키스트들도 그를 몰랐다.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대부분의 젊은 러시아 이민자들처럼 애버부치도 미국의 자유를 신화처럼 믿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미국에서 처음 맛본 일은 실업자들의 행진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잔인하게 퍼부은 곤봉세례였다. 그는 이후로도 계속 미국적 평등과 기회를 찾으려 했지만 다 헛된 일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영광스러운 미국 땅에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그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도 고난의 땅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도 자신의 조국 러시아에서 궁핍하면 법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는 것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과 미국 경찰 사이에는 차이가 없었다.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촐고츠나 애버부치의 행위가 현실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천둥번개가 보다 현실적일 것이다. 그의 사고와 감정에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소위 자유 공화국이라는 나라에서 무고한 시민을 잔인하게 곤봉으로 때리는 광경이었다. 굴욕감을 무릅쓰고 자기 영혼을 파멸시키는 경제투쟁에 나선 사람들을 무참히 짓밟는 광경을 본 촐고츠나 애버부치 같은 사람들의 마음에 격분의 불을 지른 것이다. 아무리 이들을 박해하고 잡아들이고 억눌러도 이런 사회현상을 막을 수는 없다.

종종 아나키스트들이 이런 폭력행위를 저질렀다는 확인되지 않은 의문이 제기된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책임을 아나키스트들에게 전가할 태세는 되어 있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요점은 아나키즘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민감한 본성을 타고 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이 부조리한 사회현실의 무게 때문에 폭력행위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아나키즘과 여타 사회이론은 인간을 의식화된 인간으로 만들면서 저항을 유도하는 발효소의 역할을 한다. 이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경험으로 입증된 하나의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여러 정황을 잘 살펴보면 내 주장이 보다 명료하게 밝혀질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아나키스트 활동 몇 가지를 살펴보자.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정치적 폭력행위는 미국에서 발생했다. 1892년의 홈스테드(Homested) 파업과 연관된 폭력이다.

당시는 카네기 철강회사가 철강 노동자 연합회를 분쇄하려는 음모를 꾸미던 아주 중요한 때였다. 당시 카네기 철강회사의 회장이었던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은 민주적인 업무 추진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결정적인 때마다 노조를 분쇄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그가 회장으로 있던 기간 동안 철권통치를 통해 성공적으로 이행되었다.

평화협상은 고의적으로 지연되었고 프릭은 은밀히 노조의 폭력적 대응방식을 감시했다. 즉 노조는 홈스테드 철강 공장을 요새화하여 높은 울타리도 세우고 철조망을 만들고 저격수들의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릭은 한밤중에 자신이 고용한 용병 핑커톤Pinkerton 폭력배들을 홈스테드에 침투시켰다. 그리고는 철강 노동자들을 살육했다. 핑커톤 사건으로 11명의 희생자가 났음에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실한 그리스도교인이요 자유로운 미국인이라는 프릭은 곧바로 아무런 힘도 없는 노동자들의 부인과 아이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들을 파괴된 회사 관사 밖으로 내몰았다.

이 비인간적인 만행에 미국 전역이 들끓었다. 수많은 반대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 구체적인 조치는 별로 없었다. 사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항의를 했지만 그것은 날아다니는 파리를 성가시게 여기는 정도에 불과했다.

오직 한 사람, 알렉산더 버크먼만이 홈스테드에서의 만행에 행동으로 맞섰다. 그랬다. 버크먼은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자기가 아나키스트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왜냐하면 아나키즘만이 자기의 정신적 열망과 참을 수 없는 이 세계간의 부조화를 뛰어넘게 해주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크먼이 직접 행동에 나서도록 한 동기는 아나키즘 자체가 아니라 11명의 철강 노동자들이 잔인하게 살육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버크먼은 헨리 클레이 프릭의 목숨을 노렸다.

유럽의 정치 폭력행위의 기록을 보면 수많은 사례들이, 사회적 부정과 부패라는 환경이 민감한 본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난다.

1894년에 파리의 의사당Chamber of Deputies에 폭탄을 던진 바이양(Vaillant)의 법정 진술을 보면 이런 폭력행위의 심리를 밝히는 핵심적인 내용이 보인다.

