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스 바탈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이론가, 네스토르 마흐노
오늘날까지의 많은 계급투쟁 아나키스트, 조합주의자, 다양한 전통의 좌파들은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네스트로 마흐노와 강령주의자들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얼버무려왔다. 시카고 지역 블랙 로즈 아나키스트 연방의 동지들이 20세기 초 러시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대한 나의 저작을 통해 『강령』에 대한 학습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통일된 정치적 · 경제적 공동체-노동자 조합주의를 실천하는 것에 대한 최근의 관심에 입각하여. 아마도 지금이 『강령』의 아나키즘과 조합주의 부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시점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아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합주의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에 반하는 경향이라 판단하며, 그것이 인공적이고, 근본도 의미도 없는 것이라 본다.”
아나키즘과 조합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서로 다른 두 영역에 속한다. 자유로운 노동자의 사회라 할 수 있는 코뮌주의가 아나키즘의 목표라면, 혁명적 노동자의 업무 내에서 운동을 의미하는 조합주의는 혁명적 계급투쟁의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노동자들을 생산에 기반하여 조직함에 있어 혁명적 조합주의는 다른 모든 직업기반 조직처럼 핵심이론을 결여한다. 즉, 조합주의는 현대 현실의 복잡한 사회적 · 정치적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합주의는 그 대오에 가장 열심히 결합하는 정치조직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19세기 후반, 아나키즘적인 노동대중운동이 탄생했을 때부터, 이는 거짓된 기초를 가진 분열이 되어왔다. 초기 아나키스트들 다수는 스페인의 노동자 조직에 영감을 주었고, 이 노동자 조직들은 아르헨티나의 FORA등에게 영감을 주어 그들이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를 채택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노동운동 전반에 선동작업을 배치하고, 이를 통해 초기 노동자 저항 조직을 자유 코뮌주의로 끌어들일 필요 또한 인지했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에 입각한 <빵과 자유>나 크로포트킨과 노보미르스키의 남부 러시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그룹, 이후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러시아 노동자 동맹 등에서 활동하던 초기 러시아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과 조합주의라는 단어를 호환가능하게 사용하였다. <빵과 자유>는 노동조합운동 내부에서 혁명적 조합주의, 혹은 아나키즘에 입각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개입 전술을 채택하고 옹호했다. 초기의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선언>을 쓴 노보미르스키는 당이 지도하지 않는 노동조합에 침투하여 혁명적 조합주의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이를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로 유도하거나, 제대로 된 아나키즘적 노동조합을 건설하자는 전술의 주요 이데올로그였다. 1905년, 혁명이 실패한 이후 이 운동방향은 미국의 러시아 노동자 동맹 안에서 싹텄다. 이러한 조합주의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노선에 입각한 이념과 투쟁방법론은 이후 볼린과 막시모프에 의하여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선전 동맹으로 이어졌다.
『강령』이 쓰여지기 전, 국제노동자협의회가 혁명적 조합주의와 자유코뮌주의 강령에 기반하여 결성되었다. 이후 CNT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가 그들의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역사적 목표라고 천명했다. 이 언명이 다소 불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과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혹은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의 목적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투쟁 과정에서 대중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과 조합주의의 목적과 방법론은 동전의 양면이, 상호보완적인 것이 된다.
오늘날의 대중운동적 아나키스트들에게, 조합주의가 계급투쟁의 방법론일 뿐이라는 주장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오늘날의 혁명적 · 계급투쟁적 · 조직지향적 아나키스트들 중 누가 반란적 · 자발적 전복주의나 대안적 공동체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이러한 노선은 진지한 대중운동적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보다 신뢰가능한 대안으로 대체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조직들의 대오에는 갈레아니주의자나 프루동주의자들이 없다. 최소한 나는 그러한 자들을 알지 못한다. 이에 따라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로의 혁명적 변혁을 모색하는 가장 진지한 아나키스트들에게 남겨진 대중적 자기조직과 자주경영의 전략은 조합주의적 방법론이 된다.
