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린
알려지지 않은 혁명 1917~1921
제 1권: 혁명의 탄생, 성장, 그리고 승리
루돌프 로커, 〈볼린(Voline, 1882–1945)〉
제2부. 압제, 폭력, 실패; 발전의 지속(1825~1855)
제3부. 개혁; 혁명의 재개; “차리즘의 실패”와 혁명의 실패; 반동(1855~1881)
제4부. 세기말; 마르크스주의; 급격한 진보; 반동(1881~1900)
사전노트
이 작품은 『알려지지 않은 혁명, 1917~1921 La Revolution Inconnue, 1917–1921』의 완역본으로, 1947년 프랑스어로 처음 출판되었으며, 1969년 《Editions Pierre Belfond》가 파리에서 다시 출판했다. 이 작품의 2권짜리 영역 요약본은 1954년과 1955년 《the Libertarian Book Club》(New York City)과 《Freedom Press》(London)에 의해 출판되었다. 현재 판본에는 이전 판본[할리 캔틴(Holley Cantine) 역]에 포함된 모든 자료와 생략된 섹션[제1권 1, 2장, 이후 프레디 펄먼(Fredy Perlman) 역본에서 누락된 간략한 부분]이 수록되어 있다. 새로 번역된 섹션에는 러시아어 단어가 영어로 음역되어 있다. 하지만 이전 판본에서 전재된 섹션에는 러시아어의 프랑스어 번역이 영어로 중역된 경우가 빈번히 유지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판본에서 러시아어 단어가 두 가지 철자법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루돌프 로커, 〈볼린(Voline, 1882–1945)〉
프세볼로트 미하일로비치 예이헨바움(Vsevolod Mikhailovich Eichenbaum)은 1882년 8월 11일, 러시아 제국 보로네시Voronezh 지역에서 태어났다. 내가 아는 한 그의 글들 중 오직 한 권, 러시아 시의 작은 시집 하나만이 그의 본명으로 출판되었고, 다른 모든 것들, 확실히 그의 여러 글들과 수필들은 그의 필명으로 서명되었다. 그를 볼린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그의 부모는 모두 의사였으며, 그들의 자녀들을 조기교육하기 위해 프랑스인, 독일인 가정교사를 고용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한 환경에서 살았다. 때문에 프세볼로트와 그의 형제 보리스(Boris)는 어려서부터 두 언어에 익숙해질 기회가 있었다. 볼린은 모국어인 러시아어만큼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 있었다.
그는 첫 보통교육을 보로네시의 한 대학에서 받았다. 그곳에서 학업을 마친 뒤, 그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미래를 위한 모든 계획은 그 당시 러시아에서 발생한 중대한 상황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볼린은 19세 때 학생 신분으로 혁명적 사상을 알게 되었고, 1901년부터 노동운동에 특히 두각을 드러냈다.
1905년, 러시아 제국 전체가 폭압적인 로마노프(Romanov) 통치를 거의 전복시킬 뻔한 대혁명적 격변의 주문에 휩싸였을 때, 보로네시 출신의 젊은이는 《사회주의혁명당》에 가입하여 그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진압 뒤 그는 수천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었다. 1907년, 차르주의 재판소의 판결은 그를 정치적 망명자로서 러시아의 수많은 장소 중 한 곳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운 좋게도 탈출구를 발견했고, 프랑스로 갔다.
볼린이 사회주의 운동의 여러 정파와 사회문제의 전반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하고 저울질할 수 있는 더 큰 기회를 찾은 것은 파리에서였다. 그는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의 유창한 웅변가인 세바스티앙 포르(Sébastien Faure) 같은 다양한 자유의지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파리에 있는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작은 서클 및 A. A. 카렐린(Apollon Andreevich Karelin)과 그의 그룹, 그리고 다른 러시아 망명자 단체들과 관계를 맺었다. 새로운 환경의 영향으로 볼린은 점차 그의 정치적, 사회적 견해를 변화시켰으며, 그 결과 1911년에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아나키스트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13년, 무력충돌의 위험이 온 유럽에 그림자를 드리우자,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 행동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 활동은 프랑스 정권을 화나게 했고, 1915년, 대륙에서 전선이 확장되고 있을 때 비비아니(Jean Raphaël Adrien René Viviani)-밀레랑(Alexandre Millerand) 정부는 그를 전쟁 동안 강제수용소에 집어넣기로 결정했다. 제때 경고를 받은 그는 일부 프랑스 동지들의 도움으로 보르도Bordeaux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행 화물선의 창고관리인이 되어 프랑스를 떠났다.
뉴욕에서 볼린은 미국-캐나다 내 러시아 노동자 노동조합에 가입했는데, 이 단체는 당시 1만여 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있었으며 프랑스의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C.G.T.)와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활동을 위한 풍부한 영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는 「골로스 트루다Golos Truda」(노동자의 목소리)라는 연방의 주간지 편집진이자 가장 재능 있는 강사 중 한 명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골로스 트루다」의 모든 동료들은 러시아를 향해 출발해 주간지를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최근 조직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프로파간다 연맹Anarcho-Syndicalist Propaganda Union》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러시아에서 「골로스 트루다」 출판 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볼린은 이 연맹에 가입했고 즉시 편집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초기 수 개월 동안 신문은 주간으로 간행되었지만, 1917년 10월 이래 일간지가 되었다.
한편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에 서명해 우크라이나 전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점령군에 넘겨졌다. 이 때문에 볼린은 페트로그라드를 떠나 외국 침략자들과 러시아 내 지지자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향한 자유의지주의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또한 그는 보보로프Bobrov로 가서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가야만 했기에 1915년 이후 만나지 못했던 그의 가족을 방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러시아에서 몇 달 동안 상대적 자유가 이루어지고, 볼셰비키 이외의 다른 사회운동 역시 그들 스스로의 출판물과 공개연설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알릴 기회를 아직 향유하던 때, 볼린은 항상 여러 분야로 바빴다. 그는 처음에는 보로네시에서, 나중에는 하르코프Kharkov에서 소비에트 교육계몽부의 작업에 참여했다. 1918년 가을, 그는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조직 총연맹》 설립을 도왔는데 이는 《나밧Nabat》(경보警報 혹은 경종警鐘이라는 의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강력한 조직이었고, 많은 문헌을 발행했다. 주요 기관이 있던 쿠르스크 외에도 《나밧》은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에서 동일한 명칭으로 지역신문을 발행했다. 볼린은 나밧 사무국과 정기간행물 편집진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쿠르스크에서 열린 그 단체의 총회는 그에게 러시아의 모든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 정파에 받아들여져 그들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할 수 있는 통합적 원칙 선언을 작성하도록 위임했다.
그러나 1919년 봄 소비에트 정부가 아나키스트들 언론을 탄압하고 무장세력을 집단으로 체포하며 박해하기 시작하자 《나밧》의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은 무산되었다. 볼린이 네스토르 마흐노(Nestor Ivanovych Makhno)의 혁명군에 합류한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마흐노는 군대에 토지의 공동소유, 공동체의 자치 및 연방적 연대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계몽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준비하기 위한 특별부서를 두고 있었다. 볼린은 곧 데니킨(Anton Ivanovich Denikin)에 대항하는 모든 군사작전 동안 그 부서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1919년 12월, 군사혁명위원회는 헤트만Hetman 페틀류라(Symon Vasylyovych Petliura)의 요원들의 위험한 프로파간다에 대항하기 위해 그를 크리보이 로크Krivoi-Rog 지역으로 보냈다. 그러나 도중에 장티푸스에 걸려 한 농민의 오두막집에 머물러야만 했다. 한편 데니킨의 군대는 패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 정부와 마흐노의 파르티잔 사이에 새로운 분열이 일어났다. 여전히 심하게 병을 앓고 있던 볼린은 1월 14일 모스크바 정부의 군사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을 전전하게 되었다. 트로츠키(Lev Davidovich Trotsky)는 이미 볼린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는데, 볼린에 따르면 그는 순전히 우연으로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1920년 3월, 그는 모스크바로 끌려가 10월까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 그와 다른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소비에트 연방과 마흐노 군 사이의 조약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볼린은 그 후 하르코프로 돌아와 이전 활동들을 재개하고 레닌 정부와 마흐노 군 대표단 간의 지속적인 협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적 당파들이 맺은 합의는 볼셰비키에 의해 빠르게 깨졌고, 석방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1월에 볼린과 그의 동지 대부분은 다시 체포되어 모스크바의 타간스카야Taganka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에게는 자유의지주의적 견해 외의 어떠한 혐의도 없었다. 하지만 급격하게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그들 모두가 다른 수천 명처럼 숙청되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이 목숨을 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1921년 여름,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Red Trade Union International》은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대표단에는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과의 연합이 실현 가능할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온 스페인, 프랑스 및 다른 나라들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단체 대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타간스카야 교도소에 있는 아나키스트들이 열흘 이상 지속된 단식투쟁에 돌입했을 때 수도에 도착했고, 당국이 왜 그들을 수감했는지를 공개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 대표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듣고 러시아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정부가 단식투쟁을 하던 이들이 러시아를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에 동의한 것은 회의에서 이 사건이 공개적인 스캔들이 된 이후였다. 정치범들이 프롤레타리아의 자랑스러운 붉은 조국에서 추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소비에트 정부는 그 희생자들에게 그들이 고향을 향해 떠날 때 체코슬로바키아 전쟁의 포로들로부터 빼앗은 여권을 제공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독일 슈테틴Stettin 항에 도착한 추방지들은 당국에 실명을 알려주고 볼셰비키가 그들에게 준 여권은 사실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들에게 다행히도 그 당시 독일 전체는 다른 때였다면 많은 것들이 불가능했을 혁명적인 상황의 한 가운데 놓여있었다.
비록 항구위원회는 이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독일 땅에 머물게 할 법적 권한이 없었지만 그들의 곤경을 동정해서 그들의 동료 가운데 두 사람을 베를린으로 보내 그들을 책임질 수 있는 우호적인 조직을 찾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두 대표가 독일 수도에 있는 우리 본부에 나타났을 때, 《독일 자유노동조합the Freie Arbeiter Union Deutschlands》의 위원장 프리츠 카터(Fritz Kater)는 그들과 함께 경찰청장에게 가서 필요한 모든 서류에 서명하여 몇 시간 안에 그룹 전체를 베를린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그들은 1921년 말 도착했다.
그러한 숫자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독일 동지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주택 문제는 그야말로 심각했고 수년 동안 국내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남아 있었기에 새로운 사람들이 살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어려운 과제는 일곱 명의 볼린 가족이 모두 같은 지붕 아래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위원회가 그들을 위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은신처는 난방을 할 수 있는 다락방뿐이었다.
내가 볼린과 그의 동지들을 처음 만난 것은 그때였다. 겨우 마흔한 살이었지만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거의 하얗게 새어있었기 때문에 그는 훨씬 늙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활기찬 몸짓과 민첩한 움직임은 내 첫인상을 빠르게 바로잡아 주었다. 그는 온화한 태도를 지녔으며, 사려 깊고 예의 바르며, 외적 상황이나 개인적인 고난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친절하고 지적인 남자였다. 집중력이 남다른 그는 그의 온 가족이 잠자고 식사하며 그들의 일상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던 바로 그 다락방에서 분명 어렵지 않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사실, 볼린은 베를린에 있는 동안 많은 유익한 일을 했다. 그는 독일어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박해The Persecutions of the Anarchists in Soviet Russia』라는 제목의 귀중한 80페이지 팸플릿을 작성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일에 관해 외부 세계에 대한 최초의 믿을 만하고 문서화 된 정보였다. 그는 또한 표트르 아르시노프(Peter Andreyevich Arshinov)의 책을 번역했다.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사The History of the Makhnovist Movement』(1923년, 베를린, 독일 내 러시아 아나키스트 그룹에 의해 출판됨)가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동시에 러시아어 잡지인 『아나키스트 노동자The Anarchist Worker』를 편집했다. 게다가 그는 독일 자유의지주의 운동을 위해 광범위한 일을 했고, 우리 언론을 위해 강연하고 기사를 썼다.
볼린은 약 2년 동안 베를린에 머물렀고, 이후 세바스티앙 포르로부터 당시 독일보다 훨씬 나은 생활환경이었던 파리에 그의 가족과 함께 정착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포르는 『아나키스트 백과사전Encyclopedic Anarchiste』 준비와 출판에 몰두하고 있었고, 정규 기고자로서 외국어에 익숙한 사람이 필요했다. 이렇게 볼린은 그의 활동의 장을 넓히는 데 도전적이고 열중할 수 있는 분야를 찾게 되었다. 그는 새 백과사전을 위한 다양한 글을 썼는데, 그 중 많은 것들이 여러 언어로 된 특별한 팸플릿으로 출판되었다. 또한 그는 스페인의 《전국 노동연맹Confederacion Nacional del Trabajo》(C.N.T.)의 초청을 받아들여 파리의 프랑스어 정기간행물 『에스파냐 안티파시스트L’Espagne Anti-Fasciste』의 편집자가 되었다.
하지만 비록 프랑스에서의 경제적 행운이 독일에서보다는 특히 더 호의적이었지만, 그는 일련의 불행을 겪게 되었는데 여러 끔찍한 상황 중 최악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얼마 후 그는 파리를 떠나 님스Nîmes로 갔고, 잠시 뒤 다시 마르세유Marseilles에 도착해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렸다.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한 후 그의 지위는 점점 더 위험해졌다. 은신처를 전전하며 그는 끊임없는 비극과 비참함 속에 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파리로 돌아왔는데, 불치의 결핵으로 고통받으며 그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병원에 입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1945년 9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많은 오랜 친구들이 그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 페르 라셰즈Père Lachaise의 오래된 공동묘지에 있는 화장장까지 함께 했다. 그들은 인생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더 나은 세계, 자유와 사회정의라는 위대한 대의를 위해 마지막까지 용맹한 투사로 남았던 불굴의 동지를 잃은 것을 애도했다.
루돌프 로커
뉴욕 크롬폰드에서
1953년 5월
서론 : 몇 가지 필수 사전 노트
1. “러시아혁명”은 세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12월당the Decembrist》의 봉기(1825)부터 현재까지의 혁명운동 전체, 또는 1905과 1917년의 연이은 두 번의 봉기, 혹은 마지막으로 1917년의 대폭발. 이 작품에서 “러시아혁명”은 첫 번째 의미, 혁명운동 전체로 사용된다.
이것이 독자가 소련의 현재 상황뿐만 아니라 사건의 전개와 전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 러시아혁명에 대한 비교적 완전한 역사는 여러 권의 책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역사가들이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의 목적을 지닌, 보다 한정된 프로젝트에 관심을 둔다. ⒜ 운동 전체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는 것. ⒝ 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것의 본질적 요소들을 강조하는 것. ⒞ 특정한 평가와 결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이는 점점 광범위하며 상세해질 것이다. 독자들은 1905년과 1917년의 격변기를 다루는 부분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세부사항뿐 아니라 이전에 출판되지 않은 많은 문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러시아의 일반적인 발전과 서유럽의 발전 사이의 차이라는 한 가지 사실을 끊임없이 명심해야 한다. 사실 러시아혁명에 대한 설명은 러시아에 대한 완전한 역사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거나, 혹은 더 나은 것은 그러한 연구에 맞추어 넣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우리 주제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필요할 것 같을 때마다 독자들에게 역사적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머리말
모든 혁명은―여러 경향의 많은 저자에 의해, 그리고 다양한 시기에 면밀하게 연구된 경우에도―기본적으로 커다란 미지味知가 오랫동안 남아 있다. 수 세기가 흐르고, 가끔 옛 봉기의 잔해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실과 출판되지 않은 문건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발견들은 완전할 터였던 우리의 지식과 사상을 혼란시킨다. 크로포트킨(Pyotr Alexeyevich Kropotkin)과 조레스(Jean Jaurès)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폐허들로부터 새로운 문건을 발견해 예상치 못했던 빛을 던졌을 때까지,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작품들이 이미 얼마나 많이 존재했던가? 그리고 조레스는 대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기록물들이 거의 드러나지도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대중의 역사를 적는 방법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혁명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작가들은, 비록 경험이 많고 양심적일지라도 독자들이 그들의 주제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오류와 태만을 범한다. 예컨대, 그들은 불타오르는 “혁명의 용광로”에서 펼쳐지는 놀랄 만한 사실들과 현상들을 꼼꼼히 조사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의 깊은 곳, “용광로” 바깥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그러한 발전을 불신하고 무시한다. 또는 기껏해야 그들은 종종 잘못되거나 편파적인 해석과 함께 모호한 증언을 근거로 그들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있다. 그리고 중요하며, 검토 중인 사건과 기간에 빛을 던져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숨겨진 사실들이다.
또한, 혁명 현상에 대한 과학적 열쇠들―경제학, 사회학, 심리학―은 그 초보적 상태로 인해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이 현재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다. 순수한 “르포르타주reportage”의 관점에서도 얼마나 많은 공백이 있는가. 혁명의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속에서, 매 순간 열리고 닫히는 틈새에 휩싸인 수많은 사실이, 어쩌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혁명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어떤 식으로든 폭풍에 휩쓸리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슬프게도, 미래 세대를 위해 그들이 보고, 생각하고, 경험했던 것을 적어두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또 다른 이유가 여전히 존재한다.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메모를 남기는 매우 드문 목격자, 역사가들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편파적이다. 그 모두가 혁명 가운데서 개인적인 논제를 지지하는 요소, 혹은 도그마, 당, 혹은 계급에 도움이 되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찾아 헤맨다. 모두가 자신의 이론에 모순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숨기고 폐기한다. 혁명가들 스스로도 그들의 이론에 따라 나뉘어 이러저러한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없애거나 왜곡하려고 한다.
물론 우리는 그저 가벼운, 당혹스러울 정도로 많은 수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누가 참되고 유일한 진실을 확립하고자 노력할 수 있는가? 아무도 할 수 없다―혹은 사실상 아무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혁명이라는 주제에 관해 어마어마한 양의 설명이 존재하고, 실제 혁명에 대한 근본적인 진실은 알려지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숨겨진 혁명은 다가올 격변의 씨앗을 품고 있다. 의미 있게 삶을 살고 싶거나 사건을 명확하게 이해하려는 사람은 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면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필자인 나의 의무는 이를 탐색하는 이들을 돕는 것이다.
이 글에서 알려지지 않은 혁명은 러시아혁명인데, 정치인과 어용 작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다루어진 혁명이 아니라, 그런 이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교묘히 숨겨지거나 심지어 위조된 혁명이다.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몇 권 훑어보라.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책이 다소 편향된 개인들에 의해, 그리고 교조적인, 정치적인, 심지어 개인적 관점에서 쓰여왔다. 작가가 백군白軍인지 적군赤軍인지, 민주주의자인지 사회주의자인지, 스탈린주의자인지, 트로츠키주의자인지에 따라 모두 다른 모습을 띤다. 사실은 화자의 디자인에 맞춰진다. 당신이 진실을 찾고자 하면 할수록 성공할 수 없다. 1917년 러시아의 역사 작가들은 자기 생각에 맞지 않거나, 흥미가 없거나, 불편할 경우, 가장 중요한 사실들을 침묵 속에서 너무 자주 묵과해 왔다.
1789년과 1917년의 혁명에 의해 근본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남게 되었다. 억압에 거세게 반대하고, 강력한 자유의 숨결에 활기를 띠고, 자유를 그들의 본질적인 목적으로 선언했음에도 이 혁명들은 왜 새로운 지배적이고 특권적인 집단에 의해 행해지는 새로운 독재정권 아래서 혁명에 참여한 대중을 새로운 노예제에 빠트렸을까? 혁명이 이 슬픈 종말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이러한 결말은 오랫동안 역사적 필연이 될 것인가, 아니면 몇몇 요인과 오류와 실패로부터 비롯되었기에 피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앞으로 다가올 혁명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일까? 이를 피하거나 극복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그것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혹은 의도적으로 숨겨져 온—요소들로, 우리 앞에 놓인 문제의 열쇠를 제공하고 그 해결책에 없어서는 안 될 자료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책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의 도움으로 그 문제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이다.
필자는 1905년뿐만 아니라 1917년 러시아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필자는 완전한 객관성을 지니고 1917년의 전복에 관한 입수 가능한 진실한 사실을 조사하고자 한다. 그것이 필자의 유일한 관심사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필자는 결코 다음 페이지를 써 내려가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에 대한 솔직한 설명과 공정한 분석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필자의 이념적 입장에 기인하는 것이다. 1908년 이래 필자는 어떠한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적 신념에 의해 필자는 자유의지주의적 사상에 동조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아나키스트로서 진실을 배반하는 일에 흥미가 없고, 속일 이유도 없으므로 스스로에게 객관적이라는 자찬을 허락할 수 있다. 필자는 권력에도, 높은 지위에도, 특권에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해야 하는 교의에도 관심이 없다. 진실만이 풍요롭기에 필자는 진실을 확립하는 것만을 추구한다. 필자의 열정, 필자의 유일한 야망은 정확한 사실에 비추어 1917년의 사건들을 설명하는 것인데, 그러한 설명만이 정확하고 유용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혁명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은 알려지지 않고, 심지어 예상치도 못한 많은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연구가 언젠가 그 커다란 풍요로움을 정직하고 온전히 독립적으로 탐구하기를 원하고, 탐구할 수 있고, 탐구할 방법을 알고 있는 저자의 작품 옆에 그 겸손한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라며 바친다.
제1장. 첫 번째 결실(1825~1905)
제1부. 19세기 초 러시아; 혁명의 탄생
거대한 규모의 국가, 침략자의 먹잇감이 되기 좋을 만큼 분열된 데다 낮은 인구 밀도, 2세기 이상 이어진 몽골의 지배, 지속적인 전쟁, 다양한 재해, 그리고 다른 불리한 요인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러시아의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낙후를 야기했다.
정치적으로 러시아는 19세기에 거대한 영토와 군사 귀족, 전능하리만치 강력한 관료제, 광범위하고 경건한 성직자, 그리고 7천5백만 농민 대중의 영혼들―원시적이고, 문맹이며, 그들의 “작은 하느님”인 차르 앞에 복종하는―에 의지한 채 절대군주제(독재적인 “차르”) 치하로 들어갔다.
경제적으로 러시아는 일종의 농경 봉건제 단계에 도달했다. 두 수도(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와 남부의 일부 도시들을 제외하고는, 도시들은 거의 발전되지 않았다. 상업, 그리고 특히 산업이 침체되었다. 러시아의 경제 기반은 인구의 95%를 부양하는 농업이었다. 토지는 직접 생산자인 농민들의 것이 아니라 국가나 대규모 지주인 “포메시키pomeshchiki”의 소유였다. 법적으로 토지와 재산 소유자에게 귀속된 농민들은 그들의 농노였다. 가장 큰 소유자들은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진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공로(군사, 행정 및 기타)를 대가로 첫 소유자인 군주로부터 영지를 받았다. 그 “귀족”들은 농노의 삶과 죽음을 결정했다. 귀족은 그들을 노예처럼 일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팔고, 벌을 주고, 순교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귀족은 자신에게 그다지 불편을 초래하는 일 없이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다). 7천5백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살았던 이 농노제가 국가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러한 “사회”의 사회 조직을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상층부에는 절대적인 주인들, 차르와 그의 수많은 친족, 아첨하는 궁정, 고위 귀족, 군사 계급, 고위 성직자가 있었다. 아래에는 노예들, 시민적 생활과 권리, 자유에 대한 모든 개념조차 결여된 시골의 농민 농노들과 도시의 하층민들이 있었다. 둘 사이에는 중간층인 상인, 관료, 공무원, 숙련공 및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데 특별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 사회의 문화적 그리 수준이 높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시기에 대해 유보해야만 한다. 우리가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도시나 시골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빈곤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교육과 훈련을 아주 잘 받은 특권층 사이에 현저한 대조가 존재했다.
대중의 농노제는 러시아의 전염병이었다. 몇몇 고귀한 사람들은 이미 18세기 말부터 이 혐오스러움에 항의해 왔다. 그들은 그들의 너그러운 몸짓에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편 농민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점점 더 자주 반항하기 시작했다. 다소 개별적인 성격의 지역 봉기(너무 심하게 행동하는 귀족들에 대항한) 이외에도 농민 대중은 두 가지 포괄적 운동[17세기 라진(Stepan Timofeyevich Razin) 봉기와 18세기 푸가초프(Yemelyan Ivanovich Pugachev)봉기Pugachev's Rebellion]을 일으켰는데, 이것들은 비록 실패했지만 차르 정부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고, 전반적인 체제를 거의 전복시킬 뻔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자발적인 운동은 주로 귀족 영주, 도시귀족, 그리고 부패한 행정부 등, 눈앞의 적을 겨냥한 것이라는 데 유념해야 한다. 사회 체제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다른 평등한 체제로 대체하려는 일반적 사상은 공식화하지 않았다. 정부는 성직자들과 다른 반동분자들의 도움으로 배신과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어떠한 광범위한 반란 운동도 오랫동안 거의 불가능하게, 심지어는 “심리적으로” 농민들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권에 대항하는 최초의 의식적 혁명운동은 1825년, 계승자가 없던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사망 후 그의 형제 콘스탄틴이 왕관을 거부해 다른 형제 니콜라이(Nicholas I)에게 넘어갔을 때 나타났다. 이 운동은 사회적으로는 농노제의 폐지를 목표로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공화국 또는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위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특권 계급에서 나타났다. 정부가 왕위 계승 문제에 몰두하는 틈을 타 공모자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반란에서 그들은 수도에 있던 일부 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운동의 선두에는 일부 제국 군 장교들이 있었다.) 반란은 반란군과 정부에 충성을 다한 군 측 사이에서 있던 의회 광장에서의 짧은 전투 이후 패배했다. 지방에서 계획되었던 몇 가지 봉기도 미연에 그쳤다.
이 반란은 새로운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철저한 조사를 감독했다. 조사관들은 그 운동과 관련 없고 단순히 사상적으로 공감하는 이들조차 찾아내 색출했다. 탄압은 그것을 “일벌백계”로 만들고자 했기에 철저한 잔혹함으로 계속되었다. 다섯 명의 주요 선동자들은 교수대에서 죽었고, 수백 명이 투옥되거나, 추방되고, 중노동에 처해졌다.
반란이 12월에 일어났기에 참여자들은 《데카브리스트Decembrist》, 《12월 당》 당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거의 모두가 귀족이나 다른 특권계층에 속했다. 거의 모두가 전문적인 훈련이나 고등교육을 받았다. 열린 마음을 지니고 예민했던 그들은 자의적이고 부당한 정권에 의해, 무지, 가난, 노예제도에 의해 짓눌려 있는 사람들을 보며 고통받았다. 그들은 18세기 전임자들의 저항들을 이어 행동으로 옮겼다. 그들에게 필요한 추진력을 준 것은 주로 1812년 전쟁 뒤 그들 중 많은 이가 향했던 프랑스 여정이었는데, 이는 유럽의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과 러시아 사람들의 야만적인 생활조건을 비교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동포를 억압하는 후진적인 정치 및 사회제도에 맞서 싸우기로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들은 교육받은 많은 이들을 그들의 대의에 규합시켰다. 이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페스텔(Pavel Pestel)은 심지어 그의 계획에서 막연한 사회주의적 사상을 정교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저명한 시인인 푸시킨(Alexander Pushkin)(1799년생)은 비록 이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공감했다.
이 반란이 진압되자마자, 겁에 질린 새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의 독재, 관료제, 경찰 통치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다.
한편으로는 압제자에 대한 농민들의 반란과 다른 한편으로는 “작은 하느님 차르”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 사이에 모순이 없다는 점은 강조해 두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 농민 반란은 항상 눈앞의 적인 지주(“포메시키”), 귀족, 공무원, 경찰을 겨냥했다. 농민들은 억압의 원인을 보다 깊이, 귀족과 특권층의 위대한 보호자, 첫 번째이자 가장 높은 특권층이자 고귀한 차르 및 차르 정권 그 자체에서 찾고자 하지 않았다. 농민들에게 차르는 일종의 우상으로, 평범한 인간들보다 훨씬 위대하고, 그들의 사소한 관심사나 결함을 넘어 국가의 위대한 운명을 이끌고 있었다. 당국과 관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성직자(“주교들”)는 이 생각을 농민들의 머리에 새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농민들은 전설을 받아들였고, 나중에는 이것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차르가 단지 그의 “자녀들”의 안녕만을 원하지만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존하는 데 관심이 있는 특권을 지닌 중개인들이 차르와 그의 백성 사이에 서서 차르가 그들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농민 대중은 백성들과 차르가 서로 직접 대면할 수 있다면, 일시적으로 특권층에 의해 현혹된 차르는 진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곁의 나쁜 조언자들과 부정직한 이들을 물리치고 땅을 경작하는 이들의 고통을 해결하리라고 믿었다. 그는 그들을 멍에에서 풀어주고, 올바르게 모든 좋은 땅을 직접 일하는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따라서 때로 가장 잔인한 주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면서도, 농민들은 차르와 그들을 분리한 벽이 무너지고 사회정의가 차르에 의해 다시 확립되는 날을 희망과 순종으로 기다렸다. 그들의 이러한 종교적 신비주의는 그들이 기다리고 고통받는 시간을 신에 의해 부과된 처벌과 시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왔다. 그들은 원시적인 운명론으로 그것에 순종했다.
