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체로 많은 아나키스트들과 사상가들은 공산주의 체제의 모든 장점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사회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에 대한 심각한 위험이 이 질문에서 발견된다. 그런 위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더욱 중요한 다른 질문, 즉 개인과 사회의 상호관계 일반에 대해 답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공산주의에 대한 문제는 이러한 형식의 사회적 삶에 대한 아주 널리 알려진, 여러 잘못된 시각들 때문에 복잡해졌다. 많은 경우 어느 정도 기독교적이고 수도원적인 그리고 어떤 경우든 엄격한 중앙 권력에 종속된 공산주의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19세기 전반에 공산주의를 그런 형태로 선전하였고, 적지 않은 공동체에 공산주의를 그런 형태로 실현하였다. 이들 공동체는 가족을 모델로 택함으로써 ‘거대한 공산주의 가족’의 창조를 위해 노력하였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인간을 개조하기를’ 원했다. 이 결과, 노동 외에도 그들은 긴밀한 가족 공동거주지, 현대 문명에 거리두기, 코뮌의 독립, 공동체 구성원 각각의 모든 내적 삶의 세세한 현상에 대한 ‘형제들과 자매들’의 간섭을 공동으로 적용하였다.

그 다음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300년 혹은 400년 동안 다양하게 나타난 소규모의 단일 공동체들과 대량으로 설립되어, 서로 간에 연합 협정을 체결하고 있는 공동체들을 혼동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났다.(이 연합 협정은 사회혁명의 길로 들어선 사회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이렇게 공산주의에 대한 질문과 공산주의 사회에서 개인적 독립성의 보장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제대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분리하여 관찰해야 한다.

① 생산과 수요. 즉 어떤 방식으로 노동을 공동으로 기획할 것인가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어떻게 공동으로 이용할 것인가?

② 공동생활. 즉 대가족 모델에 따라 공동생활을 실현하는 것이 필수적인가?

③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공동체들. 현재 생기고 있는 공동체들의 성격은 어떠한가?

④ 그리고 미래의 시스템에 속한 - 서로 간에 연합 협정(연방)을 체결하고 있는 - 공동체들의 성격은 어떠한가?

⑤ 공동체 시스템에서의 개인적 상황에 대한 문제. 공동체 생활은 불가피하게 개인의 억압을 초래하는가?

19세기의 거대한 지적 운동은 대체로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바뵈프(F.-N.Babeuf), 푸리에(F.Fourier), 생시몽(C.Saint-Simon), 로버트 오언(Robert Owen), 프루동(P.-J.Proudhon)으로부터 시작되어 수많은 추종자들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콩시데랑(V.Considérant), 피에르 르루(P.Leroux), 루이 블랑(L.Blanc), 독일의 마르크스(K.Marx), 엥겔스(F.Engels), 쉐프레(A.Schäffle), 러시아의 체르니솁스키(Н.Черышевский), 바쿠닌(М.Бакунин) 등, 이들은 현대 사회주의 창시자들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전파하거나 과학적인 토대 위에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얼마나 분명한 형태로 수립되었는가에 따라, 사회주의 창시자들의 사상은 사회주의의 두 주요 흐름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와 아나키(탈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이다. 그리고 현재의 사회와 공산주의 체제 사이에서 타협 혹은 절충을 모색하는 몇몇의 중간적 형식들이 있다. 예를 들면 국가자본주의(생산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대부분 국가가 지배한다), 집산주의(노동 시간에 따라 화폐 형태로 노동시간제 임금이 모두에게 지불된다. 이 돈에는 루블 대신에 노동 시간이 적혀있다), 협동조합(생산 그리고 소비조합), 도시사회주의(도시자치회가 도입한 반半 사회주의적 제도) 등 많은 종류가 있다.

동시에 순수 노동환경에서 사회주의 창시자들, 특히 로버트 오언의 사상은 거대한 노동운동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이 노동운동은 자본에 대항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투쟁을 목적으로, 모든 노동자들을 수공업 조합으로 통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1864-1879년 사이에 인터내셔널 혹은 국제 노동자연합을 탄생시킨 이 운동은 연합한 수공업들 사이에 국제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국제교류가 편해지는 정도에 따라 이 분야에서 점점 더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거대한, 지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은 세 가지 핵심적인 항목을 확립하였다. 지난 30년 동안 이 세 항목은 사회적 의식 속에 깊숙이 침투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노동시간제 임금 시스템의 폐지. 왜냐하면 이 시스템은 고대 노예제도와 봉건적 농노제도의 현대적 형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② 생산을 위해 사회에 필수적인 것에 대한 개인적 소유의 폐지.

③ 경제적 노예화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정치적 노예화 형식으로부터, 즉 국가로부터 개인과 사회의 해방.

사회주의 사상가들 사이에는 이 세 항목에 대하여 이미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노동자 수표’ 혹은 노동 시간에 따른 임금지급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집산주의자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현실적 개혁주의자’인 브루스[1]가 말한 것처럼, “모두 관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즉 모든 노동자는 국가 혹은 도시 혹은 마을공동체로부터 급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조차도 본질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항목에 대해 동의한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일시적 타협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체제에서 공산주의로 곧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보하여 물러선다. 왜냐하면 그것을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최종 목적은 여전히 공산주의다.

