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골드만
프란시스코 페러와 근대학교
―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에 실린 에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프란시스코 페러와 근대학교〉만을 옮긴다.
인생살이에서 최고의 경험은 학교이다. 학교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 사람을 좀 열등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 실수를 범하는 조직적인 제도와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당연한 일이라고 우리가 묵인한다. 참 이상한 현상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프란시스코 페러(Francisco Ferrer)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학교 선생님이었고 스페인 사람들은 이 선생님을 잘 알았고 사랑했다. 스페인 외부에서 페러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선생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09년 9월 1일 스페인 정부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요청으로 프란시스코 페러를 체포했다. 10월 13일 형식적인 재판을 거친 후 페러는 몬주익 감옥에 갇혔다. 그곳은 수많은 사람들의 한숨이 배어있는 가혹한 담장 속이었다. 여기서 그는 총살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저 한 사람의 선생님이었던 페러는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 불법적인 살인에 대해 전 세계의 문명화된 사람들은 분노와 적개심을 표현했다.
프란시스코 페러를 죽인 것이 스페인 정부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첫 범죄는 아니었다. 스페인 정부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길고 긴 피와 불의 역사이다. 저들은 그 경험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가 힘없는 자를 죽이면 더 강력한 거인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 거인이 언젠가는 이 가혹한 억압에서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실현시킬 것이다.
프란시스코 페러는 가난한 부모님 밑에서 1859년에 태어났다. 부모님은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아들이 신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로 자라기를 부모님은 소망했다. 부모님은 이 아이가 훗날 위대한 진리를 알리는 선구자가 되어 구습을 따르기를 거부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페러는 조상 대대로 믿어온 신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량함과 사랑을 이야기한 하느님이 어떻게 무고한 아이를 괴롭힐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어떻게 교회에서 고문과 고통과 지옥과 같은 무시무시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각성하고 문제를 파헤친 결과 오래지 않아 이 가공할 검은 괴물의 실체가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페러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결별했다.
프란시스코 페러는 진리에 대한 회의론자이면서 진리를 찾는 구도자였다. 또한 반골이기도 했다. 그의 정신은 조국 스페인의 철권통치에 대항한 분노로 타올랐다. 용감한 애국지사 빌라캄파(Villacampa) 장군이 이끄는 일단의 반란군이 공화주의의 깃발 아래 스페인 정권을 공격했을 때 젊은 프란시스코 페러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이 투쟁에 앞장섰다.
이들의 공화주의 이상을 미국의 공화주의와 혼동하지 않기 바란다. 아나키스트로서 나는 라틴 국가들의 공화주의자들에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지만 이들의 이상은 부패하고 반동적인 미국의 정치집단들보다는 고상하다는 사실은 안다. 미국에서는 바로 이런 부패한 반동적 집단이 자유와 정의를 모두 파괴하고 있다. 마치니와 가리발디의 추종자들은 진보와 자유주의의 최초의 적이었지만 그들의 노력이 전제주의의 전복을 성취해냈다는 점을 사람들은 깨닫고 숙고해야 한다. 미국은 바로 그 반대였다. 공화주의는 기득권 세력, 제국주의, 독과점, 모든 자유주의 세력을 절멸시키는 편에 섰다. 그 이상ideal은 느끼한 맥킨리(McKinley)였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루스벨트(Roosevelt)였다.
스페인의 공화주의 투사들은 진압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바위 같은, 히드라 같은 괴물 로마 가톨릭 교회와 스페인 왕권의 골수를 깨부수기에 한 번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이 소규모 집단의 영웅적 행동에는 체포와 박해와 처벌이 뒤따랐다. 이 추적을 피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안전한 곳을 찾아 해외로 나갔다. 프란시스코 페러도 이들과 함께 해외로 도피했다. 그는 프랑스로 갔다.
새로운 땅 프랑스에서 그의 정신은 얼마나 확장되었던가! 자유와 이상과 실천의 요람 프랑스! 파리는 우울한 구식의 그림자를 걷고 늘 젊음으로 활기차고 붐볐으며, 생명의 맥박이 힘차게 뛰는 곳이었다. 파리는 페러에게 신선한 영감을 주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젊은 이상주의자는 멋지게 성장했다.