이러한 전망은 러시아 농민 대중의 매우 특징적인 것이었다. 불만의 증가와 개별 혹은 지역적 반란이 빈번함에도 이는 19세기 동안 훨씬 두드러졌다. 농민들은 인내심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내심을 잃으면 잃을수록, 그들의 “해방자” 차르를 더 열렬히 기다렸다.
이 “차르 신앙”은 19세기 보편적인 러시아인 생활의 핵심적인 특징이었다. 그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뒤따르는 사건들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 전설은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몇몇 현상들을 명확하게 한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러시아의 역설, 아주 많은 유럽인을 놀라게 하고, 1917년의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던 역설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한편에는 교양 있고, 교육받고, 진보되고,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보고 싶어 하고, 시대정신을 알고 있으며, 노동계급의 해방과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해방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몇 가지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반란들을 제외하면), 우상과 꿈 앞에 집요하게 엎드려 있는 사람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의 몸짓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역설을 말이다. 무관심하고, 진실에 눈이 멀고, 모든 호소에 귀를 닫은 이 사람들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던 때와 같이 해방자 차르를 기다렸다.[1]
제2부. 압제, 폭력, 실패; 발전의 지속(1825~1855)
니콜라이 1세의 통치는 1825년부터 1855년까지 계속되었다. 혁명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세월을 특징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 30년 기간은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의 그늘에서 제위에 오른 니콜라이 1세는 자유주의의 어떤 표현도 싹트지 못하게 하기 위해 러시아를 철의 악덕으로 다스리기로 했다. 그는 절대적 통치를 한계까지 강화하고 러시아를 관료적이고 억압적인 국가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혁명과 이후 유럽을 뒤흔든 혁명운동은 그에게 악몽이었다. 그는 비상한 예방책을 강구했다.
모든 사람이 엄중히 감시당했다. 공무원, 경찰, 법원의 자의성에는 더 이상 아무런 한계도 없었다. 어떠한 독립에 대한 표현이든, 경찰의 철권통치를 피하려는 시도는 무자비하게 억압되었다.
당연히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검열은 전례 없이 번창했다.
“법률” 위반은 전부 가장 엄중하게 처벌되었다.
1831년 폴란드 봉기(드문 잔인함으로 피로 물든)와 국제정세는 황제로 하여금 러시아의 군국화를 더욱 강조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삶은 병영 생활처럼 규제되었고, 부과된 규율을 피하려는 이는 누구나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이 군주는 “사나운 니콜라이Nicholas the Fierce”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했다.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혹은 오히려 이 조치들과 함께 맹목적인 황제가 고려하지 않았던 악영향 때문에―그 나라(즉 인구의 특정층)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만을 드러냈다.
귀족 영주들은 그들을 그의 주된 지원자로 여긴 황제를 등에 업어 처벌받지 않고 농노들을 착취하며 끔찍하게 대했다. 농민들은 눈에 띄게 분노하기 시작했다. “포메시키”(영주)와 지방 당국에 대한 반란은 놀랄 만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억압적인 조치들이 그 효과를 잃기 시작했다.
공무원들의 부패, 무능, 변덕은 점점 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차르는 “국민을 규제하기 위해” 공무원들의 지원과 폭력이 필요했기에 아무것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분노는 더욱 격렬해졌을 뿐이다.
그 사회의 생명력은 꺼져갔다. 오직 불합리하고 무력한 공식적 일상만이 허용되었다.
이 상황은 필연적으로 장래의 전체 체제 분해로 이어졌다. 겉보기에만 강력했던 “채찍의 체제”는 내면이 썩어 있었다. 거대한 제국은 이미 “점토 발이 달린 거인”이 되어 가고 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체제에 반대하는 마음이 사회 전체를 감염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지식인층의―급격하고 중요한―웅장한 진화가 시작되었다.
거대하고 출산율이 높은 러시아에서 청년층은 계급을 막론하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일반적인 전망은 어떠했을까?
청년 농민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소 교육을 받은 청년세대가 진보적인 사상을 공언했음을 관찰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의 청년들은 노예제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르 절대왕정은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검열해도 막을 수 없는 서구 세계에 대한 연구(오히려 검열은 금지된 과일의 맛을 불러일으켰다)는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자연과학과 유물론의 등장은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러시아 문학이 인본주의 원칙에서 영감을 얻어 개화하고, 검열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도 같은 시기였다.
동시에, 경제적으로 농노의 노동과 자유의 부재는 더 이상 당시의 절박한 요구에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모든 이유로 지식인, 특히 청년들은 니콜라이 1세의 지배가 끝날 무렵 더 이념적으로 자유로워졌다. 지식인들은 농노제와 절대왕정에 단호히 반대했다.
유명한 니힐리즘Nihilism 조류가 탄생한 것은 이 시기였고, 보수적인 “아버지”와 맹렬히 진보적인 “아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도 생겨났는데, 투르게네프(Ivan Turgenev)가 『아버지들과 아들들Fathers and Sons』에서 훌륭하게 묘사한 것이다.
러시아 밖에서는 75년 전 러시아 문학에서 비롯되었고, 라틴어 어원 때문에 번역되지 않고 다른 언어로 전해진 “니힐리즘”이라는 단어에 넓고 뿌리 깊은 오해들이 뒤따른다.
프랑스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니힐리즘”은 일반적으로 혁명적인 정치적, 사회적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며, 러시아에서 생겨나 수많은 조직적 지지자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니힐리스트 당”과 그 당원은 “니힐리스트”에 대해 말한다.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정확하지 않다.
“니힐리즘”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중반에 유명한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에 의해 문학에 도입되고, 이후 러시아어에 도입되었다. 그의 소설 중 하나에서 투르게네프는 1850년대 말 젊은 러시아 지식인 사이에 나타난―원칙이 아닌―사상의 한 조류를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 용어는 유행해 금세 그 언어의 일부가 되었다.
이 사상 조류는 본질적으로 철학적이며, 대체로 도덕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 영향력이 미치는 분야는 지식인층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늘 제한적이었다. 그것의 입장은 항상 개인적이고 평화주의적인 것이었기에 반란의 정신으로 활기를 띠지 않고 모든 인류를 위한 행복이라는 꿈으로 이끌렸다.
이 조류에 의해 시작된 운동은 (만약 그것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면) 문학과 관습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어떤 다른 형태의 운동도 당시 정권 아래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영역에서 그것은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공식화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의 원칙으로서 개개인에게 적용하고자 했다.
이런 한계 속에서, 그 운동은 러시아 청년들을 매우 광범위하고 진보적인 개념으로 이끌었던 지적, 도덕적인 발전을 위한 길을 닦았다. 그중 한 가지 결과는 교육받은 여성의 해방으로, 19세기 후반 러시아가 당연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성과였다.
그것의 엄격하게 철학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 지적 조류는 인본주의적이고 해방적인 정신 덕분에 정치적인, 또한 사회적인 진정한 혁명운동을 불러일으킨 이후의 사회 개념의 싹을 운반했다. “니힐리즘”은 후에 유럽의 사상적 자극과 내외적 요인으로 발생할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러시아 바깥에서 “니힐리즘적” 조류는 일반적으로 행동 계획과 구체적 목표를 지닌 정당이나 조직된 집단에 의해 주도된 이후의 운동과 혼동된다. 하지만 “니힐리즘적”이라는 용어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이 운동의 전조가 된 사상의 조류일 뿐이다.
철학적인 개념으로서, 니힐리즘은 유물론과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가장 넓은, 심지어는 과장된 의미로까지 이해되었다.
뷔히너(Georg Büchner)(독일 유물론 철학자, 1824~1899)의 유명한 작품인 『힘과 물질Kraft und Stoff』은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비밀리에 인쇄되었고, 위험에도 불구하고 수천 부의 복사본이 배포되었다. 이 책은 당시 러시아 청년 지식인층의 성서가 되었다. 몰레스코트(Jacob Moleschott),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그리고 많은 유물론자 및 박물학자 작가들의 작품들 또한 큰 영향력을 끼쳤다.
유물론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유물론자로서 니힐리스트들은 종교나 순수이성이나 확실한 증거를 벗어나는 모든 것, 물질적 실재를 벗어나거나 실용적 용도가 없는 가치를 넘어선 모든 것에 대해서―간단히 말해서 영적, 감상적, 이상주의적인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미학, 아름다움, 편안함, 영적 즐거움, 감정적인 사랑, 패션, 쾌락에 대한 욕망을 경멸했다. 그들은 관념론의 현시인 예술을 완전히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위대한 사상가였던 뛰어난 시사평론가 피사레프(Pisarev Dmitrii Ivanovich)는 젊은 나이에 사고로 사망했는데, 노동자와 예술가 사이를 설명하는 그의 유명한 비교를 공식화했다. 피사레프는 노동자는 유용한 물질적 대상을 생산하지만 예술가의 그림은 아무런 용도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서투른 장인이라도 라파엘로보다도 무한히 존경할 만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에서 피사레프는 위대한 시인 푸시킨을 물리치기 위해 유물론과 실용주의의 원칙을 열렬히 적용했다. 투르게네프의 소설에 등장하는 니힐리스트 바자로프는 “자연은 신전이 아니라 실험실이며, 인간은 노동하기 위해 그 안에 있다”고 말한다.
니힐리스트가 벌이는 “무자비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문학적이고 언어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니힐리즘의 활동은 학술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그 사상의 베일에 싸인 선전에 한정되었다. “외국의 이단”과 모든 독립적인 사상을 억압했던 차리스트 경찰과, 마찬가지로 검열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 프로파간다를 넓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니힐리즘의 “외적인” 모습은 주로 매우 소박하게 옷을 입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니힐리스트 여성들은 대체로 짧은 머리를 하고, 종종 그들 자신을 못생기게 만들기 위해 안경을 씀으로써 아름다움과 유행을 좇는 것에 대한 경멸을 강조했으며, 패션을 반항하기 위해 거친 옷을 입고, 성 평등을 선언하며 관습적 규칙에 대한 경멸을 보이기 위해 남자처럼 걸으며 담배를 피웠다. 이러한 과도한 행동들은 그 운동의 진지함을 전혀 감소시키지 않았다. 다른 형태의 “표면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었고, 대체로 그들을 정당화 해주었다. 개인 도덕의 영역에서 니힐리스트들은 절대적 엄격함을 실천했다.
그러나 니힐리즘의 주요 이론은 특정한 개인주의의 한 형태였다.
처음에는 당시 러시아가 억압한 모든 것에 대한 매우 자연스러운 반동이었던 이 개인주의는 결국 절대적인 개인의 자유, 모든 제약, 의무, 장애, 그리고 사회에 의해 인간에게 부과된 모든 전통인 가족, 관습, 도덕, 신앙, 인습에의 고발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개인의 독립이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개인의 완전한 해방. 이것이야말로 니힐리즘의 기본적인 개념이었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와 개인의 인생의 불가침성에 대한 개인의 신성한 권리를 옹호했다.
독자들은 왜 이러한 사상적 조류를 니힐리즘이라고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용어는 가족, 사회, 종교, 전통 등 타인에게 자연스럽고 신성한 것을 아무것도(라틴어로, nihil) 받아들이지 않는 이데올로기 당파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누군가 그런 이에게 “당신은 무엇을 인정하는가, 당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당신은 무엇을 승인하며 그것이 당신을 통제할 권리와 의무마저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Nihil)라고 대답한다면 그가 니힐리스트다.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철학적인 성격(그것은 지배적인 전제정치에 대항하기 보다는 추상적인 방법으로 개인의 자유를 옹호했다)에도 불구하고, 니힐리즘은 구체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해방을 위해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장애물에 대항해 구체적인 투쟁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이 투쟁을 떠맡지는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개인을 실제로 해방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것은 순전히 이념적 논의와 도덕적 성취의 영역에 머물렀다. 또 다른 질문인 해방을 위한 직접 행동에 대한 질문은 다음 세대인 1870년과 1880년 사이 기간에 의해 제기되었다. 러시아에서 최초의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단체들이 결성된 것이 그때였다. 행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니힐리즘”과 공통점이 없었다. 심지어 그 단어조차 폐기되었다. 그것은 1860~1870년의 지적 운동의 유물이자 기념품으로서 순전히 역사적인 용어로 러시아어에 남아 있었다.
외국 사람들이 “니힐리즘”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해 “볼셰비즘” 이전의 러시아 혁명 운동 전체를 가리키며 “니힐리스트 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 운동의 실제 역사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1세의 터무니없이 반동적인 정부는 실제 상황이나 지적인 동요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그것은 그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비밀 정치경찰(잘 알려진 오흐라나Okhrana : “Security”)과 특수 경찰단을 창설함으로써 사회에 저항했다.
정치적 박해는 진정한 재앙이 되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젊은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가 페트라솁스키(Mikhail Vasilyevich Butashevich-Petrashevsky)에 의해 영감을 받은 완전히 무해한 연구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거의 사형에 처할 뻔한 것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최초의 위대한 러시아 비평가이자 시사평론가인 벨린스키(Vissarion Belinsky)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또 다른 위대한 시사평론가인 게르첸(Aleksandr Ivanovich Herzen)은 강제로 국외 거주자가 되었다. 바쿠닌(Mikhail Alexandrovich Bakunin)과 같은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혁명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원인이 너무나 뿌리 깊었기에 이 모든 억압은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억압은 상황을 개선하는 데는 더욱 성공하지 못했다. 차르의 해결책은 억압적이고 관료적인 기구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크림전쟁(1854~1855)에 휘말렸다. 이는 대참사였다. 전쟁의 변천은 사실상 정권의 파산과 제국의 진정한 약점을 보여주었다. “점토로 된 발”이 처음으로 무너졌다(당연히 이 교훈은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병폐가 드러났다.
패배한 니콜라이 1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1855년 사망했다. 파산 사실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시할 수 없었던 그는 아마도 정신적 충격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일부는 심지어 그가 음독으로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이 해석은 매우 그럴 듯 하지만 증거는 없다.
우리는 독자가 다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주장해야만 한다.
모든 약점과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 러시아는 상당한 문화적, 기술적 진보를 이루었다.
피할 수 없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국가” 산업이 탄생했고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노동계급을 낳았다. 여러 도시에 큰 공장들이 세워졌다. 항구가 열렸다. 석탄, 철, 금 등의 광산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교통망이 확장되고 개선되었다. 이 거대한 나라의 두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Leningrad)와 모스크바를 잇는 최초의 고속철도가 건설되었다. 이 철도는 두 도시 사이 지역들이 이런 종류의 건설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공학적으로 경이로웠다. 땅은 단단하지 않고 종종 늪과 습지로 이루어져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사이의 거리는 약 600베르스타versta(400마일)였다.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건설의 관점에서 보면 직선 경로에 대한 의문은 있을 수 없다. 건축 계획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보였던 니콜라이 1세(국가가 건설을 실행했다)는 여러 엔지니어에게 견적을 내고 청사진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엔지니어들은 기회에 힘입어 황제에게 수많은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포함한 극히 복잡한 예상 경로를 제출했다. 니콜라이는 이해했다. 그는 청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것들을 옆으로 밀쳐두고 연필과 종이 한 장을 집어 두 점을 그리 직선으로 연결한 다음 말했다. “두 점을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다.” 그것은 공식 명령이었고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엔지니어들은 그것을 실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진정한 위업을 달성했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비용이 투입된 엄청난 작업이자 수천의 노동자에게 지독한 어려움을 야기하는 작업이었다.
완공 이후 “니콜라옙스카야Nikolaevskaya”(니콜라이의) 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철도 중 하나였다. 거의 완벽한 직선으로 정확히 609베르스타(405마일)의 선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흥 노동계급이 그들이 떠나온 시골과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외부”작업이 끝나자마자 돌아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가 본 것 같이 영주의 땅에 묶여있는 농민들은 그곳을 영원히 떠날 수 없었다. 그들이 산업계획에 고용되려면 그 전에 지주들과 특별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했다. 도시의 실질적인 노동자들―이 때는 떠돌이 장인들―은 아주 적은 수의 파견대였다. 따라서 우리는 아직 올바른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프롤레타리아트 탄생에 대한 자극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신뢰할 수 있고 정규적인 육체노동자의 필요성은 농노제 폐지를 요구하는 긴급한 경제적 이유 중 하나였다. 따라서 2, 3세대에 걸쳐 임금노동자 계급, 즉 더 이상 땅에 매여있지 않은 진정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나타날 예정이었다.
문화적인 영역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 부유한 부모들은 자녀들이 교육받고 교양있는 사람이 되기 원했다. 빠르게 증가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수는 정부가 계속해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기관 수를 증가시키도록 압박했다. 경제 및 기술적 수요에 더해 국가의 전반적인 발전 역시 교육 시설을 필요로 했다. 니콜라이 통치 말기에 러시아는 6개의 대학교가 모스크바, 도르파트Dorpat, 하르코프, 카잔Kazan,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Kiev(설립일자 순 기재)에 있었으며, 그에 더해 첨단 기술이나 특수 연구를 위한 여러 학교도 여럿 있었다.
따라서 당시 러시아 전체가 교육받지 못하고 미개하며 거의 “야만”에 가깝다는 널리 퍼진 전설은 거짓이다. 농노제 하의 농민 인구는 정말로 교육받지 못했고 “미개”했다. 그러나 도시 주민들은 순전히 기술적인 일부 영역을 제외하고는 서유럽의 문화적 성취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청년 지식인층은, 어떤 면에서는 다른 유럽 국가의 청년들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었다.
노예화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특권계층의 문화적 수준 간의 이 거대하고 모순적인 격차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다.
제3부. 개혁; 혁명의 재개; “차리즘의 실패”와 혁명의 실패; 반동(1855~1881)
국가와 정권의 난국에 직면해야만 했던 것은 니콜라이 1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였다. 일반적인 불만, 진보적인 지식인층의 압력, 농민 대중의 봉기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 시기의 경제적 필연들은 반동집단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차르가 굴복하고 단호히 개혁의 길로 나아가도록 강요했다. 그는 전적으로 관료주의 체제와 행정관의 절대적 자의성을 종식시키기로 결정하고 사법 제도에 광범위한 변화를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그는 농노 문제에 직면했다.
1860년 이래 개혁은 끊임없이 급속하게 계속되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농노제의 폐지(1861), 공무원으로 구성되었던 이전 국가 법원을 대신해 선출직 배심원단으로 구성된 순회 법원의 설치(1864), 공공생활의 특정 영역(교육, 보건, 교통 등 일부 부문)에서 자치권을 지닌 도시와 시골 지방자치제의 설치(1864) 등이었다.
사람들, 특히 지식인층의 모든 활력은 현재 가능한 계획들로 방향을 틀었다. 지방자치단체 당국들은 세속적 성향을 지닌 대규모 초등학교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이러한 “자치 단체”와 “도시”의 학교들은 분명 정부의 감시와 통제하에 있었다. 종교 교육은 의무적이었고 “총대주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학교들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누렸고, 교직원들은 “젬스트보zemstvo”와 진보적인 지식인 가운데서 도시평의회에 의해 채용되었다.
도시의 위생 상태와 교통 개선에도 상당히 커다란 관심이 집중되었다.
러시아는 조금 더 자유롭게 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전 상황과 관련해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진보적 계층의 열망과 국가의 물질적, 도덕적 요구에 비해 몹시 소심하고 불완전했다. 개혁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인민에게 진정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권리 등 확실한 자유와 시민적 권리의 부여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검열은 조금도 터무니없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언론과 출판은 여전히 재갈이 물려 있었다.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부상하고 있는 노동계급은 권리가 없었다. 귀족, 지주, 부르주아지가 지배적인 계급이었다. 무엇보다 전제 정권은 온전하게 유지되었다(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에게 “개혁”의 뼈대는 던져주면서도 끝까지 이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정권 교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렇게 하여 개혁은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농노제가 폐지된 상황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것이 개혁의 가장 약한 지점이다.
지주들은 현상의 모든 변화에 헛되이 저항한 뒤 차르(진보적인 분자들의 힘이 넘치는 압력에 따라 길고 극적인 주저 끝에 이 결정을 내린)의 절대적 결정 앞에 굴복해야 했다. 그러나 지주들은 이 개혁을 최소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알렉산드르 2세 스스로도 당연히 “소중한 귀족들”의 신성한 이익을 침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것들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욱 쉬웠다. 최종적으로 그의 몸짓을 좌우한 것은 주로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농민들이 자신의 의도 및 이 주제를 둘러싼 궁정의 의견 불일치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그들의 인내심이 정말로 끝이 났고, 그들의 해방을 기대했으며, 만약 그들이 개혁의 연기를 알게 된다면 뒤따를 동요가 거대하고 끔찍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개혁 반대자들과의 마지막 토론에서, 차르는 자신의 진실한 감정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 이 유명한 문장을 표현했다. “아래로부터 농민이 스스로를 해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위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이 더 낫다.” 그러므로 그는 이 “자유”, 즉 농노제 폐지가 가능한 한 지주 귀족들의 이익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쇠사슬이 마침내 끊어졌다.”라고 시인 네크라소프(Nikolay Alexeyevich Nekrasov)는 울려 퍼지는 시에 썼다. “그래, 부서졌다. 한쪽 끝은 귀족을 때렸고, 다른 쪽 끝은 농민을 때렸다.”
확실히, 농민들은 마침내 개인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그들은 극히 작은 구획의 땅을 받았다. (적어도 배고픔으로 죽지 않도록 할 만큼의 크기의 땅을 주지 않고 그들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분명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들은 장기간에 걸쳐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할 뿐 아니라, 이전의 지주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에 대해 많은 수수료를 내야 했다. 7천5백만 명의 농민들이 이 땅의 3분의 1 이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 다른 3분의 1은 국가에 의해 보유되었다. 그리고 거의 3분의 1이 지주들의 손에 남아 있었다. 이 비율은 농민 대중을 기근의 삶으로 선고 내렸다. 그들은 “포메시키”들에게, 이후에는 어떠한 식으로 부자가 된 “쿨라크kulak”들에게 농락당했다.
그의 모든 “개혁”에서, 알렉산드르 2세는 가능한 한 적게 허가하고자 주의했다. 오직 눈앞에 닥친 재앙을 피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개혁”의 결함과 단점은 1870년에 이미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노동 인구는 증가하는 착취에 무방비 상태였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의 결여뿐만 아니라 정치적 또는 사회적 내용의 모든 모임의 절대 금지는 모든 비판, 선전, 사회적 활동, 사상의 순환을, 간단히 말해 모든 진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민”은 니콜라이 1세 시대보다는 덜 잔인하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남아 있는 절대왕정의 독단적인 권력 아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 대중은 힘든 노동으로 인해 전락하여 국가와 특권 계급을 부양하는 짐을 지는 짐승으로 남아 있었다.
청년 지식인 가운데 최고 대표들은 이 개탄스러운 상황을 금세 알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서구 국가들은 이미 비교적 진보된 정치 및 사회 체제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들은 더욱 괴로워했다. 1870년경 서유럽은 사회적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사회주의는 집중적인 선전을 시작했고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강력한 정당으로 조직하는 과제에 착수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 최고의 선전가들은 검열관들을 계속 거역하고 회피했는데, 검열관들은 그 절차의 기교와 다양성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교육받지도, 지적이지도 않았다[체르니솁스키(Nikolay Gavrilovich Chernyshevsky)는 결과적으로 강제노동에 의해 용맹의 대가를 치렀다]. 선전가들은 전통적인 양식으로 작성된 잡지 기사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지식인들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젊은이들을 교육하며 외국의 정치적, 사회적 사건뿐만 아니라 사상운동에 대해 정기적으로 알려주었다. 동시에 그들은 소위 알렉산드르 2세 개혁의 이면, 그들의 진짜 동기, 위선, 그리고 그들의 단점들을 능숙하게 노출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 러시아에서 자연스럽게 비밀단체가 결성된 것은 전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 경멸스러운 정권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해방이라는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단체들은 “노동 대중에게 빛을 가져다준다”는 과제에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지고 자신을 봉헌한 남녀를 불문한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수의 러시아 청년 지식인들이 가족과 안락함, 경력을 포기하고 그들을 계몽하기 위해 “인민에게” 몸을 던진 광대한 운동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정권의 주요 신하들에 대한 테러 활동이 시작되었다. 1860년에서 1870년 사이에 몇몇 고위 정부 관리들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 시도가 있었다. 또한 차르에 대해서도 실패한 몇 가지 못한 시도가 있었다.
그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거의 대부분의 선전가가 경찰에 체포되었다(흔히 농민들의 고발에 의해). 그들은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혹은 힘든 노동에 보내졌다.[2] 운동의 실제 결과는 0이었다.
차리즘이 인민 교육에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차리즘이 그러한 장애물이기에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되었다.
그리고 이 단계는 결국 차르 암살이 주된 목표였던 망가지고 자포자기한 청년들에 의해 취해졌다. 다른 요인들도 이 결정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개혁”으로 국민을 속인 자는 공개적으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 속임수는 광대한 대중 앞에 노출되어야만 했다. 그들의 관심이 극적이고 끔찍한 행동에 이끌려야만 했다. 간단히 말해, 차르의 제거는 국민들에게 정권의 허약함, 취약함, 그리고 우연하고 일시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차르 신앙”은 한 번에, 완전히 살해될 것이었다. 그룹의 일부 구성원은 더 나아갔다. 그들은 차르 암살이 출발점으로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은 일반적인 발전의 맥락에서는 혁명과 차리즘의 즉각적인 붕괴로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스로 《나로드나야 볼랴Narodnaya Volya(국민의 뜻)》라고 불렀던 이 단체는 세밀한 준비 끝에 이 계획을 실행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던 중 살해되었다. 1881년 3월 1일 테러리스트들은 두 개의 폭탄을 황실 마차에 던졌다. 첫 번째는 마차를 파괴했고, 두 번째는 황제에게 치명상을 입혀 그의 두 다리를 모두 제거했다. 그는 거의 즉시 죽었다.
그 행위는 대중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다. 농민들은 신문을 읽지 않았다(그들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완전히 무시되고 모든 선전에서 외부자였던 그들은, 황제는 그들이 잘 살기를 바라지만, 그의 선의는 귀족들에 의해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1세기 이상 매료되어, 농민들은 귀족들이 차르를 암살하여 농노제 폐지에 대해 복수를 하고 그것을 회복하려는 희망으로 차르를 암살했다고 비난했다(농민들은 그들의 해방에 대한 귀족들의 저항과 귀족들의 음모라고 비난한 토지 대금을 강제로 지불하게 한 데서 그 증거를 찾아냈다).
차르는 죽었다. 하지만 전설은 죽지 않았다(독자는 24년 뒤 역사가 스스로 전설을 파괴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민은 이해하지 못했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굽신대는 언론은 이 “저열한 범죄자들”, “끔찍한 악당들”, “얼간이들”에 대해 악을 썼다.
궁정에는 그다지 혼란이 없었다. 암살당한 황제의 장남인 젊은 계승자 알렉산드르가 즉시 권력을 잡았다.
암살을 조직하고 실행한 《나로드나야 볼랴당》 지도자들은 신속하게 적발되어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죽임당했다. 그중 한 명인 젊은 그리네비츠키(Ignacy Hryniewiecki)―차르를 죽인 폭탄을 던진 바로 그 사람―은 그 폭발로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소피아 페롭스카야(Sophia Lvovna Perovskaya), 젤랴보프(Andrei Ivanovich Zhelyabov), 키발치히(Nikolai Ivanovich Kibalchich)(폭탄을 만든 그 당의 유명한 기술자), 미하일로프(Timofey Mikhailov)와 루사코프(Ivan Vasilyevich Rusakov)가 교수형을 당했다.
이례적으로 광범위하고 심각한 박해와 억압 조치는 당을 신속히 무력하게 줄어들게 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암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새 황제 알렉산드르 3세는 최근에 폐기된 완전한 반동의 길로 돌아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전체적으로 부적절한 “개혁”은 그에게 과도하고, 불행하고,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그것들을 비통한 실수라고 생각했다. 암살이 그들의 불충분함의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는 대신, 그는 반대로 그것들 가운데서 악의 원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개혁”에 반대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살해된 것을 이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일련의 반동적인 법률을 통해 개혁의 정신을 왜곡하고, 영향을 상쇄하고, 개혁에 장애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관료적이고 억압적인 국가는 그 권리를 되찾았다. 모든 운동, 자유주의적 사상의 모든 표현이 억눌렸다.
