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에 실린 에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현대 연극: 강력한 급진사상의 전파수단〉만을 옮긴다.


일부 사회계층에서 불안과 불만을 지니게 되면 이를 외적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반동적인 압박이 가해진다. 그러나 말 없던 불안이 의식적으로 표출되어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질 때 그 영향은 인간의 전반적인 사유와 행위에 미치게 된다. 그 결과 개인은 기존 가치관을 점차 변화시키려는 사회적 의사표현을 하게 된다.

현대의 명백한 사회적 불안이 엄청나게 확산되는 양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선전 문건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예술과 문학과 그리고 무엇보다 드라마(연극)에 표출된 광범위한 내용과 대화해야 한다. 근대적 드라마는 우리 내면 깊이 내재한 불만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이 큰 해석 양식이다.

밀레(Millet)의 단순한 미술작품 하나가 우리 의식의 불만을 각성시키는 데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 거기에 나타난 농민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비리에 대한 섬뜩한 고발이 아닌가. 동시에 이 그림은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에 목숨을 걸고 자연의 풍성함을 향유할 줄 모르는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극작가 뫼니에(Meunier)는 그의 작품에서 불구가 된 형제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광부 노동자들의 점증하는 연대의식과 도전의식을 표현한다. 천재 뫼니에는 땅 속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광부들의 들끓는 불안을 반란의 정신에 충만한 예술적 표현으로 강력히 묘사한다.

근대 문학에서 저항적 각성을 추구한 문인들 중 최고의 반열에 드는 작가들은 투르게네프(Turgeniev), 도스토예프스키(Dostoyevsky), 톨스토이(Tolstoy), 안드레예프(Andreiev), 고리키(Gorki), 휘트먼(Whitman), 에머슨(Emerson)이 있다. 이들 외에도 사회변화에 대한 갈망과 보편적 열정의 정신을 지닌 여러 작가들이 있다.

문학보다도 더 영향력이 큰 것은 근대 드라마이다. 드라마는 급진적 사상을 발효하는 역할과 새로운 가치곤을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근대 드라마가 이토록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 국가의 근대이념 발전상을 연구해 보면 드라마가 위대한 사회적 진리를 성공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다. 드라마가 아닌 다른 양식으로 표출되었을 때는 무시되었던 일반적인 진리도 드라마로 표출되면 파장이 컸다. 예외적으로 드라마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던 나라는 러시아와 프랑스 정도다.

정치적 압박이 심한 러시아의 국민은 사고가 깊고, 사회적 동질의식으로 각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일반인의 지적 삶과 지적 삶을 파괴하려는 독재정권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괴리 때문에 러시아 사람들의 정치사상은 발달할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 체호프(Tchechov), 고리키, 안드레예프의 위대한 희곡들은 러시아 사람들의 삶과 투쟁과 희망과 갈증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만큼 러시아의 희곡은 급진적 사상 확산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연극 『어둠의 세력The Power of Darkness』이나 『밤 숙소Night Lodging』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진정한 기독교인인 톨스토이는 기존 기독교계의 최대의 적이기도 했다. 그는 대단한 필력으로 어둠의 세력, 즉 기독교 교회의 미신적 존재들이 인간 정신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에 대해 묘사했다.

다른 어떤 매체가 그런 극적인 힘으로 어리석은 희생자들에게 교회가 저지른 범죄의 책임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볼 때 희곡이 아닌 다른 표현 수단을 활용했다면 이처럼 인간의 양심에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고리키의 『밤 숙소』에도 톨스토이 연극과 비슷하게 직접적이고 강력한 고발 내용이 들어있다. 사회적 빈곤과 범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회 하층민들은 마지막 희망과 열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나 이들의 희미한 희망마저 잔인하고 비우호적인 사회 환경 때문에 산산이 부서진다.

러시아와는 달리 자유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프랑스는 급진적 사상의 요람이다. 프랑스 자체가 의식화 수단으로 연극을 굳이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붉은 법복Robe Rouge』과 같은 브리외(Eugène Brieux)의 작품들은 사법부의 엄청난 부패상을 묘사한다. 그리고 미르보(Octave Mirbeau)의 작품 『사업은 사업이다Les affaires sont les affaires』는 부富가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런 연극 작품들은 프랑스에서 사회 문제와 관련해 쓰인 그 어떤 책이나 신문기사보다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영국, 심지어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비록 정도는 덜하지만 연극이 역사를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즉 다른 방식으로는 급진사상을 접할 수 없는 계층에까지 급진사상을 전파했다.

독일을 예로 생각해보자. 근 사반세기 동안 대단한 이념적 순결성으로 무장된 혁신적 지성인들이 인간적 형제애와 정의의 진리를 억압받고 짓밟힌 자들에게 확산시키고자 한평생을 바쳐 애썼다. 그러나 엄청난 혁명적 파동을 일으킨 사회주의자들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체제에 희생되고 말았다. 아, 슬픈 일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은 현실에 아예 무관심했다. 독일국민에게 혁명적 파고는 불평분자와 위험하고 무식한 말썽꾸러기들의 중얼거림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이 혁명 운동가들이 있을 곳은 감옥 창살 안이었다.

교양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호소하는 이유조차 모른다. 노동자들이 이 세상 부의 증대에 기여만 하고는 굶어죽고 있는데 말이다. 아름다움과 호화스러움에 둘러싸여 자신들과 함께 사는 부자들 중에는 짐승 이하의 삶을 사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저들은 믿을 수 없어 했다. 집도 없고 넝마만 걸친 채 아무런 희망이나 야망도 없이 사는 인간들이 그들 옆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했다.

보불전쟁 이후 이런 상황이 독일에서 특히 확연해졌다.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에서는 감정적이고 애국적인 문학작품이 쏟아져 나왔고, 이로 인해 독일 청년의 마음은 피 흘리고 정복하는 일을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했다.