“재판장님! 몇 분 후 당신은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당신의 판결을 받은 후 나는 적어도 이 사회에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입니다. 이 저주스러운 사회에서는 단 한 사람이 수천 명의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을 소비합니다. 이런 악독한 사회는 겨우 몇몇 개인이 사회의 모든 부를 독점하게 합니다.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은 개도 먹지 않는 빵 한 덩어리도 얻지 못하고 있고, 온 가족은 생필품의 부족으로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장님! 지배계급이 불쌍한 사람들 속으로 내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아닙니다. 저들은 가난한 자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들은 18세기 왕에게 충성하다 죽은 자들처럼 타고난 운명대로 자신들을 파멸시킬 절벽으로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굶어죽는 자의 울부짖음을 듣지 않은 자들에게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아래에 있는 이들을 착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저들에게 재앙이 있을 겁니다. 이제 사람들이 더 이상 숨죽이지 않을 때가 다가옵니다. 사람들이 허리케인처럼 일어나 급류처럼 휩쓸고 지나갈 때가 다가옵니다. 그때 창에 꿰뚫려 매달린 피 흘리는 머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재판장님, 착취당하는 자들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의 계층은 자신의 처지를 알지도 못하고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자로 자기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노예로 태어날 운명이라고 믿고 자기 노동으로 얻는 약간의 보상에 만족하며 삽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또 다른 계층은 생각도 있고,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명확히 규명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과연 이들의 잘못인가요? 이들은 스스로 투쟁에 나섭니다. 자신을 대중의 주장을 대신하는 자로 내세웁니다.

재판장님! 저 역시 그런 부류의 한 사람입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 자본의 멍에 아래 신음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어디에서든 똑같은 상처를 입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남미 오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의 고통에 지친 자가 야자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거기서 자연을 공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할 권리가 내게 있습니다. 오지에서도 자본이 흡혈귀와 같이 밀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쌍한 하층민의 피 한 방울까지 빨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프랑스는 돌아왔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제 가족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제 가족의 고통은 내 잔에 남은 마지막 슬픔이었습니다. 이런 고난과 겁쟁이의 삶에 지친 저는 폭탄을 들고 이런 사회적 고통의 주된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던졌습니다.

내가 던진 폭발물에 다친 사람들이 저를 비난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내게 변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만약 부르주아들이 학살을 저지르거나 혁명 기간 동안 학살을 야기시키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들은 귀족의 지배 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통킹Tonquin(베트남의 항구 도시 이름 -역자 주),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다호메이Dahomey(아프리카 서부의 공화국으로 1975년 Berin으로 개칭하였다. -역자 주)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은 자를 헤아려 보십시오. 또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공장과 광산과 자본의 힘으로 돌아가는 곳에서 죽고 다쳤습니다. 굶어죽은 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의원들의 동의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얼마나 사소한 것입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 진실입니다. 하지만 위로부터 어떤 강력한 공격을 당하여 우리가 이에 방어적으로 행동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주장을 내가 대신하지 못하도록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도대체 무엇을 노린 것입니까? 귀머거리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는 큰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소리를 지르면 늘 감옥에 처넣거나 총으로 쏘아버리거나 교수대로 끌고 갔습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내가 폭탄을 터뜨린 것은 반항아 바이양의 외침일 뿐 아니라 자기 권리를 외치는 전 계층의 외침입니다. 이제 이들은 말만 하지 않고 행동에 나설 것입니다. 분명히 법 같은 것은 무시할 것입니다. 사상사들의 생각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18세기에 그랬듯 모든 정부의 힘을 다 동원해도 디드로(Denis Dderot)와 볼테르(Voltaire)의 해방사상이 인민들 사이로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정부가 어떤 힘을 동원해도 르클뤼(Reclus), 다윈, 스펜서, 입센, 미르보 같은 사람들의 사상이 정의와 자유의 사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이들의 사상은 대중을 무지로 묶어두었던 편견들을 절멸시킬 것입니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환영하는 이들의 사상은 내가 그랬듯 반란의 행동으로 표출될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어떠한 권위도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자기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삶을 꾸릴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는 자기 노동의 대가를 자신이 향유할 수 있는 때이고 편견이라는 도덕적 질병이 사라지고 인간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때입니다. 그때는 과학을 공부하고 자기 동료를 사랑하는 것 이외의 욕망이 없는 때입니다.

