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어느 아나키스트의 죽음
프롤로그
장례식
밤늦게 시체 한 구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기 때문에 관을 수행해 온 자동차들은 진흙투성이였다. 영구차를 덮고 있는 흑 · 적색기도 흙탕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혁명 전까지 바르셀로나 상공회의소 본부로 사용되었던 이곳 아나키스트의 저택에는 이미 전날부터 장례식을 치를 준비가 한창이었다. 현관 입구는 관대를 들여놓을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모든 일이 기적같이 제시간에 이루어졌다. 내부의 장식은 단순했으며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벽에는 흑 · 적색 천이 드리워져 있었고 같은 색으로 된 천개天蓋, 몇 개의 촛대, 꽃과 화환, 이것이 전부였다. 많은 조문객이 드나들 양 측면 문에는 스페인의 풍습에 따라 커다란 판지가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두루티가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두루티가 안녕히 가라고 하십니다.’
민병대가 세워 총 자세를 한 채 관대를 지켰다. 마드리드에서부터 관을 수행해 온 사람들이 집안으로 관을 들여놓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정문 앞에 운집해 있는 군중들 사이로 길을 내보려고 애썼지만 어느 누구도 높다란 정문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관을 옮기는 사람들은 작은 옆문으로 몸을 밀치며 들어가야만 했다. 장식물이 걸려 있지 않은 실내 발코니에서는 호기심에 가득 찬 구경꾼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기대에 찬 극장 안의 분위기였다.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자를 벗었지만 어떤 이들은 아예 벗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시끄러웠다. 전선에서 온 민병대원들은 그들의 동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보초병들은 참석자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장례식을 책임진 사람이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사람이 군중들 틈에 걸려 비틀거리다가 화환 위로 넘어졌다. 관 뚜껑을 들어 올리는 사이에 관을 옮겼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루티의 얼굴이 하얀 숄을 가득 채워 넣은, 유리 밑 하얀 명주 위에 드러났다. 그 모습은 아랍인처럼 보였다.
장례식 장면은 슬프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하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고야의 부식 동판화와도 같았다. 나는 지금 그때의 장면을 본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스페인 민중에게 깊은 감명을 준 장면이었다. 스페인에서 죽음이란 친구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일이다. 그래서 죽음은 법석을 떨 일이 못 된다. 스페인 사람들은 친구를 특별하게 사랑하지만 그들이 죽음을 당했을 때 애도하기 위해 달려가지는 않는다. 그들은 죽음이 그저 정해진 대로 왔다가 갈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성당의 예배 의식에 밀려 수백 년 동안 사라졌던 무어인들의 옛 전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두루티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는 전 민중의 우상이었다. 그는 정말로 대단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온 모든 사람들은 그를 잃은 것을 슬퍼했고, 그의 죽음 앞에 조의를 표했다. 그 당시 나는 프랑스 여인인 두루티의 부인 외에도 목 놓아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늙은 청소부 아줌마였다. 그녀는 사업가들이 드나들었던 이 집에서 그때까지도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생존 시에 두루티를 만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밤이 깊어가면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두루티의 관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들의 친구였던 지도자가 죽은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심중에 고통의 감정과 호기심이 얼마나 엇갈려 있는지 감히 헤아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들뜬 감정이 아니라 고인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장례식은 다음날 오전에 거행되었다. 두루티에게 죽음을 가져온 그 탄알이 바르셀로나의 심장부를 건드렸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도시 4번가의 주민들 모두가 그의 관을 뒤따랐다고 생각된다. 거리를 서성거리거나 발코니나 창문에서 내다보고 있는 사람들, 산책로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 모든 당파와 노동조합들이 노선을 떠나서 그 거리로 모여들었다. 군중들의 머리 위에는 아나키스트의 깃발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모든 반파쇼 조직의 깃발들이 형형색색 휘날렸다. 그 광경은 대단히 위대하고 숭고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기가 막히기도 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군중들을 조직적으로 인도하거나 질서를 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웠다. 그야말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혼란이었다.
장례식은 열시에 거행하기로 짜여 있었다. 발인식이 거행될 아나키즘 지역위원회의 집에 제 시간에 도착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한 시간 전에 확실해졌다.
장례행렬이 지나가야 할 도로가 인파로 인해 막힐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모든 공장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사방의 도로가 막혀버렸다. 행렬을 호위하기로 된 기마기병대와 오토바이들은 운집한 노동자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화환으로 덮인 자동차가 멈추어 선 채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장관들만이 간신히 길을 터 관에 접근할 수 있었다.
열시 반에야 종대로 줄지은 민병대원들이 흑 · 적색기를 덮은 두루티의 관을 어깨에 메고 아나키스트들의 집을 나섰다. 군중들은 마지막 작별인사로 하늘을 향해 주먹을 뻗어 올렸다. 그들은 ‘인민의 아들Hijos del pueblo’이라는 아나키즘 노래를 불렀다. 엄청난 감동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착오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초청되어 있었다. 한 오케스트라는 작게, 다른 오케스트라는 크게 연주하였다. 그러나 서로 박자를 맞출 수가 없었다. 오토바이가 부르릉거렸고 자동차는 경음기를 울리기 시작했다. 민병대 간부들이 호루라기를 불어댔지만 관을 옮기는 사람들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혼잡한 상황에서 장례식 행렬이 나아가기는 불가능했다. 두 오케스트라는 똑같은 곡을 여러 번 연주하였다. 서로 화음을 맞추려고 애를 쓰다가 아예 포기해 버렸다. 소리는 들렸지만 도대체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방에는 아직도 뻗어 올린 주먹들이 보였다. 마침내 음악이 그쳤고 주먹들도 내려졌지만 군중들의 시끄러운 소리는 여전했다. 동지들의 어깨에 메인 두루티의 관은 군중 한가운데 있었다.
행렬이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로에 이르기까지 삼십 분이 넘게 걸렸다. 불과 2백 미터 정도 떨어진 카탈루냐Cataluña 광장에 도착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기마병들은 제각기 앞길을 터 가기에도 바빴다. 군중들 속에서 흩어진 악사들이 다시 모이려고 애를 썼다. 길을 잃어버린 자동차들은 길을 찾으려고 후진했다. 화환으로 덮인 자동차들은 장례행렬을 피해 우회도로를 이용했다. 모두가 목청껏 소리를 질러야 겨우 서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왕의 장례식이 아니라 민중이 떠맡은 장례식이었다. 모든 일이 명령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하루였다. 단순히 한 아나키스트의 장례식이었지만 거기에는 그에 대한 특별한 숭배가 있었다. 혼란스러운 측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독특하고도 엄숙한 숭배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한때 두루티와 가장 가까웠던 동지 중 하나가 쓰러졌던 바로 그 투쟁의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콜럼버스 공동묘지의 입구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세 동지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가르시아 올리베르(Juan García Oliver)가 동지로서, 아나키스트로서 그리고 스페인 공화국의 법무장관으로서 말문을 열었다. 그 다음에 러시아 영사관이 말을 이었다. 그는 카탈로니아 방언으로 다음과 같이 외치며 자신의 조사를 마쳤다. “파쇼에게 종말을!” 조합총연맹의 의장을 맡고 있던 콤파니스가 마지막으로 조사를 하였다. 그는 “동지여!”로 시작하여 경건한 기도 문구인 “먼저 가소서!”로 끝마쳤다.
조사가 끝나면 장례행렬이 흩어져 돌아가리라고 예상했다. 그저 두루티의 친구들 몇 명만이 공동묘지까지 영구차를 따르겠거니라고. 그러나 이런 예상은 빗나갔다. 군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묘지를 가득 메우고 무덤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간신히 길을 낼 수가 있었다. 공동묘지의 산책길은 수천의 화환으로 넘쳐흘러 지나갈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묘지가 금세 수렁으로 변해 버렸다. 이 수렁 속에 화환들이 잠겼다. 결국 장례식의 마지막 행사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관을 옮기던 사람들이 무덤 앞에서 돌아서서 관을 시체 안치소로 옮겨놓았다.
두루티는 그 다음날에야 비로소 무덤에 묻혔다.
카민스키(H. E. Kaminski)
짧은 해설 1
집단적 허구로서의 이야기
“그의 생애는 흡사 모험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것이기 때문에 감히 어느 작가도 그의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지 못했던 것 같다.” 이것은 일냐 에렌부르크(Il'ja Grigor'evič Ėrenburg)가 부에나벤투라 두루티를 알게 된 1931년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즉시 집필을 시작했다. 자신이 두루티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를 다음과 같이 몇 문장으로 기록했다. “그 금속 노동자는 이미 소년 시절부터 혁명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는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서기도 했고, 은행을 습격하기도 했다. 폭탄을 던지기도 했고 판사를 유괴하기도 했다. 그는 세 번씩이나 사형 언도를 받았다. 한 번은 스페인에서, 한 번은 칠레, 또 한 번은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수없이 투옥되었고 8개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계속 써나갔다. 이 이야기의 서술자가 ‘모험소설’을 기피하는 것은 그가 뭔가 꾸며내는 것을 중단하고 정말 ‘진실’을 말할 때조차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거짓말쟁이로만 여길 것이라는 해묵은 불안감에 기인한다. 적어도 이번만은 사람들이 그가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믿어주기를 원하지만, 이때도 예전의 그의 작품이 일반 독자에게 느끼게 했던 그 의구심이 재발할 것 같은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한번 거짓말을 한 사람은 진실을 말할 때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두루티의 이야기를 서사화할 수 있으려면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결국 허구를 거부하는 태도에는 두루티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는 점과, 모험소설을 기피하고 나면 남는 것은 스페인의 어느 카페에서나 들을 수 있는 모호한 대화 정도에 그칠 뿐이라는 점에 대한 아쉬운 감정도 배여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들어 알고 있는 것을 침묵으로 완전히 덮어 놓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들은 이야기들에 매혹되어 그는 이야기의 전달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가 이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던가? 에렌부르크는 이와 관련된 어떤 자료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가 쓴 몇 줄의 글은 떠도는 소문을 근거로 한 것이지만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다. 그것은 얼굴도 이름도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 즉 집단의 소리인 셈이다. 그러나 이 익명의 모순투성이 이야기들이 조화롭게 구성되면 새로운 양태를 획득한다. 즉 이야기들로 구성된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태고 적부터 역사란 이런 식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말하자면 전설로, 서사로, 집단의 소설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과학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우리가 구전의 전통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된 이후부터, 즉 통첩의 교환, 계약 문서, 증빙 서류 등과 같은 ‘실증 자료’가 있게 된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쓴 역사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 교과서에 대한 불만은 원초적인 것이며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학교 수업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일반 대중들에게 역사란 이야기들의 묶음에 불과하다. 이들에게 역사는 사람들이 기억 속에 담아두고 있는 것, 즉 읽고 들은 이야기의 재현일 뿐이다.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는 어떤 신화도, 사소한 일상도, 착각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과거의 싸움들에 대한 상상이 덧붙여지기 십상이다. 이 점에서 과학은 그림책이나 질 낮은 잡지책 앞에서 무색해지고 만다. “나는 여기 어쩔 수 없이 서 있다.” “그래도 돌고 있다.” 이러한 문장들의 의미는 어떤 연구로도 해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는 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 문장이 충분히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파리 코뮌과 철옹성의 진입, 기요틴의 당통, 멕시코에서의 트로츠키 이야기가 역사에 있다. 이들 인물에 대한 이미지에는 과학보다 집단적 상상력이 더 많이 작용한다. 우리에게 길고 긴 역사의 행진은 궁극적으로 이 긴 행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일 뿐이다. 역사는 현실로부터 그 자료들을 제공받는 창작물Erfindung이다. 그러나 그것은 임의적인 창작물이 아니다. 이 창작열을 고무하는 것은 역사를 이야기로 서술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다. 그리고 이 창작물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관심사뿐만 아니라 적들의 관심사를 재인식시키고, 그 성격을 좀 더 정확히 규정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역사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자를 파는 쉴레밀, 즉 창작의 인물이다. 우선 역사의 진정한 주체가 하나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이 주체는 그 그림자를 집단적 허구로서 역사 앞에 드리우는 것이다.
두루티의 소설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사실의 자료들을 모아놓은 전기傳記가 아니며, 과학적 담론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서사 범위는 한 개인의 관점을 넘어선다. 물론 그 범위는 구체적 상황과 관계되지만 두루티라는 인물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그의 투쟁이 그의 삶을 규정한다. 즉 그것은 두루티의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또한 역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그의 모든 행동과 언술들, 투쟁의 개입에서 맺어진 관계를 전달해 준다. 두루티에 관하여 전해지는 모든 이야기는 그의 독특한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그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적을 포함하여) 기억과 그와의 관계를 더 이상 사실로서 확인할 수는 없다. 반면에 들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을 빌려 재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은 개인에게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 즉 그것은 한 남자의 실존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는 서른다섯 나이에 사망했고, 그가 남긴 유품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속옷 몇 가지, 권총 두 정, 망원경, 선글라스, 이것이 유품으로 등록된 전부였다.” 그 밖의 물품들은 남아 있지 않다. 고인이 글로 남긴 진술이라고는 거의 없다. 그의 삶은 행동,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행동은 정치적인 것이어서 대부분이 불법적이었다. 따라서 문제는 한 세대가 지나가 버렸기에 더 이상 명확하지 않은 그의 실천의 자취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 자취는 퇴색되어 거의 잊혀 가고 있다. 그러나 비록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의 자취는 수없이 많이 남아 있다. 구전되던 그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둔 글들이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문서실과 도서관에 묻혀 있다. 물론 여전히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들도 있다. 고인을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생존하고 있다. 이들을 찾아내서 이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이런 방식으로 모을 수 있는 자료는 무척 다양하다. 형식, 억양, 제스처, 관록 등이 단편 단편으로 교차될 수 있다. 콜라주 소설은 르포, 연설, 인터뷰, 선언문 등을 수용한다. 이런 소설은 편지, 여행 일기, 일화, 선전 삐라, 반박문, 신문기사, 자서전, 플래카드, 선동 팸플릿 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런 형식에서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모순은 그 자료들 사이에 틈새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재구성이란 퍼즐놀이와 같다. 퍼즐의 각 부분은 이음쇠 없이 연결될 수 없다. 바로 이런 까닭에 각 영상들의 연결을 고집하는 것이다. 아마 그 집합점들 안에 진실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화자가 사실을 모를 경우 이야기는 이와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가장 손쉬운 일이라면, 바보처럼 이 책의 모든 내용은 다큐멘터리라고 주장해 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빈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좀더 꼼꼼히 관찰한다면, ‘다큐멘터리’에서 확보할 수 있는 신뢰성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누구의 이익을 위하여 말하고 있는가? 그는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가?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확신시키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는 대체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술된 순간과 서사의 순간 사이에 몇 년이 흘렀는가? 화자는 무엇을 망각하였는가?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어디에서 알게 된 것인가? 그는 그가 본 것, 혹은 그가 보았다고 믿고 있는 것을 서술하는가? 그는 또 다른 화자가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것을 서술하는가? 이런 식으로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얼마든지 더 있다. 그런데 이 물음에 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각 증인들에게 수백 가지를 더 물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끝도 없이 검증하려다 보면 이야기의 재구성은 고사하고 해체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고 말 것이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애써 찾아내려 했던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가. 아니다. 자료의 진실성에 대한 물음은 원칙적인 것으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자료의 비판을 통해 자료가 진실과 차이가 난다고 해서 그것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 ‘거짓’에도 진실의 계기가 들어 있으며,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의 진실성은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 진실성도 그 이상의 것을 증언해 주지는 않는다. 전해지는 이야기를 투명하게 하는 것, 즉 집단의 이야기를 선명하게 빛내는 것은 역사 자체의 변증법적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역사 대항력의 미적 표현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재구성자로서 많은 것들이 소멸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런저런 식으로 일어난 사건과 서사의 과정에서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사건을 재구성하는 긴 행렬의 서술자 가운데 최후의 (아니 오히려 마지막에서 두 번째의) 사람이다. 그는 자신보다 앞섰던 모든 사람들처럼 어떤 관심을 나타내어 그것이 설득력을 발휘하도록 하려 할 것이다. 그는 비당파적일 수가 없기 때문에 서사에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가 다른 역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역사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이미 그의 최초의 개입이 드러난다.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서 드러나는 그의 관심은 완벽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재구성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혹은 자신의 의향과는 반대로 자료를 생략 · 해석 · 분해 · 조립하여, 발견한 허구들의 집합 속에 자신의 허구를 삽입하였다. 다만 그의 허구는 다른 허구에 자신의 것을 덧붙인다는 점에서만 타당성을 지닐 뿐이다. 재구성자가 신뢰성을 얻는 것은 그가 이 작품의 주인공을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는 두루티를 몰랐고 두루티의 역사적 상황 속에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는 상황을 더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 마지막 말을 비밀로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수정할 사람은 바로 독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이야기에 동의하든 부정하든, 그 내막을 잊고 있든 기억하고 있든, 소홀히 하고 있든 계속 이야기하려고 하든, 이 이야기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이며, 비록 잠시라 할지라도 최종적인 결론자인 셈이다. 재구성자의 자유도 역시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가 앞서 발견한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그의 앞에서 천칭운동만 하면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순수 객체로서만 존재하는 그런 단순한 ‘자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은 수많은 손을 거친 것이며, 이용된 흔적이 역력하다. 이 소설은 이 책의 끝에 명기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쓰인 것이다. 독자는 이들 가운데 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최후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감히 어느 작가도 이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지 못했던 것 같다.”
빗나간 아이들
두 가지 모습을 지닌 도시
로마 가톨릭의 주교 본부가 있으며, 스페인의 지방 이름과 동일한 주의 수도인 레온León 시는 레온 강을 형성하고 있는 토리오Torio 강과 베르네스가Bernesga 강의 합류지인 해발 8백51미터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1900년 당시의 인구는 1만 5천5백80명이었다. 이 도시는 마드리드와 오비에도Oviedo 시를 연결하는 급행열차를 운행한다.
성당과 중세의 여러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이 지역은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19세기 중엽에 혁명이 발생한 적도 있었지만 소실된 건축물은 하나도 없다. 당시 성벽 바깥에서는 공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모여 도시 외곽을 형성하였다. 그곳의 주민들은 철물, 철도건설, 화학과 가죽제품 등의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외지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이처럼 레온 시는 오랜 전통의 로마 가톨릭적 성격과 동시에 신흥 공업도시라는 두 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두루티가 출생한 산타아나Santa Ana 구역에는 낡고 작은 집들이 모여 있다. 이곳은 프롤레타리아트 구역이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청 직원이었고, 그의 형제들도 거의가 철로작업을 하였다. 두루티도 마찬가지였다.
이 도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주교 본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신부들의 뜻에 반하는 모든 이념과 행동은 억압받았다. 레온 시는 한마디로 말해서 오랫동안 교회가 지배해 온 스페인 군주정의 작은 성이었다. 산업은 거의 빈사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주민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막강한 수비대, 치안경비대의 여러 분소들, 수많은 수도승들, 로마 가톨릭 대성당, 주교의 호화저택, 도제 수업원, 수의사 학교, 안정과 질서를 바라는 소부르주아지 계층, 이것이 전부였다. 이곳의 환경은 어떤 이탈된 사상이나 저항적인 기질도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이주뿐이었다. 두루티라는 소년은 레온 시에서는 결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아주 미온적이어서 별로 해가 되지 않는 공화주의자들을 벌써 잠재적인 극단주의자들 내지는 풍파를 일으킬 인물들로 간주했던 곳이 바로 우리의 소년이 살았던 레온이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Diego Abad de Santillán)
여동생에게서 얻은 정보
1.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1896년 7월 14일 레온 시에서 태어남.
2. 형제, 7남 1녀. 1969년 현재 두 남동생과 여동생이 생존하고 있음.
3. 직업 : 기술공
4. 이력서 : 다섯 살에 레온 시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 언제나 착한 학생이었음. 똑똑하고 의협심도 강했다. 레온 시의 카푸친 대부의 일요학교에도 다녔다. 여기서 여러 과목을 수강하였고 수료증을 받았다. 그것을 어머니가 애지중지 보관해 왔다. 1910~1911년 멜초르 마르티네스(Melchor Martínez) 씨의 공장에서 일당 25센티모Centimo를 받고 일했다. 내가 기억하기에 그는 25센티모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 보수가 노동에 비해 턱없이 적은 액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어머니는 그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곳에서 그가 독립할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그는 야간학교에 다녔고 여가시간은 대부분 독서와 공부로 보냈다. 그 후 안토니오 미아하(Antonio Miaja) 씨가 운영하는 주물공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1916년까지 일했다. 그러고 나서 북 스페인의 철도회사에서 견습공 생활을 마치고 1916년에 기술공으로 정식 취직을 했다. 1917년 파업 후에 그는 해고되었다. 스페인을 떠나 파리로 가서 1920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 후 다시 돌아와 레온의 한 지방인 마탈랴나 데 토리오Matallana de Torio에 있는 한 탄광회사에 정화시설 설비기술자로 취직했다. 그는 병역의무를 치러야 할 나이에 파리에 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병역기피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고, 스페인에 귀국했다가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키가 컸고 건장했으므로 요새 포병으로 차출되었으나 탈장증脫腸症이 있어 제대를 하게 되었다.
5. 소견 : 이후의 생활도 마찬가지였지만, 청년 시절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는 가족에게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들에게 어머니가 안심하고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훌륭한 직장을 구하고 파업에는 가담하지 말라고 조용히 타이르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아주 공손했고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를 매우 사랑했다. 집에서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언제나 레온의 시민들로부터 존경과 동정심을 받았다. 우리는 내란 이후 모든 신분제도를 경멸하게 되었다. 내란 전에 아버지는 철도청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레온 시의 개발사업 때 철도청에 자리를 얻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1931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1968년 아흔한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물론 아버지는 그 도시에서 명망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프리모 데 리베라(Primo de Rivera) 독재 치하에서 아버지는 라이문도 델 리오(Raimundo del Rio) 시장이 이끈 시의회의 부시장이 되기도 했다.
로사 두루티(Rosa Durruti)
동창생
두루티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 우리는 동지가 되었고 형제가 되었다. 두루티와 나의 관계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훨씬 전, 그러니까 첫니가 났을 때부터였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사는 꼬마들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아주 일찍 돌아가셨다. 그때 내 나이가 일곱 살 아니면 여덟 살쯤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죽자 두루티의 어머니가 나를 보살펴주었다. 나는 그들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그 당시 우리는 그녀를 빼빼 아줌마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두루티를 빼빼, 혹은 빼빼 두루티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플로렌티노(Florentino)라는 소년에게는 이제 친어머니가 없었다. 두루티가 나를 단순한 소꿉친구나 형제 이상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그에게 나는 친형제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두루티의 학교 성적은 매우 좋았다. 그는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우리는 그 당시 벌써 보통 학생의 수준을 능가했다. 하루는 선생님이 두루티의 어머니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아드님은 더 이상 여기서 배울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것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신다면 그 애는 큰 인물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아주 똑똑합니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외에도 우리가 어렸을 때 어땠는지 알는지? 당시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식으로 한다면 빗나간 아이들이었다. 이웃 사람들은 우리 둘을 두고 기대할 것도 없는 싹수가 노란 녀석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은 약과였다. 심지어 도둑놈들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들이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 연유는 이러했다. 우리는 언제나 과수원에 몰래 침입했다. 특히 두루티는 과수원의 과일을 따와 언제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레온 시에 큰 과수원을 가진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는 우리를 붙잡으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야, 나무 위에 있는 놈들!”―그는 우리들을 그렇게 불렀다―“네 이놈들, 썩 꺼지지 못해!” 그러면 두루티는 나에게 “저 늙은 영감탱이, 망 잘 봐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과수원 주인이 “야, 이놈들아 내 말이 들리지 않는겨?”하고 소리 지르면, 두루티는 “잘 들리는구먼요!”라고 대꾸했다. 주인이 “어서 썩 꺼지지 못해!” 하면 두루티는 “잡을 테면 잡아보시지요.”라고 대꾸했다. 주인이 “야, 이놈들아, 이건 내 농장이야!”라고 말하면, 두루티는 “앗다, 그러면 내 농장은 어디 있는감유? 어째 나는 농장이 없소이?”라며 입씨름을 했다. “네놈들 몽둥이맛을 좀 봐야겠구나.” “그래 보시지,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볼 만할 거요.” 이런 식으로 우리 몇몇은 과일을 따갔다. 대개 우리는 그 과일들을 선물로 나눠주었고, 그 일이 재미있었다. 특히 두루티는 그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을 원했던가? 당시 열네 살 나이에 이미 그는 일하러 나가야 했으며,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나마 가족을 도와야만 했다. 그의 아버지는 북 철도청에 취직해 있었다. 그래서 두루티는 열여섯 살인가 열일곱 살 때 이미 그의 청춘을 철로작업에 바쳤던 것이다. 물론 당시 그 일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인건비가 당일로 지불되었기 때문에 철로작업은 안정된 일자리처럼 보였다. 기술공이라면 그것은 특히 안정된 직업이었다.
두루티는 철도청에서 일하기 전에 이미 열네 살 때 레온 시에 있는 몇몇 공장과 미아하 씨의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곳에서 벌써 그는 아스투리아 출신의 노동자들을 사귀어 알고 지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정을 두루티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두루티는 그 이야기들을 자세히 듣고 나서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아스투리아에서 왔기 때문에 부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 번 하려면 주말에 집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플로렌티노 몬로이(Florentino Monroy)
총파업
1917년 총파업이 터졌다. 당시 스페인 전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이미 우리는 그 낌새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레온 시의 사회주의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조합이라고는 없었다.
우리는 조합이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오게 하기 위하여 그 사건에 미약하나마 바람을 불어넣은 최초의 선동자였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투표용지에만 의존하는 선거에 의해 사회가 개선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때, 바로 그때는 여러분이 완전히 다른 일을 도모해야 할 때라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1917년 파업이 터졌을 때, 우리의 나이는 기껏 열아홉이었다. 폭력적이었을까? 그 파업이 폭력적인 파업이었을까! 우리는 폭력을 선동했다. 정부는 우리를 군대에 징집하였다. 파업은 밤사이에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한밤중에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전국에서 치안경비대가 노동자들을 진압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파업이 아무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에게 특별한 무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장을 하였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군인들에게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군인들이 이미 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역은 도시 쪽 강 건너편에 있었다. 벌써 날은 저물었다. 우리는 무장한 군인들의 무기가 차갑게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하늘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빵! 핑―빵, 핑―빵. 그것은 전쟁과도 같았다. 우리에겐 그것이 재미있었다.
금방 우리는 치안경비대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작은 연발권총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레온 시 중심에 있는 쌍 고압전선주를 찾았다. 그것은 매우 높았으며 전망이 좋았다. 고압전선주 바로 앞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서 있었다. 우리는 각자 모자와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집어넣고서 높이 기어 올라가 감쪽같이 숨어서 기다렸다. 우리는 돌멩이를 경찰에게 던졌다.
경찰은 돌이 어디에서 날아오는지 몰랐기 때문에 미친 듯이 날뛰었다. 돌이 아스팔트에 부딪히자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사방에서 돌이 날아들었으니! 경찰들은 말을 타고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붙잡지 못했다.
수적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효과는 좋았다. 피동적인 투쟁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혁명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고, 이후 그 분위기는 노동자국민연합(CNT, 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물론 두루티는 당시에 이미 이 투쟁의 선동자가 되어 있었다.
플로렌티노 몬로이
노동조합들
사회민주당이 배후 조종했던 관제노조인 철도노동조합은 1917년 총파업의 책임을 물어 두루티와 그의 몇몇 동지들을 해고하였다. 그들은 젊은 혈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총파업이 정치 권력자들의 계략에 넘어갔다고 파업의 결과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라르고 카바예로(Largo Caballero), 베스테이로(Besteiro), 앙히아노(Angiano), 사보리트(Saborit)와 같은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이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잠정적인 과격 노동자들의 손과 발을 묶어 그들을 쉽게 철도회사 측에 넘겨주기 위해 위장파업을 사주했던 것이다.
이런 비열한 기만적 연극을 통해 파업문제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결의하기 위하여 정치 권력자들은 의회를 소집할 명분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아나키스트 노조원들을 철도노조에서 탈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개량주의적인 계략에 의해 소집된 의회와, 이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민주당을 거부하고 노조의 혁명노선을 위한 명확한 투쟁을 선언하였다.
두루티는 그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이고 투쟁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기업가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전면적인 사보타주를 전개했다. 자동차가 불탔고 문서들은 찢겨져 나갔으며, 격납고와 창고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밖의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전술은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물건들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 사보타주가 확산되고 있는 동안 사회주의자들은 파업의 종결을 선언했다.
두루티를 포함하여 파업을 주동했던 조직원들은 직장을 잃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노조가 창립한 노동자국민연합(CNT)이 이미 성장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조직에 동조하여 연대투쟁을 벌여나갔다. 두루티는 사회민주당의 아성인 아스투리아 탄광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CNT 아나키즘 노선을 위해 중립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노조위원들과 투쟁했다.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다시 직장을 잃고 프랑스로 망명해야만 했다.
데 롤(V, de Rol)
나는 아나키즘의 발족을 아스카소(Ascaso)와 두루티의 공적으로 돌렸다. 내가 처음 두루티를 만났을 때, 그는 수줍음이 많은 청년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이념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레온 시에서 산 세바스티안으로 옮겨와서 우리 지역 노조연합에 가입을 신청했다. 그는 기술공으로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한 공장을 소개해 주었다. 며칠 후 그는 다시 와서 그곳 노조는 기업주에게 노조의 의지를 관철할 용기가 없다고 불평했다. 만일 노조연합이 허락한다면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그곳 노조를 재건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조연합은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조연합은 자체의 허약성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었고, 계획할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노조연합은 만일 두루티가 그렇게 할 경우 희생당할 수 있다고 경고까지 했다. 그래서 두루티는 그곳 노동현장을 떠났다. 그는 산 세바스티안에서 비록 감정적이기는 했지만 우리의 이념을 처음으로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두루티 투쟁의 시작이었다…….