국가에 대해 말하자면, 강력한 국가권력 그리고 심지어 독재의 열렬한 옹호자 중의 일부도 지금 존재하는 계급들은 폐기될 것이며, 그들과 함께 국가의 필요성도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단지 ‘우리’ 당이라는 이유로 사회주의 운동에서 아나키 당의 중요성을 절대로 과장하지 않고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일반 사회주의 운동에서 다양한 당파들 사이의 견해차는 여러 당이 채택한 혁명적 행동수단들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견해차가 있다고 해도, 어느 당에 속하든지 모든 사회주의 운동 사상가들은, 사회주의 운동의 최종 목표는 자유로운 공산주의의 발전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들도 인정하고 있듯이 모든 다른 것은 이 목표를 향한 과도기적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목표를 향한 과정에 나타나는 과도기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미 현대 사회에서 감지되는 미완의 과도기적 형식들, 그 경향들에 대한 연구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쓸모없게 될 것이다.

이들 경향 중에서 특히 두 가지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 중 하나는, 사회의 삶이 복잡해짐에 따라 식량, 의복, 기계, 주거지 등의 생산에서 어느 정도가 개별 노동자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이제 농업과 산업은 상당히 복잡해져 서로 얽혀있고, 산업의 모든 분파들은 서로 긴밀하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우리가 정의를 추구한다면 획득한 생산량에 따라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게 되고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토지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혹은 두 개의 서로 다른 탄광에서, 서로 다른 두 방직공장의 서로 다른 기계에서 혹은 같은 기계에서 서로 다른 면화를 대상으로 똑같이 열심히 일할 때, 그들이 생산하는 빵, 석탄, 옷감의 양은 서로 다를 것이다.

이 때문에 한 종류의 산업이 발전할수록 단위노동임금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임금은 1일 기준의 일급으로 대체된다.

다른 측면에서, 일급 자체는 평등 지향성을 갖는다. 지금의 사회는 물론 지속적으로 계급으로 분화되고 있고, 하루에 적게 일할수록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거대한 ‘주인’ 혹은 부르주아 계급이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 사이에는 4개의 큰 등급이 있다. 그 안에서 일당은 아주 다양하게 지불된다. 이 등급은 여성, 농민, 잡역인부, 기술노동자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임금을 받는 4개의 노동자 등급은 고용주에 의해 착취당하는, 그리고 더 높은 등급의 노동자에 의해 차례로 착취당하는 4개의 노동자 등급을 보여준다. 그것은 여성, 남성, 농민, 공장노동자 순이다. 지금은 그렇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평등이 수립된 사회에서, 고용주가 노동자들의 종속적 상태를, 남성이 여성의 종속된 상태를, 도시노동자가 농민의 종속된 상태를 악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계급 구분은 사라질 것이다. 올바로 정리된 사회에서 땅 파는 노동자의 하루는 귀금속상인 혹은 교사의 하루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을 근거로 로버트 오언과 그의 뒤를 이어 프루동은 노동자 수표의 도입을 제안하고 실험하기도 하였다. 즉 어떤 것이든 유익하고 필요한 것으로 인정된 생산에 5시간 참여한 사람은 누구든지 ‘5시간’이라고 표기된 확인증을 받는다. 그는 이 확인증을 갖고 공동매점에서 임의의 물건을, 즉 식료품, 옷, 사치품을 구입하거나 방세, 철도 요금 등 다른 사람들의 노동 시간의 양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 집산주의자들은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에서 모든 종류의 노동임금 지불방식으로 이 수표의 도입을 제안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의 사회적인, 사회주의적인 사용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 방법들이 고안되었다. 우리는 지금 이 모든 방법들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수표를 도입한 미국의 수천의 농장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지금 집산주의자들이 선전하고 있는 로버트 오언과 프루동의 사상이 괄목할만한 정도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75년 전 오언이 실험을 개시한 이후, 노동자 수표가 널리 보급된 곳은 없다. 나도 다른 논문 『빵의 쟁취』에서 어떤 내부적 모순들이 이 프로젝트의 광범위한 도입을 방해하는지를 제시한 바 있다.

반대로 우리는 사적인, 제한된, 불완전한 혹은 심지어 완전한 공산주의의 경향을 갖는, 많은 가능한 시도들을 파악하고 있다.

19세기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수백 개의 공산주의적 공동체들이 설립되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공산주의 원리에 따라 생활하는, 약 백여 개의 공동체가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누군가 세상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와 반半 공산주의적인 공동체들에 대해 기록한다면,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사적이고, 제한적이며,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사회 도처에서 공산주의 원리에 따라 도입된 사회화의 노력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이런 시도들은 개인들로 구성된 큰 집단에 의해서 혹은 도시 전체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이것은 자치 혹은 도시 사회주의라 불린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런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는 호텔, 여객선, 스위스식 ‘숙박시설’이 있다. 일정한 비용으로 당신은 대형 여객선에서 10 종류 혹은 15 종류의 음식 중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갖는다. 이때 당신은 하루에 몇 루블만을 지불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어느 누구도 당신이 얼마나 많이 먹는지 계산하지 않는다. 현재 그런 조직이 국제적인 규모로 설립되기도 하였다. 런던 혹은 파리에서 출발하는 경우, 당신은 하루 2루블 50코페이카로 전표를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표로 당신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에 산재된, 국제 호텔 연맹에 가입된 수백 개의 호텔로부터 방과 침대 그리고 식사를 제공받는다.