재판장님! 이제 제 얘기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사회적 불평등이 있고, 가난 때문에 자살이 매일 일어나고 뒷골목마다 사창가가 있으며 눈에 띄는 거라곤 병영과 감독인 그런 사회는 가능한 빨리 변혁되어야 합니다. 인류를 따라다니는 고통을 신속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이런 개혁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환대해야 합니다. 이런 사상이 저로 하여금 권위와 결투하도록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투에서 나는 적에게 작은 상처밖에 입히지 못했습니다. 이제 적이 나를 찌를 차례가 되었습니다.

재판장님! 당신이 내게 내릴 벌칙이 어떤 것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 모인 청중들을 똑똑히 보면서 당신에게 미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군요. 당신이 이성적 추론을 하는 동안 이 사건의 시간은 연장되고 있군요. 당신에게는 당신과 동등한 한 사람을 재판할 권리가 있겠지요?

아, 재판장님! 인류의 역사에서 당신의 판결과 당신의 심사숙고가 얼마나 사소한 것이겠습니까. 아니, 바꿔 말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이 사건에 담겨있는 인간의 역사는 얼마나 사소한 것이겠습니까. 이 같은 역사의 사건이 사라지거나 혹은 조금 변형되어 반복될지도 모르죠. 이 우주의 항구적 힘은 항상 스스로 새롭게 변모하는 힘이었으니까요.”

누가 바이양을 무지하고 사악한 정신이상자라고 하겠는가? 그의 정신은 그 누구보다 명료하고 분석적이지 않은가? 위의 변론 내용은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 자신을 변호하여 말한 것임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이것은 카르노(Carnot) 대통령에게 바이양의 사형선고를 감형해달라고 요청된 탄원서이기도 하다.

카르노 대통령은 어떤 탄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잔인하게 바이양의 생명을 원했다. 그 결과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카르노 대통령이 살해당했다. 그를 죽인 폭력적 혁명당원이 사용한 칼 손잡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이양(VAILLANT)!

카르노 대통령을 살해한 이탈리아인 산타 카세리오(Santa Caserio)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도망쳐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않고 그로 인한 결과를 감수했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설명된다. 카세리오에 대한 그의 어린 시절 선생님인 아다 네그리(Ada Negri)의 찬사를 들어보라. 이탈리아의 시인인 그의 선생님은 카세리오를 아주 부드럽고 달콤한 식물에 비유했다. 너무나 섬세하고 민감한 식물이라 이 험난한 세파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카세리오의 법정 진술이다.

“배심원 여러분! 저는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내 행동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자라면서 현 사회는 옳지 않게 조직되어 있으며 너무나 부당한 사회이기 때문에 매일 많은 수의 비참한 남자들이 자살을 하여 처자식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찾지만 일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가족들은 음식을 구걸하고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어린것들은 불쌍한 어미에게 음식을 달라고 조르지만 어미는 먹을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 가족이 갖고 있던 얼마 되지 않은 물건도 이미 팔렸거나 저당 잡힌 상태입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구걸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때때로 부랑자로 체포되기도 합니다.

저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당시는 여덟 살이나 열 살 된 어린 소녀들도 하루에 20상팀의 돈을 받고 열다섯 시간씩 일해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는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18세나 20세가 된 젊은 여성들도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고향사람들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노동자들이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한 조각의 빵을 위해 하루 종일 땀을 흘렸습니다.

이들의 노동으로 많은 부가 생산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 살았고 이들이 먹는 음식은 작은 빵과 몇 숟가락의 쌀과 물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30 내지 40만 되면 기진하여 병원에서 죽어갔습니다. 과로와 부족한 음식 때문에 이 불쌍한 사람들은 수백 명씩 영양결핍으로 죽어갔습니다. 의사들의 말을 들으면 우리 고향을 휩쓴 이 질병은 못 먹고 고생만 한 사람들에게 닥치는 질병이라고 합니다.

