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국가 : 역사에서 국가의 역할
Ⅰ
「국가 - 역사에서 국가의 역할」을 논문의 주제로 선택할 때, 나는 국가의 이념, 본질, 과거의 역할, 국가가 미래에 갖게 될 의미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서 언급되는 요구들에 대해 생각했다.
다양한 성격의 사회주의자들은 국가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분파 중에서 즉, 기질, 사유 방식, 특히 다가오는 혁명에 대한 확신에서 차이를 보이는 분파는 두 경향으로 구분된다. 한 쪽은 대부분의 국가 기능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대하고, 혁명을 위해 이용하면서 국가를 수단으로 사회혁명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이다. 다른 쪽은 우리와 비슷하게, 국가는 현대적인 국가체제 혹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국가체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본질 자체가 사회혁명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즉 국가는 자유와 평등에 근거한 사회 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발전을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적 형식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을 갖는 사람들은 국가의 개조 대신, 국가의 완전한 폐지를 추구한다.
분명 차이는 매우 크다. 현재 철학과 문학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회 활동에서 싸우는 두 흐름은 이런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통용되는 개념들이 지금과 같이 계속 지리멸렬하다면, 조만간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하고 사회의 삶 속에 실현하려는 노력이 시도되는 순간(나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개념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 시작될 것이다.
이 때문에 늘 현대 국가를 공격하는 우리들에게 국가 탄생의 기원을 밝히고, 국가의 역사적 역할을 연구하여 국가를 그보다 앞선 제도들과 비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가 ‘국가’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에 합의해야 한다. 독일에는 국가와 사회를 혼동하는 학파가 있다고 한다. 개인과 개별 지역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억압이 없는 사회는 상상할 수도 없다고 여기는 프랑스 연구자들도, 심지어 진지한 독일사상가들도 국가와 사회를 혼동하고 있다. 바로 이로부터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의 파괴를’ 원하며, ‘개인과 전체의 영원한 투쟁으로의 회귀’를 설교한다는 귀에 익은 비난이 나타난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인 ‘국가’와 ‘사회’를 혼동하는 것은 지난 30년 동안 역사 분야에서 만들어진 모든 성과들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런 혼동이 발생하는 이유는, 국가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사회를 이루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 유럽 민족들 사이에 국가는 가장 최근에 생긴 16세기 이후에 발전된 현상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류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는 지방적 자유와 삶이 아직 국가에 의해 억압당하지 않았던,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체와 자유 도시에 살았던 때라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채택한 여러 형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사회와 국가에 대한 개념들은 어떤 식으로 혼동될 수 있는가?
다른 한편으로, 국가와 정부가 혼동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국가는 정부 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때로 사람들은 국가의 폐지가 아니라 정부의 폐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와 정부는 다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개념을 대표한다. 국가의 개념은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존재를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 대한 지배를 중앙에 집중시키는 것, 즉 통치지역의 집중화, 사회적 삶의 많은 기능들을 몇몇 혹은 전체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국가는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발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특수한 차이는 잘 포착되지 않지만, 국가의 기원을 연구하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국가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국가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하는 것이다.
고대 로마 제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였다. 지금까지도 그것은 모든 법전문가들의 이상으로 남아있다. 제국의 기관들은 광범위한 영토를 그물처럼 덮었다. 경제생활, 군대행정, 사법, 부富, 교육, 심지어 종교까지 - 모든 것이 로마에 집중되었다. 법률, 재판관,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군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총독, 신들은 로마로부터 나왔다. 제국의 모든 삶은 원로원으로, 후에는 전지전능한 제국의 신神인 황제에게로 향했다. 각 지방과 주변지역에는 작은 규모의 신전과 로마전제권력의 지방정부가 있었고, 모든 지방의 삶은 이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일한 법, 로마가 제정한 법이 제국을 통치하였다. 이 제국은 시민들의 연합이 아니라, 신민들의 집합체였다.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법률가들과 통치자들은, 그들의 표현대로, 이 제국의 단일성, 법의 단일한 정신, 조직의 미와 조화에 매혹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내부적인 분열,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 야만족의 침입,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저항할 능력이 없는 지방의 소멸, 중앙으로부터 확산된 국가적 타락은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제국의 폐허 위에 새로운 문명, 즉 우리의 문명이 태어났다.
고대 동방의 역사는 제쳐두고, 신생 야만 문명[2]의 발생과 성장을 - 이 신생 야만 문명이 지금 우리의 현대 국가를 탄생시킨 그 시점까지 - 연구한다면, 국가의 본질은 완전히 명백해질 것이다. 심지어 그 본질은 우리가 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국, 동방의 전제왕권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명백해질 것이다.
Ⅱ
지난 세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인간 사회의 기원을 매우 단순하게 설명하였다.
우선 인간은 작은 가족을 이루어 살았고, 이들 가족들 사이의 적대감이 일반적 상태가 되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다 어느 멋진 날 이 끝없는 투쟁의 불편함을 확신한 사람들은 사회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분리되어 있던 가족들은 서로 합의하여 사회계약을 맺고 자발적으로 권력에 복종하였다. 초등학교부터 배운 것처럼 이 권력이 오늘날 모든 인류 진보의 원천이며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정부들은 지금까지도 지상의 소금이라는 이 고상한 역할을, 인류의 중재자이며 교화자의 역할을 구현하고 있다고 한다. 적어도, 모든 교과서와 심지어 많은 철학논문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 이론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매우 적게 알려진 시대에 만들어져, 지난 100년 동안 지배적인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백과전서파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왕권신수설과의 투쟁에서 강력한 무기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이론이 과거에 어떤 공을 세웠건 간에,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오류임을 인정하고 거부하여야 한다.
몇몇 맹수들과 멸종되고 있는 종을 제외하면, 실제로 모든 동물들은 사회를 이루며 산다. 사회를 이루어 살고 있는 동물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비사회적 동물보다 언제나 유리하다. 이들은 동물의 위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최초의 유인원들이 이미 사회를 이루며 살았다는 것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회는 인간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다. 사회는 최초의 유인원들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3]
또한 인류학이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특정 가족이 아니라 씨족 혹은 종족이 인류의 출발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고, 고대유럽 전설에서 발견되는 가부장적 가족은 훨씬 후에 나타났다. 그 이전에 인간은 이미 수천 년 동안 씨족 혹은 종족으로 살아왔다. 이 첫 번째 기간 동안 - 편의상 이 기간을 미개종족 혹은 원시종족 시대라고 부르도록 하자 -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 앞선 일련의 제도, 습관 혹은 사회적 관습들이 이미 인류를 위해 만들어졌다.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는 많은 포유류 속에 고립된 가족이 없는 것처럼, 고립된 가족은 원시종족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다. 종족은 오히려 세대에 따라 구분되었다.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한 남녀 사이의 혼인을 허용하지 않고, 동일 세대 내에서만 혼인을 허가하는 관습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진, 아득한 옛날부터 생겼다. 이 시기에 대한 흔적들은 지금도 몇몇 종족에게서 발견된다. 또한 그런 흔적들은 더 높은 단계의 발전을 이룬 민족들의 언어, 풍속, 미신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기에 사유재산의 축적은 가능하지 않았다. 종족의 구성원들 개인에 속한 것은 그가 죽은 후에 모두 시체와 함께 소각되거나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영국의 집시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 풍속의 흔적들을 우리는 문명화되었다는 모든 민족들의 장례의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국인들은 망자가 소유했던 물건들을 종이모형으로 만들어 소각한다. 우리에게는 말과 칼 그리고 훈장이 전사자들의 뒤를 따르게 하는 풍속이 있다. 이 풍속의 의미는 잊혀지고 없지만, 형식은 보존되고 있다.
원시인들은 인명을 경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살인과 유혈을 싫어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곰과 같은 몇몇 동물들의 피를 흘리는 것까지도 매우 큰 범죄로 여겼으므로, 잘못을 범한 사람은 동일한 양의 자기 피로 흘린 피에 대해 보상해야 했다.
이렇게 자기 종속의 구성원에 대한 살인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안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석기시대 인들의 후예로서 지금까지 극지방에 살고 있는 이누이트 혹은 에스키모들에게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기원, 피부색, 언어를 갖는 종족들이 유랑 중에 서로 충돌하게 되면, 종종 그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이미 사람들은 이 충돌을 가능하면 완화시키려고 애썼다. 메인(H.Maine), 포스트(August von Post), 니스(E.Nys)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후에 국제법의 기원이 될 수 있는 관습들은 이미 그 당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마을 주민들에게 미리 경고하지 않고 마을을 공격해서는 안 되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여인들이 물을 길러 다니는 길에서 절대 살인을 감행하지 않았다. 종족 사이에 평화를 협상할 때, 살해당한 사람이 많은 쪽은 다른 쪽에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다.
그때에는 하나의 일반 원칙이 다른 것들을 지배하였다. ‘너희들이 우리들 중의 하나를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너희들 중의 하나를 죽이거나 똑같은 상처를 입힐 권리가 있다.’ 이것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종족 전체가 구성원들 각각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졌기 때문이었다. “피에는 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상처에는 상처, 목숨에는 목숨(쾨니히 스바르터[L.Königswarter]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이라는 성경의 유명한 구절은 바로 이러한 관습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정의에 대한 이 사람들의 관념은 바로 그랬다. 우리가 그들 앞에서 특별히 우쭐해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우리 형법을 지배하는 ‘목숨에는 목숨’의 원리도 수많은 유산들 중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시시대를 거치는 동안 일련의 사회적 제도들이 만들어졌고(이들 중 많은 것들은 일단 제쳐두도록 하자), 종족들의 총체적 행위규범들이 (물론 구두로) 정해졌다. 사회 규범의 핵심 내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풍습, 관습, 설화說話의 힘만으로도 충분했으며, 다른 어떤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원시인들에게도 일시적인 지도자들이 있었다. 마술사와 비를 부르는 주술사들은, 즉 당시의 학자들은 자신의 종족들을 지배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실질적인 혹은 그럴듯해 보이는 지식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설화에 담긴 속담과 노래를 다른 사람들보다 잘 기억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영향력과 권력을 획득하였다. 이미 당시에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인간을 지배할 권리를 장악하려고 애를 썼으며, 선택된 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종교, 심지어 모든 예술과 기술들도 처음에는 다양한 ‘비밀들’에 싸여 있었다.
이렇게 종족들이 충돌하고 이동하는 기간에는 가장 용맹하고 용감한 특히 꾀 많은 자들이 일시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법의 수호자, 전투의 지휘자, 마술사들 사이의 연합은 아직 당시에는 없었다. 때문에 벌과 개미 사회에서처럼 혹은 현대의 파타고니아인[4]과 에스키모들의 경우처럼, 원시 종족들 사이의 국가는 언급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은 이러한 상태에서 수 천 년을 살았다.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야만족들도 그것을 경험하였고, 동시에 바로 그러한 상태로부터 빠져나왔다.
기원후 처음 수 백 년 동안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에 거주하던 종족들과 종족연합들 사이에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었다. 크고 작은 규모의 이웃 종족들로부터 압박을 받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고원지대로부터 이동을 시작하였다. 강과 호수의 물이 갑자기 말라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평원과 유럽을 향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다른 종족들을 밀어내며 점차 서로 섞이게 되었다.
이 이동의 시기에 기원과 언어가 서로 다른 몇몇 종족들은 섞이게 되었고, 그 당시 대다수 유럽의 원시적 원주민들에게 존재하던 원시종족의 관습은 불가피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원시종족 연합의 기초는 공통의 조상과 그들에 대한 숭배에 있었다. 그러나 이동의 혼돈 속에서 그리고 여러 종족들 사이의 전쟁 속에서 형성된 집단들 사이에 도대체 어떤 기원의 공통성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몇몇 종족들에서 가부장적 가족이 탄생하고 있었다. 이 가족은 이웃 종족에게서 탈취하거나 약탈한 여성들을 몇몇 인물이 소유함으로써 형성되었다.
과거의 관계는 끊겼고, 완전한 파멸을(그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많은 종족들이 그러한 운명을 겼었다) 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토지의 공동소유, 즉 각각의 종족들이 정착한 지역의 공동소유에서 새로운 관계를 찾았다. 공통으로 알고 있는 지역, 이러저러한 계곡과 구릉들의 소유는 새로운 협약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조상신은 모든 의미를 상실하였다. 새로운 지역의 계곡, 강, 숲의 신들이 조상신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새로운 연합에 종교성을 제공하게 되었다. 다른 종교의 유산들을 기꺼이 수용했던 기독교는 훗날 모든 곳에서 지역 고유의 성인들을 만들어냈다.