마누엘 부에나카사(Manuel Buenacasa)
1차 망명
그 후 그는 파리로 가서 기계조립공으로 일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곳 공장의 사람들은 그를 베르리트(Berliet), 혹은 브레게(Breguet)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레온 출신의 동지들이 그와 동행하였다. 특히 우리가 재담꾼이라고 불렀던 동지는 늘 두루티와 붙어 다녔다. 그는 나중에 파시스트에게 암살당했다. 그들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스페인 안팎에서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두루티는 이 계급투쟁에 마음이 끌렸다. 그런 점에서 미래를 어느 정도 내다볼 줄 아는 그의 안목을 읽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두루티는 이미 파리의 아나키스트 노조가 설립한 문제의 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플로렌티노 몬로이
파리에서 그는 삼 년 동안 기술공으로 일했다. 스페인의 동지들은 그에게 조국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알려왔다. 아나키즘이 점차 확산되고 있으며, CNT의 회원은 이미 백만을 넘어섰다. 공화국의 출범이 준비되고 있으며, 왕정의 몰락이 가까워오고 있다. 정권과 부르주아지는 아나키스트들과 CNT, 그리고 좌익 공화파들의 선동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권총암살단을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혁명가 두루티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몰래 프랑스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는 산 세바스티안에서 왕정 반대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아나키즘 투쟁단에 가입했다. 거기서 그는 프란시스코 아스카소와 그레고리오 호베르(Gregorio Jover), 가르시아 올리베르도 만났다.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alejandro Gilabert)
하얀 카네이션을 단 데이비스
나는 1920년에 마틸라나 델 토리오로 간 두루티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마틸라나는 레온 시의 북쪽에 있다. 그곳에서 그는 기술공으로서 영국-스페인 합작 탄광회사에서 일했다. 산속에 위치한 그 탄광촌에서는 벌써 사회주의자들이 배후를 조종하는 노동운동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도착했던 당시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 발생하던 때였고 그는 파업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마을에 갔었다.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고, 자신의 의지대로 노동자들을 선동하였다. 그는 담 위에 올라서서 대중들을 설득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주에게 항의하기 위해 몰려갔다. 행렬이 광업회사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내가 짐작하기로는 회사 감독은 파업 대표자들과 만나기를 거부했던 것 같다. 그는 영국 출신의 엔지니어였고, 이름은 데이비스(Davis)였다.
데이비스는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근사한 옷을 입고 다녔고 윗단추 구멍에는 흰 카네이션을 꽂고 다녔다. 그는 결핵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두루티에 대해서는 소문을 통해 벌써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문을 지키는 수위에게 두루티가 들어오지 못하게 지시해 놓았다.
두루티는 무장한 수위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데이비스 씨께 정중한 인사를 전하시오. 그래도 문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데리고 나오겠소. 그렇게 되면 그는 창문을 뚫고 거리에 나가떨어질 것이오.”
몇 분 뒤에 데이비스가 현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파업 지도자들을 매우 정중히 사무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오랜 협상이 진행되었다.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이 받아들여졌고, 파업은 승리로 끝났다. 며칠 뒤, 경찰이 두루티의 구속영장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두루티의 이름이 온 탄광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훌리오 파탄(Julio Patán)
다이너마이트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의 기질, 즉 호기심과 부대낌에서 오는 즐거움이 그를 라 코루냐La Coruña, 빌바오Bilbao, 산탄데르Santander와 그리고 북쪽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게 만들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두루티는 자신이 묵었던 허름한 여관 앞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목격했다. 경찰이 여관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루티는 이미 멀리 가고 없었다. 벌서부터 그는 상황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이미 악명 높은 ‘도망자 신고법’이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많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당시 산 세바스티안에 건립된 화려한 그랜드 온천장이 개막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 건물은 카바레와 카지노로 사용될 것이라고들 했다. 여름에 휴양지로 산 세바스티안을 방문하고는 하는 국왕 부처와 스페인 최고 귀족층이 이 개막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이 건물 지하실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또다시 아나키스트들의 소행으로 몰아붙였다. 경찰에 의하면, 아나키스트들이 개막식을 기회로 왕과 각료들, 그리고 다른 지체 높은 사람들을 온천장과 함께 공중 폭발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경찰이 이러한 범죄 음모를 꾸며내 아나키스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 아주 흔했다. 경찰은 두루티와, 카지노를 건축할 때 목공으로 일한 그의 두 동지들을 이 음모의 주동자로 지목했다. 경찰은 야간에 은밀하게 작업하여 구멍을 뚫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세 사람을 용의자 명단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경찰은 두루티가 기술공으로서 시한폭탄을 제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들이 많이 있는 아스투리아의 빌바오 탄광촌에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했다고 주장하였다.
목공 그레고리오 수베르비엘라(Gregorio Suberviela)와 테오도로 아라르테(Teodoro Arrarte), 두 동지는 바르셀로나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두루티는 프랑스로 도피할 수 있었다. 스페인 당국은 프랑스 정부에 두루티를 붙잡게 되면 추방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부터 그에 대한 흑색선전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흑색선전을 일삼는 자들은 그를 극악무도한 범인으로 낙인찍으려 했다. 그러한 흑색선전은 두루티가 온갖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혁명과업을 계속 수행해 나갈수록 더 심해졌다.
두루티는 아나키스트가 되기 훨씬 전에 이미 선동가로 변모해 있었다. 당시 카탈로니아 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던 부에나카사는 “오직 바르셀로나에만 프롤레타리아트 의식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두루티가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히혼Gijón과 렌테리아Rentería에서 혼자 힘으로 어려운 노동쟁의를 해결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의 동료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그저 참고만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바라보고 비꼬았다. 이 대담한 레온 시의 청년은 부에나카사의 충고에 따라 바르셀로나로 갔다.
마누엘 부에나카사, 「크로니카Crónica」[1]
짧은 해설 2
스페인 아나키즘의 뿌리
1868년 10월의 어느 날, 주세페 파넬리(Giuseppe Fanelli)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그는 대략 마흔 살쯤 되어 보였다. 그의 직업은 기술자였다. 그는 숱이 많고 짙은 까만 콧수염과 정열적인 눈을 가진 거구의 사나이였다. 그는 단숨에 그날의 일을 결정했다.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수첩에 명기된 주소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카페였다. 그 카페에서 그는 작은 모임에 참석하는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스페인의 주요 도시에서 불법 인쇄물을 찍어내는 인쇄업자들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금속이 부딪치듯 카랑카랑했다. 그는 목소리의 톤을 자유자재로 바꾸었다. 독재자와 착취자들에 대해서 말할 때는 분노와 위협적인 억양을 뒤섞었고, 피억압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비애와 고통의 음색 그리고 용기를 북돋는 음색을 띠었다. 그런데 주의할 만한 사실은 그가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들 중 몇몇이 겨우 부분부분 이해할 수 있는 불어로 말하거나, 우리말과 많은 유사성을 띠고 있는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이 경우 서로 썩 잘 통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연설을 마쳤을 때, 그의 사상은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이탈리아인의 방문이 있은 지 32년이 지난 지금도 스페인 최초의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통신원 안셀로 로렌소(Anselmo Lorenzo)는 파넬리를 ‘사도’로 기억하면서, 당시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등골을 오싹하게 했던, 파넬리의 구호를 기억하고 있다.
“심장이 섬뜩할 일을 벌이시오! 공포를!”
“나흘 동안 저녁마다 파넬리는 우리 앞에서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산책을 할 때도, 카페에 앉아 있을 때도 그는 우리와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터내셔널의 규약문과 민주사회주의자들의 동맹 프로그램, 그리고 바쿠닌(Bakunin)의 논설과 연설이 실린 몇 장의 신문을 넘겨주었다.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그는 단체사진을 찍자고 제의했다. 그가 우리 한가운데에 섰다.”
우리는 파넬리가 조직의 밀사로 스페인에 오기 전까지는 국제노동자연합이라는 조직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었다. 파넬리는 바쿠닌의 추종자였고, 제1인터내셔널 ‘반정부’파에 속했다. 그가 스페인에 전달한 비밀명령은 아나키즘이었다.
이 혁명론은 순식간에 스페인 노동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것은 스페인 서남부지역의 농업 노동자들과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 초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스페인 노동자운동은 1870년에 열린 제1차 회의에서 이미 바쿠닌을 지지하고 마르크스를 반대했다. 2년 뒤, 코르도바Córdoba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한 아나키스트 연합 회원의 수는 4만 5천 명에 달했다. 안달루시아Andalusia 전 지역으로 확산된 1873년의 농민봉기는 이미 무정부주의의 지도를 확실하게 받고 있었다. 스페인은 세계에서 바쿠닌의 혁명이론이 현실적 세력을 획득한 유일한 나라였다. 아나키스트들은 1936년까지 스페인 노동자운동 내에서 지도적 역할을 확보하였다. 그들은 숫자 면에서만 다수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 전투력도 가장 막강했다.
역사상 초유의 이러한 상황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낳게 만들었다. 그러나 스스로 믿고 확언했던 해석조차도 설득력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치경제학의 법칙에 의존한 응집력 있는 추론도 그러한 상황을 명확히 설명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페인 아나키즘이 확산될 수 있었던 조건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야기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즉 그것은 순수 경제적 해석을 지금까지 비웃었던 스페인의 역사적 발전을 이해하게 해준다.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나면, 스페인은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순수 농업 국가였다. 이 사회의 계급대립이 너무나 극단적이고 확연하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한 두 개의 민족으로 나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국가기구를 지배하고 군대나 교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던 정치계급은 대부분 대지주들이었다. 이 계급은 그야말로 비생산적이고 부패하여, 다른 유럽에서는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잠정적인 진보적 역할을 떠맡을 능력도 없었다. 이 기생적 존재는 연금을 소비하면서 그 기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팽창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에 상응하여 소부르주아지의 발전도 미진했다. 소부르주아지는 가난한 수공업자들과 소상인들을 제외하고 나면 마르크스가 명명한 ‘기관원Staatsscheißkerl’과 적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살이 찐 관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관료는 그 기능적 역할을 스스로 잃어버리지 않는 한, 행정적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적 목적에 봉사하는 집단이었다.
노동 민중의 대다수가 농촌에서 살았는데, 그것이 스페인의 현실이었다. 계급투쟁의 진행은 농업구조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북쪽지방에서는 중세적 소유 · 생산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소농과 중농으로 이루어진 마을 전체가 숲과 초원을 공동의 재산으로 사용했다. 농토는 기름졌고, 관개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다. 이처럼 그곳은 자족의 고립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중세적 사회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화폐경제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지방들, 특히 근동 해안지역과 안달루시아에서는 1836년 이후부터 신흥 대지주 부르주아지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에서 자유주의라는 말은 바로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 즉 공동 소유지를 ‘자유롭게’ 매매하여 대농지에 합병하고, 대농지의 경영을 합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1843년에 도입된 의회정치는 신흥 지주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계급은 도시에 살면서 자신들의 대사유지를 멀리 떨어진 식민지의 땅처럼 여기고, 집사나 소작농을 통하여 농지를 관리했다.
이런 식으로 하여 거대한 농업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생했다. 안달루시아 지방 주민의 3/4은 내전이 발생하기까지 하루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매일 그들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날품팔이꾼으로 남아 있었다. 추수기에는 하루에 열두 시간의 노동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한 해의 절반은 거의 실직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결과 토착화된 가난과 영양실조, 이농현상이 초래되었다.
국가권력은 마을 주민에게 점령군처럼 굴었다. 대지주라는 신흥 정치계급이 정부의 사업을 수중에 장악한 지 1년 만에 이들은 영지 내의 가장 원시적인 긴급사태, 즉 노상강도를 일소한다는 명목 하에 자체의 주둔군, 즉 영내에 거주하는 치안유지병인 치안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그 실제의 목적은 새로운 투쟁형식을 지향하는 농업 프롤레타리아트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다. 치안 경비대는 주도면밀하게 선발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언제나 이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장정들로 모집되었다. 이 군대는 토착민과 결혼을 하거나 친하게 지내는 것이 금지되었다. 치안유지병은 그들의 막사를 항상 무장 경계했고, 혼자서 순찰을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지역의 사람들은 이들을 복수 순찰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언제나 2인1조로 순찰을 돌았기 때문이다.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노골화된 계급 증오가 1930년대까지는 유격전으로 항상 표출되었다. 이 원시적인 농촌 게릴라전이 끝없이 반복되면서 마침내 그것은 돌발적이고 자생적인 농민봉기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봉기를 통하여 사회의 기초 세력인 대중의 힘이 폭발했고, 대중에게는 전례 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사라졌다. 봉기는 언제나 일정한 형태로만 진행되었다. 농업 노동자들은 치안경비대를 굴복시켰고, 신부들과 공무원들을 포로로 붙잡았다. 교회에 불을 질렀고, 토지 등기부와 소작계약서를 불태웠다. 화폐를 폐기처분하고, 정부를 철폐시키며 독립적인 코뮌을 발족한다고 선언했다. 토지를 공동 관리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들은 대부분이 문맹자들인 농민들이었기에 바쿠닌의 교의를 알았을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의 교의를 정확히 따르게 되었는지 의아스럽다. 이들의 봉기는 순전히 자체적인 것으로 연합운동의 도움 없이 이끌어졌기 때문에 정부의 군대가 유혈진압을 하면 대개 며칠 안에 끝나고 말았다.
스페인 아나키즘의 두 개의 큰 뿌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자라났다. 스페인 아나키즘은 일거에 농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적 운동에 이데올로기적 토대와 단단한 조직적 구조를 제공하여 마을 주민들의 순진무구하지만 흔들림 없는 기대, 즉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혁명에 대한 기대를 고양시켰다.
세기가 전환되는 이즈음 남부 스페인의 어느 지역에서든 ‘이념의 사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이 걸어서, 혹은 나귀를 타고, 혹은 포장마차를 타고 농촌을 배회하고 다녔다. 노동자들은 그들을 영접하여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스페인 아나키즘 운동은 처음부터 외부로부터 어떤 경제적 지원도 받지 않았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다.) 대중의 학습과정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후 어디에서든 독서하는 농업 노동자와 농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문맹자들 가운데는 신문이나 노동운동 팸플릿에 나오는 기사들을 몽땅 외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마을마다 적어도 ‘깨우친 사람’, ‘의식화된 노동자’가 한 명쯤은 있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인정을 받았다. 즉 담배도 피우지 않고 놀지도 않았으며, 술도 마시지 않았다. 무신론자임을 고백했고, 신의를 바쳤던 아내와 동거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에게 영세식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많이 읽었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카탈로니아는 가난에 찌든 스페인의 서남부 지역과는 경제적으로 극히 대조를 이루었다. 카탈로니아는 예로부터 스페인에서 산업이 가장 발달한 부유한 지방이었다. 항구와 수출, 은행, 섬유산업의 중심도시인 바르셀로나는 세기 전환기에 이미 이베리아Iberia 반도에서 자본주의의 교두보가 되어 있었다. 카탈로니아의 1인당 세 수입은 스페인 전체 평균의 두 배를 넘었다. 바스크 지방을 제외하고 이곳은 유능한 기업 부르주아지를 배출한 유일한 지역이다. 카탈로니아의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은 오로지 낭비에만 몰두했던 대지주들과는 달리 재산 축적에만 몰두했다. 이로써 1870년과 1930년 사이에 바르셀로나와 그 주변에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집중 형성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여건을 가진 유럽의 지역들과는 다르게 카탈로니아 노동자들은 사회민주주의와 개혁적 노조조직이 아닌 아나키즘을 지향했다. 이 무정부주의는 도시에 기반을 둔 스페인의 두 번째 아나키즘의 뿌리에 해당한다. 1918년에 이미 카탈로니아의 전체 노동자 가운데 80%가 아나키스트들로 조직화되어 있었다. 이 상황은 스페인에서 바쿠닌 세력들이 거둔 성공의 비결보다 더 설명하기가 힘든 부분이다.
우선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면 바르셀로나 공업지역의 노동자는 극히 일부분만이 그 지역 출신이다. 그 나머지는 가난한 남부지방의 무르시아Murcia와 알메리아Almeria에서 모집되었다. 이러한 내부 이동은 그 나라의 구조적인 실직 상황에 의해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왔다.
두 번째 계기로는 스페인 역사에서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는 원심력을 들 수 있다. 강한 지방주의, 독립성과 자율성에 대한 충동, 즉 마드리드Madrid 중앙정부의 지배에 대한 완강한 저항정신과 같은 것은 스페인의 여러 지방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특색이다. 그런데 이러한 저항정신이 카탈로니아에서만큼 강하게 작용한 곳은 없다. 카탈로니아는 여러 가지 점에서 스스로를 자치 민족으로 간주하였고, 이미 17세기에 스페인 군주정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이 강화된 것은 카탈로니아 경제의 특수한 발전 때문이었다. 카탈로니아의 민족주의는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파는 토착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했고, 계급투쟁을 신비화하기 위해 자율성의 문제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대중의 측면에서 카탈로니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혁명의 계기로 작용했다. 자치행정을 요구하고, 중앙 국가권력을 증오하는 것, 권력의 철저한 분산화를 주장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아나키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계기들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를 정치적 당파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의회선거에 불참하고 관직을 맡지 않는 것이 그들의 원칙이다. 그들은 국가를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제거하려고 한다. 아나키즘 자체의 연합에서도 그들은 조직을 선두 지휘하는 권력의 집중화에 반대한다. 아나키즘 연합은 바로 이러한 원칙을 토대로 삼고 있다. 지방마다 광범위한 자율성을 누린다. 그러나 이 원칙이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지도부의 결의에 따라야 할 경우도 있었다. 아나키즘의 원칙들이 실천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물론 구체적 조건들에 달려 있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은 191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최종적 조직형태를 갖추었다. 그것은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연맹인 노동자국민연합(CNT, 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의 발족과 함께 시작되었다.
CNT는 세계에서 유일한 혁명적 조합이었다. 이 조합은 조직을 노동계급의 물질적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기업가와 협상을 벌이는 ‘사회적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강령과 실천의 목표는 임금 노동자가 최종적 승리를 획득할 때까지 자본에 맞서 공개적이고 항구적인 투쟁을 벌여 나간다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전략에 맞춰 조합의 구성과 전술적 태도가 결정되었다.
CNT는 결코 기금 투자가들의 결속단체가 아니었기에 재정을 비축하지 않았다. 도시에서의 회원 가입금은 극히 적은 액수였고 농촌에서는 거의 무료였다. 조직원의 수가 백만이 넘었던 1936년까지도 CNT는 소수의 전문가들에게만 보수를 지급할 정도였다. 관료적 기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그들 자신의 노동을 통해, 혹은 그들이 활동했던 지부로부터의 직접적 지원에 의해 살아갔다. 이것은 사사로운 이야깃거리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CNT가 관습적으로 행해져 온 정치권력의 형태와 같이 대중들로부터 고립된 ‘노동자 간부’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결정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항시 아래로부터의 종제, 이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규정에 의해 보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기본규칙을 간접적으로 신뢰했던 전투원들의 삶의 조건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CNT의 주 무기는 파업과 게릴라전이었다. 아나키스트들에게는 파업에서 봉기로의 전환이 언제나 그저 한 걸음에 불과했다. 그들의 투쟁은 언제나 극단으로 이어졌다. 이 노동조합운동은 ‘사회적 유산자 신분’으로의 상승뿐만 아니라 생활 인정도 보장할 수 있는 순수 임금투쟁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은 사회보장비나 보험료를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근본적으로 어떤 임금협상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합이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하여 개선한 수많은 사항들은 사실상 인정받았다. CNT는 조정협상이나 평화이행의 의무와 같은 것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CNT는 파업기금을 마음껏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파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파업이 좀 더 격렬하면 할수록 그 수단은 혁명적이었다. 파업투쟁은 자기 방어에서 사보타주로, 공용징수에서 무장봉기로 전개되었다.
이로써 아나키즘 운동에서 합법적 활동과 비합법적 활동의 상황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도덕적 문제는 스페인에 나타난 여러 조건들 하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계급은 민주적 법치국가의 시민적 권리조차도 보장해 주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회선거는 수십 년 간의 광대극에 불과했다. 즉 의회선거는 타락 그 자체였다. 표를 매수하고 농촌의 촌장체계를 통하여 주민을 사주하기도 했다. 뻔뻔스러운 왜곡 비방이 난무했던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론에 입각한 권력분립의 형태라고는 스페인에 존재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까지는 사회보장법도 없었다. 의회를 통해 공포된 법안도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했다. 노동계급은 기업가 측으로부터, 그리고 국가로부터 매일 공공연한 부당함과 폭력을 당했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의 경우 폭력의 문제는 그것이 문제로 제기될 수 있기 전에 우선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CNT는 모든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활약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대중 조직체였다. 위험하고 불법적인 활동은 훨씬 이전에 조직된 연대조직과 같은 비밀 간부집단이 떠맡았다. 불법적 활동은 자기 방어, 무기 공급, 자금 조달, 구금자 석방, 테러, 스파이 활동 등이었다. 1927년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 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의 발족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이 조직은 철저히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회원의 수와 내부의 조직관계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들 사이에는 그 명성이 대단했다. 소속회원은 누구나 CNT에 동시 가입 · 조직화되었다. FAI는 아나키스트 조합에 속한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동시에 연맹은 기회주의적 변절과 개량주의로 빠져들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이러한 조직은 또다시 자생적인 대규모의 민중운동이라는 바쿠닌의 조직형태의 모습을 띠었다. 즉 확고한 신념을 지닌 직업혁명군들이 이 운동의 간부로서 활동했던 것이다.
FAI에 관한 소문이 점점 더 많이 떠돌기 시작했다. 비밀조직에는 언제나 온갖 기이한 소문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시민들 사이에 오르내리는 끔찍한 소문은 무지에서 기인한 터무니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다. (1936년까지도 대지주의 대변인들은 FAI가 ‘모스크바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비밀연맹이 출범 · 구성되었을 때, 그것의 위법성 여부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모호하였기 때문에 주목을 끌었다. 아나키스트들의 적대자들은 언제나 FAI 내부에, 특히 바르셀로나에 ‘범죄적 분자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흑색선전을 하였다. 그러나 범죄요건의 성립 여부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는 형법전서를 펼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스페인 노동계급의 특성은 독일이나 영국의 노동계급과는 달리 사유재산을 잣대로 하여 평가할 수는 없었다. 예부터 스페인 노동계급은 무력에 의해 억압을 받았을 때, 무장 저항을 자기 방어의 정상적 수단으로 간주해 왔다. 비합법적 조직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판단의 모호함에는 유럽의 여타 지역과는 다른 원인들이 있었던 셈이다. 그 한편의 원인으로 바르셀로나에서 큰 역할을 해온 사회적 요소, 즉 하층 프롤레타리아트와 관계가 있다. 이농과 실직 상황, 그리고 항구도시가 갖는 국제적 하위문화가 하층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카탈로니아 산업 노동자들은 이 계층과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여러 가지 조건에서 이들과 유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도 그들은 위를 향한 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아래를 향한 의식에서도 스스로를 명확히 구분하는 유럽의 전문 노동자들과는 달랐다.
자연히 경찰은 산업 노동자들과 하층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잠재된 계급모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온갖 음모를 다 꾸몄다. 특히 20세기 초에 경찰은 스파이와 선동가를 동시에 이용해 아나키즘 운동을 관철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각본은 사회 혁명과 러시아 볼셰비키의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모리배들처럼 스페인의 경찰도 혁명집단을 효과적으로 방조 · 지지하였다. 1908~1909년, 공장 정문과 카탈로니아 기업가의 빌라 앞에서 폭발한 2천 개의 폭탄 매입을 위한 자금 가운데 가장 큰 몫의 자금이 경찰의 계좌로부터 입금되었다. 이로써 경찰은 마드리드 중앙정부의 지시를 어기고 카탈로니아의 자치운동에 동조한 셈이었다.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비밀경찰은 아나키즘의 확산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셈이다. 즉 아나키스트들을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선동이 CNT와 FAI의 성장에 기여하도록 했던 것이다.
아나키즘의 조직형태가 갖는 장점과 단점을 적절히 보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조직형태가 갖는 장점의 기초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혁명적 열정과 전투적 연대감에 있다. 그러나 이 장점도 구심력 있는 중앙조직이 없어, 확고한 계획과 조직 간의 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효력이 확연하게 약해졌다. 따라서 시민전쟁이 발생하기 직전까지는 자생적인 봉기와 폭동이 여러 번 일어났지만 고립적인 것이어서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엥겔스는 1873년에 이미 이렇게 말했다. “그런 조직형태로는 혁명을 쟁취할 수 없다는 예의 표본이다.”
억압을 ‘지금, 여기서’ 끝내려는 근본적이고 강력한 시도들이 한 세기를 넘는 동안 불굴의 의지로 여전히 계속 반복되어 왔다는 주장은 부르주아 및 마르크스주의 사가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스페인 아나키즘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종교적 현상처럼 보인다. 아나키즘의 추종자들은 혁명의 날을 신의 정의가 세워지는 천년 왕국이 이어질 최후 심판의 날로 생각한다. 이 가설에 의하면, 메시아의 재림행렬을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할 것이고, 이 행렬을 준비하기 위한 희생을 기꺼이 각오한다는 것이다. 특히 농촌에서는 이 운동이 거의 종교적 상상과 기대에 의해 개진되었다는 점을 논박할 근거라고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을 종교적 형식으로만 환원시키는 태도는 모든 것을 세속화하는 테제 못지않게 설득력이 빈약하다. ‘정신사’의 방식에 의존하는 그런 태도는 투쟁의 정치적 내용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종교적 약속을 의식적으로 확고하게 믿었다. 적어도 유물론적 역사가들은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더 많은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게랄트 브레난(Gerald Brenan)과 프란츠 보르케나우(Franz Borkenau)가 주장하는 또 다른 테제이다. 이들의 테제에 의하면, 스페인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깊은 저항의 표현이다. 이 저항은 주로 유럽의 산업국가에서 이해했던 물질적 진보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 발전의 마르크스주의적 도식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이 도식에 의하면 부르주아지가 일시적 혁명세력으로,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산업화의 불가피한 현상인 규격화와 축적의 필연적 단계로 나타난다. 따라서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이러한 ‘진보’를 폭력의 요소를 지닌 진보로 이해하고 거부한다. 그들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업적과 성과에 대해 감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들의 노선을 따르는 것을 거절한다. 그들은 이들의 상품물신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합목적성도 내면화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체제에 대하여, 그리고 이 체제가 낳는 소외에 대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그들은 동시대 서유럽 동지들이 가질 수 없었던 그런 증오심을 갖고 자본주의를 증오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해석에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존한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기대와는 반대로, ‘가장 진보적인’ 국가는 사회 혁명이 승리로 귀결되었던 영국도 독일도 미국도 아니며, 오히려 자본주의가 낯설고 이질적인 것으로 보였던 사회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스페인에 관한 한, 아나키스트들을 단순한 ‘과거의 유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나키즘 운동을 옛 유물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위에서 지적했던 그런 역사 도식주의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스페인 혁명가들은 결코 기계와 같은 돌격대는 아니었다. 그들의 소망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었다. 이 미래는 자본주의가 준비한 미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짧은 승리의 기간 동안 수중에 넣은 공장을 폐쇄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내게 하였다.
연대의식
권총암살단의 테러
두루티에게 바르셀로나로 가라고 권유한 사람은 당시 산 세바스티안의 CNT 민족위원회의 의장이었던 부에나카사 동지였다. 1920년대는 가장 암울했던 탄압의 시대였다. 지사 마르티네스 아니도(Severiano Martínez Anido)와 경찰국장 아르레기(Miguel Arlegui y Bayonés)는 카탈로니아 아나키스트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테러―정치 운동단을 조직했다. 어떤 수단도 그들에게는 합법적으로 통용되었다. 그들은 그 지역 기업가들과 손잡고 관제 강제노조, 이른바 자유 신디케이트를 조직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어떤 노동자도 자발적으로 이 노조에 가입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업가들은 당국의 지원 하에 개인 무장단, 즉 권총암살단을 조직했다. 이 살인 고문단이 바르셀로나에서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제거했다고 한다.
당시 두루티는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그레고리오 호베르,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함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동지애를 지키자고 맹세했다. 그들은 전투 사수대를 조직하여 노동자 살인집단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스페인 노동계급은 그들을 가장 훌륭한 보호자로 생각했다. 그들은 행동으로 선동하였고, 그때마다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민중은 그들을 사랑했다. 그들의 목표가 정치적 기만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당시 총리는 다토(Eduardo Dato)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바르셀로나 탄압정책의 장본인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고 그것은 곧 실행으로 옮겨졌다.
그 후 그들ㄹ은 사라고사Zaragoza에 거주하고 있던 솔데빌라(Juan Soldevilla y Romero) 추기경을 지목했다. 그는 아스카소나 두루티의 총에 맞아 죽을 것 같은 느낌을 이미 받고 있었다. 그 지위 높은 추기경은 많은 호텔과 카지노를 경영하여, 그 수익금으로 바르셀로나의 관제 자유 신디케이트와 살인 중앙기구에 자금을 지원했던 것이다.
