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달레산드로
잊혀진 만주 코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감독인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는 미군의 의뢰로 “Why We Fight"라는 7부작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만들었다. 이 영상은 나치 선전 영화에 대응하고, 군인과 시민들에게 미국의 참전을 정당화하고자 만들어졌다.
7부작의 첫 영상인 “전쟁 서문”은 2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1929년부터 1932년 사이에 이루어진 일본의 만주 침략과 정복에 둔다. 하지만 같은 시기 만주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영상에 나오지 않는다. 이 일은 당시 만주를 다루는 많은 책과 기사들에서도 배제되어있다.
당시 만주에서는 일본군, 조선총독부군[1], 중국군, 소련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북방군, 즉 1920년대 후반 북만주에 세워진 아나키스트 코뮌의 군대와 싸워야 했다. 만주코뮌은 1911년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마곤주의[2] 혁명이나, 1918년 우크라이나의 마흐노주의 반란이나, 1936년의 스페인 혁명만큼이나 중요한 혁명적 실험이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사회실험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차지하였던 중요한 역할은 간혹 무시되거나 과소평가된다.
수세기 동안, 만주는 조선, 러시아, 중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 등지로부터 온 이민자와 추방자들의 터전이었다. 1910년, 일본 정부는 조선을 병합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 이주민 중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이주 공동체에서 매우 능동적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조선인 이민자들은 세 개의 자치구, 정의부 · 참의부 · 신민부를 건설했다. 이 자치구는 일본 제국으로부터, 중국 군벌들로부터, 만주 지역 봉건호족들로부터 자유로웠다.
이들은 지역 인민의 보호, 중국 정부의 약화,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물리적 거리, 산악지형의 험난함 등에 힘입어 수년간 정부나 군벌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하였다. 이 자치구들은 자기방위를 위한 군사력으로서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 등을 갖추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해방구를 지켜내었다. 북로군정서는 김좌진 장군이 이끌었다. 김좌진은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를 혐오하고, 거세게 저항하였다. 그는 1920년 대한독립군에 가입하여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전의 과정에서 대단한 통솔력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김좌진은 그의 친척 김종진에 의해 아나키즘을 접하게 되었다.
1925년,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김좌진, 김혁, 최호, 나중소 등의 게릴라 투사들이 만주의 신민지역에 새로운 자주독립적 인민사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게릴라투사들은 이 제안을 수인하고 실현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김종진, 정신 등 상당수 아나키스트들이 이 프로젝트의 시작 당시부터 함께했다. 이 프로젝트는 자기조직에 근거하였기에, 상당수 지역 농민과 노동자들 역시 이에 빠르게 호응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김좌진을 한인 마흐노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김좌진이 마흐노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역량과 자주 독립적 생산-소비자 협동조합 및 노동자 농민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 자기방위 조직의 건설에 대한 헌신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스스로 자주경영과 경제적 협력, 생활에 필요한 조직적 구조의 체계를 건설할 수 있었고,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도왔다. 이들은 지속가능한 자유의지주의적 혁명이 되리라 기대하며 코뮌을 만들었다. 이 코뮌은 다양한 생산역량을 가진 이들 사이의 협력을 전제로 한 자치를 중요한 가치로 바라보았다. 이 코뮌의 목표는 농장의 기동과 운영, 집단적 구매와 판매, 상호부조적 사회의 건설 등 협력적 활동들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나아가 이들은 초중등학교를 설립하면서 문화적, 교육적 활동 역시 증진되었다. 이로써 필수적인 생산기술과 학술적 지식에 관한 개인적 · 사회적 발전 역시 확보할 수 있었다.
1929년 신민부는 그 이름을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바꾸었다. 마을 총회에서는 풀뿌리 토론과 결정들이 이루어졌고, 그들은 지역 총회에, 연방 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신민부에는 자기방위, 농업, 교육, 재정, 선전, 청년, 공중보건, 총무의 8개부서가 있었다. 모든 대표단들은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이었고, 그들은 다른 노동자들의 임금과 비슷한 임금을 받았다. 그들은 행정부에서 복무하는 동안 어떠한 특권도 가지지 않았다.
한국의 아나키스트 역사학자인 하기락은 한족총연합회가 이러한 구조가 아나키스트적 이상을 강화한다고 바라보았다고 전한다. “모든 회의는 구성 대중에 대한 예산의 집행계획을 결정하고, ‘역량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라는 원칙에 따라 예산서를 승인했다”
신민코뮌은 흑룡강 등의 인접 지역으로 확장했고, 아무르 강을 동쪽 경계로 하고, 쑹아차허를 서쪽 경계로 하며, 남쪽으로는 하얼빈―훈춘이 위치한 삼각지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강역은 35,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고, 2백만 명 가량이 거주했다.
하지만 1930년대 초, 코뮌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일본제국은 35,000명의 군인으로 만주를 침공하여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은 조선공산당은 코뮌 내부로 잠입하였고, 그 아나키스트 지도자인 김좌진을 체계적으로 암살했다. 김좌진은 1930년 1월 살해되었다.
일본군, 조선공산당, 만주국군 등이 코뮌을 안팎에서 포위했고, 결국 이를 파괴하였다.
살아남은 아나키스트들은 숨어들어가 지하에서 게릴라전을 지속하였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아나키스트들은 남북 모두에서 탄압을 경험해야 했다. 그럼에도 아나키즘의 전통은 다시 한 번 반도의 급진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기 시작했다.
지난 십여 년간 이 중요한 혁명적 사건에 관한 책과 기사들이 다소 출판되었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더 많이 필요하다. 이 운동은 20세기에 발발한 자유를 향한 투쟁에 관한, 급진적 운동에 관한 아나키스트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가 특권계급에 저항하고, 세계와 우리의 정신을 그들의 영향권 바깥으로 쪼개어내는 시도를 함에 있어 새로운 방법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1] Korean Army. 당시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상태였던 것을 고려할 때, 사실상 조선총독부 주둔군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나, 당시 조선총독이 주둔군에 대한 독립적 통수권을 가지고 있었고, 출병권마저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군과 구분할 필요는 있을 듯 하다.-역자 주
[2] 멕시코 혁명기 리카르도 플로레스 마곤(Ricardo Flores Magon)에 의하여 주창된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사상. EZLN운동이 마곤주의의 형제격이라고 자칭한다.-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