독일 지성인들은 외국의 문학 작품으로 도피했다. 입센(Ibsen)과 졸라(Zola), 도데(Alphonse Daudet), 모파상(Maupassant)의 작품들과 특히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같은 위대한 러시아 작가의 작품들로 도피했다. 그러나 자기 토양에 뿌리 내린 문학과 드라마가 없는 나라는 높은 문화적 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어서 곧 자국민의 삶과 투쟁을 반영한 드라마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가장 젊은 드라마 작가들 중 한 명인 아르노 홀츠(Arno Holz)는 그의 작품 『젤리케 일가Die Familie Selicke』에서 속물들의 안일하고 편안한 삶의 모습을 들추어냈다. 이 연극은 사회의 인간쓰레기로 거리에 내몰린 남녀들을 다루었다. 이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은 쓰레기통에서 찾아낸 음식물 찌꺼기들이다. 아주 섬뜩한 주제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강렬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궁핍을 모르고 그래서 이 세상이 다 잘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단단하게 덮고 있는 껍데기를 깨기 위한 충격요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연극은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진리는 고통스럽고, 이것을 독일인들은 정면으로 인정하기 싫어했다.

희곡 『젤리케 일가』는 가시적인 효과를 얻은 대표 희곡에 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라마의 천재 홀츠는 이 희곡을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내용으로 해석하여 무대에 올리면서 광범위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끔찍하게 불평등한 현실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주더만(Hermann Sudermann)의 작품 『명예Ehre』와 『고향Heimat』도 중요한 주제를 다룬다. 감정적 애국주의 때문에 일반적인 독일인들은 명예를 굉장히 왜곡되게 추구하게 되었다. 결투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가 생겼다. 이런 광적인 유행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대표적인 작가들의 입에서 나왔다. 이런 독일적 병폐를 가장 분명하게 폭로한 작품이 『명예』이다.

이 연극은 단순히 결투 문제만 다루지 않는다. 명예의 참된 의미를 분석하여 명예란 어떤 고정불변인 선천적 감정이 아니라 사람과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각자의 경제적 · 사회적 위상에 따라 명예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연극에서 부자가 생각하는 명예와 희생자가 생각하는 명예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이네케(Heinecke) 가족은 백만장자 뮐링(Mühling)의 배려로 그의 땅에 세워진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 한 채를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하이네케의 아들 로버트(Robert)는 이때 집에 없었다. 로버트는 뮐링을 대신하여 인도에서 큰 장사를 하고 있었다. 로버트가 돌아왔을 때 누이동생이 젊은 뮐링에게 성폭행 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뮐링은 40,000마르크 수표를 제시하면서 이 문제를 좋게 마무리하자고 제안한다. 분개한 로버트는 자기 가족의 명예가 더럽혀졌다고 참을 수 없는 화를 폭발시킨다. 로버트는 인류애가 넘친다는 이 백만장자의 면전에 다음과 같은 비난을 퍼붓는다.

“당신에게 노예에 불과한 우리가 당신을 위해 심장의 피를 바치는 동안 당신은 우리 딸들과 누이들을 유린하고는 친절하게도 이들이 당한 불명예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가 당신을 위해 벌어다 준 돈을 주려고 하는군요. 당신이 말하는 명예가 이런 식이오.”

이 연극에서 명예의 개념을 조명하는 역할을 하는 자는 카운트 트라스트(Count Trast)이다. 『명예』에서 중요한 등장인물인 그는 여러 지방의 풍속에 대해 두루 대화를 나눈다. 그는 많은 여행 경험이 있는데 한 번은 야만부족 마을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이들 부족이 환대의 표시로 부족장의 아내와 트라스트가 동침하도록 했다. 그런데 트라스트가 이 제안을 거부하자 이것은 부족의 환대를 거부한 행위로 이 부족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라고 말했다.

『고향』의 주제는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이다. 갈등 구조가 희곡 처음부터 끝까지 주를 이룬다.

슈바르츠(Schwartz) 중령의 딸 마그다(Magda)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아버지가 선택해준 배우자를 거절한 것이다. 부모의 명령을 감히 거절한 마그다는 집에서 쫓겨난다. 생명력과 자유정신으로 충만한 마그다는 바깥세상으로 나갔다가 12년 후에 유명한 가수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부모를 찾아간다. 그러나 엄격한 그녀의 아버지는 즉각 그녀에게 부모의 권리를 고집한다. 마그다는 분개하지만 아버지는 끈질기게 마그다의 과거를 밝히라고 요구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존경하는 폰 켈러(von Keller) 수상이 학창시절에 마그다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마그다는 경제적 · 사회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 고투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의 허망한 사랑의 결실로 마그다는 아이를 임신했지만 남자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떠나고 말았다. 완고한 군인인 마그다의 아버지는 폰 켈러 수상에게 딸과 결혼할 것을 요구한다. 마그다의 사회적 · 직업적 성공을 보고 켈러는 이 요구에 기꺼이 동의하려 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마그다가 노래를 그만두어야 하고 아이를 양육기관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은 마그다의 다음과 같은 도전적인 발언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 말을 통해 여성의 사고와 행동이 상당한 수준의 독립을 성취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당신과 당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지요. 내가 왜 지금은 사랑하지도 않는 당신과 살기 위해 나의 처지를 악화시켜야 하죠? 왜 내 몸을 금으로 장시개서 내 이름을 오명으로 더럽혀야 하죠? 나는 10년이란 세월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했어요. 지금 내가 얻은 명성은 몇 날 며칠을 밤새워 나의 경력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차곡차곡 쌓은 결과에요. 이런 내가 왜 당신 앞에서 굴욕적이어야 하죠? 나는 나 자신일 뿐이고, 나 자신을 통해서 나를 찾을 뿐이에요.”

『고향』의 전반적인 주제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투르게네프가 『아버지와 아들Fathers and Sons』에서 이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투르게네프의 이 위대한 작품은 보편적 상황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러시아적 상황을 담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러시아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고향』은 특히 드라마적인 양식 때문에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는 작품이 되었다.

급진주의를 전파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안목이 깊은 독일인들을 혁명화시킨 드라마 작가는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dt Hauptmann)이다. 그의 첫 연극 『해가 뜨기 전Vor Sonnenaufgang』은 독일의 대표적인 극장에서 상연을 거부당했고 맥줏집 정원 뒤편 작고 초라한 무대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는데, 강력한 번개처럼 빛을 발해 사회 전역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무식하고, 문맹인데다 야만적인 대지주와 농노의 삶을 다루고 있다. 부를 생산하는 농노와 그것을 소유하는 자 모두에게 부는 사람을 술주정꾼, 게으름뱅이, 타락한 자로 만든다는 것을 매우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해가 뜨기 전』에서 가장 부각되는 특징은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 의한 무차별적인 훈육이다. 이것 때문에 하우프트만은 많은 비난을 들었다.