프란시스코 페러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굶주린 사람처럼 자신을 다양한 자유주의 운동에 던졌다. 온갖 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흡수하면서 그의 사상은 성장했다. 파리에 머물면서 페러는 근대적 학교의 운영상황을 보았다. 이때의 경험이 페러의 인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에서의 근대적 학교는 규모는 작았지만 페러가 오기 훨씬 전에 설립되었다. 첫 근대적 학교의 창설자는 따뜻한 정신의 소유자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이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의 위대한 루이즈는 오래 전에 미래는 젊은 세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파괴적인 제도, 곧 부르주아 학교로부터 구해내지 않으면 사회악은 계속 존재하게 될 것으로 인식했다.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Henrik Johan Ibsen)과 함께 루이즈는 당시 사회 분위기가 유령에게 짓눌려 있고, 어른들은 너무나 많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유령을 타도하면 99개의 다른 유령들이 나타났다. 이 유령들을 다 물리치고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사람을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린이에게는 극복해야 할 전통이나 인습이 없다. 어린이의 마음은 과거의 이념으로 짓눌려있지 않고 어린이의 가슴은 계급적 차별에 멍들지 않은 상태다. 아이는 조각가가 점토로 조각품을 만들 듯 선생님이 만들기 나름이다. 결국 어린이라는 미완의 세계가 예술작품이 되느냐 아니면 별 볼 일 없는 모조품이 되느냐는 가르치는 선생의 창조적 힘에 달려있다.
루이즈 미셸은 어린이의 마음을 조각하는 데 아주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루이즈 자신이 어린이와 같은 천진한 천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며 온화했다. 루이즈의 마음은 사회적 부정을 볼 때마다 뜨겁게 불타올랐다. 파리의 시민들이 사회적 불의에 항거할 때 루이즈는 항상 그 선두에 섰다. 억압받는 민중을 위한 헌신의 대가로 루이즈가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난 후 몽마르트르의 작은 학교는 곧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미 씨앗은 뿌려졌고, 프랑스의 많은 도시에서 근대적 학교가 태동했다.
근대적 학교를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늘 젊은 마음으로 평생을 산 폴 로뱅(Paul Robin)이다. 몇몇 친구와 함께 그는 파리 근교의 아름다운 셈퓌Cempuis라는 곳에 커다란 학교를 하나 세웠다.
그는 부르주아식의 유전 개념은 단지 젊은이들의 끔찍한 범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아버지의 죄 때문에 고통 받아야 했던 아이들이 부모가 유산을 남긴 것이 없기 때문에 계속 가난과 도덕적 타락 속에서 벗어날 수 없고 술주정뱅이나 범죄자로 자랄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폴 로뱅의 아름다운 정신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불합리한 것이었다.
유전적 요소도 작용하겠지만 다른 요소들 역시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유전외적 요소들이 더 크지는 않을지라도 유전적 원인을 제거하거나 최소화하는 작용을 다른 요소들이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경제적 · 사회적 환경이 적절하고, 자연의 자유를 만끽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고, 사랑과 동정심을 배우고, 무엇보다 어린이가 필요한 것에 대해 깊이 이해해주면 무고한 아이에게 부여되는 잔인하고 부정한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요소들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폴 로뱅은 소위 최고의 부모들에게서 자란 자기 아이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가재도구를 갖고 다니며 어디든 필요한 곳으로 갔다. 거리에서 오두막에서, 고아원과 버려진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과 교화소와 그 밖의 모든 어두운 사회적 그늘에서 일을 했다.
이 사회는 양심이라고는 없이 그저 사회적 평안을 위해 가련한 희생자들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처박아두었고, 로뱅은 이들을 찾아갔다. 로뱅은 자기가 만든 학교가 수용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더럽고 버려지고 추위에 떠는 아이들을 모아 셈퓌로 데려왔다.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자유롭고 제약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아이들은 잘 먹고 청결을 유지하고 깊은 사랑과 이해심을 배웠다. 이 어린 식물들은 자신들의 친구이자 스승인 폴 로뱅의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나 꽃을 피웠다.
아이들은 자립적이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일반 사회제도란 가난한 자를 계속 가난하게 만드는 끔찍한 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셈퓌는 프랑스에서는 금지된 남녀공학 위반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운영된 것만으로도 모든 선진적 교육자들은 이런 교육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교육을 통해 근대적 교육방법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고, 교육체제는 조금씩 그러나 필연적으로 붕괴되었다.