하인츠 뤼디거(Heinz Rüdiger) /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
나는 1922년에 바르셀로나에서 두루티를 알게 되었다. 당시 CNT는 이미 거대한 노조조직체가 되어있었다. 이 노조조직은 많은 노동자들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에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우리는 당시 연대의식이라는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 조직은 이후에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조직원은 두루티, 가르시아 올리베르,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그레고리오 호베르, 가르시아 비반코스, 안토니오 오르티스를 포함하여 대략 열두 명쯤 되었다. 처음에는 모두 합쳐서 열두 명뿐이었다.
우리는 백색 테러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런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기업가들은 당국의 승인 하에 용병대를 두고 있었다. 용병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고, 상당한 보수를 지급받는 무도 유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만 했다. 우리가 이 조직을 구성할 당시 바르셀로나에서만 벌써 3백 명이 넘는 아나키스트 노조원이 백색 테러단에게 희생을 당했다. 분명 3백 명이 넘었다!
우리는 그 당시 공격적인 혁명 활동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때는 자기 방어의 시대였다.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은 당시에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나중에야 조직되었다. 따라서 주거지역이나 공장에서 서로 알게 된 우리들은 지역별로 조직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리카르도 산스(Ricardo Sanz)
연대의식의 조직원(1923~1926)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 아라곤 출신. 급사, 1901년 출생.
라모나 베르니(Ramona Berni) : 여자 직조공.
유세비오 브라우(Eusebio Brau) : 주물공. 1923년 경찰에 살해당함.
마누엘 캄포스(Manuel Campos) : 카스티야 출신. 목수.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레온 출신. 철물공이며 기계조립공. 1896년 출생.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Aurelio Fernández) : 아스투리아 출신. 기술공. 1897년 출생.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 카탈로니아 출신. 1901년 출생.
미겔 가르시아 비반코스 : 무르시아 출신. 부두 노동자. 도장공塗裝工, 운전수. 1895년 출생.
그레고리오 호베르 : 가구공.
훌리아 로페스 마이나르(Júlia López Mainar) : 여자 요리사.
알폰소 미구엘(Alfonso Miguel) : 장식 가구공.
페피타 노트(Pepita Not) : 여자 요리사.
안토니오 오르티스(Antonio Ortiz) : 가구공.
리카르도 산스 : 발렌시아 출신. 염색공. 1898년 출생.
그레고리오 소베르비엘라, 또는 수베르비엘라 : 나바라 출신. 기술공.
마리아 루이사 테헤도르(María Luisa Tejedor) : 여자 잡화상인.
마누엘 토레스 에스카르틴(Manuel Torres Escartín) : 아라곤 출신. 빵 제조업자. 1901년 출생.
안토니오 ‘엘 토토’(Antonio ‘El Toto’) : 날품팔이꾼.
리카르도 산스 2 / 세자르 로렌소(Cesar Lorenzo)
아스카소
나는 아스카소 형제를 사라고사에서 처음 만났다. 1919년은 러시아 혁명이 아직 확고한 자리를 굳히지는 못하였지만 전 세계의, 특히 스페인의 노동자 대중들에게 혁명의 예감을 환하게 밝혀준 해였다.
아스카소 형제는 의용단Voluntad의 조직원이었다. 의용단 조직은 당시에 조직의 이름을 본떠서 「의용단」이라는 자체 신문을 발행하였다.
사라고사의 카르멘 군 막사에서 몇 명의 사병들이 기습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날 밤, 그들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사전 통보도 하지 않고 보초들을 밀어내고 장교 한 명과 상사를 살해하였다. 그들은 막사를 완전히 장악하고 이렇게 외쳤다. “소비에트 만세! 사회 혁명 만세!” 그러고 나서 그들은 시내로 달려가 전신전화국과 신문사 편집국을 점령했다. 그러나 열정은 대단했지만 전혀 계획을 세우지 못한 탓에 새벽 4시가 되었을 때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결국 그들은 막사로 되돌아가 다시 보초를 섰다. 치안경비대가 출동했을 때, 그들은 잠시 항거하다가 곧 굴복했다.
경찰은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로부터 선동의 주동자가 누구인지를 자백 받아 선동자를 색출하려고 했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군사 재판은 병사들 모두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야 할지, 아니면 아무에게도 사형 선고를 내리지 말아야 할지 증거가 없어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어디든 비겁자가 있기 마련이고, 신문사를 점거한 일곱 명의 병사를 치안경비대에 고발한 자는 「헤랄도 드 아라곤Geraldo de Aragon」이라는 지방지의 편집국장이었다. 사병들은 이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 당했다. 우리 조직원들 사이에서 아나키스트들과 노조원들을 항상 추적하는 그런 모리배에 대한 분통이 터져 나왔다. 우리 동지 가운데 한 사람이 권총으로 편집국장의 몸뚱이를 벌집으로 만들어놓았다.
이 사건으로 아스카소 형제가 고발되었다. 형 호아킨은 도망갈 시간이 있었지만 급사였던 동생 프란시스코는 체포되었다. 그가 종업원으로 일했던 호텔의 지배인과 동료들, 그리고 그의 고객들은 그가 어려운 시절에 사회에 봉사한 선량한 사람이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일 그의 재판 선고일에 사라고사의 주민들이 총파업으로 항거하지 않았더라면 검사가 청구한 내용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그는 분명 사형을 언도 받았을 것이다. 상황에 밀려 배심원들은 아스카소에게 무죄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열여덟 살 소년 아스카소가 미소를 지으면서 형무소 정문을 나섰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은 구호를 외쳤다. “아나키즘 만세!” 당시 형무소에 갇혀 있던 우리도 그 구호에 동조했다.
항상 경찰이 아스카소의 주위를 감시했기 때문에 그는 사라고사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어 바르셀로나로 갔다. 그때가 1922년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식료품 노조의 조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 연합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하루는 그가 내게 라코루냐에 가서 급사로 일하고 싶다고 알려왔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상선대원商船隊員을 알선하는 직업소개소를 아나키스트 노조원들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도시에 갈 수가 없었다. 우연찮게도 그가 라코루냐에 가기로 된 바로 그날, 마르티네스 아니도가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경찰은 아스카소가 그를 암살할 계획을 품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그를 체포했던 것이다. 그러나 혐의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를 다시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족이 살고 있던 사라고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경찰은 또 다른 함정을 파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동자와 ‘혁명가들’에 대해서 온갖 혐의를 씌웠던 솔데빌라 추기경이 수녀원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름 모를 손길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 사건으로 수많은 노동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체포되었다. 이 검거 열풍 때 아스카소도 체포되었으나 추기경이 암살당한 시간에 아스카소는 형무소 면회 중이었음이 형무소 간수와 수감된 자들이 증언함으로써 그에 대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었고 경찰은 또다시 그를 석방해야만 했다. 8일 후, 아스카소는 다시 체포되었다. 당국은 혐의자들에 대한 심문을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검찰은 사형 선고를 요구했다. 그 사이에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는 권력을 동원하여 두 명의 아나키스트들에게 교수형을 지시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아스카소의 생명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재판이 열리기 직전에 다른 여섯 명의 정치범과 함께 형무소를 탈출했다.
데 롤
호베르
호베르는 연대의식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는 이 조직에서 ‘분석파’로 통했다. 그는 테루엘Teruel 지방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날품팔이 생활을 청산하라고 그를 발렌시아로 보냈다. 그는 피혁공이 되어 이불 덮개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가 일하는 부서에서 파업이 발생해 그는 처음으로 구금생활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파업에 폭력진압이 자행되었다.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이 폭행을 당했고 공장이 포위되었다. 결국 기업주들의 폭력적 보복에 대한 정당방위로 공장주가 살해되었다. 파업위원 전원이 구속되었다. 호베르에게는 폭력선동과 신체 상해 등등의 죄목으로 징역 2년이 구형되었다. 곧 석방되었으나 이번에는 군 막사 내에 군사 해체 전단을 유포하였다는 혐의로 다시 감금되었다.
마침내 호베르는 바르셀로나로 가서 금지 조치된 CNT의 회원이 되어 가장 투쟁적인 동지 중 한 사람으로 변신하였다.
당시 부르주아지는 노동자들에게 강력한 적군으로 비쳤다. 백색 테러가 점점 더 잔인해졌다. 테러단의 하루 일정은 체포, 고문, ‘도망자’ 저격으로 짜여 있었다.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에게 마지막 남은 선택은 프롤레타리아트 폭력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선량한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마침내 호베르도 손에 무기를 들고 자본가들의 권총암살단에 대적하였다. 당시에는 어떤 투쟁적인 노동자도 완전무장을 하지 않고서는 집 밖을 나설 수가 없었다. 노동현장에서도 권총을 장전하여 작업대 옆에 놓고서 일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기업연합의 회장이며, 수억의 재산을 가졌던 사업가 그라우페라(Graupera)가 무장대원들의 탄알에 쓰러졌다. 이어서 바레트(Barret), 브라보 포르티요(Bravo Portillo), 에스페호(Espejo)와 같은 살인전문 경찰단원이 살해되었다. 바르셀로나의 부지사였던 마에스트레 라보르데(Maestre Loborde)가 발렌시아에서 죽었다. 사라고사에서는 빌바오의 제철소 회장, 자동차회사의 사장, 시청 토목과장, 밀고자요 노동자 착취자로 알려져 있던 전기회사 공장 감독관 등이 혁명가의 총탄에 쓰러졌다. 바르셀로나에서도 CNT는 필사적인 자기 방어를 했다. 매일 노동자가 살해되었고, 부르주아지나 경찰도 대낮에 살해되었다. 이 전쟁은 3년 동안 거리에서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사무실에 앉아 탄압을 주도해 왔던 마르티네스 아니도와 아르레기는 자유로운 하늘 아래 감히 얼굴을 내놓고 다닐 수가 없었다.
경찰은 아나키스트들이 마르티네스 아니도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발표했다. 정보에 의하면, 음모의 주동자들이 우선바르셀로나 시장을 저격한 다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할 아니도와 아르레기와 같은 저명인사들을 수류탄으로 암살한다는 것이었다.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방어적인 저항을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산업계의 거물들을 호위하는 바르셀로나의 추적단이 철통같이 감시를 했지만 수류탄 기습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많은 기업가들이 중상을 입었다. 기습공역을 받고 로마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파견한 시의회 고문이었던 안글라다(Anglada)와 시장이 부상을 당했다. 호베르는 계속되는 이런 투쟁의 분위기에서 언제나 뒤따르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서도 냉정한 침착성을 잃지 않고 용감하고 정열적인 투쟁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다토 수상이 노동자들에 의해 살해되자 아니도와 아르레기는 직위 해제되었다. 노조가 합법화되었다. 그래서 노조는 조직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당시에 호베르는 두루티와 아스카소 형제를 알고 있었다.
3년의 유혈진압 끝에, 바르셀로나에서 최초로 공식적인 노동자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대단한 전시적 효과를 거두었다. 목재 노동자 노조가 외치는 분노의 소리는 스페인에서 가장 넓은 강당 중 하나인 빅토리아 극장 주변을 메우고도 남았다. 행사는 전사한 1백 7명의 CNT 전위대들의 긴 명단을 읽어내려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바르셀로나의 아나키스트 단체들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노동자 문화원과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들이 발간하는 연합신문은 그 발행 부수가 오만 부에 달했다. 이 수치는 부르주아지가 발행하는 바르셀로나의 일간지를 능가했다.
데 롤
학교 설립자금
일찍이 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중이었던 1915년에 아나키즘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나의 아버지는 공산당원이었으며, 1871년 파리 코뮌의 바리케이드 투쟁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당시 내 나이는 열아홉 살도 채 되지 않았다.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신문에 글을 기고했다. 나는 국제 공산당원이었기에 전쟁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페인으로 갔다. 왜냐하면 스페인은 당시 중립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에서 나는 즉시 시위운동에 가담하여 실천적인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나는 철공소와 제련소에서 보조공으로 일하면서 십 년 동안 일당제로 연명하였다. 스물여덟 살이 될 때까지 열두 번이나 직업을 바꾸었다. 예기치 않게 나는 스페인 북서쪽의 외딴 지방인 갈리시아에 있는 라코루냐의 무료학교 선생이 되었다.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단체는 선원과 항만 부두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한 CNT의 지부였다. 개교에 필요한 자금은 두루티가 조달했다.
그가 조달한 자금은 물론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지금은 그저 차분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습격을 했던 것이다. 이번에 습격한 곳은 은행이 아니라 어음거래소였다. 두루티가 권총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돈을 요구했다. 실탄 한 발이 발사되었다. 노조는 자금을 마련해야 학교를 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행위는 부르주아지의 법전을 들고서는 판단할 일이 아니다. 나는 당시 민중들의 상황 자체를 생생하게 경험하였다. 그때의 상황은 내게도 용기가 있었더라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렇게 했을 분위기였다. 당시 스페인에 만연해 있던 참혹하고 끔찍했던 현실을 목격했더라면, 그 사람들의 목숨을 건 행동에 수긍했을 것이다.
가스톤 레발(Gaston Leval)
3회 검거작전
호르마셰Hormaeche 건설회사를 상대로 한 바르셀로나 지하철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은 새로운 파장을 일으켰다. 회사는 오래 전부터 CNT의 적이었다. 회사는 파업 선동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사복 형사대를 고용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기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빌바오의 전임 지사였던 곤잘레스 레게랄(Gonzalez Regueral)이 레온 시에서 피살되었다. 으레 그렇듯이 경찰은 연대의식 조직에서 범인을 색출하려고 했다. 경찰은 우선 두루티를 혐의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두루티는 문제가 터진 바로 그날,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브뤼셀에 가 있었다. 그러자 경찰은 아스카소를 범인으로 몰았다. 그러나 그도 그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건 당일에 라코루냐에 구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경찰은 아라르테와 수베르비올라를 수배했다. 두 사람은 바르셀로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경찰 당국은 수베르비올라, 아라르테,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호베르가 접선하기로 한 날짜와 장소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수베르비올라가 묵고 있던 여관이 경찰에 의해 포위되었다. 그는 탈출을 시도했다. 양손에 권총을 들고 경찰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의 체포를 위해 여관에 진입해 있던 경찰은 당황하여 몸을 뒤로 피했다. 그러나 여관 문을 나서자마자 여관 입구와 모퉁이에 잠복하고 있던 경찰들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수베르비에르는 죽임을 당했다. 서너 명의 사복 경찰들이 아라르테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수배 받고 있는 동지라며 그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아라르테는 그들이 경찰임을 눈치 채고, 안전한 동지의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그들을 시 외곽으로 유인하여 거기서 기회를 잡아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그에게 그런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리에서 그를 바로 사살했다. 여관 5층에서 급습을 당한 아스카소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추적자들이 그의 등 뒤에서 맹렬히 사격을 했지만 그는 생명을 건졌다. 호베르는 자기 집에서 검거되어 시경으로 끌려갔다. 경찰국장이 그를 불렀다. 그는 감방에서 나와 도로로 통하는 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두 감시병의 가슴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고는 퍼붓는 총알 세례를 피하면서 쏜살같이 도망쳤다.
데 롤
두루티와 아스카소, 호베르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에두아르도 다토 총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두루티는 이 암살계획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암살계획을 실제로 준비한 사람은 라몬 아르크스(Ramón Archs)였다. 그는 나중에 고문 살해되었다. 이 계획의 가담자들 중 한 사람이 아직 생존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의 가담자인 라몬 카사네야스(Ramón Casanellas)는 소련으로 망명하여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였다. 그 후 그는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했다.
페데리카 몬트세니(Federica Montseny)
1932년 8월 말, 연대의식의 조직원 대부분이 아스투리아에 모였다. 9월 1일, 스페인 은행 히혼 지점이 습격당했다. 이 습격에서 희생자는 없었다. 며칠 후, 치안경비대가 오비에도에서 습격에 가담했던 몇 명의 동지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경찰은 사정없이 사격을 가했다. 그때 유세비오 브라우 동지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는 조직원 가운데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최초의 동지였다. 경찰은 솔데빌라 추기경 암살사건의 용의자로 토레스 에스카르틴을 체포했다. 경찰은 에스카르틴을 고문하여 정보를 캐내려 하였다. 그는 오비에도 형무소를 탈출하려 했지만 치안경비대의 감시가 철통같아서 탈옥에 실패하였다.
경찰은 유세비오 브라우의 시신을 확인시켜 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쉰 살이 넘었고, 미망인이 된 그의 어머니가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생계를 위하여 연대의식은 그녀가 살고 있던 신인민촌 구역의 시장에 가게를 하나 마련해 주었다.
리카르도 산스 2
무 기
우리가 가진 무기라고는 휴대용 화기와 소형 권총뿐이었다. 스페인에서 무기를 밀수입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르셀로나의 동지들은 그들이 근무하고 있던 주물공장을 생각해냈다. 동지들은 공장을 인수하면 수류탄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혁명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수류탄을 만들려면 폭약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채석장에서 일하던 동지들이 우리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제공해 주었다.
이 모든 일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돈은 은행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돈을 반대했던 우리가 은행에서 돈을 가지고 나오는 것은 변절행위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찌우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혁명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금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행위를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한 번은 내가 스페인 무기 밀수업자와 동행하여 프랑스에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마르세유에서 무기를 조달받았다. 그 밀수업자는 그런 일의 전문가였다. 나는 마르세유에서 독일제 기관총을 처음으로 만져보았다. 그것을 스페인으로 가져왔다. 장군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1936년에 나는 그 기관총을 잡고 거리로 진출하였다.
리카르도 산스 1
프리모 데 리베라의 쿠데타가 발생한 지 한 달 뒤인 1923년 10월, 연대의식은 중개인을 통해 아이바르Eibar에 있던 가라테 - 아니투아 무기 합작회사로부터 열두 발들이 연발총 1천 정과 탄약 2십만 포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을 구입하는 데 25만 페세타를 지불했다.
이보다 몇 시간 전에 연대의식은 바르셀로나의 신인민촌 구역에서 30만 페세타로 주철공장을 매입했다. 이 공장에서 수류탄 캡슐과 포탄 껍데기를 주물했다. 주물공 유세비오 브라우가 그 일의 책임을 맡았다. 또한 연대의식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빈민촌 구역에 무기고를 두고 관리하였다. 밀고자의 제보를 받고 경찰이 무기고를 수색했을 때, 6천 발이 넘는 수류탄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 구입한 휴대용 화기와 총기들을 보관한 무기고가 도시 곳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이 무기들은 대개 무기중개상들이 퐁트 로뮈와 피게르다를 가르는 프랑스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밀반입한 것들이었다. 또 다른 수송 편으로는 해로가 있었다.
연대의식의 규율은 엄격했다. 작전에 직접 관련이 있는 책임자 몇 명에게만 행동지침이 내려졌다. 각자에게 필요한 것만 알렸을 뿐 나머지는 비밀이었다. 대원들 사이에는 대장이니 주동자니 하는 간부 형태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지들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졌다.
리카르도 산스 2
혁명민족위원회가 브뤼셀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마르세유를 거쳐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러나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두루티와 아스카소가 1923년 6월에 비축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빌바오로 갔다. 무기 제작회사는 아이바르에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기술병이 중개인 역할을 맡았다. 무기수송의 공식 루트는 일단 배편을 이용하여 멕시코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선장은 바다에 나가서 새로운 지시를 기다렸다가 명령을 받으면 뱃머리를 돌려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바르셀로나로 입항한다는 것이었다. 입항할 때도 정박소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를 택하여 밤에 물건을 하역할 계획이었다. 시간이 절박했다. 그러나 회사는 인도 기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무기를 실은 배가 9월이 되어서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너무 늦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프리모 데 리베라가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끝마쳤기 때문이다. 배를 빌바오로 돌려보내 무기를 회사에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
아벨 파스(Abel Paz) 2
어머니
두루티가 레온 시에 살고 있는 식구들을 방문하러 간 뒤로 우리는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셀로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그곳 투쟁의 정황에 대해서도 듣고 있었다. 그가 어머니에게 갔을 때,―여러분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어머니는 그의 옷을 기워야 했고 구두를 수선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어. 신문은 언제나 두루티가 여기저기서 이런 짓, 저런 짓을 했다고 떠들고 있지만, 두루티가 몰래 집에 올 때는 언제나 그저 너덜너덜한 옷만 몸뚱이에 걸치고 왔지. 그 애 꼴을 좀 보라지! 기자 나부랭이들이 어떻게 썼지? 오직 두루티를 희생양으로 만들려는 새빨간 거짓말뿐이야. 그것이 지금의 그 애를 만들어놓은 거야.” 어머니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두루티를 담벼락의 낙서감으로 삼았다. 그림은 은행을 터는 장면이나 폭탄을 몸에 주렁주렁 단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항변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그 애가 집에 돌아왔을 때마다 내가 떨어진 옷을 기웠는데, 신문의 기자 놈들은 우리 애가 습격한 은행에서 돈을 삽으로 퍼갔다고 써놓다니.”
물론 실제로 습격이 여러 번 있었지만 두루티는 그 돈을 이쪽 손으로 가져가서는 저쪽 손으로 수감된 동지들의 가족과 투쟁을 위해 사용하였다. 여러분도 이해하겠지만 감춘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우리가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플로렌티노 몬로이
우리 모두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한 번이냐고?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열서너 번은 된다.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가 권력을 장악했던 1923년, 그의 하수인들은 우리 모두를 가둬버렸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우리를 감금했던 것이다. 그런 감금은 독재 정치 아래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나는 바르셀로나, 사라고사, 산 세바스티안, 레리다 등의 감옥에서 오 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우리가 수감되었을 때마다, 간수들은 우리 편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정보를 갖다 주었고, 우리의 비밀문서를 바깥으로 몰래 반출시켜 주기도 했다. 간수를 우리 편으로 만들기는 쉬웠다. 많은 간수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설득당해 그렇게 하기도 했지만 고집이 센 간수들은 돈으로 매수하였다. 우리는 동지들이 가족을 잘 돌봐주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잠잘 수가 있었다. 우리는 감방에서도 자주 정치토론을 벌였다.
나는 가르시아 올리베르와는 여러 번 같은 방에 수감되었지만 두루티와는 딱 한 번 같이 지낸 적이 있다. 당시의 형무소 동기들 가운데 여러 명이 훗날 장관이 되었다.
리카르도 산스
짧은 해설 3
스페인의 난국 상황(1917~1931)
제1차 세계대전 중 스페인은 중립국이었다. 대부분이 외국 자본가들의 수중에 들어간 북부의 낡은 광산지역은 항상 바쁘게 작업이 이루어졌다. 카탈로니아 산업에 야간 작업조가 투입되었다. 이 지방의 경기는 최고의 상태였다. 스페인의 후진적 경제구조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은 스페인 경제에 갑작스러운 호황을 가져왔다. 그러나 임금은 여전히 낮았다. 정전이 선언되던 날, 스페인의 금 보유 은행은 9천만 파운드의 금을 비축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밤이면 해안가는 빛의 물결이었다. 낮에는 화사한 햇살이 비쳤고, 새떼가 날고 여자들로 붐볐다. 여기서도 전쟁이 가져다준 황금물결이 넘쳐흘렀다. 동맹국뿐만 아니라 적국을 위해서도 공장들은 완전 가동되었다. 회사는 돈을 긁어모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삶의 기쁨으로 가득했다. 쇼 윈도우, 은행, 창녀촌에도! 그것은 쾌락적 광기로 변하고 있었다.” 이것은 직업혁명가 빅토르 세르헤(Victor Serge)가 1916~1917년의 겨울에 스페인에서 경험한 것들이다.
“더 이상 혁명을 기대하지 않으려던 순간에 결국 혁명이 터졌다. 설마 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우리는 러시아 발 긴급 전보를 읽었다. 우리는 상황이 변했다고 느꼈다. 우리에게 전해진 전보의 내용은 단순하고 구체적이었다. 이제 정의의 빛이 비춰진 것이다. 세계는 치유 불가능한 광기의 상태는 아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심지어 행동가와는 거리가 멀었던 우리 공장의 노동자들조차도 본능적으로 페트로 광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였다. 혁명의 체험은 곧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 전해졌다. 당시 스페인의 군주 알폰소 13세(Alfons \x87]\x87V)는 국민의 인기나 신용도 면에서 니콜라우스 2세(Nikolaus \x87U)보다도 나쁜 평가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요건 즉, 농업문제, 뒤처진 산업화, 유럽에 비해 거의 반세기나 낙후한 통치형태 등이 스페인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전쟁기간 동안에 일어난 상공업의 부흥은 부르주아지, 특히 카탈로니아 부르주아지의 세력을 강화시켰다. 카탈로니아 부르주아지는 대토지를 소유한 세습귀족과 완전히 노쇠한 궁정귀족에 대하여 적대적 입장에 서 있었다. 또한 산업의 호황은 아직 노동자귀족, 즉 스스로 시민계급으로 부상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신생 프롤레타리아트의 힘과 요구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은 폭력의 정신을 일깨웠다. 턱없이 낮은 임금은―나는 하루 일한 대가로 4페세타를 받았는데, 그것은 미국 화폐로 80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당장 해방투쟁으로 뛰어들 각오가 서게 만들었다.
전망의 지평은 한 주가 다르게 좋아졌다. 석 달 만에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CNT에 새로운 세력이 동조했다. 나는 작은 인쇄 노조에 소속되어 있었다. 비록 우리 노조는 수가 늘지 않았지만―회원 수는 대략 서른 명 정도였다―영향력은 커져 있었다. 마치 우리 모두는 사명으로 각성되어 있는 듯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지 삼 개월 뒤에 노동자위원회는 봉기를 위한 총파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밤에는 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번화가인 파랄레오에 있는 에스파뇰 카페에서―이 카페에 인접한 뒷골목은 창녀들이 우글거리고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음침한 사창가였고, 창녀들은 문을 열어놓고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다음에 있을 투쟁을 위하여 무장한 행동대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싸움에서 쓰러진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들은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놓고는, 옆 테이블에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경찰의 끄나풀을 비웃었다. 그들은 바르셀로나를 장악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세부지침까지 마련한 상태였다. 그러나 마드리드는? 그리고 나머지 지역들은 어쩔 것인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함으로써 군주정이 종식될 것인가?
1917년의 총파업은 유혈 진압되었다. 70명의 노동자가 무장군의 총에 죽었다. 이 총파업의 실패에는 두 가지가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나는 스페인 사회에서 군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스페인 노동자운동의 분열이다.
1880년대와 1890년대 이후부터 스페인 아나키즘을 견제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의 형태를 띤 대항세력이 성장하였다. 1879년에 창립된 이 당은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적극적으로 의회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 당은 선거제도의 공공연한 기만에 속아 수십 년 사이에 그 세력이 위축된 상태였다. 노조조직으로 이 당에 수족 역할을 했던 노동자총연맹(UGT, 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도 세계대전까지는 세력을 확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많은 회비를 모금한 형태, 보수를 받고 일을 하는 소부르주아지 출신의 전문 참모진을 둔 형태, 겁먹은 태도와 거의 다를 것이 없는 정치적 우유부단성을 고려할 때, 사회민주당은 서유럽의 모델을 충실히 모방한 셈이었다. 이 모든 관점에서 사회민주당은 CNT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었다. 두 라이벌의 대립은 지역적 분할을 낳았다. 이 대립은 내전이 터지기까지 스페인 노동자운동을 분열시켜 놓았다. 아나키스트들은 카탈로니아와 안달루시아에 활동기반을 둔 반면에 사회민주당은 주로 아스투리아Asturia, 빌바오, 마드리드에서 영향력을 다져놓았다. 개량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에야 비로소 대중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은 사회민주당의 경제주의적 · 의회주의적 환상을 촉발시켰다. UGT와 CNT 사이에 감정 대립의 골이 너무 깊어서 행동의 통일을 보인 경우는 극히 순간적인, 이를테면 1917년과 1934년, 그리고 내전의 상황에서일 뿐이었다. 조직 간에 행동의 통일을 강요하는 상황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상호 불신과 악화된 감정 때문에 행동의 통일은 언제나 깨어지기 마련이었다. 두 파벌 간에 지속적인 연대는 있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민주당은 노동자들을 기존의 사회질서 속에 통합해 넣으려 한 반면에 CNT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1917년의 혁명은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구정권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정권을 지원했던 군부와 경제 세력들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유일하게 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수구 정당들, 즉 ‘보수당’과 ‘자유당’은 전과 다름없이 정부 내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은 조정능력만 있었을 뿐 자신들의 노선을 전술적 상황에 적용하지는 못했다. 마드리드 행정부가 앞장서서 제시한 유일한 개혁안은 카탈로니아 부르주아지와의 협상이었다. 이 협상에서 부르주아지는 상당한 조세면제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그것은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자들을 좌파로 기울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카탈로니아 민족주의가 요구한 자율성의 문제는 미결로 남았다. 민족주의의 자율성 요구는 소부르주아지 스페인 민족당Esquerrapartei이라는 새로운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스페인 민족당은 노동자운동의 잠재적인―비록 불확실하기는 하지만―동맹 파트너가 되었다. 한편 의회주의라는 간판 뒤에는 사회적 우파세력들이 보이지 않는 동맹관계를 맺으며 모여들었다. 간판 전면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둔하고 무능한 지주계급이 전과 다름없이 서 있었다. 이 계급은 거만한 기생적 관료들로부터 측면지원을 받았다. 배후에는 그들과 점차 한 덩어리가 되어 성장하고 있는 기업 부르주아지와 신분이 높은 성직자들, 특히 1912년에 이미 스페인 산업과 금융 자본의 1/3을 통제 관리했던 예수회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쟁 이후에 스페인으로 흘러든 외국 자본이 있었다. 외국 자본은 1936년에 엄청난 역할을 했다(프랑스 자본이 30억, 영국 자본이 50억, 미국 자본이 30억 마르크가 들어와 있었다). 이러한 세력들의 연합은 그 내적 모순과 완강한 상호 견제에도 불구하고 1936년까지는 별 탈 없이 지탱되었다. 혁명적 노동자운동은 이러한 세력들을 정치적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투적 방법을 통하여 궁지로 몰았다.