이 연극이 두 번째로 공연되는 동안 베를린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극장에서 소동을 일으켰다. 그 외과의사는 두 개의 핀셋을 자기 머리 위로 휘두르며 이렇게 소리쳤다.

“이런 유치한 내용을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떠들게 놔둔다면 독일의 품위와 도덕의 추락은 경각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 외과의사는 잊혀졌고 하우프트만은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우뚝 섰다.

『직조공들Die Weber』이라는 작품이 처음 무대에 올려졌을 때 사상가들과 시인들의 진영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었다. 도덕주의자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더럽고 추악한 노예들 같은 노동자들을 무대에 올리다니! 이런 끔찍한 가난과 추악함을 저녁을 먹은 후 감상하라는 말이냐? 내용이 너무 지나쳐!”

하긴 직조공들의 삶이 처한 가공할 현실이 기름기 번지르르한 부르주아들 눈에는 지나쳐 보일 만도 하다. 이 작품이 지나치다면 그것은 진실과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고발한다!

물론 이 작품이 나오기 전에도 자본이 노동을 삼키지 않으면 살찔 수 없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부는 그 누군가를 가난하게, 배고프게, 춥게 만들지 않으면 축적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은폐되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억압받는 자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현대 연극의 목적이다. 실레시아Silesia라는 작은 마을의 직조공들의 삶을 세상에 알린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목적도 이것이다. 하루에 18시간을 일하면서 일용할 양식과 난방용 땔감을 구하기에도 모자라는 노동자들의 모습. 눈이 덮인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에서 추위를 막는 것이라고는 넝마밖에 없는 인간들이 사는 모습. 헐벗고 배고파 괴혈병을 앓는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라온 폐병에 걸린 임산부들. 이것이 자비로운 기독교 시대의 희생자들이다. 생명도 없고, 희망도 없고, 따뜻함도 없다. 아, 그렇다. 정말 지나친 것은 이것이다!

하우프트만은 극적인 다재다능함으로 모든 사회적 삶들을 다루고 있다. 경제적 여건의 참담함을 묘사하는 것은 물론 각 개인이 전통과 인습의 노예에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해방되기 위한 투쟁도 다룬다. 이런 주제를 다룬 그가 쓴 극적 구성의 산문시 『가라앉은 종Die Versunkene Glocke』에 등장하는 종을 만드는 장인 하인리히(Heinrich)는 자유의 산 정상에 오르는 데 실패한다. 그 이유를 라우텐델라인(Rautendelein)이라는 이가 대신 말해주는데, 그가 너무 오래 정상이 아닌 계곡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을 만드는 장인의 운명과 비슷하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 포케라스(Vockerath) 박사와 안나 마르(Anna Maar)도 소외된 이들이다. 이들 역시 그 사회적으로 숭배되는 관습에 도전할 힘이 없다. 그러나 이들의 실패 자체가 전 세계의 숨죽이고 살던 개인들에게 저항의 정신과 사회해방의 정신을 일깨워준다.

막스 할베(Max Halbe)의 『청춘Jugend』과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깨어나는 봄Frühling's Erwachen』이라는 두 작품은 급진사상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파급시킨 희곡들이다. 이 작품들은 아이들 문제와 그 본질에 대한 심각한 무지와 편협한 청교도 정신을 다룬다. 특히 『깨어나는 봄』이 그렇다. 어린 소년소녀들은 건강과 복지만큼 중요한 문제이고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의 기능인 사회적 존재로서의 젊은이들의 각성을 막는 거짓된 교육과 구역질나는 도덕에 희생된다. 이 연극에서 어머니는 분명 훌륭한 어머니인데도 불구하고 14살 딸을 성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게 기른다. 결국 이 소녀는 무지의 희생자가 된다. 그 딸의 어머니는 딸이 약을 잘못 먹고 죽은 모습을 본다. 이 소녀의 묘비명에는 그녀가 빈혈로 죽었다고 적혀있다. 그녀의 도덕은 흠이 없는 셈이다.

이런 문제에서 보이는 청교도적 위선의 참상을 베데킨트가 특히 잘 조명했다. 그는 가장 유망한 아이들이 성적인 무지와 선생들이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주지 못한 결과, 그 희생자가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웬들라(Wendla)라는 소녀는 자기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인데 어머니에게 생명의 신비를 설명해달라고 한다.

“결혼한 지 2년 반이 된 언니가 한 명 있어요. 언니는 셋째 아이를 낳았어요. 나는 어떻게 아이를 낳게 되는지 전혀 모릅니다. 엄마, 제 얘기를 막지 마세요. 엄마한테 묻지 않으면 제가 누구한테 묻겠어요? 이런 질문을 한다고 절 나무라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어떻게 아이가 태어나요? 엄마는 도저히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전 이제 14살이고 아직도 아이를 다리 밑에서 주워온다는 이야기를 믿고 있어요.”

이 소녀의 어머니 자신이 허위적인 도덕 개념의 희생자가 아니라면 애정이 담긴 적절한 설명을 딸에게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어머니인 그녀는 자신의 도덕적인 수치심과 당혹감을 감추려고 이렇게 대답을 회피했다.

“아기를 갖기 위해서는 말이다. 음, 사랑을 해야 하고, 남자를 말이야, 그 남자와 결혼을 하지…. 웬들라,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야. 네 나이 때 아직 사랑을 할 수는 없지만, 자, 이제 알겠지!”