셈퓌에 이어 유사한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이를 시도한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자유로운 사랑l’Amour Libre』의 천재적 작가이자 시인인 마들레느 베르네(Madelaine Vernet)와 세바스티앙 포레(Sebastian Faure)가 있다. 포레는 ‘라 루쉬La Ruche’[1]를 지었는데 나는 1907년 파리에 머물 때 이곳을 방문했었다.
몇 년 전 포레 동지는 라 루쉬가 세워진 대지를 사들였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그는 황무지를 꽃이 활짝 핀 땅으로 바꾸었다. 아주 잘 정돈된 농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세 개의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커다란 정방형 마당이 있고 넓은 길을 따라가면 정원과 과수원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방문객들이 드나든다. 이곳 정원은 많은 식물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어떤 종류의 식물들이 라 루쉬를 장식하고 있는지는 오직 한 사람 포레만이 안다.
세바스티앙 포레는 아이가 모순된 영향력을 동시에 받으면 결과적으로 발전에 장애가 온다고 보았다. 오직 물질적으로 궁핍하지 않고, 가정이 위생적이고, 지적인 분위기가 조화를 이룰 때 아이는 건강하고 자유로운 인격체로 자란다.
세바스티앙 포레는 자기가 만든 학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24명의 남녀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이들은 고아거나 부모가 있어도 너무 가난해 양육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내 개인의 돈으로 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숙식을 제공하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12살이 될 때까지 이들은 건전하고 기초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12살에서 15살 사이에도 교육은 계속되었는데 각자의 취미와 능력에 따라 약간의 직업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라 루쉬를 떠나 바깥세상에서 자기 삶을 살 자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다시 돌아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도 있지요. 부모가 자식을 맞이하듯 돌아오는 아이들을 환영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서 계속 일하기를 원하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따르면 됩니다. 노동이익의 1/3은 기본비용으로 계산된다. 1/3은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숙식을 위해 운영되는 자금으로 저축된다. 나머지 1/3은 개인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내가 돌보는 아이들의 건강은 완전했습니다. 깨끗한 공기, 영양이 풍부한 음식, 야외에서의 운동, 위생적인 환경 만들기,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흥미 있는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애정 어린 이해와 보살핌으로 아이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상태는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이전에 좋은 기회를 얻지 못했던 보통의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얻은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지요. 이들이 얻은 가장 중요한 것은, 보통 학교의 아이들에게 보기 어려운 특징, 즉 공부에 대한 애정, 알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아이들은 새로운 공부 방법을 배웠습니다. 빨리 암기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부법입니다. 우리는 주변 환경에 대한 아이들의 흥미를 일깨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관찰과 조사와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워줬습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귀머거리나 소경의 수준을 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뭐든지 절대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항상 탐구하는 자세를 갖고, 자신의 의문이 철저히 해결될 때까지 자족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정신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해결책으로 생기는 의혹이나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성장이 방해되고 자신감이 결여되는 이유는 바로 불완전한 문제해결에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솔직하고 친절하고 다정다감한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라 루쉬에서는 아이들 자신과 어른들 간의 조화가 너무나 잘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단지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우리를 존경하거나 또는 두려워한다면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사랑과 자신감을 갖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무를 부과하기보다는 이해를, 두려움 대신에 자신감을, 그리고 엄격함 대신 애정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정신 속에 동정심과 친절함과 관대함이 얼마나 풍성하게 숨어있는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참된 교육자의 노력만이 이 보물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자극하여 최상의 그리고 가장 고상한 성향들을 불러내는 겁니다. 자연의 식물이 자연스럽게 꽃잎을 피우는 것을 보는 것도 큰 보람이지만 인간이라는 식물이 성장하여 참된 한 개체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보상인지 모릅니다.”[2]
역사 교육과 여전히 계속되는 옛날식 교육 방법에 대해 세바스티앙 포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참된 역사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참된 역사는 인간성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다 이름도 없이 죽어간 자들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3]
프란시스코 페러는 이런 근대적 학교 교육의 시도를 받아들였다. 그는 근대교육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론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과 군인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스페인에 이런 학교가 필요했다.
스페인의 전반적 교육체계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손아귀에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육 원칙은 이렇다. “아홉 살이 지나면 다른 사상에 물들기 때문에 그 전에 아이들의 마음에 로마 가톨릭을 주입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페러는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새로운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커다란 의무감을 느꼈다. 마침내 운명적으로 페러는 자신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지원을 받는다.