그때 이후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독립적인 가족들로 구성된 농촌공동체는 토지의 공동소유에 의해 결합되었고 다음 수세기 동안 민족연합을 위해 필수적인 연결 고리가 되었다. 농촌공동체는 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에 지금까지도 존재한다. 게르만인, 스칸디나비아인, 슬라브인 등 로마제국을 멸망시켰던 야만인들도 그런 체제 아래 살았다. 야만인의 법[5], 카빌족[6], 몽골족, 아프리카인 그리고 다른 민족의 현대 농촌공동체 연합 사이에 지배적인 관습과 법들을 연구한 덕분에, 우리는 동시대 문명의 출발점으로 작용했던 사회형태를 완전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Ⅲ
오늘날처럼 농촌공동체는 과거에도 각각의 마을에서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개별 가족들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토지를 공동유산으로 보았고, 가족의 크기를 고려하여 필요와 능력에 따라 서로 토지를 분배하였다. 지금까지도 동유럽, 인도, 자바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수억의 사람들이 그러한 체제에 살고 있다. 국가가 광대한 공간의 시베리아로 이주할 권리를 부여했을 때, 우리 시대의 러시아 농민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선 토지의 경작은 공동으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도 많은 지역에서 이 관습은 적어도 공동체 토지의 일정한 부분을 경작할 때 유지되고 있다. 숲의 벌채, 삼림의 개간, 요새 혹은 도시의 건설, 습격 시 도피처가 되는 탑 등 모든 것은 국가의 개입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던 농촌공동체가 있는 곳에서, 수억의 농민들이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처럼 공동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요즘 말로 ‘소비’는 가족단위로 이루어졌다. 각각의 가족은 자신의 가축, 채소밭, 비축물자를 소유했고, 따라서 각 가족은 저축을 하고, 축적된 재산은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었다. 모든 사안에 대해서 공동체회의는 최고의 권력을 가졌다. 지역의 관습은 법이었고, 남자와 여자로 구서오딘 모든 가족 대표들의 공동 집회는 재판소, 특히 민사와 형사소송 모두를 위한 유일한 재판소였다. 모욕을 당한 공동체원은 보통 공동체회의가 열리는 장소에 자신의 칼을 꽂기만 하면 되었다. 양 편의 증인들이 선서한 후 모욕 사실을 확인하면, 공동체회의는 관습에 따라 ‘선고宣告’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사회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것을 모두 서술하기는 어렵다. 개별 국가들이 소수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모든 제도들, 비록 소수의 이익을 위해 왜곡되었지만 우리의 법에서 발견되는 모든 법 개념들, 모든 재판의 형식들은, 재판형식들이 개인을 보호하는 한에는, 공동체 관습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배심원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큰 진보를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사실 우리는 야만인들의 제도로, 지배계급에 유리하도록 변형된 제도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로마법은 관습법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농촌공동체들의 자발적이고 폭넓은 연합 덕분에 그들의 민족적 동일성의 의식도 발전되었다.
농촌공동체는 토지의 공동소유와 빈번한 공동경작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관습법에 기초한 주권, 재판권, 입법권을 소유했고, 구성원들의 사회적 요구 대부분을 충족시켰다.
그러나 모든 수요가 충족된 것은 아니었다. 충족되어야 할 것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정신은 다음과 같았다. 즉 인간은 새로운 수요가 발생하면 피에 의존하지 않고, 새롭게 발생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스스로 일에 착수하였으며, 이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동의에 따라 크고 작은 규모의, 많은 혹은 적은 수의 연합과 단체를 만들었다. 실제로 그 시대의 사회는(농촌공동체 내에서처럼 농촌공동체 밖에서, 즉 공동체들의 연합에서도) 문자 그대로 서원한 형제단들, 상호부조를 위한 연합들, 가족공동체들의 그물로 덮여 있었다. 우리들은 이런 발전단계와 이 정신의 발현을 야만인들 사이에서 - 이들 연합은 로마식으로, 더 정확히 말해 비잔틴식으로 수립된 국가에 아직 굴복당하지 않았다. -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카빌족은 앞에서 언급한 기능을 갖는 농촌공동체를 아주 잘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신의 활동영역을 자기 마을의 좁은 경계 너머로 확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 속으로 모험을 찾아, 상인으로 편력을 시작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러저러한 기술과 예술을 배우기 위해 떠난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상인들과 기술자들은 서로 다른 마을, 종족 혹은 공동체 연합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형제단’ 속에서 서로 연합한다. 먼 여행에서 상호 안전을 위해, 서로에게 비밀스런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그들에게 연합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연합한다. 그들은 형제단에 서약을 하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송에서도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 이 외에도,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도 내일 어떤 싸움에 말려들어 예의법규와 공동생활의 규범이 정한 경계를 침범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다치게 할 수 있다. 이 경우 다친 사람이나 모욕을 당한 사람에게 아주 큰 보상을 해야 한다. 가해자는 마을 재판에서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고, 여섯, 열 혹은 열 두 명의 서약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진실을 규명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형제단 가입이 중요한 또 한 가지 이유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는 정치에 대해 논하거나 심지어 음모를 꾸미고 싶은 욕구가, 이러저러한 도덕적 신념 혹은 관습을 확산시키고 싶은 욕구가 있다.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필요도 있다. 이웃 종족들과 동맹을 체결하고, 폭 넓은 연합을 형성하고, 종족 사이에 법의 개념을 확산시켜야 한다. 이 모든 도덕적,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카빌족, 몽골족, 말레이족 등은 정부에 부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관습법을 따르며, 개인적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 그들은 어떤 일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있는 정부와 교회에 의해 타락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직접 연합한다. 그들은 형제단을, 정치적 종교적 결사를, 수공업자 조합을 결성한다. 중세 유럽인들은 이것을 길드라고 불렀고, 카빌족은 소프라고 부른다. 이 소프들은 마을의 경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먼 사막과 낯선 도시들로 확장된다. 실제로 이들 연합에서는 형제 정신이 실천되었다. 자신의 모든 재산과 생명을 걸어야 할지라도, 소프의 구성원에 대한 도움을 거절하는 것은, 형제단의 반역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러한 사람들은 ‘형제’ 살해자 취급을 당한다.
오늘날 우리가 카빌족, 몽골족, 말레이족 등의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5세기에서 12세기 심지어 15세기까지 유럽에서 야만족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살았던 사회적 삶의 본질이기도 하다. 길드, 조합, 우니베르시타스[7] 등의 이름으로 아주 다양한 목적을 위한 많은 연합들이 모든 곳에 존재했다. 상호방어를 위하여, 가해자에 대한 상호 징벌을 위하여, 손해에 대한 보상금으로 ‘눈에는 눈’의 복수를 대체하기 위하여(보상금을 낸 후에 가해자는 형제단 가입이 허용되었다), 수공업장에서 공동 작업을 위하여, 역병이 돌 때 상호부조를 위하여, 영토를 방어하기 위하여, 증가하는 외부 세력에 공동으로 저항하기 위하여, 교역을 위하여, 선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러저러한 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한마디로 연합은 황제와 로마 교황의 계율에 따라 양육된 현대 유럽인들이 국가에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위해 존재하였다. 사회적 신분을 상실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당시에 자유인이든 농노든 자신의 공동체 외에 어떤 다른 연합이나 혹은 길드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을 찾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전설(사가 saga)은 형제단과 관련된 사건들을 노래한다. ‘형제단원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가장 훌륭한 서사시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반면에 교회 그리고 태동 중에 있던 왕권, 즉 되살아난 비잔틴 혹은 로마법의 대변인들은 저주와 명령을 사용하여 형제단들을 공격한다.(다행스럽게도 이 저주와 명령은 죽은 활자로 남아있다.)
형제자매의 연합은 인간의 경제적, 정신적 삶과 같은 매우 다양한 형태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모든 곳에서 나타났다. 이들 연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 전체는 의미를 상실하고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두 제도, 즉 농촌공동체와 자유 형제단은 로마, 기독교 혹은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던 시기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이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만족 이동 시기의 유럽과 10 혹은 11세기 유럽을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500년 혹은 600년 동안 인간은 성공적으로 처녀림을 정복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밭과 울타리로 둘러싸인 요새화된 도시의 보호를 받는 마을들이 나라를 덮었고, 마을들 사이에는 숲과 소택지를 지나는 길이 나 있었다. 이들 마을에서 우리는 다양한 수공업의 태동을, 그리고 내적, 외적 평화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져 완벽한 그물망을 형성한 제도들을 발견한다. 전시대와 달리, 이미 이 시기에는 살인 혹은 마을 주민에 대한 상해에 대하여 가해자나 가족 중의 하나를 죽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상해를 입히는 방법으로 복수하지 않았다. 왕의 친위대였던 대귀족과 귀족들은 과거의 규범을 유지하였으나(이는 그들 사이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농민들 사이에는 가해행위에 따른 보상금을 지불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고, 그 후에 평화가 회복되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가해자는 피해자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다툼과 분쟁에는 중재 재판이 있었다. 중재 재판은 깊이 뿌리내린 제도로서 일상의 습관이 되었다. 이와 달리 주교와 제후들은 모든 분쟁을 자신들이 혹은 자신들의 관리들이 다룰 것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공동체가 사회적 안정을 파괴한 사람에게 부과하는 벌금을 자신들이 징수하기를 원했다.
마침내 수백 개의 마을들은 강력한 연합을 결성한다. 이것은 미래 유럽 민족의 맹아로서, 서약을 통해 내적인 평화를 유지할 것을 의무화하고, 자신들이 점유한 토지를 공동의 유산으로 생각하고, 상호 방위를 위한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한 연합들은 몽골족, 터키-핀족, 말레이족들 사이에 지금도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평선 위에는 검은 점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 연합들과 더불어 다른 연합들, 지배하는 소수의 연합이 발생한다. 후자의 연합은 자유로운 인간들을 농노로, 신민으로 바꾸기를 시도한다. 로마는 멸망했으나, 로마의 신화는 다시 살아났다. 다른 한편, 동방의 강력한 국가를 꿈꾸는 ‘기독교’는 태동하던 시민 그리고 군사 권력을 지지한다.
자신들이 인간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지배자는 인간을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반대로 인간은 언제나 안정과 평화를 사랑한다. 때로 인간은 싸움을 거부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피를 좋아하지 않으며, 언제나 전쟁상태보다는 목축과 땅의 경작을 더 좋아한다. 야만족의 대이동이 약화되고, 떠돌이 무리가 어느 정도 땅을 차지하고 정착하자, 새로운 유랑인과 적을 방어하는 수고는 한 사람에게 위임된다. 위임받은 사람은 전쟁에 익숙한 모험가들 중에서 혹은 강도들 중에서 크지 않은 친위대를 직접 구성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동물사육이나 토지경작에 종사한다.
그 후 ‘보호자’는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난한 친위대원에게 말과 무기를 주고(당시 이런 것들은 매우 비쌌다.) 그렇게 해서 친위대원을 부유하게 만든다. 그는 권력의 첫 번째 맹아를 키운다. 다른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으로 기능했던 설화를 잊기 시작한다. 과거에 있었던 결정들을 기억하고 있는 노인들이 가끔 결정에 대해 노래하거나 공동체의 큰 축제 때 사람들에게 영웅담을 이야기한다. 그때, 부모로부터 아들에게 전수된 기술처럼, 이 시와 노래를 기억하는 가족들이 즉 ‘법’을 순수형태로 보존하는 가족들이 조금씩 특화된다. 마을사람들은 복잡한 분규와 분쟁의 해결을 이들에게 부탁한다. 특히 두 마을 혹은 두 마을연합이 자신들이 선택한 중재 재판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러하다.
이들 가족 속에서 제후 권력 혹은 왕권이 싹튼다. 그 시대의 제도를 연구하면 할수록 무기의 힘보다 관습법에 대한 지식이 권력의 획득을 더 쉽게 만든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범법자를 ‘징벌’하려는 욕망 때문에, 무기에 직접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법에 복종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최초의 ‘권력 연합’이 창조된다. 이것은 공동 지배를 서로 보장하기 위한 최초의 공동체, 즉 마을 공동체에 적대적인 세력으로서 재판관들과 군 지휘관들 사이의 연합이다. 이 두 관직은 한 인물로 결합된다. 그 인물은 재판 선고를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무장한 군인들을 거느리며, 자신의 요새에서 군사력을 강화한다. 또한 그 시대의 부(예를 들면 빵, 가축, 무기)를 자기 가족 사이에 축적하고 보존하기 시작하여, 점차 이웃 농민들에 대한 지배를 주장한다. 그 시대의 지식인들(주술사, 점성가, 성직자)은 그를 지지하고 자신들 몫의 권력을 얻는다. 즉 그들은 마술사의 위협적인 능력에 칼의 힘을 결합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만든다.
이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상술하기 위해서, 왜 점차 자유인들이 세속 혹은 종교 지배자를 위해 노동해야 하는 농노로 전락하게 되었는가를, 시골과 도시에 대한 지배가 어떤 방식으로 서서히 만들어졌는가를, 이 증가하는 지배에 대항하여 어떻게 농노들이 연합하고 봉기했는가를, 어떻게 이들이 견고한 성벽 앞에서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한 군인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이 필요하다.
11세기 경 유럽에 오늘날 우리가 동방의 역사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과 비슷한 신정국가(신정정치) 혹은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야만적 왕조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 없었다. 어쨌든 이러한 작은 전제왕권과 신정정치의 속성은 존재하고 있었고, 이제 더 발전하기만 하면 되었다.
‘야만족’ 정신은 스칸디나비아족, 작센족, 켈트족, 게르만족, 슬라브족들이 7-8세기 동안 형제단과 길드의 자유로운 협약을 통해 빈곤을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이 정신은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시골, 도시, 촌락에 살아 있었다. 사실 야만족은 예속되어, 군주를 위해 일하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자기주도와 자유로운 협약의 정신은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그들의 연합들은 불멸할 것처럼 보였으며,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에서 연합의 각성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12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도시공동체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봉기를 시작한다. 이 봉기는 오래전부터 연합의 정신에 의해 준비되고, 수공업 길드와 농촌공동체의 연합이란 토대 위에서 발전되었다.
대부분의 공식 역사가 이 봉기를 축소하고 있지만, 이것은 유럽을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구출하였다. 이 봉기는 신정군주국과 전제군주국의 발전을 저지하였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바빌론의 문명이 그랬던 것처럼, 신정군주국과 전제군주국에서 우리의 문명은 화려하고 공허한 위용을 뽐내다가 수세기 후에는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새로운 삶의 한 장, 즉 자유로운 도시 공동체들의 장은 이 혁명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Ⅳ
현대 역사가들은 로마법의 정신으로 훈육되고, 로마를 모든 제도의 원천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다. 그들은 12세기 공산운동의 정신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개인의 권리를 과감하게 인정하는 것, 인간들을 마을로, 도시로, 연합으로 자유롭게 결속시킴으로서 형성된 공동체를 과감하게 인정하는 것은 단일화와 중앙집권화를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였다. 단일화와 중앙집권화는 고대 로마의 특징이었으며, 이들은 현대 공식 학문의 역사적 표상들에 스며들어있다.