빵과 의복은 도시마다 넘치는데 굶주리는 사람도 많고 고통 받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면직물과 모직물이 그득한 대형 가게들고 많고, 창고에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충분히 먹일 수 있는 밀과 옥수수가 그득합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존해 살아갑니다. 이들은 매일 오락거리에 많은 돈을 씁니다. 노동자들의 딸들을 유린하기도 하고 방이 40개, 50개나 되는 집을 갖고 있습니다. 20~30필의 말이 있고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삶의 모든 쾌락을 누립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들 사이의 이런 엄청난 불평등을 보노라면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재산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설교하면서 백성들을 무지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바이양은 시 의사당에 폭탄을 던져 현 사회체계에 대한 저항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몇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입니다. 그러나 부르주아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또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비난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나키스트들을 추적하여 바이양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나키즘 강연에 참여하기만 했던 사람들까지 체포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처자식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감옥에 갇히면 그 사람만이 고통을 받는 게 아니라 어린것들도 먹을 것을 달라고 울게 된다는 사실을 정부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법정은 사회의 현실에 대해 잘 모르는 무고한 아이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다만 감옥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는 것 아닙니까. 이들은 단지 배고픔을 면하고 싶을 뿐입니다.

정부는 또 개인의 가택을 수색하여 사적인 편지들을 조사하고 강연과 집회를 금지하는 등 우리들에 대해 가장 악명 높은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지금도 수백 명의 아나키스트들이 신문에 칼럼을 썼다는 이유로 또 공개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당신은 부르주아 사회의 대표들입니다. 내 머리를 원하신다면 가져가십시오. 그러나 내 머리를 가져간다고 아나키스트의 선전활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인간은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189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종교 가장행력 때 폭탄이 투척되었다. 그 자리에서 3백 명의 남자와 여자가 체포되었다. 그 중 일부는 아나키스트였지만 대다수는 노동조합원과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을 악명 높은 몬주익의 감옥에 처넣고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한 사람이 죽고, 또 정신이상자가 생기자, 이 사건이 유럽의 자유주의적 언론에 포착되었다. 덕분에 몇 명의 생존자들이 석방되었다.

이런 고문 수사의 핵심 책임자는 스페인의 수상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Canovas del Castillo)였다. 고문을 명령하고 살을 태우고 뼈를 뭉개고 혀를 자르도록 명령한 자가 바로 이 수상이었다. 쿠바에서도 이런 잔인함을 발휘했던 카노바스는 양심적인 인사들의 호소와 반발을 완전히 무시했다.

1897년 카노바스는 젊은 이탈리아인 안지오릴로(Angiolillo)의 총에 맞아 죽었다. 안지오릴로는 자기 고향 신문의 편집장이었는데, 대담한 발언 때문에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박해가 시작되자 안지오릴로는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탈출했다. 스페인에서 또 프랑스와 벨기에로 도망갔고 마지막으로 영국에 정착했다. 영국에서 작곡가로 일을 하다가 출판인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때 사귄 출판인 중 한 사람은 안지오릴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안지오릴로는 단순한 편집자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저널리스트의 풍모를 지녔습니다. 그의 글 솜씨가 얼마나 섬세한지 어릴 때부터 인쇄에 관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잘 생겼고 솔직한 표정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검은색이었으며 동작은 빠른 편이었지요. 전형적인 쾌활한 남부 유럽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안지오릴로는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지만 영어는 할 줄 몰랐습니다. 내 불어 실력이 짧아 안지오릴로와 긴 대화를 할 수는 없었죠. 하지만 안지오릴로가 곧 영어 문장을 습득하기 시작하자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또 재미있게 영어를 배우더군요. 그래서 얼마 있지 않아 그는 동료 작곡가들 사이에 인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매너는 세련되고 겸손했으며 동료들을 무척이나 잘 배려할 줄 알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영어를 습득했기 때문에 안지오릴로는 언론보도 내용에 곧 친숙하게 되었다. 그는 신문에 보도된, 몬주익에서 무기력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깊은 인간적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의 추적을 피해 도망온 몇몇 스페인 사람들이 영국에서 망명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열린 대집회에서 이 스페인 남자들은 자기 셔츠를 벗어 끔찍하게 불에 탄 자국을 보여주었다. 안지오릴로는 이것을 보았고 이때 그가 받은 충격은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논쟁할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안지오릴로 자기 자신의 삶조차 능가하는 충격이었다.

스페인의 수상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는 산타 아구에다에 체류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통상 관계자 외의 모든 사람들은 고명하신 수상 근처에도 갈 수 없다. 그런데 얼굴이 잘 생기고 세련되게 옷을 입은 이 이탈리아인은 예외였다. 이 이탈리아인은 중요한 언론의 대표라고 다들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그 잘 생긴 신사가 안지오릴로였다.

