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은 어떻게 국가기관―때로는 물리적인 힘, 폭력, 전쟁에 종사하는 국가와 어떻게 관계 맺기를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국가가, 심지어 전쟁 중인 국가라도 하느님의 승인을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평화로운 하느님 나라와 일치하지 않는 국가의 행위에 저항함으로써 그들의 시민권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하는가? 이것들은 정치신학 부문의 핵심을 찌르는 큰 질문들이며, 새로 발간된 책은 그 신자-국가 관계에 대해 급진적인 접근법을 고려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 : 복음에 관한 정치적 해석Christian Anarchism: A Poli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에서 알렉상드르 크리스토야노풀로스(Alexandre Christoyannopoulos)는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이 독특한 정치신학이자 독특한 정치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이 「Will&Testament」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이 충실한 그리스도교 제자직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그가 믿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의 배후에 있는 기본 사상은, 정치에 관해서라면 “아나키즘”은 “그리스도교”를 뒤따르는(혹은 뒤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나키즘”은, 예를 들면 국가에 대한 고발(국가를 통해 우리는 폭력적이기도 하고, 우상숭배를 저지르는 등의 일을 하기 때문에), 국가 없는 사회의 구상, 그리고/또는 포괄적이며 상향식인 공동체 생활을 성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가 그것을 해석하는 것처럼 매우 합리주의적인 방식으로나, 천주교Catholic의 틀을 통해 도로시 데이(Dorothy Day)가 접근하는 것처럼이나, 자크 엘륄(Jacques Ellul), 버나드 엘러(Vernard Marion Eller), 데이브 앤드류(David Frank Andrews), 마이클 엘리엇(Michael C. Elliott) 같은 이들의 다양한 개혁교단의 눈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를 해석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에도 많은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은, 제대로 이해하자면, 예수가 정치적 영역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아나키즘이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9/11 이후 지난 10년간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 정치행동의 예시가 있었는가?


그렇다, 많다―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 웹사이트(이곳[1], 이곳[2], 이곳[3], 또 이곳[4])의 어떠한 리서치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시민적 자유civil liberties에 대한 국내 제약에 이르기까지 “테러와의 전쟁”의 여러 각도를 규탄하기 위해 공공 “전례liturgies”를 행하고 직접행동에 나서며 광범위한 연합에 동참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섀넌 공항을 지나가는 미군 전투기를 “보습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DSEI(Defence and Security Equipment International) 방산전시회 바깥에 피를 쏟아 붓고, 노스우드Northwood와 파슬레인Faslane을 봉쇄하고, 다우닝 가Downing Street 외곽에서 전쟁 희생자들의 이름을 낭독했으며, 국방부를 “엑소시즘” 했고, 위키 내부 고발자 브래들리 매닝(Bradley Manning)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금융위기의 기원과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반응의 결과를 규탄하는 데 똑같이 종사해왔으며, 악화되고 있는 지구 환경 재앙, 일부가 제국의 중심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죽는 비극을 계속 겪고 있고, 때로는 추방당하고, 매 맞고, 감금당하고, 죽임 당하는 일,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것을 끈질기게 낳고, 진정으로 개혁하기 매우 어려워 보이는 세계화된 정치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은 막대한 개인적 비용을 치르며 행해졌다―주류 언론들이 광고를 퍼붓고 다른 곳들을 찾느라 바쁜 반면,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때로는 감옥에 갇히거나 벌금을 냈다.



예수는 아나키스트였는가?


그렇다, 나는 여러 면에서 그가 그러했다는 좋은 예시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국가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것은 맨 처음부터 그렇게 이해되었고, 그 때문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 점을 시사하는 신약성서의 구절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요 구절만을 언급할 수 있을 듯하다(나는 내 책에서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들이 논평한 모든 것들을 다루려고 노력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산상설교임에 틀림없는데, 그 내용의 대부분은 예수, 야고보, 베드로, 바울로의 용서, 우리의 적을 사랑하고 서로를 판단하지 말라는 내용이 많은 구절에서 반복되고 있다―국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또는 오히려 우리가 국가를 통해 그렇게 하지 않고),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국가는 어쨌든 대부분 쓸모없어질 것이다. 사막에서의 세 가지 유혹도 있는데, 이는 국가 우상숭배에 대한 매우 명백한 비난이다. 또는 예수의 직접행동이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비난하고 있음을 분명히 암시하는 성전 정화(그리고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는 그 행동이 비폭력적이었다고 주장한다)가 있다. 그리고 신법神法 적용에 있어서 위선자로서의 바리사이파에 대한 모든 쓰라린 비판, 오늘날 일부 교회 당국에 그리 적용하기 어려운 것 같지 않은 비판들이 있다. 예수의 체포와 재판은 또한 정치 당국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십자가형은 국가폭력에 대한 그의 비난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용서의 대안을 모두 구현하고 있다. 또한 사도행전, 많은 서간, 묵시록도 있다―이 모든 것들에서 설득력 있는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의 해석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약성서의 꽤 많은 구절에 따르면, 예수의 가르침과 본보기는 넓게 정의된 아나키즘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신약성서는 신자들에게 시민적 권위를 존중하고 신이 권위를 부여한 세속적 정부를 존중하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의 해석에 반하여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로 가장 많이 제기되는 두 구절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과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는” 구절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모두 충분한 깊이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들이 제시한 이러한 것들에 대한 설명을 암시하는 것은, 전자에 관해서 바울로(어쨌든 항상 그의 당대의 권위에 엄격하게 복종하지 않은)는 실제로는 산상설교에 대한 해석, 심지어 가장 최악의 적들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예수의 부름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그저 그가 십자가에 복종했던 것처럼.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은 권위를 정당화하지 않고, 폭력적인 저항이 아니라 끈기 있게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모범적인 태도로 그들의 악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쪽 뺨을 돌리는 방법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는” 것에 대해서는, 동전들은 카이사르의 것이지만 그 외에는 “카이사르에게 속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것이 아닌 하느님에게 속한 것에는 생명을 포함해, 실제로는 동전이나 공공 기념물 이외의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는 우리에게 법적으로는 카이사르의 것인 변하기 쉬운 것과 정말로 중요한 것을 명확히 구별하도록 부르고 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이 구절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너무나 간략한 요약에 불과하지만, 나는 단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의 해석에 대한 조언을 할 뿐이다.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는 늘 평화주의자인가