12세기의 봉기를 어떤 탁월한 개인이나, 어떤 중앙집권적 제도의 공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봉기는 친족관계와 농촌공동체와 같이 인류의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은 어떤 한 지역에 혹은 한 지방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인류 발전 단계에 속한다.
여기에 공식 학문이 이 운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이 시기를 실제로 이해하고 기록한 티에리(J.Thierry)와 시스몽디(J.Sismondi)의 뒤를 잇는 학자가 오늘날까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지 뤼세르(A.Luchaire)만이,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메로빙거 왕조와 코뮌 시대에 대한 위대한 역사가 티에리가 제시한 길을 따르고 있다. 이런 이유로 독일에서도 이 시기에 대한 연구와 그 정신에 대한 모호한 이해는 지금에야 비로소 향상되고 있다. 영국에서 이 세기에 대한 진실한 평가는 역사가들에게서가 아니라, 시인인 윌리엄 모리스(W.Morris)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예외는 그린(J.Green)인데, 그는 생애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로마법의 영향이 크지 않은 러시아에서는 벨랴예프, 코스토마로프, 세르게예비치와 몇몇 다른 사람들이 민회시대의 정신을 탁월하게 이해하였다.
중세의 공동체는 한편으로 농촌공동체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적 경계를 초월하여 존재했던 많은 조합, 길드들로 구성되었다. 도시의 성벽과 망루의 보호 아래 이 공동체는 이 두 종류의 조합들이 결합함으로써 형성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공동체는 완만한 성장의 결과로서 나타났다. 그것은 서유럽의 모든 지역에서처럼 다른 지역에서도 혁명의 결과였다. 이러저러한 지역의 거주자들이 자신들의 성벽 안에서 충분히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공동서약’을 행한다. 구성원들은 모욕과 싸움 혹은 상해와 관련된 과거의 일들을 잊기로 맹세하고, 앞으로 분쟁 시에 자신들이 선정한 길드 혹은 도시 조합 외에는 어떤 다른 판관에게도 의뢰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러한 습관은 모든 수공업 조합에서, 모든 공제조합에서, 모든 가부장적 공동체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 주교 혹은 제후들이 농촌공동체에 자신의 재판기관을 도입하고 강제로 그것을 관철시키기 전까지, 이것은 농촌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도시의 구성원이 된 모든 자유농민 마을들과 교구들은 도시에 만들어진 형제단과 길드들과 함께 ‘우정(amilas)’을 수립하고, 자신들의 재판관을 선출하여, 이 집단들 사이에 생긴 영원한 연합에 충성하기로 맹세하였다.
즉시 헌장이 작성되고 승인을 받게 되었다. 때로 헌장의 모델을 구하기 위하여 이웃 도시로 사람들을 파견하기도 하였다.(지금 우리는 수백 종류의 헌장들을 알고 있다.) 이렇게 하여 새 공동체가 창조되었다. 그 이전까지 주교 혹은 제후들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재판을 하거나, 종종 그들의 지배자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완성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무기를 들고 이 젊은 연합에 대항하여 싸워야 했다. 다른 제후들을 지배하기 위해 애쓰지만, 재산은 없었던 왕 혹은 제후가 돈을 대가로 헌장을 ‘수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는 공동체에 자신의 재판관을 지명하기를 거부하는 대신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여러 도시의 수호자로서 다른 봉건영주들 앞에서 큰 중요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일반적 규칙은 아니었다. 즉 수백 개의 자유도시들은 자신들의 성벽과 창의 보호 아래 고유의 의지 외에는 어떤 다른 법도 없이 살았다.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에 운동은 모방을 통해 일사분란하게 전 유럽에 확대되었다. 운동은 스코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러시아로 퍼졌다. 지금 우리가 헌장과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혹은 스페인의 자유도시들의 내적인 구조를 비교하면, 동일한 종류의 사회계약의 보호막 아래서 성장한 공화국들과 헌장들의 유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법 앞에서 노예가 되는 것 외에, 제도의 단일성을 획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모든 로마의 숭배자들과 헤겔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교훈인가!
대서양에서 볼가까지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이탈리아까지 전 유럽은 비슷한 자유도시들도 뒤덮였다. 그들 중에서 플로렌스, 베네치아 혹은 뉘른베르크와 같은 일부 도시들은 인구가 많은 중심도시가 되었고, 다른 도시들은 수백 가구로 구성된 크지 않은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도시들도 보다 더 번창하는 다른 도시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생명과 힘으로 충만한 도시의 발전은 물론 모든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지리적 상황, 대외무역거래의 특징,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 때문에 각각의 공동체는 고유한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근본에는 동일한 원리가 놓여있었다. 러시아의 프스코프처럼 네덜란드의 브뤼지도, 삼백여명의 거주자가 사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처럼 여러 섬들을 가진 번성한 베네치아에서도, 북프랑스 혹은 폴란드의 도시처럼 아름다운 플로렌시아에서도 모두 우정(amilas), 즉 농촌공동체와 연합된 길드 연맹을 구성하였다. 그들의 내적인 조직의 전체적 특징은 어디서나 동일했다.
도시 인구가 성장함에 따라 도시의 벽은 확장되었다. 더 높은 새 망루들이 추가되었고, 각각의 망루들을 중심으로 도시의 구역과 길드가 자리 잡았으며, 망루는 고유의 특수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도시는 보통 몇 개의 구역 혹은 구간으로 나뉘었다. 넷, 다섯 혹은 여섯 개의 구역 혹은 구간은 도시 중심의 내성內城으로부터 성벽을 향해 펼쳐진 길들로 구분되었다. 이 구역과 구간들에 각각의 독특한 수공업 혹은 작업장들이 자리를 잡았다. 즉 새로운 수공업 혹은 새로운 작업장들은 마을을 형성하고,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와 도시성벽의 경계 속으로 들어왔다.
각각의 거리와 교구는 옛 농촌공동체에 해당하는 토지단위였다. 이들은 자신만의 거리의 장 혹은 교구장, 거리 민회民會, 법정, 선출된 성직자, 수비대, 깃발과 인장(국가의 독립성의 상징)을 갖는다. 다른 거리들 그리고 교구들과 연합을 결성하는 경우에도 이들은 독립성을 유지한다.[8]
거리 혹은 교구와 주로 일치하거나 거의 일치했던 직업단위는 길드, 즉 수공업 조합이었다. 이 조합도 똑같이 자신들이 성직자, 거리, 민회, 재판소를 보유한다. 조합은 고유의 금융기관, 군대, 깃발을 갖는다. 조합은 고유의 인장을 소유하고 완전한 독립성을 갖는다. 전쟁이 발생할 때, 길드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길드의 수비대는 다른 길드의 수비대와 나란히 출정한다. 이에 길드의 깃발은 도시의 큰 깃발과 나란히 높이 게양된다.
도시는 이들 구역, 거리, 교구, 그리고 길드들의 연합이 된다. 도시는 중앙민회에 모든 주민들의 전체회의, 자신의 중앙시청, 선발된 재판관들과 고유의 깃발을 갖고, 이 깃발 주위에 모든 길드와 거리의 깃발들이 집결한다. 도시는 다른 도시들과의 협상에 임하고, 전권을 갖는 단위로서 필요한 누구와도 동맹을 맺고, 원하는 누구와도 민족적인 그리고 국제적인 연합을 체결한다. 예를 들어, 도버(Dover)시 근처에 위치한 영국의 씽크 포츠[9]는 해협의 반대쪽에 있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항구도시들과 연합을 형성한다. 바로 이 시기에 자발적인 동의에 따라 협약의 망이 만들어지고, 이것은 훗날 국제법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모든 도시의 공통의견이 이 협약들을 보호하였으며, 오늘날 국제법이 준수되는 것보다 더 잘 준수되었다.
어떤 복잡한 분규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 도시는 자주 이웃 도시의 도움을 받았다. 그 시대의 정신, 즉 권력보다는 오히려 제3자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노력은 다투는 두 공동체가 제3자에게 의뢰하는 행위 속에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수공업 조합들에서도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도시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상거래를 행하고, 어떤 민족적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협약의 체결에 임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국제 노동자 회의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지만, 무지한 우리는 수공업자와 심지어 도제들의 국제적 대회가 15세기에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다.
외부의 공격이 있을 때, 중세 도시는 스스로 방어하거나, 매년 한 두 사람을 자체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주변 봉건영주들과 혹독한 전쟁을 수행한다. 혹은 도시는 제후나 공작을 특별 ‘군사 지휘관’으로 고용한다. 그는 1년 단위로 고용되며, 도시는 필요한 경우 그를 해임할 권리를 갖는다. 친위대를 유지하기 위해 도시는 법정 징수금과 벌금을 받아 모은 돈을 그에게 지불한다. 그러나 그는 도시의 일에 개입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 때로 도시가 너무 약해서 주변의 봉건영주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 때, 도시는, 어느 정도 고정적인 ‘군사 지휘관’에게 하듯이, 주교, 제후 혹은 다른 가문에 - 이탈리아의 구엘피(Guelfi) 혹은 기벨리니(Ghibellini), 러시아의 류릭 가문, 라트비아의 올게르드 가문 등 - 도움을 청한다. 이때 도시는 주교 혹은 제후의 권력이 성 안에 살고 있는 친위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한다. 심지어 주교, 제후는 허가 없이는 도시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다. 알려진 것처럼, 지금까지도 영국 왕은 시장의 허가 없이는 런던으로 들어갈 수 없다.
중세도시의 경제적인 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다양해서 신뢰할 만한 개념을 전달하려면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국내의 상거래는 개별 수공업자가 아니라 언제나 길드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가격은 상호협약에 의해서 결정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처음에 대외 무역은 전적으로 도시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대 노브고로드, 제네바 등이 대외무역을 이끌었다. 나중에서야 상인 길드가 독점적으로 무역을 했고, 더 후에는 개인들이 이끌었다. 일요일과 수요일의 점심식사 후에는 (이 시간은 목욕을 위한 것이었다.) 누구도 일하지 않았다. 도시는 밀, 석탄 등과 같은 필수품의 구매를 담당하였고, 자신만의 가격으로 자기 주민들에게 그것을 공급하였다. 스위스에서 도시는 19세기 중반까지 곡물구매 권한을 가졌다.
우리가 수집할 수 있는 많은 역사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를 전후한 어떤 시대에도 중세도시들이 누렸던,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 그러한 행복을 인류는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중세도시는 오늘날의 빈곤, 미래에 대한 불확신, 과도한 노동을 전혀 알지 못했다.
Ⅴ
단순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을 조직하는 자유, 생산과 국내 상거래는 수공업자 조합들이 담당하고 대외무역과 주요 생필품의 구매는 도시 스스로가 행하던 관습, 이러한 것들 덕분에 중세 도시들은 처음 200년 동안 모든 거주자를 위한 행복, 부富, 높은 발전,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영국의 로저스(Thorold Rogers)와 많은 독일 연구가들은 소비재 가격 대비 임금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을 조사하였다.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의 수공업자들과 심지어 단순 일급 노동자들의 노동임금은 우리 시대 가장 숙련된 노동자들의 노동임금보다 높았다. 옥스퍼드 대학과 영국의 몇몇 영지 그리고 몇몇 독일과 스위스 도시들의 회계장부가 이것을 명백하게 증명한다.
다른 한편, 예술작품, 그 시대 노동자들의 참된 예술품이라 할 만한 시청 혹은 사원뿐만 아니라, 가장 단순한 가재도구인 자수, 촛대, 찻잔 혹은 항아리를 치장했던 장식의 양을 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그 시대의 노동자는 우리 시대의 조급증, 성급함, 피로감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금속을 불리고, 소상을 만들며, 옷감을 짜고 자수를 놓았다. 오늘날에는 극소수의 노동자들, 즉 예술가들만이 그렇게 일할 수 있다. 교구, 길드 그리고 전 도시에 속한 교회와 공공건물들을 장식하기 위해 무료로 행해진 작업을 들여다본다면, 즉 이 건물들에 바친 그림, 조각, 철 혹은 은으로 만든 장식 혹은 목공과 석공의 자잘한 물건들과 예술작품들과 같은 헌물들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들은 발명정신의 흔적을,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를, 모든 노동에 영감을 주었던 자유정신을, 길드에서 발전된 형제적 연대의 정신을 발견할 것이다. 사람들은 수공업의 실질적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형제애와 사회성의 관계로 결합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길드의 규칙에 따르면, 언제나 두 ‘형제’가 병든 ‘형제’의 침대에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염병이나 역병이 창궐할 때면 상당한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사망 시에 길드는 죽은 형제 혹은 자매의 장례와 관련된 모든 일과 비용을 담당하고, 그의 시체를 매장하여 부인과 자녀들을 돌보는 것을 의무라 생각했다.
‘12세기 봉건주의의 숲 속에 생긴 오아시스’는 현대 도시의 주민들 위에 드리워진 극단적 빈곤, 억압, 미래에 대한 불확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자유로운 협약과 자유로운 자기주도의 토대 위에서 성장한 정치적 자유의 보호를 받으며, 이들 도시들에서 새로운 문명이 빠른 속도로 생기고 발전하였다. 그토록 빠른 속도는 전후의 어떤 시기에도 찾아볼 수 없다.