차르는 분명히 농노제를 재확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 대중들은 이제껏 이상으로 불명확한 무리로서의 상태를 유지하고, 착취하기 좋고, 모든 인권을 박탈당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선고되었다.
교양있는 계층과 인민 사이의 아주 작은 접촉은 다시 의심스럽고 불가능해졌다. 높은 문화적 수준과 고결한 염원을 지닌 상위 계층과 침울하고 분별없는 삶을 사는 인민의 좁혀질 것 같지 않은 격차인 “러시아 역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떠한 형태의 사회 활동도 다시금 금지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소심한 개혁에서 살아남은 것은 우스개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 아래서 혁명 활동의 부활은 불가피했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이 활동의 형태는 물론 본질도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요인에 의해 완전히 변형되었다.
제4부. 세기말; 마르크스주의; 급격한 진보; 반동(1881~1900)
《나로드나야 볼랴당》의 차리즘에 대한 폭력적인 조직 활동이 실패한 후, 다른 사건들이 러시아 혁명 운동의 근본적인 변혁에 기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출현이었다.
알려진 것과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투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했는데, 이 개념은 서유럽에서는 《사회민주당》이라는 노동자 계급 정당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어졌다.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라살(Ferdinand Lassalle)의 사회주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개념 및 업적은 러시아에 알려져 연구되고, 설명되고, 비밀리에 실행되었다. 심지어 법학 서적조차 교묘히 베일에 싸인 언어를 사용해 사회주의를 다루었다. 잘 알려진 “대형 잡지”가 커다란 열정으로 발행되었다. 투고자 중에는 사회문제, 사회주의 교리 및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규칙적으로 분석한 당시 최고의 언론인 및 선전가들이 있었다. 이 출판물들이 러시아의 문화생활을 위해 지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 없이는 그 어떤 지식인 그룹도 있을 수 없었다. 최신호를 얻기 위해서는 도서관에서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만 했다. 한 세대 이상의 러시아인들이 이 잡지들로부터 사회 교육을 받았고 모든 종류의 비밀 간행물을 읽음으로써 이 교육을 갖추었다.
따라서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적 행동에만 기반을 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는 이전 음모가들의 실망스러운 희망을 대신하게 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산업과 기술의 점차 가속화되는 발전과 그 모든 광범위한 결과였다.
철도망, 기타 교통수단, 광업, 석유 시추, 야금술, 섬유 및 공작 기계 산업―이 모든 생산 활동은 시간 낭비를 만회하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전국에 산업지대가 생겨났다. 새로운 공장과 늘어나는 노동자 인구로 인해 수많은 도시의 환경이 급격히 변화했다.
이러한 산업의 급증은 불충분한 토지를 영원히 포기하거나 겨울 동안 추가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비참한 농민들의 대규모 집단으로 구성된 노동력에 의해 지탱되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산업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발전을 의미했다. 그리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계급은 혁명운동에 많은 몫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확산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의존했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은 새로운 상황을 결정짓는 기본 요소였다.
산업 발전과 상승하는 생활 수준은 일반적으로 모든 분야의 교육 받은 사람들, 전문가들, 기술자 및 숙련 노동자들을 필요로 한다. 모든 유형의 학교―국립, 공립, 그리고 사립―의 수가 도시와 시골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대학교, 특수 기술 및 고등학교, 초등학교, 전문 과정들이 도처에 생겨났다(1875년 징집된 병사 79%가 문맹이었다. 1898년에는 이 수치가 55%까지 떨어졌다).
이 모든 발전은 절대주의 정치 체제의 틀 밖에서, 심지어 그에 반대해 일어났다. 그 정권은 국가의 살아있는 몸에 더 경직되고, 터무니없고, 눈에 거슬리는 시체들을 고집스럽게 붙들며 버티고 있었다.
그 결과, 잔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반反군주주의 운동은 물론 혁명 및 사회주의 선전이 점차 확산되었다.
심지어 농민들―가장 소극적이고 가장 억압받는 이들이었던―조차 빈곤과 비인간적인 착취에 의해 만연한 동요의 메아리로 인해 자극 받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메아리는 “젬스트보Zemstvo”에서 일했던 수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농민들에게 전달되었다(당시 이 사람들은 “젬스키 라보트니치zemski rabotnici”라고 불렸는데, 시골과 가족 관계가 있는 노동자들, 계절에 따른 노동자들, 그리고 농업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젬스트보 노동자”로 알려져 있었다). 정부는 이 선전에 대해 무력했다.
세기가 끝나갈 즈음, 두 개의 뚜렷한 세력이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대치했다. 하나는 왕좌 주변에 모인 매우 특권적인 계급들로 구성된 고래의 반동적 세력이었는데, 귀족, 관료, 지주, 군인 계층, 고위 성직자 그리고 초기 부르주아지 등이었다. 다른 하나는 1890~1900년에 주로 학생들로 이루어졌으나 도시와 산업 지역의 청년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모이기 시작한 젊은 혁명 세력이었다.
1898년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혁명적 조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the Social Democratic Labour Party》을 창설했다(“노동 해방단Emancipation of Labor Group”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사회민주주의적 단체는 1883년에 설립되었다).
명확히 대립하고 있는 이 두 세력 사이에는 주로 중산층을 대표하는 계급들로 이루어진 일정 수의 “저명한” 지식인들, 즉 대학교수, 변호사, 작가, 의사 등의 제삼세력이 서 있었다. 그것은 소심한 자유주의 운동이었다. 비록 그들이 비밀스럽고 매우 신중하게 혁명 활동에 지지를 보냈지만, 그들은 개혁에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알렉산드르 2세 통치 기간과 같이) 임박한 혁명의 위협 아래 절대주의 정권이 큰 양보를 해주어 결국 입헌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오직 농민 대중만이 이 소요 밖에 계속 남아 있었다.
황제 알렉산드르 3세는 1894년 사망했다. 그의 자리는 마지막 로마노프 가문인 그의 아들 니콜라이 2세(Nikolai II)가 차지했다.
막연한 전설에 따르면 새 차르가 자유주의 사상을 천명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차르의 절대 권력을 심각하게 제한할 헌법을 “그의 국민”에게 허가할 용의가 있다고도 했다.
사실이기를 바라며 어떤 자유주의적인 “젬스트보(시 의회)”는 젊은 차르에게 매우 소심하게 대표권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1895년 1월, 니콜라이 2세의 결혼식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는 귀족, 군, “젬스트보” 등 다양한 대표단을 형식적으로 맞이했다. 시 대표들은 새 주인이 축하를 받던 중 갑자기 화를 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신경질적으로 “젬스트보”에게 영원히 “미친 꿈”을 포기하라고 소리치며 요구한 데에 놀랐다. 이러한 요구는 “젬스트보” 내 “체제전복적인” 태도를 지닌 어떤 “선동가”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로 인해 즉시 강조되었다. 이렇게 해서 절대주의와 반동은 국가의 전반적인 발전을 경멸하며 다시 한번 자신들을 재확인했다.
제5부. 20세기; 성급한 발전; 혁명적 진전; 결과(1900~1905)
우리가 방금 언급한 사건과 특징들은 20세기 초 더욱 뚜렷해졌다.
한편으로 절대주의 정권은 사회의 열망을 인지하는 대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을 유지하고 모든 혁명운동뿐만 아니라 어떠한 반대표현도 억압하기로 결정했다. 니콜라이 2세의 정부가 대규모 반유대주의 선전과 그에 이은 유대인 포그롬(대박해-역자 주)을 선동해―심지어 직접 조직함으로써―사람들의 불만을 눈 돌리게 한 것은 이때였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 경제 발전은 가속화된 속도로 계속되었다. 1900년부터 1905년까지 5년간 산업과 기술은 엄청나게 도약했다. 석유 생산(바쿠Baku 유전), 석탄(도네츠Donets 탄전炭田), 금속 생산은 빠르게 다른 산업국가 수준에 빠르게 도달하고 있었다. 도로와 교통수단(철도, 자동차, 하천, 해양운송)이 확장되고 현대화되었다. 수천, 혹은 심지어 수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대형 건설 공장이 대도시 외곽에 세워지거나 확장되었다. 산업지역 전체가 세워지거나 확대되었다. 산업 지역 전체가 들어서거나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대한 푸틸로프Putilov 공장들, 대규모 넵스키Nevsky 조선소, 커다란 발틱Baltic 공장에 더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공장들도 나열할 수 있고, 콜피노Kolpino, 추호보Chukhovo, 세스트로레츠크Sestroretsk 등 수만 명의 노동자가 있는 수도의 외곽 산업지대, 모스크바 근교의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Ivanovo-Voznesensk 산업 지역, 그리고 남부 러시아의 몇몇 중요한 공장인 하르코프, 에카테리노슬랍스카야Ekaterinoslav 및 다른 곳들이 있다. 이러한 급속한 발전은 흥미가 있는 집단 외에는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오늘날까지도 볼셰비키가 대두하기 전에는 러시아에는 산업이 거의 없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산업들은 전적으로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사람들 말이다). 그럼에도, 그 발전은 순전히 산업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상당했다. 산업화는 프롤레타리아적 요소들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 시기의 통계에 따르면 1905년 러시아에는 약 300만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문화적 내용들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성인 교육도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905년 러시아에는 남녀를 위한 30여 개의 대학교와 고등교육 학교들이 있었다. 이 기관들은 거의 모두 국가에 의존했다(민간 지방자치단체의 자금을 지원받은 일부 기관을 제외하고). 주로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의 결과로 이루어진 오래된 전통에 따라, 대학의 법령은 상당히 자유로웠으며 내부 독립(자치권)을 허용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는 이것들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시도는 모두 큰 혼란을 일으켰다. 정부는 마침내 그러한 계획들을 포기했다.
대학교 및 고등학교의 교수들은 특정 절차에 따라 대학교 졸업생 중에서 선발되었다.
거의 모든 도시, 심지어 중요하지 않은 도시들에도 고등학교와 소년, 소녀들을 위한 예비 학교가 있었다. 중등학교는 국가, 개인 또는 “젬스트보”에 의해 설립되었다. 세 가지 경우 모두 국가가 교육 계획을 수립했으며, 교육은 눈에 띄게 유사했다. 종교 교육은 의무였다.
중등학교의 교직원은 사소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학 공동체에서 채용되었다. 대학에 출입할 수 있는 졸업장을 수여 받기 위한 교육과정은 8년간 이어졌다.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들은 8년 의무 기간 외에 예비 수업으로 1년을 보낼 수 있었다.
도시와 시골 초등학교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일부는 국가에 의해 설립되었고, 다른 일부는 자치 단체와 “젬스트보”에 의해 설립되었다. 모두가 국가의 감시와 통제 아래 있었다. 초등교육은 무료였고 의무적인 교육은 아니었다. 국가는 자연스레 초등학교에서 교리문답을 강요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 남녀는 적어도 4년제 중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성인을 위한 저녁 강좌와 일부 잘 조직된 “대중 대학”이 모든 대도시에서 기능했다. 자치단체들과 특히 개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이러한 기관들에 헌신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들은 분명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드물었다. 이 교육 비용은 너무 비쌌다.
그럼에도 널리 퍼진 전설과는 달리 이 학교들에 대한 접근은 노동자나 농민의 자녀들에게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학생은 자유주의적 지식인층, 공무원, 사무직 및 부르주아 가정의 지식인 가족 출신이었다.
지식인들이 최소한 진보적 신조를 공언했다는 사실은 경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자치 단체 및 대중학교와 기관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의 선전이 학교 교과과정 바깥에서 가능하게 만들었다.
“대중 대학”의 강사와 초등학교 교사들은 혁명적인 집단 출신이 많았다. 보통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일부 교장들은 그들을 용인했다. 그들은 일을 “정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국은 이 선전을 저지할 수 없었다.
학교 교육과 대화에 더해, 교육은 저술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에 의해 쓰이거나 위대한 작가들의 발췌문으로 구성된 엄청난 양의 대중적인 팸플릿들이 시장에 등장했다. 이 팸플릿들은 모든 학문을 다루고 매우 진보적인 정신으로 정치 및 사회문제를 분석했다. 공식적인 검열은 이 증가하는 홍수에 대해 무력했다. 저자와 출판사들은 당국의 경계를 속이는 수많은 방법을 발견했다.
지식인과 노동계급에서 비밀리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문학을 더한다면 우리는 1900년에서 1905년 사이의 기간을 특징짓는 광범위한 교육운동에 대한 좋은 개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후 혁명운동의 범위와 진보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특정 세부사항을 제시할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이러한 운동이 정치적, 사회적 열망의 움직임이 놀라운 도덕적 발전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청년들은 종교적, 국가적, 성적 등 모든 편견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해방시켰다. 어떤 면에서는 러시아의 전위적 집단이 서방 국가들보다 오랫동안 더 발전해 있기도 했다. 인종과 민족의 평등, 성 평등, 자유 결혼(자유 연합union libre), 종교의 부정은 그 집단으로부터 물려받은 진리였는데, 사실 이것들은 “니힐리스트” 시대부터 실천되어 온 것이다. 이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 작가들[벨린스키(Vissarion Grigoryevich Belinsky), 게르첸, 체르니솁스키, 도브롤류보프(Nikolay Alexandrovich Dobrolyubov), 피사레프, 미하일롭스키(Nikolay Konstantinovich Mikhaylovsky)]은 엄청난 임무를 완수했다. 이들은 여러 세대의 지식인들에게 차리즘적 중등교육 제도에 의해 부과된 의무교육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해방의 의미를 가르쳤다.
이러한 해방 정신은 궁극적으로 러시아 청년들에게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전통이 되었다. 그들은 잠시 공식적으로 부과되는 교육에 온순히 따랐지만, 청년들은 졸업장을 받자마자 그 매에서 벗어났다.
“대학교에 가지 마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가운데서 졸업증서가 형식을 갖추어 배부될 때, 우리 교구의 주교가 외쳤다. “대학에 가지 마시오. 대학교는 폭도들의 소굴이오….”(그는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했을까?) 이 명예로운 주교님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 대학에 다니는 모든 젊은 남녀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잠재적인 혁명가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학생”은 “반역자”를 의미했다.
그 뒤 그들이 나이 들었을 때, 삶의 문제와 거듭되는 불행으로 부서진 이들 왕년의 반역자들은, 그들의 첫 번째 충동을 잊거나 흔히 부정했다. 그러나 대개 몇몇은 자유주의적인 신조, 반항 정신, 그리고 중대한 경우 가장 먼저 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살아있는 불꽃 등을 회복했다.
그럼에도 노동 대중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국가와 부르주아지의 착취 증가에 노출된 채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고, 모이고, 듣고, 요구를 적용하거나, 조직하거나, 싸우거나, 파업하는 등의 모든 권리가 결여되어 노동자들은 물질적 및 도덕적으로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시골에서는 농민 대중의 가난과 불만이 계속 증가했다. 농민들―1억7천5백만 명의 남녀, 어린이들―은 버려지고 일종의 “인간 무리”로 여겨졌다(신체형身體刑은 1863년 법적으로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04년까지 그들에게 현실이었다). 일반 문화와 초등교육의 부족, 원시적이고 불충분한 도구, 신용이나 다른 형태의 보호 혹은 원조의 부재, 아주 높은 세금, 당국과 “상위” 계급의 자의적이며 경멸적이며 잔인한 대우, 새로운 가족 구성원 사이에 토지 분할의 결과 그들의 땅이 더 작게 나뉘는 것, “쿨라크들”(부유한 농민)과 상류층 지주 사이의 경쟁―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불행에 대한 다양한 원인이었다. 심지어 “농민 공동체”―유명한 러시아의 미르mir―조차 더 이상 구성원들을 뒷받침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 3세와 그의 후계자 니콜라이 2세의 정부는 미르를 농민들에게 세금과 납부금을 내도록 강요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국가의 세밀한 관찰과 감시를 받는 단순한 행정기구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선전과 활동이 확실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은밀하지만 활동적으로 퍼져나갔고, 주로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추종자를 발견했다. 1898년 창당한 《사회민주노동당》의 영향력은 이 당이 불법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다른 모든 당과 마찬가지로) 많은 도시와 특정 지역에서 느낄 수 있었다.
활동가들에 대한 정부의 엄중함은 점점 더 잔인해졌다. 수많은 정치적 재판들이 있었다. 행정부와 경찰의 탄압 조치는 수천 명의 “대상”을 잔인하게 강타했다. 감옥, 망명지, 그리고 강제노동 수용소가 가득 찼다. 그러나 당국은 당의 활동과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는 있었지만, 이전 최초의 정치적 집단의 숨통을 끊는 데 성공했던 것처럼 그것의 숨통을 끊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1900년 이후 당국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 운동은 대폭으로 확대되었다. 학생과 노동자들이 일으키는 혼란은 매일의 사건이 되었다. 사실 대학은 정치적 문제로 인해 수개월 간 빈번하게 폐교되었다. 노동자들의 지지에 대한 학생들의 응답은 공공장소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카잔 대성당의 광장이 학생과 노동자들이 모여 혁명적인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붉은 깃발을 들고 다니는 대중시위의 고전적인 장소가 되었다. 정부는 경찰과 카자크Cossack에게 말을 태워 보내 광장과 인근 거리를 검과 채찍(나가이카Nagaika)으로 “소탕”했다.
혁명은 거리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독자에게 전반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또 다른 의구심을 더해야 한다.
우리가 방금 그린 그림은 정확하다. 그러나 큰 틀을 잡지 않은 채 이 그림만 보고, 국가와 인민의 큰 총체적인 부분을 끊임없이 언급하지 않으면 과장될 위험이 있고, 결국 이후의 사건들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 잘못된 일반적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1억8천만 명 이상의 거대한 인구 중 우리가 설명한 지적 운동에 영향을 받은 집단은 아주 작은 층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그것은 주로 학생이 대부분인 수천 명의 지식인과 대도시 노동자 계급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 즉 수많은 농민 대중, 도시 주민의 대다수 및 심지어 노동 인구의 대다수는 여전히 혁명적인 소요에 바깥에 있었고,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에 적대적이었다. 우리는 1900년부터 노동자의 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진보적 집단의 구성원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혁명의 폭발은 또한 점점 더 비참해지는 농민 대중들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동시에,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그들의 활동으로만 주요한 사회적 변화를 결정하는 대중―은 발달되지 않은 전망을 유지했다. “러시아 역설”은 거의 온전히 남아 있었고, “차르 신앙”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계속해 현혹했다. 이 대중과 관련해 문제의 운동은 작고 피상적인 소요에 지나지 않았다(1903년 런던에서 열린 사회민주회의에는 4명의 노동자만이 참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참 나아가 앞서 있는 사람들, 아득히 뒤처져 있는 채인 사람들 집단 간의 모든 접촉은 불가능했다.
독자는 그 뒤에 일어난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것을 끊임없이 명심해야 한다.
1901년, 혁명 활동은 새로운 요소, 《사회민주노동당》과 함께 《사회주의혁명당the Socialist-Revolutionary Party》이 부상함에 따라 많은 자극을 받았다. 이 당의 프로파간다는 순식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양당은 세 가지 본질적인 점에서 서로 의견이 달랐다.
1. 철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사회주의혁명당》은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반대했다.
2. 반反마르크스주의를 이유로 이 당은 농민 문제에 대한 다른 해결책(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에만 기반을 두고 농민 대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그들은 농민의 급속한 프롤레타리아화를 기다렸다), 결과적으로 시골에의 선전을 소홀히 했던 반면, 《사회주의혁명당》은 러시아 농민 대중을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대의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사회주의혁명당》은 농민들의 프롤레타리아화를 기다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시골에서 대규모 선전을 수행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농토 계획을 농민의 토지 구획 확대와 그 외 자잘한 개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예상하고 있던 반면, 《사회주의혁명당》의 최소계획은 토지의 완전 및 즉각적인 사회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3. 완전히 이러한 원칙에 일관하여 《사회민주노동당》은 대중의 행동에 기대어 모든 테러 활동과 정치적 암살을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해 거부했다. 반면 《사회주의혁명당》은 지나치게 열심이거나 잔인한 차리즘 고위 관리들에 대한 암살 시도에 일정한 공익성을 부여했다. 중앙위원회 지시에 따라 정치적 암살의 준비와 실행을 담당한 “전투 조직”이라 불리는 특별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차이를 제외하면, 두 정당의 단기적 정치 및 사회 계획(“최소 계획”)은 거의 동일했다. 사회주의로의 진화를 위한 길을 닦을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이 그것이었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사회주의혁명당》은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감행했는데, 그중 일부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02년, 당의 젊은 활동가인 학생 발마셰프(Stepan Valerianovich Balmashov)는 내무부 장관 시퍄긴(Dmitry Sergeyevich Sipyagin)을 암살하고, 1904년 또 다른 《사회주의혁명당》 당원인 학생 사조노프(Igor Sazonov)는 시피아긴의 유명하고 잔인한 후계자인 폰 플레베(Vyacheslav Konstantinovich von Plehve)를 살해했으며, 1905년 《사회주의혁명당》 당원 칼라예프(Ivan Platonovich Kalyayev)는 모스크바의 총독(“가증스러운 총독the hideous satrap”으로 알려진)인 세르게이 대공(Grand Duke Sergei Alexandrovich)을 살해했다.
두 정당에 더해 소규모 아나키스트 운동도 있었다. 극히 약하고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정규적인 접촉 없이 지식인과 노동자(남부의 농민들) 일부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두 개의 아나키스트 단체가 있었고, 모스크바에 있는 더 많은 집단이 있었으며(후자가 더 강하고 활동적이었다), 그에 더해 남부와 서부 집단도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들의 활동은 약한(그럼에도 극도로 어려웠던) 선전, 지나치게 열심인 관리들에 대한 암살 시도, 그리고 “개인적인 복수” 같은 일부 행위들에 국한되었다. 자유의지주의 문학은 외국에서 밀반입되었다. 이것은 주로 《나로드나야 볼랴》의 붕괴 이후 강제 이주 되어 영국에 정착한 크로포트킨의 팸플릿으로 구성되었다.
1900년 이래 혁명 활동이 급속한 증가는 정부는 경보를 놀라게 했다. 당국을 가장 괴롭힌 것은 선전이 노동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법적으로 금지되고, 따라서 존재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회주의 정당 모두 주요 도시에 위원회, 프로파간다 조직, 비밀 인쇄소 및 꽤 많은 단체를 지니고 있었다. 《사회주의혁명당》은 성공적으로 암살들을 수행했는데, 그 파장은 많은 주목, 심지어 감탄까지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방어와 탄압―감시, 방첩, 도발, 수감, 포그롬―이 부족했다고 판단했다. 노동 대중을 사회주의 정당과 다른 모든 혁명 활동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정부는 논리적으로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한 정부의 지배를 이끌어 내는 마키아벨리적 계획을 고안했다. 정부는 정부가 직접 지휘하는 합법적이고 공인된 노동자조직을 출범시키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일석이조를 노린 것이었다. 한쪽으로는 노동자 계급의 공감과 감사, 헌신을 끌어당겨 혁명적인 정당들로부터 떼어놓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노동자들의 운동을 면밀히 주시하며 원하는 곳 어디로든 이끄는 것이었다.
그 일이 정교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노동자들을 국가 기구로 끌어들이고, 의심을 진정시키고, 흥미를 지니게 하고, 그들에게 아첨하며 유혹하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속일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척하고, 정당들을 일소하고, 그들의 선전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을 넘어서는 것―특별하고 구체적인 행동들로 그들을 넘어서는 일이 필요했다.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경제나 사회질서에 있어 어느 정도 양보를 하는 데 합의하는 선까지 가는 동시에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한 “계획”은 정부가 절대적인 신뢰를 지닌, 교활하고 능숙하며 경험이 많은, 노동자들의 심리에 친숙하고, 노동자들에게 자신을 강요하고 신뢰를 얻는 방법을 아는 이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했다.
정부는 마침내 이 계획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은 비밀경찰(오흐라나Okhrana)의 두 요원을 선정했다. 한 명은 모스크바의 주바토프(Sergei Vasilyevich Zubatov)였고, 다른 한 명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교도소의 사제인 가폰 신부(Georgy Apollonovich Gapon)였다.
차르의 정부는 불장난을 하고 싶어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잔혹하게 타올랐다.
제2장. 충격(1905~1906)
제1부. 가폰의 서사시; 첫 번째 총파업
모스크바에서 주바토프는 꽤나 빠르게 가면이 벗겨졌다. 그는 많은 것을 완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일이 훨씬 더 나았다. 매우 간교하고 그늘에서 일하는 가폰은 노동자조직들의 신뢰, 심지어 애정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진정 선동가이자 조직가로서 재능을 지닌 그는 자신이 직접 이끌며 그의 활기찬 활동으로 자극한 소위 “노동자 모임Workers’ Sections”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1904년 말에는 수도의 여러 지역에 11개의 모임이 있었으며, 수천 명의 회원을 두었다.
노동자들은 저녁에 자발적으로 이 “모임”에 참석해 그들의 문제를 논의하고, 강의를 듣고, 신문을 보았다. 입구는 가폰주의자Gaponist인 노동자들 스스로가 엄격하게 지켜졌기 때문에 정당의 활동가들은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더라도, 그들은 금세 발견되어 밖으로 버려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은 그들의 “모임”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가폰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그들은 자신의 불행과 포부를 그에게 털어놓았고, 관리자와 맞서 싸우는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면서 그들의 상황을 개선할 방안을 논의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노동자 가운데서 살아온 가폰은 그에게 털어놓은 노동자들의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한 동의와 진심으로 이입하는 척하는 데 매우 능했다. 적어도 초반에는 이런 것이 그의 공식 임무였다.
정부가 모임의 노동자들에게 적용하고자 생각했던 명제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여, 그대는 그대가 속한 모임을 통해 조심스럽게, 법적인 한계 안에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성공하기 위해 정치에 관여할 필요는 없다. 그대들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며 시급한 관심사에 대해 고려하면 곧 더욱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정당과 정치적 투쟁, 나쁜 양치기들―사회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제안한 수단은 그대들이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이끌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하라. 이것은 허용된 것이며, 그대가 진정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길뿐이다. 정부는 그대들을 매우 염려하고 있으며 그대들을 도울 것이다.” 이것이 가폰과 그의 조력자들이 노동자들 스스로가 만든 모임 사이에 모여 정교하게 설교한 주제였다.
노동자들은 그 초대에 응답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행동을 준비했다. 그들은 가폰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요구를 발전시키고 공식화했다. 극도로 미묘한 관계로 가폰은 여기에 참여해야 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즉시 노동자 사이에서 불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는 확실히 그들의 이익을 배반하고 관리자 측을 편들어준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는 인기를 잃을 것이다. 나아가 더욱 심각한 의심들이 생겨날 것이다. 만일 이렇게 되면 그의 일은 망가질 것이다. 그의 이중 첩자 노릇에서 가폰은 다른 무엇보다도, 얻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던 공감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지하고자 했다. 그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마치 노동자들의 대의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대중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지휘하고, 형성하고, 그들의 행동을 이끌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반대가 일어났다. 그 운동은 그것에 주어졌던 한계를 빠르게 넘어섰다. 그것은 예측하지 못한 진폭, 활력, 기세를 빠르게 얻었고, 모든 계산을 불사르고, 그것을 만들어낸 이들의 기대를 뒤집었다. 그것은 곧 가폰마저 휩쓸고 진정한 홍수가 되었다.
1904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큰 공장 중 하나이자 가폰이 수많은 추종자와 친구를 거느린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가폰의 동의를 얻어 그들은 관리자들에게 매우 온건한 경제적 요구 목록을 작성하고 전달했다. 그달 말, 그들은 관리자들이 “이러한 요구를 고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는 것과 정부가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공장의 관리자들은 지도자로 간주되는 일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그들을 복직시키라는 요구가 있었다. 경영진은 거부했다.