부르주아는 소비활동에서 개인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해 줌으로써 이런 유형의 제한된 공산주의가 많은 이익을 가져올 것이란 것을 잘 이해하였다. 그들은 하루 혹은 한 달에 일정액을 내기만 하면 추가적인 비용 없이 숙식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사치 품목은 계약에 포함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고급 포도주, 호사스런 방에 대해서는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비용으로, 여행객 각자가 공동식탁에서 얼마나 먹는지를 계산하지 않고도, 기본적인 수요는 충족되었다.

특히 모든 주민의 수입이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이고, 그 때문에 모두에게서 평등하게 보험료가 징수되는 마을에서의 화재보험, 철도여행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고를 위한 사고보험, 도난보험(영국에서 당신이 1년에 몇 루블 정도만 내면, 보험회사는 당신이 도난당한 모든 것에 대해, 당신 자신의 평가에 따라, 1,000루블까지 당신에게 보험금을 지불한다. 이때 어떤 조사도, 경찰에 신고하는 일도 없다. 보험사 직원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세요? 어차피 경찰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걸요. 당신이 받을 돈은 보험료, 부대비용을 제하고도 이익이 남을 것입니다.”) - 이 모든 것은 지난 20년간 매우 빠르게 나타났던 사적인 공산주의 혹은, 더 정확히 말해, 협동조합 형식들이다.

이외에도 학술조합이 있다. 1년에 일정 액수만 내면 당신은 도서관, 연구에 필요한 공간, 박물관 혹은 동물원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백만장자도 자기 돈을 들여 마련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당신에게 방, 도서관, 학회 그리고 다른 모든 설비를 제공하는 클럽도 있다. 생명보험, 개인적인 여행사뿐만 아니라 영국의 폴리테크닉 여행사와 같은 교육기관이 운영하는 여행자조합, 혹은 지금 영국에서 유행하는 것으로, 1주에 1루블 혹은 심지어 반 루블만으로 가족이 1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의 생선을 어부에게서 직접 집으로 배달해주는 조합, 회원에게 수천 가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전거 클럽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최근에 발생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수백 개의 제도를 갖고 있으며, 이 제도들은 매우 광범위한 소비 영역을 공산주의적으로 활용하는 원칙에 토대를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또한 우리는 급속히 증가하는 공산주의적 성격의 도시제도들을 갖고 있다. 도시는 매년 일정한 비용으로, 각자가 얼마나 많은 물을 소비하는지 엄밀하게 계산하지 않고도, 모두에게 물, 가스, 조명을 위한 전기를 마치 노동력처럼 공급한다. (이를 위해 맨체스터시는 탄광을 매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도시는 자신의 항구와 부두를, 거리에 상관없이 동일한 교통비가 적용되는 전차를(미국에서는 수백 걸음에서 30베르스따까지 동일한 요금을 낸다.), 공동목욕탕과 세탁소를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도시는 자신들의 공동거주지를 건설하거나, 면양을 사육하거나 젖소 농장을(영국의 토르케) 운영한다. 도시 경제를 공산주의적 방향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들은 매년 증가하고, 그것의 적용범위는 확장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아직 공산주의가 아니며,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모든 제도들의 기본 사상은 그 안에 공산주의 원리를 일부 포함한다. 즉 일정 금액을 매년 일정한 횟수 납부하면, 당신은 일정 정도 욕구를 충족할 권리를 갖는다. 이 욕구들 중에서 사치품은 예외가 된다. 지금 당신은 이를 위해 여전히 돈을 내고 있지만, 노동으로 지불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다. 기초는 이미 놓였다.

공산주의가 되기에 이 제도들은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첫째, 노동이 아니라 돈으로 지불한다는 것이 특히 공산주의답지 않다. 둘째, 적어도 사기업에서 소비자에게는 업무 관리에 대한 투표권이 없다.

그러나 또한 다음과 같은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제도의 기본 사상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사기업에라도 이런 - 첫 번째 항목, 즉 노동으로 지불하는 방식을 적용한 - 공동체를 지금 도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500 데샤티나의[2] 토지를 예로 들어보자. 이 땅에 정원에 속한 4분의 1 데샤티나 규모의 집 200채를 짓고, 나머지 땅은 평야, 채소밭 그리고 공원으로 활용한다. 사업주는 이 집에 사는 각 가정에 그들이 매일 준비하는 50가지 음식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제공하거나(미국 호텔에서 하는 것처럼), 그는 원하는 가정에 빵, 생고기, 채소, 차와 커피를 집에서 요리할 수 있도록, 필요한 만큼 공급한다.(어부들은 가정에 생선을 공급함으로써, 이 방향으로 일보를 내딛고 있다.) 물론 난방은 미국식으로 중앙보일러와 연결된 관을 통해 뜨거운 물을 순환시킴으로서 이루어진다. 이 제도를 운영하는 사업주는 이 모든 것을 위한 비용으로 당신에게서 매일 일정액을 돈으로 받거나, 마을/호텔에 필요한 작업장 중 임의의 장소에서 매일 일정 시간 노동하게 함으로서 비용을 충당한다. 당신은 선택에 따라 하루에 몇 시간씩 들판에서 혹은 채소밭에서 혹은 부엌에서 혹은 방청소 일을 한다. 당신의 노동은 당신의 생활비로 계산된다. 그런 제도는 내일이라도 도입할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어떤 진취적인 호텔소유자도 이것을 실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3]

거의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많은 공동체들이 이 항목에서, 즉 노동 일반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도 이 항목에서 실패할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적어도 많은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옳지 않다. 공산주의적 공동체들이 붕괴할 때, 실패의 원인은 전혀 일반 노동에 있지 않았다.

