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천주교 신자 노동자> : 그 목적과 수단
Author: 익명
Date: 2008
Source: 2009년 12월 7일에 www.catholicworker.org에서 재출간

《천주교 신자 노동자》 운동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와 관용의 원칙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원천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히브리어와 희랍어 경전이며 또한 신자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우리의 영감과 함께 성스러움이 뛰어난 신자들,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증거하는 살아 있는 증인들"이다.(성인들과 성녀들을 위한 성찬기도문 서문)

이 목적은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우리 운동의 창시자 도로시 데이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만든 세상보다 더 편안한 세상을 의도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선해지기 더 쉬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피터 모린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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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부의 생산과 통제의 방법론에 따라) 자본주의적이라 불리는 우리의 사회를 바라볼 때, 그리고 그 사회의 부르주아들을 바라볼 때, 그 물질적인 이득의 확보에 대한 만연한 관심에 따라, 그리고 우월함과 평범함을 나누는 것에 대한 강조에 따라,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와 거리가 멀다고 바라본다.

경제적으로, 사유재산적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는 모두 부의 불공정한 분배를 가져온다. 이윤동기가 결정의 주된 요인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다른 이의 땀으로 살아간다. 그 와중에 권력이 없는 이들은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빼앗긴다. 고리대금업(적정이윤 이상의 이자를 갈취하는 것)은 이 체계의 잘못된 본질에 주되게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의 부채 재앙이 가난한 국가를 더 큰 빈곤으로, 탈출의 여지없는 의존성으로 이끌고 있음을 상기한다. 이곳 미국에서는 풍요의 한복판에서 굶주리고 집이 없으며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의 수가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나고 있다.

노동에 있어 인간의 노동의 이유는 더 이상 인간의 필요가 아니다. 그 대신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이자 “진보”라 불리는 억제되지 않는 기술의 발전이 지배한다. 일자리는 “하이테크”산업에, 전쟁 산업에, 낭비되는 물건들의 소비사회에 집중된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인간의 복리에 무관한 일에 갇힌다. 나아가, 일자리가 점점 더 특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의미 있는 작업으로부터 배제되거나, 그들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된다. 심지어 농업에 있어서도, 농산업이 농업을 대체했다.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도덕적 제약들은 포악함이 넘쳐흐르고, 자연의 법칙에 대한 무시는 이 행성을 위협하고 있다.

정치에 있어, 국가는 삶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기능을 한다. 국가의 권력은 기술의 성장과 손잡고 급성장했다. 이로써 구체적인 정책이 구성될 때, 군사적, 과학적, 기업적 이윤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단지 국가 기구의 크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관료적 정부를 향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이는 비인간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관료제는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 단지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책임체계를 만들어내 효과적인 정치 토론이 잘못된 것을 시정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도덕에 있어,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인간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로 인해 오염되었다. 계급, 인종, 성별은 사회 안에서 개인의 가치와 위치를 결정한다. 이는 압제를 촉진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부와 그 통제권을 둔 대리전을 조장함으로써 이 분할을 심화한다. “생산적”이지 않은 자는 추방되고, 국가 기관에 의해 “절차화”된다. 영적 결핍은 만연하며, 고립, 광기, 성적 문란, 폭력으로 현현한다.

군비경쟁은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자 방향성에 대한 명확한 신호를 보낸다. 군비경쟁은 파괴의 수단을 늘렸고, 절멸에 대한 공포를 확장하였으며, 기본적인 생존권을 부정한다. 군비경쟁과 빈곤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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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변에서, 혹은 우리 안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과는 반대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동선에 관한 교리는, 하느님의 주관하심 아래 각 구성원의 개별선이 전체의 공동선으로 묶이는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아래와 같은 것을 지지한다.