프란시스코 페러의 제자인 뫼니에 부인(Mlle. Meunier)이 페러의 근대적 학교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페러에게 약간의 소중한 재산과 학교 기금으로 매년 1만2천 프랑의 수입을 남겼다.
무엇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는 속담이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비열한 죄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페러의 인격을 모독하는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즉 페러가 뫼니에 부인의 돈을 소유하려고 그녀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거짓 소문이 미국 로마 가톨릭계 신문마다 실렸다.
한 남자와 여자의 친밀한 관계는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문제, 그들만의 성스러운 관계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페러와 관련되어 유포된 무수한 거짓말 중에 뫼니에 부인과의 관계가 거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로서는 이 문제와 관련해 조금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물론 로마 가톨릭 성직자의 위선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문제의 진실을 이해할 것이다.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은 여성을 성적 상품으로만 보지 않는가? 수녀원과 수도원에서 벌어진 역사적 자료들을 보더라도 이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니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은 남자와 여자의 협력을 성적인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뫼니에 부인은 페러보다 꽤 나이가 많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인색한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어린 시절의 사랑과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프란시스코 페러는 기계처럼 학교에서 졸업장이나 만들어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는 일에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참된 스승이었다.
교육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추었고, 무엇보다 가르치는 일에 대한 불타는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우리의 동지 페러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필생의 사업을 시작했다. 1901년 9월 9일 첫 번째 근대적 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 학교를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반기며 지지했다. 개교식 때 짧은 연설을 통해 페러는 자신의 계획을 동료들에게 펼쳐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연설자도 선동가도 투사도 아닙니다. 나는 선생입니다. 나는 무엇보다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를 위한 나의 헌신으로 젊은 세대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의 동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측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재고해 달라고 페러에게 당부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반대자에 대해 어떤 짓을 할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페러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페러는 과거의 학교처럼 번지르르한 거짓말에 불과한 교육목표를 내세우면서 근대적 학교를 세울 마음이 없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솔직담백하고 공개적이고자 했다.
프란시스코 페러는 로마 가톨릭 측에 찍힌 인사가 되었다. 학교를 여는 첫 날부터 그는 감시를 받았다. 학교 건물도 감시 대상이었고, 만가트Mangat에 있는 그의 작은 집도 감시당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미행이 따랐고 심지어 프랑스와 영국에서 동료들을 만날 때도 감시가 붙었다. 숨어있는 적이 올가미를 당기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페러는 알폰소(Alfonso ⅩⅢ) 암살기도 사건이 있었던 1906년 거의 체포될 뻔 했었다. 그러나 페러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증거가 너무나 분명해 이 검은 까마귀[4]들도 어찌할 수 없었다.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일단 페러를 놔두기로 했다. 그들은 때를 기다렸다. 적들은 희생자가 걸리도록 덫을 놓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1909년 7월 스페인에서 반군사 봉기가 발발했을 때 페러를 잡을 기회는 왔다. 봉기는 혁명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반군사주의적 항거였다. 수세기에 걸쳐 군홧발에 짓밟힌 스페인 국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국민들은 군인들의 무익한 학살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용감한 리프Riff족이 자기들의 독립을 위해 싸웠듯이 독립을 위해 스페인 정부에 항거하는 소수민족을 짓밟고 억압하는 스페인 독재정부를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스페인 국민들은 소수민족을 향해 총을 들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1천8백 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는 평화의 복음을 설교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제로 이 복음을 실천하려고 하자 로마 가톨릭 측은 국민들에게 총을 들게 하라고 정부당국에 촉구했다. 그리하여 스페인 왕조는 러시아 왕조가 그랬듯 살인적인 방법을 취했다. 국민들은 강제로 전쟁터로 끌려 나갔다.
국민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이전까지 가만히 있던 스페인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대들었다. 거머리처럼 노동자들의 힘과 생명과 피를 빨아먹는 자들에게 대항했다. 그랬다. 스페인 국민은 교회와 성직자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저들 수천 명의 목숨이 날아간다 해도 스페인 국민에게 저지른 엄청난 폭행과 범죄의 대가를 다 치를 수 없었다.