스페인 군부는 이미 19세기에 세습귀족처럼 사회와 등을 돌리고 국가 내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장교들은 엄청나게 거만했다. 장교 한 명에 사병 여섯 명이 따라다녔다. 군대는 잘못 관리되어 기술적으로도 낙후한 상태였고, 제대로 된 훈련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년대 초에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군대의 존재 이유는 자신의 땅에서 점령군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 있었다. 내전이 있기까지 지배계급은 군부와, 이들에 가까이 서 있던 탄압을 위한 기구들(치안경비대, 비상경비대, 비밀추적단, 기병대)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지금까지도 이 점에서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력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정권이 혁명을 피하기 위해 택한 길은 군사독재였다. 스페인의 혁명은 이미 1917년에 무르익어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개혁을 주저했다. 그는 공화국을 두려워했고, 그와 함께 농경 - 과두정체는 전통적인 통치형태를 악착같이 고수했다. 사회민주당은 모호한 약속과 최소의 특혜로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CNT와의 타협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세력 대결은 아나키스트들의 활동 무대인 바르셀로나로 옮겨졌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완강하게 대치했다. 1917년에서 1923년까지의 피비린내 나는 휴전의 5년은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도시 게릴라전의 시대였다. 그 투쟁은 곧 닥칠 시민전쟁을 대비한 총연습과도 같았다. 군대와 경찰의 지원을 받았던 기업가들이 CNT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범죄와 국가 폭력 사이의 경계선이 지워져버렸다. 카탈로니아 군사령관 마르티네스 아니도(Severiano Martínez Anido)와 그의 부하인 경찰총장 아르레기(Miguel Arlegui y Bayonés) 장군은 국가 폭력의 대표자들과 흡사한 지옥의 사자들처럼 보였다. ‘도망치는’ 포로들을 마치 일상의 평범한 업무를 수행하듯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살한 사람은 게슈타포가 아니라 스페인 관청의 기관원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탈영법Ley de fugas을 통하여 사살을 법적으로 인준하였다. 카탈로니아 자본가는 군대의 특수요원에 버금가는 돌격대를 조직했다. 바르셀로나의 끝없는 근접전투는 총살, 사보타주, 선동, 비방문의 발표, 집단 체포, 프락치들의 활동, 살인, 고문, 탄압으로 도시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스페인 군대를 치명적인 패배로 몰고 간 모로코 식민지 전쟁을 1923년에 낡은 정권에게 사형 언도를 내렸다. 정권의 마지막 탈출구는 독재였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무엇보다도 기업 부르주아지 출신의 후보였다. 그는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와 무솔리니가 내걸었던 구호를 본떠서 ‘근대화’라는 강령을 들고 나왔다. 그도 물론 군부의 지지에 의존했다. 따라서 그는 군부에 온갖 특혜를 베풀 수박에 없었다. CNT는 금지조치를 당했다. 사회민주당은 정권에 협력하기로 결정했고, 그리하여 사회민주당의 총수였던 라르고 카바예로(Largo Caballero)는 독재자의 내각에 들어갔다. 그에 의하면 타협과 임금협상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노조조직의 국유화를 의미했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전선’의 형성을 초래하였다. 재야 지식인들이 탄압을 받았다. 프리모는 카탈로니아의 문제를 무시하였다. 개혁은 서류상의 개혁일 뿐이었다. 스페인 사회의 모순은 독재자의 책상 위에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1929년의 경제공황은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의 실험주의를 패배시켰다. 군부가 동요했다. 그리고 군주정은 끝이 났다. 스페인 기업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는 새로운 정부형태를 관철시켰다. 1931년 3월에 알폰소 13세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망 명
도 피
1923년,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아스카소와 두루티는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왜냐하면 스페인의 반동세력들이 그들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스카소는 사라고사의 대주교 솔데빌라 추기경을 암살한 혐의로 수감 중이었다. 동지들이 탈옥을 계획하여 실행하였는데, 탈옥수 중에는 아스카소도 끼어 있었다. 아스카소는 다른 탈옥수들처럼 거리를 배회하거나 카페에 앉아 있다가 곧 다시 잡혀 들어가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북부에서 바르셀로나로 가축을 수송하던 화물열차에 올라탔다. 수송 도중에 일어날 수 있는 탈취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 열차에는 항상 가축 감시원들이 동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스카소는 까만 감시원 복장을 하고서 한밤중에 사라고사에서 이 기차에 기어올랐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그는 바르셀로나에 있던 나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후 아스카소는 바르셀로나에서 프랑스로 갔다. 파리에서 그는 두루티와 가르시아 올리베르, 호베르를 만났다. 우리는 그들에게 수중에 남아 있던 동을 몽땅 나눠주었다. 연대의식은 프랑스에서도 계속 활동했다. 연대의식이 파리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프티Petit 14번가에 국제 아나키스트 서점을 세운 것이었다. 조직은 그 서점에 30만 페세타를 기부하였다. 동시에,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아나키즘 백과사전의 기초를 그때 다져놓았다. 그 사전은 지금도 시리즈물로 계속 출간되고 있다.
리카르도 산스 1
살아남은 네 명의 연대의식 조직원이 파리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은 호베르와 두루티, 그리고 아스카소 형제였다. 두루티는 레놀Renault 자동차공장에서 금속공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형 아스카소는 석조공장과 모자이크공장에서 일을 했고 동생 아스카소는 철판공장과 배관공장에서 보조공으로 일했다. 호베르는 매트리스공장에서 일했는데, 능력을 인정받고 공장장이 되어 다른 노동자들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그런 감독 일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아 곧 그만두었다.
데 롤
1923년, 아니면 1924년, 독재통치가 자행되던 첫해, 나는 우리가 빌바오에서 계획한 작전을 위한 접선에서 그를 알게 되었다. 두루티는 파리 망명 중에 불법적으로 빌바오에 왔던 것이다. 그는 그의 절친한 친구 중에 한 사람인 호베르와 함께 빌바오의 번화가를 태연하게 거닐었다. 그 만남은 중요한 모임을 위한 것이었다. 그 모임은 다른 조직에서 온 많은 동지들과 함께하는 회합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사회주의자들도 참석했다. 나는 그 회합에서 두루티가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이며, 나중에 공화국의 총리가 된 라르고 카바예로와 토론을 벌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후안 페레르(Juan Ferrer)
순진한 시도
파리 망명 중에도 고향의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던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폭군 독재자를 무력으로 뒤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행동대원들이 군 막사를 점령하고 바리케이드를 치는 사이에 파리 망명자들은 스페인 국경감시소를 무장 기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소문이 스페인의 여러 도시에 나돌자 군대가 점차 동요하였다. 스페인 군대는 아프리카를 탄압하기 위한 모로코 출정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로 넘어가는 탈영병의 수가 늘어났다. 상황은 혁명군에게 유리해 보였다. 파리 아나키스트들은 바르셀로나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호베르가 대표자로 임명되었다. 그가 도착한 지방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다. 무장봉기를 계획하고 준비하기 위한 그 회합에는 CNT의 대표자들과 몇 몇의 행동책들이 참석했다. 바르셀로나 동지들은 군 막사를 점령하고 포진지를 장악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행동책으로 참석한 몇 명의 병사와 하급 장교들은 위병소를 열어주고 그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많은 병사들이 봉기에 참여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호베르는 파리로 돌아와 동지들에게 작전상황을 보고했다. 또 다른 파견자가 바르셀로나로 갔다. 바르셀로나의 동지들이 거사일을 정했음을 확인하였다. 파리 조직책은 그날 엔다야Hendaya, 이룬Irún, 베라 데 비다도사Vera de Bidadosa, 페르피그난Perpignan과 피게라스Figueras 국경감시소를 습격할 계획이었다.
거사 일주일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지난 번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에 동의했던 CNT의 두 대표자가 이제 와서 겁을 먹고 갑자기 결정을 재고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야 봉기에 가담하여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고 싶지만 조직의 이름을 걸고서는 이번 행동에 참석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최고위원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벽에 쓴 ‘책임’이라는 허깨비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회의 참석자들은 이번 거사의 기본방침을 모든 ‘거물급들’을 제거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참석자 중 한 명이 파리로 돌아갔다. 회의에서 파리 밀사로 호베르를 추천했지만 이번의 경우 그는 파리 밀파를 거절했다. 그가 비록 바르셀로나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의 거사 참여는 국경선에서보다는 오히려 고향 땅에서 행하고 싶다는 것이 거절 이유였다. 그래서 다른 동지가 파리로 특파되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는 이미 봉기의 준비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거사일을 프랑스 동지들에게 전보로 알리자고 제의했다. 암호는 ‘모친 병중’이었다. 파리, 리용, 마르세유 그리고 아나키스트 단체가 있었던 다른 모든 지역에서는 그 전보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열기를 경험한 사람은 그때 일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보를 접수하면 즉시 국경선으로 달려가 국경수비대와 격렬한 투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국경수비대는 우리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조직도 더 잘 갖추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장력에서도 우세했다.
마침내 전보가 도착했다. 십여 명 내외의 작은 조직인 우리는 권총만으로 무장하고 곧 출발했다. 우리는 돈을 긁어모았다. 파리에 있던 동지들은 오르세이에서 서로 접선하였다. 형 아스카소가 차표를 나눠주고는 묵직한 가방을 들고 맨 마지막으로 기차에 올랐다. 그는 우리가 사용할 무기 중에 가장 무거운 윈체스터 소총 25정을 운반했다.
같은 시간에 바르셀로나 동지들은 아타라사나스Atarazanas에 있는 포병부대를 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소분대 단위로 인원을 편성했다. 그들은 사전에 물색한 장소를 야간에 점거했다. 공격개시는 정각 여섯시에 수류탄을 던지며 시작하기로 하였다.
아타라사나스는 바르셀로나 제5구에 위치하며, 그곳은 특히 감시가 심한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예전에 맨 먼저 가두투쟁이 발생했던 곳이기도 하고, 「노동자연대Solidaridad Obera」라는 아나키스트 인쇄소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땅과 해방Tierra y Libertad」, 「용광로Crisól」와 같은 노동자 잡지 편집부, 목재 노동자 노조와 건축 노동자 노조 본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시내에서 일하던 상당수의 노동자가 살고 있었다.
철저한 보안조치에도 불구하고 경찰 룬데(Lunte)가 사전에 냄새를 맡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한 투쟁 부대가 군 막사를 향해 진군하던 중 순찰대에 의해 저지당했기 때문이다. 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경찰 경계병 한 명이 사망했고 다른 경계병은 부상을 입었다. 증원군이 출동했고 비상경보기가 울렸다. 경찰은 기관총으로 무장하여 막사를 에워쌌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우리의 공격을 미리 차단했다. 두 명의 동지가 그 부근에서 붙들려 현장에서 총살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국경 감시초소를 공격할 기회는 아예 가질 수 없었다. 베라와 엔다야를 치기로 한 노동자 전투단은 출정노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다른 곳의 동지들보다 열여덟 시간이나 앞서 불행한 일을 당했다. 그들은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지친 몸으로 다음 투쟁에 돌입했다. 그들은 전투를 벌이면서 높은 산을 넘어야만 하는 길고 지루한 퇴각을 해야만 했다. 이 행군에서 두 동지가 넘어졌는데, 그 중 한 명은 심한 부상을 입었다. 낙오한 많은 대원들이 이틀 뒤에 체포당했다. 그들 중 네 명은 팜플로나Pamplona에서 사형되었고, 나머지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피게라스와 헤로나 공격을 담당한 단원들이 페르피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베라 사태를 이미 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경찰은 오래 전부터 비상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천명쯤 되는 남자들이 페르피얀으로 갔을 때 그들은 감시자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흩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많은 동지들이 체포되었다. 단 50명으로 조직된 그룹만 몰래 빠져나와 무기와 탄약이 들어있던 가방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그들은 속보행군을 하여 피레네 산맥 중턱에 다다랐다. 사전의 약속에 따라 그곳에서 그들은 스페인 마을에서 밀파한 한 동지를 만났다. 그는 험한 산악을 통해 피게라스로 가는 루트를 안내할 길잡이였다. 그들은 계획된 대로 형무소를 공격하여 그곳에 감금되어 있던 동지들을 탈출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산악 안내자는 나쁜 소식을 전했다. 국경선에는 포와 전차를 배치한 여러 연대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기습도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우리의 습격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단 한 번의 투쟁도 치러보지 못하고 패배자가 되어 돌아가야만 하는 치욕과 분노, 울분이 치밀어 우리는 소리 없이 울었다. 아스카소가 우리와 행동을 같이했다. 두루티는 베라 국경선을 넘은 대원들과 함께 행군하였다. 호베르는 바르셀로나 공격군에 가담해 있었다.
모든 작전은 무모하고 순진한 시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 시도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를 비웃으며 우리를 정치적 패배자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칭 아나키스트라고 했던 많은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말했다. 사실 우리의 시도는 단순한 패배였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패배를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의 실패가 구속된 동지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거나, 팜플로나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동지들의 의지를 약화시켰던 것은 아니다. 나머지 동지들, 가령 아스카소와 두루티 그리고 호베르 동지는 계속 투쟁할 것이다.
데 롤
경찰은 아나키스트 조직인 연대의식의 혁명투쟁을 뿌리 뽑기 위하여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이런 목적에서 경찰은 연대의식의 조직원들에게 스페인 히혼은행 무장습격이라는 죄목을 씌웠다. 그러나 경찰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란 간단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습격 당일 두루티는 프랑스에 있었고 아스카소 형제는 수감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스카소 형제 중 한 명은 솔데빌라 추기경의 암살혐의로 사라고사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으며, 다른 한 명은 경찰이 목재 노동자 노동조합원의 가택을 덮쳤던 바르셀로나에 있었던 것이다. 경찰의 그 습격은 동지들에 의해 격퇴 당했다. 그때 동지들은 경찰 한 명에게 부상을 입혔고 두 명은 사살했다.
경찰은 두루티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가 은행을 습격하고 프랑스로 안전하게 도주했다고 추측하고, 프랑스 정부에게 그들을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페인 당국은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아 ‘범인’의 사진과 인상착의 전단을 각국에 발송하였으며, 특히 스페인어권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들에게 강력하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때부터 칠레나 아르헨티나 등 어느 곳에서나 대형 강도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스페인 경찰은 아스카소와 두루티에게 혐의를 씌울 의도로 서류를 해당 국가에 발송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찰 당국들은 그들의 혐의사실에 대한 어떤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으면서도 그들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데 앞장섰다. 그런 식으로 스페인 경찰은 여러 나라와 연계하여 두루티와 아스카소, 호베르가 결국 신변인도가 절박한, 용서받지 못할 악인으로 세상에 알려질 때까지 온갖 조잡한 수단을 다 부렸다.
데 롤
라틴 아메리카의 모험
두루티, 아스카소 그리고 호베르는 파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라틴 아메리카로 갔다.
그들은 새로운 나라를 찾아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등을 여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도 적절한 환경을 찾지 못했다. 노동계급은 나약했고, 조직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물을 떠난 물고기 꼴이 되었다. 지루한 방랑 끝에 그들은 그런 곳에서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돈키호테처럼 여행하고서 프랑스로 돌아왔다.
리카르도 산스 1
1942년 말, 두루티와 아스카소는 그들이 스페인 혁명을 위해 공식적인 정치 캠페인을 시작한 적이 있었던 쿠바로 출발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대중연설가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두루티는 민중의 지도자처럼 활동했다. 경찰이 그들을 위험한 선동가로 지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쿠바를 떠나야만 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정말 순탄치 않은 삶을 끌어나갔다. 언제나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에서 며칠, 때로는 페루에서 며칠 체류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칠레의 산티아고 체류는 그런대로 좀 길었다. 그러나 산티아고도 그들에게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몬테비데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셰르부르크Cherbourg 행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배는 대양으로 나가지 못한 채 기계 고장 때문에 항로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기선을 ‘유령선’이라고 불렀다. 결국 그 선박은 카나리아 군도에 정박했다.
아벨 파스 2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경찰 당국은 두루티의 수배령을 내렸다. 그들은 두루티를 스페인 아나키스트 연합의 대표자로 간주하였다. 그의 사진이 역마다 혹은 기차와 전차 곳곳에 붙어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두루티는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게 체포되지 않고 온 대륙을 횡단하였다.
카노바스 세르반테스(Cánovas Cervantes)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끔 두루티를 보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라틴 아메리카 일주 여행 중이었다. 그는 그의 동지들과 함께 혁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곳에서 많은 은행을 털었다.
가스톤 레발
한 번은 아스카소와 두루티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전차를 탔는데 자신들의 수배 전단이 붙어있는 바로 아랫자리에 자신들이 앉아있다는 사실을 언뜻 깨닫게 되었다. 당국에서 현상금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 한 그 나라를 빨리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일등석 배표를 샀는데 그것은 매우 빈틈없는 계획이었다. 그들은 곧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노동자로서 일등석이라니! 물론 두루티는 누구보다 용감하고 선량한 친구였고 빈틈없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이상한 거동은 일등석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면 큰 식당 입구에는 사환이 서서 손님들의 모자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두루티는 모자를 쓴 채 사환 옆을 그냥 지나갔다. “손님, 모자를, 모자를 주시지요!” 두루티는 그를 그대로 세워두고서 모자를 자기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식사 후에 디저트가 나오면, 칼로 사과의 껍질을 벗기고 오렌지를 포크로 집는 행동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런 도구들을 그냥 내팽개쳤다.
그때 그의 친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심하게, 사람들이 벌써 자네를 쳐다보고 있다네.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아. 일을 꾸며야겠네. 그냥 쉽게 이렇게 말하자구, 우리는 곡예사들입니다!” “뭐? 곡예사들이라고? 그럼 내가 무희처럼 돌아다닐까, 아니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그냥 이렇게 할까? 알았어! 자네는 바로 운동선수인 거야. 핸드볼 선수, 어때!” 배 위에서 그들은 계속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핸드볼 선수로서 말이다. 기막힌 생각이었다. 승객들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배에서 내릴 때 삼등석의 승객들은 일일이 엄격한 검사를 받았지만 일등석을 타고 온 그들은 여권만 보여주고 쉽게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유게니오 발데네브로(Eugenio Valdenebro)
이상理想의 도서관
두루티와 아스카소의 원대한 꿈은 세계의 모든 대도시에다가 아나키즘 출판사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 일 중에 가장 큰 계획은 지식 세계의 중심지인 파리에 그 본부를 두는 것이었다. 그 본부 옆에 오페라나 콩코르 광장이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근대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작품들을 각국어로 번역 출판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목적에서, ‘국제 아나키즘 출판사’가 파리에 설립되었다. 이 출판사로부터 많은 서적과 팸플릿, 잡지가 다양한 언어로 출간되었다. 프랑스 정부도 세계의 다른 모든 반동 정부와 마찬가지로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그 일을 방해하였다. 두루티―아스카소 조직이 이제 문화영역에서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정부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돈키호테의 그 두 후예들을 추종하던 자들이 일시적으로 매장될 지경이었다. 그 우울한 기사 돈키호테가 ‘부당한 행위를 근절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지상에다 정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창을 들었듯이, 그들은 다시 권총을 들었다.
카노바스 세르반테스
두루티는 원조비로 자유국제노동자동맹에 총 50만 프랑을 기부했다.
스페인 공화국이 선포된 후에 아나키스트들은 출판사를 바르셀로나로 이전하려고 계획했다. 이 계획에는 수천 페세타가 필요했다. 그러나 프랑스 헌병들이 포르트부 역 세관 검역소에서 모든 자료들을 불 질렀다. 그리하여 그토록 많은 자금과 희생을 바쳐 쟁취했던 성과물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
유명한 러시아 아나키스트이며 유격대원이었던 네스토르 마흐노(Nestor Machno)는 당시 파리에 있던 한 작은 가구공장에서 일했다. 두루티처럼 그도 행동파였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농민군과 함께 그는 반혁명적인 백색 근위대를 격퇴하였다. 적색군의 병참장교였던 트로츠키는 마흐노가 러시아 혁명에 자유노선을 도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를 축출하려고 했다.
두루티는 그를 매우 존경했고 그와 친한 사이가 되었다. 성격 면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닮았다. 둘은 혁명의 목적을 두고 같은 생각을 했다.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
국왕 암살계획
나는 아스카소와 두루티를 베르테(Berthe)라는 이름을 가진 파리의 한 여성 동지의 집에서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나의 가방에 대해서 물었다. 물론 나는 그들에게 가방을 보여주었다. 아스카소가 가방을 손에 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가방이 참 부드럽군요.” 나는 대답을 하면서 그 가방은 최고급 강화섬유로 만들어진 최고품이라고 자랑했다. 아마 사람들은 내가 물건을 팔러 다니는 세일즈맨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만사가 헛수고였다. 아스카소는 그 가방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왜 그랬는지 나중에 가서야 깨달았다. 그의 가방은 몇 개로 분해된 총과 다른 무기들을 옮기는 데 사용되었다.
1926년 약정된 그날, 파리에서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의 국빈방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선조 가문, 즉 보르본 가家가 저질렀던 그 모든 것보다 더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두루티와 아스카소는 프랑스 제3 공화국이 프란시스코 페레르의 살인자를 환영하기 위해 마르세유에서 축포를 울리는 바로 그 순간에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차분하게 준비했다.
스페인 남자들은 부르주아지이든 프롤레타리아트이든 간에 고관대작이 방문할 때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런 관습은 우리 두 동지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국왕의 공식방문이 있기 바로 전날까지도 철저히 준비했다. 삼엄한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프랑스 수도의 저명인사들이 드나들던 그런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들은 클럽에서 테니스를 쳤다. 그리고 환영식 때 정치인들이 타는 의장 승용차 옆을 지날 때에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였다. 모든 계획이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었다.
공식방문 전날 우리는 베르테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녀는 나뿐만 아니라 아스카소도 맛보려 하지 않았던 사고수프Sagosuppe를 우리에게 대접한 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그녀의 요리 솜씨를 놀려댔다. 그녀는 두루티와 아스카소가 그 집을 나갔을 때 울었다.
“둘이서 공모를 꾸미는 그 현장에 아무 관계도 없는 제 남편이 있을 것”이라고 보르본 가의 악명 높은 스파이 마니스칼코(Maniscalco)가 언젠가 그녀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 바로 그 삼자가 아스카소와 두루티가 타고 갈 그 승용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 경찰에 매수되어 있었다. 두 암살자는 체포되었고, 파리 시민들은 마르세유의 축포가 울렸을 때 아무 탈 없이 알폰소 13세를 환영할 수 있었다.
프랑스 민주당이 체포된 자들을 보르본 가 하이에나의 목구멍에 넘기지 않은 것은 파리 동지들의 거센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루티와 아스카소가 석방되어 벨기에 국경선을 넘을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았던 것이다.
벨기에의 한 기계제조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프란시스코 아스카소가 나에게 마지막 작별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에게 비록 많은 걱정거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청년 아스카소가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언제나 농담을 즐기는 것 같았다. 키는 작았지만 몸이 가볍고 민첩했다. 그의 얼굴을 보면 그에게 아랍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얼굴빛은 검은색을 띠었다. 그는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그의 까만 머리카락은 언제나 가지런히 빗겨져 있었다.
두루티는 몸집이 상당히 큰 편이었다. 아주 겸손했으며 말이 거의 없었다.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은 강인했다. 그는 당시 커다란 안경을 끼고 다녔던 걸로 기억된다. 약간 근시안이었다. 그 두 친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한쪽이 없어서는 서로가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색하는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과 떨어질 수 없는 법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념적으로 볼 때도 그들은 결코 개인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을, 대중운동을 전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원동력으로 보았다. 그들은 대중이 그들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으며, 대중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대중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었다.
니노 나폴리타노(Nino Napolitano)
아스카소도 그들이 알폰소 13세의 암살계획을 어떻게 준비하였는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스페인 국왕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의장행렬이 어디를 지나갈 것이며, 어디서 쏘아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고용한 운전사가 그들을 경찰에 밀고했다. 당시 경찰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신문을 사려고 하는 순간에 체포되었다. 그 후 두루티와 아스카소 그리고 호베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고 세 사람은 모두 피고인석에 앉게 되었다.
유게니오 발데네브로
재 판
나는 많은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을 법정에서 변호하였는데, 가끔은 결과가 좋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들 중에 가장 완강하고 용기 있었던 사람들은 아스카소, 두루티, 호베르였다.
1926년 7월 2일, 프랑스 당국은 경찰이 스페인 국왕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단서를 잡고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국왕에 대한 성대한 환영행사가 7월 14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세 사람은 레장드르 거리에 있는 가구가 딸린 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미 스페인에서도 그들을 수배 중이었다. 10월에 그들은 형사재판을 받았다. 검찰 당국은 반국가적 행위, 여권 위반, 외국 치안법령 위반 등과 같은 온갖 죄목을 다 붙여 공소를 제기하였다. 이 소송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오히려 더 투쟁적이었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통치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스페인에 혁명의 물결을 일으키기 위하여 국왕을 제거하려 했다고 대담하게 증언했다.
그들은 징역형을 선고 받고 헌법재판부로 이첩되었다. 헌법재판부의 판결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다른 두 나라의 정부로부터 이미 범인 인도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온 것인데, 요청 동기는 “그 범인들이 산마르틴은행 무장 강도 습격사건의 혐의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발송된 것이었다. 마드리드 정부는 두루티가 히혼은행 습격에 가담했으며, 아스카소는 1923년 사라고사의 추기경 암살음모의 공모자였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정부는 스페인의 협조요청서를 기각하였으나 아르헨티나의 청원서를 헌법재판부에 양도했다. 베르통(Berthon), 게르누(Guernut), 코르코(Corcos)와 함께 내가 변호를 맡았다. 법정 앞에는 평상시와는 달리 경찰들이 총동원되어 무장경계를 하고 있었다. 온 법정이 마치 출정지처럼 보였다. 아스카소와 두루티, 호베르는 동원경찰을 개의치 않았다.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 햇빛에 그을린 얼굴, 짙은 눈썹,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고야 앞에 모델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베르통 변호사가 이 거친 ‘암살범’을 위해서 알랑거리는 말과 사근사근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다시 한 번 인사치레의 말투로 변호를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제가 스페인의 극단적 자유노선을 걷고 있는 이 세 사람을 재판관님 앞에서 변호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재판에서는 범죄자의 신병 인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선고 결과가 전적으로 정부에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법에 의하면 내각이 이 판결을 속결 지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승복할 수가 없어서 즉시 정치적인 장외투쟁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우리는 법정투쟁을 병행하기 위하여 에리오트(Herriot), 팽르베(Painlevé), 레이게스(Leygues)와 같은 사람들에게 의뢰했다.
앙리 토레스(Henri Torres)
두루티는 1년이 넘게 콩시에르제리Conciergerie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가 참수형을 당할 때까지 수감되어 있던 그 감방에 수감된 것이다. 그가 석방된 후 경찰은 그를 벨기에 국경 근처로 데려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국경을 넘어가라고 명령했다. 이런 방법을 써서 프랑스 정부는 그들에게 골칫거리였던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의 신병 인도 요청을 회피하려 했다.
카노바스 세르반테스
정치투쟁
내가 전기의자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미국 아나키스트들을 구하기 위해 사코(Sarco)와 방제티(Vanzetti) 위원의 이름을 걸고 지루하게 끌어온 긴장된 정치투쟁을 계속 벌이고 있던 어느 날, 나의 동료들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아스카소와 두루티, 그리고 호베르는 어떻게 되었는가? 자네가 그들을 변호해야만 하네.”
그 세 명의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의 정치투쟁을 CNT의 노선에서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티네스 아니도가 그 조직을 불법단체로 규정하여 금지명령을 내리고 프리모 데 리베라의 지시를 받고 있던 형리들과 알폰소 13세의 충복들이 끈질기게 그들을 추적하자 그들은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그 후 그들은 프랑스를 공식방문하려 했던 이른바 ‘그들의 국왕’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범죄사건이 발생했다. 은행 출납계 직원이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경찰의 끄나풀인 한 택시 운전사의 증언으로 아스카소, 두루티, 호베르가 그 사건의 혐의자로 지목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부르던 대로 ‘소총병 삼총사’는 스페인 정부의 탄압을 피해 서둘러 떠났던 여행이―비록 그들이 그 사건과 무관하더라도―의혹을 불러일으킨 화근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프랑스 당국에 그들의 신병 인도를 정식으로 요청했고, 그 요청은 원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에 앞서 아스카소, 두루티, 호베르는 파리 법원이 불법 무기소지죄로 그들에게 선고한 6개월 징역형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장전된 총을 소지하고 스페인 국왕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가 승용차 안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나는 서로 성격이 다른 두 사건을 동시에 다루면서 한꺼번에 다섯 명의 투쟁가들을 변호해야만 했다. 이런 나의 상황은 마치 내가 스페인 망명자들을 위해 활동했던 정치적 망명자 보호법 위원회의 일을 소홀히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페인 망명자 측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사코 · 방제티 위원회의 일을 소홀히 했더라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나는 여전히 ‘순수 노선파’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는 협박을 받고 있는 다섯 명을 구하기 위한 나의 교섭활동을 양해해 달라고 그들에게 요구할 수가 없었다. ‘순수 노선파’의 한 사람이 나의 행동을 두고 반쯤 빈정대고 반쯤 거슬리는 시를 쓰기조차 하였다. 그 시는 이렇게 끝맺었다. “죽음이 두려우랴! 죽음이여 어서 오라!” 물론 여기서의 죽음은 ‘시인’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나에게 빈정거린 사람이 그가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스페인의 독재자도 아스카소와 두루티, 그리고 호베르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스페인 정부는 그들의 수많은 정치적 암살음모를 맹렬히 비난하였다―그러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프랑스는 자유주의를 표방하려 했다. 결국 모든 것이 스페인과 아르헨티나 정부가 조작한 허위 연극이었다. 만일 세 사람이 스페인 당국에 인도된다면 그들은 잘하면 스페인 단두대의 사형은 모면할 수 있겠지만, 그 대신 끔찍한 푸에고 섬에서의 종신유배를 언도받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물론 우리가 그 ‘소총병 삼총사’를 변호했던 상황이 완전히 유리한 상태만은 아니었다. 당시 그곳 경찰은 ‘혐의가 있는’ 세 외국인의 국외 추방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운명마저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항소의 가능성은 희박했다. 오직 프랑스 정부만이 경찰 전권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정권 책임자는 포엥카레(Poincaré) 수상과 바르투(Barthou) 내무장관이었다. 그들은 비굴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극을 받으면 쉽게 동요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운동을 벌여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영향력 있는 인권협회가 우리를 지원하게 할 생각이었다. 조심스럽게 활동하는 그 조직이 하는 일이란 대개 제1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좀 지나치게 행동한 소수 자유주의자들을 옹호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위기에 처한 그 아나키스트들을 그냥 못 본 체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그저 무서운 소문만 떠돌았던, 소외받고 있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우선 내가 알고 있던 한 고관 부인을 찾아갔다. 부인의 이름은 마담 세베린느(Séverine)였다. 그녀는 친절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요, 레코인 의원님?” 문제가 무엇인지 나는 몇 마디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내가 구명운동을 펼치고 있는 동료들의 무죄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요구하지 않았다.