인격주의Personalism. 모든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기반으로 하고, 모든 형이상학과 도덕의 목적이 되는 철학으로써의 인격주의. 이러한 지혜를 따름으로써 우리는 자기중심적 개인주의self-centered individualism를 벗어나 타인의 선으로 향할 수 있다. 이것은 변화하는 조건에 대하여 개인이 책임을 지고, 국가나 다른 기구가 비개인적인 “자비”를 제공할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우리는 교회가 이 철학으로써 새로워지고, 피터 모린이 가르친 부드러운 인격주의를 통해 교회의 부르심에서 멀어진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맞이할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탈중앙적 사회. 이러한 사회는 현재의 큰 정부, 산업, 교육, 보건, 농업에 대응한다. 우리는 가족 농장, 지역적 토지신탁, 소규모 공장에 대한 노동자의 소유와 경영, 자경자급농장, 식량 · 주거 등의 협동조합 등을 지지한다. 우리는 화폐를 다시금 교환의 수단만으로 돌려놓고, 인간이 더 이상 자산이 아니게끔 하는 모든 시도를 지지한다.

녹색 혁명. 이를테면 반反사유재산적 코뮌주의, 농업을 통한 자급자족, 수공업과 기술의 전용, 사람들이 스스로의 노동의 과실에만 의존하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사회 등을 말한다. 이로써 상호성과 갈등 해결에 있어서의 공정함과 함께, 우리 노동의 정확한 의미를 재발견하고, 토지와의 참된 연결을 재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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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반드시 필요한 개인적, 사회적 변혁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희생적 사랑을 통해 보여주신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믿는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예시로 삼아, 기도를 통해, 그의 성육신과 성혈과의 교감을 통해, 우리는 다음의 실천들을 추구한다.

비폭력.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오의 복음서 5,9) 오직 비폭력적 행동만이 인격주의적 혁명을 이룰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건 간에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에 반대하며, 모든 압제를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인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느니 스스로 고통 받으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와 단식, 그리고 악惡에의 비협조를 통해 폭력과 싸우라 요청하셨다. 전쟁을 위한 납세를 거부하고, 징집을 거부하고, 불공정한 법률에 응하는 것을 거부하자. 비폭력 파업과 보이콧에, 시위와 농성에 참여하자. 지배의 체계에 대한, 기업의 재정에 대한, 고리대금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이 모든 것이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방법이 될 것이다.

자비로운 행위(마태오의 복음서 25,31-46에서와 같이)는 복음의 요체이며, “우리 형제자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해 우리가 하여야 할 일들을 명확히 말해준다. 환대의 집[1]은 사랑의 행동을 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심이 된다. 이 곳에서 가난한 자들은, 원래 그들의 것이어야 할 것을 받게 된다. 이를테면 우리 옷장에 있는 두 번째 코트나, 우리 집의 남는 방이나, 우리 식탁의 남는 자리 같은 것 말이다. 우리가 지금 바로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것이 아예 없는 이들이 갖게 하는 것이 정의로움이다.

육체노동. 우리 사회는 육체노동의 존엄성과 귀함을 부정한다. “육체노동은 협동을 촉발하고 장벽을 극복하며 자매애와 형제애를 건설함은 물론, 우리가 손과 정신을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 육체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도로시 데이) 베네딕도회의 표어인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우리에게 인간의 노동은 세상의 교화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선물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자발적 가난. 우리는 또한 자발적 가난을 추구한다. “가난의 신비함은 가난을 공유하는 것에 있다. 타인에게 우리의 것을 나누어줌으로써 가난해진다면, 우리는 사랑을 더욱 알게 되고, 더욱 믿게 된다.”(도로시 데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지 않은 이들과 우리의 것을 자유롭게 나눔으로써 자발적으로 가난해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은총을 바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의 “가난한 이웃에 대한 우선적 선택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2]을 육화(肉化, incarnate)하는 길에 이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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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목적을 가지고 실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희생과 고통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하듯 하는 성공 여부는 판단의 최종 기준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살아낼 것인가이다.


[1] 역자 주 : 환대의 집house of hospitality은 로마 가톨릭 노동자 운동에서 주관하는 지역 기반 조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집과 음식, 의복 등을 제공하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2] 역자주 - 빈자 우대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poor은 20세기 후반 등장한 카톨릭 사회 교리의 원칙 중 하나로써,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