노동자들의 분노와 노여움은 어마어마했는데, 우선 그들의 길고 힘든 노력은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둘째,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믿게끔 이끌리고 있었다. 가폰 자신도 그들을 격려했고, 그들을 희망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의 선하고 합법적인 길에 따른 첫걸음은 그들에게 쓰라린 실패를 가져다주었을 뿐이며, 그것은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속았다고 느꼈고, 도덕적으로, 해고된 동지들에게 유리하게끔 개입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가폰 쪽으로 향했다. 가폰은 자신의 명성과 역할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분개하며 노동자들에게 푸틸로프 공장에 가서 필사적으로 대처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임과 가폰의 보호가 계속되고, 요구를 순전히 경제적인 것에 제한하는 이상 안전하다고 느꼈고, 몇 차례 격동적인 회의를 마친 뒤 파업으로 그들의 명분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가폰을 신뢰하여 개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1904년 12월 러시아 최초의 대규모 파업을 일으킨 푸틸로프 공장에서의 파업이 발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모든 노동자 모임은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동요하고 움직였다. 그들은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실패를 전반적인 실패로 매우 올바르게 이해했다. 가폰은 당연히 그 모임의 편을 들어야 했다. 저녁에 그는 그들 모두를 방문하여 푸틸로프 파업자들에게 유리한 연설을 하고 노동자들에게 단호한 행동으로 그들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며칠이 흘렀다. 이례적인 동요가 수도의 노동자 대군중을 뒤흔들었다. 공장들이 자발적으로 비워졌다. 효시나 신호 없이, 준비나 리더십 없이, 푸틸로프 파업은 거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소동이었다. 파업자들은 모든 형식적 행위와 규율을 무시하고, 즉각적이며 분명한 조치를 요구하면서 모임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간단히 말해, 파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뭔가 행동하고, 무언가 하기 위해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거대하고, 인상적이고, 결정적인 무엇인가 말이다. 이것이 전반적인 마음이었다.
아무도 정확히 어떻게,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환상적인 생각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러시아의 불행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이름으로 차르에게 “청원”을 준비하자는 생각, 청원을 뒷받침하기 위해 겨울 궁전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는 생각, 가폰이 이끄는 대표단을 통해 차르에게 청원을 직접 전달하자는 생각, 차르에게 그의 백성들의 비참함을 들어달라고 부탁하자는 생각이었고, 비록 순진하고 역설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이 생각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것은 그들을 통일시키고, 영감을 주고, 열광시켰다. 그것은 그들의 운동에 의미와 정확한 목표를 주었다.
각 모임은 대중과 함께 그 행동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가폰에게 청원서 초안 작성 책임을 요청받았다. 그는 또 한 번 동의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상황에 떠밀려 역사적인 대중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청원서는 1905년 1월의 초순 동안 준비되었다. 소박하고 감동적인 그것은 헌신과 자신감을 내뿜었다. 사람들의 고통은 아주 많은 마음과 성실함을 통해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차르에게 이러한 고통에 눈을 건네고, 효과적인 개혁에 동의하고, 그것들이 실행되는 것을 보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가폰의 청원이 직관적이고 진정 감동적인 작품이었다는 것은 묘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음 단계는 모든 모임에서 청원서를 채택하도록 하고, 이를 많은 대중에게 전달하고, 겨울 궁전을 향한 행군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 새로운 요소가 작용하기 시작했다. 정당에 속한 일부 혁명가들(이때까지 정당들은 “가폰주의Gaponism”을 멀리하고 있었다)이 가폰과 만났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그가 그의 태도, 청원서, 그리고 그의 행동에 대해 덜 “순종적이고”, 더 위엄 있는, 더 확고한,―다시 말해, 더 혁명적인 방식을 취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진보적인 노동자들의 조직도 그를 이 방향으로 몰고 갔다. 가폰은 고상하게 받아들였다. 일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그와 관계를 맺었다. 그들에 동의하여 그는 원래의 청원서를 원래보다 현저히 확대하고, 차르에 대한 충성스러운 헌신을 강조하지 않았다.
“청원서”의 최종본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 중 가장 위대한 역사적 역설이었다. 그것은 차르에게 충성스러운 연설이었고, 차르에게 그의 권력을 없애게 될 철두철미한 혁명을 승인하고 심지어 수행할 것을 요청했다. 실제로 혁명적인 정당들의 최소계획 전체가 그 안에 포함됐다. 시급한 조치 중에는 출판과 언론, 사상의 완전한 자유, 모든 협회와 단체에 대한 절대적인 자유,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 파업권, 농민 공동체에 유리한 대규모 토지 소유자에의 수용으로 이어지는 일부 농업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주적인 선거법의 근거해 선출된 제헌의회의 즉각적인 소집 등이 있었다. 그것은 자살로 향하는 퉁명스러운 초대였다. 다음이 “청원서”의 완전한 최종본이다.
폐하,
우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우리 아내들, 우리 자식들, 그리고 우리 부모들, 아무 자원도 없는 늙은이들이 당신께, 오 차르시여, 당신께 정의와 보호를 요청하러 왔나이다.
우리는 비렁뱅이로 굴러떨어졌나이다. 우리는 억압 받고, 고단한 노동의 무게에 짓눌리고, 모욕에 흠뻑 젖어 있나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여김 받지 않고 침묵 속에 슬픈 운명을 겪어야 하는 노예로 다루어지나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참을성 있게 견뎌왔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무지와 압제만이 우리 몫으로 될 심연의 가장 밑바닥으로 던져지고 있나이다. 우리는 압제와 모든 인간의 법칙에 반하는 대우로써 질식하고 있나이다.
오, 차르시여. 우리는 더는 이겨낼 수 없사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이어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은 끔찍한 순간이 왔나이다. 이것이 저희가 일을 멈춘 이유이고, 사장들에게 그들이 저희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겠노라 말한 이유이옵니다.
저희는 아주 작은 것만을 요구했는데, 저희가 요구한 그 작은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삶이 아니옵고 지옥이요 영원한 고문이나이다.
저희의 첫 요구는 저희에게 동의하여 저희의 필요를 충분히 고려하도록 사장들에게 바란 것이었나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절했나이다! 저희는 법률이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저희의 필요를 논의할 권리 그 자체로 거부되었나이다.
저희의 하루 여덟 시간 노동에 대한 요구도 불법이라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나이다.
저희는 임금賃金 결정에의 참여를 요구했나이다. 저희와 공장 안 행정 사이 의견 불일치에 대한 중재를 위하여, 남녀를 불문한 미숙련 노동자의 하루 최저 임금 1루블을 위하여, 초과 근무의 억제를 위하여, 거기 일하는 이들이 바람, 비 혹은 눈으로 인하여 죽지 않기 위한 작업장의 안전을 위하여 하였나이다…. 저희는 또한 병자를 돌볼 것을 요구했나이다. 저희는 또한 저희에게 지시함에 모욕이 수반되지 않을 것을 요구했나이다.
이 모든 요구가 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나이다. 요구를 드러내는 행위 그 자체가 범죄라 여겨졌나이다. 저희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장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무례한 것으로 여겨졌나이다.
오, 황제시여! 여기 당신의 30만을 넘는 인간이 여기 있나이다. 허나 저희는 겉보기만 인간이옵니다. 실제로는 저희에게 인권은 없나이다. 저희는 저희 필요를 논의하고자, 저희 상황을 개선하려는 조치를 취할 목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만나는 것이 허용되지 아니하나이다. 저희 가운데 감히 노동계급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감옥에 갇히거나 유배되나이다. 너그러운 마음과 섬세한 영혼을 지니는 것은 범죄로 간주되나이다. 불행한 이들, 노숙자, 희생당한 이, 타락한 이에게 박애의 정을 드러내는 것은 가증스러운 범죄로 되나이다.
오, 차르시여! 이 모두가 다스릴 힘을 주신 하느님의 계명과 일치하나이까? 그런 법률 아래서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나이까? 저희, 러시아 노동자들이 죽고 자본가들과 관료들이 알아서 살아가며 그들의 삶을 즐기는 것이 차라리 바람직하지 아니하나이까?
폐하, 그것이 저희를 기다리는 미래이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당신의 궁전 앞에 모인 이유이옵니다. 당신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옵니다. 오직 불행과 무지만이 있을 뿐인 무법자의 구덩이로부터 당신 백성을 끌어내기를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 백성에게 기회를, 그들의 진짜 운명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주소서. 관료들의 견딜 수 없는 억압으로부터 그들을 구하소서. 백성들과 당신을 갈라놓는 벽을 허무시고 그들로 함께 나라를 다스리도록 부르소서.
당신께옵서는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여기 내려오셨나이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행복은 우리에게 고통과 굴욕만을 주는 당신의 관리들로 인해 저희에게서 빼앗겨지나이다.
저희의 요구를 노여워 마시고 세심히 보아주소서. 그것들은 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을 위하여, 저희 선을 위하여, 폐하,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나타났나이다. 저희 가운데 말하여지는 것은 무례함이 아니옵고, 오늘날의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끝내고자 하는 너른 필요에의 경각이옵나이다.
러시아는 너무나 거대하며, 필요 또한 부지기수라 관리들로만 이루어진 정부로는 나라를 이끌 수 없나이다. 국민이 정부에 참여함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온데, 이는 국민의 필요는 오직 국민만이 알기 때문이옵니다.
따라서 당신 백성을 돕기를 물리치지 마소서. 전국 모든 계급 대표들에게 지체함 없이 모이라 말씀하소서. 자본가와 노동자를 대변하게 하소서. 공무원, 사제, 의사, 교수도 그들 대리인을 고르게 하소서. 누구든 각자 자신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이를 자유롭게 고르도록 하소서. 이를 위해 보편적인 참정권 제도하에 제헌의회 선출을 허해 주소서.
이것이 저희 요구의 핵심이옵니다. 다른 모든 것이 그에 달려있나이다. 이것이 저희 벌어진 상처에 대한 가장 좋으며 하나뿐인 참된 위안이나이다. 만일 이렇게 되지 아니하면 저희 상처는 계속 벌어져 있어 저희는 피를 흘리며 죽게 되나이다.
저희의 모든 병증은 만병통치약이 없나이다. 여러 치유책이 필요하나이다. 저희는 이제 이를 아뢰어 올리나이다. 저희는 신실히, 열린 마음으로, 폐하, 아버지께 아뢰나이다.
다음 대책들은 불가결하나이다.
첫째 항목은 모든 권리의 결여와 러시아 국민을 특징짓는 무지에 대한 조치로 이루어져 있나이다. 조치에는 이러한 것들이 포함되옵니다.
1. 개인의 자유와 보전.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종교적 문제에 대한 사상의 자유. 정교분리.
2. 국가가 지원하는 보편 및 의무교육.
3. 국민 앞에 책임지는 대리인들. 행정조치의 적법성 보장.
4. 예외 없는 법 앞의 개인 평등.
5. 신념으로 인해 투옥된 모든 이의 즉각 석방.
둘째 항목은 빈곤에 대한 조치로 이루어졌나이다.
1. 모든 간접세의 폐지. 소득에 대한 직접적이고 혁신된 과세.
2. 토지 매입에 대한 수수료 폐지. 이자율 인하, 국민들에게의 점차적 토지 양도.
셋째 항목은 자본에 의한 노동 분쇄에 대한 조치로 이루어졌나이다.
1. 노동의 법적 보호.
2. 직업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협력할 목적으로 노동조합을 설립할 노동자들의 자유.
3. 하루 8시간 근무. 초과 근무 제한
4. 자본에 대항해 투쟁할 노동의 자유
5. 노동자를 위한 국가보험법 제정에 노동자계급 대표의 참여.
6. 최저 임금
이것들이, 폐하, 저희의 주된 요구들이옵니다. 그것들의 수행을 명하소서. 이것이 이루어지리라 저희에게 다짐해 주소서, 그러면 당신께옵서는 러시아를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며, 그러면 당신 이름은 영원히 저희 마음, 저희 자식들의 마음, 저희 자식들의 자식들 마음에 새겨지리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께옵서 다짐을 건네지 않으신다면, 당신께옵서 저희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여기서, 이 광장에서, 당신의 궁전 앞에서, 저희가 갈 곳도 없고, 다른 곳에 있을 이유도 없으므로 인하여 죽기로 정했나이다. 저희에게는 오직 두 가지 길이 열려 있을 따름이나이다. 하나는 자유와 행복으로, 다른 하나는 무덤으로 이어지옵니다. 이 길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시면, 오, 차르시여, 저희는 그것을 따르리이다, 심지어 그것이 저희를 죽음으로 이끈다 하여도.
만일 저희 목숨이 고통을 겪는 러시아를 위한 학살이 된다면, 저희는 그 희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저희는 그것을 기쁨으로 바치나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상황의 모든 역설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행동은 다양한 실제 요소들의 결합된 압력의 논리적 귀결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작용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자연스러운 “통합synthesis”이었다.
한편으로 차르 앞에서 집단 시위를 벌인다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차르의 선한 의지에 대한 대중의 순진한 믿음을 보여주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우리는 이미 “차르 신앙”이 인민에게 행사한 지배권을 기술했다). 시골과의 유대를 깬 적이 없던 러시아 노동자들은 “작은 하느님”에게 도움과 보호를 요청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예로부터의 농민 전통에 입각했다. 자발적이고 압도적인 분출로 인해 그들에게 주어진 특이한 상황을 이용해서, 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아픈 곳을 가리켰고,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해결책을 얻고자 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적어도 부분적인 성공을 기대하면서도,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어디 서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다른 한편으로 혁명 정당들―그 운동을 대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너무나 무력해 그 운동을 멈추기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의 영향력은 가폰에게 어느 정도 압력을 가할 만큼 강했고, 그에게 그의 행동을 “혁명화”하도록 강요했다.
간단히 말해 그 행위는 부산물이었으나, 자연스러운, 살아있는 세력들의 산물이었다.
지식인이나 자유주의 조직들, 그들은 전개되는 사건을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가폰 자신의 행동과 심리는 역설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원래는 광대요 못한 경찰로부터 보수를 받는 요원이었으나, 그는 그를 저항할 수 없으리만큼 앞으로 내몬 대중 운동의 전율 돋는 물결에 휩쓸렸다. 운동은 결국 그를 이끌었다. 사건들은 그 자신도 모르는 새 그를 우상화한 군중들의 선두에 서게 했다. 모험적이고 낭만적인 그는 환상에 젖어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사건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인식한 그는 아마도 과장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는 이미 온 나라가 혁명을 겪고, 왕좌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그 운동의 최고지도자인 가폰, 국민의 우상이 영광의 정상으로 옮겨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실이 정당화하는 듯한 이 꿈에 매료된 그는 마침내 자신이 시작한 운동에 육신과 영혼을 바쳤다. 경찰 요원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는 이 열병 같은 나날 동안 거대한 폭풍의 번개에 완전히 현혹되어, 그에게 거의 신성한 사명으로 보였던 그의 새로운 역할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1905년 1월 초 가폰의 전망은 그러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가 성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적어도 사건 며칠 전 가폰을 만나 그가 활동하는 것을 본 필자의 개인적인 소감은 그러하다.
심지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이상한 요소―정부의 침묵과 열띤 준비 기간 동안 경찰이 개입이 전혀 없었던 것―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경찰은 새로운 가폰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의 행동을 영리한 움직임으로 해석하며 끝까지 그를 신뢰했다. 그리고 경찰이 마침내 변화와 임박한 위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일어난 사건들을 멈추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한 정부는 결국 이 운동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경찰은 잠시간 아무 지시가 내려오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이해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사실이 대중을 격려하고 그들의 희망을 키웠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정부는 이 운동에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굴복될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논평했다.
겨울 궁전으로 향하는 행진은 1월 9일 일요일 아침(옛 달력)으로 정해졌다. 마지막 날들은 주로 “모임”에서 대중들에게 “청원서”를 낭독하는 데 할애되었다. 거의 모든 곳에서 같은 순서가 반복되었다. 하루 일과 내내, 가폰 스스로나 그의 친구들 중 한 명은 회의 장소를 교대로 채우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청원서를 읽어주고 논평했다. 자리가 채워지면 곧 문이 닫히고 탄원서가 낭독되었다. 참석자들은 별도의 서명 용지에 자기 이름을 서명하고 방을 나갔다. 길에서 참을성 있게 차례를 기다려 온 또 다른 군중이 방을 가득 메웠고, 의식이 반복되었다. 이는 자정이 넘도록 모든 모임에서 계속되었다.
이러한 마지막 준비에 비극적인 한 줄을 더한 것은 연설자의 최상의 호소와 호소에 대한 군중들의 엄숙하고 암울한 맹세였다. “노동자, 농민, 그 외 동지 여러분!” 연설자가 말했다. “불행한 형제들이여! 여러분 모두 대의와 시위에 충실하시오. 일요일 아침 겨울 궁전 앞 광장으로 나오시오. 그리하지 않는 것은 우리 대의에 대한 반역이 될 것이오. 그러나 조용히, 그리고 평화롭게 와서 다가올 엄숙한 시간까지 서 있으시오. 가폰 신부가 이미 차르께 이를 알렸고, 개인적으로 그 분이 여러분 가운데서 무사할 것이라고 장담했소. 만약 여러분이 잘못된 행동을 허용한다면, 가폰 신부는 그것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오. 여러분은 탄원서를 들었소. 우리의 요구는 정당하오. 우리는 더 이상 이 비참한 삶을 계속할 수 없소.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 찬 가슴을 연 채 두 팔 벌려 차르께 맨손으로 가는 것이오. 그분께서 해야 하실 일은 우리를 받아들여 우리 요청을 듣는 것이오. 가폰 신부가 직접 청원을 제출할 것이오. 희망합시다, 동지 여러분, 희망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차르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 말에 귀 기울여 주시고, 우리의 정당한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시기를 바랍시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만약 우리를 받아들이는 대신, 차르께서 총과 칼로 우리를 공격한다면, 형제들이여, 오히려 그분을 불쌍히 여기시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을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그의 온 왕조와 함께 그가 영원히 저주받게 하시오! 맹세하시오, 모든 동지들, 형제들, 평범한 시민들이여, 그렇게 된다면 그의 배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시오! 그렇게 된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배신자를 파괴할 것이라고 맹세하시오….” 그러자 집회에 참석한 모두가 흥분하여 손을 들어 답했다. “우리는 맹세한다!”
가폰은 스스로 탄원서를 읽었던 곳―그리고 그는 모든 모임에서 적어도 한 번은 탄원서를 낭독했었다―에서 그는 덧붙였다. “나, 사제 게오르기 가폰은, 그렇게 된다면 하느님의 뜻을 통해, 차르에게 바친 맹세에서 그대를 해방시켜 주며, 그를 파괴할 자를 미리 축복하겠노라.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을 테니!” 감정에 북받친 그는 말없이 떨고 있는 청중들에게 이 말을 두세 번 되풀이했다.
“나를 따를 것이라고 그대의 사랑하는 이들, 자식들의 목숨을 대고 맹세하라!” “네, 신부님. 네! 우리는 우리 자식들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라는 대답이 계속되었다.
1월 8일 저녁, 행진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특정 지식인 및 문학 단체는 정부의 결정이 취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경우라도 군중은 궁전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 군중이 고집한다면 주저 없이 총을 쏘라는 것이었다. 대표단이 황급히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당국으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모든 명령이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수도는 철두철미하게 무장한 군대 수중에 있었다.
나머지는 알려져 있다. 1월 9일 일요일 아침, 노동자들(주로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한)과 다양한 이들로 구성된 엄청난 군중이 겨울 궁전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수도와 교외 온 지역에서 출발한 수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이 집합 장소를 향해 행진했다.
그들은 어디서나 이 인산인해를 향해 끊임없이 총을 쏘아대는 군대와 경찰의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이 밀집된 군중의 압력―시시각각 계속해 증가하는 압력―은 어쨌든 군중들이 궁전을 향해 계속 움직이도록 했고,그 주변 거리를 가득 채우고 혼잡하게 했다. 총성에 흩어진 수천의 사람들은 목표지점으로 끈질기게 움직이고, 샛길과 우회로를 택했는데, 운동의 추진력, 호기심, 분노에 차 있었고, 그 분노와 공포를 외쳐야 할 강한 필요성으로 움직였다.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차르의 궁전 앞 광장에 도달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차르가 그들을 찾아와 그들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고쳐줄 것이라고 믿으며 계속해 희망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다른 이들은 상황이 기정사실화 된다면 차르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남은 사람들, 가장 순진한 사람들은 차르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자신들이 도살당하는 상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처음부터 사실을 은폐한 뒤, 경찰이 이제는 백성들이 “작은 하느님”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려 애쓰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르에게 도착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곳에 있겠노라 맹세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폰이 그곳에 있었다. 아마도 그는 차르에게 도달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어쨌든 인파는 사방에서 뚫고 들어와 마침내 겨울 궁전의 바로 주변까지 침범해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정부는 무장하지 않고 고통스러워하며 절망에 빠진 군중을 총으로 쓸어버리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무서운 광경이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상 유례없는 광경이었다. 군중은 기관총이 발사된 지점에서 공포와 고통, 분노로 비명을 질렀으나 그 거대한 군중은 그 크기에 모든 움직임을 방해받았기 때문에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었는데, 이는 후에 “대학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강풍에 질식하고 짓밟히는 듯, 조금씩 뒤로 밀려난 군중은 다시 시체 위로, 죽어가는 사람들 위로, 부상자들 위로, 새로 도착한 사람들로 인해 뒤에서 밀려왔다. 그리고 새로운 불길이 주기적으로 이 살아있는 덩어리에 죽음의 전율을 보냈다. 이것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인접한 거리가 마침내 비워지고 군중이 도망칠 수 있게 됐을 때까지.
이날 수도에서는 수백의 남녀,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다. 당국은 병사들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양심의 가책을 없애기 위해 병사들을 취하게 했다. 궁전 근처 뜰에 배치된 병사 몇몇은 아무 생각도 없이 “더 잘 보려고” 나무에 오른 아이들을 “격추”하며 즐거워했다.
저녁 무렵에는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다.” 희생자 수는 어림잡아서라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진 것은 그날 밤 시체로 가득 찬 긴 열차가 이 모든 불쌍한 시체들을 도시 바깥으로 운반했다는 것, 그들은 마구잡이로 들판과 숲에 매장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차르는 그날 수도에 있지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군 당국을 자유롭게 풀어준 후, 그는 여름 별장 중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ye Selo로 피신했다.
가폰은 차르의 이콘과 초상화를 들고 가는 이들에 둘러싸여 나르바Narva 문을 통해 궁전으로 이동한 많은 군중을 이끌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군중들도 성문 바로 앞에 주둔한 군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는 간신히 도망쳤다. 첫 총탄이 발사되자마자 그는 납작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잠시 그가 다치거나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에 의해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긴 머리를 자르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얼마 후 그는 정권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외국에 있었다. 러시아를 떠나기 전 그는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짧은 호소문을 보냈다.
“사제된 나는 지금, 무고한 형제, 자매, 아이들을 학살한 모든 자들, 장교들과 병사들을 저주한다. 나는 백성들의 모든 압제자들을 저주한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병사들에게는 나의 축복이 있을지어다. 나는 그들을 차르에 대한 충성 맹세로부터 풀어준다―명령을 통해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한 반역자 차르로부터.”
덧붙여 그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성명을 준비했다.
“…노동자 동지들, 더 이상 차르는 없소! 오늘 그와 러시아 백성 사이에 피의 홍수가 흘렀소. 러시아 노동자들이 러시아 백성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나서야 할 때가 왔소. 그대들은 이 투쟁에 나의 축복 받으시오. 내일 나는 그대들 가운데 있을 것이오. 오늘 나는 잠시 쉬고자 하오.”
이 성명은 전국에 걸쳐 대대적으로 배포되었다.
여기가 가폰의 운명에 대해 조금 언급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일지 모른다.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은 전前 사제는 외국에 정착했다. 몇몇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이 그를 돌보아 주었다. 이제부터 그의 미래는 그에게만 달려있었다. 그는 과거와 관계를 끊고, 교육을 받고, 이념과 입장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받았는데, 다시 말해 진정한 활동가 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가폰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 그의 어두운 영혼 속에서 우연히 타오르던 신성한 불은 그에게 야망과 개인적인 면죄부의 불일 뿐이었다. 불씨는 빠르게 꺼졌다. 가폰은 자기교육과 진지한 활동에 대한 준비에 전념하는 대신, 지루함을 낳는 비활동에 만족했다. 느리고 참을성이 필요한 일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덧없는 모험이 즉각적이고 영광스럽게 반복되기를 꿈꿨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사건들은 오래 걸렸다. 대혁명은 오지 않았다. 그의 지루함은 커졌다. 그는 마침내 예전의 일을 잊고자 방탕한 태도로 눈을 돌렸다. 그는 대개 시간을 음습한 카바레에서 보냈는데, 반쯤 취한 채 매춘부들과 함께 망가진 환상에 대해 통곡했다. 그는 외국에서의 삶을 혐오했다. 그의 조국 상황이 그를 고문했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러시아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에 용서를 구하고 다시 봉사하고자 돌아갈 수 있는 허락을 구하는 편지를 쓸 생각을 했다. 그는 비밀경찰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그들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했다.
그의 이전 수장들은 그의 제안을 꽤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승낙하기 전, 그들은 그에게 회개하고 선의를 지니고 있다는 물질적인 증거를 요구했다. 《사회주의혁명당》의 영향력 있는 구성원들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은 그에게 이 정당에 대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가폰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는 동안, 당의 영향력 있는 구성원 중 한 명인 가폰의 친밀한 동료 기술자 루텐베르크(Pyotr Moiseyevich Rutenberg)는 가폰과 경찰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들었다. 그는 그 문제를 당 중앙위원회에 언급했다. 위원회는 가폰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 그의 권한 내에서 모든 일을 할 책임을 그에게 부여했다(루텐베르크 스스로가 회고록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루텐베르크는 역할을 다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거액의 돈을 받고 루텐베르크가 자발적으로 그의 당을 배반하리라고 짐작하게끔 가폰의 신뢰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가폰이 그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루텐베르크는 마치 수락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가 가폰을 통해 경찰에 매우 중요한 당의 기밀을 전달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들은 가격을 협상했다. 이 협상―루텐베르크가 일부러 거짓으로 오래 끈 반면 가폰은 경찰의 동의를 얻어 실행한―은 루텐베르크 뿐만 아니라 가폰도 돌아갈 수 있게 되며 마침내 러시아에서 마무리되었다.
연극의 마지막 막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루텐베르크는 도착하자마자 가폰의 충실한 동료들이었던 몇몇 노동자들에게 미리 경고했다. 그들은 가폰이 변절자라고 믿기를 거부했다. 루텐베르크는 그가 그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루텐베르크의 “변절”에 대한 대가가 할 대가가 완전히 정산되는 가폰과 루텐베르크의 마지막 만남 때 가폰주의자 노동자들이 숨어 있기로 동의했다.
만남은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버려진 별장에서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은 가폰의 진짜 역할을 확인하고 공개적으로 그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 만남이 이루어지는 방과 근접한 방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들은 가폰의 변절을 확인하자마자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들은 가폰을 향해 몸을 던져 그를 붙잡았고,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한심하게도, 그는 무릎을 꿇고 옛정으로 그들의 용서를 간청했다) 잔인하게 그를 살해했다. 그들은 가폰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의 목에 밧줄을 걸어 천장에 매달았다. 얼마 후 우연히 그의 시체가 발견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폰의 개인적인 서사시가 끝났다.
대체로 진실한 그의 회고록에서, 가폰은 1905년 1월 9일 이전 경찰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정당화하고자―매우 어색하게―노력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모든 사실을 말하지는 않은 것 같다.
운동에 관해서는, 그 나름의 길을 따랐다.
1월 9일의 사건들은 전국적으로 막대한 반향을 일으켰다. 러시아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사람들은 차르에게 그들의 불행을 호소하기 위해 평화롭게 궁전으로 온 사람들의 말을 듣는 대신, 지배자가 냉혹하게 총살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분개하며 알게 되었다. 오랜 기간, 마을에서 위임을 받은 농민들은 진상을 파악하라는 임무를 받고 비밀리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곧 모든 사람이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차르 신앙”이 사라졌다.
이는 또 다른 역사적 역설이다! 1881년 몇몇 혁명가들은 그 전설을 죽이기 위해 차르를 암살했다. 그것은 살아남았다. 24년 후 그것을 죽인 것은 차르 자신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1월 9일 일어난 사건이 파업을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총파업이 되었다. 1월 10일 월요일, 단 하나의 공장도, 조선소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조용한 반란의 움직임이 울려 퍼졌다. 러시아 노동자들의 첫 번째 위대한 혁명적 파업―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파업―이 성취되었다.
중요한 결론은 앞선 모든 것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
사람들이 차리즘의 정체, 상황의 전체성, 투쟁의 참된 과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백하고 광범위한 역사적 경험을 관통하는 삶을 겪어야만 했다. 선전도, 열성적인 이들의 희생도 그 스스로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없던 것이다.
제2부. “소비에트”의 탄생
우리는 이제 러시아혁명의 가장 중요한 국면 중 하나인 “소비에트”의 기원과 초기 활동에 도달하게 된다.
또 다른 역설적인 사실로, 이것은 혁명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고 가장 자주 왜곡된 측면 중 하나다.
