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윤
한국 아나키즘의 역사
1910년에 시작한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국의 급진주의자들이 1920년도 초반에 받아들인 아나키즘은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사상 중 하나였다. 그들의 민족의식에 힘입은 즉각적인 목표는 직접행동을 통한 ‘독립쟁취’였지만,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최종 목표는 아나키스트 원론을 따른 사회적 혁명이었다. 아나키즘은 그들에게 자유, 권위 부재, 자발적 협력에 관한 보편적인 뜻으로 상호원조를 통한 인류발전과 새로운 사회를 위한 희망을 약속해 볼셰비즘과 사회 다윈주의에 대한 대안이 됐다.
1920년도 동아시아에서 활발했던 아나키스트들과 그들의 사상의 유통은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그들과 다른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초국가적인 문제의식 공유를 가능케 한 상호간 영향과 영감을 준 접촉점이 됐다는 점에서 한국의 아나키즘 발흥에 있어 중요했다. 민족주의와 같이 초국가주의는 한국 아나키즘 발흥의 주 요인이었다. 이와 정치적 독립 없이는 그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는 그들의 믿음은 왜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사회혁명보다 정치적 독립을 우선시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 (Hwang 2007).
1920년 이후 아나키스트 단체와 조직들은 중국과 일본에 있던 한국인 망명자나 유학생들 사이에서 먼저 나타났다. 1920년도 초 중국에서 흑색 청년 동맹{1}의 베이징 지사와 재 중국 무정부공산주의자 연맹이 성공적으로 설립됐다. 1928년 발행된 후자의 첫 사설(社說) ‘탈환’에서는 ‘피지배층’을 위한 사회혁명에 대한 분명한 지지를 선언됐고 신채호는 자신의 1923년 ‘조선 혁명 선언’에서 일제정부에 대항한 집단폭력을 정당화했다 (Graham 2005: 373–6, 381–3). 한국에 아나키즘의 도입에 있어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1920년도 초 중국에서 세계주의와 반볼셰비즘을 전파한 바실리 에로솅코 (Vasilij Eroshenko)라는 러시아 시인이자 아나키스트의 역할이 컸다 (Bak 2005: 26; Hwang 2007). 여러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1928년 상하이 노동 대학의 설립과 1927년과 28년 사이 취안저우 농촌 자위 운동과 1929년과 1930년도 초 사이, 마찬가지로 취안저우에서, 교육적 실험에 참여했다. 1931년 이후부터 일부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힘을 합쳐 일제에 대항하는 무력항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중국 한국 청년 연합의 선언 공표된 것과 같이 그들에게는 항상 정치적 독립보다 사회적 혁명이 우선이었다 (Bak 2005; 161-8).
일본의 첫 아나키스트 지향 ‘코쿠토카이’(黑道會)는 1921년에 나타났지만 한국인 아나키스트 무리는 이로부터 탈퇴해 ‘흑우회’ (코쿠토가이)를 설립하고 ‘뚱뚱한 조선인’ (太い鮮人 [후토이센진])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박열은 1923년, 그의 일본인 동지 카네코 후미코(金子 文子)와 함께 일본 천왕 암살 혐의로 체포됐을 때까지 위 단체와 잡지의 중진이었다. 1923년에 출판된 ‘뚱뚱한 조선인’과 같은 해 그 뒤를 이은 ‘현사회’ (겐샤카이)는 자본주의와 신민주의의 족쇄 아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국가적, 초국가적 목표를 명료하게 공표했다 (Hwang 2007). 박열의 구속은 일본에 근거하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에 차질을 일으켰다. 이들의 활동은 1926년 창립되고 후에 일본 ‘코쿠쇼쿠세이넨렌메이’ (黑色青年聯盟)의 회원단체가 된 ‘흑색 운동사’에 의해 잠시 재개됐다. 당연히, 일본에서 활동하던 많은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출판과 여러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는데, 이는 일제의 감시 아래 그들의 생존을 증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오스기 사카에 (大杉 栄), 핫타 슈조 (八太 舟三)와 이와사 사쿠타로 (岩佐 作太郎) 등의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지지와 심지어 후원을 받기도 했다.