첫째, 그런 공동체들 거의 모두가 반半 종교적 열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공동체의 설립자들은 ‘인류의 선구자, 위대한 이상의 개척자’가 되어, 매우 까다롭고 ‘고귀하고’ 엄격한 도덕률들에 복종하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 ‘갱생하고’, 마지막으로 모든 시간을, 모든 노동 시간을 공동체에 바치기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만 살기로 결심하였다.

이 모든 것은 참 좋고, 멋지기도 하다. 새로운 사상은 그런 자기희생을 통해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옛날 은둔자들이 한 것처럼 행동함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사람들이 실제와는 다른 것이 되도록 불필요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사업주·자본가들의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것 외에는 어떤 고상한 목적도 갖지 않는 공동체들이 최근에 비로소 주로 노동자·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다른 오류는, 그들은 반드시 가족을 모델로 삼아, ‘형제·자매들의 대가족’을 설립하기를 원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그들은 한 집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평생 동안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러나 한 지붕 아래에서의 협소한 공동생활은 대체로 쉽지 않은 일이다. 피를 나눈 형제도 늘 한 집에서 혹은 한 방에서 함께 오래 살지는 않는다. 때문에 각자에게 최고의 자유를 그리고 각 가정의 내적인 삶에 대한 최대한의 보호를 보장하는 대신, 모든 구성원에게 ‘대가족’의 삶을 부과한 것은 본질적 오류였다. 예를 들어 러시아 두호보르파[4] 신자들은 독립된 가옥에 살았기 때문에, 수도원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반半 공산주의적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작은 공동체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알려진 것처럼, 여객선 혹은 감옥에서처럼 아주 좁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외부와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된 사람들은 서로를 견딜 수 없게 된다. (자신의 경험 혹은 난센[Nansen]과 그의 동료들을 상기해 보라.) 작은 공동체 내에서 두 사람은 쉽게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 그리고 외부와의 접촉이 부족할 경우에, 외부세계와 멀리 떨어질수록 공동체는 쉽게 붕괴된다.

이 때문에 작은 공동체를 설립할 때, 몇 년 이상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더 오래 살아남는다면, 오히려 그것을 슬퍼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성원들은 어느 한 구성원의 노예와 같이 되거나 개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공동체가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확신할 수 있으므로, 적어도 10개 혹은 20개의 공동체가 계약을 통해 연합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경우 특정한 이유로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기 원하는 사람은 적어도 다른 공동체로 옮길 수 있고, 그의 자리는 다른 쪽에서 온 사람이 채울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공동체는 불화로 인해 몰락하고, 나아가 공동체의 재산은 한 구성원의, 가장 교활하고 잇속에 밝은 ‘형제’의 손으로 넘어간다. 나는 공산주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협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꾸준히 피력하였다. 이 의견은 이론에서가 아니라 지난 몇 년간의, 특히 더 광범위한 조직의 부재로 인해 몇몇 공동체가 특정 ‘형제들’의 손으로 넘어간 영국에서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30년간 대량으로 설립된 작은 공동체들은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이유 때문에 몰락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과 격리되어 있었다. 활동가에게 투쟁과 투쟁에 의해 활기를 얻는 삶은 배부른 식사보다 훨씬 더 필요하고 불가피하다. 사람들과 함께 살고, 사회생활의 격렬한 흐름 속에 잠기고, 투쟁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그들의 고통에 아파하려는 욕구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니콜라이 차이콥스키가 내게 훌륭하게 지적한 것처럼, 젊은이들은 18세가 되면 공동체를 떠나야만 한다. 다른 세계에 섞이지 않고, 그 세계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젊은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코뮌은 인적 없는 곳으로 떠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그렇게 행동한 공산주의자들은 또 다른 오류를 범했음을 나는 지적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토지를 무상으로 혹은 매우 싼 값으로 매입하였다. 이로서 그들은 새로운 삶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도시 혹은 대로에서 떨어진 새 장소에서 주민 각자가 싸워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을 추가로 갖게 되었다. 경험이 말해 주듯이 이것은 매우 큰 어려움이다. 그들이 싼 값에 땅을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뉴캐슬 근처의 공동체는 물질적인 면에서 일반농업이 아니라 채소재배와 원예농업에 종사할 때(주로 온실 재배로) 훨씬 잘 그리고 빨리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게다가 대도시와 인접해 있을 때, 공동체는 과일과 채소의 판로를 확보하고 토지 임대료를 웃도는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채소와 원예농업은 일반농업, 나아가 황무지 개간보다 훨씬 수월하게 도시 주민에게 접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거의 언제나 우두머리를 가지려는 소망이 공동체 붕괴의 -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 이유가 되었다. 행정조직을 최소화하거나 전혀 갖지 않았던 공동체들은(북미의 이스카리아처럼) 다른 공동체들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고 오래 지속되었다.(35년간) 이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의 잔혹함은 언제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지배와 권력 때문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작은 공동체에서 권력 때문에 생긴 다툼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붕괴로 귀결된다. 대도시에서 우리는 정치적 적대자들과 나란히 살아갈 수 있다. 그들과 지속적으로 마주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순간 마주쳐야 하는 작은 가족 내에서 어떻게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을까? 권력 때문에 생긴 정치적 다툼과 음모는 이제 작업장, 채소밭, 외양간으로,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모이는 공간으로 옮겨가고 삶은 불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 세워진 공동체들이 붕괴된 주요 원인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공산주의적 노동 일반 그리고 공동체생산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언제나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상업적인 기업에서 토지의 가치 상승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지난 100년 동안 세워진 공동체들 중 어느 것과 비교해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드물게 기업의 몇몇 부문에서 공산주의적 원칙에 따른 산업생산과 같은 정도의 이익을 내기도 하였다. 멘토파 제분소 혹은 방직공장 혹은 벌목 혹은 과실수 재배가 그러하다. 초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던 토지가 몇 년 후에는 10배 혹은 심지어 100배의 가치를 갖게 만든 공동체의 이름을 수백 개는 거론할 수 있다.