대체로 그렇다. 많은 경우 그들의 아나키즘은 타협하지 않는 평화주의로부터 정확히 유래한다. 그들은 확실히 전쟁 및 다른 형태의 정치적 폭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위축되거나, 폭력이 반대 없이 만연하도록 내버려둔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들은 독창적으로 그러한 폭력의 가면을 벗기고 비난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이며, 그리고 흔히 정치적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행동에 참여하고, 전쟁에서 죽임당한 이들을 위한 철야기도를 조직하고, 난민들에게 음식과 피난처를 제공하는 등등의 일을 한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낡은 껍데기 안에 새로운 (평화주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한다.”[5] 따라서 그들은 평화주의자들이지만, 이것이 불의나 악에 대항하는 활동에 있어서 그들을 비非평화주의자 못지않게 “활동적이고” 용감하게 만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의 비판이 있다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의 비판도 있는가


그렇다―가끔은 매우 쓰라린 것들이었다. 우선, 그들은 예수가 추종자들에게 분명히 요구하는 것이 실제로는 비현실적이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세를 위한 것이라고 그리스도인들을 안심시키는 교회의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다(마치, 만약 그런 경우라면 그러한 요구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에게 있어 예수의 급진적인 정치적 요구가, 보다 확립되고 보다 제도화됨에 따라 거의 모든 공식 교회와 그 신학자들에 의해 배신당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는 종종 정치적 보호를 위한 대가이거나 적어도 그들의 박해를 끝내기 위한 대가였지만,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그러한 박해를 예상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맞다, 예수의 급진적인 요구를 배신한 것에 대한 점에서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는 늘 교회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비평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톨스토이처럼 그들 사이에서도 교권 개입에 더 반대하는 이들은 교회가 인간의 이성을 죽이고, 산상설교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식儀式과 신앙으로 군중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과 같이 직접적으로, 또는 비인간화된 악과 싸우기 위해 불가피한 최근의 전쟁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몇 세기나 걸쳐 교회가 공포를 불러일으키도록 저지른 것들 중 몇 가지를 명시적으로 비판했다. 이들 모두가 교회와 국가의 오랜 로맨스 관계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교회”가 그들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의지적인(자진해서 세례를 통해, 또 오직 회개에 의해서만 결합되는) 공동체,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현대의 동시대 권위들에 위협적일 수밖에 없는 공동체, 혹은 매우 어두운 세상을 밝힐 사랑, 보살핌, 정의의 급진적으로 다른 공동체라는 점을 지적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들이 그러하다고 말할 수 없다. 급진적 활동가들과 분파들이 수 세기에 걸쳐 생겨났지만[성 프란시스(St. Francis), 디거스Diggers, 퀘이커Quaker, 재세례파Anabaptist, 메노나이트Mennonite, 혹은 더 최근으로는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사상] 그들이 다수가 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에 의해 퍼지는 비판들에 취약할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라고 묘사할 것인가


나는 그런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는 예수의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을 증거하고, 체포와 박해를 감수하고, 청빈 속에 살며 제도적 폭력, 경제적 착취와 탐욕스러운 소비자운동을 영속시키는 세계적인 정치 및 경제기계에 기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많은 경우 엄청난 개인적 희생을 치렀다. 그들은 불의에 대응하는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의 방식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 고무되어 있으며, 내 견해로는 그들 중 많은 수가 당연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그는 비폭력이 톨스토이의 주요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 서적을 읽은 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인정한다)와 비견될 수 있다. 나는 그만큼 영웅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나는 나의 기여를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에 대한 학문적 토론과 연구를 위한 공간을 가리키고 제공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분명히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에 상당히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은 믿음만큼이나 삶의 방식이며, 나는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스트라는 라벨을 붙일 명예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1] https://www.catholicworker.org/

[2] https://www.londoncatholicworker.org/

[3] http://www.apinchofsalt.org/

[4] https://www.jesusradicals.com/

[5] 세계산업노동자연맹[the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I.W.W.)]의 규약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를 뜻하는 표어-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