“좋아요, 레코인 의원님. 제가 메나르 도리앙(Mesnard-Dorian) 부인에게 보낼 서찰을 의원님께 써드리지요. 부인은 협회에 영향력이 있는 분이랍니다. 또 아주 친절하시구요. 아마 의원님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메나르 부인은 레장드르 거리에 있는 도시 궁정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응접실에는 공화국의 높은 양반들이 드나들었다. 그녀는 당장 빅토르 바쉬(Victor Basch) 협회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다시 나는 그 사람을 찾아갔다. 그는 나를 특별히 환영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의원님의 친구 분들은 죄가 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우리 협회 대표자들이 제게 그렇게 보고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내용이 빈약하기 그지없는 서류 뭉치에 근거하여 재판하는 아주 그릇된 판사들보다 더 간단하게 일을 판단하는 것 같다고 항변했다. 그때 그는 말꼬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의 최고 법정에 다시 서게 된다면 그들을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그려!”
“아나키스트들의 생각은 회장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라고 내가 대꾸했다. 그는 벌컥 화를 냈다. 나는 그가 소르본 대학의 교수였고, 몇 해 전에 아나키즘에 관한 책을 펴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그의 화를 누그러뜨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냥 나와 버렸다. 우리의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기만을 당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서야 비로소 게르누(Guernut)라는 인권협회 사무총장이 전화를 걸어 ‘아스카소 및 공동 피고인’ 사건에 관한 우리들의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 ‘공동 피고인’은 내가 보기에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했지만 협회는 우리가 긴박하게 필요한 수단이었다. 우리가 열 문은 인권협회의 지원에 따라 변화의 속도가 달라질 수가 있었다.
내무장관은 바쉬 회장과 게르누 사무총장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직접 방문하려고 했다. 그는 세 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유죄라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할 바가 못 되며, 협회는 잘못된 정보에 귀 기울이지 말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나는 바쉬와 게르누의 연락을 받고 그들에게 갔다. 아직도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레코인 의원님, 사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의원님의 친구 분들이 무죄가 아니라고 솔직히 시인하시지요! 만일 의원님께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드시면 인권협회와 협의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대여섯 개의 일간지 신문사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다. 다른 잡지들도 우리의 활동을 기사로 실었다. 망명자 보호법 변호위원회는 아스카소, 두루티, 호베르의 신병 인도 문제를 정부가 연루되어 있는 정치적 사안으로 부각시켰다. 이런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그 세 명의 아나키스트들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들은 프레스네스Fresnes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바르투는 심문을 포기하고 법적 진단을 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프레스네스 병원으로 달려갔다. 형무소 소장과 그의 부하 직원들이 이 열로 서서 나에게 인사했다. 내가 이런 도열을 받으며 형무소를 방문하게 된 것은 내 일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각자의 독방 침상 위에 누워있던 그 세 프로테스탄트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했다.
그 후 그들은 정해진 재판관 앞에 섰다. 그러나 재판관은 법조문을 핑계로 신병 요청이 받아들여질 것인지의 여부에 관한 공식적인 질문만을 하도록 했다. 그는 네 명의 유능한 변호사들(코르코, 게르누, 베르통, 토레스)의 변론을 무시한 채 공식적 질문만을 인정했다. 그것으로 내무장관은 승리한 기분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찰국장 대리가 피수감자들의 신병을 인도받기 위하여 이미 파리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양손을 비비고 있었다.
소송에서 패한 듯했다. 그러나 나는 예전의 두 배로 뛰었다. 6천 명의 군중들이 시위를 벌이기 위해 불리에르Bullier 체육관에 운집하였다. 팽르베와 에리오트 장관에게 협상 대표자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팽르베 장관이 허둥지둥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더듬거렸다. “물론 그렇지만…… 물론……” 사람들은 다른 부패한 각료들과 마찬가지로 그래도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차라리 에리오트가 그 중 좀 나은 태도를 보였다. 그는 48시간 안으로 이번 사건에 관한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가져오게 하겠다고 했으며, 이 문제를 내각에서 거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다음 재심 때까지 범인의 신병 인도 문제의 결정을 연기하겠다고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경찰 국장 대리는 분통을 터뜨리면서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아르헨티나 신문은 일면기사로 이렇게 표제를 달았다. ‘프랑스 정부, 한 갱단 때문에 곤욕을 치르다!’
이 사건이 일찍이 여론화되었다면 아스카소와 두루티는 이미 오래 전에 석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부는 스페인 왕실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정부는 다시 한 번 타협하려 했고 결국 신병 인도를 결정하였다.
정부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번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며, 오직 의회만이 정부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긴급동의안을 국민 입법회의에 상정할 영향력 있는 의회를 소집하려고 했다. 나는 국민 입법회의에 무기한 출입권을 발급받아 거기에 있는 나의 회의 집무실을 정돈하였다. 다섯 명의 의원들이 이미 긴급동의안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지표는 2백 표였다. 그러나 아직 50표가 부족했다. 나는 나머지 표를 여당으로부터 끌어내야 했다. 세심한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런 일에 적합한 사람은 본래부터 의회주의를 반대한 자들 외에 더 기대할 사람이 없지 않았던가!
그 사이에 프랑스 전국은 여전히 아스카소, 두루티 그리고 호베르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피수감자들을 인도하기 위해 전함을 출항시켜 대기하고 있었다. 무장한 순양함이 대서양 한가운데 떠 있었다. 그러나 인도 기한이 만료되도록 ‘소총병 삼총사’는 여전히 콩시에르제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우리는 법규를 들이대면서 당장 그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우리는 비웃음만 샀다.
마침내 의회 청문회 날이 다가왔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정의였지만 어떤 의원들은 포엥카레 정권을 실각시킬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의회는 루머와 공론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청문회가 얼마나 번거로운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는 포엥카레는 정오 휴정 직전에 충복 말뷔(Malvy) 재무위원장을 내게 보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저, 레코인 의원님께서는 도대체 무얼 원하십니까? 의원님께서는 이 정부의 실각을 정말 그렇게도 원하십니까?”
“나는 다른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소. 우리는 다만 한 가지만을 요구하고 있소. 아스카소와 두루티 그리고 호베르를 석방하라는 것뿐이오.”
“제가 당장 수상께 다녀오겠습니다. 의원님께서는 두시에 다시 이리로 좀 와주십시오. 제가 그때 의원님께 수상의 결정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표결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바르투와 포엥카레가 항복하겠다고 전해 왔다. 이날은 1927년 월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날 우리는 오르페브르Orfévre 선창 가까이 있는 콩시에르제리 형무소 정문에 도착했다. 우리는 기자들과 사진사들에게 둘러싸였다. 문이 열렸다. 아스카소와 두루티 그리고 호베르가 거기에 서 있었다.
루이 레코인(Luis Lecoin)
반쯤 마술사이고 반쯤 카푸친의 수사修士와 같이 집요한 레코인은 그의 기묘한 전술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였다. 1927년 7월, 콩시에르제리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나의 협력자는 피수감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다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당신은 석방될 것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 작정입니까?” 두루티는 잠시 침묵을 지킨 뒤 생각에 잠긴 채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계속 운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앙리 토레스
동반자
물론 부에나벤투라와 나는 정식 결혼을 올리지 않았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을 바꾸는 것, 그것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파리에서 만났다. 그때가 아마 1927년이었을 것이다. 그는 막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프랑스 전국에서 대대적인 정치 시위운동이 있었다. 정부가 굴복했다. 소총병 삼총사는―이 별명은 여론이 지어준 것이다―석방되었다. 두루티가 출감한 그날 저녁에 그는 몇 명의 친구들을 방문했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갑자기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우리의 사랑은 지속되었다.
에밀리엔느 모린(Emilienne Morin)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정부가 그들의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의 동지들은 소련에다 피난처를 마련하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그들에게 요구한 조건 때문에 그 노력을 좌절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이제 남은 방법이라고는 변장을 하고 파리로 되돌아가는 일밖에 없었다. 몇 명의 동지들이 그들을 한 달 동안 숨겨주었다. 그들은 리옹에서 겨우 일자리를 구했다. 반년이 지난 후 경찰이 그들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재판을 받았고 추방명령을 어긴 죄로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호세 페이라츠(José Peirats)
우리는 리옹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재판으로 이제 두 번째 소송이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부에나벤투라가 여권 없이 리옹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스카소의 여자 친구와 함께 형무소를 찾아갔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내가 마음속으로만 짐작하고 있던 형무소생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이 석방된 후 급행열차 편으로 벨기에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에서도 경찰이 끈질기게 따라붙었고, 체류허가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독일로 갔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에밀리엔느 모린
뜻밖의 외국 손님들
그 후 1928년, 두루티는 그의 친구 아스카소와 함께 베를린에 도착하였다. 물론 불법 입국이었다. 이제 중요한 일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두루티는 약 2주 간 베를린의 빌메르 마을, 아우구스타 62번가 5층에 있는 나의 집에 기거했다.
그러나 그가 직업을 갖고자 할 때에는 경찰에 보고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위해 체류허가증을 발급받으려고 애썼다. 당시 프로이센 정부는 사민당과 중앙당이 제휴한 연립정부였다. 때마침 나는 쿠르트 로젠펠트(Kurt Rosenfeld) 법무장관을 알고 있었다. 그를 찾아가 두루티의 체류를 법적으로 허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만일 두루티의 이야기가 나오면 중앙당은 분명 암살기도 사건을 다시 끄집어낼 것이 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사라고사 추기경 암살음모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루티가 머물렀던 몇 주 동안 나는 그와 많은 토론을 했다. 그는 루돌프 로커(Rudolf Rocker), 프리츠 카터(Fritz Kater), 에리히 뮈잠(Erich Mühsam)도 알고 있었다.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왜냐하면 두루티가 독일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화는 늘 혁명 이야기에서 맴돌았다. 언제나 두루티는 혁명의 결과가 한 당의 독재정치로 이어져서는 안 되며, 새로운 사회는 아래서부터 위로 이루어져야만 한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명령하달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식 혁명의 결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틴 조우취(Augustin Souchy)
두루티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키가 컸고 건장하였으며 머리도 비상했다. 마치 당통(Danton)과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위엄이 있었다. 물론 그가 분위기에 따라 목소리를 바꿀 때는 친근하기도 했고, 거의 부드럽기조차 하였다.
나는 물론 그와 그의 동지들에 대해서―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의 떠돌이 생활, 그리고 그들의 습격사건에 대해서도―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물론 이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아스카소와 두루티는 정치 갱단이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혼란한 시기의 테러리스트들이기도 했다.―지금도 신문은 그렇게 떠들고 있다―그러나 그들은 단 한 푼도 사취하지 않았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브뤼셀에서의 나날들
1930년, 마침내 그들은 브뤼셀에서 벨기에의 체류허가증을 받았다. 그들은 2년 동안 브뤼셀에서 살았다. 거기서 아스카소와 두루티는 나의 친구가 되었다.
아스카소는 매우 친절한 동지였다. 그는 아이러니하면서도 분별력이 있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항상 가벼운 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반대로 두루티는 육상선수 이상으로 매우 강하게 활동했다. 그는 머리숱이 많았고, 웃을 때는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의 시선은 선하면서도 빛이 났다. 나는 아스카소를 먼저 알게 되었따. 우리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였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이미 우리 대화의 대부분은 사회문제였다. “어떤 인간도 인간을 지배할 권리는 없다”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아련히 들려오는 것 같다. 나는 금세 그에게 매료되었다.
1930년에서 1931년까지 브뤼셀에서 지낸 사람은 당시 얼마나 많은 국외 동지들, 특히 스페인과 이탈리아 동지들이 그곳에 기거하였는지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다녔던 피신처의 그 어떤 침울한 분위기와 함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마음씨 착한 햄 데이(Hem Day)가 몽마르트에 마련했던 작고 허름한 서점이 그들의 피신처였다. 그곳은 모든 ‘혁명분자들’의 접선지였다.
2층에 세든 사람이 둘 있었다. 나와 상인 바라스코(Barasco)였다. 그 방은 작은 공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이상야릇한 공장은 직접 행상에 넘기는 온갖 종류의 장난감을 만들어냈다. ‘공장’은 방이 한 개뿐이었는데, 그것이 식당, 거실, 부엌, 침실 혹은 공동침실로도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밤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수가 제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량해 보이던 여섯 명의 사람들이 바라스코의 이름을 대면서 찾아왔다. 그들 중에 아스카소와 두루티도 끼여 있었다.
레오 캄피온(Léo Campión)
나는 그 후 속기록 타이피스트로서 해왔던 일을 그만두고 그를 찾아 브뤼셀로 갔다. 스페인 망명자들은 벨기에에서 소위 말하는 반半 합법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가짜 신분증과 가명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벨기에 경찰은 그 사실을 모두 자세히 알고 있었다. 경찰이 두루티의 증명서들을 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데도 여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뤼셀의 경찰은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었다.
에밀리엔느 모린
아스카소와 두루티는 서로 완벽한 보완 역할을 하였다. 두루티는 행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정열적이고 적극적이어서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었다. 반면에 아스카소는 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끈덕졌고 친절하면서 계획적이었다. 말하자면 완벽한 전술가였다. 그는 혁명의 실천계획을 수립한 사람이었다. 그의 계획은 언제나 약정된 시간에 모든 세부지침이 맞아떨어질 만큼 치밀했다. 두루티의 장점은 과감하고 신속하여 머뭇거림 없이 일을 처리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단호하면서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다. 감히 그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벅찬 일이었다.
카노바스 세르반테스
짧은 해설 4
스페인의 난국 상황(1931~1936)
스페인 노동계급은 공화국의 선포를 정치적 승리로 받아들였다. 모든 억압의 시대가 지나간 후에는 으레 그렇듯이 CNT도 조직을 새롭게 정비했다. 이 특수한 조직형태는 동면에서 깨어나 복권된 세력들과 함께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권은 공화국의 출범을 혁명운동의 덕택으로 생각하지 않고 유혈사태 없이 보초병을 교체한 덕택으로만 여겼다. 정부의 위기와 새로운 선거라는 자유주의와 부르주아지 당파들의 회전목마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회전판 저울의 바늘은 경제적으로는 허약하지만 숫자상 다수를 점하고 있던 소부르주아지 ‘중도파’를 향했다. 소부르주아지는 사회민주당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 정부를 견제하였다. 다시 말해서 공화국의 사회적 기반은 우스울 정도로 허약했던 것이다. 즉 공화국은 정치적 힘을, 오직 우파연합과 노동운동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호견제의 상황에서 어부지리로만 얻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새 정부의 통치력은 보잘것없었다. 구조적 개혁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농업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토지개혁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라는 몇몇 조항을 제외하고 나면 공화국 일 년 동안 구조적 진보를 이룬 개혁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카탈로니아의 자치권 조례의 승인이었다.
노동과 농민 문제에는 답변이 없었다. 이들 조직의 최대 세력인 아나키즘운동연합은 의회를 보이콧했다. 정부의 조치에 실망한 대중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파업과 농민봉기, 기아에 시달린 폭동, 도시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정부는 노동계급의 직접적 행동에 대하여 예전과 마찬가지로 경찰과 치안경비대, 군을 투입하는 긴급조치 외에는 달리 대응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비상조치가 정해진 순서였다.
공화국 3년에 스페인의 난국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선거 참여를 거부한 결과, 반동세력은 힘들이지 않고 완전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새로 형성된 우파들의 선거조직세력인 CEDA가 의회에 개입했다. 힐 로브레스(Gill Robles) 정부는 공화국 출범 초기에 내놓았던 빈약하기 그지없는 몇몇 성과마저도 사문화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33년부터 1935년까지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우파의 전술적 목표는 당연히 노동운동을 근절하는 것이었다. 물론 힐 로브레스는 파시스트는 아니었다. 히틀러가 반혁명세력들과 함께 독일의 경제구조를 단숨에 근대화함으로써 집결된 경제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침략군으로 무장한 반면에, 스페인의 우파세력은 자신들의 입장에서도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린 왕정복고에만 관심을 쏟았다. 따라서 이들에게 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유일한 길은 후퇴였다. 그러나 그 길도 폭력으로써만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 사회민주당은 생존의 문제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과거에 써먹었던 협조라는 낡은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이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다면 자멸에 이를 것이다. 당이 개혁에 앞장서라는 기초 당원들의 압력이 고조되었다. 이 상황에서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라르고 카바예로는 정권과의 공조를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유 부르주아지 공화당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장저항을 준비시켰다. 사회민주당의 지도를 받았던 노조조직, UGT(노동자총연맹) 내부에서 갑자기 레닌의 구호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1934년 10월에 UGT의 본거지인 아스투리아에서 지금까지의 아나키스트들의 어떤 무장행동도 무색하게 만든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부당하게도 아스투리아 ‘10월 혁명’은 잊히고 말았다. 파리 코뮌 이래 서유럽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와 비교될 만한 구호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스페인 북부의 전 지역이 이 구호를 외치며 일어났다. 곧 노동자위원회가 형성되었다. 마드리드의 지도부는 이 운동을 자제시킬 힘마저 잃어버렸다. 해묵은 라이벌 의식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대對 정부군 투쟁의 깃발 아래 사회민주당과 아나키즘,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아스투리아에서 통일전선을 펼쳤다.
아스투리아 혁명의 비극은 혁명이 처음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그 원인이 있었다. 아스투리아는 스페인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다. 마드리드 봉기는 초기부터 진압되고 말았다. 아스투리아 노동자들은 바르셀로나에 허약한 동맹 파트너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파트너는 카탈루냐 민족당Esqerra으로서 루이스 콤파니스가 이끌었다. 그는 카탈루냐의 자치를 수호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 아나키스트들은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들을 빈번히 비방했다. 그는 사회민주당이 경찰로 하여금 CNT를 추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을 종종 받았다. 결국 노동운동의 이 뿌리 깊은 분열이 1934년 ‘10월 혁명’ 실패의 실질적 원인이다.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반란군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아스투리아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데에는 몇 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혁명본부들이 포 사격을 받았다.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사령관의 지휘를 받고 있던 외인부대와 무어족 연대가 아스투리아 노동자들을 대량 학살했다. 탄압은 잔인했다. 1935년 말, 스페인 감옥에는 3만 명이 넘는 정치범들이 갇혀 있었다.
진압이 성공한 후에 반동세력의 기고만장한 태도는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반동세력은 1936년 2월에 새 선거를 공포할 만큼 그들의 힘을 과시했다. 이 공포가 얼마나 경박한 조치였는지는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아스투리아 패배 이후 사회민주당은 혁명을 위해서만 당이 창립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사회민주당은 후회하는 심정으로 의회전술로 되돌아가 중도노선의 공화파들과 선거 연대투쟁을 결의했다. 수적으로 열세한 공산당 그룹도 이 연대투쟁에 합세했다.
이 연대는 1936년 2월 선거에서 압승을 획득할 ‘인민전선’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지각변동도 의회 등단을 완강히 거부했던 세력이 인민전선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즉 1백만에 육박하는 회원 수를 가진 CNT가 선거 보이콧이라는 구호를 묵인함으로써 통일전선의 출범을 결행했다.
그러나 새 정부는 1931년의 조치와 마찬가지로 단호한 개혁을 거의 실행하지 못했다. 새 정부는 힐 로브레스 정권이 무효라고 선언했던 법들이 다시 효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으로만 만족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옛날 그대로였다. 인민이 인민전선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화주의자들은 스페인의 난국을 풀어갈 수 없었다.
낡은 사회를 허물려는 움직임은 오히려 우파 쪽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인민전선의 출범 첫날부터 우파는 선거에 의해 세워진 정부를 힘으로 전복시키려는 결의를 다졌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적 · 조직적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어떻게 하여 반동세력이 왕정복고의 꿈에서 벗어나 침략자로 변모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좋은 실례를 보여주었다. 세계대전의 주축국들은 그러한 변모를 넘어서 인민들에게 선동적 지원뿐만 아니라 물질적 지원도 약속했다. 스페인 파쇼집단인 팔랑헤Falange가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군부는 제국을 준비했다. 정부와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정부는 주저했다.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7월 17일 프랑코가 스페인-모로코 군사반란을 선두 지휘하였다. 7월 18일 반란은 전국을 휩쓸었다. 반란군은 사흘 만에 스페인의 1/3을 수중에 넣었다. 철저한 로마 가톨릭 지역인 나바나, 아라곤, 갈리시아, 레온, 구舊 카스티야(카스티야라비에하 Castilla la Vieja, 카스티야 왕국의 북부에 해당하며 현재의 칸타브리아 지방, 라리오하 지방, 부르고스 주, 소리아 주, 세고비아 주, 아빌라 주, 바야돌리드 주, 팔렌시아 주와 면적이 일치한다-편집자 주), 세비야, 카리츠와 코르도바가 정복된 것이다. 그러나 반란군은 필사적인 저항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들은 스페인 민중을 이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공화국
귀국
제2공화국이 선포되고 며칠이 지난 1931년 4월에 두루티와 아스카소 그리고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나의 집을 찾아왔다.
우리는 오랜 시간 토론했으며, 특히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주요 문제를 거론하였다. 한 부류는 제2공화국에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반대쪽은―그들은 두루티, 아스카소 그리고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소속한 아나키스트 운동의 극좌파였는데―공화국이 구성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스페인 사회의 진보를 위태롭게 하고, 혁명적 구조변화의 과정을 단절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고백한다면, 사실 그 당시 나는 극단적인 대변혁이 우리의 과업을 망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 후 공화국의 진행과정을 보면서 나는 두루티, 아스카소 그리고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주장이 옳았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공화국이 보수주의적 개량주의로 변질되고 말았다. 공화국은 당시 스페인의 절박한 문제였던 토지개혁을 단 한 번도 시행할 수 없었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1931년 스페인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을 때 정말 모두가 열광했고 도취된 상태였다. 브뤼셀에 있던 망명자들은 그들의 서류를 찾아서 가능하다면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두루티와 아스카소가 제일 먼저 떠났다. 우리는 가방과 짐을 꾸리기 위해 남아 있었다.
나는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첫 인상은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좋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에는 비가 그리 많이 오지 않는다고들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비옷을 브뤼셀에 있는 한 여자 친구에게 선물로 줘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때는 6월이었다. 정치적 분위기도 파리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프랑스 아나르코 생디칼리슴 운동까지도 알고 있었는데, 그곳은 여기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밤과 낮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스페인 동지들의 정신상태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약간 단순하고 초보적이었다.
나를 놀라게 한 또 한 가지는 여성들의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시위에서 여성들이 드물게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남자를 동반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카페에 드나들었다. 그들은 커피 잔을 앞에 두고 몇 시간씩이나 앉아 있었다. 그들은 술꾼은 아니었다. 물론 술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부에나벤투라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당신의 동지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모두가 독신자들뿐이랍니까?” 그러나 그 당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당시 스페인 여자들은 집에 눌러앉아 있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에밀리엔느 모린
공화정이 선포된 후 스페인에 갔을 때, 그때 나는 두루티를 트랑킬리다드Tranquilidad 카페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트랑킬리다드’는 스페인어로 ‘조용한 카페’라는 뜻이다. 당시 그곳은 아나키스트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자주 체포해 갔던 경찰들의 접선지이기도 했다. 물론 경찰은 언제나 몰래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만남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는 이미 두루티에 관해 많은 소문을 들었다. 그는 내가 그 믿을 수 없는 소문을 듣고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매우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그가 가끔 보여주었던 그 무한한 정열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르투어 레닝(Arthur Lehning)
그 ‘소총병 삼총사’ 중에 아스카소가 가장 침착한 사람이었다. 가르시아가 강인한 힘을, 두루티가 튼튼한 팔과 의지력을 소유했다면 아스카소는 그야말로 냉정하고 명석한 두뇌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가 입가에 우울하거나 농담 섞인 표정을 지을 때의 모습은 부드러우면서도 신중했다. 그의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아이러니했다. 몸은 야위어 왜소했지만 행동은 신중했다. 그는 다소 느긋한 것 같았지만 그 이면에는 초인적인 힘이 잠재해 있었다. 그는 민중적이고 가끔 들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루티와 비교해 보면 다소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커다란 주먹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굵직한 목소리를 내는 부에나벤투라와 냉정하지만 언제나 입가에 웃음을 잃지 않는 프란시스코가 함께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부에나벤투라는 힘을, 프란시스코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5월 1일
스페인 공화국이 제정된 후 나는 친구인 아스카소, 두루티, 호베르를 만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갔다. 5월 1일 전날 저녁에 도착했다. 공산주의자들이 5월 1일에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여 도시 곳곳에 플래카드를 잔뜩 걸어놓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CNT-FAI는 아무것도 내걸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쪽지 하나도! “그들은 선전선동 가능성을 다 포기했단 말인가?” 내가 물었다. “전단 한 장 보지 못했네.” “우리는 「노동자연대Solidaridad Obrera」라는 일간지에 우리의 행진을 공시했네.”
다음날 실제로 아나키스트들은 10만 명을 모았다. 공산주의자들은 기껏해야 6~7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아나키스트들의 자신감이 도를 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총병 삼총사’와 그들의 스페인 동지들은 그런 나를 비웃었다. 그들은 내가 지나친 신경과민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몇 년 후 그들은 그 조심성의 결여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루이 레코인
매주 일요일마다 FAI는 몬주익Montjuïc 공원의 넓은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연사로서는 거의 매번 카노 루이스(Cano Ruiz),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아르투로 파레라(Arturo Parera),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두루티가 등장했다. 처음 이 집회에는 2백 명 정도의 청중들만 참석했다. 그러나 연사들, 특히 두루티와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했던 연설이 소문으로 알려지자 광장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매주 일요일마다 수천, 수만의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두루티는 뛰어난 웅변가는 아니었다. 그의 연설은 거의 언제나 일관성 없이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수사학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왔다. 강하고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는 은연중에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말을 꾸미지 않고 이야기를 매우 쉽게 했다. 그것이 대중을 끌어들이는 그의 강하고 풍부한 감정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헤로나Gerona 지방의 동지들이 두루티를 한 시위에 연사로 초청한 적이 있었다. 연설을 마친 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동기는 그가 파리에서 알폰소 13세의 암살을 사전에 모의했다는 그 해묵은 죄목이었다. 검찰 당국은 군주정이 무너지고 대사면 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모양이었다. 헤로나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형무소를 파괴하고 두루티를 석방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번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이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당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파업 사흘 만에 두루티는 석방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1931년 5월 1일에 봉기가 일어났다. 예술궁전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 사면으로 풀려난 정치범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카탈루냐의 프란시스코 마시아(Francisco Maciá) 대통령에게 보낼 결의서가 작성되었다. 거대한 시위행렬이 줄을 이었다. 이 행진에 가르시아 올리베르, 두루티, 아스카소, 산티아고 빌바오 그리고 CNT-FAI의 또 다른 지도자들이 선두에 섰다. 그것은 공화국 선포 이래 가장 큰 프롤레타리아트 행진이었다. 군중들은 도시의 넓은 도로로 행진해 갔다. 행렬이 카탈루냐의 중심인 정부 청사 앞에 당도했을 때 경찰이 발포했다. 노동자들과 경찰 간에 공방전이 일어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군이 개입하였다. 1개 대대병력이 공화국의 광장으로 출동했다. 당장 두루티가 군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치안경비대와 기동경찰대가 다시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려고 했을 때 군인들이 경찰에게 거총자세를 취하였다. 그래서 대량학살이 방지되었다.
이 돌발적인 사태는 1931년 공화국의 모순된 정책의 상징이었다. 공화국 관직에는 아직도 군주정치의 하수인이었던 구세력들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공화국은 노동계급의 권익을 대변할 그 어떤 사회정책도 수행할 수 없었다. 체제형태만 바뀌었을 뿐 알폰소 13세 때의 구시대적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민중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
암울한 공화국
공화국 체제 하에서 심각한 계급투쟁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였다. 1932년, 카탈루냐 피골스Figols 탄광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이 파업은 본격적인 차원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들이 1933년 1월에 다시 들고일어났다. 주로 카탈루냐 지방에서 일어났지만 안달루시아에서도 파업이 발생하였다. 나는 카사스 비에하스Casas Viejas의 비극만을 기억하고 있다. 같은 해 12월에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한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1934년에는 아스투리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였다. 그 혁명은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최초의 혁명이었다. 이 혁명에 스페인의 거대한 두 개의 노조조직인 CNT와 프롤레타리아트 형제들이여 단합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UGT가 협력했다.