프란시스코 페러는 1909년 9월 1일에 체포되었다. 10월 1일까지도 페러의 친구들과 동지들은 페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10월 1일 한 통의 편지가 아나키스트 단체인 루마니테L’Humanité에 전달되었다. 이 편지를 통해 페러에 대한 재판 같지도 않은 재판의 전모를 알 수 있었다. 10월 2일에 페러의 동료 솔레다드 빌라프란카(Soledad Villafranca)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걱정할 필요는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난 전혀 혐의가 없어. 오늘 난 특별히 기쁘고 희망에 차 있네. 오늘에서야 자네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네. 내가 체포된 이후 처음으로 일광욕도 할 수 있었네. 내 감방 창으로 따뜻한 빛이 들어오거든. 자네 역시 즐겁게 지내야 하네.”
불쌍하게도 페러는 10월 4일까지도 자기가 죽게 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더욱 불쌍한 사실은 페러의 친구들과 동지들도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적이 정의감을 갖고 있을 거라고 믿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사법부를 다시 한 번 믿은 결과 형제의 죽음을 자기 눈앞에서 목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페러를 구할 준비조차 못했다.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전혀 못했다. 왜? 페러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으니까. 그는 무죄였으니까.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뭐든 할 수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사법부라는 숙련된 측근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의 적을 재판하는 것은 최악으로 정의로운 재판이 되었다.
10월 4일 페러는 루마니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1909년 10월 4일 감방에서,
사랑하는 친구들, 나의 절대적인 무죄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사형을 구형하고 있네. 그 근거는 경찰을 비난했다는 것과 내가 세계 아나키스트의 괴수로 프랑스의 노동조합 결성을 지시했고, 세계 곳곳의 반란과 음모에 연루된 죄가 있다는 것이야. 내가 런던과 파리로 여행한 것도 다 이런 목적과 연관되었다고 말하더군.
이런 터무니 없는 거짓말로 나를 죽이려 하네.
심부름할 사람이 곧 떠나려 하네. 시간이 없군. 경찰이 재판관에게 제출한 모든 증거는 거짓말과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휴지조각에 불과하네. 나를 해칠 증거가 없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어.
페러”
1909년 10월 13일 페러의 마음은 너무나 담대하고 강인하고 성실하고 고요했다. 바보 같은 사람! 페러의 마지막 고통스러운 맥박은 꺼져가고 있다. 그때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그의 맥박이 고동치고 있었다. 그 맥박소리가 엄청난 천둥소리로 커져 은밀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저주처럼 울렸다. 검은 옷을 걸치고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성직자 살인자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라!
프란시스코 페러는 반군사 봉기에 참가했는가? 마드리드의 로마 가톨릭 신문에 실린 첫 번째 기소장에 따르면 그는 전혀 봉기에 참여했다고 기소된 것이 아니었다. 이 기소장에는 바르셀로나의 대주교와 모든 고위 성직자들이 서명했다. 이 기소장의 핵심 내용은 프란시스코 페러가 무신론 학교들을 조직하고 무신론 문헌들을 배포한 죄를 언급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무신론적 신념 때문에 화형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 다른 조작이 필요했다. 그래서 봉기를 선동한 혐의가 추가되었다.
지금까지 알아본 어떤 권위 있는 자료에도 페러가 반군사 봉기와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당국자는 증거가 충분하다고 했다. 확실히 72명의 증인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증인들과 페러는 단 한 번 대면한 적도, 함께 있던 적도 없다.
페러가 그 봉기에 참여했을 거라는 심증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렇다. 프란시스코 페러는 훌륭한 선생님이었을 뿐만 아니라 의심할 바 없이 뛰어난 조직가이기도 했다. 1901~1909년까지 8년간 그는 스페인에 109개의 학교를 만들고, 자유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 자유로운 학교free school를 308개나 별도로 만들게 했다. 학교 일과 관련해서 페러는 현대적인 인쇄기기를 도입하고 전문 번역가들을 조직하여 가장 이성적이고 근대적인 과학 저술과 사회학 저작 15만 부를 배포했다. 이렇게 가장 뛰어난 조직가가 어리숙한 짓을 할 리는 없다.