경영상의 오류는 다른 모든 곳에서와 같이 물론 공산주의 공동체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같이 산업계에서 새 기업 100개 중 매년 60-80개가 파산한다. 새로 설립된 기업 5개 중에서 3개 내지 4개가 설립 후 5년 안에 파산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공동체에서는 그렇지 않다.

기지를 발휘하고 싶은 마음에서 부르주아 신문들은 아나키스트들에게 고립된 섬을 주어, 과거의 경험을 이용하여 그곳에 코뮌을 설립하게 하라고 충고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제안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다만, 이 섬이 프랑스의 섬이어야 하며(파리가 위치한 일-드-프랑스[5]), 사회적 부 중에서 - 사람 수에 따라 계산하여 - 우리 몫을 줄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일-드-프랑스도, 사회적 부 중에서 우리 몫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 우리 스스로가 사회혁명의 방법을 통해 그 모든 것을 가져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871년의[6] 파리와 바르셀로나는 이미 그런 상태에 상당히 접근해 있었으며, 그 이후 공산주의적 시각이 노동자들 사이에 상당히 성공적으로 확산되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도시가 공산주의 시스템을 도입하고 나서, 그것을 이웃 도시들에 확산시키지 않으면, 향후에 매우 큰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는 것을 오늘날 노동자들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삶을 즉시 상당히 큰 지역에, 예를 들어 미국의 사회주의자 친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하이오 혹은 아이다호와 같은 미국의 한 주 전체에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옳다. 공산주의 실현을 위한 첫발자국은 결코 한 도시에서가 아니라 충분히 큰 산업 그리고 농업 지역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농촌 없는 도시는 생존할 수 없다.

국가 공산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수차례 증명해야 했고, 여기서 다시 우리의 논거들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가장 훌륭한 증명은 국가주의자들 자신도, 즉 사회주의 국가의 옹호자들도 국가의 강제 위에 건설된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현재의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권력쟁취에 매우 몰두하고 있어서, - 모든 시민들이 국가의 임금노동자가 되는 체제, 즉 국가자본주의의 실현과 양립할 수 없는 - 사회주의 국가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를 위해 노력하라는 말을 하면 그들은 화를 낸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사회적 관계의 형식을 실현하기 원하는지에 대해 도무지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하다. 임박한 사회혁명의 가능성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현 자본주의 국가에서 권력의 일부를 장악하려하고, 미래의 방향을 미래 스스로가 결정하도록, 모든 것을 미래에 위임해 버린다.

미래 사회를 설계하려는 사람들은 이렇다. 그들이 국가원리를 발전시킴으로서 인류가 쟁취한 크지 않은 개인적 자유를 밑으로부터 훼손시킨다고 우리가 지적할 때, 그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절대로 원하지 않고, 단지 통계 위원회를 만들기 원할 뿐이라고 보통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알려진 것처럼, 유일한 쓸모 있는 통계는 개인 자체로부터 나온다. 단지 개인 스스로가, 개인적으로, 자신의 나이, 직업, 사회적 상태와 관련된 통계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우리 각자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을 결산할 수 있다. 통계수치가 신뢰성을 확보하기를 발행인이 진정으로 바라는 경우에, 오늘날 통계는 그런 식으로 수집된다. 우리의 ‘농가 현황’도 그런 식으로 지방자치회의 정직한 젊은 통계조사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지원자들이(학자와 통계협회) 주민 각자에 주어지는 질문들을 만든다. 통계 위원회의 역할은 인쇄된 질문지를 배포하고, 카드를 분류하고, 계산기를 사용하여 최종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때문에 사회주의자가 국가를 그렇게 이해하고, 국가에 어떤 다른 권력도 위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심으로 말한다면) 단순히 ‘명예로운 퇴각’을 의미한다. 전 세기에 걸쳐, 국가주의자·사회주의자들 스스로도 절대로 국가를 조사용지를 나르는 배달부로, 최종 조사결과를 산출하는 계산원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가는 국민 삶의 실질적 관리자였다. 또 언급해야 할 것은, 과거의 자코뱅주의자들은 30여 년 전에는 그토록 열렬히 선전했지만, 이제는 독재와 사회주의적 중앙집권화에 덜 열광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들 중 누구도 베를린의 독일 국민의회에서 감자의 수요와 생산을 결정해야 한다는 무모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황당무계한 것들은 주장하지 않게 되었다.