1936년 1월 선거에서 좌파가 마침내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선거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정치범을 사면하겠다는 공약이었다. CNT는 반反 의회주의였지만 이번만은 투표를 하든, 하지 않는 그것은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고 선언함으로써 실상은 선거 참여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선거를 보이콧하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두루티도 의견을 같이했다.
공화국 시절 두루티는 모든 봉기와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모든 일은 일관성 있게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오자마자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때문에 그는 1932년에 또다시 아스카소와 함께 아프리카에 있는 시스네로스Cisneros로 추방되었다. 그 후 내내 연금되어 있었다. 정권은 사면이나 전술전환의 조치로 두루티를 석방했다가 얼마 후 또다시 그를 체포하는 일을 반복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조용히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두루티는 언제나 노동자들에게 공화파들과 사회주의파들이 혁명을 배반했으므로 혁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페레스 콤비나(Pérez Combina)와 아르투로 파레라와 함께 그는 피골스 갈탄 탄광지로 갔다. 그는 광부들에게 시민적 민주주의는 파산했으며 혁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부르주아지의 재산은 공유되어야 하며, 국가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렇게 될 때만이 노동계급의 참다운 해방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탄광 노동자들에게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그는 강철과 다이너마이트로 폭탄을 제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것은 스페인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농민들은 대지주를 지켜주었던 치안경비대와 매일 투쟁했다. 전국 도처에서 파업이 발생하였다. 선거를 앞두고 있던 정부로서는 부르주아지의 입장에 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들 편에 설 수도 없는 난감한 입장이었다. 정부는 결국 부르주아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1932년 1월 19일, 피골스 광부들이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무장봉기를 시작했다. 이 운동은 카르도너Cardoner와 알토 요브레가Alto Llobregat 골짜기를 휩쓸었다. 피골스, 베르가Berga, 수리아Suria, 히로네야, 살렌트Sallent 탄광지가 혁명의 화염에 휩싸였다. 이 도시에서 최초로 자유공산주의가 사건에 개입하였다.
8일이 지난 후 군대가 개입을 시작했다. 봉기를 진압할 때 군대는 상당히 온건적이었다. 왜냐하면 정부군의 지휘자는 온건파 장교인 움베르토 힐 카브레라(Humberto Gil Cabrera)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CNT의 한 친구가 되었다. 그의 덕분에 탄광 노동자들에 대한 유혈진압을 피할 수 있었다.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
1932년 1월 18일, 피골스 탄광 노동자들이 알토 요브레가 탄광지에서 공공연한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사유재산과 자본제를 폐지할 것을 선언하였고 자유공산주의를 외쳐댔다. 중앙정부는 선동자들을 ‘노조원의 이름을 빌린 폭도들’이라고 불렀고, 수상 마누엘 아사냐(Manuel Azaña)는 그 지역 지사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군을 동원하든 어떻게 하든 15분 안에 시위를 진압하시오.” 그러나 실제로 군이 이 시위를 진압하는 데는 5일이 걸렸다.
호세 페이라츠 1/2
무정부의 5일―그것은 꽃 한 송이가 피었다가 지는 정도의 시간일 뿐이었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추방
그 사이에 바르셀로나에서 총파업이 선언되었다. 꼬리를 문 충돌과 총격전이 있었다. 탄광에서 체포된 수백 명의 탄광 노동자들이 해상 수송을 위해 형무소처럼 개조된 함선에 태워졌다. 배는 바르셀로나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다. 탄압의 물결이 카탈루냐 전 지역과 레반테Levante 해안, 그리고 안달루시아를 덮치고 있었다. 주동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행 기선으로 수송되었다. 그 기선은 2월 10일에 1백4명의 시위 가담자들을 수송하였다. 거기에는 두루티와 아스카소도 끼여 있었다. 배의 항로는 스페인의 식민지 서부 아프리카(리오 데 오로, Río de Oro)와 카나리ㅏ 군도(푸에르토벤투라)로 정해져 있었다.
프란시스코 아스카소가 동지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썼다.
“자신들의 알량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이런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던 불쌍한 부르주아지들!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보고 놀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고문과 추방 그리고 살인이 그들의 본질이니까! 그러나 마지막 결정타를 맞지 않으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 동물조차도. 부르주아지의 마지막 결정타에 맞서다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슬픈 일이다. 특히 이 투쟁에서 쓰러진 사람들이 우리의 형제들이라면. 우리가 폐기처분하지 못한 법률이 그들의 살인행위에 합법성을 보장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노동계급이 당하고 있는 이 단말마의 고통은 더 이상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강철 배의 몸체는 우리의 분노에 찬 함성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적들의 종말의 시작이다. 가끔 실패하여 희생되는 동지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지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의 해방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작별인사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이별의 작별인사가 결코 아니다. 동지들이여! 우리는 곧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이오.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로부터.”
호세 페이라츠 2
동지들이 아프리카로 추방되었을 당시, 그들은 바나나 수송 증기선에 태워져 기네아Guinea 항만의 바타Bata 항구로 수송되었다. 물론 그들 1백69명은 모두 화물칸에 갇혀있었다. 바람이 들어오는 구멍한 단 한 개의 작은 통풍창뿐이었다. 그들은 갑판 위로 올라가려 했다. 아스카소가 말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는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그때 감시병이 권총을 빼들고 소리쳤다. “돌아가!” 그러나 알다시피 아스카소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감시병이 총을 겨누었다. 아스카소가 말했다. “쏠 테면 쏴 봐라, 이 비겁한 돼지 같은 놈아. 네가 나를 지금 죽이지 못하여 내가 나중에 네놈을 거리에서 만나게 되면, 네놈을 개처럼 취급할 거야!” 중사는 불안했다. 떨고 있었다. 아스카소를 사살하면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서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동지들 모두가 갑판 위로 달려 나갔다. 그런데 선장이 호위 구축함에 지원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해병들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총의 안전장치를 푼 채 밧줄을 타고 기선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 폭동은 이유가 있는 정당한 것이었다.
두루티가 앞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셔츠를 찢었다. 당시 그는 체중이 90킬로그램 이상 나가는 거구였다. 그가 해병들에게 소리쳤다. “우리가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당신들이 우리를 위협할 수 있지만, 만일 우리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면 스페인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곧 알게 될 것이오.” 그때 장교는 차라리 협상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폭동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겠으며, 피수감자들이 언제라도 갑판 위로 나오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바타 항구로 갔다.
마누엘 뷔산(Manuel Buizan)
거의 물속에 잠길 것 같은 고철선 부에노스아이레스 호號가 리오 데 오로에 정박했을 때 시스네로스의 지사는 두루티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아무도 지사의 그런 조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두루티는 결국 추방된 자들과 분리되어 몇 명의 동지와 함께 카나리아 군도의 하나인 푸에르트벤투라 섬으로 이송되었다. 시스네로스 지사의 이름은 레게랄(Regueral)이며, 그가 빌바오의 초기 주지사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빌바오의 초기 주지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나키즘 운동을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하였고, 퇴직 후 어떤 행사에 참석했다가 밤에 레온 시 거리에서 권총 사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인 레게랄은 두루티와 그의 몇몇 동지들이 자기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두루티를 자신이 관리하는 식민지 땅에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리카르도 산스 3
소요
CNT는 추방조치에 대하여 다시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시청을 습격하여 흑 · 적색기를 달아 올렸다. 그들은 군 막사를 포위 공격하였다. 사바델Sabadell에서 지원 병력이 출동했다. 격렬한 투쟁을 벌였지만 결국 아나키스트들이 패배했다. 그 결과 그들은 최소 4년에서 최고 20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추방조치에 대한 항거의 물결은 계속 이어졌다. 5월 29일, 이 항거는 시위운동, 무장충돌, 사보타주로 절정에 다다랐다. 형무소는 구속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구속자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형무소가 불탔다. 폭동을 진압한 형무소 소장이 며칠 지나지 않아 넓은 도로에서 피살되었다.
호세 페이라츠
1932년 12월 말,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돌아왔다. 공화-사회민주당의 연립정부는 CNT에 대한 탄압을 계속 자행하였다. 그럼에도 FAI는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공원의 예술궁전에서 대중 집회를 열었다. 추방에서 돌아온 두루티는 그곳에서 첫 연설을 했다. 청중의 수는 대략 10만 명 정도 되어 보였다. 그는 매일 혁명을 계획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경찰은 예술궁전 주변에 수많은 기관총을 거치하였다.
카탈루냐 부르주아지는 겁에 질려있었다. 그들의 언론은 정부가 아나키즘에 대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CNT는 불법화되었고 CNT의 일간지 「노동자연대」의 간행도 금지되었다. 정치적 대중 집회는 모두 원천 봉쇄되었다. 아나키스트들 가운데는 구속자의 수가 더 늘어나더라도 정부의 탄압조치에 물리적 힘으로 강력히 대응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철도노조가 동맹파업을 선언하였다. 이 동맹파업은 국가의 경제와 정치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정부는 철도를 군의 감시 하에 두겠다고 위협하였다.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이 봉기를 계획 구상하였던 것이다. 아스카소, 두루티, 아루렐리오 페르난데스, 리카르도 산스, 디오니시오 에로레스(Dionisio Eroles), 호베르 그리고 다른 동지들이 이 계획에 찬성하였다. 한 사건이 이런 행동을 더욱 부채질했던 것이다. 일라리로 에스테반(Hilario Esteban)과 멜러(Méler)라는 두 아나키스트가―이들은 나중에 내란이 발생했을 때 아라곤 전선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바르셀로나의 클로트Clot 구역에 폭탄공장을 하나 세웠다. 경찰은 공장이 잘못하면 폭발할 수 있다는 구실을 대며 공장을 수색하였다. 경찰이 아나키스트들의 병기 창고를 점거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은 지체하지 않고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래서 아나키스트 행동대원과 FAI 보호간부들이 1933년 1월 8일에 바르셀로나의 군 막사를 습격하였다.
스페인 전 지역에서 무장 봉기가 연이어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부는 이 봉기를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
1월 봉기가 실패한 후 두루티와 아스카소가 다시 구속되었다. 그들은 이번에는 푸에르토 데 산타마리아(Puerto de Santa María) 형무소에서 6개월을 보냈다. 그 후 두루티는 석방되자마자 그의 끈질긴 집념에 따라 다시 일에 착수하였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공화정이 선포된 후 CNT와 FAI는 온갖 비방과 모욕을 당해야 했다. 공산당 신문인 「바타야La Batalla」지가 게재한 헤드라인의 표제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FAI-주의=파시즘(FAI-isumus=Faschismus)’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라르고 카바예로의 초기 고문관으로서 활동했던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파브라 리바스(Fabra Riba)의 선언을 기억하고 있다.
“아스카소와 두루티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정신박약의 미치광이들이다. 우리는 그런 미치광이와의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들과 논의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과거의 잔재를 즉각 청산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루스 데 알바(Luz de Alba)
어느 날 공화국의 지시를 받고 있던 해당 관청이 우리의 인쇄기를 압류해 간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 인쇄기는 우리의 신문인 「노동자연대」를 찍어내던 윤전식 인쇄기였다. 나는 압류 이유를 몰랐다. 당국은 신문의 광고가 무슨 무슨 일을 선동했다고 했다. 신문은 더 이상 나오지 못했다. 인쇄기가 강제 경매되었다. 수많은 장사꾼이 몰려와 값을 매겼다. 그러나 그곳에 경매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도 경매장에 갔었다. 적어도 스무 명 정도는 되었는데 그 중에 두루티와 아스카소도 있었다. 두루티가 일어나서 우리의 윤전기에 20페세타를 불렀다. 물론 그 값은 지나치게 낮은 것이었다. 다른 장사치들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1천 페세타!” 첫 경쟁자가 이렇게 값을 부르자 두루티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내걸었던 값을 당장 취소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스카소가 끼어들었다. 그가 소리쳤다. “4두로Duros!” 그것 역시 이십 페세타였다. 아스카소보다 높은 값을 부르고 싶었던 그 구매자는 옆구리에 권총을 의식했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경매인은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망치를 들고 버터 바른 빵 값에 불과한 20페세타로 윤전기를 우리에게 넘기겠다고 말하고 망치를 쳤다.
그 당시와 지금은 비교할 수가 없다. 우리가 프랑스 망명 당시 CNT의 인쇄소에서 한 일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그때는 인쇄기가 부족했다. 우리 인쇄기도 형편없이 낡은 상태였다. 우리는 새 기계가 필요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물론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다. 합법적으로 매우 열심히, 그것도 이 낡은 인쇄기로 말이다. 우리에게 두루티와 아스카소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새 인쇄기를 구입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텐데. 그러면 우리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을!
후안 페레르
공장 활동
자칭 노동자 공화국이라고 말했던 그들이 두루티를 어떻게 했던가? 그들은 두루티가 여기저기서 선동을 하며 다닌다고 하여 그를 바타 섬으로 유배하였던 것이다. 아스카소와 두루티 그리고 다른 수백 명의 동지들은 한평생 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먹고 살았다. 그들은 사무실에 앉아 노조로부터 보수를 받으며 일한 전문 기능인들이 아니었다. 두루티는 보스체계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CNT나 FAI로부터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었다.
마누엘 에르난데스
바르셀로나의 댐Damm 맥주 양조장의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에 항의하여 파업을 일으켰다. 기업 경영자들은 양보는커녕 몇 명의 노동자들을 해고까지 하였다. 그래서 CNT는 댐 맥주 불매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몇몇 소매업주들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은 계속 댐 맥주를 팔아주었다. 그러자 두루티와 서너 명의 동지들이 그들을 찾아가 유리창과 술잔, 바의 스탠드를 부수었다. 그러자 바르셀로나의 모든 술집에서는 허겁지겁 게시판을 내걸었다. 그 위에는 〔저희 업소에서는 댐 맥주를 팔지 않습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2주 후 회사는 파업기간의 봉급을 지급하였다. 회사는 해직노동자를 복직시키고 새로 정한 봉급기준을 CNT와 협상함으로써 파업을 매듭지었다.
라몬 가르시아 로페스(Ramón Garcia López)
두루티는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들의 연대투쟁과 직접적 경제활동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1933년 이후부터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노동자들에게 교육시키려 애썼다. 그는 무엇보다도 공장위원회의 발족이 시급하다고 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노동연대를 사회혁명의 기초로 여겼다. 1933년 가을, 대규모의 반反 의회주의 집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장은 노동자의 대학이다.”
하인츠 뤼디거(Heinz Rüdiger)
그는 우리의 운동에 중간계급, 즉 학생과 작가들이 가담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노동자 대중과 연대할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형무소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느 날, 그는 흔히 기술공과 전문가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에 대하여 불평했다. 미장공이 집을 설계하여 세울 수 있듯이 금속 노동자도 어떤 공장이든 완벽하게 가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다른 모든 부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리베르토 카예하스(Liberto Callajas)
일상생활
스페인에서의 나의 일상생활은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내 전공을 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스페인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나는 노조를 돕거나, 영화관의 좌석 안내원이라는 일자리를 얻기까지 청소부로 일했다. 당시 영화관 좌석 안내원은 가장 깨끗한 직업이어서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여러 번 일자리를 바꾸었다. 우리는 계속 이사를 다녔다. 바르셀로나에서만 대여섯 번 이사했다. 거기에다 부에나벤투라는 걸핏하면 형무소 신세를 졌다. 직업혁명가 남편을 둔 여자들은 비참한 생활을 했다.
1931년 나의 딸 콜레트(Colette)가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딸의 출생은 나의 생활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두루티가 오랜 기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는 동지들이 생활비를 대주었다. 우리가 방세를 지불할 수 있을 때까지 동지들 개개인이 몇 페세타씩을 기부하였다.
에밀리엔느 모린
1936년 초에 두루티는 바로 내 옆집에 살았다. 그는 산스Sans 구역의 작은 집에 기거했다. 기업가들은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아무데서도 직업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동반자였던 에밀리엔느가 영화관 좌석 안내원으로서 가족의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어느 날 오후에 우리는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때 그는 부엌에 있었다.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면서 어린 딸과 아내를 위해 저녁을 짓고 있었다. 나와 함께 갔던 한 친구가 그에게 농담을 했다. “어이, 두루티,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은 여자들이나 하는 일 아닌가?” 두루티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자네도 본을 좀 받게. 나는 집사람이 일하러 나가고 없을 때는 집안 청소도 하고 잠자리를 정돈하며 요리도 한다네. 그 외에도 나는 딸을 씻기고 옷도 갈아입힌다네. 자네 부인이 일하고 있는 동안 자네같이 올바른 아나키스트가 선술집이나 카페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자네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라네.”
마누엘 페레스
물론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연애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스페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연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웃음이 절로 났다. 자유연애란 그들의 기질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책에서만 자유연애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여성해방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문제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말하지만, 스페인 남자들은 자신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편견에 대해서는 즉각 해결하려고 했지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각별히 노력했다. 여자는 부엌에만 매여 있어야 한다니! 그들은 이런 생각에 얽매여 있었다. 나이가 많은 한 동지가 한 번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이론은 정말 좋고 훌륭하다. 그런데 아나키즘도 중요한 일이지만 가족은 아나키즘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가족의 문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쨌든 나는 부에나벤투라와 함께 행복하게 지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답답하게 막힌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자신이 누구와 생활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않았던가!
에밀리엔느 모린
그는 내 마음에 든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한 번도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아주 검소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감히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이 말을 여러분은 믿어도 좋다.
호세파 이바녜스(Josefa Ibañez)
나는 아스카소를 「노동자연대」의 인쇄소에서 만났다. 1934년 당시 우리는 언제나 거기서 우리의 선전 팸플릿을 가져갔다. 그 팸플릿은 우리가 비합법적으로 독일에 보냈던 독일어판 팸플릿이었다. 그것은 마치 초콜릿 봉봉 상자에서나 볼 수 있는 광고용 인쇄물처럼 포장되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햇살에 익숙지 않아 언제나 모자를 쓰고 다녔다. 아나키스트들에게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속성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스카소는 내가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만으로 나를 약간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인사했다. 나의 손에는 못이 박혀있지 않았다.
“아, 예? 선생께서 바로 그 아스카소 씨입니까?” 나는 반문투로 말했다. 그는 너무 왜소하여 큰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이 말투에 그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런 목소리로 묻지 말았어야 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비웃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스물한 살이었지만, 열일곱 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아스카소 씨는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사람 같았다. 그 밖에도 그는 우리같이 농담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곧 나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 역시 내가 쓴 모자를 벗게 했다. CNT의 남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였지만 품위를 중히 여기고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었다. 철도 노동자인 나의 한 남자친구는 그의 평상시 습관대로 귀족처럼 행동했다. 그만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두루티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대단히 소박한 사람이었다. 귀족처럼 품위 있게 행동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그 사람들도 그를 존경했다. 어느 오후에 나는 두루티를 그의 부인이 현금수납계와 좌석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는 영화관에서 만났다. 에밀리엔느는 카운터에 앉아 지나가는 모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두루티가 갔을 때만 조용히 있었다. 나는 몇 가지 물건을 사기 위하여 람블라스Ramblas 거리로 갔는데 그가 나와 동반해 주었다. “저는 폭탄과 총격이 무서워요”라고 내가 말했다.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거의 매주 파업이 일어났다. 습격사건이 터지고 경찰이 진압작전을 펼쳤다. 람블라스 가로수 뒤에 기동경찰대가 칼을 꽂은 총을 들고 잠복 대기하였다. 가끔 정규군까지 눈에 띄었다. 몸에 수양버들을 꽂은 무어족들을 볼 때는 특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마치 그 분위기는 오페라 무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인들이 상점 앞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지붕 테라스에서 수류탄이 떨어졌다. 밀어 올리는 유리창 덧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닫혔다. 여자들은 흰 손수건을 흔들며 상점 안으로 뛰어들거나 보도 바닥에 엎드렸다. 잠시 후 다시 조용해졌다. 공습경보 해제신호가 울려 퍼졌다.
두루티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지도 않고 나와 함께 경찰 옆을 지나갔다. “나도 너만큼이나 겁이 났어.” 그가 말했다. “두려움과 용기는 서로 아주 가까이 나란히 서 있는 거란다. 어디쯤에서 두려움이 중지하고 용기가 발동하기 시작하는지 나도 가끔 모를 때가 있어.” 거리의 아이들이 그를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다. 나를 진지하게 대해주기까지 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결코 쉽게 여자와 교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전혀 반대로 그들은 대개 칼뱅주의자들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항상 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두루티는 공명심이라고는 몰랐다.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진지한 태도로 대했다. 바르셀로나의 모든 사람은 그를 새로이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를 마치 왕의 장례식처럼 치러주었다.
마델라인느 레닝(Madeleine Lehning)
선거 보이콧
1933년 11월 의회선거를 앞두고 CNT는 전례 없는 정치 선동을 펼쳤다. 그들은 투표 불참을 강력하게 선언했다. 선거 보이콧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아나키스트들의 신문과 팸플릿은 모든 마을에 전해졌다. “우리는 투표를 거부한다”는 제1면의 제목은 스페인 농민들과 노동자들로부터 대대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들은 ‘수상쩍은’ 여당과 좌파 자유당 및 사회민주당의 정책에 의해 이미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왔던 것이다. 이 정치적 선동은 11월 5일 바르셀로나의 투우 경기장에서 개최된 대중 시위 때 그 절정에 도달했다. 이 대회에 참석한 노동자는 7만5천~10만 명이나 되었다. CNT의 저명한 대중연설가들이 ‘선거를 앞둔 사회혁명’이라는 제목 하에 연설을 하였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가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난번 공화국의 제정을 위하여 투표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선택해 준 공화국이 9천 명의 노동자들을 구속하리라고 상상했다면 공화국을 제정하자는 데 투표했겠습니까?”
“아니오!” 대중들이 소리쳤다.
다음 연사로는 아주 젊은 아나키스트 발레리아노 오로본 페르난데스(Valeriano Orbón Fernández)가 등장했다. “공화파들의 혁명은 좌절되었고 파쇼들의 반혁명이 우리의 코앞에 다가서 있습니다. 독일은 어떠했습니까?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히틀러가 무엇을 꿈꾸고 있었는지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선거를 통해 자기 자신의 사형 언도에 서명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자랑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어땠습니까?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선거에서 45%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 아닙니까! 거기다 6%의 유동 표를 자기네 쪽으로 끌어들인다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계산한 표를 얻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전에 아주 간단한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뭐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계산이 적중하여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하더라도, 다음날 자신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손에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다는 상황이 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반동들은 기득권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법입니다.”
호세 페이라츠 2 / 스테픈 존 브라데마(Stephen John Brademas)
1933년 11월 19일 의회선거 투표 기권 비율
바르셀로나 : 40%, 사라고사 : 40% 이상, 유스카 : 40% 이상, 타라고냐 : 40% 이상, 세비야 : 45% 이상, 카디스 : 45% 이상, 말라가 : 45% 이상, 스페인 전체 32.5%
세자르 로렌소(César Lorenzo)
1933년 선거에서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그때까지의 노동운동 가운데 최대의 선거 보이콧― 정치적 선동을 전개한 셈이었다. 선거 불참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것으로만 그쳤다. 그 결과 우익 보수당이 승리하게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힐 로브레스 정권은 파쇼정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권이 극단적 반동정권인 것만은 분명했다.
아르투어 레닝
사라고사 봉기
선거 직후 CNT는 마드리드에서 비밀회의를 소집하였다. 나는 그 모임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논의된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CNT는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주마다 지역위원회를 두고 있었다. 물론 위원회는 대개 독자적 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항상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아라곤 대표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올바른 정부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근본책임이다. 우리는 선거결과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행동해야만 한다. 지금이야말로 무장봉기를 일으킬 때가 아닌가?”
그러나 바르셀로나 대표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무기도 없으며, 준비도 되지 않았다. 지난해 이미 우리는 수많은 패배를 경험했다.”
그러나 아라곤 대표자들은 봉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아라곤 북부 지방에서는 투표 기권율이 거의 90%에 육박했다. 그래서 그곳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만만했던 것이다. 사라고사는 처음 며칠 동안은 CNT의 지시를 따랐다. 그곳 북부지방 곳곳에서 자유공산당이 선언되었다. 비록 CNT가 처음에는 봉기를 찬성하지 않았지만 일단 봉기가 발생하자 외부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는 즉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모든 일이 몇 주 만에 끝났다. 두루티와 메라(Mera), 그리고 다른 동지들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국가내란음모죄로 기소되었다.
아르투어 레닝
바르셀로나의 기념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두루티는 반동들의 선거 승리에 대한 대응책은 무장혁명뿐이라고 선언하였다. CNT는 이 선언을 채택했다. 그러나 1933년 1월의 봉기가 실패한 후 아직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가르시아 올리베르만이 이 선언에 반대했다. 그는 이 정책을 모험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수년 간 우정을 다져왔던 그와 두루티 사이에 처음으로 일어난 의견충돌이었다. 두루티는 봉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사라고사로 갔다. 혁명은 다수 의석을 차지한 반혁명세력들이 마드리드에서 의회를 소집하던 바로 그날 시작되었다. 그날은 1933년 12월 8일이었다.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
이른 아침에 바르셀로나의 정치범들이 집단 탈옥하는 놀라운 사건이 터졌다. 그들은 시내로 통하는 하수구에 구멍을 뚫었던 것이다.
CNT 혁명위원회는 본부를 사라고사에 두었다. 거기에는 아나키스트 민족위원회도 있었다. 오후에 터진 수십 발의 폭탄은 도시 전체를 흔들어놓았다. 정부는 즉각 공권력을 발동하여 1백 명 정도의 혁명군을 체포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두루티와 이사크 푸엔테(Isaac Puente), 시프리아노 메라(Cipriano Mera)를 위시하여 위원회의 회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두투쟁은 밤을 지나 그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쳤다. 수도원이 불태워졌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연결하는 급행열차가 화염에 휩싸였다. 열차가 폭탄에 의해 방화되었던 것이다. 군대가 강력한 대응조치를 취했다. 장갑차까지 동원되었다.
알카야 데 구르레아, 알캄플, 알바레트 데 싱카 그리고 유스카 지방의 여러 마을에서 자유공산주의가 선언되었다. 테루엘 지방의 여러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발데로블레스Valderrobles 지역의 농민들은 화폐를 폐기처분하였고, 시 공관과 지방법원, 토지등기소의 모든 공문서를 불태워 없앴다.
그러나 봉기는 곧 실패하고 말았다. 지방 도시만이 CNT의 파업선언에 동조했던 것이다. 투쟁은 아라곤과 리오하Rioja 지방에 국한되었다. 혁명의 결정적 열쇠를 가지고 있던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는 1월 봉기 실패의 상처로부터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운동 세력 내부의 심한 분열 때문에 혁명은 모험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호세 페이라츠 1 / 스테픈 존 브라데마
새 형무소
나는 사라고사 형무소에서 그와 함께 보냈던 고통스러웠던 시간과 즐거웠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조차 농담을 즐겼다. 그에게는 순수성, 말하자면 어린 아이와 같은 순박성이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투쟁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바로 12월 8일의 봉기가 결정되었던, 사라고사 금속 노동자 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그 중요한 모임에서 그가 이야기하던 당시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그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거리에서 가두투쟁이 벌어졌다. 투쟁의 결과는 우리의 기대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다. 우리가 거리로 진출했을 때 두루티는 내 옆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파시즘과 계속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콘베르티도Convertido 거리에서 두루티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투쟁이 끝난 뒤에 나는 형무소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마누엘 살라스
두루티는 폭동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데 그가 사라고사에 구류되어 있는 동안 예비 심문조서가 밤사이에 법원에서 몽땅 증발해 버렸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1
나는 국제 아나키스트 노동자동맹(AIT)의 비서로서 1935년까지 스페인에 있었다. 나는 스페인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두루티를 만났다. 그는 당시 바르셀로나에 수감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찾아갔다.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그의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 하지만 내가 형무소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비합법적으로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노동자동맹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라도 체포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면회를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저는 우선 제 직분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경솔한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저 나를 따라온 걸로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말을 하지 마세요. 우리가 당신을 제 사촌이라고 말하고 당신은 그때 적당한 이름으로 서명을 하는 겁니다.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에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나보다 스페인 말을 훨씬 더 잘할 텐데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결국 나는 그를 방문하기로 하고 그들과 함께 형무소를 찾아갔다. 두루티가 창살 뒤에 서 있었고, 우리 앞에도 창살이 있었다. 두 창살 사이를 간수가 왔다 갔다 했다. 두루티가 불어로 나에게 소리쳤다. 그는 정치문제에 관하여 목이 터져라 이야기했다. 조직은 사업을 어떻게 해나가야 한다, 등등 계속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여기 감옥소에서, 그것도 외국인에게 불어로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있는 것을 간수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 그들이 당장 나를 체포하겠지. 이런 일은 스페인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거야. 그러나 나는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고 형무소 문을 나올 수 있었다.
아르투어 레닝
아스카소와 두루티는 또다시 체포되어 바르셀로나 경찰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 관해서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경찰서에 면회를 신청했다. 독방에 앉아 있던 두루티는 머리가 봉두난발이 되게 헝클어놓았다. 부인들이 도착했을 때 그는 오랑우탄처럼 소리를 질렀다. “우! 우! 우!” 여자들이 기겁을 하였다. 간수가 소리쳤다.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그러자 두루티가 이렇게 말했다. “이 여편네들은 우리가 원숭이나 되는 듯이 생각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이 여자들이 땅콩을 던져줄 만큼 아직 원숭이가 덜 되었으니까, 재미를 보고 싶어 하거든 이 여편네들을 서커스장으로나 보내시지!”