웬들라에 대해 알았을 때 어머니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신한 웬들라는 수종이 생겨 몸이 아프다고 상상했다. 어머니가 자포자기하는 마음에 울며 “넌 수종에 걸린 게 아니란다, 너는 아기를 가진 거야, 얘야”라고 할 때 웬들라는 고통스럽게 어리둥절해서 외친다. “그럴 리 없어요, 엄마. 난 아직 결혼하지도 않았어요…. 오, 엄마, 왜 저에게 모든 걸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똑같은 어리석음으로, 모리스(Morris)라는 소년은 학교 시험에서 낙제해 자살로 내몰리고, 웬들라를 임신시킨 멜치오(Melchior)라는 어린 아빠는 교도소로 보내졌다. 어린 나이에 성적으로 일찍 눈을 뜬 것이 선생님과 부모님의 눈에는 타락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문제의식을 느낀 독일 사람들은 의무적인 성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성적인 문제를 솔직하고 지적으로 논의하는 출간물인 「모성보호Mutterschutz」에는 상당 기간 동안 성교육의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베데킨트라는 천재적인 극작가가 급진적 사상을 확대하면서 독일의 많은 학교에 성 생리학을 도입하게 되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스칸디나비아는 다른 매체보다도 연극을 통해 많은 진전을 보았다. 입센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위대한 수필가 비요르손(Björnson)은 스칸디나비아 제국에 만연한 불평등과 부정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가 없어 광야에서의 외침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입센은 달랐다. 그의 대표작들인 『브랜드Brand』, 『인형의 집A Doll's House』, 『사회의 기둥들Pillars of Society』, 『유령들Ghosts』, 『인민의 적An Enemy of the People』 같은 희곡들에서 전통적인 관념들을 흔들어 놓았으며 삶에 대한 현대적이고 실질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종교에 대한 현대적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브랜드』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여기에서 종교는 지상에서 성취될 이상이며, 인간적 형제애와 연대감과 친절의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위선을 너무나 혐오했던 입센은 그 위선의 베일을 벗겨냈다. 입센은 천박한 사회 조직을 지탱하는 네 개 항목을 열거함으로써 맹폭을 가했다. 첫째, 오늘날 삶 속에 만연한 거짓. 둘째, 도덕적 규범으로 희생을 부추기는 설교. 셋째, 절대 다수가 유일하게 숭배하는 물질 만능주의. 넷째, 편협성의 병폐. 이 네 가지 주제는 입센의 희곡에서 주된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사회의 기둥들』, 『인형의 집』, 『유령들』, 『인민의 적』에서 이 내용들을 집중해 다루고 있다.

『사회의 기둥들』! 이는 썩고 부패한 기둥들에 기대어 선 사회구조에 대한 신랄한 고발작품이다. 이 기둥들은 외관상으로 반짝거리고 아무런 손상도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단지 그 썩은 실상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썩은 기둥들은 어떤 기둥들인가?

컨설 버닉(Consul Bernick)은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인데 자기 고장에서는 자선가이자 지역 사회의 유지였다. 그는 정상에 이르기 위해 거짓과 기만과 사기를 연속적으로 저질렀다. 그는 오랜 친구 요한(Johann)의 명성을 빼앗고,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 로나 헤셀(Lona Hessel)을 배반하고 돈 때문에 로나 헤셀의 의붓자매와 결혼했다. 버닉은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암거래를 하면서 부를 쌓았고, 낡고 위험한 배인 인디언걸Indian Girl이라는 배를 수선해 바다에 띄워 사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기의 옛 애인 로나가 그에게 돌아오자 그는 편협하고 천박한 삶의 공허함을 깨닫는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웠으나 아들과 다음 세대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자신이 더러운 짓을 하면서 그 토대를 닦은 것이라고 위안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마지막 희망도 땅에 떨어졌다. 왜냐하면 진실은 거짓 위에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을 그가 깨달은 것이다. 정신적으로 지극히 순수한 마을사람들이 잔치를 열어 이 위대한 자선사업가를 축하하려고 준비하는 순간 다음과 같이 참회한다.

“나는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소…. 나의 동료 시민 여러분은 나의 본질을 알아야 하오. 자, 다들 내가 어떤 놈인지 잘 보시오. 이 일에서부터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거요. 겉만 번지르르한 이 늙고 위선적인 놈은 공허하고 거짓을 일삼는 작자요. 불쌍한 겁쟁이기도 하오.”

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여성해방의 길을 닦았다. 자신이 아버지와 남편 헬머 토르발드(Helmer Torvald)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 노라(Nora)는 자신의 인형 같은 역할에서 벗어난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내게 말해주고 그 의견을 반복하게 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숨겼다. 아버지가 내 주장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를 부를 때 인형 같은 아이라고 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아버지는 나를 가지고 놀았다. 이후 나는 당신의 집에서 살기 위해 왔다. 당신은 모든 것을 당신 기호에 맞춰 놓았다. 나는 당신과 똑같은 기호를 가지든지 아니면 그런 척해야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난 마치 손을 벌려 먹을 것을 구걸하는 거지처럼 산 것 같다. 나는 토르발드 당신을 속이며 살았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당신과 아버지는 내게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남편 토르발드 헬머가 옛 속물들이 흔히 주장하듯 아내의 의무와 사회적 의무를 언급하며 노라를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노라는 인형 옷을 벗어 던지고 의식 있는 여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노라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자신을 가장 먼저 인식하면서 자신이 인간임을 깨달았다. 노라는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 있었지만 겁내지 않았다. 노라는 법적 정의와 제도적 지혜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것이 옳은지, 즉 내가 옳은지 사회가 옳은지는 내가 결정하겠어.”

노라는 남편을 어린아이 같이 따르면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허위 앞에 그녀가 꿈구던 희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남편처럼 안전한 거짓말을 하면서 편안하게 안주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암묵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노라가 화려한 새장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것은 새롭게 다시 태어난 한 인격체로서 다가올 삶과 자기의 성性에 대한 자유와 진실의 문을 연 것이었다.

다른 어떤 희곡보다도 『유령들』은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해 사회 구조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와 남편인 헬머의 결합이 정당화되는 이유는 남편이 아내에 대한 성적인 순결을 지키고 사회의 엄격한 도덕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헬머라는 사람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상적인 남편이요 헌신적인 아버지다. 『유령들』에서는 이와 전혀 다르다. 캡틴 알빙(Captain Alving)과 결혼한 후 알빙 여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피폐해졌다. 이 사람과의 삶은 철저한 몰락 그 자체였고, 자식을 낳을 가능성도 없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알빙 여사는 어렸을 때의 친구인 만더스(Manders) 목사에게로 마음이 기운다. 이 목사는 진정한 영혼의 구원자로서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는 알빙 여사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남편과 가사에 충실하라고 한다. 목사인 그에게 세속적 행복이란 성스럽지 못한 정신적 징후에 불과하고, 아내의 의무는 판단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었다. “선善을 위해 권능이 당신에게 지운 십자가를 겸허하게 감당하라”는 것이다.