그와 같이, 공산주의 국가는 유토피아이다. 한때 옹호했던 사람들도 이 유토피아를 거부하고, 오래전부터 다른 더 진지한 질문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다면, 아나키즘적인, 즉 자유롭고 무無국가적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에 위험이 되지 않는단 말인가? 그것은 개인적 자유의 축소와 개인적 자기주도에 대한 억압을 동반하지 않는단 말인가?

문제는, 자유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노예상태와 종교적 억압의 시대에 상속된 수많은 거짓 표상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기아의 위협을 받아 노동자들이 기업주와 체결한 계약은 그 자체가 자유라고 우리에게 설명한다. 모든 정당의 정치꾼들은 강력한 국가에 예속된 시민들의 현재 상태를 자유라고 불러야한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애쓴다. 마지막으로 도덕론자들은, 심지어 밀과 그의 무수히 많은 추종자들처럼 가장 철저한 자들조차도 자유의 개념을, 모든 타인들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로 정의한다. 어렴풋한 먼 옛날부터 전해진 ‘권리’라는 단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너무 많은 것을 말한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밀의 정의는 철학자 스펜서, 많은 저술가들 그리고, 예를 들어, 심지어 터커(B.Tucker)와 같은 몇몇 개인주의 아나키스트들이 재판, 형벌, 심지어 사형을 포함하여, 국가의 모든 권리를 정당화하고 부활시키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처음에 온 힘을 다해 반대하던 국가 자체를 사실상 부활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의지’에 대한 사유도 모든 이런 논의 아래 숨어있다.

인간의 반半 무의식적 행위는 젖혀두고, 우리 뇌의 일정한 판단을 요구하는 의식적 행위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자. 법, 종교와 형벌 시스템은 바로 이 의식적 행위에 영향을 행사하려 애쓴다. “나는 산책을 간다.”고 우리 생각은 말한다. “아니야, 난 친구와 약속이 있어.”라고 다른 생각이 말한다. 혹은 “난 일을 끝내기로 약속했어.” 혹은 “아내와 아이들 혼자서는 지루할 거야.” 혹은 마지막으로, “일하러 가지 않으면 내 자리를 잃어버릴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 마지막 판단에는 벌에 대한 공포가 언급되어 있다. 처음 세 가지 판단은 인간의 개인적인 일과 자신의 사적인 습관 혹은 개인적 기호와 관련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자유상태와 비 자유상태 사이의 모든 차이가 존재한다. “벌을 피하기 위해 특정한 만족을 거부한다.”고 말해야 하는 인간은 부자유한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는 형벌 자체를 폐지하고, 형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아나키즘적 원리 위에 설 수 있으며, 그때 형벌의 공포 그리고 비난의 공포조차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 이상을 추구한다.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정직의 습관으로부터도(예를 들어 자신의 말에 충실한 습관으로부터), 자신의 기호로부터도(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기 원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아픔이나 고통을 주지 않으려는 소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로빈슨조차도 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가 통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고, 채소를 재배하거나 월동을 대비해 식량을 비축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노동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가 늦잠을 자고 굴속에 누워 뒹굴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그는 잠시 망설이다 이미 시작한 일을 하기 위해 나간다. 그에게 친구가 생긴 순간부터, 개 혹은 염소 몇 마리, 특히 그가 프라이데이를 만난 다음부터 그는 이미, 자유란 단어가 열띤 토론에서, 때로 공공집회에서 사용되는 의미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게 되었다.

그는 이미 의무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미 타인의 이해를 배려해야 했으며, 그는 - 아나키에 대한 논쟁에서 사람들이 우리 앞에 놀라울 정도로 모순되게 묘사하곤 하는 - 그런 ‘완전한 개인주의자’가 아니었다. 로빈슨에게 아내와 아이들이 생긴다면 아이는 누가 양육할 것인가, 그 자신인가 아니면 사회인가라는 문제 때문에 그에게는 또 다른 의무가 발생할 것이다. 그에게 가축과 채소밭이라도 생기면, 그 순간부터 이미 그는 더 이상 - 가끔 자유로운 인간 유형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인 - ‘아무 것도 알기 싫어’, ‘이기주의자’, ‘개인주의자’ 그리고 이것들과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다. 로빈슨의 섬에도, 어떤 사회에서도, 그 사회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런 자유로운 게으름뱅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들의 이해를 언제나 고려했고 언제나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더욱더 긴밀한 상호관계가 수립됨에 따라, 이 타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소망과 감정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고 그것의 충족을 주장함에 따라, 인간은 그들의 이해를 더 고려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 외에 어떤 다른 정의도 내릴 수 없다.

친구의 비난을 제외한다면, 자유는 사회적 형벌의 두려움을, 신체적 혹은 기아의 공포에서 비롯된 형벌 혹은 비난에 대한 두려움을 자기 행위의 판단에 개입시키지 않고 행동할 가능성이다.