오늘날까지 “소비에트”의 기원에 대해 쓰인 모든 것들에는―나는 외국의 연구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건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관심을 지닌 독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간격이 있다. 아무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첫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형성되었는지 정확하게 밝히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거의 모든 작가와 역사가들, 부르주아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멘셰비키”, “볼셰비키” 기타)는 10월 총파업 당시인 1905년 말, 잘 알려진 10월 17일의 차르 선언문(10월 선언-역자 주) 및 그 이후의 사건들과 최초의 “노동자 소비에트”의 기원을 연계해 추정했다. 독자는 다음 장을 읽음으로써 이 간격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작가들―특히 파벨 밀류코프(Pavel Nikolayevich Milyukov)는 그의 회고록에서―은 1905년 초에 미래의 “소비에트”의 선구자들을 막연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한 세부사항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제시고자 했던 세부사항은 틀린 것들이었다. 따라서 밀류코프는 그가 “치들로프스키 위원회Chidlovsky Commission”에서 소비에트의 기원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이는 1905년 1월 전날, 노동자를 대리하는 공식 대리인들의 협력으로 특정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허사였던 공식 기구―반은 정부 기관이고 반은 자유주의적이었던―였다. 밀류코프에 따르면 노사리(Georgii Stepanovich Khrustalev-Nosar)라는 이름의 지식인은 다른 대표단과 함께 위원회의 말단에 “소비에트”―최초의 노동자 소비에트―를 만들었고, 노사리는 이 소비에트의 의장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중추가 되었다. 이는 모호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노사리가 “치들로프스키 위원회”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보여줄 것처럼 그는 이미 이 “위원회” 이전에 결성되어 그것과 아무 연관성도 없는 최초의 노동자 소비에트의 일원―이자 또한 의장―이었다. 다른 작가들도 비슷한 오류를 범했다.
《사회민주노동당》 당원들은 종종 첫 소비에트의 진정한 주동자를 자신들이라고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볼셰비키들은 많은 경우 그들로부터 이 명예를 훔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진실에 대해 무지한 그들 모두가 틀렸다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어느 한 당도, 어느 한 상설 조직도, 어느 한 “선구자”도, 최초의 소비에트라는 개념을 낳지 않았다. 소비에트는 집단적 합의의 결과로서, 소규모로, 우연히, 완전히 사적인 모임의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3]
독자가 여기서 발견하게 될 자료는 이전에 출판된 적이 없으며 “알려지지 않은 혁명”에서 가장 뜻밖의 장 중 하나다. 역사적 진실을 재구성할 때가 되었다. 이는 이 진실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더욱 절박하다.
독자들이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1905년 말이 아니라 그해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최초의 “노동자 대표단 소비에트”의 탄생에 본의 아니게 관여했다.
그 당시 행동에 참여했던 노동자 가운데 한 명이 아직 살아서 그 이야기를 전할 수 있지 않은 이상, 오늘날 나는 아마도 이 역사적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일자를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이전 몇 번인가의 기회에 이 사실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신문들을 연구할 때마다―러시아뿐만 아니라 외국의 신문들도―나는 항상 같은 간격을 발견했다. 러시아에서 최초의 노동자 소비에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작가는 한 명도 없었다. 알려진 모든 것들, 오늘까지 알려진 모든 것들은 이 소비에트가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초대 의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 서기 노사리로, 소비에트에서는 흐루스탈료프(Khrustalyov)로 더 잘 알려졌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소비에트라는 개념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왜 시작되었는가? 어떤 상황에서 도입되어 실행되었는가? 노사리는 어떻게, 왜 초대 의장이 되었는가? 그는 어디서 왔으며, 어떤 정당에 속해 있었는가? 최초의 소비에트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것은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모든 질문은 아직 답이 없는 채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간격이 이해할 법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첫 소비에트의 탄생은 완전히 사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광범위한 캠페인이나 행동 바깥에서, 모든 선전의 범위를 넘어, 매우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독자는 내가 하는 말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혁명의 이 측면을 다룬 글들에서 독자는 거의 우연히 언급된 노사리-흐루스탈료프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또한 당혹스러운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이 사람이 어떻게, 언제 등장했는지, 왜,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 그가 첫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작가들은 노사리를 언급하는 것에 눈에 띄게 짜증을 내고 있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 침묵할 수 없는(침묵하기를 강하게 원하더라도) 그들은 노사리와 그의 역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부정확한 몇 마디를 중얼거리다가 1905년 말 레프 트로츠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이 된 때부터의 활동으로 서둘러 넘어간다.
이 재량권, 이 성가심, 그리고 이 성급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전반적으로 역사학자도 사회주의자(트로츠키 포함)도 정당들도 소비에트의 진짜 기원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고, 이를 인정하는 것은 틀림없이 짜증 나는 일일 것이다. 둘째로, 사회주의자들이 진실을 알고 그것을 고려하고 싶어 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그들이 한 모든 것은 훨씬 나중에 그것을 이용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진실을 알든 모르든 그들은 이 사실을 슬쩍 넘어가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4] 이 사실들을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 언급한 필요성이 야기하는 짜증스러운 감정 때문이었다. 또 한 편으로는, “대중 언론”에 소비에트에 관해 글을 쓸 기회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소비에트의 기원에 대한 침묵을 끝내고, 오류와 신화에 맞서 싸우고, 진실을 밝힐 생각을 접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전, 어떤 기사와 잡지에 실린 가식적인 암시와 거짓말에 분개한 나는 파리에 있는 러시아 역사 잡지 발행인인 M. 멜구노프(M. Melgunov)를 방문했다. 나는 순전히 참고 자료 제공의 목적으로 그에게 최초의 노동자 소비에트의 탄생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했다. 나의 제안은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우선 출판사가 내 본문을 전혀 수정하지 않겠다는 나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둘째로 그의 글이 공정한 역사 출판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에 대해 말할 의무가 있는 나는 그것들이 전개된 사실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언론이―역사적으로든 다른 목적으로든―관심이 있다면, 여기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04년에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 가운데서 문화와 교육 업무를 맡고 있었다. 나는 나만의 방법을 따라서 홀로 계획을 수행했다. 나는 직관적으로 혁명적이었으나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고, 갓 대학을 졸업했었다.
연말 무렵, 나는 백 명이 넘는 노동자를 교육하고 있었다.
내 학생 중에는 남편과 함께 가폰의 노동자 모임에 속한 젊은 여성이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가폰이나 그의 “모임”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듣지 못했었다. 어느 날 저녁, 학생은 나를 우리 동네 “모임”으로 데려갔고, 이 작업과 그 설립자에 관심을 가지기를 몹시 바랐다. 그날 저녁 가폰이 회의에 모임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가폰의 진짜 역할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진보적인 노동자들은 그의 계획에 대해 완전한 신뢰를 갖지 못했으나―왜냐하면 그것이 합법적이고 정부로부터 발현된 것이었기 때문에―그들은 그에 대한 그들만의 해석을 지니고 있었다. 사제의 다소 불가사의한 행동이 그들의 해석에 확신을 주는 듯했다. 그들은 합법이라는 보호막 아래 가폰이 정말로 거대한 혁명운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었다(이것이 후에 많은 노동자가 그 사람이 경찰 요원 중 하나였다고 믿기를 거부한 이유 중 하나다. 이 역할이 명백하게 밝혀지자 가폰의 친한 친구였던 몇몇 노동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월 말, 나는 가폰을 만났다.
그의 인성은 나를 매료시켰다. 그쪽에서는 내 교육 활동에 관심이 있었―거나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
우리는 다시 만나 더 길게 이야기하기로 약속했고, 이를 위해 가폰은 자기 주소가 적힌 방문증을 내게 주었다.
며칠 뒤 잘 알려진 푸틸로프 공장 파업이 시작되었다. 그 직후, (1905년) 1월 6일 저녁, 내 학생은 격한 감정으로 내게 사건들이 극도로 심각하게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폰은 수도의 노동 대중들의 막대한 운동을 촉발했다. 그는 모든 모임을 방문해 군중에게 열변을 토하며 1월 9일 일요일에 겨울 궁전 앞에 모여 차르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자고 요구했다. 그는 이미 청원서를 작성했으며, 다음 날 저녁인 1월 7일, 우리 모임에서 그것을 읽고 논평하기로 했다.
그 이야기는 내가 듣기에 거의 가망이 없어 보였다. 나는 직접 상황을 검토해 보고 싶었기에 다음 날 저녁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다음날 나는 모임에 갔다. 거센 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군중이 방과 거리를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진지하고 조용했다. 노동자들 외에도 지식인, 학생, 군인, 경찰 요원, 소규모 동네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경비원은 없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가폰 “신부님”이 곧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왔다. 그는 꽉 들어차 서 있는 밀집된 인파를 뚫고 재빨리 단상으로 나아갔다. 그 방에는 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있는 듯했다.
침묵은 인상적이었다. 돌연 커다란 모피 코트를 벗지도 않고 단추만 푼 채, 그의 캐석(cassock. 성직자의 통상복-역주)과 사제의 은 십자가가 눈에 띄게끔 하면서, 퉁명스럽고 단호한 몸짓으로 커다란 겨울 모자를 벗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가폰은 첫마디부터 주의 깊게 들으며 전율하고 있는 이 많은 군중에게 청원서를 읽고 설명했다.
극도로 목이 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그는 며칠 동안이나 쉬지 못해 지쳐있었다―그의 연설은 거의 거룩하게, 하지만 동시에 따뜻하고 눈에 띄게 진실하게, 그의 모든 간청과 호소에 대해 기뻐 날뛰며 반응하는 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바로 다가섰다.
그가 남긴 인상은 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는 거대하고 결정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느꼈다. 나는 내가 그 열변을 듣는 동안 특별한 감정에 전율했던 것을 기억한다.
간신히 말을 끝마치고 가폰은 단상에서 내려와 몇몇 충직한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서둘러 떠나면서, 그의 협력자 한 명이 다시 청원서를 다시 낭독하는 동안 바깥에 있는 군중들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많은 사람으로 인해 그와 떨어져서, 그가 서두르고, 초인적인 노력에 열중함과 동시에 녹초가 되고, 또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게 접근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더욱이, 이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나는 학생이 내게 말한 것이 사실임을 이해했다. 거대한 대중의 움직임,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저녁인 1월 8일에 다시 한번 그 모임에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주로 대중과 접촉하고, 그들의 행동에 참여하고, 내 행동을 구체화하고 싶었다. 학생 중 몇 명이 나와 동행했다
내가 모임에서 발견한 것들은 내가 해야만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우선, 나는 다시 한번 거리에 군중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모임 중 한 사람이 “청원서”를 읽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기다렸다.
몇 분 뒤 기운차게 문이 열렸다. 천 명도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방을 나갔다. 또 다른 천 명도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 들어갔다. 나는 그들과 함께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단상에 앉아 있던 가폰주의자 노동자 한 명이 청원서를 읽기 시작했다.
아! 정말 불쾌했다. 전혀 영혼이 없는 나약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아무런 설명이나 결론도 내지 않은 채, 그는 불안해하고 주의 깊은 군중 앞에서 그 글을 웅얼거렸다. 그는 10분 만에 지루한 강의를 마쳤다. 그러고 나서 방은 또 천 명도 넘는 듯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비워졌다.
나는 친구들과 잠시 상의했다. 우리는 결정했다. 나는 서둘러 무대 쪽으로 갔다. 그날까지 나는 한 번도 대중 앞에서 연설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고무하고 교육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나는 다시 한번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하는 노동자에게 다가갔다. “정말 피곤해 보이십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저와 교대하시죠.”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당황스러워했다. 그가 나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계속해 말했다. “저는 가폰의 친구입니다. 여기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가폰의 방문증을 보여주었다. 내 친구들은 나의 제안을 뒷받침했다.
그 남자는 마침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는 일어나 내게 청원서를 주고 단상을 내려갔다.
나는 즉시 청원서를 읽어 내려가며 그것을 해설했는데, 특히 중요한 구절, 항의와 요구를 강조하며 차르가 반드시 이를 거부할 것이라고 확신을 담아 주장했다.
나는 그 청원서를 밤늦게까지 여러 번 읽었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모임의 테이블 위에 서로 밀치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유명한 1월 9일―나는 청원서를 한두 번 더 읽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거리로 나갔다. 엄청난 군중이 첫 신호를 통해 시작할 준비를 하며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9시에 내 친구들과 나는 팔짱을 끼고 첫 세 줄에 줄을 선 뒤 군중이 따라오도록 선동하며 궁전으로 향했다. 군중이 뒤섞여 빽빽하게 줄을 지은 채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는 분명히 광장이나 궁전 어느 곳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네바Neva 강을 건너게 된 우리는 이른바 “트로이츠키Troitskiy” 다리로 가는 길목에서 군대의 장벽과 마주쳤다. 몇 차례 쓸모없는 경고 뒤, 군대는 총을 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총격이 특히 살인적이었다. 군중들은 멈추어 흩어졌는데, 약 서른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그 두 배나 발생했다. 많은 병사가 공중으로 발사했다는 것을 언급해 두어야 하는데, 군대와 마주한 집들 윗층의 많은 창문이 총알로 인해 산산조각 났다.
며칠이 지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파업 대오는 거의 온전히 남아 있었다.
이 엄청난 파업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그것은 어떤 정당이나 어떤 노동조합 같은 기구(당시 러시아에는 노동조합이 없었다)에 의해, 혹은 어떤 파업 위원회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의 주도 아래, 그리고 완전히 자유로운 힘으로, 노동 대중은 공장과 조선소를 나섰다. 정당들은 늘 해오던 습관처럼 그 운동을 끌어들여 이용할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곧 이러한 문제에 마주쳤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가난이 파업 참가자들의 문을 두드렸다. 이에 곧바로 마주해야만 했다. 반면, 모든 곳의 노동자들은 투쟁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계속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의 지도자를 빼앗긴 “모임”은 자신들이 궤멸 되었으며 거의 무력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당들은 전혀 활기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행동을 조정하고 주도할 조직이 시급했다.
이 문제가 수도의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주장되고 해결되었는지는 나 역시 모른다. 아마도 “모임”의 일부는 그들 지역의 파업 참가자들에게 적어도 물질적인 원조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살던 구역에서는 사건들이 구체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독자들이 앞으로 볼 것처럼, 그것들은 뒤에 대중행동으로 이어졌다.
우리 집에서는 근처의 약 마흔 명의 노동자가 매일 모임을 가졌다. 경찰은 당분간 우리를 내버려 두었다. 최근 사건들 이후 경찰은 이상한 중립을 유지했다. 우리는 이 중립을 이용했다. 우리는 행동할 방법을 찾았다. 우리는 몇몇 결정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내 학생들과 나는 우리 학습모임을 마치고 개별적으로 정당에 가입해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모두 그 사건들을 혁명의 시작이라고 여겼다.
1월 9일 이후 여드레쯤 지난 어느 날 저녁, 누군가 내 방 문을 두드렸다. 나는 홀로 있었다. 키가 크고 열려 있고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젊은 남성이 들어왔다.
“당신이 아무개 씨요?” 그가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을 계속했다.
“오랫동안 당신을 찾고 있었소. 어제 드디어 당신 주소를 알게 되었고. 나는 법률서기인 게오르기 노사리라고 합니다. 여기 방문한 이유를 설명하겠소. 1월 8일, 나는 당신이 청원서를 읽는 것을 들었소. 나는 당신이 많은 친구, 노동자 단체와 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소. 그리고 당신은 어떠한 정당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았고.”
“그렇습니다.”
“좋소, 나도 정당에 속해 있지 않소. 나는 그들을 믿지 않소.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혁명적인 사람이고, 노동자 운동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나는 노동자 중에 아는 이가 없소. 그런 반면 나는 정권에 반대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 모임과 광범위하게 접촉하고 있소. 그래서, 내게 생각이 있습니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그 아내들, 그리고 아이들이 파업으로 인해 끔찍하게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반면에, 저는 이런 비참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가장 원하는 부유한 사업가들을 알고 있지요. 요컨대, 나는 파업 참가자들을 위해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소. 하지만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조직적이고 공정하며 유용한 방법으로 분배하느냐 하는 것이오. 난 당신을 생각했소. 당신과 당신이 알고 있는 몇몇 노동자들이 내가 가져올 수 있는 금액을 받아서 1월 9일 파업 참가자들과 희생자 가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겠소?”
나는 바로 받아들였다. 내 친구 중에는 사장의 마차를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가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사용해 노동자들을 방문하여 구호품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저녁 친구들과 만났다. 노사리는 그곳에 있었다. 그는 이미 수천 루블을 가지고 온 상태였다. 우리의 행동은 바로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꼬박 하루를 이 일에 몰두했다. 저녁에 나는 노사리로부터 필요한 자금을 받아 방문 일정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파업 참가자들에게 돈을 분배했다. 이렇게 해서 노사리는 나를 찾아온 노동자들과 알게 되었다.
그러나 파업은 끝나가고 있었다. 매일 몇몇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자금이 바닥나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행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지금 어떤 형태여야 할까?
공동의 행동이 계속되지 않고 영원히 분리될 것처럼 보이는 전망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해 보였다. 자신이 선택한 정당에 개별적으로 가입하기로 한 우리 결정은 더 이상 우리를 만족스럽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것을 원했다.
노사리는 정기적으로 우리의 토론에 참여했다.
여느 때처럼 우리 집에 몇몇 노동자가 모여 있던 어느 날 저녁―노사리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우리는 상설 노동자조직을 구성하자는 생각을 했다. 위원회나 협의회 같은 것들로, 이를 통해 일련의 사건들을 올바르게 따라가고, 모든 노동자 간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필요하다면 그들에게 상황을 알리며, 혁명적인 노동자들의 집결지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떻게 이 생각이 우리 사이에 떠올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제안한 사람은 노동자 중 하나였다고 기억한다.
러시아어로 정확히 평의회를 뜻하는 소비에트라는 단어는 이런 구체적인 의미로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나왔다.
간단히 말해, 이 첫 번째 협의회는 노동자들의 상설 사회 조직 같은 것이었다.
그 생각은 채택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소비에트”가 어떻게 조직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기능할 것인지가 결정되었다.
그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모든 대규모 공장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협의회 창설을 알리고 노동자 대표 협의회(소비에트)로 명명된 조직의 간부 선거를 비공식적으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되었다. 누가 소비에트의 일들을 지휘하는가? 누가 이끌고 지도하는가?
그곳에 있던 노동자들이 주저 없이 내게 이 자리를 제안했다.
노동자들이 내게 표한 신뢰에 감동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노동자입니다. 여러분은 노동자로서 여러분의 이익을 다룰 기구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여러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 중 하나가 아닌 사람에게 운명을 맡기지 마십시오. 새로운 주인을 위에 두지 마십시오. 그들은 결국 여러분을 지배하고 배신하게 될 겁니다. 나는 여러분의 투쟁과 해방에 관련된 모든 일에서 오직 여러분 자신만이 참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보다 여러분을 위하거나 대신해서 무언가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서 의장, 서기, 그리고 행정위원들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의 교육을 전제로 하는 지적, 도덕적인 조언이 필요하다면 지식인, 교육받은 사람들이 기쁘게 여러분을 주인으로서 이끌지 않고, 조직에 간섭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교육에서 박탈당한 것은 여러분 잘못이 아니기에 그들은 여러분에게 이 도움을 줄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지식인 동료는 심지어 여러분의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오직 조언자로서만 말이지만요."
나는 또 다른 이의도 덧붙였다. “나는 노동자가 아닌데 어떻게 여러분 조직의 일원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어떤 방법으로 참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그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노동자 등록증이 나를 위해 발급될 것이며, 나는 다른 이름으로 조직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러한 절차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나는 그것이 나와 노동자들에게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고 불행을 초래하리라고 생각했다. “노동자 운동에서는 모든 것이 솔직하고 정직하며 성실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 제안에도 불구하고 내 동료들은 “안내자” 없이 무언가를 스스로 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하다고 여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노사리에게 의장직을 제안했다. 그는 나와 같은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못했기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며칠 뒤 그는 공장 대표 흐루스탈료프라는 이름이 적힌 노동자 등록증을 받았다.
곧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러 공장 대표들이 첫 회의를 개최했다.
노사리 흐루스탈료프는 대표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 조직의 의장이 되어 체포될 때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최초의 소비에트가 탄생했다.
얼마 뒤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다른 공장의 대표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 숫자는 상당했다.
몇 주 동안 소비에트는 정기적으로, 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비밀리에 만났다. 그들은 「노동자 대표단 소비에트로부터의 소식(「이즈베스티야Izvestia」)」이라는 노동자 소식지를 출판했다. 동시에 그들은 수도에 있는 노동자들의 운동을 이끌었다. 한때 노사리는 소비에트의 첫 대표로서 앞서 언급한 “치들로프스키 위원회”에 참석했다. 그는 위원회에 환멸을 느껴 떠났다.
얼마 후 최초의 소비에트는 정부의 박해로 인해 회의를 거의 전면 중단해야 했다.
1905년 10월 혁명운동 당시, 완전히 재건된 소비에트는 공개회의를 재개했다. 그 존재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 시기부터였다. 이것이 그것의 기원에 관해 널리 퍼진 오류를 부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은밀한 작은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노사리는 아마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독자는 그의 개인적인 운명에 대해 아래에서 몇 마디를 읽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아는 한, 그는 이런 사실들을 결코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 사건에 가담한 노동자들은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이 사실을 언론에 밝히려고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5]
《사회민주노동당》은 이 소비에트에 침투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미래의 볼셰비키 위원인 《사회민주노동당》 당원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에 들어가 스스로를 비서로 임명했다. 후에 흐루스탈료프 노사리가 체포되었을 때, 트로츠키는 의장이 되었다.
1905년 1월 수도의 노동자들이 보인 본보기는 여러 다른 도시의 노동자들로 인해 뒤따라졌다. 노동자 소비에트가 여기저기서 결성되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 그들의 존재는 일시적이었다. 그들은 지방 당국에 의해 신속하게 적발되고 억압되었다.
반면, 우리가 보아온 것과 같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오랫동안 계속해 활동했다. 1월 9일의 사건 이후, 특히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큰 좌절을 겪은 이후, 중앙 정부는 감히 그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탄압은 한동안 노사리의 체포에만 국한되었다.
게다가 1월 파업은 그 자체로 추진력이 부족해 끝이 났다. 보다 광범위한 운동이 없었기에 첫 소비에트의 활동은 곧 보잘것없는 과업으로 전락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1905년 말 마침내 진압되었다. 차르 정부는 1905년 혁명운동의 마지막 흔적을 “청산”하고 트로츠키 및 수백 명의 혁명가를 체포하고 모든 좌파 정치조직을 파괴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뀐)의 소비에트는 1917년 2~3월의 결정적인 혁명 당시 다시 등장했다. 그때 소비에트는 전국의 모든 도시와 주요 지역에 결성되었다.
제3부. 참혹한 전쟁; 혁명적 파업의 승리
1905년 1월의 사건들로 야기된 파도는 바로 진정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온 나라가 요동쳤다.
1905년 봄 이래, 차르 정권의 전반적인 상황은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주된 이유는 차르 정권의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경험한 쓰라린 패배였다.
1904년 2월에 시작된 이 전쟁은 엄청난 오만과 함께 국가주의적, 애국적, 군주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려는 목적을 주로 수행되었으나 절망적으로 패배했다. 러시아 육군과 함대는 완전히 패배했다.
여론은 공공연하게 실패에 대해 당국의 무능과 체제의 퇴보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많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다른 계층들도 증가하는 분노와 반란의 정신에 빠르게 사로잡혔다. 패배―연달아 이어진―의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분노는 한계를 알지 못했고, 동요는 널리 퍼졌다.
정부는 자신들의 패배를 깨닫고 침묵했다.
이 상황을 이용해 자유주의 및 혁명적 집단들은 정권에 대해 폭력투쟁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허가를 요구하지 않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실천했다. 그것은 진정한 “정치적 자유”를 쟁취한 것이었다. 모든 경향, 심지어 혁명적인 경향의 신문도 등장해 검열이나 통제 없이 나타나서 자유롭게 판매되었다. 정부와 모든 제도가 맹렬히 비난받았다.
소심한 자유주의자들조차 행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연합”(모든 노동조합의 활동을 지휘하는 일종의 중앙위원회), 비밀조직인 “해방노동조합”(정치 조직) 등 수많은 직종의 노동조합들을 설립했다. 그들은 또한 “《입헌민주당the Constitutional-Democratic Party》”이라는 정당을 공식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매진했다. 정부는 이미 1월 파업과 소비에트의 모임을 용인했기에 이것들을 모두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암살은 점점 빠르게 연이어 일어났다.
여러 도시에서 폭력시위, 더구나 심각한 봉기가 일어났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도 했다.
농민들은 여러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자크리”의 행동(농민 반란)을 촉발했고, 성을 불태우고, 토지를 수용하고, 지주들을 쫓아내거나 심지어 암살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계획을 지닌 《농민연합Union of Peasants》이 결성되었다.
정권의 적들은 매우 많아지며 대담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옳았다.
정부의 군사적인 패배와 고통스러운 “도덕적인” 상황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바로 돈이다. 주로 프랑스에서 열린 해외에서의 차관 확보를 위한 협상은 차르 정권에 대한 신용 결여 탓에 끝없이 지연되었다.
1905년 여름 사이 육군과 해군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흑해 해군의 주요 부대 중 하나인 전함 포템킨의 유명한 반란과 서사시는 그 뛰어난 예시다. 몰락하는 정권의 마지막 장벽―군대―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온 나라가 차리즘에 점점 더 단호히 맞서기 시작했다.
1905년 8월, 다양한 압박에 굴복한 황제는 마침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후적이지만―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위선적이지만―특정한 “자유”를 인정하기로 정했다. 그는 또한 매우 제한된 권리와 극도로 편협한 선거 절차를 바탕으로 대표자 국회(“두마Duma”)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 내무부 장관인 불리긴(Alexander Bulygin)이 이 선거를 준비하고 시행을 담당했다. 그러나 때늦고 명백히 위선적인 이 소심한 조치는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선동과 반란이 계속되었고, “불리긴의 두마”라고 불리는 이 “두마”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리긴은 “사임”(8월 말)할 수밖에 없었고, 니콜라이 2세가 더 의미 있는 양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 비테(Count Sergei Yulyevich Witte)로 대체되었다.
한편, 정부의 무활동과 스스로도 인정하는 무능함은 반대세력과 혁명 세력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10월 초부터 사람들은 혁명의 최종장의 전주곡으로서 전국을 아우르는 규모의 총파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국을 아우르는 이 파업―근대사상 유례가 없는 어마어마한 파업―은 10월 중순에 일어났다. 그것은 1월의 파업만큼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오랫동안 이를 갈망하고 준비해 온 소비에트, “노동조합 연합” 및 주로 수많은 파업 위원회에 의해 조직되었다. 공장, 조선소, 작업장, 창고, 은행, 행정 사무실, 철도 및 기타 모든 교통수단, 우체국 및 전신국―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러시아의 생활이 멈추었다.
정부는 발판을 잃고 패배를 인정했다. 10월 17일(1905년), 차르는 그 유명한 “10월 17일의 선언”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여기서 그는 엄숙하게 자신의 “친애하고 충실한 신하들”에게 모든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고 가능한 빨리 대표자 평의회의 일종인 “국가 두마The State Duma”를 소집하기로 정했다고 선언했다[두마라는 용어는 이전 세기의 두마보야르스카야Dumaboyarskaya라는 국가 평의회 혹은 귀족(보야르Boyar)원에서 따온 것인데, 차르가 자신의 일을 수행하도록 도움을 요청한 기관이었다. 이후 16세기와 17세기에는 젬스카야 두마Zemskaya Duma가 고대 프랑스 군주제의 에타 제네로États généraux에 버금가는 모임인 상이한 계급들의 대표자 모임에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기의 “고로드스카야 두마Gorodskaya Duma”는 “시의회”를 의미했는데, “고로드”는 “시市”를, “두마”는 “사고思考”를 의미했다]. 선언문에 따르면 이 두마는 정부를 돕기 위해 소환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막연한 입헌 체제에 대한 막연한 약속이었다. 몇몇 단체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옥탸브료노크Oktyabryonok”라고도 하는 “《10월당Octobrist》”이라는 정당이 곧바로 나타나 선언문이 알린 개혁을 받아들이고, 적용하고, 옹호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차르 정부의 이러한 행동은 “헌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 외국에서 효과를 내기 위해서. 혁명이 끝나고 정부가 사태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았다는 인상을 주고, 따라서 여론, 특히 프랑스 금융계의 여론에 영향을 미쳐서 차관 협상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2. 대중을 속이고, 진정시키고, 혁명으로 향하는 길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두 가지 목표는 실현되었다. 파업은 끝나고 혁명적인 기운은 깨어졌다. 외국에서 생겨난 인상은 완전히 호의적이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 차르 정부는 여전히 혁명을 진압할 만큼 강하다는 것이 보여졌다. 차관이 허가되었다.