알빙 여사는 26년 동안 십자가를 졌다. 권능을 위해서가 아니라 귀여운 아들 오스왈드(Oswald)를 위해서였다. 그녀는 이 아들을 해독이 넘치는 남편의 집에서 구해내고 싶었다.

알빙 여사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의무와 정성”으로 시아버지를 모신 것도 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녀가 자신의 전 생애를 희생한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녀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죄를 반복했고,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배웠다.

“우리는 모두 유령들이다. 이 유령들은 우리 안에 살아있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죽은 이념들과 생명 없는 신념들이 다 유령들이다. 유령들에게는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유령들은 항상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다. 유령들을 제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모두는 불쌍하게도 빛을 두려워한다. 당신이 나에게 당신이 말하는 의무와 책무라는 멍에를 내게 강요할 때, 내가 너무나 혐오스러워하는 것을 당신은 옳고 바른 것이라고 할 때, 나는 당신 교리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단지 당신의 교리 일부분만 꺼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일부분을 밝혀내자 당신의 교리 전체가 풀어졌다. 그때 나는 당신의 교리가 모두 하나로 엮여져 있는 것임을 알았다.”

헨리크 입센의 걸작들이 담아내고 있는 깊이를 어떻게 단순한 사회가 가늠할 수 있겠는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이 위대한 사회사업가라 할 수 있는 입센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입센은 이런 사회 분위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음을 『인민의 적』이라는 작품에서 드러냈다.

이 위대한 희곡에서 입센은 마지막 장면을 부패하고 죽어가는 사회체제에 대한 장례식으로 연출했다. 이 폐허 위에 새로 탄생한 용감한 저항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 사람은 이상적인 인물 스토크만(Stockman) 박사로 사회에 대해 연민하고 공동체 의식으로 충만해 있다. 그는 온천이 많은 고향 마을의 외과의사로 불려간다. 여기서 그는 목욕탕들이 습지 위에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치료차 이곳으로 몰려든 환자들에게 습지는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이 습지라는 사실을 확인한 이 정직한 의사는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사업 관련자들이 사람들의 건강이나 정의에는 관심도 없고 이익과 배당금에만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개혁론자인 마을의 의원들조차 항상 주민들을 위해 헌신하겠노라고 떠벌리지만 저돌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의사에 대한 지지를 회피한다. 외과의사가 발견한 사실을 세상에 공표하면 마을에 불명예가 되고 결국 자신들의 수입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스톡만 박사는 직접 주민들에게 호소하기로 했다. 주민들은 자기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혼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실을 고발할 장소조차 얻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그가 진실을 밝히자 그는 인민의 적으로 온갖 비난과 조소를 받았다. 마을 주민들은 이 외과의사를 악으로 보고 광적으로 이 악을 뿌리 뽑으려 했다. 결국 이 의사는 한직으로 쫓겨났다. 그의 폭로로 마을은 금전적인 손실을 입었고, 관료, 선량한 시민 그리고 종교적인 개혁자들의 타협적인 태도는 진실의 목소리를 질식시켰다. 그는 거짓과 사기의 수렁 위에서라도 마을의 번영을 도모하려는 군중의 비도덕성을 깨달았다. 그는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거짓된 공동체가 파괴된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무너져야 했다. 해충처럼 거짓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근절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냥 보고 지나친다면 모든 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스토크만 박사는 현실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유인은 불량배처럼 행동해서는 안 됐다. 그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겁쟁이만이 진실과 이상을 유린하는 거짓된 번영이나 집단에 대한 “배려”를 허용한다. 집단의 시간표는 모든 살아있는 진실의 목을 조르고, 편의적인 타협은 도덕과 정의를 뒤엎어버려 마침내 삶을 끔찍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입센의 이 희곡들, 『사회의 기둥들』, 『인형의 집』, 『유령들』, 『인민의 적』은 문명이라 불리는 사회의 공동묘지에 서성거리는 유령들을 역동적으로 제거해 나간다. 아니, 그 이상이다. 입센의 파괴적 효과는 항상 가장 건설적인 효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입센은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근간을 흔들 뿐만 아니라 보다 건강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확고하게 건설한다. 그가 추구하는 미래는 개인의 주권에 기초하여 통합된 사회이다.

급진적 사상의 위대한 선구자들이 살았던 영국도 연극 예술의 영향력이 큰 곳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급진적 사상가들을 열거하라면 다음과 같다. 고드윈(Godwin), 로버트 오언(Robert Owen), 다윈(Charles Darwin), 스펜서(Spencer),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등이다. 그리고 자유를 노래한 시인들로 셸리(Percy Bysshe Shelley), 바이런, 키츠(John Keats)가 대표적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쇼(George Bernard Shaw)와 피네로(Arthur Wing Pinero), 골즈워디(John Galsworthy), 랜 케네디(Charles Rann Kennedy)의 희곡작품들이 과거 위대한 시인들의 외침조차 듣지 않던 사람들에게 급진사상을 전파했다. 과거에는 가난을 주제로 한 로버트 오언의 에세이도 읽지 않고, 버나드 쇼의 사회주의적 논설에도 눈길을 주지 않던 대중들이 연극 『바바라 소령Major Barbara』을 통해 급진사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연극은 가난을 기독교 문명 최대의 죄악으로 묘사했다.

“가난은 사람들을 허약하게 하고, 노예근성에 젖게 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가난은 질병과 범죄와 매춘을 만든다. 요컨대 가난이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질병의 근원이다.”

가난은 의존과 그들이 없애려고 하는 바로 그 가난을 무성하게 만드는 구호 및 자선 단체와 제도를 생겨나게 한다. 예를 들어 『바바라 소령』에서처럼 구세군은 알콜 중독과 싸운다. 그런데 구세군에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은 다름 아닌 배드거(Badger)라는 위스키 제조회사 사장이다. 그는 자기 부의 원천인 알콜 중독을 없애겠다고 매년 수천 파운드를 기부한다. 그래서 버나드 쇼는 사회에 대한 유일한 자선가는 바바라의 아버지인 총포 제조업자 언더샤프트(Undershaft) 같은 사람이라고 결론짓는다. 언더샤프트의 인생 논리는 화약이 말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다.