유제니오 발데느브로(Eugenio Valdenebro)
인민전선
1934년 아스투리아 10월 혁명 후 두루티는 다시 감금되었다. 이번에는 발렌시아 형무소에서 여러 달을 보냈다. 그는 자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실패로부터 벗어나서 스페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아스투리아 연합을 도모하려고 했다.
부르주아지 민주당을 거부하자는 데는 만장일치를 보았다. 모든 노동자들의 연합이 절실히 필요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UGT에,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CNT에 가입한다. 두 조직은 자본주의를 공동의 적으로 놓고 연합투쟁을 벌인다.”
사라고사 CNT의 최종협의에 따라 1936년 5월에 사회민주당의 노조조직인 UGT와의 연합투쟁이 결의되었다. CNT가 UGT에 요구한 한 가지 조건은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 당파들과 맺고 있던 협력관계를 공식적으로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때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가는 길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 CNT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 협정에 앞서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1936년 1월에 다시 선거가 있었다. 그 중 아나키스트들의 수가 절반이 넘었다. 좌파들은 선거에서 승리하면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우파는 더욱 심한 탄압으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만일 CNT가 조직의 지지자들에게 전과 마찬가지로 선거 보이콧을 선동한다면 3만 명의 구속자 석방이 어렵게 될 것이고, 선거에 참여하라고 권한다면 아나키스트들이 처음부터 싸워왔던 보통 선거권과 의회주의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두루티가 돌파구를 찾아냈다. 선거투쟁 결과가 나오면 좌 · 우파 모두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그는 예리하게 포착했다. 좌파는 만일 우파가 승리한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고, 우파는 좌파의 승리가 곧 시민전쟁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들의 선거투쟁 양상을 지켜본 두루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이처럼 혁명 아니면 시민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투표를 하고 조용히 부엌 식탁에 앉아 있는 노동자는 반혁명주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투표를 하지 않고 식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노동자도 더 나을 게 없습니다.”
CNT는 이런 식으로 선거거부 문제를 회피하였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그 결과 좌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우파는 그들이 주장했던 것을 기정사실로 보이게 하기 위한 시민전쟁을 준비하였다. 이처럼 선거투쟁 방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두루티의 공이 컸던 것이다.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
CNT는 스페인 사회에 실제로 강한 힘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좌파에서든 우파에서든 독재자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1
두루티는 인민전선이 거둔 1936년 1월 16일 선거 승리의 소식을 푸에르토 데 산타마리아Puerto de Santa María 형무소에서 들었다. 거기에는 나중에 카탈루냐의 대통령이 된 콤파니스와 여러 협의회 위원들도 수감되어 있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모두 사면되었다.
「크로니카Crónica」
선전포고
선거 후 CNT는 바르셀로나에서 수개월 간 끌어왔던 두 파업에 처음으로 개입하였다. 그것은 전철 파업과 염색 방직 노동자 파업이었다. 1월 28일 새 정부는 1934년 1월 이후에 정치적 이유 또는 파업 가담죄로 해직된 모든 노동자들이 복직되어야 한다는 방침을 기업주들에게 내렸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주들은 정부의 방침을 거부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정부가 강력한 정부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다. 두루티는 콤파니스의 대통령 취임식이 행해진 3월 4일에 바르셀로나의 대극장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몇몇의 새로운 동지들이 권력을 잡게 된 날을 경축하기 위해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좌파’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 동지들의 투쟁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그 지도자들에게 각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CNT와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선거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좌파는 우파들이 각료와 정부 요직에 앉아서 우리 인민들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일으킬 뻔했던 비상사태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발생하고 있는 전철 파업과 염색방직공장의 파업에 대한 책임은 이 정권의 지도부에 있습니다. 우리는 선거가 있기 오래 전부터 그들의 책략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CNT가 혁명을 배반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공략으로 내세웠던 정치범 석방은 사실 선거 전략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선거에서 패배하여 정치범이 석방되지 않을 때, 그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우리 인민은 정치가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속자들을 위해서 투표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파업의 문제에 대해서 여기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정치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우리를 끝까지 그냥 조용히 지켜보라. 우리는 끝까지 방직공장과 전철 회사를 상대로 하여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정부는 절대 개입하지 말라!
평의회 의원들은 자신들의 석방을 인민의 거대한 용기 덕분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들이 CNT에 간섭하려 한다면, 그들은 그들이 왔던 바로 그곳으로 즉각 되돌려 보내져 결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에 다음의 사항을 재차 요구합니다.
우리가 자본가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데 정부는 개입하지 말라!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최소한의 요구이다! 직장을 폐쇄하고 자본을 외국으로 유출하고 있는 부르주아지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희 부르주아지들의 모든 공장을 폐쇄하여 우리가 소유할 것이다! 우리가 공장을 장악할 것이다! 왜냐하면 공장은 우리 노동자들의 것이니까!“
이어서 프란시스코 아스카소가 연설했다.
“분명히 우리가 승리한 것입니다.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결국 좌익 당파들이 선거에서 이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경제는 선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반동 부르주아지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부르주아지들의 책동을 내버려둔다면 지금의 선거 승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권을 잡은 지금의 좌파들은 우파적 정책을 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황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스페인 자본가들은 외국 자본가들과 동맹을 결속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경제전쟁을 도발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정부는―그 각료들이 좌파든 아니든―결코 중립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현 정권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술값 정도를 지불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업가들의 재산은 몰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정책은 그들의 정강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좀 순진한가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멍청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저 공장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젠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장 구내에서 집회를 가져,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과 함께 생산위원회를 조직할 것입니다. 만일 공장이 폐쇄된다면 우리는 기업주의 재산을 몰수하여 공장을 인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본가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안전하게 공장을 운영할 것입니다. 자본가들은 공장의 가동에 짐이 될 뿐입니다. 공장에서의 승리가 동반되지 않는 정치적 승리는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노동자연대」 / 스테픈 존 브라데마
승리
서곡
그는 자신이 바깥에서 하는 일을 집안에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나만 빼놓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1936년 7월 이전에 그들은 군사훈련을 하였다. 그들은 프랑코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리라고 미리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당시 내게는 처음 듣는 소식이었지만 이웃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여자들은 언제나 가장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다. 여자들한테는 바깥의 모든 일이 언제나 침묵과 비밀이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에밀리엔느 모린
7월 16일, 평의회의 기대에 따라서, 그리고 카탈루냐에 긴급 소집된 CNT-FAI 총회의 결정에 따라 연합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연합위원회에서 산티얀과 가르시아 올리베르 그리고 아스카소가 FAI를, 두루티와 아센스(Asens)가 CNT를 대표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콤파니스 정권에 제의한 첫 번째 협상안은 무장의 문제였다. 끈질긴 협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이 요구를 제기할 때마다―그런데 그들이 제의한 요구조건은 총기 2만 정이 아니라 자기 방어에 꼭 필요했던 1천 정 정도에 불과했다―정부로부터 들은 답변은 어떤 무기소지도 금한다는 것뿐이었다. 정치가들은 파쇼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무장한 민중들을 더 두려워했다.
CNT-FAI 연합은 이미 7월 12일 이후 바르셀로나의 군사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하여 눈에 띄지 않는 소규모의 연락책을 구성했다.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정부는 노조에 무장을 허용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장을 해제하려고 했다. 아나키스트 행동대원을 체포했다는 경찰 순찰대의 보고가 다시금 내무부에 입수되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아나키스트들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압수하려고 했다. 경찰의 탄압은 연행자들을 불법무기소지죄로 법원에 넘길 만큼 이미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2 / 아벨 파스 1
7월 19일이 되기 사흘 전, 그러니까 14일인가 15일에 우리는 바르셀로나 항구에서 무기를 실은 배를 습격하였다. 카탈루냐 정부의 평의회가 그 무기들을 인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루티와 다른 동지들이 그 무기들을 운송 노동자 노조에 넘겼다. 그날 기동경찰대가 두루티의 집 주변에 잠복 대기하고 있었다. 가택을 수색했다. 그러나 두루티는 이미 바깥으로 빠져 나가고 없었다. “화물차를 몰고 와, 빨리!” 그리고 동지들은 무기를 실은 우유 배달차를 몰고 사라졌다. 당국은 구식 소총 대여섯 정만 찾았을 뿐 나머지는 모두 우리 CNT의 수중에 들어왔다.
유제니오 발데느브로
카탈루냐 사회안전부의 페데리콬 에스코페(Federico Escofet) 총경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스페인 전국에서 군사 쿠데타 움직임이 있으며, 이 음모에는 바르셀로나 주둔군까지 가담하고 있다는 확정적인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그가 접촉하는 사람들, 특히 공화국에서 신뢰하는 요원들이 전달한 신빙성 있는 보고서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쿠데타 주동자들의 명단과 성명서, 구호문, 작전계획서, 디데이 출동명령 문건들이었다. 그는 쿠데타 결행일을 7월 16일로 추정했었다. 그런데 달력은 이미 18일로 넘어갔으니 에스코페는 쿠데타가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부터 그는 호세 마리아 내무장관과 24시간 연락하고 있었다. 그는 장관과 자신의 측근인 비센테 과르네르(Vicente Guarner) 소령과 함께 비상사태 발생 시 긴급대응을 하기 위해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 안전 대책부가 당면한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회안전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카탈루냐 자치정부 및 마드리드 중앙정부, 즉 사회민주당과 격렬한 무기 소지 협상투쟁을 벌여왔던 FAI 아나키스트들과 연합노조인 CNT를 고려해야만 했다. 비상사태에 직면하여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대통령 콤파니스가 연방위원회를 소집한 사실을 알아낸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반파쇼단체와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즉시 무기 지급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콤파니스 대통령이나 내무장관과 마찬가지로 에스코페 총경에게도 무모한 가두투쟁가들인 CNT 조직원들에게 무기를 공급한다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일로 보였던 것이다.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부의 적이 된 군부와 정부 방어군 경찰이 전투를 벌여 양쪽 전력을 소모하고 나면, 도시는 아나키스트 연합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 뻔했던 것이다. 아나키스트 연합은 카탈루냐 정부의 정치적 · 사회적 안정에 군사 쿠데타 못지않게 위험한 존재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예, 에스코페 총경입니다. 아, 호세 마리아 장관님이시군요. 안녕하셨습니까! ……뭐라고요? ……아! 예, CNT 말씀이시군요. 물론 그들이 항의할 것입니다. 전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통령께도 골칫거리입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권총 소지를 허용했습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수류탄도 압수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다른 무기들은 모두 우리 수중에 있습니다. 과르네르 소령이 무기를 압수했습니다.”
문제는 간밤에 발생한 무기 탈취사건이었다. 아나키스트 운송노동자연합의 행동대원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던 몇 대의 배를 습격해 엄청난 수의 소총과 권총을 탈취했던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과르네르 소령이 제게 그렇게 보고했습니다. 그가 순찰을 나서기 전에 전망대 위에서 감시를 한 후 직접 노조 사무실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답니다. 논쟁중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아무도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 두루티와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그 논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직접 참석해 있었다고 합니다.”
잠시 귓불을 만지고 있던 에스코페 총경에게 과르네르 소령이 말했다.
“노조원들이 화를 내면서 두루티를 총으로 위협했다고 총경님께서 장관님께 직접 말씀드리십시오. 그들은 서로 동지들 아닙니까!”
“과르네르 소령이 지금 막 제게 보고하길 노조원들이 두루티에게 총을 겨누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장관님께서는 이 사실을 대통령께 보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뭐라고요? 예,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제가 과르네르 소령에게 그렇게 지시하지요.”
에스코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검고 윤이 났으며 곱슬이었다. 그의 태도는 흥분된 상태였고 목소리는 몹시 화가 난 투였다. 그가 과르네르 소령에게 말했다. “나는 FAI와 그 회원들을 무작정 믿을 수가 없어. 그들은 마치 표범처럼 무기를 노리고 있어.” “뭐 다른 정보에 대해서는 장관께서 말씀한 게 없습니까?” “물론 있다네. 내일 새벽에 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다고 하였네. 장관은 믿을 만한 정보를 갖고 있네.” “제 기분을 총경님께서는 아실는지요? 저는 일이 터지면 우리가 누구의 편에 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루이스 로메로(Luis Romero)
방어위원회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7월 18일이 여느 토요일과 별로 다르지 않은 날로 보였을 것이다. 날이 몹시 무더웠지만 거리를 빈둥거리며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해수욕장도 텅 비어 있었다. 물건을 사러 거리에 나와 있는 가정부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제과점에서는 이른 오후에 벌써 빵이 바닥났다.
CNT 지역위원회 본부에는 사람들이 바삐 들락거렸다. 모든 시 구역과 교외에 파견되었던 보고자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총연합위원회는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두루티는 식당 한 모퉁이에서 상황을 알고 싶어 하는 피골스 출신 탄광 광부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루티는 몸을 의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탈장수술을 받았는데 아직 완쾌되지 않았다. 병의 증세가 재발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네트(Marianet)가 몇 초 간격으로 마드리드에 전화를 걸었다. 사방에서 아스카소를 찾고 있었다. 그는 당장 페이-페이 카페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금속 노동자 노조원들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은 그에게 당장 행동으로 투쟁하겠다고 제안했다. 프란시스코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때가 이릅니다. 우리는 냉정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아벨 파스 1
호치키스 M1914 기관단총 1정, 체코산 속사포 2문과 예비실탄을 장전한 윈체스터 소총이 신 인민촌 구역 에스프론세다Espronceda 길목에 인접한 푸하다스Pujadas 거리 276번지의 거실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곳, 그레고리오 호베르의 집에서 방어위원회가 소집되었다.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그리고 프란시스코 아스카소가 두 시간 늦게 모습을 나타냈다. 일종의 무장 야간경계를 위한 그 최후의 회합은 한밤중에 소집됐다. 공군 소위 세르반도 메아나(Servando Meana)는 그들 세 사람이 내무성으로 타고 갈 자동차를 준비해 두었다. 그들은 돌발적 기습에 즉각 대응 발사할 수 있도록 무기를 장전한 채 급히 차를 몰았다. 그들은 늦어지면 동지들이 걱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무성 건물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CNT의 전투대원들이 무기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가르시아 올리베르, 두루티와 아스카소는 궁전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들을 자제시키기 위하여 발코니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산 안드레스San Andrés 막사를 포위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군중들을 설득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된다면 2만5천 정의 소총과 기관단총, 대포 몇 문 정도는 내일이면 CNT와 FAI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접촉하고 있던 공군 메아나 소위와 다른 장교들이 이미 디아스 산디노(Díaz Sandino) 중령과 협상을 마친 상태였다. 산디노 중령은 프라트 데 요브레갓Prat de Llobregat 공군기지의 사령관이었다. 쿠데타군이 출동하여 막사를 비우는 사이에 비행기가 이륙하여 막사를 공격한다는 작전이었다. 막사를 폭격할 때 탄양고가 폭발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폭격이 끝난 후 산타 콜오마, 산 안드레스, 산 아드리앙, 클로, 신 인민촌의 각 시 지부 방어위원회의 조직원들이 막사를 공격하고, 필요시에는 성문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다는 이 작전에 디아스 산디노 중령이 동의했던 것이다. 산 안드레스 막사의 무기고에는 수백만 발의 탄약이 적재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그레고리오 호베르는 동지들에게 빵과 소시지를 대접하고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모든 조치가 잘 맞아떨어졌다. 각 시 지부 위원회의 행동대는 주의사항을 지시받았다. 각자는 행동의 순간이 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숙지하고 있었다. 공장뿐만 아니라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배의 갑판까지도 감시가 심했다. 사이렌은 기습경보를 알리는 장치였다. 위원회는 군대가 막사를 떠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극비 정보에 의하면, 반란군은 새벽에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일에 몰두하여 신경이 날카로워진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의자에 앉았다. 큰일을 또 한 번 치르기 전에 남은 한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수주, 아니 여러 달 동안 이 모임은 이 밤을 준비해 왔다. 이미 2월 선거 이전에 그들은 곧 시민전쟁이 터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CNT 추종자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또 한 번 선거 보이콧을 생각했지만 예외적으로 부르주아 좌익당과 사민당에게 찬성표를 행사했었다. 지도부는 선거에 참여 또는 불참을 권고하지 않고 그 결정을 노동자 각자에게 맡겼었다. 그들은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하든 우파가 승리하든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걸로 이해했던 것이다. 만일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이 선거에 불참하여 파쇼집단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것은 곧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될 것이었다. 반대로 좌파가 승리하면,―물론 CNT는 좌파가 승리하리라고 예상했는데―파시스트가 늘 하는 방식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려 들 것이 뻔했던 것이다. 따라서 손에 무기를 드는 일은 어떤 경우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바로 현재의 상황이 그러한 예측을 입증해 주고 있는 셈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의 분석은 당내 활동을 하고 있던 어떤 직업정치가들의 분석보다 더 현실적으로 적확했던 것이다.
CNT는 거의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지역단체들로 구성된 지역연합조직이었기 때문에 전국적 차원에서 공격을 계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카탈루냐를 중심으로 우선 바르셀로나를 작전계획지역으로 택했다. 물론 마드리드가 스페인 정치의 중심도시였지만 바르셀로나는 산업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밀집한 도시였다. 바르셀로나 인구 중 다수가 노동자였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는 혁명의 전통을 가진 도시였기 때문에 CNT는 바르셀로나를 정치투쟁의 우선지역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 노동자가 승리하면 운동의 물결은 스페인의 다른 도시로 신속히 퍼져나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바르셀로나에 방어위원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그들은 분견위원회가 언제라도 연합 방어위원회와 통합될 수 있도록 조직을 구성했다. 각 시 지부 위원회는 X 시간의 암호를 알고 있었다. 아나키스트 청년연맹단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청년단과 여성회도 이 작전계획에 가담했다. CNT는 적들이 낌새를 차리지 못하도록 이번 작전에서는 총파업을 선포하지 않기로 노조연합 및 지역위원회와 합의한 상태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시가 지도에는 군막사의 위치, 군의 배치상황 그리고 군의 인원수가 나타나 있었다. 군으로부터 가져온 비밀정보를 통해 적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면밀히 파악하였다. 방어위원회는 하수구의 구조를 점검하고 지하통로와의 교차점을 숙지하였다. 전선망은 보다 중요했다. 필요할 경우 언제라도 작전구역에서 전기공급을 차단할 준비를 갖추었다. 무장대원들은 군이 막사를 출발하여 거리로 밀고 나올 때 저지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저항을 받지 않은 군부는 이 위장된 초기 승리에서 민중봉기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것이었다. 군인들은 1인당 적어도 쉰 발의 실탄을 쏘게 될 것으로 추정했다. 그들이 막사로부터 멀어졌을 때 무장대원들은 사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군인들은 실탄이 떨어져 고립되면 사기를 잃을 것이 뻔했다. 그때 바로 총봉기하기로 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중요한 전략은 병사들이 장교들에게 등을 돌리게 하거나 탈영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기동경찰대가 합법적 정부를 지원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을 공격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래서 행동대는 그들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치안경찰대의 태도는 애매모호하였다. 그것은 지켜봐 달라, 만일 그들이 노동자를 공격하거든 그때는 쿠데타군을 향해서 쏘듯이 자신들에게 가차 없이 사격을 하라는 식이었다.
모든 작전계획이 치밀하게 검토 논의되어 결정되었다. 이제 아나키스트 방어위원회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많이 마셨다. 그들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각자 모든 세부사항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수년 전부터 함께 투쟁해 온 동지들이다. 그들은 서로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 아니 아마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밤이 서로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프란시스코 아스카소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피웠다.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고, 창백하며 가늘고 차가운 그의 입술에는 이상야릇한 미소가 맴돌았다. 두루티도 웃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검고 짙은 눈썹, 눈썹사이의 비근鼻根에 깊이 패인 주름살, 찌푸린 이마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어린애와 같은 인상을 풍긴다. 생동감 넘치는 그의 검은 시선이 또다시 무기 쪽을 향한다. 덩치가 크고 금발이며, 강한 몸을 가진 리카르도 산스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다. 그레고리오 호베르는 광대뼈 때문에 ‘중국 되놈’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다녔는데, 여전히 중국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허리 아래쪽으로 탄띠를 늘어지게 메고 있었다.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는 마치 온도계를 들여다보듯이 호베르의 얼굴에서 상황의 심각성을 읽어내려고 한다. 그는 눈이 약간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폼을 재고 옷을 잘 차려입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그것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모두 경험이 풍부한 가두투쟁가들이고, 귀신처럼 총을 다룰 줄 아는 도시게릴라들이다. 위원회에는 젊은 청년이 두 사람 있었다. 그들은 안토니오 오르티스(Antonio Ortiz)와 발렌시아(Valencia)였다. 안토니오는 농담을 좋아했기 때문에 과묵한 동지들이 이야기를 하도록 애써봤지만 헛된 일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완전 곱슬이었다. ‘발렌시아’는 태도가 아주 의연했다. 그는 지독한 골초로서 줄담배를 태웠다. 그들이 방어위원회의 본부를 여기로 정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이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베르의 집에서는 맞은편에 있는 주피터 축구장이 보였다. 거리에는 차출된 사람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화물차 두 대가 축구경기장 옆 푸하다스 거리에 정차중이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에스프론세다 72번가에서 5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며, 아스카소는 산 후안 데 말타San Juan de Malta 가에 살고 있다. 그의 집은 ‘파리골라Farigola’라는 술집 옆에 붙어 있다. 이 술집에서 며칠 전에 시 지부 위원회의 총회와 바르셀로나 방어위원회가 열렸다. 두루티는 그곳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끌로 가에 살고 있다.
고물시장에서 구입한 낡은 벽시계는 움직이기가 괴로운 듯이 느리게 똑딱거린다. 호치키스 기관단총, 체코산 속사포 두 정과 수많은 윈체스터 소총들…….
루이 로메로
열한시와 자정 사이에 몇몇 대원들은 수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위원회를 출발했다. 출동지시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동차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확보한 자동차가 람블라스 거리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에는 CNT-FAI라고 크게 백묵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산책 중이던 노동자들이 그 자동차를 보고 운전병에게 “FAI 만세!”라고 외쳤다.
그날 밤 바르셀로나의 무기상점이 털렸다. 아나키스트 행동대원들이 쇼윈도와 진열장을 비웠고 수류탄과 엽총을 약탈했던 것이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2 / 아벨 파스 1
새벽 두시, 두루티와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경찰 총경을 찾아갔다. 그들은 사회안전부의 에스코페 총경에게 기동경찰대의 무기 절반을 회수하여 노동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무조건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에스코페가 거절했다. 그는 자기 부하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임무를 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무기라고는 한 정도 내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네 시 삼십분, 경찰 총경의 방에 전화벨이 울렸다. “몬트사와 페드랄베 지역의 군대가 막사를 떠난 상황입니다”라는 보고였다. 아스카소와 두루티는 무기를 들고 경찰서를 떠났다. 산티얀과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당직장교의 얼굴을 제복 윗도리로 덮어씌웠다. “권총이 어디 있소? 어서 말하시오!”
아벨 파스 1
새벽 다섯 시 정부 청사 앞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보초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바르셀로네타에서 온 시위군중들이 정문을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막 도착한 두루티는 이 시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알고 있었다. 그는 발코니로 올라갔다. 부두 노동자들은 두루티를 알아보고는, 연합위원회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서 청사 안으로 들어갈 대표자들을 보초가 통과시키게 하라고 그에게 요구했다. 바로 그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조금 전만 해도 시위군중들과 기동경찰대의 청사 보초병들 사이에 있었던 그 긴장이 깨어져버린 것이다. 군기가 흔들렸다. 노동자들과 보초병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한 보초병이 자신의 권총을 뽑아 한 노동자에게 건네주었다. 곧 다른 보초들도 그들의 총을 군중들에게 넘겨주었다. 장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경찰들이 인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벨 파스 1 /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2
사이렌
희뿌연 안개로 덮인 푸하다스, 에스프론세다, 르룰 거리에 새날의 여명이 비쳐오고 있었다. 무장한 수많은 남성대원들이 축구경기장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푸른색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선발된 스무 명의 행동대가 아나키스트 방어위원회를 호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가두투쟁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무기는 두 대의 화물차에 적재되었다. 리카르도 산스와 안토니오 오르티스가 앞 트럭의 차폐 위에 기관총을 설치하였다. “동지 여러분, 산스 구역 지부위원회에서 방금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군이 출동했다고 합니다!” 보고자는 그야말로 숨이 가빴다. 아침 일찍 일어난 사람들이 주변 발코니에서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얼굴에는 불안한 빛이 가득하였다. 전투대원들이 축구장에 운집하였다. 권총을 소지한 사람들은 뽐내듯이 권총을 흔들어 보였다. 권총을 가지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비축해 두었던 무기가 배분되었다.
“무엇을 할까요? 사이렌이 울리기를 기다릴까요?” 두루티가 물었다. 운전병이 시동을 걸었다. 멀리서 우웅―하고 길게 끄는 소리가 들렸다. 제일 먼저 공장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침묵이 흘렀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가까이에서 울리는 듯했다. 사람들이 발코니로 뛰어 올라갔다. 위원회와 호송대원들이 화물차에 올랐다.
“FAI 만세!”
“CNT 만세!”
“출발!”
트럭이 출발했다. 트럭에 탄 대원들이 총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면서 인사했다. 나뭇가지에 매단 흑 · 적색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신 인민촌의 람블라스 거리가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여러 대의 자동차가 합류하여 줄을 이었다. 선동자들은 단호한 결심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이 구경꾼들에게 기관단총을 높이 쳐들어 보였다. 사람들이 지붕과 발코니에서 두루티, 아스카소, 가르시아 올리베르, 호베르의 이름을 외쳤다. 사이렌이 계속 울렸다. 그 소리는 바르셀로나 공단지역의 기층민중들이 사는 곳에서 들여왔다. 그 소리는 바로 노동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목소리로서 출동하라는 명령처럼 들렸다.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위원회의 회의실로 사용된 노조 사무실의 뒷방에서 밤을 새웠다. 이제 그들은 도시 중앙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산스, 오스타프랑크, 콜브랑크 지역의 대원들과 토라사의 ‘무르시아 사람들’, 그리고 카사안투네스 지방에서 온 CNT의 추종자들이 에스파냐와 파랄에로 광장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의 공격목표는 레반토 공병대였다. 에스파냐 공업상사의 염색 방직 노동자들, 벽돌공, 피혁공, 도살장 노동자들, 청소부, 날품팔이꾼들뿐만 아니라, 클라베 합창단의 몇몇 가수들, 몬주익 빈민촌의 하층 프롤레타리아들, 빈민촌 뒷골목의 총잡이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왔다. 모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라시아 마을의 채소 재배 농민들도 가담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혁명적 아나키즘의 경향을 갖고 있었다. 방직 노동자들, 전철 노동자들 그리고 상인들까지 가세했다. 이 투쟁의 대열에는 아나키스트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POUM(통합마르크스주의 노동당)도 섞여 있었다. 모두가 오로스Oros 5번가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스 5번가와 구역 경계선을 향해 진군했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차도와 교차로를 감시하였다. 카르멜Karmel 탄광촌의 기식 프롤레타리아들이 산을 내려와 도시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멀리 평원으로 이어지는, 아직 건설중에 있는 신작로의 주변에 사는 주민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나키스트들의 위대한 스승으로 알려진 페데리코 우랄레와 그의 딸 페데리카 몬트세니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던 포브레와 귀나르도 지방의 옛 동지들과도 합류하였다. 파브라 코트 로티어Fabra y Coats y Rottier 주식회사의 노동자들과 스페인-스위스 합작회사의 기술공들, 기계공장의 기능 노동자들이 막노동자들, 실직자들과 연합하여 시 전체를 방어하고도 남을 무기들이 적재되어 있는 산 안드레 군 막사의 병기고를 향해 진출하였다. 히로나Girona 제철소의 노동자들, 전기회사와 제지공장의 노동자들, 클로, 프로뱅살, 라쿠나와 신 인민촌 등의 지역에 있던 가스 및 화학공장 노동자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어부들, 부두 노동자들, 화산지역의 금속공들, 북부역의 철도 노동자들과 소모로스트로의 집시들과 같은 바르셀로네타 지역의 하층 민중들과 연대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두 대의 트럭이 페드로 4번가에 도착했다. 거리도 흥분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그곳은 상인들과 형편이 ‘좀 나은’ 수공업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눈빛으로 자동차 행렬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에는 아무도 비난의 얼굴빛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침묵조차도 위험한 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를 질러댔다. “CNT 만세! 파쇼에게 죽음의 심판을! 교회를 타도하라!”
이 전통 도시의 심장부에서 결정이 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그곳이 비록 부르주아지 구역이지만 거기에도 많은 동지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지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수위와 구두닦이들, 식당 보이, 도로 청소부들이 그들을 추종하였다.