혁명적 정당들이 그 모험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그들은 선언문을 단순한 정치적 책략으로 여겨 즉시 노동 대중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조금 수상쩍은 상태였다. 그들은 마치 확실하게 확신을 얻은 것처럼, 만족을 손에 넣은 것처럼 파업을 끝냈다. 그러나 파업이 끝났다는 사실은 단순히 혁명에 힘이 결여되어 있고 아직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신호일 뿐이었다. 진정한 만족을 나타내는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사기의 모습을 인지했기에 “새로운 권리”의 사용에 서두르지 않았다. 이는 금세 증명되었다. 일부 도시에서는 “승리”와 차르가 약속한 “새로운 체제”를 기념하기 위해 조직된 평화적인 공개 시위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고 유대인 포그롬이 잇따랐다―성벽에서 차르의 “선언문”이 공개되는 동안 말이다.
**ㅍ제4부. 혁명의 패배; 충격에 대한 평가
1905년 말,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차관에 찬성하기로 결정했고, 거액이 승인되었다. 이 “수혈”은 빈사 상태에 빠진 차르 정권을 구해냈다.
더욱이 정부는 지나치게 굴욕적이지 않은 평화 협정으로 전쟁을 끝마치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중단되었던 반동이 일어섰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앞에 아름다운 미래를 내걸고 혁명과 싸우며 에워쌌다.
무엇이 되었든 혁명은 스스로 숨을 거두어야 했을 것이다. 10월 파업은 최대한의 노력이자 가장 높은 지점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숨 돌리는 것”, “일시 정지”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마도 좌파 두마로부터의 자극 아래, 추후 반등할 것을 기대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는 동안 차르가 선언문을 통해 사후적이나마 약속하고 사람들이 받아들인 자유는 철저히 억압되었다. 정부는 다시 혁명적인 언론을 불법화하고, 다시 검열을 시행하고, 대량으로 체포를 진행하고, 손이 닿는 모든 곳의 모든 노동자조직이나 혁명적 조직을 청산하고, 소비에트를 탄압하고, 노사리와 트로츠키를 투옥하고, 주요 봉기가 일어난 지역에 모범적인 처벌을 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숙청했다. 군대와 경찰은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감히 건드리지 못한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머지않아 소집될 두마였다.
그럼에도 혁명은 반동의 처치 곤란에 대응해 두 번의 사건을 더 만들어냈다.
첫 번째는 슈미트(Pyotr Petrovich Schmidt) 소령의 지휘 아래 일어난 흑해함대의 새로운 반란이었다. 소요는 진압되었고 슈미트는 총살대에서 사살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1905년 12월 모스크바 노동자들의 무장 반란이었다. 그들은 며칠이나 정부군에 대항해 버텼다.
이를 끝장내기 위해 정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부대들을 불러들였고 포병부대까지 소집했다.
이 반란이 일어나는 동안, 전국적으로 새로운 총파업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만약 이 파업이 일어났더라면 반란은 승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비 조직이 10월과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힘이 빠져 있었다. 파업이 총체적이지 않았다. 우편뿐 아니라 철도도 기능을 다 했다. 정부는 군대를 수송할 수 있었고 모든 곳에서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혁명의 숨이 턱 끝까지 차 있다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1905년 말 폭풍은 장애물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그쳤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며 불가결한 작업을 수행했다. 폭풍이 지형을 휩쓸고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의 삶과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영원한 흔적을 남겼다.
우리는 이제 그 충격의 마지막 “대차대조표”를 살펴볼 것이다.
“대변” 쪽에서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우선 구체적으로 두마가 있었다. 한동안 정부는 두마에 지나치게 쓰라리거나 급속한 실망을 하지 않도록 막기 위해 충분히 폭넓은 선거법에 정성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두마 역시 “한숨 돌리기” 위해서는 “일시 정지”해야만 했다.
모든 사람이 두마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1906년 봄으로 예정된 선거는 전국적으로 열성적인 활동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정당이 거기 참여했다.
이런 국가적인 상황으로 인해 벌어진 상황은 매우 역설적이었다. 좌파 정당들이 선거 선전을 공공연히 합법적으로 확산하는 동안(정부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고 교활한 함정을 설치함으로만 이에 개입할 수 있었다) 교도소는 운동을 청산할 당시 체포된 같은 정당의 당원들로 붐볐고, 언론과 출판은 여전히 재갈이 물려 있었다. 노동자들의 조직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는 단지 표면적인 역설일 뿐이다. 그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이 설명은 또한 정부가 두마의 기능을 어떻게 예측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선거 때문에 인민들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어야 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두마가 절대왕정에 반하기 위해 소집된 기구로 해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정부의 관점에서 두마는 단지 협의적이고 종속적인 보조 기관에 지나지 않아 당국의 특정 업무에서 관료들을 돕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비록 좌파 정당들의 선거로 인한 동요를 어느 정도 용인할 필요가 있기는 했으나, 정부는 사전에 정당, 유권자, 두마 자체의 반항적인 태도에 대해 일정 정도만 허용하고 대응하기로 정해두었다. 정부가 보기에 두마는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에 정부가 혁명가를 감옥에 가둔 것은 완벽하게 논리적인 것이었다.
러시아의 삶에서 완전히 새로 등장한 또 다른 구체적인 사실은 다양한 정당들의 구성과 합법성―비록 일정 선에 그쳤지만―이었다.
1905년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는 비밀스러우며 문자 그대로 “정치적”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인 두 정당만이 있었다. 《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주의혁명당》이 그것이었다.
10월 17일 선언문, 선거운동에 대한 전망으로 주어진 약간의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거운동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합법 및 준합법 정당들을 양산했다.
고질적인 군주제 지지자들은 “러시아 국민 연합Union of Russian People”을 창설했다. 이는 “공약”으로 두마를 포함해 “범죄적 폭동의 압력으로 인해 약속했던 모든 것”을 진압할 것을 요구한 극단적 반동주의의 “포그롬주의자” 정당이었다. 그들은 이렇듯 1905년 사건들의 마지막 흔적을 완전히 없애고자 했다.
덜 격렬한 반동분자들도 있었다. 즉 대다수의 고위 관료, 거대 기업가, 은행가, 귀족, 사업가, 지주들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10월당》” 주위에 모여들었다(이를 “《10월 17일 연합Union of October 17》”이라고 불렀다).
이 두 우파 정당의 정치적 비중은 보잘것없었다. 그들은 우스갯소리 대상이었다.
부자들과 중산층 대부분은 물론, “저명한” 지식인들도 오른쪽으로는 “《10월당》”에 가까이, 왼쪽으로는 공화주의적 경향을 표출한 중도파의 거대 정당에 자리를 잡았다. 다수당의 공약은 절대주의를 종식하는 입헌군주제를 요구했다. 군주제가 유지되기는 해야 하나 그 권력은 크게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은 “《입헌민주당》(약칭 “《카데트당Ca-Det Party》”)”이라는 이름을 취했으며 “《국민자유당People’s Freedom Party》”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의 지도자는 주로 지방 자치 단체의 큰 손, 변호사, 의사, 자유주의적 지적 작업에 종사하는 이들, 학자들 가운데 모집되었다. 꽤 많은 자금에 접근할 수 있으며 매우 큰 영향력과 입지를 지닌 이 당은 창설된 그 순간부터 광범위하고 활기찬 활동을 벌였다.
극좌파에는 “《사회민주노동당》”(앞서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그 선거 활동은 굳건한 공화주의적 공약과 혁명적 전술에도 불구하고, 다소 개방적이고 합법적이었다)과 마지막으로 “《사회주의혁명당》”(농민 문제에 관한 것을 제외하면 그 공약과 전술은 《사회민주노동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이 있었는데, 두마 시기에 규칙에 맞고 자유로이 활동하기 위해 “《노동당Labor Party》”(이후 별도의 정당이 되었다)이라는 이름으로 후보를 냈다. 이 두 당이 주로 노동자, 농민 대중뿐 아니라 지식인 노동자들의 광대한 층을 대표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정당들의 공약과 사상에 대한 몇 가지 세부사항을 제공하고자 한다.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정당의 공약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농지農地 문제였다. 이는 시급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필요로 했다. 사실 농민 인구는 너무나 급속히 증가했기 때문에 1861년 해방된 농민들에게 부여된 토지는 그 당시 이미 불충분했고, 지속적인 토지 분할 결과, 사반세기 동안 기근의 바탕이 되었다. “닭 한 마리도 풀어둘 땅이 없다”고 농민들은 말하고 있었다. 농촌의 막대한 인구는 이 문제에 대한 공정하고 효과적인 해결을 점점 더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정당이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 동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1. 《입헌민주당》은 대규모 개인 소유주와 국가의 토지 가운데 일부를 농민에게 양도함으로써 배경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농민들은 공식적이고 “공정한” 평가로 정해진 조건으로, 국가의 도움을 받아 양도된 토지에 대해 점진적으로 값을 지불하게 될 것이었다.
2. 《사회민주노동당》은 농민들이 필요로 하는 토지에 대해 대가 없이 순수하고 단순한 양도를 제안했다. 토지는 국가의 자산이 되며, 필요에 따라 분배될 수 있을 것이었다(토지의 “국유화” 또는 “공유화”).
3. 《사회주의혁명당》은 가장 급진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개인 소유주 손에 있는 모든 토지의 즉각적이며 완전한 몰수, 모든 토지 재산(개인 및 국가를 막론하고)의 즉각적 압수, 국가의 통제 아래 모든 토지를 농민 집단이 처분하여 배치하는 것(토지의 “사회화”).
다른 것들을 하기에 앞서, 두마는 이 시급하고 복잡한 문제에 대처해야만 했다.
우리는 이 시기 극좌파 양당(《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주의혁명당》)의 일반 이념을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1900년경, 이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중심부에는 커다란 견해 차이가 나타났다. “최소계획”을 고집하는 일부 당원들은 다가오는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될 것이며 그 결과는 비교적 온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단번에 “봉건적” 군주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민주공화국, 미래 사회주의의 토대를 마련할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닦는 것―이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러시아에서의 “사회혁명”은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당내 많은 구성원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관점으로는 다음번 혁명이 이미 모든 논리적 결과와 함께 “사회혁명”이 될 모든 기회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은 “최소계획”을 폐기하고 당의 권력 쟁취와 자본주의에 대한 시급하고 결정적인 투쟁을 준비했다.
첫 번째 조류의 지도자들은 플레하노프(Georgi Valentinovich Plekhanov), 마르토프(Julius Martov) 등이었다. 두 번째 조류의 위대한 고안자는 레닌이었다.
이 두 진영 사이의 마지막 분열은 1903년 런던 총회에서 일어났다. 레닌주의 성향을 지닌 《사회민주노동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다수”는 러시아어로 “볼신스트보Bolshinstvo”였기에 이러한 경향의 당파는 볼셰비키라고 불렸다(바꾸어 말하자면 “다수파majoritarians”일 것이다). “소수”는 “멘신스트보menshinstvo”였기에 남은 이들은 “멘셰비키”라고 불렸다(바꾸어 말하자면 “소수파minoritarians”일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조류는 각각 볼셰비즘(다수 경향)과 멘셰비즘(소수 경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17년의 승리 뒤 “볼셰비키”는 자신들을 “《공산당Communist Party》”이라 불렀고, “멘셰비키”들은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권력을 잡은 《공산당》은 “멘셰비키”를 반혁명적이라고 선언하고 그들을 소탕했다.
《사회주의혁명당》 또한 두 개의 다른 정당으로 나뉘었다. “멘셰비키”와 같이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거칠 필요성을 주장한 《사회주의혁명당》 “우파”, 그리고 볼셰비키와 마찬가지로 혁명은 최대한 추진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의 즉각적 철폐와 사회주의(일종의 사회공화국) 확립으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회주의혁명당》 “좌파”가 그것이다.
(1917년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사회주의혁명당》 우파를 반혁명세력으로서 숙청했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와 볼셰비키 정부는 처음에는 협력했다. 이후 양당 간 큰 의견 불일치가 발생하자 볼셰비키는 옛 동맹과 결별했다. 마침내 볼셰비키는 그들을 불법화하고 전멸시켰다.)
1905년 혁명 당시 이 두 반체제적 조류(볼셰비즘과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실질적인 영향은 미미했다.
혁명 당시 등장한 다양한 사상적 조류에 관해 우리의 설명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사회주의혁명당》이 제3의 조류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는데, 이는 당으로부터 분리되어 혁명 중에 부르주아 국가뿐만 아니라 (정치기구로서의) 국가 그 자체의 철폐를 요구했다. 이러한 사상 조류는 러시아에서 최대주의Maximalism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최소계획을 거부한 당파들이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와 결별하고 비정치적 토대를 바탕으로 구축된 완전한 사회주의를 위한 최대계획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즉각적으로 노력할 필요성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대주의자”들은 정당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적 최대주의자 연합Union of Socialist Revolutionary Maximalists》”을 창설했다. 이 “연합”은 자신들의 견해를 알리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그들은 또한 몇 가지 정기 간행물도 출판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 구성원은 많지 않았고 영향력 역시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들은 주로 테러 활동을 수행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혁명적 투쟁에 참여했고, 적지 않은 구성원이 참된 영웅으로서 사망했다.
그들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아나키즘에 매우 가까웠다. 최대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당의 유용성을 부인했다. 그들은 국가와 정치적 권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감히 당장 정치적 권위를 완전히 포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곧바로 완전한 “아나키즘적” 사회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따라서 그들은 “완전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구별했다). 그 사이의 기간으로 최대주의자들은 국가와 권위의 요소들이 “최소한으로 축소”되는 “노동자 공화국”을 제시했는데, 이는 최대주의에 따르면 또한 급속한 소멸이 보장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국가와 권위에 대한 이러한 “일시적” 유지가 최대주의와 아나키즘을 나누었다.
(볼셰비즘에 반대했던 모든 사상 조류와 마찬가지로, 최대주의는 1917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분쇄되었다.)
아나키즘적 혹은 조합주의적syndicalist 개념은(우리는 우리 연구 후반부에 이것들을 철저히 검토할 것이다) 이 시기 러시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 바깥에서는 많은 사람이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아나키즘의 “대부들”―이 러시아인이었으니 러시아는 오랫동안 아나키즘적인 사상과 운동을 지닌 나라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심각한 오해다. 바쿠닌(1814~1876)과 크로포트킨(1842~1921)은 모두 외국에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들 중 누구도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로 각성한 적이 없다. 그들의 작품 또한 1917년 혁명에 이르기까지 외국에서만 등장했으며 주로 외국어로 쓰였다. 특별히 러시아를 위해 번역, 각색 또는 출판된 그들의 작품에서 발췌한 일부만이 큰 위험을 안고 러시아에 비밀리에 유입되었는데, 그 양은 매우 적었다. 게다가 이 몇 권의 출판물을 러시아 내에 배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인들의 사회, 사회주의, 혁명적 교육 전체가 아나키즘적 요소를 전혀 알지 못했고,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나키즘적 사상에 관심이 없었다.
1917년 혁명 이전에는 러시아에 노동자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합주의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노동자조직 형태인 “소비에트”가 1905년 황급히 생겨났다가 조합주의적 개념과 운동이 없었기에 1917년 다시 생겨나게 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만일 노동조합 기구가 존재했더라면 노동자 운동을 주도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미 몇몇 작은 아나키스트 조직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서부와 남부에 존재했다고 언급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은 1905년의 사건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2월의 무장 반란 동안 주목을 끌었다.
(1917년 이후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운동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모든 운동을 분쇄하면서 아나키스트 운동을 짓눌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쉽게 짓밟을 수는 없었다. 1917년 혁명 과정에서 볼셰비키와 아나키즘 사이의 투쟁―그럼에도 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3년 이상 지속되고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이 눈에 띄는 사건―은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될 것이다.)
1905년의 교훈적인 결과, 정신적인 영향으로 돌아가자. 미래에 대한 그것들의 중요함은 얼마 되지 않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업적보다 훨씬 더 컸다.
우선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 “차르 신앙”은 사라졌다. 무수한 대중은 정권의 실체와 그것을 타파해야 할 절박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절대왕정과 차리즘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침내 대중은 이 체제에 오랫동안 반대해 온 모든 이들, 전위적인 지식인들, 좌파 정당들, 그리고 혁명적인 세력 전반과 힘을 합쳤다. 이리하여 진보적 조직들과 대중 사이에 견고하고 광범위한 접촉이 확립되었다. 이제부터 이 접촉은 확산되고, 깊어지고, 강화될 것이었다. “러시아의 역설”이 사라졌다.
이로써 두 가지 주요한 성취가 실현되었다. 한편으로는 궁극적인 혁명이 “기댈” 수 있는 물질적 요소가 존재했다. 이는 두마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포괄적 반란으로의 길을 막았던 정신적 장애물이 무너졌다. 대중은 마침내 그 병폐를 이해하고, 마침내 해방 투쟁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과 합류했다.
다음번 결정적인 혁명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는 1905년의 충격의 “대변貸邊”의 측면이었다.
유감스럽지만 “차변借邊” 역시 몹시 강력했다.
불행하게도 1905년의 운동은 노동계급 조직을 만들 수 없었다. 이는 조합주의적 조직도,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노동 대중은 단결권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들은 연락망도 조직도 없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의 정신적 영향은, 다음번 혁명에서 노동 대중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잃을 것만 가득한 정당들의 파멸적 경쟁에서, 가증스러운 투쟁에서 정당들의 무의식적인 상품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혁명 직전 노동자 운동과 참된 노동자조직의 부재는 사실은 노동자들의 실질적 행동과 실질적 명분을 희생시켜 한 정당, 혹은 다른 정당이 장차 지배하게 될 미래의 문을 열었다.
독자는 이 “부채”의 엄청난 무게가 1917년의 혁명에 치명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에는 혁명을 분쇄할 것이었다.
우리는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최초의 노동자 소비에트 초대 의장인 노사리 흐루스탈료프의 개인적 운명에 대해 아직 무언가 덧붙일 필요가 있다.
운동의 “청산”(1905년 말) 기간 중 체포된 노사리는 재판을 받은 뒤 유죄판결을 받고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는 탈출해 외국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 역시 가폰처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고, 심지어 정규적인 일을 할 수도 없었다. 그는 분명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고 변절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병들고 가난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해외에서의 삶을 이어나갔다.
이는 1917년 혁명까지 계속되었다. 혁명이 발발하자마자 그는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급히 조국으로 달려가 혁명 투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우리가 신뢰하는 한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결국 볼셰비키에 등을 돌리고 그들에게 총살당했다고 한다.
제5부. “일시 정지”
진정한 혁명의 첫 시도로부터 분리된 12년―정확하게―동안 “폭발”과 “충격”은 혁명적 관점에서 아무런 눈에 띄는 것을 추가하지 않았다. 반대로 반동은 일선을 넘어 번성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몇 대규모 파업과 잔인하게 진압된 크론슈타트의 발틱 함대 반란에 주목해야 한다.
두마의 운명은 이 시기 두드러진 사건이었다.
두마는 1906년 5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회기를 시작했다. 이 첫 회기에 엄청난 대중의 열광이 동반했다. 정부의 모든 음모에도 불구하고 두마는 정부에 대항했다. 《입헌민주당》은 당원 수와 대표자들의 자질로 두마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모스크바 대학의 교수이자 당의 가장 저명한 의원 중 한 명인 무롬체프(Sergey Andreevich Muromtsev)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좌파 의원들―《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주의혁명당》(“《노동당》”)―도 인상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모든 사람이 열정적인 관심으로 두마의 심의를 바라보았다. 모든 희망이 두마로 향했다. 사람들은 적어도 의미 있고, 효과적이며, 정의로운 개혁을 기대했다.
그러나 첫 대면부터 적대감이―처음에는 고요했으나 점차 명백하게―“의회”와 정부 사이에 발생했다. 정부는 두마를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태도로 대했다. 그들은 두마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는 순수한 협의체로서도 두마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반면 두마는 입법적이고 헌법적인 기구로서 자신을 강요하려 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긴장되었다.
사람들은 분명하게 두마를 지지했다. 정부의 입장은 불리하고, 우스꽝스럽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해졌다. 그럼에도 정부는 당장 혁명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정부는 이를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부는 군대와 경찰에 의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부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정력적인 신임 장관 스톨리핀(Pyotr Arkadyevich Stolypin)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두마가 주로 농업 계획과 관련해 준비한 “인민에의 호소”를 구실로 삼았다.
어느 날 아침 “국회의원들deputies”은 두마의 문이 닫히고 군대가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군대와 경찰이 거리를 행진했다. 두마―“제1 두마”로 알려진―는 해산되었다. 공식 포고가 발표되어 이 조치를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이는 1906년 여름에 일어났다.
긴 일련의 암살과 몇 차례의 동떨어진 반란을 제외하면, 스베아보르크Sveaborg와 크론슈타트Kronstadt(후자는 단기간에 진압되었고, 전자는 1905년 10월에 일어났다)의 반란을 제외하고는 국가는 평온을 유지했다.
의원들 자신도 사실상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사실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저항은 혁명적인 행동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현재로서는 혁명이 무력하다고 느꼈다(더욱이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정부는 감히 두마를 이토록 무례한 태도로 해산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는 진정 강력하다고 느꼈고, 적어도 한동안은 틀림이 없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하게끔 혁명을 꿈꾸기에는 너무 약했다. 노동 대중과 그들의 정당들은 이 시점에서 그들이 혁명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여겼다.
결과적으로 의원들은 해산에 굴종했다. 더구나 이 포고는 두마를 완전히 억압한 것이 아니라 다소 수정된 규칙에 기초해 가까운 시일 내의 새로운 선거를 공표했다. “인민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독단적 행위에 대한 항의 성명을 발표하는 데 그쳤다. 이 성명을 완전히 자유롭게 준비하기 위해 전前 의원들―주로 《입헌민주당》 의원들―은 핀란드(러시아 제국의 이 지역은 일정 부분 입법 독립이 보장되어 있었다) 비보르크Viborg 시에서 만났는데, 이것이 이 성명이 “비보르크 항의Vyborg Appeal”라고 명명된 이유다. 그 뒤 그들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반란”이 위험하지 않은 성격이었음에도, 그들은 얼마 후 특별법원에 의해 재판을 받고 가벼운 형의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그럼에도 그들은 두마에 재출마할 권리를 잃었다).
오직 한 명의 의원, 스타브로폴Stavropol 지역의 젊은 농민인 “《노동당》” 당원 오닙코(Onipko Fedot Mikhailovich)만이 사임하지 않았다. 크론슈타트에서의 봉기를 자극한 것이 바로 그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하마터면 총살대에서 총살될 뻔했다. 몇몇 개입과 우려가 그를 구출했다. 그는 결국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추방 선고를 받았다. 그는 탈출에 성공해 외국의 도피처를 찾았다. 그는 1917년 러시아로 돌아왔다. 이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매우 믿을 만한 어떤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사회주의혁명당》 우파의 일원으로 계속 투쟁했으며, 볼셰비키에 등을 돌리고 그들에게 총살당했다고 한다.
“제1 두마” 해산 직후 정부는 선거법을 개정하고, 다른 예방책과 교묘한 수단에 염치없이 의지하고 “제2 두마”를 소집했다. 첫 번째 두마보다 몸짓이 훨씬 온건하고 평범했던 이 두마였지만 여전히 정부에게는 “너무나 혁명적”이었다. 모든 음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좌파 의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두마는 차례로 해산되었다. 이번에는 선거법이 상당히 수정되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곧 흥미진진한 사건이나 자극적인 논쟁이 잠시 그들의 관심을 끌었던 드문 순간을 제외하고는 두마의 활동―오히려 비활동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었다.
제2 두마의 해산은 제3을 거쳐 마지막으로 제4 두마로 이어졌다. 이 마지막 두마―반동적 정부의 손에 쥐어진 완벽하게 유순한 도구―는 1917년의 혁명까지 암담하고 메마른 존재를 연명할 수 있었다.
개혁이나 유용한 법에 대해 두마는 전혀 성취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존재가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야당 의원들의 비판적인 연설, 현안에 직면한 차리즘의 입장, 절대왕정 체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상태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의회”의 무력함, 이 모든 사실은 체제의 본질, 부르주아지의 역할, 성취해야 할 과제, 정당들의 계획에 관해 수많은 사람을 계속해 깨우쳤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이 시기는 한마디로 길고 비옥한 “경험적 교훈”으로, 다른 정치 및 사회 교육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었다.
두 가지 평행적 과정이 이 문제의 기간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한편은 절대왕정 체제의 가속되는 결정적인 퇴화―“붕괴”가 더 나은 단어일 것이다―이고, 다른 한편은 대중의 의식이 급속하게 성장한 것이었다.
차리즘의 퇴화에 관한 의심의 여지 없는 징후는 외국에 알려져 있었다. 황실의 태도와 생활방식은 일반적으로 군주정이 몰락하기 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니콜라이 2세의 무능과 무관심, 그의 장관들과 공무원의 병증과 부패, “군주”와 그의 가족을 사로잡은 저속한 신비주의(사제 라스푸틴의 유명한 일화)―이 요소들의 합주는 외국의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대중의 심리에 일어나고 있는 지대한 변화였다. 그럼에도, 예를 들어 1912년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1905년 이전의 동일한 사람들의 원시적 상태와는 더 이상 공통점이 없었다. 점점 더 많은 계층이 분명하게 반反차르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모든 조직과 모든 정치적, 사회적 선전을 방해한 야만적인 반동만이 대중들 스스로가 사상의 마지막 형태를 형성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러므로 눈에 띄는 혁명적인 사건들이 없었다는 것이 혁명적 과정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표면 아래에서, 특히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에서 줄어들지 않은 강도로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모든 중요한 과제들이 중단되었다. 러시아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폭력적이고 결정적인 혁명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오직 추진력과 무기만이 결여되어 있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러한 상황이었다. 이 전쟁은 대중에게 필수적인 무기뿐만 아니라 필요한 추진력을 부여했다.
제3장. 폭발
제1부. 전쟁과 혁명
다른 나라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정부도 1914년 유럽 전쟁이 시작되자 악한 본능, 동물적인 열정, 민족주의 및 광신적 애국주의와 같은 사악한 정서의 모든 것들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같이 수백만의 사람들이 속고, 최면에 걸리고, 방향을 잃고, 마치 도살장으로 향하는 소 떼처럼 전쟁의 전선으로 돌진하게끔 강요받았는데, 그러는 동안 당시의 진짜 문제는 잊혔다. 그리고 차르의 군대에 의해 달성된 몇 가지 초반의 “성공”은 더욱 “국민들의 커다란 열정”에 더욱 부채질했다.
그럼에도 이 인위적으로 연출된 공연에는 특이한 선율이 섞여 있었는데, 정신 속에 깊이 각인된 생각이 그 “열정” 뒤에 숨어 있었다. 우리는―군대와 거의 모든 민간인은 추론했다―아주 잘 싸워서 이길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우리의 청구서를 들이밀 것이다. 우리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는 체제에 완전한 변화를 기대한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병사들은 속삭였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의 총을 사수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상황은 곧 바뀌었다. 연이은 패배가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불안, 환멸, 사람들의 분노가 되살아났다.
그 전쟁은 금전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어마어마한 인명을 손상시켰다. 수백만의 목숨이 아무런 목적도, 보상도 없이 희생되었다. 로마노프 정권은 다시 한번 무능, 부패, 약점을 드러냈다. 게다가 희생자들에게 큰 손해를 입힌 몇몇 패배들은 설명도 되지 않고 불가사의하며 의심스러웠다. 전국 각지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명백한 무능뿐만 아니라 범죄적인 태만, 책임자가 매수되었다, 최고 지휘부 내 간첩 행위가 있다, 황가 및 여러 지도자가 원래 독일 출신이다, 황실 스스로가 배신을 저지르고 있다 등. 황가 구성원들은 독일인에 대해 동정심을 지니고 있다거나 심지어는 적들과 직접 거래했다는 등의 이야기로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다. 전혀 거리낌 없는 분노와 증오로 인해 황후는 “보헤Boche”(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 독일군을 가리키던 멸칭-역자 주)라고 불렸다. 대중들 사이에 걱정스럽고 불길한 소문이 퍼졌다.
처음에 황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후에 몇몇 조치가 취해졌다―느리고 서투르게. 순전히 형식적인 것들이라 그것들은 효과적이지 못했고,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군대와 백성들의 사기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로, 니콜라이 2세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나마 직접 전투 부대의 최고 지휘권자를 가장했다. 그는 전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몸짓은 매일같이 악화하고 있는 전반적인 상황에 아무 변화도 주지 못했고, 이에 반해 전적으로 무능하고 활동적이지 않은 차르는 무력했다. 군대와 온 나라에 분열이 만연했다.