그리고 완전히 확인된 사실 하나는 그 반군사 봉기가 전혀 조직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군사 봉기는 이전의 많은 혁명 사건들처럼 대중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일례로 바르셀로나 대중들은 4일 동안 장악하여 통치했는데, 관광객들의 말에 따르면 기존의 평화나 질서가 전혀 붕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일반 시민들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권력을 잡았을 때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1871년 파리 코뮌 시절의 파리 시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파리 시민도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이들은 굶어 죽으면서도 식량이 가득한 창고를 지키고 있었다. 또 프랑스 은행을 지키기 위해 파수꾼을 세우기도 했다. 이 프랑스 은행은 부르주아가 훔친 돈을 보관하는 곳이 아닌가.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 역시 자기들을 지배했던 자들이 착취해 축적한 재산을 지키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전형적인 패배자의 애처로운 어리석음인가! 참으로 비극적인 모습이다. 일반인들을 억압하는 족쇄가 뼈 속까지 깊이 박혀 있어 그 속박을 깰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국과 법과 사유재산이 얼마나 외경의 대상이었는지 자기의 영혼을 불태우면서도 마음의 준비가 없어 예상하지 못한 상화엥서 이것들을 파기하지 못했다.
이런 자발적이고 비조직적인 행동에 페러 같은 인물이 연루됐을 거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런 투쟁은 결국 패배, 처절한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페러라면 당연히 알지 않았을까? 아니, 그가 직접 참여했다면 노련한 지도자로서 용의주도하게 이 봉기를 조직하지 않았을까? 이런 모든 증거가 불충분하다면 페러가 무죄라는 것을 입증할 다른 결정적인 증거를 대보겠다. 그의 무죄를 입증할 다른 증거가 많지만.
봉기가 발발하던 당일인 7월 5일 페러는 합리적 교육연맹League of Rational Educaion 소속 회원들과 선생님들과의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가을 사업을 논의하고 특히 엘리제 르클뤼(Elisée Reclus)의 위대한 저서 『인간과 대지L’Homme et la Terre』 그리고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Alexeyevich Kropotkin)의 『프랑스대혁명Great French Revolution』 출판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만약 혹시라도 페러가 이 봉기를 알고 그 회의에 참여했다면, 동료들이 자신과 함께 있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친구들과 동지들을 그 날 바르셀로나로 불러들였다면 그는 정말 뻔뻔스러운 냉혈한이 아니겠는가? 하긴 사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로마 가톨릭 예수회의 범죄자들이라면 얼마든지 의도적으로 친구들을 불러 죽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프란시스코 페러에게는 평생 동안 할 일이 있었다. 만약 그가 이 봉기를 지원하게 되면 그는 자기 모든 계획을 다 잃고 얻을 것이라고는 파멸과 재앙뿐인 상황이었다. 페러는 일반인의 분노에 담긴 정의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일, 자기의 희망, 자기의 본성 때문에라도 그런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측에서는 온갖 거짓과 허위와 중상모략을 동원하면서 광분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과거 이런 더러운 범죄에 한 번 이상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던, 깨어있는 양심적 인물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프란시스코 페러는 아이들에게 가장 끔찍한 이념, 곧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을 가르쳤다고 비난을 받았다. 끔찍하다고? 프란시스코 페러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왜 그가 아이들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미워하도록 가르치겠는가?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장엄한 일몰 광경을 보여주고 별이 빛나는 하늘을 감상하게 하고, 경외로운 산과 바다를 구경시켜주었다. 그는 단순한 방법으로 모든 생명의 성장과 발전과 상호관계를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악한 잡초가 아이들의 마음에 영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했다.
페러가 아이들에게 부자들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라고 말했다고 한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마녀 이야기일까? 페러는 가난한 자를 구제할 준비를 하도록 아이들에게 교육시켰다고 하는 게 옳지 않은가? 페러는 아이들에게 가난은 부끄럽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이며,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가난은 미덕이 아니라 악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창조적 노력은 존귀하며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이 창조적 노력만이 삶을 유지하고 자기만의 특성을 기른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이야말로 그저 남에게 기생해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익하고 해로운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중요한 이야기 하나만 더 하겠다. 페러는 반군사적 이념을 주입시키면서 군대를 해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정말일까? 페러도 톨스토이처럼 전쟁이란 합법적인 살육이고, 전쟁은 증오와 교만을 부채질하고, 민족의 정서를 갉아먹고, 전쟁에 참여한 민족을 광란으로 날뛰게 만든다는 사실을 믿은 것은 분명하다.
근대교육의 이념과 관련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교육의 모든 가치는 아이의 육체적 · 지적 · 도덕적 의지라는 측면에 있습니다. 과학의 경우 사실만으로 과학의 역할을 하듯이 교육도 모든 교조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조주의는 아이들에게 방향 자체를 고정시키고 아이는 그저 뒤만 따르게 만듭니다. 교조주의적 목적을 소멸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목적을 존중하게 만드는 게 더 어렵습니다. 교육은 항상 의무를 부여하고, 위반했다고 지적하고, 규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교육자는 선생 자신의 생각과 성향에 아이들이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지도하는 사람입니다. 아이 자신의 에너지를 극대화하도록 해 줄 수 있는 선생이 최고의 선생입니다.