“혁명적 조합주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립해보자. 혁명 이후 혁명적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질문, 즉 혁명적 노동조합이 새로운 생산의 조직가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들이 그 역할을 노동자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미루어두자. 우리는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적 노동운동으로써 혁명적 조합주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오늘날 부각되고 있는 문제는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참여해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하고, 어떠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아나키스트들이 조합주의 운동에 개인으로써, 선전가로서 진입하여온 현대까지의 시기를 노동운동을 향한 기능공의 관계의 시기라 바라본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강령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가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에 참가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고 말하지만, 강령주의자들은 “새로운 세계를 옛것의 껍데기 안에서 건설”하자거나 사회가 노동자 평의회와 공장위원회를 통해 조직될 것이라 논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령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이 노동조합운동에 모나트주의자들처럼 참여하여 조합주의 운동 내의 개인 활동가이자 선전활동가로 남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아나키스트들이 노동운동 내부에서 운동을 아나키화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강령의 다른 점은 조합주의 운동에 참여할 것인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운동에 어떻게 참여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참여할지일 뿐이다. 강령은 비정치적 목적을 가진 조합주의적인 노동운동을 건설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강령은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을 아나키즘으로 끌어올 것을 추구한다. 네스토르 마흐노와 『강령』의 저자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노동 운동을 아나키화하려는 시도라고 보아 이를 칭송하였다. 그리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노동조합들의 공동체적 투쟁을 하나의 전술노선으로 단결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혁명적 조합주의의 좌익에 자유의지주의적 이상을 부여하여 아나키즘 성격의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한다. 이것은 전진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은 실증적 방법론을 넘어서지 못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노동조합 운동의 ‘아나키화’를 그 운동 바깥에서 조직된 아나키스트들을 엮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반이 될 때에만, 아나키즘적 노동조합주의는 ‘아나키화’ 될 수 있고, 기회주의와 개량주의로 향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럼 강령주의자들은 사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이 중요한 약진이라 칭송해 마지않았고,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건설을 통해 조합주의 운동에 자유의지주의적 개념을 추동하려 하였다. 앞서 말하였듯, 강령주의자들이 조합주의자들을 비판하였던 요점은 이 노동조합운동의 아나키화가 현장 투쟁 바깥의 사회운동과 단일한 투쟁으로 합쳐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통일은 아나키스트 노동자의 일반조직, 아나키스트 총동맹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현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이론은 이 (『강령』이 지적한) 결핍을 충족하려 노력하고 있다. CNT는 세입자 투쟁에 조합주의적 방법론을 결합시켰고, 무상교육을 위한 투쟁에 학생 조합을 결합시켰다. 현대의 연대체들은 공동체주의와 조합주의의 독특한 혼합체다.
“조합주의는 일관성 있는 사회적 · 정치적 이론이 없는 노동자들의 모임에 불과하고,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사회적 문제를 풀어낼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운동에 있어 아나키스트들의 과업은 그 운동 안에서 자유의지주의적 이론을 발전시키고, 그 운동을 자유의지주의적 방향으로 유도하고, 그 운동을 사회혁명의 적극적 무기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노동조합주의가 아나키즘 이론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시기가 도래했을 때, 노동조합주의는 결국 국가주의적 정당의 이데올로기로 돌아설 것이다.”
현대의 신강령주의자들이 위의 문단을 다시 한 번 재독해볼 것을 권고한다. 오늘날의 아나키스트들은 단지 노동조합이나 사회운동을 건설하는 것에 멈추고, 이러한 조직이나 운동이 비정치적 성격으로 남아야 한다고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는 비정치성에 관한 이론이 만들어진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비정당적 노동조합이나 사회운동이라는 노동자의 풀뿌리 조직이 있었고, 사회적 침투를 통해 이 조직들을 아나키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흐노와 강령주의자들은 이러한 조직과 운동은 결코 추상적인 정치적 진공상태로 남지 않을 것이고,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와 방법론을 채택시키기 위해 내부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주의적인 정치 경향이 조직들을 탈취하여, 아나키스트 대중운동을 잠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노동자운동에서 아나키스트들의 과업은 노동조합 바깥의 아나키스트 조직과 그 활동을 엮어냄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혁명적 노동조합을 아나키스트의 총체적 조직의 방향성에 따라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된 세력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아나키스트적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으로 제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노동조합에 이론적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소규모 실험적 집단이 아닌 엄격하게 조직된 아나키스트 집단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 소규모 실험적 집단에서는 조직적 연계도, 이론적 합의도 없다.
“회사, 공장, 작업장에서의 아나키스트 그룹들이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혁명적 노동조합의 투쟁을 조합주의에 내재한 자유의지주의적 이상으로 선도하게끔 하고, 이 그룹들을 아나키스트의 총체적 조직의 행동으로 다시금 조직하는 것. 이것이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수단과 방법이 되어야 한다.”
강령의 조합주의 부분의 마지막 세 문단이 명확히 지향하고 있는 바, 통일적 아나키스트 노동대중조직을 건설하여 각 회사, 공장, 작업장의 투쟁을 공동체에서의 투쟁과 묶어내는 것은 오늘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대중전략과 상통한다. 이는 아나키스트 노동운동 초기부터 존재하여 왔던 다원론적 전략이라는 입장에서 한발짝 나아간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적 노동조합을 지향함과 동시에, IWW나 다른 노동조합들 안에서 아나키즘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아나키즘적 목표와 방법론을 관철하기 위한 사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에게 명확히 필요한 것은, 단지 이데올로기 투쟁이나 선전을 위한 조직을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사회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조합주의적 방법론과 아나키스트적 목적이 합쳐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노동계급투쟁과 공동체적 투쟁을 단결시키고, 한데 묶음으로서 우리의 목표인 사회혁명을 더욱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