절망 가운데 몇몇 음모가 자유주의 집단 내에서, 심지어 차르의 최측근 사이에서도 선동되었다. 음모자들의 계획 중 하나는 “전쟁과 왕조를 지키기 위해” 차르의 숙부인 니콜라이 대공 등, 보다 “최신적”이고 인기 있는 군주를 지지해 지배자를 퇴위시키는 것이었는데, 모든 관련자가 임박한 몰락을 예상했다.
그들은 사악한 수도승 라스푸틴을 소탕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공모자들은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지체했다.
1917년 2월의 폭발이 일어났을 때, 잔인하게도 상황은 이 단계였다.
이 갑작스러운 폭발을 일으킨 것은 군사적인 전개도, 황실의 반역설도, 심지어 차르의 무능이나 인기 없음마저도 아니었다.
사람들을 절박하게 만들고 결정타를 가한 것은 온 나라의 경제생활과 국가의 존재, 그 자체의 완전한 무질서였다. 크리보셰인(Alexander Vasilyevich Krivoshein) 장관은 행정부와 국가의 모든 서비스에 대해 “이런 무질서는 마치 정신병원과 같다”고 시인하며 말했다. 그리고 차르 정부의 무능과 그 행위들의 참담한 결과가 대중으로 하여금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전쟁 중인 모든 나라는 유럽 전쟁의 이 단계에서 엄청난 경제적,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는 멀리 떨어진 전선의 수백만 명을 먹이고 보급을 유지할 필요성과 동시에 국내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어디에서나 이 이중 작업이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곳에서―심지어 상황이 특히 어려운 독일에서도―이는 다소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예견도, 미리 계획한 것도, 조직된 것도 없는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말이다.[6]
도시연합, 전쟁산업위원회 등 특정 살아 움직이는 세력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총체적 권력과 국가의 붕괴가 더욱 일찍 나타났을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이러한 조직들은 자발적으로 나타나 군대와 민간 대중의 보다 긴박한 요구에 상당한 수준으로 부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력들의 활기차고 유익한 활동뿐만 아니라 젬스트보(지방 의회), 자치단체 등―우리가 역설하는 것은 법률에 대한 반대와 관료주의에 저항해 행해진 활동들이다―도 매우 중요한 교훈적 영향을 가졌다. 매일 군대와 온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차리즘의 총체적 무능함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대체할 수 있는 요소들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고, 나아가 죽어가는 로마노프 체제가 그 요소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행동을 방해해 온 나라를 재앙으로 몰아넣는 불명예스러운 방법도 인식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군대와 러시아 대중은 자신들의 주도하에 숭고한 헌신과 확신을 지니고 생산, 조직된 운송, 감독 된 물자, 그리고 배급 및 군수품의 도달과 분배를 보장하는 것이 이러한 자유 연합과 위원회라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리고 매일같이, 군대와 대중은 정부가 이 없어서는 안 될 행동에 반대하고 국가의 이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보았다.
차리즘의 몰락과 다른 요소들로의 대체에 대한 군대와 대중의 최종적인 정신적 준비는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혁명 이전 과정을 완수했다. 그것은 그 준비작업에 마무리를 부여했다.
1917년 1월,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경제 혼란, 노동자들의 빈곤, 그리고 러시아의 사회적 혼란이 너무나 심각해서 몇몇 대도시들― 특히 페트로그라드―의 주민들은 연료, 옷, 고기, 버터, 설탕뿐만 아니라 빵도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2월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두마와 젬스트보(지방 의회), 자치단체, 연합, 위원회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시 인구는 기근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의 보급에도 완전히 결함이 생겼다. 그리고 동시에 완전한 군사적 붕괴에 도달했다.
2월 말까지, 러시아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쟁을 계속하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또한 도시의 산업 노동자들이 공장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물자를 조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차리즘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자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궤도를 이탈한 낡은 기계를 맹목적으로 작동하기를 고집했다. 그리고 그것은 여느 때와 같이 억압하고, 활동가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정당의 투사들을 탄압했다.
“위대한 열정”으로부터 2년 반이 지난 뒤 혁명을 초래한 것은, 한편으로는 전쟁을 계속하며 기근 상태를 견딜 수 없던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르의 맹목적인 완고함이었다.
2월 24일(러시아 구력舊曆 기준), 동요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작되었다. 주로 식량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고, 심각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사건은 갑작스레 돌변했다. 수도의 노동자들은 러시아 인민이 대체로 그들과 연대하고 있다고 여기며 몇 주 동안 극도로 선전 활동을 했는데, 굶주리고, 심지어 더 이상 빵을 배급받지도 못했음에도 거리를 점거하고 격렬히 시위를 벌였으며 해산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렇지만 첫날의 시위는 신중하며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었다. 빽빽이 들어찬 무리 속에서 노동자들은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소리쳤다. “빵을 달라! 빵을 달라! 먹을 것이 없다! 빵을 줄 게 아니면 차라리 우리를 쏴라! 우리 아이들이 굶어 죽어간다. 빵을 달라! 빵을 달라!”
경찰에 더해 정부는 시위대에게 카자크 기마부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당시 페트로그라드에는 신뢰가 되지 않는 예비군을 제외하고는 병력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노동자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병사들에게 가슴을 들이밀며 아이들을 껴안고 울부짖었다. “감히 우리를 죽일 수 있다면 모두 죽여라! 굶어 죽는 것보다 총에 맞아 죽는 게 낫다!”
마침내―그리고 이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거의 모든 병사가 미소를 지으며,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장교들의 명령을 무시한 채 군중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리고 장교들도 특별히 고집스럽지는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군인들이 노동자들과 친분을 쌓아 총을 건네고 말에서 내리며 군중들과 어울렸다. 당연히 군대의 이런 태도는 시위 중인 노동자들을 고무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경찰과 카자크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든 시위대를 공격했고, 시위대 가운데 몇몇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페트로그라드와 교외 병영의 주둔 부대들은 여전히 혁명의 편에 서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는 그들을 보내 전투하는 것을 삼갔다.
그러나 2월 26일 아침, 주목할 만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는 포고령을 내려 두마를 해산시켰다.
이는 모두가 결정적 행동을 시작하기 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 일종의 신호였다. 수도 곳곳에 거의 즉각적으로 알려진 그 소식은 사건들에 박차를 가했다. 그때부터, 시위는 엄연한 혁명적 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차리즘 타도!”, “전쟁 타도!”, “혁명 만세!” 등의 외침이 계속해서 결의에 차고 위협적인, 투쟁적인 군중 가운데 울려 퍼졌다. 도시 전역에서 시위대는 결연히 경찰을 공격했다. 법원 청사를 포함한 몇몇 공공건물이 불에 탔다.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잔뜩 쳐졌다. 곧이어 수많은 붉은 깃발이 나타났다. 병사들은 여전히 자비롭게 중립을 유지했으나 점점 더 군중과 섞여 들어갔다. 정부는 점차 줄어드는 군대에 의존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제 정부는 반란군에 대해 도시의 모든 경찰력을 투입했다. 경찰은 대규모 공격을 위해 신속히 분대를 나누었다. 경찰은 여러 집의 지붕과 심지어 몇몇 교회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모든 전략적 거점을 점령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들고일어난 대중에 대해 총공세를 시작했다.
2월 26일, 하루 종일 전투가 치열했다. 많은 경우 경찰이 몰려나거나 살해되거나 기관총이 침묵했다. 하지만 격렬하게 저항하는 다른 곳들도 있었다.
전선에 있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상황의 심각성을 전보를 통해 경고받았다. 한편 두마는 해산 명령에 굴복하지 않고 남아 있기로 했다.
제2부. 혁명의 승리
1917년 2월 27일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페트로그라드에 주둔한 모든 부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막사를 박차고 나와 무기를 들고 수도의 몇몇 전략적 거점들을 점령했다. 혁명이 세를 넓혔다.
어느 순간, 반항적이고 무섭게 위협적인 수많은 부분 무장 시위대가 즈나멘스카야Znamenskaya 광장과 니콜라옙스키Nikolayevsky 철도역 근처로 모여들었다. 정부는 아직 신뢰할 수 있는 병사들인 제국 근위대 가운데 2개 기병 연대와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경찰 분대를 보냈다. 군대는 경찰을 지원하고 보조하기로 되어 있었다.
시위대에게 통상적인 해산 경고 명령을 한 뒤 경찰 지휘관은 군중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또 다른 이 마지막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근위대 기병대를 지휘하는 장교는 사브르를 치켜세우며 “경찰을 공격하라!”고 외침과 함께 2개 연대를 경찰에 맞서 출격시켰다. 거의 순식간에 경찰은 얻어맞고 뒤로 튕겨 나가며 압도당했다.
곧 경찰의 마지막 저항이 무너졌다. 혁명군은 정부의 무기고를 점유하고 도시의 모든 주요 거점을 점령했다. 소란스러운 군중들에 둘러싸인 부대는 몸을 일으켜 차례로 깃발을 펼치고 두마―가엾은 제4두마―가 버티고 있는 타브리체스키Tauride 궁전 앞에 서서 스스로 해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트로그라드와 외곽 지역의 주둔 부대 중 마지막 부대들도 이 운동에 합류했다. 차르 정권에게는 더 이상 수도 부근에 무장 부대가 없었다. 사람들은 자유가 되었다. 혁명이 승리했다.
이후 발생한 사건들은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두마의 유력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고, 사람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지방도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일부 부대는 서둘러 전선에서 철수해 차르의 명령으로 반란군이 장악하고 있는 수도로 파견되었지만 도달할 수 없었다. 철도 노동자들이 도시 근처에 도착하자 그들을 더 이상 수송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병사들은 장교들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혁명 편으로 합류했다. 또한 일부는 전선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그냥 흩어졌다.
차르 니콜라이는 철도로 페트로그라드로 향하던 중 드노Dno 역에 기차를 정차시킨 뒤 다시 프스코프Pskov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두마의 대표단과 혁명에 가담한 군 인사들을 만났다. 그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몇몇 사소한 교섭 끝에 그는 자신과 그의 아들 알렉세이(Alexei Nikolaevich)를 위해 3월 2일 퇴위에 서명했다.
잠시간 임시정부는 이전 황제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Grand Duke Michael Alexandrovich)에게 황위를 수여하려고 했으나 그는 나라와 왕조의 운명이 정기적으로 소집되는 제헌의회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고 선언하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전선은 혁명의 성취를 환영했다.
차리즘은 무너졌다. 제헌의회의 결성이 그날의 질서였다. 그것이 소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임시정부는 “공인되고 책임 있는” 당국이 되었다. 승리한 혁명의 제1장이 막을 내렸다.
우리는 이 2월혁명의 요점을 도식화하기 위해 몇 가지 사실에 대해 세부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다시 한번, 대중의 행동은 자발적이었으며 필연적으로 오랜 기간의 구체적인 경험과 정신적 준비가 절정에 이르렀다. 이 행동은 어떠한 정당에 의해서도 조직되거나 지도되지 않았다. 무장한 이들―군대―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 조직화 원리는 그 뒤 곧이어 도입되어야 했으며 도입되었다.
[어쨌든 탄압 때문에 좌파 정당들의 중앙 조직은 물론 그들의 지도자들 역시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회민주노동당》의 마르토프, 《사회주의혁명당》의 체르노프(Viktor Mikhailovich Chernov), 레닌,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Anatoly Vasilyevich Lunacharsky), 로좁스키(Solomon Abramovich Lozovsky), 리코프(Alexei Ivanovich Rykov), 부하린 등은 모두 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귀국한 것은 2월혁명 이후였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이러한 사건들에서도 드러난다.
다시 한번, 러시아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자극이 혁명에 주어졌다―이는 정부의 고집으로 인해 자연스레 강화된 불가능이었다. 이 불가능은 전쟁이 나라를 강타한 불가분의 혼란에서 비롯되었다.
제3부. 사회혁명을 향해
두마에 의해 형성된 임시정부는 물론 순전히 부르주아적이고 보수적이었다. 그 구성원인 리보프 공(Prince Georgy Yevgenyevich Lvov), 구치코프(Alexander Ivanovich Guchkov), 밀류코프 및 다른 이들[어렴풋하게 사회주의자인 케렌스키(Alexander Fyodorovich Kerensky)를 제외하고]은 거의 모두 《입헌민주당》에 정치적으로 속해 있었다. 사회적 특권 계급에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 절대왕정이 타도되면 혁명은 끝난 것이었다. 실제로는,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들은 “질서를 재확립”하고, 국가와 전선의 전반적인 상황을 조금씩 개선하고,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추진하고”, 새로운 정신으로 고무시키고, 특히 국가의 새 헌법, 새 정치 체제, 새 형태의 정부를 수립할 제헌의회 소집을 평화적으로 대비하고자 했다. 앞으로 사람들은 착한 아이들처럼 참을성 있게, 신중하게, 이 새 주인들이 그들에게 베풀 호의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이 새 주인들,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은 자연스레 스스로를 다른 “문명화된” 국가와 같이 권력을 사용할 선하고 중도적인 부르주아지로 보았다. 그리고 그 체제의 정치적 전망은 훌륭한 입헌군주제를 넘어서지 않았다. 구성원 대부분은 아마도 소심하게 매우 중도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을 상상했을 것이다. 농지 문제, 노동자 문제 등은 미래에 수립된 정부에 의해 “검증된” 서구 모델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다.
최종적인 분석으로, 임시정부는 필요하다면 시간을 끌어서라도 대중을 다시금 진정시키고, 기강을 잡고, 복종하게끔 되돌리며, 대중이 그들의 욕망을 위해 너무 폭력적이거나 한계를 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다소간 확신했다. 이는 마침내 막후에서 조작된 “정상적인” 선거를 보장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고, 이것은 물론 빈틈없고 단단한 제헌의회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두말할 것 없이 부르주아적인.
이 시점에 “현실주의자”, “기득권” 정치인, 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들의 계산이 틀렸다고 분명히 해두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현실은 그들을 완전히 피해갔다.
나는 1917년 4월 혹은 5월, 뉴욕에서 곧 있을 제헌의회의 구성과 가능한 행동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한 훌륭한 러시아 교수의 강연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훌륭한 교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러시아혁명이 제헌의회를 넘어서게 된다면, 선생님은 어찌 되리라고 예상하십니까?”
그 훌륭한 강연자는 경멸스러워하며 반어법을 섞어 자신은 “현실주의자”라고만 답했고, 그에 야유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아나키스트이며, 나는 그런 공상적인 가정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그 학식 있는 교수는 스스로를 훌륭하게 속여넘겼으며, 그 자신이 “공상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드러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그의 연설에서 그는 단 한 가지 만일의 사건을 소홀히 했다. 그것은 몇 달 뒤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나는 개인적인 의견을 살짝 덧붙이고 싶다.
1917년, 현실주의자도, 정치인도, 작가도, 교수도, 러시아인과 외국인 들은 거의 예외 없이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즘의 승리를 오만하게, 그리고 경멸적으로 예측하지 못했다. 우리 시대에는, 볼셰비즘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성취된 사실이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기꺼이 그것을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고려하고자 한다. 그들은 심지어―다시 한번 능숙하게 자신을 속이며―볼셰비즘의 “커다란 긍정적 중요성”과 “볼셰비즘의 완전한 전 세계적 승리”를 인정한다.
나는 전적으로, 그들의 동일한 “현실주의”와 “예지력”으로 인해, 이전과 같은 오만함과 동일한 그 확신으로 가득 찬 그들이 사태를 제때 예측하지 못하며 그것이 일어난 이후에야 그것을 받아들이리라고 확신한다―전 세계 사회혁명에서 자유의지주의 사상이 참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첫 번째 임시정부는 분명 그에 직면한 장애물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장애물은 제헌의회 소집 전에 처리해야 하는 문제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이 의회 구성을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행하는 것이 전적으로 그들의 권리에 부합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첫째로 전쟁 문제가 있었다.
환멸을 느끼고 완전히 지쳐버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거나, 혹은 기껏해야 완전한 무관심 속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군대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인할 수 없는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비참한 상황,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이 완전히 군대를 뒤흔들었다.
두 가지 해결책이 가능했다. 전쟁을 끝내고 별도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군대를 해산시키고 오로지 국내 문제에만 신경을 쓰는 것―또는 전선을 유지하고, 규율을 회복하고, 군대의 사기를 “되살리고”, 적어도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을 계속하는 불가능한 작업을 시도하는 것.
첫 번째 해결책은 다른 호전주의자들과 동맹을 맺고 그 동맹을 깨는 것이 “국가적 수치”로 간주하는 “애국적” 부르주아 정부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정부가 “임시적”이었던 만큼, 그들은 관습적 공식을 따를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제헌의회가 소집되기까지 중차대한 변화는 없다. 제헌의회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있는 온전한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때문에 임시정부는 두 번째 해결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이는 실현 불가능했다.
이 점은 일반적으로 충분히 강조되지 않기에 강력히 주장되어야 한다.
“부르주아 국가”라고 불리는 기계는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고장 났다. 그 목적과 활동은 항상 사람들의 이익과 열망에 반하는 것이었다. 우선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된 이상, 그것을 수리하거나 다시 정상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기계를―강제적으로든 자유롭게든―작동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고장 난 장치는 강제로 규칙을 행사할 수도, 재설정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목표를 향해 자발적으로 “행진”하지 않았다.
따라서 망가진 장치를 다시 가동시키기 위한 헛된 노력으로 시간과 힘을 낭비하는 대신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다른 장치로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부르주아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정부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몰락한 정권의 “기계”와 사악한 유산인 전쟁을 모두 유지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것이 그들 스스로를 점점 더 인기가 없게끔 만들고 있었다. 또한 기계(부르주아 국가)가 고장 났기에 전쟁과 같은 의지를 강요하게끔 끌고 나갈 힘도 없었다.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이 첫째 문제는 필연적으로 임시정부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곤란한 문제는 농지 문제였다.
러시아 농민들―인구의 85퍼센트를 차지하는―은 토지를 소유하기를 열망했다. 혁명은 이러한 열망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주었다. 수 세기 동안 무기력하게 짓눌리고 착취당하고 속아온 농민 대중들은 더 이상 다른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금 즉시 탁상공론 없이, 토지가 필요했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러시아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차르 정권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 불가능한 일이 계속되는 한, 그것을 깨닫지 못한 어떤 정부도, 필연적으로, 차르의 그것처럼 무너질 것이었다.
확실히 임시정부는 상황을 바꾸고, 혼란을 끝내고, 국가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힘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것들은 환상이었다. 시간도 대중의 심리상태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05년으로 돌아가서, 10월 17일 선언 직후(“자유”가 아직 존재하는 동안) 소집된 농민회의에서, 많은 대표자가 두마 소집에 대비해 농민 대중의 열망을 위한 대변인 역할을 했다.
“토지 대금에 관한 어떤 말도 내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농민 대표 중 한 명이 선언했다.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공무원의 도움을 받아 우리 삶을 구렁텅이로 빠뜨렸던 그들은 우리더러 지난날의 노예주들에게 배상하라고 한다. 우리는 이미 소작료를 충분히 주지 않았는가? 우리가 땅에 뿌린 피가 몇 통이나 되는지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그들의 모유로 이 자들의 사냥개들을 길렀다. 이는 대가가 아닌가?”
“수 세기 동안 우리는 바람에 날린 모래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람이었다. 이제 우리가 다시 돈을 내야 한다고? 오, 맙소사. 외교적인 논의는 필요 없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다―혁명적인 방법이.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한번 우리를 속일 것이다. ‘대금’에 관한 말은 무엇이 되었든지 타협이다. 동지들, 당신 아버지들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마시오. 1861년에 그들, 노예주들은 우리보다 더 영리했고, 우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전부를 가져가지 않았기에 우리에게 아주 조금밖에 넘겨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에게 땅을 판 적이 없다”며 오룔Oryol 지역 농민들은 반발했다. “따라서 우리는 대금을 치를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비인간적으로 낮은 임금으로 일함으로써 충분한 돈을 지불했다. 아니,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대금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나리님들은 달에서 땅을 얻어온 게 아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빼앗아간 것이다.”
카잔 지역의 대표들은 “토지 대금은 사람들에게 명백한 불의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사람들은 땅과 더불어 토지 매매 영수증을 함께 받아야 했다. 사실 나리님들은 땅을 구매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나중에 팔기 위해 땅을 몰수했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른 농민들은 1897년에서 1906년 사이에 석학인 니콜라이 루바킨(Nikolai Alexandrovich Rubakin)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나리님들―오를로프Orlov 가문, 데미도비Demidov 가문, 발라쇼프Balashov 가문―은 그들의 황제와 황후들로부터 선물로 땅을 받아 얻었소. 그리고 지금 그들은 그런 값을 우리에게 내기를 원합니까? 이는 불의일 뿐만 아니라 공공연한 약탈이오.”
이는 농민들이 1917년에 더 이상 기다리려 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거의 모든 곳에서 그들은 토지를 수용하고 있었고, 아직 도망치지 않은 지주들을 몰아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농지 문제”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심의, 계략, 정부나 제헌의회의 결정에 간섭받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해결했다. 그리고 주로 농민들로 구성된 군대는 확실히 이 직접 행동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저항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저항은 반란을 일으키는 농민들에 맞서는 것이고, 또한 거의 필연적으로 군대에 맞선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쟁 문제와 마찬가지로 지능적이고 능숙한 행동으로 사안을 배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전술을 채택했다. 정부 대변인은 농민들에게 모든 법률을 제정할 권리가 있으며 확실히 농민들에게 분명 만족을 줄 것이라고 말하며 제헌의회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아무것도 이끌어 내지지 않았다. 이러한 간청은 대개 무산되었고 이 전술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권력을 지닌 “나리님들”의 말을 조금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자주 속아 넘어갔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땅을 차지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고 여겼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정의였다. 만약 그들이 가끔 망설였다면, 그것은 오직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처벌받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또한, 산업 노동자들의 문제도 부르주아 정부에 의해 농민들의 그것만큼이나 해결 불가능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혁명을 통해 삶의 질을 최대한 개선하고 최소한의 권리 확립을 얻고자 했다. 이 갈등 국면에서 즉각적이고 매우 심각한 투쟁이 예견되었다. 그렇다면 임시정부는 어떤 방법으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순수하게 경제적인 문제는 다른 문제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에 대처하는 것을 미룰 수 없었기에 매우 어려웠다. 전쟁과 혁명의 한복판에서, 혼란스러운 국가의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생산은 물론, 교통, 교환, 금융 등을 새롭게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문제가 남아 있었다. 현 상황에서는 그에 대한 유효한 해결책이 없었다. 임시정부는 물론 가까운 시일 내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수많은 이유로 이 과제 달성은 성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정부는 제헌의회의 개원을 두려워했다. 약속과는 달리,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개원을 연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운 좋은 행운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설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다른 위험한 장애물들이 생겨났다.
가장 심각한 것은 노동자 소비에트의 부활, 특히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부활이었다. 이것은 혁명 초기에 재확립되었다―전통에 의해, 그리고 또한 1905년과 마찬가지로, 다른 노동 단체의 부재로 인해. 사실 그 당시 산업 노동자들은 중도 사회주의자,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혁명당》 우파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들의 이념과 계획은 임시정부의 계획에 완전히 반대되었고, 자연스럽게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정신적 영향과 활동은 곧 정부의 그것과 충돌하기 시작해 임시정부에 손상을 입혔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러시아에서 제2의 정부와도 같았다. 그것은 모든 막대한 지방 소비에트의 연결망의 어조를 설정하고 그들의 활동을 조정했다. 이렇게 전국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으며 그것은 빠르게 강력해졌다. 또한 그것은 착실하게 군대에서 점차 영향력을 획득했다. 이윽고 소비에트의 지시는 때때로 임시정부의 명령보다 훨씬 더 큰 무게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소비에트를 신중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정부가 그들과 싸우는 것을 더 선호했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까지도 없다. 그러나 언론, 조직, 사회적 행동의 절대적 자유를 요란하게 선언했던 혁명 직후에 조직된 노동자들을 상대로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실질적인 힘으로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없었다.
따라서 정부는 나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고, 강력한 경쟁자를 용인하며, 심지어 그들과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노동자들과 군대 내에서 그들에게 보내는 공감이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심각한 사회적 갈등에서는 그 두 가지 결정적인 세력이 의심의 여지 없이 소비에트의 편을 들 것이라는 점을 예리하게 알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들은 “희망”할 뿐이었다. 그들은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러나 비공식적이지만 위협적이며, 대처해야만 했던 이 두 번째 “관리자”의 존재는 임시정부―공식적이지만 무력한―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를 구성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정당들, 특히 극좌파 세력(《사회주의혁명당》 좌파, 볼셰비키, 아나키스트)에 의한 격렬한 비판과 활발한 선전도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당연하지만 임시정부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에 기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굳이 감행했다 하더라도 그 명령을 실행하기 위한 병력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미 반대세력과의 전투를 몇 번이나 견뎌내고 강력한 물리력(경찰, 군대, 금전 등)을 소유했던, 조직화되고 강하게 뿌리내린 강력한 부르주아지조차도 그렇게 많은 문제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결책에 도달하고 기존의 상황에 직면해 그 의지와 계획을 강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르주아지는 러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을 의식한 계급으로서의 자본가 계급은 러시아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약하고, 조직적이지 않으며, 전통이나 역사적 경험이 없었기에,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활동적이지조차 않았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존재하기 어렵고 활동적이지 않은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임시정부는 공백 상태에서 일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이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제4부. 사회주의 정부를 향해; 사회주의의 빈곤
이렇게 하여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최초의 러시아 임시정부는 신속하게 우스꽝스럽고 치명적인 무능으로 재빨리, 불가피하게 전락했다. 그 불쌍한 것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것은 기동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시동이 꺼져버렸다. 한편 모든 주요한 문제들도 수렁에 빠졌다. 이 허깨비 정부에 대한 비판과 전반적인 분노는 나날이 커졌다. 곧 그 존재는 지탱될 수 없게 되었다. 엄숙한 출범으로부터 겨우 60일이 지난 5월 6일, 그들은 다툼 없이 이른바 (사회주의자가 참여한) “연립정부”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는데, 연립정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구성원은 매우 중도적인 《사회주의혁명당》 당원, 아니 오히려 “독자적인” 사회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였다.
이 부르주아―사회주의 정권은 이전의 것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리라 바랄 수 있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의 존재 조건과 행동의 무력함은 꼭 첫 번째 임시정부와 동일했다. 무력한 부르주아에게 의지해야 했고, 전쟁을 계속해야 했으며, 점점 더 시급해지는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고, 좌파들에게 공격받았고, 모든 어려움에 둘러싸였던 이 두 번째 임시정부는 첫 번째와 같이 불명예스럽게,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인 7월 2일에, 몇몇 부르주아적 요소를 포함했지만 주로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제3의 임시정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 시점에서 제3, 이어서 제4 정부(바로 직전의 것과 거의 같은)의 최고지도자였던 케렌스키는 한동안 일종의 러시아의 두체Duce가 되었고, 멘셰비키와의 긴밀한 협력으로 《사회주의혁명당》이 혁명의 주인으로 확실히 등장한 듯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러시아는 매우 실질적인 세력, 즉 농민, 산업 노동자 대중, 대다수 지식인, 소비에트, 군대 등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정부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무엇도 성취하지 못했다.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만 해도 케렌스키의 마지막 정부는 매우 강해 보였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변호사이자 의원議員이었던 케렌스키는 대중과 군대 어디서나 큰 인기를 누렸다. 혁명 발발 당시 두마에서의 그의 연설은 인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가 권력 장악은 러시아 전역에 엄청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현재 소비에트 대표단(소비에트, 공장위원회, 군사위원회)의 압도적 다수가 사회주의자들이었으며, 소비에트는 전적으로 《사회주의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의 손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소비에트―그러니까 국가의 모든 노동계급―에 거리낌 없이 의존할 수 있었다.
케렌스키 내각 초기 몇 주 동안, 그에 대한 나라 전체의 신뢰가 너무나도 강했기에 공개적으로 그들의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은 위험했다. 몇몇 선동가들은 공공 광장에서 케렌스키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려다가 이를 몸으로 깨달았다. 심지어 린치를 당한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놀랄 만한 이점으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 케렌스키는 하나의 조건을―효과적으로, 행동으로―충족하기만 하면 됐다. 당통(Georges Jacques Danton)이 과거에 추천했던 것을 말이다. 그는 대담하게, 더 대담하게, 항상 대담하게 했어야만 했다.
바로 이것이 케렌스키에게 완전히 결여된 자질이었다!
현 상황에서 그에게 있어 대담함은 다음을 의미했다. 1. 전쟁의 즉각적인 포기(이를 실행할 어떠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 2. 자본주의 부르주아 정권과의 단호한 단절(즉, 완전한 사회주의 정부 구성). 3. 모든 러시아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을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로 즉각 지향하는 것.