미래의 교육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본성을 발현하는 교육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깨닫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아마 삶의 현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방법적 진보일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제약의 극복을 의미하는 완전함을 향해 진보해간다는 사실은 우리가 과학을 통해 어린이의 구제를 희망할 때 바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진보할 능력이 있습니다. 쉬지 않고 자기 환경을 개척하고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합니다. 인간에게는 지적 독립이 가장 큰 힘입니다. 그런 인간은 다른 것에 기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최상의 것을 수용하고 새로운 이념을 승리로 이끌며 행복해 하고, 하나의 생명이지만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이런 인간을 두려워합니다. 따라서 사회가 언젠가는 우리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맡길 날이 올 것이라 희망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우린 따를 겁니다. 우린 열심히 이런 과학자들의 경험을 교육에 접목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개인을 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교육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목적을 이런 교육환경에서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새로운 학교를 세우려고 합니다. 이 학교는 자유의 정신이 지배하는 학교가 될 것이고, 미래의 학교는 전반적으로 우리가 시도하는 학교의 형태가 될 것입니다.
현재까지 시험적으로 시행해본 결과는 아주 좋습니다. 현행 학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모든 조직적 규제와 자연과 생활을 분리시키는 모든 인위적 장벽들을 우리는 없앨 수 있습니다. 자연적 본성을 말살하고 아이들에게 기존의 이념을 주입하는 지식교육과 도덕교육을 우리는 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기만한다는 두려움이 없는 매력적인 환경에서 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과 접촉하게 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삶에 대한 깊은 감동이 까다로운 학문을 대체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지 못했다면 어린이 구제에 있어서 가장 큰 이 부분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조건에서만 우린 과학과 노동의 성취들을 자유롭고 풍성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다 이룰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때로는 지식의 부족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에 완전히 다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현 교육적 성취에 안주하기보다는 불확실한 작업을 더욱 해나가야 합니다. 나는 현 교육의 주제가 되고 있는 세계적 지식이나 지적 결함보다도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기 쉬운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자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5]
페러가 차라리 폭동을 조직해 바리케이드를 치면서 싸우고 폭탄을 던졌다면, 처벌되고 감금됨으로서 오히려 로마 가톨릭 교회 측과 독재 정부 측에 그토록 위험한 인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벌과 구금은 이 세상 모든 악의 배경이 아닌가?
노예와 순종과 가난과 모든 불행과 사회적 불평등이 다 처벌과 감금에서 나온 결과들이다. 페러는 확실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1909년 10월 13일 몬주익의 형장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의 죽음이 헛되다고 하겠는가? 전 세계적으로 분노의 물결이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페러의 이름을 딴 거리들이 생겨났고, 벨기에에서는 기념비를 세우자는 운동이 생겼으며 프랑스에서는 혁명적 순교자의 전통에서 가장 계몽적인 인물 맨 앞자리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영국에서는 최초로 그의 전기를 발행했다. 모든 나라가 프란시스코 페러의 위대한 업적을 기렸다. 심지어 진보적 이념 측면에서 가장 후진국인 미국에서도 프란시스코 페러 협회가 탄생했다. 이 협회의 목적은 페러의 전 생애를 책으로 출판하고 미국 전역에 페러식 근대학교를 세우는 데 있다. 이런 국제적 혁명의 파도를 보고 누가 페러가 헛되이 죽었다고 말하겠는가?
몬주익에서의 그의 죽음은 참으로 훌륭하고 극적이고 인간의 심장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당당하고 꼿꼿한 내면의 눈이 빛을 향하는 프란시스코 페러에게는 거짓된 성직자도 필요 없었고 그를 저버리는 망령을 비난할 필요도 없었다. 사형집행인들은 죽어가는 시대이고 자신은 살아있는 진실이라는 의식은 그 마지막 영웅적인 순간까지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죽어가는 시대와 살아나는 진실,
그 살아남이 죽음을 묻으리라.
[1] 벌집이라는 뜻.
[2] 「Mother Earth」, 1907.
[3] Ibid.
[4]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
[5] 「Mother Earth」, 190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