현대의 모든 산업은 이들 도시에서 비롯되었다. 300년 동안 이곳에서 수공업과 예술은 매우 높은 수준의 완전성을 획득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세기는 생산 속도에서만 이 시대를 능가할 뿐 질적으로는 종종 그에 미치지 못하고, 예술적 세공에서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예술을 소생시키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미술의 아름다움에서 라파엘로와, 힘과 과감성에서 미켈란젤로와, 과학과 예술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시와 언어의 아름다움에서 단테와 혹은 건축에서 리옹, 랭스(Reims), 쾰른의 성당 건축가와 - 빅토르 위고에 따르면 이 성당의 ‘건축가’들은 민중들 자신이었다. - 비교될 수 있단 말인가? 플로렌스와 베니스, 브레멘과 프라하의 시청, 뉘른베르크와 피사의 탑과 같은 수없이 많은 아름다움의 보고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예술의 기념비들은 자유로운 도시 시대의 창조물이다.
이 문명이 가져온 모든 것을 여러분이 일별하기 원한다면,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의 둥근 지붕과 노르만 족의 졸렬한 아치들을 비교해 보라. 혹은 라파엘의 그림들과 바이외[10]의 단순소박한 자수와 양탄자들을, 뉘른베르크의 수학적 물리학적 악기와 시계들과 전시대의 모래시계들을 비교해 보라. 또는 단테의 낭랑한 언어와 10세기 야만족의 라틴어를 비교해 보라. 이 두 시대 사이에서 완전 새로운 세계가 자라났다.
또 하나의 영광된 시대인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대를 제외하면, 인류가 이 시대처럼 빠른 속도로 발전한 적은 없었다. 2, 3세기만에 인간이 그렇게 심오한 변화를 겪은 적이 없었고, 자연력에 대한 지배력을 그 정도 수준까지 발전시킨 적이 없었다.
당신은 우리가 자랑하는 현대문명의 성공들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문명은 중세의 자유도시들 사이에서 자라난 문명의 자식일 뿐이다. 현대과학을 창조한 나침반, 시계, 인쇄기 같은 많은 위대한 발명들, 새로운 세계의 발견, 화약, 중력의 법칙,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게 한 기압의 법칙, 화학이론,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이 제시하고 이탈리아 대학들에서 수립된 과학적 방법은 자유도시들과 공동체 자유의 보호 아래 발전된 문명의 유산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 공동체들의 역사에 가득한 당파 내부의 싸움들을 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길거리의 난투극들, 봉건권력자들과의 필사적인 투쟁, ‘구舊 수공업자들’에 대한 ‘신新 수공업자들’의 반란, 이 투쟁의 유혈과 복수에 대해서 잊은 것처럼 보인다.
아니, 난 이것을 절대로 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세 이탈리아의 두 역사학자 레오(Leo)와 보타(C.Botta)처럼, 페라리(G.Ferrari), 지노 카포니(M.Capponi)와 많은 다른 학자들처럼, 나는 이들 당파들의 갈등은 도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담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갈등이 있을 후에 도시의 삶은 새로운 일보를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레오와 보타는 중세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발생한 길거리 충돌을 자세히 연구하고, 이 충돌들과 더불어 완성된 거대한 진보, 즉 모든 주민들에 대한 행복의 보장, 새로운 문명의 탄생에 대한 연구를 끝내면서 다음과 같은 아주 신뢰할 수 있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우리 시대의 모든 혁명가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그런 것처럼, 코뮌이 자신의 환경 속에 모순과 갈등을 허용할 때, 바로 그럴 때에만 도덕적 완전성을 제시하고, 그럴 때에만 공공질서를 유지한다.”
그렇다. 이 갈등은 자유롭게 허용된 갈등이고, 그 어떤 외적인 세력의 개입도 없는 갈등이며, 국가의 개입이 없는 갈등이다. 이것은 국가가 서로 싸우는 세력 중 하나에게 유리하게 저울의 한 쪽을 엄청난 무게로 누르는 것과는 다르다.
이 두 연구가와 유사하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평화를 강요하는 것은 이익보다 손해가 훨씬 크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여 대립하는 것들은 강제로 결합되어, 단일한 질서로 편입되기 때문이다. 개개인들과 작은 유기체들은 그들을 삼키는 거대하고 단일한, 무채색과 무생명인 전체의 희생이 된다.’
자유도시들이 국가가 되고, 농촌과 외곽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고, 즉 ‘거대한 무채색의, 무생명의 전체’를 창조하려고 애쓰기 전까지, 이들 도시들이 내적인 갈등을 통해 매번 더 젊고 강하게 자라고 성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거리에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도 자유도시들은 번성한 반면, 200년 후 바로 그 문명은 국가의 형성으로 초래된 전쟁의 소음 속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문제는, 자유도시들에서 투쟁은 개인의 자유의 획득과 보존, 연합의 원칙, 자유로운 연합과 공동의 행동권을 위하여 진행되었다. 이와는 달리 국가는 개인의 억압을 위해, 자유로운 협약의 파괴를 위해, 왕, 재판관, 성직자 즉 국가 앞에서 모든 국민들을 똑같은 노예로 만들기 위해 전쟁하였다는데 있다.
여기에 모든 차이가 있다. 죽이는 투쟁과 갈등이 있고, 또한 인류를 진보시키는 투쟁과 갈등이 있다.
Ⅵ
16세기에 새로운, 현대적 야만족들이 나타나 중세의 모든 자유도시 문명을 파괴하였다. 물론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하였지만, 여하튼 그들은 문명의 성장을 적어도 2-3백년 억제하였고 문명을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야만족들은 개인의 손발을 묶고 개인의 모든 자유를 박탈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자기주도와 자유로운 협약 위에 수립한 연합을 잊고 모든 점에서 유일한 통치자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에 따르면 사람들 사이의 모든 직접적 관계는 파괴되었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만이 사람들을 연합시킬 권리를 가진다. 또한 국가와 교회만이 산업적, 상업적, 법적, 예술적,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이해를 관리할 소명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관계를 위해 12세기의 사람들은 스스로 직접 연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면 이 야만족은 누구였는가? 그것은 바로 국가였으며, 그것은 전쟁지휘관, 로마전통의 후계자들인 재판관, 성직자, 즉 세 세력 사이에 새로 나타난 삼각연합이었다. 세 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를 상호 보장하기 위해서 연합하였고, 사회를 지배하고 결국 사회를 억압하게 될 유일한 권력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이 새로운 야만족들은 중세 자유도시와 같은 강력한 조직들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었는가? 이들은 이를 위한 힘을 어디로부터 퍼 올렸는가?
그들에게 이 힘을 제공한 것은 무엇보다 농촌이었다. 중세도시들은 시민을 해방시켰지만, 이와 동시에, 고대 그리스 도시들이 노예를 해방시킬 수 없었던 것처럼, 농민을 농노상태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었다.
사실 도시를 해방시킬 때, 스스로 수공업과 농업을 결합했던 도시민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농촌 거주자들을 자신들의 해방 사업에 끌어 들이려고 노력하였다. 2세기 동안에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의 도시민들은 봉건영주와 치열한 전쟁을 치렀고, 이 투쟁에서 놀라운 영웅심과 집요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지배자들의 성을 정복하고 그들을 둘러싼 봉건제도를 붕괴시키기 위해 마지막 힘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한 성공은 불완전했다. 전쟁에 지친 나머지 그들은 영주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때 농민들의 이익을 희생시켰다. 도시의 경계 밖에서, 도시는 단지 전쟁을 중단할 목적으로 농민을 영주의 손에 넘겨주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도시는 영주가 같은 도시에 산다는 것을 조건으로 그를 시민이라 불렀다. 다른 지역에서 도시는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영주와 나누어 가졌고 도시민 스스로가 농민을 지배하게 되었다.
대신 영주는 자신들이 경멸하고 미워했던 도시민에게 복수하였다. 영주는 자신의 귀족가문들 사이의 적대감과 복수 때문에 도시의 거리를 피로 물들였다. 물론 그들은 도시조합을 무시했으며, 불화를 이곳의 공동재판소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길거리에서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이외에도 귀족은 낭비벽, 음모, 호화로운 생활, 왕과 주교의 궁전에서 습득한 교육으로 도시민을 타락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도시민을 자신들의 끝없는 다툼 속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도시민도 귀족을 모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주인이 되고 도시 경계 밖에 거주하는 농민들의 노동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왕, 황제, 차르, 교황은 통치권을 확보하였고,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도시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다. 농민들이 즉각 그들을 따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여하튼 농민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두었다. 그 결과 농민들은 도시를 방어하지 않았다.
왕의 권력은 농촌에서, 농촌 주민이 둘러싸고 있는 무장한 성에서 서서히 성숙되고 있었다. 12세기에 왕의 권력은 단지 이름만으로 존재하였다. 지금 우리는 도둑의 우두머리들도 그러했음을 알고 있다. 우두머리들은 티에리가 증명한 것처럼 스스로 왕의 칭호를 가졌다. 그러나 당시에 그것은 거의 아무 의미가 없었다. 스칸디나비아 어부들은 자신들의 ‘어망의 왕’을 가졌고, 심지어 거지들에게도 자신들의 ‘왕’이 있었다. 왕, 제후, 코눙[11]은 그저 일시적인 우두머리였다.
서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여기저기에서 더 강력하고 혹은 더 교활한 제후가 다른 제후들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교회는 물론 그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강제, 음모, 매수, 필요하다면 칼과 독약을 수단으로 제후는 다른 봉건영주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모스크바의 황제 권력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12] 왕권이 나타난 곳은 소란스런 민회, 타르페이아의 절벽[13] 혹은 강을 가진 자유도시들이 아니었다. 폭군들을 위한 권력은 언제나 지방에서, 농촌에서 생겨났다.
프랑스에서 폭군들이 랭스 혹은 리옹에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를 대신하여 파리를 선택했다. 당시 파리는 부유한 농촌 마을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들과 농촌 마을의 집합체였다. 하지만 그곳에 민회가 있는 자유도시는 없었다. 영국에서 왕권은 인구가 밀집한 런던의 대문인 웨스트민스터에 자리 잡았다. 러시아에서는 수즈달과 블라디미르에서 실패한 후에, 왕권은 모스크바 강변 부유한 농촌 마을들 안에 세워진 크렘린에 자리를 잡았다. 노브고로드 혹은 프스코프, 뉘른베르크 혹은 플로렌시아에서는 절대로 왕권이 강화될 수 없었다.
이웃 농민들은 왕에게 식량, 말, 인력을 제공하였다. 탄생 중인 권력자들은 이외에도 공동체의 상업이 아닌 왕의 상업으로 부유해졌다. 교회가 그들을 후원하고 옹호하였으며, 자신들의 재산으로 그들을 지원하였고, 마침내 왕의 도시를 위하여 특별한 성인과 기적을 만들어냈다. 교회는 파리의 성모 혹은 모스크바의 성모를 거룩하게 만들었다. 자유도시들이 주교의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고 젊은 혈기로 전진하려는 바로 그때, 교회는 태동하던 왕을 수단으로 서서히 자신들의 권력을 부활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교회는 결국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요람을 특별히 친절한 배려, 향, 황금으로 감쌌다. 교회는 그와 연합하여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회복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파리, 모스크바, 마드리드, 웨스트민스터 등 모든 곳에서 교회가 어떻게 왕 혹은 황제의 요람을 정성스럽게 보호하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교회는 국가정신에 입각한 강한 조직을 갖고 있었다. 또한 모든 사회계급에서 찾아낸 강한 의지와 기민한 지성을 소유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활동하였다. 교회는 음모를 꾸미는 데 능숙하였으며, 로마와 비잔틴 법에 정통했다. 교회는 자신의 이상을 즉 성경의 정신에 입각한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성취하기 위해 집요하게 일했다. 왕은 제한 없는 권력을 갖지만, 최고 성직자의 명령에 순종하며, 교회의 손안에 든 세속의 무기일 뿐이었다.
16세기에 왕과 교회라는 이 두 패거리의 협력은 최고에 달했다. 왕은 이미 자신의 경쟁자들인 영주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으며, 다음 단계에 그들의 손은 이제 자유도시들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지만 16세기의 도시도 더 이상 우리가 12, 13, 14세기에 보았던 것들이 아니었다. 도시는 12세기의 해방 혁명으로부터 탄생되었지만, 주변 농촌 주민에게도 심지어 피난처로서 후에 도시성벽의 경계로 이주하여 수공업을 시작한 도시민들에게도 자신들의 평등사상을 확장시킬 과감성을 갖지 못했다. 모든 도시들에 단순히 ‘가문’이라고 불리는 (12세기의 혁명을 주도한) 구 가문과 (늦게 도시로 이주한) 신 가문 사이의 차별이 나타났다. 구 ‘상인길드’는 새로운 이주자들을 자신들의 영역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신 수공업자들’을 자신들의 상거래에 참여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도시의 단순한 상인길드는 도시의 재정을 위해 물건을 팔던 도시의 상업 에이전트였다. 그들은 이제 중개인과 거간꾼으로 변신하여 해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도시 생활에 동방의 화려함을 도입하였다. 나중에 ‘상인길드’는 지주와 성직자와 연합하거나 독점권을 위해, 부에 대한 권리를 위해 가장 가까운 왕에게 의지하였다. 공동체성을 포기하고, 사적인 것으로 변한 상업은 마침내 자유도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 외에도 처음에 도시와 민회를 구성했던 구 수공업자 길드는 자신들이 향유하던 권한을 신 수공업자 길드에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신 수공업자들은 혁명의 방법을 통해 평등권을 확보해야 했다. 혁명은 실제로 우리가 역사를 알고 있는 모든 도시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혁명은 대부분의 경우에 모든 삶, 수공업, 예술의 혁신을 낳았다. 이런 현상은 플로렌시아에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하지만 혁명은 다른 도시들에서 빈자들(popolo basso)에 대한 부자들(popolo grasso)의 승리로, 운동의 진압으로, 무수한 유형과 처형으로 끝났다. 특히, 영주들과 성직자들이 싸움에 개입한 곳에서 그러했다.