카노바스가 막 자기 집을 나서려고 베란다에 발을 내딛었다. 그때 갑자기 안지오릴로가 그 앞에 나타났다.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카노바스는 그 자리에서 시체가 되었다.

수상의 부인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안지오릴로를 가리키며 “살인자, 살인자!”라고 그녀는 외쳤다. 안지오릴로는 부인에게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부인. 나는 당신을 숙녀로 존경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 남자의 부인이라는 사실이 유감이군요.”

안지오릴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은 가장 끔찍한 형태의 죽음이었다. 그의 영혼은 어린아이의 영혼으로 취급되었다.

그는 교수형을 당했다. 죽은 몸뚱이는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하루 종일 태양빛을 맞으며 누워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로 와 공포와 두려움으로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 살인마 … 잔인한 살인마.”

이 얼마나 어리석고 끔찍한 무지인가! 대중은 항상 오해하고 항상 저주를 퍼붓는다. 안지오릴로의 경우와 아주 유사한 사건이 가에타노 브레시(Gaetano Bresci)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움베르토(Umberto) 왕에게 가한 이 폭력이 미국의 한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브레시는 기회의 땅 미국에 건너와 성공을 꿈꿨다. 실제로 그는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근면성실하게 일했다.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독립이 보장되고 인간적이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으면 문제될 게 없었다.

그래서 희망과 열정으로 그는 뉴저지의 패터슨에 정착하여 이 마을 직물공장 한 곳에 일주일에 6달러를 받기로 하고 괜찮은 일자리를 얻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일주일에 6달러면 분명 좋은 수입이었지만 새로운 땅 미국에서는 넉넉한 돈이 아니었다. 브레시는 자기의 작은 집을 사랑했다. 그는 훌륭한 남편이었고 헌신적인 아버지였다. 그에게는 애지중지하는 밤비나와 비앙카라는 자식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열심히 일했다. 실제로 주급 6달러 벌이에서 1백 달러를 저축했다.

그에겐 하나의 이상이 있었다. 노동자가 품기엔 가당찮은 이상이었다. 즉 패터슨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사회문제La Questione Sociale」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일에 지쳤지만 매주 그는 동료들과 이 신문발행 준비를 도왔다. 늦은 시간까지 일했지만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말았다. 동료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 브레시는 수년 간 모은 저축액 전부인 100달러를 가져와 동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이로써 이 신문은 계속 발행될 수 있었다.

그의 이탈리아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었다. 농작물 작황이 좋지 않았다. 농민들은 기근에 직면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선량한 임금 움베르토 왕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왕은 도와주고자 했고, 실제로 도와주었다. 움베르토 왕의 궁궐로 간 농민의 아내들은 말없이 여윈 아이들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왕의 군대가 불을 질러 이 불쌍한 여자들과 아이들을 그냥 죽여버렸다.

브레시는 이 끔찍한 대량학살 기사를 패터슨의 직물공장에서 일하다 읽었다. 그의 마음의 눈은 아무런 방어능력도 없는 자기 고향의 부인네들과 무고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바로 선량하다는 임금 앞에서 이들이 도륙을 당한 것이다. 그의 심장은 공포로 뛰었다. 밤마다 상처 입은 자들의 신음소리를 브레시는 들었다. 그 중에는 그의 동료도 있었고, 자기 살붙이도 있었다. 왜, 왜 이런 더러운 살인이 자행되는가?

패터슨에 조직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그룹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거의 싸울 것 같은 분위기로 끝났다. 브레시는 자기가 내놓은 수백 달러를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동료들은 잠시 기다려달라고 간청했다. 만약 브레시가 빌려준 자금을 돌려주면 이 아나키스트 신문은 발행을 중단해야할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브레시는 자기 돈을 돌려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무지란 얼마나 잔인하고 어리석은가. 브레시는 자기 돈을 돌려받는 대신 자기의 선의와 신뢰를 잃었다. 동료들은 브레시가 자기 이상보다 탐욕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1900년 7월 29일 움베르토 왕은 몬조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미국 패터슨의 젊은 이탈리아 직공 가에타노 브레시가 자칭 선량하다는 왕의 목숨을 빼앗았다.