언더샤프트는 이렇게 말한다.

“최악의 범죄는 가난이다. 가난에 비하면 다른 모든 범죄는 미덕이고, 다른 모든 불명예는 영광스럽다. 가난은 온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페스트를 확산시켜 보고 듣고 냄새 맡은 자를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간다. 당신이 말하는 범죄라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살인도 일어나고 도둑질도 있고, 폭행과 욕설이 난무하지만 이런 것들이 정말 중요한가? 이런 일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수히 겪는 불행이다. 런던에 진짜 범죄자는 50명도 안 된다. 그러나 가난에 찌들고 비천하고 더럽고 영양실조에 걸리고 못 입는 사람은 수백만 명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물리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 이들은 사회의 행복과 자유를 말살시키고, 저들이 우리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 비참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저들을 가혹하게 대한다. 가난과 노예가 수세기 동안 당신들의 설교 제목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내 기관총 앞에는 그런 말이 필요 없다. 저들에게 설교하지 말라. 저들과 함께 생각하지 말라. 저들을 죽여라…. 총이 가장 확실하다. 총이야말로 사회체제를 전복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투표? 웃기지 마라! 투표를 해도 내각의 이름만 바뀔 뿐이다. 총을 쏠 때 정부를 전복시키고, 새 시대를 출발시킬 수 있다. 낡은 질서를 엎고, 새 시대를 여는 것이다.”

사람들이 버나드 쇼의 사회주의 논설들을 읽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연극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강력한 역사적 진실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버나드 쇼는 연극을 통해 혁명적 내용을 담아 급진사상을 전파했다.

하우프트만의 『직조공들』 이후 골즈워디가 쓴 『투쟁Strife』은 가장 중요한 노동극이다.

『투쟁』의 주제는 두 명의 주인공 사이의 대결이다. 회사 사장인 앤서니(Anthony)는 엄격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그의 고용인들이 몇 달 동안 일을 못해 굶어 죽을 지경인데도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 비타협적 혁명가인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는 노동자와 자유를 위해 헌신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파업자들이 지루하고도 질긴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가난과 가족들의 굶주림을 보면서 파업자들은 지쳐간다.

『투쟁』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군중에 대한 묘사이다. 이들은 변덕스럽고 줏대 없는 자들로 묘사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과 종교의 권능을 말하는 옛 성직자를 찬양하고 반란을 막기 위해 사람들을 훈계한다. 그러다가 일단의 사람들이 군중들을 데리고 가 노조의 정당성을 말한다. 노조는 타협적이었고,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요구조건들을 걸고 파업에 과감히 나설 때마다 노동자들을 속였다. 그러다 군중들은 다시 데이비드 로버츠의 진지함과 그의 정신과 의지력에 들떠 흥분한다. 모든 사람이 기꺼이 바람이 부는 대로 어디로든 나갈 자세다. 노동자들은 항상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떼처럼 움직인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상업주의가 만연한 우리 시대는 도대체 줏대 있는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리 정신이 고결한 인간이라도 이용가치가 떨어지고 그 자의 철학을 다 팔아먹으면 쓰레기더미에 그냥 버려진다. 이것이 이 회사 사장 앤서니와 혁명운동가 데이비드 로버츠의 문명이었다. 이들은 서로 반대된 진영을 대표했다. 서로 적대적이고 절대 건널 수 없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갈라서 있는 두 진영이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 운명을 지니고 있다. 앤서니는 보수주의자와 옛날의 이념과 강철 같은 억압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을 대표한다.

“나는 32년 동안 이 회사의 사장이었소. 네 번이나 사람들과 싸웠소. 그러나 한 번도 진 적이 없소. 시대가 변했다고들 하지. 하지만 나는 변하지 않았소. 주인과 하인이 동등하다고 하지. 말도 안 되오. 집에는 한 사람의 주인만 있게 마련이오. 자본과 노동이 동일하게 이익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하오.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 이익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오.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요. 쇠파이프로 다스리는 것. 주인은 주인이고, 하인은 하인이오.”

이처럼 반동적이고 낡은 개념에 집착하는 것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의 용기와 일관성에는 칭찬할 만하다. 이 자는 적어도 진보진영의 온건파처럼 억압받는 이의 이익을 절반쯤 대변해주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진보진영의 감상적인 온건파들은 아홉 손가락으로는 도둑질을 하고 한 손가락으로는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운다. 이런 자들은 러셀 세이지(Russell Sage) 같은 진정한 진보주의자를 괴롭힌다. 그리고 수백만 달러를 사회연구 작업에 소비한다. 이들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착취해 늙고 별 볼 일 없는 여자로 만든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몇 푼 쥐어주고 일하는 여성의 집 같은 것을 설립한다. 그에 비하면 앤서니는 그래도 싸울 가치가 있는 적이다. 이런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공개적 전장에서 맞설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데이비드 로버츠는 적과 맞설 만한 모든 정신적 · 도덕적 자질을 갖췄다. 저항 정신과 근대적 이념의 측면에서 상대를 능가한다. 로버츠 역시 일관성을 지닌 인물로 자기 계급의 완전한 승리 외에 다른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잠시의 육체적 안락과 따뜻함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후손과 미래를 위한 싸움이다. 오, 사람들이여, 그들에 대한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짐을 지워 하늘을 어둡게 하지 말라. 이 세상이 시작된 이후 줄곧 나와 처자식의 피를 빨아먹어 입술이 벌겋게 된, 하얀 얼굴의 괴물을 벌벌 떨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그들과 맞서 싸울 용기가 없다면, 그들이 자비를 구할 때까지 밀어붙일 수 없다면, 그들은 계속 우리 생명을 빨아먹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개만도 못한 지금 모습 그대로 영원히 남아있게 될 것이다.”

타협과 사소한 이익은 필연적으로 그런 괴물을 뒤에 남겨두게 한다. 대중들의 마음이 데이비드 로버츠의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괴물은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희곡작가가 예언가는 아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친숙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은 분명하다. 노동자들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두 요소, 자본과 노동이 언제든지 화해할 수 있다고 하는 기대심을 버려야 한다. 데이비드 로버츠 같은 인물이 세상을 혁명하고, 그래서 “피 묻은 입술을 가진 하얀 얼굴의 괴물”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어주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해방의 길은 보다 밝은 지평으로 향하는 자유로운 삶과 인간에 대한 보다 심오한 가치를 인정할 때 비로소 열린다.