자유에 대한 이보다 더 넓고 동시에 구체적인(실질적인) 다른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런 의미로 자유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는 모든 개인적 자유를 축소하고 심지어 말살할 수도 있음을 물론 인정해야 한다.(많은 사회에서 그렇게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또한 이 자유를 최대로 확대할 수 있고, 이런 조건에서만 즉 개인적 자유가 확대될 때에만 공산주의는 인간사회에서 견고해질 수 있다.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갖고 공산주의에 접근하는가에 달려있다. 공산주의적 공동생활 형식 자체는 절대로 개인의 종속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일정한 공동생활 형식 속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크고 작은 공간은 여러 사회제도에 도입된 개인적 자유의 필수성에 대한 관점에 의해 정의된다. 단 이 개인이 종속적인, 피라미드적인 형식에 놓여있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

앞에서 언급한 사항은 모든 형식의 사회적 혹은 공동생활과 관련해서 정당성을 갖는다. 두 사람이 한 방으로 이사하면, 그들의 공동생활은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종속 혹은 둘 사이에 평등과 자유의 관계 수립이라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둘이서 채소밭을 일구거나 신문을 발행하는 경우에도 같은 일이 생길 것이다. 서로 다른 조합들 그리고 모든 형태의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10, 11, 12세기에, 그 시대의 여러 도시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창조되었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후, 바로 이들 공동체에서, 교회와 로마법의 가르침을 받아 사람들은 독재를 요구하였다. 도시의 재판제도, 작업장의 건설 등등은 전과 같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여러 도시에는 로마법, 교황청, 국가의 권리와 같은 개념들이 발전되었고, 그러자 중재재판소, 자유로운 계약, 개인적 자기주도와 같은 기본 개념들은 사라졌다. 이 결과 17세기, 18세기 중반의 중부 유럽에서 노예적 굴종이 발생하였다.

더 주의 깊게 고찰하면, 오늘날까지 시험해본 사회조직과 제도들 중에서 공산주의가 어떤 것들보다 개인의 자유를 더 많이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은 - 단 자유, 아나키가 공동체의 기본 이념이 되는 경우에 -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완전한 자유에서 시작하여 모든 사람의 완전한 노예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식을 포함한다. 반면에 사회적 삶의 다른 형식들은 치우침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 즉 그것들 중 일부, 즉 시민적 평등과 재산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형식들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다른 사람의 노예로 만든다. 공산주의는 모든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의 의지에 무조건 복종하는 수도원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자유로운 조합의 형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 조합에서 각각의 구성원은 완전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구성원들이 그것을 원하고, 강요하지 않아도, 각자의 자유를 수호하고 모든 방향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한, 그때까지 조합은 존재한다.

물론 공산주의는 위계적이고 강제적일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경우 공동체는 곧 붕괴될 것이다. 혹 공산주의는 아나키즘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농노제도 혹은 집산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국가는 숙명적으로 강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 국가는 국가이기를 중단할 것이다.

어떤 다른 공동생활 형식보다 뛰어난 공산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 그것은 명백히 공산주의가 - 반대급부로 하루에 10 혹은 9 혹은 심지어 8시간 대신에 4 혹은 5시간 이하의 노동만을 요구하면서도 - 사회 구성원 각각에게 복지와 심지어 사치품에 대한 욕구의 충족까지도 완전하게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적인 삶이 진행되는 하루 16시간 중에서(나머지 8시간은 취침을 위해 필요하다.) 각자에게 10 혹은 11시간을 여가로 제공한다는 것은 이미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이상으로 여겼던 수준으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의 강력한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이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쉽게 매일 10시간의 여가를 갖고, 이와 함께 복지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런 여가는 지금 부르주아 체제에 존재하는 가장 어려운 노동 중 하나로부터의 해방을 가능하게 한다. 여가 그 자체가 개인적 자유의 광범위한 확대를 위한 구성요소가 된다.

그 다음에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여기는 것,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단절하는 것, 이것은 다시 개인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게 한다. 어떤 다른 공동생활 형식도 이 정도의 개인의 자유를 가능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을 성취하는 것은 첫발자국을 내딛을 때에만, 즉 사회구성원 각자의 생존이 보장되고, 어느 누구도 - 사적인 쉬운 돈벌이를 위해 노동력을 이용하려는 - 주인에게 노동력과 지혜를 팔도록 강요당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사회의 계속적인 발전과 진보를 위한 첫 토대는 직업의 다양성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은 다시 개인의 자유 확대를 가능하게 한다. 사회의 구성원 각자가 여가 시간에 과학, 예술, 창작, 사회활동, 발명의 영역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면, 노동 시간에 여러 생산 분과에서 일할 수 있고, 교육 자체가 이런 목적에 따라 실시된다면, 더 큰 자유가 확보될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 앞에 개인 능력을 모든 방향으로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과학, 예술, 창작, 발명 등과 같이 전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영역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다.