패터슨의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사람들은 모두 추적당하고 박해를 받았다. 그리고 브레시의 행동은 아나키즘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했다. 마치 극단적 형태로 표출된 아나키즘의 가르침이 왕에게 원조를 구하러 간 부인네와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한 자들의 무력과 동일한 것처럼 간주됐다. 마치 아나키즘의 연설이, 멋진 웅변이 한 인간의 영혼을 불태워 피 흘려 죽어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인 양 말이다. 브레시 같은 평범한 사람은 말이나 어떤 행동에 밀려 움직이지 않는다. 그를 움직이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은 사회적 혈족관계였다. 그 힘이 마치 철이 자석에 붙듯이 사회의 부정과 위협에 대응하게 만들었다.

사회이론이 정치적 폭력행위를 초래하는 한 요인이라 하자. 그러면 아나키즘이 거의 태동하지도 못한 인도에서의 최근 돌발사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어떤 옛 철학보다 힌두교의 교리는 무저항과 삶의 표류를 최고로 여기고, 지고의 정신적 경지인 니르바나Nirvana를 이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사회적 불안이 날로 증대하자 최근에는 정치적 폭력행위로 귀결되어 힌두교도인 마다르 솔 딩라(Madar Sol Dhingra)가 쿠르존 와일리 경(Sir Cruzon Wyllie)을 살해했다.

이런 현상이 오랜 세월 동안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수동적인 정신으로 길들여진 국가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면 하물며 사회적 불평등이 현저한 곳에 사는 사람들이 엄청난 혁명적 의식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은 주장의 논리에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무고한 사람에 대한 억압과 폭압과 무차별적인 처벌은 영국 상품 불매운동 이래 인도의 외래 지배자인 식민정부가 내세운 핵심 지침이 되었다. 인도에서 영국의 폭압정치는 이제 그 증거가 분명하다. 영국인들은 무력으로 인도를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오만함 때문에 폭탄 테러가 발생한 것이고 저들의 폭압이 힘없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가해질수록 테러리즘 또한 더욱 늘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테러리즘을 우리 인도의 문화와는 전혀 맞지 않는 낯선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런 폭압이 계속되는 한 테러리즘은 불가피하다. 우리의 테러에 대한 책임은 폭압자에게 있는 것이지 테러리스트에게 있지 않다. 힘없고 무력한 사람들이 절망의 끝에 몰리게 되면 테러라는 마지막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테러가 전혀 범죄가 아니다.”[2]

보수적인 과학자들도 유전이 인간 특성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기후, 음식, 직업, 색이나 빛, 소리도 인간심리 연구에 고려되어야 할 요소들이다.

그렇다면 엄청난 사회적 병리현상들이 사람들에 따라 각기 다르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가르침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내세우는 자들 때문에 정치적 폭력행위가 자행된다는 식의 고정된 개념은 온당치 않다.

다른 어떤 사회이론보다도 아나키즘은 인간 생명을 그 무엇보다 귀중히 여긴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근본적으로 톨스토이의 정신에 동의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어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 생명을 희생하게 된다면 그 상품 없이 사회가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생명이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나키즘이 순종을 가르치는 건 절대 아니다. 모든 고통과 비참함과 병폐가 순종이라는 악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순종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오래 전에 이미 미국의 몇몇 선조들은 폭압에 대한 저항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렇게 말한 그 사람은 전혀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폭압에 대한 저항은 인간 최고의 이상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어떤 형태로든 폭압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그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이 폭압에 저항하려고 한다. 그것은 숨쉬는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다.

자본과 정부의 전반적인 폭력과 비교할 때 저항세력이 행사하는 폭력이라는 정치적 행위는 넓은 바다에 떨어진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폭력적 저항이, 이 사회에 감내할 수 없는 불평등 요소들이 존재하고 이로 인한 갈등이 심각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가장 강력한 반증임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무나 무자비하고 잔인하고 참으로 비인간적인 삶에 이들은 바이올린 줄처럼 고음으로 공명한다. 절망적인 순간에 그 줄은 끊어진다. 무감한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불협화음만이 들린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외침을 감지하는 자들은 어떤 것이 조화인지 이해한다. 이들은 인간 본성이 가장 압박받는 순간에 그 외침을 듣는다. 이것이 정치 폭력의 심리이다.


[1] 위의 글은 런던의 《프리덤 그룹Freedom Group》에서 발행한 팸플릿 내용이다.

[2] 「The Free Hindust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