사회적 평등에 관한 중요한 주제가 최근에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된 분야는 바로 감옥과 처벌의 문제이다.

중요한 작가 치고 이 중대한 주제를 다루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 미국 내외의 유능한 작가들이 이 주제를 역사적 · 심리학적 · 사회적 관점에서 논의했고 현재의 처벌 제도와 범죄 대처 방식을 모든 각도에서 살펴보고, 결론적으로 이런 제도적 장치가 낭비고 부적절하다는 데 동의했다. 수감자들에게 자행된 사회적 범죄에 대한 많은 문건과 고발을 통해 개선된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다. 그러나 몇몇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개선이 감옥에서 이루어졌을 뿐 근본적인 개선은 전혀 성취되지 않았다. 중대한 사회적 오류를 파헤친 대표적인 작품이 골즈워디의 『정의Justice』이다.

이 연극은 법무사무소 제임스하우앤선즈James How and Sons 사무실에서 시작된다. 상급 법무관 로버트 콕슨(Robert Cokeson)은 자신이 발행한 9파운드짜리 수표 한 장이 90파운드로 위조된 사실을 발견한다. 의혹이 하급 서기관 윌리암 팔더(William Falder)로 향했다. 팔더는 유부녀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술주정꾼 남편의 학대를 받는 여자였다. 천성이 착한 사람인 팔더는 사장의 추궁에 자신이 수표를 위조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연인 루스 허니윌(Ruth Honeywill)의 힘든 형편을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팔더는 루스를 그 잔인한 남편의 손아귀에서 구해 함께 도망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때 근대사상에 깊이 감화된 콕슨의 아들 월터(Walter)가 팔더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도덕적이고 법을 준수하는 시민인 콕슨은 팔더를 경찰에 넘겼다.

제2막은 법원이다. 여기서는 어떻게 정의가 조작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톨스토이 소설 『부활』에서의 법정 장면처럼 각 장면들은 극적인 힘이 넘치고 심리적 진실을 드러낸다. 23살의 민감하면서 조금 허약한 체질의 젊은이 팔더는 법정 앞에 서 있다. 유부녀인 그의 애인 루스는 사랑과 헌신의 마음으로 이 젊은이를 어떻게든 구하려고 노심초사한다. 어쨌든 루스와의 사랑 때문에 팔더가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프롬(Frome) 변호사가 팔더를 변호했다. 프롬 변호사가 배심원들에게 깊은 사회 철학적 언어로 인간적 동정과 배려를 자극하며 호소했다. 그는 팔더가 단순히 수표를 변조했다는 사실에만 변론의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팔더의 일시적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하는 동시에 모든 사회악의 깊은 뿌리를 잘 고려해 달라고 간청했다. 즉 사회적 악이, 삶을 마비시키는 사회적 삶이라는 배경이 범죄의 이면에 항상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팔더는 유부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현 제도법상 남편과 이혼할 수 없다. 잔인한 남편이 아내인 루스를 살해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팔더는 자기 애인이 살해당하는 것을 그냥 구경하든가 아니면 자기 손으로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것이 변호사의 핵심 주장이었다. 변호사는 배심원의 마음을 움직여 한 젊은이를 형사범으로 감옥에 넣지 않기 위해 이렇게 호소했다.

“정의롭다는 법은 기계와 같아 누구든지 이 기계에 말려들면 그대로 기계를 따라 굴러가야 합니다. 이 젊은이가 자신의 약함 때문에 저지른 행동 하나의 잘못으로 이 기계에 말려 들어가 산산이 찢어지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젊은이도 감옥이라 불리는 어둡고 불우한 배에 올라타야 할 선원이 되어야 합니까? … 배심원 여러분, 이 젊은이를 파멸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의 결과에 따라 파멸 …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올가미를 이 젊은이 앞에 던지게 됩니다. … 이 젊은이를 벌하기로 결정되는 순간 정의의 수레바퀴는 이 젊은이의 몸을 짓이기고 굴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의 수레바퀴는 그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굴러갔다. 학식이 높은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법은 법 자체이다. 그것은 장엄한 지적 건축물로서 우리 모두 그 안에 보호를 받는다. 법의 체계를 해칠 수 없다.”

팔더는 3년형을 언도받았다.

감옥에서 이 초범 죄수는 자신이 끔찍한 제도의 희생자임을 깨달았다. 당국자는 팔더가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감옥은 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제3장 3막에서는 침묵 속에 고동치는 맥박이 울린다. 모든 장면이 판토마임이다. 팔더가 있는 감방의 장면이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팔더는 양말을 신고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머리를 문 쪽으로 기울이고 귀를 기울인다. 조금 더 문 쪽으로 가까이 간다. 양말을 신은 발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문에서 멈춘다. 문 밖의 작은 소리라도 들으려고 팔더는 더더욱 신경을 곤두세운다. 갑자기 몸을 바로 세운다. 어떤 소리라도 들린 듯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다. 그런 다음 무거운 한숨을 쉬고, 자기가 해야 할 일감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한 땀 두 땀 바느질을 한다. 슬픔에 완전히 젖어 바느질 한 땀이 마치 생명을 향한 한 걸음 같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돌려 감방을 걷기 시작한다. 우리를 돌아다니는 짐승처럼 머리를 흔든다. 다시 문 앞에 멈추고 소리를 듣는다. 손을 펴 문 위에 올리고 이마를 철조망에 댄다. 그러다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창문 쪽으로 간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지 머리를 감싸고 창문 아래에 선다. 하지만 밖을 볼 수는 없다. 깡통 하나를 집어 들고 뚜껑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본다. 마치 자기 얼굴을 친구로 사귀겠다는 듯한 태도다. 날이 점점 어두워진다. 문득 손에 들려있던 깡통 뚜껑이 달가닥 소리와 함께 떨어진다. 침묵을 깨는 유일한 소리이다. 팔더는 의도적으로 벽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어둠 속에 하얗게 보이는 셔츠가 벽에 걸려 있다. 거기에 누군지, 그 무엇인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가볍게 두드리는 날카로운 소리와 찰칵하는 소리가 들린다. 유리 칸막이 뒤쪽에서 감방의 불이 켜진다. 독방이 환해진다. 팔더는 숨을 헐떡인다.