말할 것도 없이, 마키아벨리즘을 익힌 왕들은 자유도시의 내부적인 삶에 개입할 때, ‘부자들의 박해로부터 빈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후에 황제가 되는 모스크바 대공은 부자들로부터 ‘최하층민’과 ‘서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를 정복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모든 곳에서 발생하였다.
이 외에도 인간의 개념 자체가 변화했기 때문에 도시는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법과 로마법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켰다.
12세기의 유럽인은 본질상 연방주의자였다. 그는 자유로운 자기주도, 자유협약, 자발적 연합을 옹호하였고, 사회의 출발점을 고유의 개성에서 찾았다. 그는 복종에서 구원을 찾지 않았고, 사회구원자의 도래를 기다리지 않았다. 기독교적 혹은 로마적 가르침은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언제나 권력 지향적이었고, 영혼, 특히 신자들의 노동을 지배하려 했던 기독교회의 영향 아래, 다른 한편으로 12세기부터 강력한 영주, 왕 그리고 사제의 궁에 침투하기 시작하여 곧 대학에서 사랑받는 교과목이 된 로마법의 영향 아래, 처음에는 반목했지만 잘 어울리게 된 두 가르침의 영향 아래 인간의 이성은 서서히 타락하고, 결국 사제와 법률가가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권력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하층 수공업자들의 반란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누군가 구원자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들은 독재자 혹은 도시 왕을 선출하고 반란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무제한의 권력을 이들에게 부여하였다. 그리고 독재자는 교회와 동방의 전제국가로부터 배운 온갖 세련되고 잔혹한 방식으로 권력을 이용하였다.
교회는 그를 지지하였다. 최고 성직자에게 복종하고 교회의 충실한 무기가 되는 성서적 왕의 출현은 교회의 꿈이었다! 이외에도 교회는 열성적으로 합리주의 정신과 ‘이교적’ 사상을 증오했다. 전자는 제1차 르네상스 시대에 즉, 12세기의 르네상스 시대에 자유도시를 지배하던 정신이었다. 후자는 새로 발견된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에게 자연으로의 복귀를 호소하였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교황, 성직자, 교회 일반에 대항하여, 원시 기독교의 기치를 걸고 봉기하려는 흐름을 증오했다. 교회가 애호하던 무기인 화형, 고문, 교수대가 이교도들을 향해 투입되었다. 이 때 교황, 왕 혹은 독재자 중 누가 무기가 되든지 교회는 상관하지 않았다. 화형, 고문대 그리고 교수대만이 이교도들과의 싸움에서 제 구실을 하였다.
로마 법률가들과 성직자들. 이 두 집단의 영향 아래 자유로운 자기주도와 자유협약의 오랜 연방주의 정신은 소멸되고, 훈육의 정신, 지배와 피라미드형 조직의 정신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부유한 계급과 마찬가지로 민중도 밖으로부터 구원자를 찾았던 것이다.
구원자인 왕은 소란스런 도시의 민회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이 건설한 도시에 부를 축적하고, 자신에게 복종하는 귀족들과 농민들의 호위를 받았다. 왕이 도시 대문 앞에 등장하여 빈자들에게는 부자들로부터의 강력한 보호를, 부자들에게는 빈자들의 폭동으로부터의 보호를 약속했을 때, 이미 권력의 독에 중독된 도시는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들은 왕에게 대문을 열어주었다.
이 외에도 13세기부터 몽골족들은 동유럽을 정복하고 파괴하였다. 이제 모스크바에 몽골의 칸과 정교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황제 체제가 생겼다. 그 다음에 터키족이 유럽을 침략하고,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을 파괴하였고, 1453년에는 빈까지 도달하였다. 터키족을 저지하기 위해 유럽의 중심인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에서 강력한 국가들이 탄생하였다. 동시에 유럽의 다른 쪽인 스페인에서 모로코인들의 추방은 카스티야(Castilla)와 아라곤(Aragon)에서 새로운 강력한 전제왕권이 수립되는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이 전제정권은 로마교회와 종교재판, 칼과 고문실에 의지하였다.
이 침략과 전쟁들은 불가피하게 유럽을 새로운 시대로, 전쟁국가의 시대로 진입하게 만들었다. 전쟁국가들은 모든 다른 도시들을 왕 혹은 대공의 도시로 ‘연합하기 위하여’, 즉 복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도시들이 스스로 작은 국가들로 변신하자, 후자는 강력한 국가에 병합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Ⅶ
그러나 자유공동체와 중세의 연방체제에 대한 국가의 승리는 방해 없이 완성될 수 없었다. 심지어 국가의 최후 승리를 의심할만한 시기도 있었다.
중부 유럽의 도시들과 넓은 농업지대에서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형식과 외형 면에서 종교운동이었지만, 의식주의 평등을 추구하는 순수 공산주의적 운동이었다.
14세기에 우리는 프랑스(1358년 경)와 영국의(1381년 경) 두 농민운동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역사에서 자크리의 반란[14]으로 알려져 있고, 두 번째는 농민지도자 중의 하나인 와트 타일러(Wat Tyler)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두 운동은 당시 사회를 근본부터 흔들었다. 그러나 두 운동은 주로 봉건지주에 대항한 것이었다. 진압되었지만, 영국에서 이 민중봉기는 농노제도에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에서 자크리의 반란은 농노제도의 발전을 저지하였고, 그것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농노제도는 독일과 동부유럽에서 이룬 것과 같은 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16세기에 유사한 운동들이 보헤미아의 ‘후스(Huss)파’,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의 ‘재세례파’[15]라는 이름으로 중앙 유럽에서 점화되었다. ‘혼란의 시대’[16]란 이름으로 알려진 이와 유사한 운동이 17세기 초에 러시아에서도 일어났다. 서유럽에서 이것은 봉건영주와 봉건지주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 원시국가를 위한 교회법과 로마법에 대항한 반란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운동의 의미는 어용역사가와 교회역사가들에 의해 완전히 왜곡되었고,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은 이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운동의 표어는, 양심의 명령 외에는 어느 것에도 복종할 의무를 갖지 않는 개인의 완전한 자유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였다. 훗날 국가와 교회가 운동의 가장 격렬한 옹호자들을 소탕하고, 운동을 교묘히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꿔버렸을 때, 운동은 혁명적 성격을 상실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변질되었다.
운동은 설교로 시작되었고, 몇몇 장소에서는 무국가적 아나키즘을 실천적으로 적용하기도 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종교적 형식들과 혼합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불가피했던 종교적 형식들을 걷어내면, 우리는 이 운동이 지금 우리가 대변하고 있는 사상적 흐름과 본질상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그것에서 고유의 양심이 인간의 유일한 법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국가적인 것이든 신적인 것이든 모든 법이 부정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운명의 유일한 관리자로서의 공동체를 방어하는 것, 한마디로 공산주의와 평등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본다. 그것은 봉건지주로부터 땅을 되찾아 주고, 돈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국가에 대한 모든 봉사를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느냐고 물었을 때, 재세례파 운동 철학자들 중 하나인 덴크(H.Denck)는 스스로 성서에서 자신을 위해 발견한 규칙만이 인간행동에서 의무적으로 지켜야할 유일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 모호한 공식은 교회용어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책(성서)’의 권위는 공산주의와 권력에 대한 ‘찬’과 ‘반’의 논거를 손쉽게 찾을 수 있게 하고, 자유의 선언에 대한 문제에서는 특유의 불분명한 태도를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운동의 종교적 색채와 함께 그 속에 패배의 맹아를 포함하고 있었다.
도시에서 발생한 운동은 즉시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농민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깃발 대신에 창에 낡은 장화나 짚신을 꽂았고, 지주들이 점유한 공동체 토지를 빼앗았으며, 농노제도의 족쇄를 부수었다. 또한 그들은 성직자와 재판관을 몰아내고, 자유 공동체로 조직되어 갔다. 한동안 이 반란은 갓 태어난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왕 혹은 제국의 권력은 단지 화형, 고문 그리고 교수대의 도움으로 수년 동안 십만 명 이상의 농부들을 살해한 후에, 교황과 개신교의 지원을 받아 이 반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루터는 교황보다도 더 많은 농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재세례파 운동으로부터 탄생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초기에 민중운동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나, 민중을 살육하고 민중운동을 탄압하는데 전력을 다해 도움을 주었다. 이 거대한 지적 흐름의 생존자들은 ‘모라비아 형제단’으로 몸을 피했으나, 이 형제단도 교회와 국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무사히 살아남은 소규모 집단들만이 구조되어 일부는 남동러시아로, 일부는 독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지금까지도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으며, 국가를 위한 어떤 봉사도 거부하고 있다.
이때 이후로 국가의 존재는 보장받게 되었다. 법률가, 성직자, 지주 그리고 군인은 왕권 주위에서 우호적인 연맹을 결성하고, 이제 다시 파괴적인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얼마나 많은 거짓을 축적해 왔는가! 학교에서 우리 모두는, 국가가 중세 사회의 폐허 위에 민족적 연합을 창조하여 인류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그러한 연합은 도시들의 경쟁 때문에 전에는 실현되기 어려웠다고 배웠다. 우리 모두는 학창 시절에 그렇게 배웠고, 나이가 들어서도 거의 모두 이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중세 도시들은 모든 경쟁에도 불구하고 400년 동안 이들 연합을 자발적 협약에 기초한 연방으로 결속하려고 했으며, 그들은 이점에서 완전하게 성공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롬바르디아(Lombardia) 동맹은 북이탈리아의 모든 도시들을 포괄하였고, 제네바와 베네치아에서 고유의 재정을 소유했다. 토스카나(Toscana) 동맹, 60개의 도시가 참여한 라인(Rhein) 동맹과 같은 다른 연방들, 베스트팔렌, 보헤미아, 세르비아, 폴란드, 러시아 도시들의 연방이 전 유럽을 덮었다. 상업을 위한 한자(Hansa) 동맹은 당시에 스칸디나비아, 북독일, 폴란드, 발틱 해 주변의 러시아 도시들을 포함하였다. 자발적 연합의 형성을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들 그리고 심지어 그것들의 실천적 실현도 이곳에 존재했다.
지금까지도 그런 연합의 살아있는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스위스를 보자. 그곳에서의 연합은 무엇보다도 프랑스 란(Lan) 지방에 있는 것과 유사한 농촌공동체들(칸톤[17]) 사이에 생겼다. 왜냐하면 도시가 폭넓은 대외적인 상거래를 했던 다른 나라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위스에서 도시들은 농촌과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스위스의 도시들은 농촌이 봉기할 때 도움을 주었다. 이 때문에 연합은 도시들과 농촌을 하나의 연방으로 통일하여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존속시켰다.
그러나 본질상 국가는 자유연합을 용인할 수 없다. 자유연합은 국가의 입법자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국가 안의 국가!’ 국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발적인 연합을 국가 안에 두는 것을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국가는 신민臣民만을 인정한다. 국가와 그의 지주인 교회만이 개별적인 개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는 절대적 권리를 갖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국가는 시민들 사이의 직접적 관계에 기초한 도시를 필연적으로 파괴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필수적으로 그러한 도시에서 모든 내적 관계를 파괴하고, 도시 자체를 파괴하며, 도시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파괴해야 했다. 연방의 원리 대신에 국가는 복종과 규율을 수립해야 했다. 이것이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이것이 없다면 국가는 국가이기를 중단하고 연방으로 변화된다.
그래서 학살과 전쟁의 세기인 16세기는 삶과 죽음의 투쟁으로, 태동하던 국가가 도시들과 그 연방들에게 선포한 전쟁으로 완전히 소진되었다. 도시들은 포위되어 점령되고 약탈당했다. 주민들은 학살당하고, 유형에 처해졌다. 국가는 모든 전선에서 승리했으며, 이 승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5세기에 유럽은 부유한 도시들로 덮여 있었다. 도시의 수공업자, 석공, 방직공, 조각가들은 예술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대학은 과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들의 무역상들은 대륙을 횡단하였고, 배는 바다와 강을 종횡으로 항해했다.
2백년이 지나는 동안 이들 중에 무엇이 남았는가? 5만~10만의 주민을 가진 도시들은 즉, 오늘날 가장 잘 설비된 수도와 비교할 때 각각의 주민 당 더 많은 학교와 병원 침대가 있었던 플로렌스 같은 도시들은 보잘것없는 장소로 변하고 말았다. 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쫓겨났다. 도시의 부는 국가 혹은 교회의 소유가 되었다. 산업은 관리들의 조악한 지원 아래 곤경에 빠지고, 상업은 몰락하였다. 도시들을 이어주던 도로는 17세기에는 통행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국가는 모든 곳에 전쟁의 씨앗을 뿌리고, 전쟁은 유럽을 황폐화시켰으며, 국가가 직접 파괴하지 못했던 도시를 파괴했다.
그렇다면, 농촌은 국가적 중앙집권화로부터 이득을 보았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스코틀랜드, 토스카나, 독일 농촌의 삶에 대해 역사가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이것과 1648년 영국, 태양왕 루이 14세 시기의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 농촌의 빈곤, 한마디로 국가가 지배한 백년 후에 발생한 모든 농촌의 빈곤에 대한 서술을 비교해 보라.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인정하고 지적하는 빈곤은 도처에 있었다. 농노제도가 폐지된 곳에서 그것은 여러 다른 형태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아직 폐지되지 않은 곳에서 그것은 국가의 비호 아래 고대 노예제의 모든 특징을 갖는 잔혹한 제도로, 심지어 이보다 더 나쁜 제도로 변화되었다.