이는 모두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구성원 다수가 사회주의자이며 지도자도 사회주의자였던 정부에게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그들이 어디서든 그랬듯,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케렌스키 자신은 역사적 필요성을 이해하고 나아가 마침내 그들의 진정한 계획을 완수할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는 대신,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위한 투쟁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개 같은 “최소” 계획의 포로로 남았다.
사회주의자들과 케렌스키는 노동 대중과 그들의 해방에 솔직하게 헌신하는 대신, 그들 스스로의 물러터진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러시아 자본주의와 국제자본주의 사이에서 장난을 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찾지 못했다.
케렌스키는 감히 전쟁을 포기하지도, 부르주아에게 등을 돌리지도, 노동계급에 단호히 기반을 두지도 않았고, 심지어 단순히 혁명을 계속하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굳이 제헌의회의 소집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다!
그가 감히 한 일은 우선, 일련의 개혁을 역행하는 것이었다. 전방으로는 사형제와 군사법원이 재구성되었고, 후방으로는 억압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케렌스키가 생각하기에 병사들 간에 전쟁 초기와 같은 열정을 되살리는 데는 연설과 선동적인 열변이 필요해 보였기에 그는 전선을 수차례 방문했다. 그는 전쟁이 관성적으로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그는 언변과 처벌로 새로운 자극을 주고자 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연설을 해서 그의 총사령관Commander-in-Chief(그는 또한 각료회의의 의장이기도 했다)이라는 직함은 곧 러시아 대중에게 총연설관Orator-in-Chief이라고 바꿔 불리게 되었다.
케렌스키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데는 두 달 정도면 충분했는데, 특히 그의 연설에 야유를 보내며 끝을 본 산업 노동자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행동을, 평화와 사회혁명의 행동을 원했다. 그들은 또한 제헌의회의 신속한 소집을 원했다. 모든 임시 정권들이 고집스럽게 소집을 미루었던 것도 그들이 인기가 없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볼셰비키는 이 점을 이용해, 특히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곧 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
간단히 말해서, 케렌스키 정부가 실패한 이유들은 이전 정권들의 붕괴를 불러온 것들과 같았다. 중도 사회주의자들의 전쟁 중단에의 무능함, 이 네 번째 정부의 기본적인 국가 문제 해결에 대한 통탄할 만한 무능, 그리고 혁명을 부르주아 체제의 범위 아래로 가두려고 한 그 의도.
여러 가지 형편과 사건들―이러한 치명적인 무능의 논리적 결과―이 상황을 악화시켰으며 케렌스키의 몰락을 촉발했다.
우선 볼셰비키당은 이 무렵 최대의 세력을 모아 선전과 행동을 위한 강력한 조직을 지녔으며, 수천 명의 연설가와 기사를 출판함으로써 능숙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격렬하게 정부(그리고 모든 중도 사회주의자들)의 정책, 태도, 활동에 대한 비판을 전국으로 매일 퍼뜨렸다. 그들은 전쟁의 즉시 중단, 동원 해제, 혁명의 지속을 주장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사회사상과 혁명적 사상을 확산시켰다. 그들은 매일 제헌의회를 즉시 소집하고, 만약 그들이 권력을 얻으면 당시의 모든 문제를―재빠르고 성공적으로―결정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반복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겁먹지 않고, 같은 못에 망치질했다. 권력!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외쳤다. 볼셰비키에게 정치적 권력을 주면 모든 것이 교정되고, 해결되고, 실현될 것이라고 말이다.
지식 노동자, 산업 노동대중, 군대가 점차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따랐고, 그 추종자 수는 급격히 증가해서 모든 공장과 기업들에 침투한 볼셰비키당은 1917년 6월에 이미 무장세력, 선동가, 선전가, 작가, 조직가, 활동가들의 웅장한 세력을 강화했다. 그들은 또한 상당한 자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레닌에 의해 지도되는 용감한 중앙위원회를 지도부로 두고 있었다. 그들은 치열하고, 열성적이고, 폭발적인 활동을 계속했고,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고 여겼다. 극좌세력에 별다른 경쟁자가 없었기에 이는 사실이었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는 훨씬 빈약해 그저 위성으로 여겨질 뿐이었고, 아나키즘적 운동은 거의 시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적 조합주의revolutionary Syndicalist 운동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존재하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점차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여겨 감히 볼셰비키를 단호하게, 직설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다. 그는 적을 물리치는 데는 충분했지만, 오히려 그들을 선전하고, 그들이 주목을 모으고, 존경받을, 그리고 결과적으로 대중의 신뢰를 얻어낸, 반쪽짜리 조치, 비열한 조치에 의존했다. 최종적 분석으로, 이러한 소심한 반동은 적을 약화하기는커녕 강화했다. 그러고는, 다른 많은 이와 마찬가지로 케렌스키 역시 위험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볼셰비키의 승리를 예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당 내부에서도 레닌은 거의 혼자서만 승리의 확신에 차 있었고, 거의 혼자서만 반란을 준비할 기회가 다가왔다고 주장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마침내 동맹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자신의 꿈, 그리고 아마도 스스로의 연설로 인해 최면에 빠진 케렌스키는 6월 18일, 독일 전선에서 그의 잘 알려진 공세를 시작했다―비참하게 실패해 그의 인기에 큰 타격을 입힌 공세를. 그리고 7월 3일, 페트로그라드에서는 군대(그리고 크론슈타트 요새에서 온 수병들)가 참가한 정부에 대항하는 무장봉기가 발발했고, “케렌스키를 타도하라! 사회혁명 만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케렌스키는 비록 어려웠으나 여전히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전 영향력의 그늘을 잃었다.
그 이후 그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혁명의 고조와 케렌스키의 우유부단함에 절박해진 “백군白軍”의 장군이었던 코르닐로프(Lavr Georgiyevich Kornilov)는 전방에서 수천 명의 병사(대부분―사실상 식민지 부대인―다른 연대에 비해 쉽게 속이고 다룰 수 있는 코카서스Caucasian 연대 출신)를 전선에서 데려와, 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들을 속이고, “무장 범죄자 무리를 끝장내고 그들을 말살할 힘이 없는 정부를 수호할 것”이라고 맹세하며 다른 장군의 지휘 아래 그들을 페트로그라드로 보냈다.
아마도 언젠가 구체적으로 알려질 이유로 인해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에게 미약한 반대―형식적인 반대만 했다. 수도는 오직 노동자들의 격렬한 결단과 막대한 노력, 그리고 숭고한 희생정신 만에 의해 구원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좌익의 도움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서둘러 무장하고 코르닐로프를 대항해 스스로 주도하여 “전선”으로 향했다. 수도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는 여전히 결정적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한 치의 영토도 양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그들은 전장에 많은 전사자를 남겼고, 다음날을 위한 충분한 병력과 군수품을 확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철도 및 전신 노동자들의 신속하고 정력적인 행동 덕분에 전선의 군사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코르닐로프의 본부는 전선과 전국에서 고립되었다.
밤이 되자 코르닐로프의 병사들은 “무법자, 범죄자, 놈팽이”로 평가되던 이들의 영웅적인 저항에 놀라 속임수인지 아닌지 의심하며 전사자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들은 그 시체들이 모두 진정한 산업 노동자의 못 박힌 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곧 페트로그라드에 있던 코카서스 출신의 몇몇 사회주의자 단체가 코르닐로프의 진영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은 그곳의 병사들과 협의하고, 그들에게 실제 상황을 알리고 “무법자”라는 미신을 일소하고, 동족상잔의 싸움을 포기하게끔 설득했다. 다음 날 아침, 코르닐로프의 부하들은 기만당했다고 선언하고, 형제 노동자들과 계속 싸우기를 거부하고 주 전선으로 돌아갔다. 코르닐로프의 모험은 끝났다.
그 직후 여론은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와 비밀리에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 이야기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 상황은 도덕적으로 케렌스키 정부와, 넓게는 중도 사회주의자들의 종말을 새겨넣었다. 볼셰비키당의 결의에 찬 공세의 길이 열렸다.
그 뒤 매우 중요한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소비에트, 공장 협의회, 군사협의회의) 새 대의원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중도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하여 그 당은 모든 노동자 계급과 혁명적 활동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볼셰비키도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도움으로 농민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그들은 이제 결정적인 공세를 위한 훌륭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이 단계에서 레닌은 케렌스키에 대항하는 《범 러시아 소비에트 총회Pan-Russian congress of Soviets》를 소집하고, 군대의 도움을 빌려 그를 타도하고, 볼셰비키 권력을 출범하고자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는 일부는 공개적으로, 일부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숨어 있을 수밖에 없던 레닌은 원격으로 필수 작전들을 지시했다. 케렌스키는 위험을 의심했지만 그것을 회피할 힘이 없었다. 사태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희곡의 마지막 장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그 시기 러시아 상황의 몇몇 눈에 띄는 요소들을 요약하는 것은 적절할 것이다.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직무를 수행한 보수적 혹는 중도적 정부들은 혁명 중 러시아 사람들이 직면한 매우 심각한 문제를 기존 조건 아래 해결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함을 증명했다. 이것이 바로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국가가 부르주아 입헌 정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 두 가지 중도 사회주의 정부를 내다 버린 주된 이유였다.
특히 두 가지 사실이 이 무능을 두드러지게 했다.
1.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네 개 정부 모두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언급한 것.
2. 사람들은 제헌의회의 소집을 절박하게 기다렸으나 그 정부들은 그것을 소집할 수 없었던 것.
전쟁의 즉각 중단, 의회의 즉각 소집, 안전으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완전한 사회혁명을 제시한 극좌세력의 끈질긴 선전은 덜 중요했던 다른 분파들과 함께 혁명의 장엄한 행진을 활기차게 했다.
이렇듯 차리즘에 대한 봉기로서 2월에 발발한 러시아혁명은 부르주아 정치 혁명의 단계, 그리고 민주주의적이고 중도적인 사회주의의 단계를 빠르게 뛰어넘었다.
10월, 길목에서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자 혁명은 효과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사회혁명적인 기반 위에 놓였다. 따라서 모든 중도적 정부와 정당의 실패 이후 노동 대중이 두려움 없이 사회혁명을 바라보는 유일한 정당, 권력을 얻으면 기존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재빠르고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약속하는 유일한 정당으로 향하는 것은 타당하고 당연한 일이었다―볼셰비키당으로 말이다.
아나키스트 운동은, 우리가 분명히 되풀이하지만, 여전히 너무 약해서 사건들에 가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조합주의 운동은 없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세 가지 주요한 요소들이 존재했다. 1. 부르주아지, 2. 노동계급. 3. 이데올로기 선도자이자 “전위”의 역할을 맡은 볼셰비키당.
독자들이 알고 있듯 부르주아지는 취약했다. 볼셰비키가 그것을 제거하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었다.
노동계급 역시 취약했다. 조직되어 있지 않고(진정한 의미에서) 경험이 부족하고,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진정한 임무를 알지 못했기에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볼셰비키에게 맡겼으며, 볼셰비키는 그 행동을 장악했다.
우리는 독자가 그것들을 더 잘 지켜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자 여기에 새로운 국면을 기대하는 짧은 글을 추가하고자 한다.
혁명의 시작될 당시 러시아 노동계급의 이러한 부족함은 이후 혁명 전체에 있어 치명적임이 증명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1905~06년 실패로 끝간 혁명의 빚과 같은 해악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은 단결권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흩어진 채 남게 되었다. 1917년 그들은 그 사실의 파장을 느꼈다.
(볼셰비키당이 지배권을 잡은 뒤 초반 행보를 고려해 보라.) 노동자가 혁명을 달성하고 스스로 해방하는 것을 돕는 대신에, 그들의 투쟁에서 그들을 돕는 대신에, 일반적으로 모든 혁명적 사상가의 역할이자 결코 “정치 권력”을 취하고 행사하는 것을 결코 포함하지 않고 노동자가 그들의 생각으로 할당한 역할 대신에―이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볼셰비키당은 일단 지배권을 잡자 스스로를 절대적인 지배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들은 빠르게 타락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권 계급으로 조직했다. 그리고 후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새로운 형태로, 노동계급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때려눕히고 굴복시켰다.
이 때문에 혁명 전체가 거짓으로 꾸며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인민 대중이 볼셰비키의 위험을 인식했을 때, 그것은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물질적, 행정적, 군사적, 경찰적 힘을 가지고 견고하게 조직된 새로운 주인과 그들 간의 투쟁 끝에 사람들은 굴복했다. 그 쓰라리고 불평등한 대립은 약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러시아 밖에서는 오랫동안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진정한 해방을 위한 혁명은 “혁명가들” 그들 자신에 의해 다시 억눌렸다.
여기서 “정치 권력”은 그 자체로는 힘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국가의 무기인 자본, 군대, 경찰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강하다. 그러한 밑받침이 부족하면 그것은 “허공에 매이게” 되고, 무력하며 작동할 수 없다. 러시아혁명은 이를 정식으로 증명했다. 1917년 2월 이후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정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무력했고, 그 “권력”은 두 달 뒤 저절로 무너졌다. 파산 후, 그것은 더 이상 실질적 힘을 지니지 못했다―생산자본, 대중의 신뢰, 견고한 국가 기구, 그들 자신의 군대, 그 어느 것도 말이다. 두 번째 임시정부와 세 번째 임시정부도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같은 이유로 무너졌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사건들을 촉발하지 않았다면 케렌스키 정권은 얼마 뒤 정확히 동일한 운명을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사회혁명이 “국가”를 수용하는 과정에 있다면 (그리하여 자본, 토지, 광산, 공장, 통신수단 그리고 돈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하고, 군대가 사람들과 공동전선을 꾸린다면) “정치 권력”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패배한 계급이 관습적으로 정부를 구성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설령 그들이 그것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능하며, 무장한 사람들의 사소한 활동에도 간단히 억압되는 유령 정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혁명에 관해 말하자면, “정치 권력”을 지닌 “정부”가 왜 필요하겠는가? 혁명은 오직 한 가지 임무, 즉 사람들과 같은 진로로 나아가고, 스스로를 조직하고, 통합하고, 경제적으로 완전해지고자 하고, 필요하다면 스스로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확장하고, 대중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생활을 건설하는 것만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정치 권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혁명적인 이들 자신들의, 그들의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조직, 그들의 조직된 연맹, 그들의 방어 조직들의 정상적인 기능이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이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정치” 활동은 무엇인가? 나는 이런 질문들을 이해하기 쉬운 정의나 답변을 얻지 못한 채 좌파 정당 구성원들에게 몇 번이나 제기했던가! 어떻게 “정치” 활동을 그 자체로, 특히 존재의 명확한 이유를 지닌 공동체에 유용한 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다른 활동들은 어느 정도 정확하게 묘사하고 정의할 수 있다―사회나 경제, 행정, 법률, 외교, 문화 같은 것들은 말이다. 하지만 “정치” 활동―그것은 무엇인가? 이 용어는 정확하게 중앙 행정 활동을 나타내며, 널리 확장된 집단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주장된다. 국가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정치 권력”은 곧 “행정력”을 의미하는가?
이 두 개념이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권력과 행정은 이처럼 혼동된다(마치 국가와 사회가 혼동되는 것처럼). 실상, 행정 활동은 인간 활동의 어느 분야와도―분리될 수 없으며―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활동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조직, 연맹 또는 정상적인 중앙집중화의 원칙인 이상(그것이 요구되는 정도까지) 연합적으로―또한 주변부로부터 중앙으로 작용한다.
특정 종류의 인간 활동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행정을 생각할 수 있다. 각 분야 혹은 여러 분야에서 조직 능력을 지닌 사람은 보통 조직가 또는 “행정가”의 기능을 행사해야 한다―그 기능은 단순히 해당 분야 전체 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이러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정치 권력을 확립할 필요 없이 “사안의 행정”(연락, 유대, 균형 등)을 그렇게 보장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권력”은 다른 모든 “개별 사안”과 같이 어떠한 일반적인,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인간 활동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막연한 것으로 남는다. 그것이 그에 상응하는 업무 수행에 의해 실제 기능이 정상적으로 수행될 때 “정치 권력”이 공허해지고, 그들 스스로의 무게에 의해 추락하는 이유이다. 인간 공동체에는 특정한 “정치적” 기능이 없기에, 정치 권력 “그 자체”는 존재할 수 없다.
러시아의 법학자인 A. A. 골덴베이제르(Alexei Alexandrowitsch Goldenweiser)는 그의 회고록[7]에서 그가 혁명 당시 우크라이나의 특히 불안정한 지역의 한 도시에서 살았다고 진술한다. 사건들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는 여러 차례 백군이나 적군의 “권력” 바깥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골덴베이제르는 그 기간 내내 그곳 주민들은 “권력”이 있을 때보다 더 잘 살았고, 일하고, 자신의 필요를 처리했다고 전했다. 그 사실을 언급한 것은 골덴베이제르 뿐만이 아니었다. 의외인 것은 그가 그것에 놀랐다는 것이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고, 행동하게 하고,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준비하게 하는 것이 “권력”인가? 모든 인류 역사상 사회를 잘 조직하고 조화롭게, 행복하게 만드는 “권력”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역사는 우리에게 그 반대를 가르쳐준다. 인간 사회는―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한 한―정치적 권력이 약하고(고대 그리스나 중세의 특정 시기를 참조하라) 사람들이 권력에 의해 다소 떨어져 있던 시기에 행복하고, 조화롭고, 진보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강력한 “정치 권력”은 사람들에게 불행, 전쟁, 빈곤, 침체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정치” 권력은 우리 시대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특정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인류 사회의 진화 가운데 형성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에 관여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 주제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수천 년 동안 “권력”이 전쟁 외에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말하는 데에 국한할 것이다. 그 주제에 관한 모든 학술 작품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최근 수십 년 동안 러시아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행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제, 지시, 강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따라서 “정치 권력”은 강제 수단을 소유한 대규모 집단(국가)의 큰 중앙 행정이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대중적 행정 서비스는 특정하고 영구적인 “정치 권력”을 설정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정치 권력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이러한 방식의 조치에 의지할 수 있다.
또한 대중은 스스로를 조직하거나 스스로 효과적인 행정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작품에서 독자가 그 반대의 충분한 증거를 찾을 수 있기 바란다.
만약 사회혁명의 한복판에서 정당들이 “권력의 조직화”를 통해 스스로를 즐겁게 하기를 원할 경우,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혁명적 과업들을 계속하고 정당을 고립시켜 두면 된다. 그들은 곧 이 쓸모없는 게임을 포기할 것이다. 1917년 2월 이후, 그리고 특히 10월 이후, 러시아 노동자들이 새로운 주인을 만들어내는 대신 모든 혁명가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의 군대로 보호되고, 온 나라에서 충분히 지지를 받아 그저 그들의 과업을 계속했더라면 바로 이 “정치 권력”이라는 개념은 곧 사라졌을 것이다.
독자가 지켜볼 다음 장에서는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사실들이 나타날 것인데, 이것이 주제를 확실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 혁명이 올바른 길을 가고, 정치적 “궁정 혁명가”들에 의해 잘못 이끌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제5부. 볼셰비키 혁명
1917년 10월 말, 러시아에 절정이 다가왔다. 대중은 새로운 혁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7월 이후 몇 차례 자발적인 봉기(이미 언급된 페트로그라드에서의 그것, 칼루가의 그것, 또 카잔의 그것)와 군대 및 일반인 사이의 동요가 이에 대한 충분한 증거였다. 그때부터 볼셰비키당은 두 개의 실제 세력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어마어마한 대중과 군대 대부분의 신뢰를. 그들은 행동에 들어갔고 승리를 결의한 결정적 전투에 열정적으로 준비했다. 그들의 선동은 격렬했다. 그들은 핵심적인 전투를 위한 노동자와 육군 부대 구성을 마무리했다. 또한 그들은 성공 이후에 대비해 자체 부대를 조직하고 레닌을 필두로 하는 볼셰비키 정부 계획을 구성을 정렬했다. 레닌은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최종 지시를 내렸다. 시베리아 탈출 후 지내던 미국에서 몇 달 전 귀국한 레닌의 오른팔 트로츠키는 권력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기로 되어있었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는 볼셰비키와 협력하고 있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숫자가 적고 조직력이 부족했으나 케렌스키에 대항하는 대중의 행동을 지지하고 촉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은 새 혁명을 새로운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적 방향에서 벗어나 자유의 정신으로, 자유로운 조직과 협력을 향해, 진정한 사회적 길로 나아가게 하고자 했다.
그 뒤의 사건들은 꽤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 사실들을 간단하게만 열거할 것이다.
케렌스키 정부의 극도로 취약함을 인식하고, 압도적인 다수 노동 대중의 공감을 얻었으며, 크론슈타트 함대―언제나 혁명의 선봉이었던―의 적극적 지지와 페트로그라드 주둔 부대 대다수의 지지를 확신한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10월 25일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같은 날 《범 러시아 소비에트 총회》가 소집되었다.
중앙위원회가 생각하기에 이 총회―그들 당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볼셰비키가 대표 대다수를 차지한―는 필요에 따라 혁명을 공표하고 지지하며, 나라 안 모든 혁명 세력을 결집하고, 케렌스키의 최후 저항에 맞설 것이었다.
10월 25일 저녁, 반란은 효과적으로 일어났다. 총회는 예정대로 페트로그라드에서 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
시가전도, 바리케이드도, 광범위한 전투도 없었다. 모든 일이 간단하고 빠르게 일어났다.
모두에게 버림받았으나 환상에 사로잡혀있던 케렌스키 정부는 수도의 겨울 궁전에 눌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정예” 경비대대와 여군 대대, 그리고 소수의 젊은 사관생도들로 보호받고 있었다.
소비에트 총회와 당 중앙위원회가 공동으로 구상한 계획에 따라 볼셰비키에 의해 장악된 일부 분대가 궁전을 포위하고 방어 부대를 공격했다. 이 부대들의 행동은 크론슈타트에서 차출되어 궁전 맞은편 네바 강에 정박한 발틱 함대 몇몇 전함에 의해 지원을 받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순양함 오로라Aurora였다.
짧은 교전과 순양함으로부터의 몇 번의 포 사격 이후 볼셰비키 부대는 궁전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케렌스키는 가까스로 도망쳤다.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은 체포되었다.
따라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반란”이 볼셰비키가 이끄는 소규모 군사작전으로만 제한되었다. 정부의 자리가 비워지자마자 당 중앙위원회가 그곳을 맡았다. 그 전복은 사실상 궁정 혁명이었다.
케렌스키가 전선에서 소환한 일부 병력(카자크, 또 다른 코카서스 사단)과 함께 페트로그라드로 진군하려 한 시도는 실패했다―수도의 노동 대중, 특히 재빨리 구원을 나선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격렬한 무력 개입으로 인해. 페트로그라드 외곽의 가치나Gatchina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케렌스키 부대의 일부는 패배했고, 다른 이들은 혁명 진영으로 넘어갔다. 케렌스키는 도망쳐 외국으로 탈출했다.
모스크바나 다른 지역들에서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모스크바에서는 혁명 세력과 반동 사이에 열흘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도시의 몇몇 구역은 포격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었다. 마침내 혁명이 승리했다.
몇몇 다른 도시들에서도 치열한 투쟁 끝에 승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골은 대부분 평온하거나 오히려 무관심한 채 남아있었다. 농민들은 자신들 지역의 관심사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한동안 그들은 스스로 “농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데에 있어 아무런 잘못도 볼 수 없었다. 일단 토지를 손에 넣었고, 대지주인 포메시키의 귀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자 그들은 거의 만족했고, 왕위를 누가 차지하고 있는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볼셰비키로부터 어떠한 해악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볼셰비키가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완전히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보였다.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혁명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 혁명이 성취된 방식은 “정치 권력”을 위한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만약 여러 이유로 그러한 권력이 대중의 강력한 지지, 특히 군대에 의해 지지받는다면 그에 맞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반대로 권력이 대다수 대중과 군대에 의해 버림받는다면―모든 진정한 혁명에서 그러한 것처럼―그것은 신경 쓸 가치가 없다. 무장한 이들의 작은 몸짓만으로도 그것은 카드로 만든 집처럼 무너질 것이다. “정치” 권력이 아니라 혁명의 진정한 힘, 무궁무진하고 자발적이며 잠재적인 힘, 억누를 수 없는 정신, 그것이 여는 광활한 지평선에 관심을 두어야만 한다―다시 말해 그것이 가져오는 엄청난 가능성에 말이다.
그러나 몇몇 지역, 특히 동부와 중앙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의 승리가 완전하지 않았다. 반反혁명이 곧 출현했다. 그것은 스스로를 통합하고 중점을 획득하며 1921년 말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이어졌다.
특히 안톤 이바노비치 데니킨 장군이 이끄는 반혁명 운동 중 하나는 볼셰비키의 권력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먼 남부 러시아에서부터 출발해, 데니킨의 군대는 1919년 여름 모스크바의 성문에 거의 다다랐다.
같은 지역에서 표트르 브란겔(Pyotr Nikolayevich Wrangel) 장군이 시작한 또 다른 봉기 또한 매우 위험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Alexander Vasilyevich Kolchak) 제독이 시베리아에서 조직한 세 번째 백군 운동은 한동안 눈에 띄게 위협적이었다. 옴스크omsk의 본부에서 우랄산맥을 향해 서쪽으로 군을 이끌고 나아가며, 그는 몇 차례 전투에서 볼셰비키를 무찔렀다.
다른 반혁명적 반란은 그만큼 중대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반혁명 운동 대부분은 외국의 개입을 통해 어느 정도 지원되고 물자를 보급받았다. 일부는 중도 사회주의자, 《사회주의혁명당》 우파, 그리고 멘셰비키들에 의해 지지받거나 정치적으로 이끌어지기도 했다.
또 다른 한편, 볼셰비키 권력은 두 방향으로 길고도 곤란한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옛 동지였던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와 맞서야 했으며, 아나키즘 운동 및 사상에 맞서야 했다. 당연히 이러한 좌파 운동들은 반혁명 편에 서서 볼셰비키와 싸우지 않았고, 반대로 “진정한 사회혁명”의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당이 잘 못 되었음을 알렸다.
의심의 여지 없이 반혁명 세력의 탄생, 그리고 특히 그 규모와 힘은 볼셰비키 세력의 파산과 러시아 대중을 위한 새로운 경제 및 사회생활을 조직하지 못한 데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나아가 독자는 10월혁명의 진정한 발전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또한 새로운 권력이 스스로를 강요하고, 유지하고, 혁명의 문제를 자신들의 방식대로 “해결”해야만 했던 수단이 무엇이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1922년 말까지 볼셰비키당은 완전히―적어도 역사 가운데 일시 정도―상황을 지배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었다.
차리즘과 부르주아 봉건 체제의 폐허로부터, 바야흐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1] 1917년 혁명 이전 19세기 러시아 상황과 1789년 혁명 이전 18세기 프랑스 상황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몇몇 특성은 특히 러시아스럽다.
[2] “193인”에 대한 유명하고 가공할 만한 재판이 이 억압의 절정이었다.
[3] 레닌(Lenin)이 그의 작품에서, 부하린(Nikolai Ivanovich Bukharin)이 그의 작품 『공산주의 ABC The ABC of Communism』에서 “소비에트”는 1905년에 노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언급한 것은 전적으로 옳지만, 그들은 세부사항을 설명하지 못했으며, 그들은 이 노동자들이 볼셰비키, 혹은 적어도 그 “동조자들”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4] 한 가지 예외를 언급해야겠다. 나는 세바스티앙 포르가 출판한 『아나키즘 백과사전L'Encyclopédie Anarchiste』의 러시아혁명에 대한 짧은 연구에서 이 사실들을 “혁명”이라는 단어로 언급했다. 그 후 포르는 『진정한 사회혁명La véritable révolution sociale』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내 글을 포함한 백과사전에 등장한 연구 중 일부를 다시 펴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자유의지주의 문학을 읽지 않기 때문에 인용된 사실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5] 노사리에게는 아내가 있었지만 나는 이 사건들 이후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에게는 또한 스테판(Stefan)이라는 남동생도 있었는데, 나는 후에 그를 감옥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그 뒤 그를 보지 못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면 그들이 내 말을 확인해줄 수 있을 것이다.
[6] 독자는 이 취약함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독자는 러시아에서―연약하고, 체계적이지 않으며, 전적으로 국가에 의존한―부르주아지에게 주도권이 없고, 실제적인 힘이 없으며, 국가 경제에서 유기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산업 노동자들과 농민들―목소리도 권리도 없는 농노들―은 제국의 경제생활에서 아무것도 아니었고, 차르 정권 국가에서 아무것도 담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체계 전체가 차르 정권 공무원들의 손에 달려있었다. 전쟁이 이 계층에 지장을 주고 구식 조직을 혼란스럽게 하자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
[7] 『러시아혁명 공문서 중 키예프 회고록Kievan Reminiscences, in Archives of the Russian Revolution』, Vol.Ⅵ, pp.161-303, 모스크바?,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