개인의 자유가 각각의 공동체 혹은 공동체 연합에서 어느 정도 실현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공동체의 토대 위에서 취하는 관점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큰 규모의 종교공동체를 알고 있는데, 그곳의 구성원들은 내적 감정상태의 표현조차 금지되었다. 불행 때문에 고통이 얼굴에 표현되는 경우, ‘형제들’ 중 하나가 즉시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형제여, 슬픈가? 그래도 즐거운 얼굴 표정을 짓도록 하게. 그렇지 않으면 다른 형제와 자매들에게 아픔을 주게 되니까.”또 우리는 9명으로 구성된 영국 공동체 하나를 알고 있는데, 구성원 중의 하나가 1명의 대표와 4개의 위원회를 - 그것은 원예, 식량, 가사, 판매 위원회이며, 위원회의 장은 전권을 갖는다. - 정할 것을 요구하였다.(사회주의자들 사이에도 코치카레프들[7]이 번식하고 있다.) 물론 ‘권력을 추구하는 범죄적 광신자(롬브르조[C.Lombroso] 박사에게 추천할만한 특수한 유형)’들이 설립했거나, 그들로 넘쳐나는 공동체들도 있다. 적지 않은 공동체들이 “사회가 개인을 삼킨다.”는 광신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그런 광신자들을 생산하지 않았다. 그들을 만들어낸 것은 기본원리가 극도로 위계적인 기독교와 로마법, 즉 국가와 국가이론이었다. 국가주의적 관점을 갖는 어떤 공동체도 회초리와 도끼로 무장한 재판관과 권력기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그것과 단절하지 않는 한, 그 관점은 실제로 공산주의에 위협과 장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기본원리는 결코 권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 우리 중 각자가 무엇을 생산하고 요구하는가를 계산하지 않고 - 생산과 삶 모두에 필요한 것을 사회가 모두 소유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좋다는 단순한 주장이다. 이 기본 개념은 노예화가 아니라, 해방과 자유를 지향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금까지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코뮌에서는 단순히 생산과 소비의 경제적 수단만을 생각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실험은 대부분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실험은 사회로부터, 사회적 삶과 투쟁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실험은 연합을 이루는 대신에 개별적이었다. 즉 공동체들은 지나치게 작았다.

실험은 - 여가를 전혀 제공하지 못할 정도로 - 많은 양의 노동을 구성원들에게 요구하였고, 구성원들을 완전히 삼켜버리려 하였다.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기본 목표로 삼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험은 가부장적, 종속적 가족 모델에 기초를 두었다.

공산주의는 경제 제도다. 그러한 것으로서 공산주의는 공동체의 개인에게, 개인의 자기주도에 그리고 과거에 확립된 관습을 일정하고 화석화된 형태로 영원히 유지하려 할 때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 저항에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락할 것인지를 결코 미리 말해주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종속적인 것이 될 수 있고 그러한 경우에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붕괴된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자유로운 것이 될 수 있고, 그러한 경우에 - 12세기 도시들의 불완전한 공산주의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 유럽을 갱생시키는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삶의 탄생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두 형태의 공산주의 즉 자유로운 공산주의와 종속적인 공산주의 중에서 전자만이 진보와 삶의 자질을 갖고 있으며, 모든 가능한 방향으로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에, - 여가 덕분에, 복지를 보장할 가능성 덕분에 확대된, 시간이 줄어든 자유로운 노동 덕분에 확대된 - 개인의 자유는, 도시가스 혹은 도시수도의 공급 때문에 혹은 현대의 호텔 때문에 그리고 지금 수천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노동 시간 중에 당하는 강요 때문에 겪는 것보다, 결코 더 어려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나키를 목적과 수단으로 갖는다면, 공산주의는 가능할 것이다. 반면에 이 목적과 수단이 없을 때 공산주의는 개인의 노예화를 시도하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역주 - 현실적 개혁주의자(possibilist), 1880-20세기 초에 있었던 프랑스 노동운동의 한 흐름으로, 이 운동의 지도자는 폴 브루스(Paul Brousse, 1844-1912)였다.

[2] 역주 - 미터법 이전 러시아에서 사용된 지적단위. 1,092헥타르에 해당한다.

[3] 이 글을 쓴 이후에 나는 미국을 다녀왔다. 부유한 대학생들을 위한 화려하고 큰 식당뿐만 아니라, 훨씬 가난한 대학생들을 위한 아주 값싼 - 더 크지만 덜 예술적인 건물 - 식당이 보스턴 근처의 캠브리지에 세워졌다. 많은 학생들이 식대를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고용하여 식사시간에 식당에서 일을 시킨다.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대학생들은 아주 기꺼이 이 일을 한다. 그들은 이렇게 식대를 돈이 아니라, 정해진 기준에 따라 노동으로 지불한다. 이런 식당들이 자신들의 농장을 운영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예를 들면, 보스턴은 농산품과 과일의 큰 산지이고, 메사추세츠 주의 - 현금 유통을 위해 중요한 - 과일과 채소 생산 중심지다.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해 언급했고, 그런 생각은 공감을 얻었다. 아마 학교 농장들은 빠르게 정착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대학들도 농장을 운영한다.

[4] 역주 - 두호보르(Духоборы, Doukhobors)파. 성령부정파聖靈否定派, 영투사파靈鬪士派, 영성파靈性派라고도 한다. 두호보르의 의미는 ‘영혼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다. 17-18세기에 러시아에서 시작되었으며, 환생을 인정하고 예수의 신성과 교회설립을 부정했다. 세속적 권위를 부정하여 납세, 병역 역시 거부하였으며, 때문에 러시아 제국 시절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해 탄압받았다. 오늘날에도 러시아, 조지아, 캐나다 등지에 존재한다.

[5] 역주 - 일 드 프랑스(Île-de-France). 프랑스 26개 행정구역 중 하나로, 현재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가 위치해 있다.

[6] 역주 - 1871년의 파리 코뮌을 의미한다.

[7] 역주 - 코치카레프는 러시아 작가 고골의 희곡 『결혼』에 등장하는 관리다. 그는 결혼을 망설이는 친구를 설득하기 위해, 결혼하면 아이들을 낳아 키워 많은 관리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좋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