국가의 주된 관심은 우선 자유도시를 다음에는 농촌공동체를 파괴하고, 농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를 끊고, 약탈한 토지를 부자에게 넘겨주고, 농민들을 관리, 성직자, 지주들의 권력에 예속시키는 것이었다. 도대체 국가로부터 어떤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Ⅷ
도시의 독립을 파괴하는 것, 상인길드와 수공업길드를 약탈하는 것, 도시의 대외무역을 장악하고 파괴하는 것, 길드의 내부 행정권을 장악하고 국내 상업과 수공업을 모든 세세한 사항에 이르기까지 관리의 무리에게 종속시키는 것, 이렇게 하여 산업과 예술을 쓰러뜨리는 것, 지역 예비군을 파괴하는 것, 강자에게 유리한 세금으로 약자들을 억압하고 전쟁으로 국가를 유린하는 것. 16-17세기에 태동하던 국가가 한 역할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같은 일이 농촌의 농민들 사이에도 일어났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느끼자 즉시 국가는 서둘러 농촌공동체를 파괴하였고, 국가의 전횡에 완전히 노출된 농민들을 유린하였으며, 공동체 토지를 약탈하였다.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는 역사가, 정치가, 경제학자들은 농업공동체가 농업발전을 방해하는 낡은 토지소유 형식이며, 농업공동체는 자연스런 경제발전의 영향을 받아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라고 언제나 우리를 가르쳤다. 정치가와 자본주의 경제가들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 학교에서 배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혁명가와 사회주의자들도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과학적’ 사회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에서만 만날 수 있는 몹시 불쾌한 거짓일 뿐이다. 진실을 알기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자료가 역사에 축적되어 있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달로즈(V.Dalloz)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진실은 국가가 농촌공동체의 모든 독립성과 사법권, 입법권 그리고 행정권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다음에 토지는 국가의 비호를 받는 부자들에 의해 강탈당했고, 혹은 국가에 몰수당하였다.
이런 강도행위는 프랑스에서 16세기에 시작되었고, 17세기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659년에도 여전히 국가는 공동체를 자신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공동체 토지의 강탈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이 14세의 명령서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은 멋대로 토지를 점유하였다[18] …그들은 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토지를 나누어 가졌고, 부채를 날조하여 공동체에 갚게 만들었다.”라고 왕은 명령서에서 말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모든 수입을 몰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언어로 ‘자연사’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 한 세기 동안 적어도 전체 공동체 토지의 절반이 국가의 비호를 받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공동체는 1784년까지 존속하였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여전히 느릅나무 아래 어딘가에서 집회를 계속하였고, 토지를 분배했으며, 세금을 정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바보(A. Babeau)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튀르고(A.Turgot)는 공동체의 민회가 ‘지나치게 소란스럽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민회를 폐지해버렸다. 그 대신에 그는 재산을 소유한 주민 중에서 선발하여 회의를 구성하였다. 1787년, 혁명 전야에 국가는 이 방법을 전 프랑스에 확대하였다. 농촌공동체는 파괴되었고, 공동체 업무관리는 부유한 자본가와 농민들로 구성된 소수 조합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제정의회는 1789년 12월 서둘러 법을 통과시켰고, 그 이후 귀족의 자리를 차지한 자본가들은 공동체 토지 중 나머지 부분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농민 반란이 있은 후에야 1792년 국민공회는[19] 동 프랑스에서 봉기한 농민들이 이룩한 것을 승인하였다. 즉 국민공회는 농민들에게 공동체의 토지를 돌려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농민들이 반란으로 땅을 되찾았을 때에만, 농민들이 스스로 이 일을 실현한 곳에서만 가능하였다.
알려진 것처럼, 모든 혁명적 법안들의 운명은 그러했다. 즉 그것이 완성된 사실이 되었을 때에만, 혁명적 법안들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국민공회는 이 법안에 자본가의 독을 주입시킬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법안에 따르면, 귀족으로부터 몰수한 토지는 ‘능동적인 시민’에게, 즉 농촌 자본가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국민공회는 ‘수동적인 시민’, 즉 누구보다 공동체 토지의 분배가 절실했던 가난한 농민 대중들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했다. 다행히 이에 대한 답으로 농민들은 1793년 다시 폭동을 일으켰다. 그때서야 국민공회는 모든 농민들 사이에 토지를 분배한다는 새로운 법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결코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으며 공동체 토지의 새로운 장악을 위한 구실로 사용되었다.
이들 권력자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이 모든 대책들은 공동체들을 ‘자연사’시키기 위해 충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동체들의 존재는 계속되었다. 1794년 8월 24일 당시 권력을 갖고 있던 반동 세력은 공동체에 새로운 타격을 주었다. 국가는 모든 공동체 토지를 몰수하여 그것으로 국가 부채를 충당하기 위한 예비기금을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토지를 농민들에게, 자코뱅당원의 처형으로 즉 테르미도르의 반동[20]으로 끝난 자본주의 혁명의 경쟁자들에게 경매로 팔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섯 번째 해 ‘프레리알[21]’ 2일 이 법은 3년 만에 폐기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들도 파괴되었고, 이를 대신하여 ‘지방의회’가 설립되었다. 국가는 의회를 손쉽게 자신들의 관리로 채울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농촌공동체가 재건되는 1801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대신에 36,000개의 프랑스 공동체에 시장과 조합장을 임명할 권한을 정부 스스로가 갖는 법안을 만들었다! 이 우매한 짓은 1830년 혁명까지 계속되었고, 이후에야 1784년의 법이 부활했다. 두 대책 사이의 기간 동안 공동체 토지는 1813년 국가에 의해 몰수당했고, 그 후 3년 동안 약탈을 당했다. 남은 토지들은 1816년에야 반환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든 새로운 정부는 지지를 보여준 사람들에 대한 포상 비용의 재원으로 공동체 토지를 생각했다.
1830년 이후 3회에 걸쳐, 처음은 1837년, 마지막은 나폴레옹 3세가 공동체의 삼림과 목장을 농가별로 분배할 것을 명령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세 번 모두 정부는 농민들의 저항을 받고서야 이 법안을 취소하였다. 그럼에도 나폴레옹 3세는 이것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의 총신들을 위해 몇몇 거대한 장원을 은밀하게 탈취하였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에서 공동체 토지소유가 ‘자연스러운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실과 ‘경제법칙’이었다. 그렇다면 전쟁터에서 수십만 군인의 죽음도 역시 ‘자연스러운 죽음’이란 말인가?
프랑스에서 일어난 것은 벨기에,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도 일어났다. 간단히 말해, 슬라브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유럽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모든 서유럽국가에서 공동체 약탈의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방법만이 달랐다. 영국에서는 일반적인 수단을 도입하지 않고, 수천 개의 개별적인 인클로저 법령[22]을 제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법령에 따라 귀족과 자본가로 구성된 의회는 개별적인 사안마다 토지의 몰수를 승인함으로써, 지주들이 둘러싼 토지를 지주들이 소유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영국에서는 지금까지도 고랑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이 고랑들은 공동체 토지를 구역으로, 어느 정도는 가족 단위로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우리는 마샬(A.Marshall)의 저서에서 19세기 초까지 존재했던 이런 종류의 토지소유에 대한 분명한 묘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영국에는 농노제도를 제외하면 농촌공동체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퓌스텔 드 쿨랑지[Fustel de Coulanges]의 충실한 제자인 시봄[F.Seebohm]과 같은 학자)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한 방법을 우리는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도 볼 수 있다. 공동체 소유였던 토지의 사유화는 이렇게 19세기 중반 즈음에 완성된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토지 중에서 보잘것없는 부분만을 소유하게 되고 말았다! 바로 이것이 지주, 성직자, 군인, 재판관들 사이의 상호보장연합이, 즉 국가가 농민에게 행한 것이다. 국가는 농민에게서 빈곤과 경제적 노예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마지막 수단을 빼앗고 말았다.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공동체 토지의 강탈을 조직하고 은폐하면서, 국가가 지방 삶의 조직인 공동체의 존재를 허용할 수 있었을까?
명백히 그렇지 않다.
자신의 환경 속에서 시민들이 국가의 몇몇 의무를 갖는 조합을 조직하도록 허용하다면, 그것의 국가의 원칙과 모순된다. 국가는 매개하는 단체 없이, 모든 신민의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국가는 노예상태에서의 평등을 요구한다. 국가는 ‘국가 속의 국가’를 견디지 못한다.
때문에 16세기에, 국가가 수립되기 시작하자마자, 국가는 도시의 시민들과 농촌의 농민들 사이의 관계를 끊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국가가 독립은 절대 아니지만 가끔 도시 관청의 자치를 미약하나마 허용했다면, 이것은 오직 국가의 재정과 관련된 목적을 위해, 국가의 일반부채를 대폭 줄이기 위해서였다. 혹은 민중을 희생시켜 도시 재산가들에게 부자가 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최근까지 영국에서 일어났으며, 지금도 영국의 제도와 관습에 반영되고 있다. 즉 최근까지 소수의 부유한 상인들이 모든 도시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하다. 지방의 삶은 관습법으로부터 발전한 반면, 로마의 법은 권력의 중앙집권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둘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예를 들어, 이것은 왜 프랑스 통치 하의 알제리에서, 카빌의 젬마 혹은 농촌공동체가 토지에 대한 소송을 진행할 때면, 공동체 회원들 각자가 개별적으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가에 대한 이유다. 왜냐하면 법정은 젬마의 집단적인 하나의 소송보다는, 오히려 50 혹은 200명의 개별적인 소송을 다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법전이라 알려진 국민공회의 자코뱅 법령은 관습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이 법령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로마법 혹은 나아가 비잔틴 법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프랑스 어딘가 큰길가의 나무가 바람에 쓰러졌을 때 혹은 어떤 공동체의 한 작은 지역을 스스로 수리하는 대신 농민이 2 혹은 3프랑을 주고 석공에게 일을 맡기길 원할 때, 그가 책상에 앉아 내무부와 국가 출납국의 15명이나 되는 관리에게 편지를 써야하는 이유이다. 이 거대한 잡일은 50장 이상의 서류를 교환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무를 팔 수 있고, 농부는 공동체 금고에 2-3프랑을 낼 수 있는 허가를 취득할 수 있다.
이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이코노미스트지』에 실린 트리코쉬의 기사를 보라. 그는 이 50장에 달하는 서류의 자세한 목록을 모두 소개하였다.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이것은 제3공화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5 내지 6장의 서류로 정리되는 구체제의 ‘야만적’ 방법들이 아니다. 야만시대에 국가의 통제는 유명무실했다고 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런데 이것만이 문제인가! 불필요한 2만 명의 관리들과 불필요한 수억 루블의 예산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질서’와 일사분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것은 정말 별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 위에 놓인 훨씬 더 나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파괴하는 원리다.
한 마을의 농부들에게는 언제나 수천 가지 공동의 이해가 있다. 예를 들면, 농사, 이웃사이의 이해, 지속적인 교제들이 있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온갖 종류의 목적을 위해 서로 단결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그러한 단결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가는 그들에게 학교, 성직자, 경찰과 재판관을 제공한다. 그들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무엇인가 더 필요하게 되면 그들은 수립된 체계에 따라 교회와 국가에 호소해야 한다.
그렇게 1883년까지 프랑스에서 농민들이 어떤 것이든지 조합을 결성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예를 들면 공동으로 비료를 구매하거나 들판을 건조시키기 위한 조합의 결성도 금지되었다. 공화국은 1883-1886년에야 비로소 농민들에게 이 권리를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온갖 제한과 예외규정으로 누더기가 된 조합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19명 이상의 회원을 갖는 모든 단체들은 불법이었다.
이렇게 국가로부터 받은 교육으로 인해 우리의 지성은 왜곡되었고, 그 결과 농업조합이 그때 이후로 프랑스에서 급속도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기뻐한다. 그러나 농민들이 수백 년에 걸쳐 상실하게 된 조합결성의 권리가 중세에 획득한 그들의 자연스런 재산이었으며, 이것은 자유인이든 농노든 모든 사람의, 논란의 여지없는 재산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노예의 정신에 오염되어, 이 권리가 마치 ‘민주주의의 성과물들’ 중의 하나라고 상상하고 있다.
국가에 의해 왜곡되고 일그러진 교육과 우리 국가의 편견들이 우리를 이 정도로 무지하게 만든 것이다!
Ⅸ
“도시와 농촌에 공동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교회와 국가에 호소하라. 그러나 직접 공동으로 연합하고, 힘으로 해결을 시도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16세기부터 이 문구는 전 유럽에 퍼지게 된다. 14세기 말에 발표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명령에서, 우리는 “모든 조합, 형제단, 회의, 조직된 단체, 목수와 석공 사이에 이미 정해지거나 정해질 예정인 규약과 서약은 오늘부터 효력을 상실하며 폐지될 것이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도시의 반란과 다른 민중운동들이 진압되고, 국가가 완전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국가는 예외 없이 지금까지 수공업자들과 농민들을 연결하던, 모든 민중적 기관에(길드, 형제단 등) 손을 대기로 결정하였다. 국가는 직접 기관들을 해체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것은 영국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들 기관의 변화 과정 각각을 기록한 문서들이 다량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길드와 형제단을 점점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국가는 그들의 조합, 다음에는 축제, 직공장들을 제거하였다. 국가는 직공장을 대신하여 자신의 관리와 재판관을 임명하였다. 그 후 15세기 초 헨리 7세 때 길드의 재산을 직접, 가차 없이 몰수하였다. ‘위대한’ 개신교 왕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는 아버지가 시작한 일을 완료하였다.