아득히 멀리서 두꺼운 철판을 두들기는 희미한 소리가 갑자기 들린다. 팔더는 몸을 움츠리고 이 갑작스러운 소리를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무슨 커다란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방에 울린다. 이 소리가 팔더에게 최면을 건다. 팔더는 문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기어간다. 문을 때리는 소리가 울린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점점 더 가깝게 울린다. 팔더의 손이 움직인다. 자기 정신은 문을 때리는 저 소리에 합류한 것처럼 보인다. 소리는 점점 커져 마침내 팔더의 방에까지 들어왔다. 팔더는 꼭 쥔 두 손을 갑자기 든다. 숨을 격렬하게 헐떡이며 갑자기 문으로 돌진해 문에 부딪힌다.

마침내 팔더는 감옥을 떠난다. 죄수라는 낙인을 이마에 찍고 자기 마음에는 비참함을 새기고 가출옥수가 된다. 루스의 탄원 덕분에 제임스하우앤선즈 회사는 그가 루스를 포기한다는 조건하에 직장복귀를 허용했다. 그때 팔더는 자기가 사랑한 여인 루스가 무자비한 자본가에 의해 그녀 자신을 팔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는 “공장에서 값싼 스커트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10실링 이상 벌어본 적이 없다. 하루 종일 일했다. 밤 열두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장이 갑자기…” 루스가 심리적으로 불안한 이 순간에 경찰이 나타나 팔더를 감옥으로 끌고 갔다. 죄목은 자신이 가출옥수임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가혹한 주변 환경을 견디지 못한 젊은 팔더는 죽음을 택한다. 다시 감옥에 끌려갔을 때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의 정의보다는 죽음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이 연극의 파급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이 연극에 감화된 영국의 내무장관은 영국 내 감옥에 대한 광범위한 개혁을 시도했다. 이런 사실은 현대 연극이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확인해주는 셈이다. 골즈워디의 강력한 사회고발은 앞으로의 미국의 대중적 정서나 감옥 환경 개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쨌든 이 연극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사회의식을 각성시키는 결실을 거두었다.

또 다른 현대극 『하인The Servant in the House』은 우리의 사회적 삶의 중요한 요소를 강타했다. 케네디의 걸작품인 이 연극의 주인공은 로버트(Robert)이다. 그는 이 점잖은 사회가 비난해 마지않는 지저분한 술주정꾼이었다. 그러나 하수구 청소부인 로버트는 진정한 영웅, 그리고 유일한 구원자이다. 위험한 하수구로 자원해 내려가는 자가 바로 로버트이다. 그래서 그의 동료들은 신선한 빛과 공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로버트가 자기 삶을 항상 희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기분 좋게 사는 것이다.

노동이 사회적 부의 원천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어느 지역에서나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버트의 단순한 말은 노동의 의미와 위대한 가능성을 가진 그 목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미국 연극은 여전히 유아기이다. 삶의 현실을 반영하려는 시도로 만든 연극 대부분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현대극이 외국에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지적 대중의 태도에서 희망이 보이기는 한다.

미국에서 지금까지 연출된 것 중에서 진짜 연극이라 할 만한 유일한 것은 유진 월터(Eugene Walter)의 『가장 쉬운 길The Easiest Way』이다.

이 연극은 뉴욕 생활의 “특별한 현상”을 재현한다. 이게 전부라면 이 연극은 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일 것이다. 이 연극의 가치와 중요성은 보다 깊은 차원에 있다. 이 작품은 우선, 로라(Laura)보다 더 강한 우리 모두를, 가장 쉬운 길, 고결함과 진실과 정의를 파괴하는 바로 그 길로 몰아가는 것이 우리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로라의 성에는 잔인하고 무감한 숙명이 각인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이 연극에 보편성을 부여했고 가장 강력한 사회고발 작품의 특성을 띠게 했다.

사회 경제적 상황에 몰려 로라는 인간적 에너지를 범죄에 소모한다. 이것은 보통의 소녀가 가정을 꾸리기 위해 아무 남자와 결혼하게 되는 상황과 같은 현상이다. 남성이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기 위해 온갖 모욕을 다 견뎌야 하는 상황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성의 숙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보자. 로라가 자기의 성을 이용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은 다음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우린 길들여진 가축들보다 인간의 삶이 더 나은 게 없다는 걸 알지 않는가? 이건 카드 게임이다. 우리 카드를 잘 활용하지 않으면 진다.”

삶의 투쟁에 뛰어든 여성에게는 오직 단 하나의 무기, 곧 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성이라는 상품만이 인생의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카드이다.

이런 맹목적 숙명론이 여성을 자생력 없이 기생하는 이로 만들어왔다. 그런데 왜 로라의 힘과 인내를 기대하는가? 가장 쉬운 길은 태고적부터 그녀에게 입력된 길을 의미한다. 로라는 다른 길을 따라갈 수 없다.

급진적 사상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한 연극을 언급하라면 앞에서 말한 것 외에도 무수히 많다. 대표적으로 몇 작품만 더 언급한다면 찰스 클라인(Charles Klein)의 『제3등급The Third Degree』, 메딜 패터슨(Medill Patterson)의 『제4계급The Fourth Estate』, 이다 크라우처스(Ida Croutchers)의 『한 남자의 세계A Man's World』가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미국에서 희극 예술이 전성기를 맞고 있음을 알리는 작품들이다. 희극이라는 예술이 이제 미국 사회의 끔찍한 질병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옛말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다. 이 말을 우리 시대의 경향에 적용한다면 모든 길은 위대한 사회재건으로 통한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노동자의 경제적 각성이 있고 산업 현장에서 하나 된 행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근대교육의 경향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특히 아이들의 자유로운 발전에 근대교육 이념이 적용되고 있다. 불안과 불만을 억누르지 않고 그 저항의 정신을 예술과 문학을 통해 표현하고 개발하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이 공개된 길을 만든다. 무엇보다 현대의 연극은 극작가와 연출하는 사람을 거쳐 두 번 발표되는 것이어서 인간의 정신과 감성 두 측면에 다 영향을 미친다. 연극은 사회적 불만들을 발전시키고 무지와 편견과 미신의 댐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저항의 물결을 높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