일본에 근거하던 한국인 아나키스트 단체들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비난을 표했고 볼셰비키들을 ‘새로운 특권계층’이라 부르며 강력하게 공박했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1930년 이후 일제의 중국 침공 이후 ‘위험한 사상’에 대한 더 삼엄해진 감시 때문에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 중 예외는 ‘흑색신문’이라는 신문사였다. 1930년에서 1935년까지 일본에 있던 한국 아나키스트 노조와 단체의 자금을 받으며 출판된 이 신문사는 아나키스트 활동에 대한 다양한 지역, 국내 그리고 국제 소식을 전했고 사회 혁명과 범세계주의 사상, 모든 아나키스트와 대중 간 경계를 뛰어넘는 상호작용에 대한 생각을 전파했고 독립운동 단체 내의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대한 비판을 내놓았다 (Hwang 2007).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성쇠는 일본과 중국에 있던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아나키스트 단체를 설립하려는 모든 시도는 항상 일제 정부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 1924년 흑기 연방 (Black Flag Federation) 설립 시도와 1925년 참된 친구 연방 (Real Friend Feredarion) 설립 시도와 1929년 최갑령의 한국 아나코-코뮌주의 연방 설립 시도는 모두 즉시 와해됐다. 하지만, 1930년도까지 여러 아나키스트 단체와 조직은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설립됐다. 1930년도와 1940년도 사이에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체포되거나 살아남기 위해 종적을 감췄다. 중국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비슷하게 그들의 목표는 한국의 목표가 아닌 아나키스트 사회의 설립이었다 (무정부주의 운동사 편찬 의원회 1989: 189-274, 394-400).
1930년도에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은 국내와 해외에서 서서히 퇴조해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 혁명에 대한 신념은 독립에 대한 국가적 목표와 공존하며 최소한 1945년까지 지속됐다 (Yi 1974: 11). 이러한 면에서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독립을 위해 도입되지 않고 자본주의 아래 일반적인 사회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받아들여졌다. 아나키즘은 ‘21세기를 위한 자유’를 위한 사상으로서 남한에서 아직 존재하는 것 같다 (Bak 1999).
참고문헌 및 권장 도서
Bak, H. (2005) 식민지 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 서울: 선인.
Bak, Y. (1999) 21세기 자유, 아나키즘!. Hankoreh21 279 (10월 21일). http://www.hani.co.kr/h21/data/L991011/1paqab02.html 에서 이용 가능 (1999년 10월 21일 접속).
Graham, R., (Ed.) (2005) Anarchism: A Documentary History of Libertarian Ideas. Vol. 1: From Anarchy to Anarchism (300 CE to 1939) [아나키즘: 자유의지론 사상 역사의 기록. 제1권: 아나키에서 아나키즘까지 (기원300년에서 1939년까지)]. Montreal: Black Rose Books.
Hwang, D. (2007) Beyond Independence: The Korean Anarchist Press in China and Japan in the 1920s–1930s. Asian Studies Review 31, 1 [독립을 초월해: 1920-30년도 중국과 일본의 한국인 아나키스트 신문] (3월): 3–23.
무정부주의 운동사 편찬 의원회 (편집본) (1989)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서울: 형설 출판사.
Oh, J. (1998)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서울: 구각 자료원.
Yi, C. (1974) 욱완 문전 (이정규 전집). 서울: 삼화 인쇄.
Yi, H. (2001) 한국의 아나키즘 – 사상편. 서울: 지식 산업사.
{1} 원문에서 한국 단체와 조직명은 모두 영어로 번역돼 기재됐었다. 본 번역본에 기재된 단체들의 대부분의 한국 명칭은 Dongyoun Hwang의 Anarchism in Korea: Independence, Transnationalism, and the Question of National Development, 1919–1984에 나온 것을 사용하였다 (영어 아나키스트 도서관에서 이용 가능). 영문 직역의 경우 해당 명칭 옆에 괄호로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