소롤드 로저스(Thorold Rogers)가 올바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전혀 정당하지 않은’, 말 그대로 백주의 강탈이었다. 소위 ‘과학적’ 경제학자들은 바로 이 강탈을 경제법칙의 영향 아래 발생한 길드의 ‘자연사’라고 말한다.
실제로 고유의 상거래와 자신만의 재판소와 자신만의 군대와 회계, 조직, 강력한 서약을 가진 길드 혹은 조합을 국가가 허용할 수 있을까? 국가주의자들에게 이것은 ‘국가 속의 국가’인 것이다! 국가는 이들을 탄압해야 했고, 영국, 프랑스, 독일, 보헤미아 모든 곳에서 국가는 탄압했으며, 그것들 중에서 단지 형식만을 남겨두었다. 즉, 국가의 경제적 목적을 위해 유용한, 거대한 행정기구의 부분을 이루는 형식만이 남게 되었다.
길드와 수공업자 조합들은 전에 삶을 구성하던 모든 것을 상실하고 왕의 관리들에게 종속되었으며, 지난 40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산업발전의 핵심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길드와 조합이 18세이게는 산업발전의 부담으로, 장애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인가? 국가가 그것들을 파괴했던 것이다.
실제로 국가는 길드의 삶을 위해, 국가의 개입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했던 독립성과 자주성을 파괴하였다. 또한 길드의 모든 부와 재산을 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는 이와 함께 길드의 모든 경제활동 기능까지도 빼앗았다.
중세도시의 내부에서 이해가 충돌하거나 두 길드가 상호협약에 이르지 못하고, 논쟁의 해결을 위해 도시에서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경우에, 양자는 어떻게든 합의를 하거나 어떤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도시의 다른 모든 길드들이 이 문제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타협은 이루어졌으며 때로 필요한 경우 그들은 제3의 심판자로 이웃 도시를 초대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유일한 심판자는 국가다. 인구 수백의 어떤 자그마한 도시의 자잘한 문제 때문에 왕의 행정부서와 의회사무실에는 무수한 서류와 밀고장이 쌓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회는 문자 그대로, 지방에서 올라온 수천가지 자잘한 송사로 넘치게 되었다. 이 서류들을 분류하여 읽고 분석하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말의 편자, 옷감의 염색, 청어 절이기, 나무통 제작 등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도는 수천 명의 관리들을(이들 중 대부분은 돈에 매수되었다.) 필요로 하였다. 그래도 일의 양은 늘어가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곧 국가는 해외무역에 손을 대었다. 국가는 해외무역이 좋은 돈벌이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둘러 그것을 장악하였다. 과거에 도시들 사이에 운반된 옷감의 가격, 양모의 청결도 혹은 청어 운반통의 용량 때문에 불협화음이 생길 경우, 두 도시는 이 문제로 서로 문서를 교환하였다. 논쟁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 그들은 제3의 도시에 도움을 청하고 제3의 심판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거나,(이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옷감의 질과 가격 혹은 통의 용량에 대한 국제적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방직 길드 협의회나 통 제작 길드 협의회가 소집되기도 하였다. 이제 국가가 중앙에서, 파리 혹은 런던에서 이 모든 다툼의 해결을 담당하게 되었다. 관리들을 수단으로 국가는 통의 용량, 옷감의 질, 씨줄과 날줄로 사용된 실의 수와 굵기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국가는 명령을 통해 모든 수공업의 세세한 부분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것의 결과를 알고 있다. 18세기에 이 통제의 억압을 받아 산업은 죽어갔다. 국가의 보호 아래서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예술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것은 죽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석공과 목공 길드의 건축은 어떻게 되었는가? 건축이 죽었다는 것에 답하기 위해서는 국가 지배 시기의 일그러진 기념물들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국가가 가한 타격으로부터 지금ᄁᆞ지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건축은 죽고 말았다.
섬세한 아마포, 네덜란드산 양복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거의 전 유럽에서 철공들의 손은 귀하다고 할 수 없는 철을 재료로 우아한 장식물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철을 그토록 솜씨 있게 다루던 철공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중세에 정밀한 기계로 뉘른베르크의 명성을 창조했던 선반공, 시계공과 같은 장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제임스 와트를 생각해 보라. 18세기 말에 그는 자신의 증기기관을 위해 정밀한 실린더를 제작할 사람을 찾느라고 30년을 허비하였다. 그의 세계적 발명은 30년 동안 조잡한 모델로 머물러 있었다. 모델에 따라 기계를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국가가 산업에 개입한 결과였다. 국가가 한 일이란 것은 고작 노동자들을 경시하고 탄압하며,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고, 도시에 빈곤의 씨앗을 뿌리고, 수백만 농촌 사람들을 굶어죽게 만들고, 산업 노예 시스템을 만든 것이었다.
‘과학적’ 경제학자들은 옛 길드의 이러한 보잘것없는 잔재들, 국가에 의해 억압당하고 교살당한 이 조직들, 국가행정기관의 무익한 부분들을 무지 때문에 중세 길드와 혼동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이 산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파괴한 것은 길드도 노동조합도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기관의 무익하고 심지어 해로운 부분들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산업에 대해, 즉 노동자에 대해 국가가 갖고 있던 그 권력을 정성들여 유지하였다.
무서운 테러리즘적 국민공회가 파업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한 답변에서 언급한 내용을 기억해보기 바란다.(기억에 따라 인용하면 다음과 같아.) “한 국가는 시민들의 이익을 보호할 의무를 갖는다.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당신들은 동맹을 구성하고, 당신들은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파업에 사형선고를 내린다!”
이 답변에서 사람들은 보통 프랑스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만을 본다. 그렇지만 그것에 다른, 더 깊은 뜻은 없는가? 그것은 국가와 모든 단체의 관계에 대한, 즉 1793년 자코뱅주의에서 가장 명확하게 표현된 관계에 대한 언급이 아닌가?
“당신이 무엇인가에 불만이 있다면, 국가에 호소하라! 국가만이 백성들의 불만을 만족시킬 권리를 갖는다. 그러므로 자위自衛를 위해 연합을 결성하는 것은 금지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화국은 스스로를 유일하고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불렀다.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자 · 자코뱅주의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고유의 잔혹한 논리를 갖고 국민공회는 국가의 비밀스런 의미를 표현하지 않았단 말인가?
국민공회의 답변에는 사회단체 즉, 어떤 목적을 갖든 모든 사적인 조직들과 국가의 모든 관계가 표현되어 있다.
러시아의 파업에 대해 말하자면, 파업은 지금도 국가에 대한 범죄로 생각된다.
독일의 경우에도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빌헬름 황제는 최근에 광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청원하라! 그러나 그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행동에 나서기를 감수한다면, 그대들은 내 군대의 총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은 프랑스에서도 거의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영국에서도 그렇다. 비밀결사, 배반자와 고용주에 대항한 단검, 자동차에 설치한 폭약(바로 1860년에도), 베어링에 뿌린 모래 등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수단으로, 100년간의 투쟁 후에야 비로소 영국 노동자들은 파업의 권리를 획득하는데 거의 성공했다. 국가는 하루 8시간 노동에 관한 법률을 대가로 고용주와의 갈등에서 노동자들이 의무적인 조정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려고 한다. 이러한 국가가 설치한 덫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노동자들은 파업의 권리를 곧 완전히 획득할 것이다.
100년 이상의 치열한 투쟁! 고통이 큰 만큼, 그만큼 많은 노동자들이 감옥에서 죽어갔고, 호주로 유형을 떠났으며, 살해당하고, 교수형을 당했다! 이 모든 것은 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반복하자면, 그 권리는 국가가 사회에 무거운 손길을 뻗지 못하던 그때에 자유인과 농노 모든 인간들이 소유했던 바로 그 권리다.[23]
이러한 운명에 처한 것은 노동자들만이 아니었다. 상업 조합의 결성권을 획득하기 위해 부르주아 국가와 치러야 했던 투쟁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국가는 독점권을 확보하여 종복들의 이익을 보장하고, 국고를 가득 채울 수 있을 때에만 조합 결성권을 위임하였다. 국가가 학술원, 대학, 교회를 수단으로 명령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고 쓰거나 심지어 생각할 권리를 위한 투쟁들! 다만 읽고 쓰는 것만이라도 배울 권리를 위한 투쟁! 국가가 유보하고 있는 권리, 국가가 사용하지 않는 권리, 심지어 함께 즐거워할 권리는? 재판관을 선택하는 것, 혹은 중세에 사람들은 어떤 재판관에게서 어떤 법에 따라 재판받기 원하는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또한 여전히 우리 앞에 있는 투쟁, 즉 종교재판과 동방의 전제주의 정신 속에 탄생한 혐오스런 형벌의 책이, 형법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그 책이 소각되는 날이 오기 전에 있을 투쟁은 두말할 것도 없다.
혹은 조세 시스템을 보라. 이것은 순수하게 국가로부터 기원한 제도로서, 국가가 소유한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국가는 유럽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신생국인 미합중국에서도 이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국가는 이 무기로 국민 대중을 권력의 휘하에 두고, 자신의 동조자를 이롭게 하며, 지배하는 소수를 위해 다수를 파산시키고 낡은 사회적 불평등, 낡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자 한다.
전쟁을 생각해 보라. 국가는 전쟁 없이 만들어질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국가를 이루는 한 지역이 이웃 지역과 대립하는 이해를 갖는 것을 허용하는 순간 전쟁은 불가피하게 된다. 우리를 위협하는 과거와 미래의 전쟁들에 대해, 무역시장 쟁탈을 위한 전쟁들에 대해, 식민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전쟁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전쟁에서 승리하든지 패배하든지에 상관없이, 전쟁이 어떠한 노예상태를 초래하는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열거한 모든 악 중에서 가장 나쁜 것, 그것은 학생시절과 그 이후의 삶에서 국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국가의 교육은 우리의 두뇌를 왜곡시킨다. 그 결과 우리 안에 자유의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노예의 개념으로 대체된다.
혁명가라고 자처하는 이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나키스트들을 몹시 미워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나키즘의 자유 개념이 자유에 대한 편협하고 괴상한, 국가의 정신이 침투된 교육을 통해 습득한 개념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은 아나키스트들을 미워한다. 요즘 우리는 발걸음을 뗄 때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현상은 국가가 젊은이들의 생각 속에 교묘하게 자발적인 노예의식을 주입했고 지금까지도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은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종속을 영원히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철학을 가톨릭·국가 철학으로 교살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를 왜곡하고(메로빙거 왕조, 카롤링거 왕조 그리고 류릭 왕조에 대한 황당한 이야기를 전하는 첫 페이지부터, 자코뱅 당을 찬미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민중이 사회제도의 창조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들은 머리가 둘인 교회와 국가라는 우상의 이익을 위해 심지어 자연과학까지도 왜곡한다. 군인, 성직자, 사형집행인의 삼자연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인 심리 그리고 사회 심리를 매번 왜곡한다.
수세기 동안 교회 혹은 성서에 대한 복종을 설교했던 도덕이론들도 이제는 그 고삐를 벗어버리고 국가에 대한 복종을 설교하고 있다. “이웃들에 대한 관계에서 그대들은 그 어떤 직접적인 의무도 갖지 않는다. 그대들에게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도 없다. 그대들의 모든 의무는 국가에 대한 의무다. 국가가 없다면 너희들은 서로의 목을 물어뜯을 것이다.” 스스로를 ‘과학’이라 부르는 새로운 종교는 우리를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고 한편으로 종교는 여전히 낡은 로마와 황제의 신에게 기도한다. “이웃, 친구, 공동체 구성원, 시민, 그대는 이런 것을 잊어야 한다! 그대는 국가의 기관들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그대들 모두는 하나의 선행만을 훈련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의 노예가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국가는 그대의 신이다!”
교회, 대학, 언론, 정당들도 국가와 훈육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이 찬양은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되어서, 혁명가들조차도 이 새로운 우상을 감히 직시하지 못한다.
현대의 급진주의자는 뼛속까지 중앙집권주의자, 국가주의자 그리고 자코뱅주의자다. 그의 발뒤꿈치를 사회주의자들도 따라가고 있다. 15세기 말 플로렌스인들은 귀족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독재의 손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현대 사회주의자들은 국가가 창조한 경제체제의 추악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독재와 국가를 인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Ⅹ
이 글에서는 피상적으로밖에 다룰 수 없지만, 여러분은 이 모든 사실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역사에서 국가는 어떤 모습을 갖고 있으며, 본질상 국가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처럼 여러분도 사회제도가 공평하게 모든 목적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관처럼 사회제도의 발전은 공평하게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정한 기능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면 여러분은 우리가 왜 국가 폐지의 불가피성이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연합을 방해하고, 지방의 자기주도적 발전을 가로막고, 존재하는 자유를 교살하고, 새로운 자유의 생성을 방해하는 일, 인간 사회의 역사에서 이 모든 일들의 수단이 된 제도들은 국가의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제도들은 수세기 동안 살아남아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일정한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한 제도들이 지금까지 한 것에 반대되는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 결론에 대한 답으로 그들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거의 어린애 같은 반론을 제기한다. “국가는 있다. 국가는 존재하고 있으며 준비된 강력한 조직이다. 그 조직을 이용할 수 있다면, 왜 그것을 폐지해야 하는가? 사실, 국가조직은 해롭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조직이 착취자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민중의 손에 떨어지면, 왜 선한 목적을 위해 민중의 행복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것은 전제專制를 해방의 무기로 바꾸려고 했던 실러가 쓴 포자 후작의[24] 꿈이거나, 가톨릭교회로부터 사회주의의 지렛대를 만들려고 했던 졸라의 소설 『로마』의 프로만 수도원장의 꿈일 뿐이다!
이런 주장에 답해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도 갖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혹은 사회혁명을 가련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상상해서 사회주의적 지향과는 아무런 공통점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다.
프랑스를 구체적인 예로 들어 보자. 형식은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제3공화국은 본질상 여전히 왕정체제라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프랑스를 공화적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 제3공화국을 비난한다. 나는 제3공화국이 사회혁명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제3공화국이 공화국의 풍속과 공화국의 정신조차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풍속의 민주화 혹은 계몽의 확산을 위해 지난 20년 동안 실제로 이루어진 많이 않은 것들은 모든 곳에서, 심지어 우리가 경험한 시대정신의 억압이 심했던 유럽 군주국에서도 이미 이루어졌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이런 이상한 국가체제, 즉 공화적 군주국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프랑스가 30년 전과 같은 성격의 국가였고, 여전히 그런 국가란 사실에서 연유한다. 통치자들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로마제국을 모델로 프랑스에 창조된 거대한 관료제는 살아남았다. 바람에 큰길가의 나무가 쓰러지면, 이 거대한 메커니즘의 바퀴는 전처럼 5~10장의 서류를 교환하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서류 위의 도장은 변했지만, 국가와 국가의 정신, 기관, 지역적 중앙집권화와 기능의 중앙집권화는 변함없이 남아있다. 더구나, 모든 기생충이 그런 것처럼 이들은 매일 점점 더 나라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적어도 진실한 공화주의자들은 공화주의적 의미의 변화를 이룩하기 위해 국가의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용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들 또한 스스로 오랫동안 그것에 만족해왔다. 우리는 지금 그 결과를 보고 있다.
낡은 조직을 폐지하고, 국가를 폐지하고, 농촌공동체, 자유노동조합 등의 사회 단위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연합 형식을 창조하는 대신에, 그들은 ‘낡고 이미 존재하는 조직들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역사상의 제도가 이러저러한 경향 속에서 하고 싶은 대로 작동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며, 제도는 고유한 발전의 길을 간다는 진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가 이 제도에 흡수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아직 사회의 모든 경제적 관계들의 변화는 아니었다. 이 문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진행 중이다. 문제는 사람들 사이의 몇 가지 정치적 관계의 변화에만 있었다.
이런 완전한 실패와 가련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민중에 의한 국가권력의 쟁취만으로도 충분히 사회혁명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낡은 기계, 낡은 메커니즘은 자유를 파괴하고, 개인을 노예화하며, 박해를 위한 법적 근거를 모색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노예적 사고에 익숙하게 만들고, 그 결과 인간의 지혜를 흐릿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역사 과정 속에서 서서히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낡은 기계, 낡은 메커니즘이 기적처럼 새로운 역할에 유용할 것이라고 우리가 믿기를 원한다. 즉 그것들이 느닷없이 무기와 기반이 되어,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이 창조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경제적 기초 위에 자유와 평등이 확립되고, 사회의 각성과 더 나은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
사회주의의 폭넓은 성장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협소한 소상인적 개인주의에 기초한 현대사회를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 문제는, 가끔 형이상학적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노동의 모든 생산물을 노동자에게 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 장로들 혹은 역장에 대한 주민들 각각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수공업자들, 농촌 마을들, 도시들, 주들 사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공장, 철도, 농촌 마을, 식료품 창고, 소비와 생산, 분배에서 이 모든 것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거리에서, 모든 마을에서, 공장 혹은 철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그룹 속에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그리고 조직된 정신이 각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최초로 현대 사회조직에, 상업 혹은 행정제도에 손을 대기로 결정한 그 시간부터 개인들과 인간 그룹들 사이의 모든 관계는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민중적 창조의 자유로운 활동을 요구하는 이 거대한 파업을 국가의 틀 속에 억지로 밀어 넣기를 원한다. 또한 국가의 본질을 구성하는 피라미드 조직으로 구속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본 것처럼, 국가의 존재 의미는, 개인의 억압에, 모든 자유로운 조직화와 자유로운 창조의 파괴에, 모든 개인적 자기주도에 대한 증오에 그리고 유일한 이념의 (이 유일한 사상은 필연적으로 평범성의 이념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승리에 있다. 그들은 이러한 국가 혹은 메커니즘으로부터 거대한 변화의 실현을 위한 무기를 만들기를 원한다! 그들은 명령을 통해, 선출된 다수를 통해 모든 사회적 개혁을 관리하기를 원한다! 이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
우리 문명의 역사에는 두 흐름, 두 적대적인 전통이 있다. 그것은 로마적 전통과 민중적 전통, 황제적 전통과 연방적 전통, 권력의 전통과 자유의 전통이다. 그리고 거대한 사회혁명 전야인 지금도 이 두 전통은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민중적 흐름 혹은 정치적 종교적 지배를 열망하는 통치지향적 소수의 흐름, 서로 싸우는 이 두 흐름 중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 것인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선택은 이루어졌다. 우리들은 자유로운 합의에, 개인의 자유로운 자기주도에, 필요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연합에 기초한 조직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그 흐름에 찬성한다. 다른 사람들이 원한다면 교회법과 황제 권력의 로마전통을 고집하게 놔두어라!
역사는 유일한, 중단되지 않는 발전과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때로 발전은 세계의 한 부분에서는 중단되고, 다른 부분에서 재개되기도 한다. 이집트, 아시아, 지중해 연안, 중앙유럽은 차례로 역사 발전의 무대였다. 매번 발전은 원시종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에 자유로운 도시들의 시대가 등장했고, 마지막으로 국가의 시대가 왔다. 국가의 시대에 발전은 일정기간 계속하다가 그 후에는 급속히 소멸되었다.
이집트에서 문명은 원시종족 사회에서 시작되어, 마을공동체 단계에 도달하였고, 그 후에 자유도시의 시기를 경험했으며, 나중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국가는 일시적인 개화 이후에 나라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발전은 아시리아, 페르시아, 팔레스타인에서 다시 시작되었고, 다시 원시종족, 농촌공동체, 자유도시, 강력한 국가의 단계를 지나 멸망에 이르렀다!
새로운 문명은 그리스에서 발생하였다. 다시 원시종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농촌공동체를 거쳐, 그리스 문명은 공화도시의 시기로 들어갔다. 이 단계에서 그리스 문명은 완전히 개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쪽으로부터 동방 전제전통의 독을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전쟁과 승리는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제국을 창조하였다. 국가가 수립되어 문명으로부터 생명의 즙을 빨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끝, 즉 죽음이 도래할 때까지!
그때 문명은 로마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원시종족으로부터의 태동을 만나게 된다. 그 다음에는 농촌공동체와 자유도시가 뒤를 잇는다. 다시 이 단계에서 로마 문명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다음에 국가, 제국이 등장하고 이와 더불어 끝, 죽음이 왔다!
로마제국의 폐허 위에서 문명은 켈트족, 게르만족, 슬라브족, 스칸디나비아족 사이에서 다시 태어났다. 농촌공동체를 형성하기 전까지 원시종족들은 천천히 자신들의 제도를 만들어갔다. 그들은 12세기까지 이 단계를 살았다. 그때 공화적 자유도시들이 생겼다. 이 도시들은 인류 지혜의 찬란한 개화를 실현하였다. 이에 대해 증명하고 있는 것은 건축가들의 기념물, 예술의 발전, 우리의 자연과학의 토대를 놓은 발견들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국가가 무대에 등장하였다. 다시 죽음이 왔을까? 그렇다, 그것은 죽음 혹은 재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유롭고 반국가적인 토대 위에 사회를 재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둘 중의 하나. 국가는 폐지되어야 하고, 그러한 경우에 정력적인,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주도권에 기초한 수천의 중심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혹은 국가는 개인과 지방적 삶을 압살할 것이다. 국가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권력 장악을 위한 전쟁과 내적인 투쟁을 수행하고, 폭군들을 교체하기만 하는 피상적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끝, 죽음이 온다!
스스로 선택하라!
[1] 나는 1896년 봄 파리에서 예정된 강연을 위해 이 글을 썼다. 그러나 프랑스에 입국할 때 체포되어 추방되었기 때문에 강연을 할 수 없었다. 당시의 강연 원고를 약간 다듬어 논문으로 만들었다.(크로포트킨)
[2] 역주 - 크로포트킨이 ‘신생 야만 문명’이라 표현한 것은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나타난 신생 유럽 문명을 의미한다. 여기서 ‘야만’으로 번역한 ‘Barbarian’은 어원적으로 그리스인의 관점에서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외국인의’를 의미하며, 비 그리스인 혹은 비로마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Barbaria/barbarus’에서 유래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단어는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의 중세를 열었던 게르만족을 주로 의미하며, 크로포트킨도 이런 관점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3] 이러한 입장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내 저서인 『상호부조론(Mutual Aid), 2판, 1904』와 이것의 독일어 번역인 『상호부조론(Gegenseitige Hilfe), Leipzig, 1904』에서 볼 수 있다.
[4] 역주 - 아르헨티나 남부에 위치한 파타고니아 초원지대의 원주인.
[5] 야만인의 법이란 개념은 보통 ‘랑바르덴(Langbarden : 긴 수염)’족과 바바리아족 등이 만든, 지금까지 살아남은 법을 의미한다. 우리의 『야로슬라프 러시아법』도 이에 속한다. 분량 때문에 나는 ‘비분화가족’에 대한 서술은 제외하였다. 이것은 매우 넓게 퍼져있는 생활공동체로, 인도에 많이 발견되며, 중국 가정생활의 토대를 이룬다. 우리의 경우에는 ‘세메이스키예’, 즉 자바이칼리야의 구교도들이 이에 해당된다. 비분화가족은 씨족과 농촌공동체 사이에 위치한다.
[6] 역주 - 알제리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
[7] 역주 - universitas, 라틴어로 조합, 단체를 의미한다.
[8] 러시아와 관련된 사항은 벨라예프의 『러시아 역사 이야기』를 보라.
[9] 역주 - Cinque Ports. 영국 남해안의 특별 항구. 원래는 5개 항이었으나 후에 2개 항이 추가됨.
[10] 역주 - 바이외(Gayeux). 프랑스 바스노르망디주의 칼바도스 데프르트망(Department)에 있는 도시로 장식품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11] 역주 - Konung. 왕을 의미하는 옛 북유럽어.
[12] 코스토마로프의 『러시아에서 군주제의 기원』을, 특히 『유럽 통보』에 게재된 것을 참조하라. 코스토마로프는 자신의 「자료집」 출간을 위해 이 논문을 부드럽게 고쳤다. 아마 검열의 요구 때문인 것 같다.
[13] 역주 - Saxum Tarpeium. 로마의 카피톨리움 남서쪽에 위치한 절벽으로, 이곳에서 범죄자를 떨어뜨려 죽였다.
[14] 역주 - Jacquerie. 백년전쟁 중 북프랑스에서 발생한 농민폭동. 자크리는 당시 농민의 대표적인 이름이었던 자크를 집합명사화한 명칭이다.
[15] 역주 - Anabaptist. 재침례파(再浸禮派)라고도 한다. 신앙고백이 불가능한 영유아 시기, 관습적인 세례가 아닌 자각적인 신앙고백 이후의 세례만이 유일한 세례라고 주장한다.
[16] 역주 - 러시아의 이반 4세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된 정치적 혼란의 시대(1584-1613).
[17] 역주 - Kanton. 스위스의 행정 단위.
[18] 역주 - 루이 14세는 농촌공동체가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경작한 것을 “멋대로 토지를 점유하였다.”고 비난하고 있으며, 이러한 비난을 구실로 농촌공동체의 수입을 강탈했다.
[19] 역주 - convention nationale. 프랑스 제1공화국의 최고 입법-행정기관(1792-1795).
[20] 역주 - 프랑스 혁명정부를 무너뜨린 테르미도르(혁명력의 11월) 9일의 쿠데타 사건(1794.07.27.).
[21] 역주 - Prarial(프레리알 : 목장의 달, 풀의 달). 1793-1805년 사이에 사용되었던 프랑스 혁명력의 9번째 달로, 5월 20/21-6월 18/19일에 해당한다. 본문의 “다섯 번째 해 프레리알 2일”은 1797년 5월 21/22일이다.
[22] 역주 - 이것은 소위 영국의 인클로저(enclosure) 운동과 관련된 법령으로, 공동이용이 가능한 토지에 담이나 울타리 등의 경계선을 쳐서 남의 이용을 막고 사유지로 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결과 농민들은 지주에게 땅을 빼앗기고,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고 후에 공업노동자가 되었다. 모직물 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강제로 농토를 목장으로 전환시켜 양모의 생산을 증진시키려 했던 이 정책은 농촌을 몰락시켰고, 농민을 값싼 노동자로 전락시켜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23] 심지어는 지금도, 바로 1903년에, 보수당 정부에서 파업권은 다시 박탈되었다. 최고 심판기관인 영국의 상원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파업이 났을 때, 노동조합이 파업노동자를 대체하기 위해 투입된 노동자들을 만류하였다는 것이 - 힘으로 위협하지 않고, 보초가 단지 만류하기만 해도 - 증명된다면, 노동자는 고용주가 입은 손실을 배상하여야 한다. 유명한 태프 베일(Taff Cale) 파업에서도 노동조합은 고용주들에게 5만 푼트를 - 50만 루블 이상을 - 배상하였다고 한다. 최근에도 그와 유사한 일이 발생하였다. 노동조합은 30만 루블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소송을 끝낼 수 있었다.
[24] 역주 -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비극 「돈 카를로스(Don Karlos)」의 등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