루이 로메로
가두투쟁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안토니오 오르티스, 호베르와 ‘발렌시아’가 산 파브로의 파랄에로-론다 사거리에 진을 치고 있던 반란군에 대하여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런 대로 무장을 갖춘 노동자들과 함께 아타라사나 부대를 탈영한 하사관 한 명과 두 명의 사병이 투쟁에 동참하였다. 그들은 장교를 배반하고 기관단총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들은 산 파브로의 길모퉁이 집 지붕 테라스에서 산 파브로 성문을 보루로 하고 있던 군대를 향하여 사격을 가해 군을 후퇴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호베르와 오르티스는 페이-페이 카페의 뒷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사격을 가했다. 패전한 군인들은 파랄에로까지 후퇴하였다. 몇 명의 군인들이 ‘물랑 루즈Moulin Rouge’라는 카바레 옆 과일가게 뒤로 가서 카페의 테라스에 올라가 그곳을 엄폐물로 삼았다. 그곳은 파랄에로 거리 전체를 기관총 사정거리 안에 둘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아살토 거리에서 파랄에로 도로를 횡단하려 했던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대원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이른 아침에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아스카소 그리고 두루티가 람블라스 거리에서 만났다. 그들은 두루티가 그의 단원들과 함께 팔콘Falcón 호텔을 점령하여, 호텔 창문을 통하여 적의 완강한 방어벽을 뚫는다는 작전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극장 광장에서 상황이 끝나면 두루티는 카사 후안Casa Juan 레스토랑으로 진격하여 아타라사나 부대와 평화의 문을 보루로 지키고 있는 파쇼들을 향해서 기관총을 발사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들은 람블라스 거리에서 구도시의 중심부로 통하는 모든 교차로를 차단할 예정이었다. 전술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파랄에로와 산 파브로의 교차로에 군대가 주둔한 상황은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계획에 극히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파쇼들의 기관총 사격망을 분쇄하기 위해 모든 힘을 집중했다. 산 파브로 거리를 따라 돌격할 때 그의 돌격대는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들은 국경수비대의 초소를 지나가야만 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기습공격을 피하기 위해 대원들을 안전한 거리에 두고 수비대 장교와 협상을 벌였다. 그는 그들이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정하라고 요구했다. 수비대는 정부에 충성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무는 치안담당이 아니라 밀수입을 막고 관세를 징수하는 일일 뿐이라고 하였다. 수비대는 맹세코 가르시아 올리베르 전투대의 배후를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약했다. 다소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아말리아 거리에 있는 여자 감옥을 통과하게 되었다. 거기에도 파쇼들이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대원들은 철저하게 수색하였다. 다행히도 기습은 없었다. 반동들에게 구치소 기능을 했던 형무소를 습격하였다. 구속되어 있던 여자들이 불안과 기쁨에 울먹이면서 감옥을 떠났다. 많은 여자들이 흥분하여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아바드 사폰트Abad Zafont 거리에서 아스카소 대원들이 가르시아 올리베르 단원들에게 근접하고 있었다. 아스카소는 낡은 갈색 옷을 입고 가벼운 샌들을 신고 있었다. 손에는 안전장치를 푼 권총이 들려 있었다.
“놈들이 ‘물랑 루즈’ 안으로 후퇴하고 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여러분은 시카고 바가 있는 저 건물 지붕 위를 점거하시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적들에게 사격을 가하시오! 헛총질은 하지 말고!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시오! 우리는 여러분이 쏘는 기관총 소리를 들으면, 즉시 파랄에로로 돌진하여 놈들을 쓸어내겠소!”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돌격대원들이 프로르 가를 지나 시카고 바로 가는 동안 아스카소의 대원들은 잠시 쉬면서 담배를 피웠다. 군대가 계속 사격을 가했지만 이미 수세에 몰려 타겟을 정확히 찾지 못했다.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들었지만, 거리에는 대담한 기자들 몇몇이 취재하러 나와 있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몸을 숨기기 위해 집 입구 가까이 서 있었다. 마침내 지붕에서 총알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어내며 서로 응사하였다. 이때 권총에서 나는 작은 폭음소리가 들렸다. “FAI 만세! 공격하라!”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이 돌진하면서 파랄에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장밋빛 목욕 외투를 걸친 한 여자가 밤을 지새우고 화장도 하지 않은 창백한 얼굴로 팔을 높이 쳐들며 소리쳤다. “아나키스트 만세!”
루이 로메로
교차로에서 카탈루냐 광장에 도착한 무장 노동자들이 군인들을 향하여 사격을 개시했다. 치안경비대도 반란군에게 발포했다. 대포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콜론Colón 호텔에서는 쿠데타군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여전히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전투는 삼십 분 이상 계속되었다. 광장은 죽은 시체로 즐비했다. 마침내 호텔 1층이 치안경비대의 손에 넘어갔다. 콜론 호텔의 창문에 최초로 백색기가 걸렸다. 전화국 건물 안에서는 파쇼들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건물을 향해 돌격하던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두루티가 선두에 섰다. 그들은 람블라스의 언덕길 위쪽 끝에서 출현하였다. 거리의 중앙보도는 시체로 덮여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바르셀로나 연방 비서 오브레곤(Obregon)도 있었다. 드디어 두루티의 대원들이 전화국 건물 현관에 들어섰다. 두루티가 전화국 로비에 제일 먼저 들어갔다. 전화국은 층층이 완전 점령되었다. 노동자들이 바르셀로나의 중심부인 카탈루냐 광장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아벨 파스 1 /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2
람블라스 거리에는 구경 75밀리 대포가 배치되었다. 그 대포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타라사나 요새의 성벽을 뚫어 돌파구를 열었다. 그 사이에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군부대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심지어 바르셀로나의 일반 시민조차도 군부대를 향하여 사격을 가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실탄을 날라다주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남자들에게 빵과 음료수를 갖다 주었다.
리카르도 산스 1
아스카소의 죽음
이제 아나키스트들은 아타라사나 군대와 람블라스 거리의 아래 지역에 진을 친 방위군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이미 산타 모니카 람블라스 거리까지 진출했다. 군 막사 맞은편에 있는 평화의 문에는 경찰대원들과 시민으로 구성된 또 다른 아나키스트 가두투쟁가들이 연합전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아스카소가 이끌던 아나키스트 방어위원회의 조직원들은 람블라스 산책로의 굵은 가로수를 엄폐물로 삼아 조심스럽게 남쪽으로 이동했다. 두루티, 오르티스, 발렌시아,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아나키스트 노조 행동대원들이 그쪽에 있었다. 아나키스트 행동대원들은 건축 노동자 출신의 코레아(Correa), 금속 노동자 욜디(Yoldi)와 바론(Barón), 전철 노동자 가르시아 루이스(García Ruiz)였다. 아스카소의 형제들인 도밍고(Domingo)와 요하킨도 함께하고 있었다. 운전석 차폐 위에 기관단총을 거치해 왔던 트럭도 출동 대기중이었다. 트럭에는 리카르도 산스, 아우렐리오 페르디난데스와 도노소가 타고 있었다. 그들 외에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공격대원이 군 막사 가까이 다가갈수록 진군하는 걸음은 더 무거워지고 위험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듯한 분위기였다. 쿠데타군은 완강히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운수 노동자 노조의 지붕 발코니와 주변 노동자들의 집 발코니로부터 사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지난 밤 동안 가구와 침대 매트리스, 수많은 두루말이 종이로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두루말이 종이는 「노동자연대」의 인쇄소에서 가져간 것들이다.
먼저 아나키스트들이 나무 엄폐물에서 뛰어나와 람블라스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산타 마드로나 거리에서 공격선이 저지되었다. 이 도로는 군인들과 방위군으로부터 양측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사격국역이었다. 방호물이라고는 산책로 중앙에 서 있는 도서 가판대뿐이었다.
두루티와 그의 대원들은 계속 진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포 공격과 수류탄 공경으로 이미 파괴되어 있던 막사의 가장 낡은 곳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일부 담장은 파손되지 않은 채 서 있었기 때문에 엄폐물이 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아스카소는 산타 마드로나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문에서 연발사격을 가해 왔던 기관총 사격을 중지시켰다. 그 사격 구역 안으로 람블라스 거리를 가로질러 온 동지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루이 로메로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엄폐물에서 나와 방위군의 사격망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동지들이 전술작전에 대해 논의하던 중에 두루티의 가슴을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동료들이 그를 임시 응급처치실로 보냈다. 최초의 여성 투쟁가인 롤라 이투르베(Lola Iturbe)가 응급조치로 그의 가슴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 동안 아스카소, 가르시아 올리베르, 후스토 부에노(Justo Bueno), 오르티스, 비반코스, 루시오 고메스(Lucio Gómez)와 바론으로 구성된 소단위 돌격대가 바리케이드에서 지그재그로 달려 람블라스 산책로 중앙에 있는 도서 가판대로 돌진하였다. 그것은 생사를 건 투쟁이었다. 가판대는 산타 마드로나 거리를 가로질러 기습공격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들은 콩 볶는 듯한 총알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막사내의 감시탑과 방위군에게 더 없이 좋은 표적물이 되었다.
아벨 파스 1
코레아와 다른 몇 명의 대원을 수행한 아스카소가 도서 가판대에 도착했다. 두루티와 다른 대원들이 그를 염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스카소는 동료들의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면 적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식의 신호를 그들에게 보냈다. 감시탑의 기관총 사격이 중지되었다. 그는 전술적 상황을 탐색했다. 감시탑 바로 아래에 트럭이 한 대 주차해 있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 가판대와 그 트럭 사이에는 엄폐물이 없었다. 그는 권총만으로 순간순간 엄호사격을 하면서 트럭에 도달하기만 한다면 기관총 사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돌진하였다. 군의 사격수들이 그를 발견하고 사격을 가했다. 그의 등 뒤쪽 집 벽에 수많은 총알이 박혔다.
루이 로메로
바리케이드에서 이 작전을 지켜보고 있던 두루티가 파블로 푸이스(Pablo Puiz)에게 말했다. “내가 찰과상을 입었기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고 여러분이 내게 말한 것은 나를 속인 거나 마찬가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아스카소가 공격목표로 삼고 있는 막사의 작은 감시탑에 화력을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적의 사수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 문제인지 벌써 간파하고 있었다.
아벨 파스 1
아스카소는 트럭에 이르기 전에 무릎을 꿇고서 조준사격을 하였다. 그가 다시 일어나 트럭 쪽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총알이 그의 이마 정중앙을 관통했다. 그는 푹 쓰러졌다.
동지들은 그가 두 팔을 높이 쳐들었다가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얼굴을 바닥에 묻고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루이 로메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일 먼저 알아차린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엄폐물로 삼고 있던 흉벽을 뛰어넘어 파코를 도우러 가려 했지만 바론이 무의식중에 그를 와락 붙잡았다. 적의 사격이 조용해지기까지는 몇 분이 지났다. 그 후 비로소 리카르도 산스와 오르티스가 아스카소의 시신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
아벨 파스 1
7월의 그날,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졌던 그 가슴 아픈 사건을 나는 아주 가까이서 경험했다. 나는 거리로는 나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가 거리로 나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사격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금속 노동자 노조연합의 일원이었던 아스카소가 람블라스 거리에서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동지들이 그를 안고 들어왔을 때 그의 시신을 보았다. 그의 몸은 실로 끔찍하게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 바로 체의 구멍만큼이나 많이!
아무도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혼자 몸으로 나갔던 것이다. 반대편의 막사는 여전히 프랑코 군의 수중에 있었는데 말이지. 완전히 혼자서 그는 불을 보듯 뻔한 죽음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는 마치 자살한 것처럼 보였다.
에밀리엔느 모린
우리 대원들의 최후 접전이 7월 20일 아타라사나 부대 앞에서 벌어졌다. 기관총 연발소리와 FAI가 던진 폭탄소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두루티가 최전방에서 공격을 이끌었다. 아스카소와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불을 뿜어 가열된 기관총 뒤에 서 있었다. 산스는 포위된 막사에 던질 수류탄 상자를 옮겼다.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 안토니오 오르티스와 그레고리오 호베르도 그곳에 있었다. 이 접전에서 프란시스코 아스카소가 쓰러졌다.
그의 죽음은 대원의 종말이었다. 우리 모두가 하나로 뭉치는 일은 그 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아스카소의 장례식 때도 하나가 되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이 대원들이 잃었던 최대의 손실이었을 것이다. 대원은 흩어져 해체되었다.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리카르도 산스 2
아나키
“FAI 만세!” “아나키 만세!” “CNT 만세!”
“동지들이여! 우리는 파쇼를 타도했습니다. 바르셀로나의 투쟁적인 노동자들은 군대와 싸워 승리했습니다.”
“공화국 만세!”
“내 생각에는 공화국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바르셀로나 투쟁은 끝이 났다. 방위군이 굴복했다. 이어서 포위된 아타라사나 부대도 항복했다. 가두투쟁가들은 환희에 찬 얼굴로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그들은 무기를 높이 쳐들었다. 주먹을 뻗어 올려 그들의 인솔자를 찬양했다.
포로들은 옷이 해지고 피로에 지친 검게 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셔츠 바람으로 팔을 위로 들고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위협적인 무기에 둘러싸인 채, 흥분하여 욕을 해대는 군중들 사이로 끌려 다녔다. 아무도 그들을 어디로 끌고 갈지 몰랐다. 감시자조차 몰랐다.
전철 노동자인 가르시아 루이스가 가르시아 올리베르에게 물었다.
“저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
이제 바르셀로나에는 경찰이나 기동경찰대 장교가 없었다. 정치가도, 명령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거만한 제복을 입고 다니던 사람들, 카지노 복장에 훈장과 견장을 달고 다니던 사람들, 버클에 군도를 차고 까만 중절모를 쓰고 다니던 사람들은 제거되었다.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이 승리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억압받고 구속당하면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지하실 구멍으로 기어 다녔던 그들이 이제는 당당히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고 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을 운송 노동자 노조에 데려가서 잘 붙잡아두시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우리가 곧 결정할 것이오.”
두루티는 눈썹을 찌푸린 채 아직도 식지 않은 총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호베르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승리의 기쁨도 수년 동안 함께 투쟁해 왔던 동지 아스카소를 잃은 슬픔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불쌍한 파코!”
그러나 그들은 슬픔의 고통과 우수적 감상에 잠겨있을 시간이 없었다. 행동의 시간이 왔다.
“자, 이제 갑시다!”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말했다.
루이 로메로
두루티는 7월 20일에 두 번 부상을 입었다. 한 번은 이마였고 또 한 번은 가슴이었다. 아스카소의 시신 앞에서 그는 고통과 분노에 찬 통곡을 터뜨렸다고 한다.
전투가 끝났을 때 부르주아지 언론이 테러분자와 살인자로 매도했던 두루티가 주교의 저택을 찾아갔다. 광분한 민중들이 바르셀로나 주교의 머리를 요구했지만, 두루티는 그를 여름 외투로 감싸 저택을 몰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 그의 생명을 건져주었다. 그는 저택에 쌓여 있던 수백만 페세타에 달하는 보물들을 무사히 평의회에 넘겼다.
알레한드로 힐라베르트
바르셀로나 대주교는 7월 20일 이후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를 받았다.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아나키스트들은 그에게서 이전에 받은 신세에 보답하려 했던 것 같았다. 주교는 두루티와 페레스 파르바스(Pérez Farvas)가 1934년 10월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이들을 위해 감형원에 서명한 적이 있었다.
마르게리트 호우베
평의회가 엄청나게 값비싼 예술품을 건져낼 수 있었던 성당을 제외하고 바르셀로나의 모든 교회들은 불태워졌다. 교회 담장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 내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많은 교회가 계속 연기에 싸여 있었다. 람블라스―파세오코론 거리의 모퉁이에 위치한 이탈리아 정기운항 선박 코주츠리츠Cosuchlich호 회사의 관리사무실 건물이 폐허로 변하였다. 그곳은 이탈리아 저격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그 건물을 습격하여 방화했던 것이다. 교회와 이런 건물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건물에 대한 방화는 없었다.
프란츠 보르케나우(Franza Borkenau)
투쟁에서 승리했을 때 바르셀로나와 교구 내에서는 인간 사냥이 시작되었다. 사냥의 대상자들은 목사, 신부, 수녀, 귀족, 부르주아지 등 청산되어야 할 사람들은 모두 포함되었다. 수도원과 교회가 불탔고 부르주아지의 호화저택들이 약탈당했다.
이러한 테러행위가 확산된 것에 대한 책임을 아나키스트들에게만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행동은 부르주아 계급과 교회에 대한 민중들의 오랜 증오심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표출된 것일 뿐이었다. 형무소도 개방되었다. 강도, 도둑, 살인자들이 떼를 지어 마음대로 행동했다.
혁명 초기에 자행된 끔찍스러운 일들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추정할 수 없을 것이다, 카탈루냐에서만 7백여 명이나 되는 목사와 신부 그리고 수녀들이 살해당했다. 고통을 당하면서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끔찍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카탈루냐에서 살해된 인원은 2만5천 명, 구속된 자가 1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장 라이노(Jean Raynaud)
스페인에 기업가 친구들이 많았던 어떤 외국 실업가가 한 번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에게는 이곳이 어느 정도 안전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하군요!” 물론 그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이란 카탈루냐 기업연합에 관계한 기업가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들 중 수천 명이 혁명 초기에 살해되었습니다. 군대가 전투에서 패하자마자 노동자들은 적들에게 개인적 보복을 가하기 시작한 겁니다.” 나는 그런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명 모든 보복조치가 전적으로 개인적 성격만을 띤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목사들이 살해된 것은 그들이 인간 개인으로서 증오를 샀기 때문이 아니라 (만일 이런 식의 보복이었다면 그것은 ‘적들에 대한 개인적 보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목사라는 공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때 도망치지 못한 기업가들, 특히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섬유회사를 경영한 기업가들은 그 회사의 노동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노동운동의 적으로 소문난 바르셀로나의 전철회사와 같은 대기업의 이사들은 해당 회사의 노조 특수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리고 우파의 정치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특수대원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대량학살에서 친구들, 아마도 절친한 친구들마저 잃어버린 나의 대화 상대자가 그 사건들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는 “끔찍했어요”라고 말했다. “법적 절차나 소송도 없이 사람들이 총살당했습니다. 그저 신분이나 사회적 위치, 혹은 정치관과 종교관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적 보복에 의해 살해되다니! 아나키스트 놈들! 뭐, 통합마르크스주의 노동당이라고! 갱단들일 뿐이야!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이들의 행동을 중지시켜야 하고 좀 더 선하게 행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민족연합당의 평의회 정권조차 그러한 사건 때문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프란츠 보르케나우
기동경찰대 사이에서도 아나키즘이 점차 확산되었다. 경찰서가 텅 비었다. 경찰들이 거리로 나갔던 것이다. 카탈루냐 정부의 기병대였던 주 근위대의 사기도 저하되었다. 카탈루냐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한 호화저택의 발코니에서 서너 명의 남자들이 가구를 도로로 내던지고 있었다. 그런 일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모든 폭동에는 저택 습격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습격이 아니면 재산을 약탈해 갔다. 콤파니스 대통령을 실제로 불안하게 만든 것은 기동경찰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정부 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개인 재산에 대한 약탈행위가 아주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데도 기동경찰은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공공질서의 파수꾼들이 그들의 규율을 파기한다면 승리의 결과가 사라질 위험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콤파니스는 사회안전대책부의 총경 에스코페에게 전화를 걸어서 기동경찰대와 치안경비대, 주 근위대를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는지 물었다.
에스코페가 대답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대원들이 탈영하여 FAI에게 투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누엘 베나비데스(Manuel Benavides)
복수 지배체제
권력의 문제
밤사이에 카탈루냐의 모든 권력이 CNT와 FAI의 손에 넘어갔다.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조직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조직의 지도자들은 두 가지 가능성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나키스트들의 독재, 아니면 무기력하지만 아직 존재하고 있는 카탈루냐 정부와의 타협이었다. 중대한 순간이었다. 만일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이 평의회라는 국가기구를 해체했더라면 뒤이은 몇 달 간의 혁명투쟁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방어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전투가 끝나면 카탈루냐 국가기구는 자연 해체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근거도 없었다. 물론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가 정권을 장악하지 않은 것은 혁명의 혜성을 운항궤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 일조한 여러 계기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스테픈 존 브라데마
사회민주당원이며, 나중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연합하여 만들ㄷ어진 카탈루냐 사회주의통일당(PSUC)의 사무총장이 되었던 후안 코모레라(Juan Comorera)는 간밤의 상황에 대해 대통령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CNT와 POUM이 거리를 장악하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몇 주 안에,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몇 달 내에 이 조직을 와해시킬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패배할 지루한 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총력을 기울여 CNT에 대응할 수 있는 노동자총동맹(UGT) 사회주의 노조를 조직하는 일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무력으로 일을 처리하셔서는 안 됩니다. 질서를 잡으시는 방향으로 혁명을 이끌어야 합니다. 각하께서는 정부를 따르고 있는 무리들을 조직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군대를 개편해야 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아나키스트들이나 트로츠키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온갖 비방을 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귀머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장전투력이 생기고 건실한 노동자 농민 운동을 통하여 경제를 복원한다면, 전선에서는 전투를 수행할 수 있고 후방에서는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의사일정이 마비되는 사태는 없을 것입니다.”
마누엘 베나비데스
대기업 은행의 본점이며 카탈루냐 기업연합의 본부가 있는 거대한 석조건물인 캄보Cambó빌딩은 라이예타나Layetana 32번가의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편 바르셀로나의 강성 건축노조의 본부는 암거래시장 안에 있는 낡고 우중충한 건물 안에 있었다. 이 노조는 CNT에 소속되어 있었다. 혁명투쟁이 진행되던 가운데 이 노조 사무실에 모인 노동자들은 캄보빌딩을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계획은 처음에는 순수한 전략적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빌딩 최고층에서의 기관총 사격은 중요한 교통의 대동맥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건물이 점거되자 거기에 들어오는 대원들의 수가 늘어났다. 그래서 빌딩은 저절로 일종의 작전통제실로 변했다. 전투가 진행되던 중에 CNT 지역위원회도 그 건물에 상주하게 되었다. 혁명이 승리로 끝났을 때, 건물의 명칭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모든 사람들은 그 건물을 CNT-FAI 빌딩이라고 불렀다.
전에는 금융계와 산업계가 그들의 사무실로 사용했던 그곳이 이제 협의회와 위원회 그리고 바르셀로나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이용하는 작전본부가 된 것이다. 빌딩의 변화된 모습은 현관 입구에서부터 드러났다. 반원 모양의 높다란 현관 입구에는 모래주머니를 쌓아올인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방아쇠 뭉치가 잠긴 기관총 두 정이 거치되어 있었다.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넓은 발코니에는 커다란 투시도가 걸려 있었다. 7월 20일, 카탈루냐 CNT 총회가 그곳에서 개최되었다. 거기서 내려진 CNT의 정치노선은 카탈루냐 정부의 노선에 대립하는 것이었다.
아벨 파스 1
대통령과의 담판
이제 막 CNT 지역위원회의 회의가 끝난 건축 노동자 노조 사무실은 카탈루냐 평의회 의사당으로부터 불과 몇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방어위원회는 자동차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무장한 승용차가 그들을 수행했다. 그들이 소총, 권총, 자동 연발권총, 수류탄으로 무장한 것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면도 있었지만 동시에 언제 출현할지 모르는 가상의 적을 대비하기 위한 안전조치이기도 했다. 두루티는 많은 집회에서 연사로 나선 경험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행동파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연설보다는 오히려 탄띠에 찬 권총과 무릎에까지 걸친 소총에 더 의지했다. 죽은 아스카소를 대신해서 그의 형 호아킨이 두루티 옆을 지켰다.
위원회의 조직원들은 지난 사흘 동안 단판의 승부를 걸었다. 그들의 승리는 그들 모두에게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도시가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다. CNT-FAI가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전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 아나키의 출범을 알리는 시계가 울렸던 것이다. 정부는 어떻게 대처할까? 두루티와 그의 대원들은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들은 정부를 구성할 마음은 없지만 쟁취한 권력은 협상 테이블에서 손에 무기를 들고 지킬 것이다. 아무도 이들의 승리에 도전할 수 없다. 치안경비대가 과거에는 정부를 지원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경비대원들이 당황하고 있다. 병영화 된 탄압기구였던 경찰이 이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동경찰대도 점차 민중의 편에 서고 있다. 군대는 이미 힘을 상실했다. 반파쇼 장교들은 충성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부대를 강력한 군대로 개편할 능력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근위대의 힘이라고는 너무 허약하여 정부 청사를 지키기에도 급급하다. 저항할 수 있는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과 소부르주아지 집단들은 아나키스트들을 상대할 수가 없다. 바르셀로나 프롤레타리아들은 이제 거의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감시초소와 바리케이드의 요충지대는 안전하게 보호되어 있다. 지역노조와 노동자본부는 안전하게 방위되고 있다. 부르주아지 정치가들은 고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축 노동자 사무실에서 지역위원회 회원 마리안느, 산티얀, 아우구스틴 조우취와 여러 행동대원들이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동안 전화벨이 울렸다. 마리안느 바스케스가 전화를 받았다. “예, 지역위원회 비서입니다.” 그는 아주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들 그가 농담 섞인 말투로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알겠어요. 그럼요, 좋습니다. 우리가 당장 논의해 보죠.”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람들 쪽으로 몸을 돌려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콤파니스 대통령이 위원회 대표자와 만나자는 제의입니다. 협상을 하고 싶답니다.” 의아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위원회 비서는 계속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동지 여러분, 저는 방어위원회가 참석한 지역위원회의 이 회의가 개회됨을 선언합니다.”
열띠고 긴 토론이 전개되었다. 일부 위원들은 이 초청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들은 대통령을 파직시키고 카탈루냐 전 지역에 자유공산주의를 선포할 순간이 왔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든 것이 계략일 수 있다고 염려했다. 발언자들은 지난 며칠 간 잠을 떨치기 위해 계속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태웠기 때문에 목에서 쉰 소리가 났다.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이 딜레마에 대한 한 가지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것은 다른 당들과 협력을 하든지 아니면 아나키즘 독재를 하든지 하자는 양자택일의 안건이었다.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을 두려워하지 말고 초대에 응하여 콤파니스의 태도를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중요한 계기는 우선 투쟁대원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새 힘을 결집하는 데에는 짧더라도 휴식시간이 꼭 필요했다. 이것은 파쇼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어려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라고사 동지들을 염두에 두고 내려진 결정이기도 했다.
자동차 행렬은 하이메Jaime 1번가를 지나 정부 청사를 향했다. 그들은 공화국 정부 청사의 광장에 도착하였다. 평의회 발코니에는 카탈루냐 대형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청사 정문에는 주 근위대의 보초병이 서 있었다. 옆 골목에는 기동경찰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의 완장을 팔에 끼고 있는 시민들도 보였다. 중무장을 한 CNT-FAI 대표자들이 차에서 내렸다. 위병 장교가 입구에 내린 대원들 가까이 다가왔다. 대원들은 두루티, 가르시아 올리베르, 호아킨 아스카소, 리카르도 산스,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 그레고리오 호베르, 안토니오 오르티스와 발렌시아였다.
“우리는 CNT-FAI의 대표자들이오. 콤파니스가 우리에게 회담을 요청했고. 우리는 우리의 호위병을 함께 데리고 왔소.”
루이 로메로
우리는 소총과 권총 그리고 기관총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거기에 갔다. 우리는 외투를 걸치고 있지 않았으며, 얼굴은 포연이 묻어 거무칙칙했다.
“우리가 CNT-FAI의 대표자들이오.”라고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그리고 저들은 우리를 수행한 호위병들이오. 콤파니스가 우리와 회담을 하고 싶다고 제의했소.”
카탈루냐 대통령은 우리를 선 채로 맞이했다. 그는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악수를 했다. 소개는 간단히 했다. 모두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각자의 소총을 무릎 사이에 끼웠다. 콤파니스는 짤막하게 인사말을 했다.
“다른 것보다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사실을 먼저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CNT와 FAI는 그 세력의 의미에 맞는 이와 같은 대접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언제나 가장 심한 압박을 받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전에 여러분 편에 섰던 제가 정책수행이라는 책임 때문에 고통을 무릅쓰고 여러분과 부대끼며 억압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도시와 카탈루냐 전 지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독자적인 힘으로 파시스트들을 굴복시켰기 때문이지요. 제가 우리 당과 보초, 그리고 당국의 여러 사람들이 지난 며칠 동안 여러분에게 지지를 약속하지 못한 사실을 상기시키더라도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그는 잠시 신중하게 생각하고서 다시 말했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탄압을 받았던 여러분이 지금은 군부들과 파시스트들을 상대로 하여 승리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허심탄회하게 여러분과 회담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겼습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수중에 들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저를 카탈루냐 대통령으로서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거나 저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백의종군하여 파시스트들과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 반대로 생각해 주면, 저는 파쇼가 승리를 한다면 살아서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저는 지금 스페인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우리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를 이 전쟁에 미천하나마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 당과 저의 이름을 걸고서 이 명예를 지킬 것이라고 확약합니다. 여러분은 저의 충성된 마음을 한 남자의, 한 정치가의 그것으로 믿어도 좋습니다. 저는 불명예가 있는 그날로 자신의 모든 과거가 파산되고 만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카탈루냐가 사회적으로 가장 진보한 지역들 가운데 항상 선봉에 서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1
이미 콤파니스는 카탈루냐의 세 정당의 대표자들을 다른 방에 모두 불러놓았다. 그들은 아나키스트들과 회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담 이후 CNT-FAI의 대표자들이 공식 용인되었고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연합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 위원회는 나중에 반파쇼 민병대의 중앙위원회로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카탈루냐의 질서를 회복하고 사라고사의 군사 쿠데타에 대해 무장투쟁을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호세 페이라츠 2
협상
7월 19일, 바로 이날은 카탈루냐는 물론 스페인 전 지역의 모든 정치구조가 무너진 날이었다. 합법적 정부는 그때부터 음성적 존재에 불과했다. 이 나라의 실제적 정치상황으로 보아 새로운 권력구조의 생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반파쇼 민병대 위원이 바르셀로나에 창설된 것이다.
이런 군사자문 조직의 발족은 사실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들은 정부에 귀속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이념에도 배치되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정부의 활동을 그대로 방치하였다. 그러나 사실 민병대원과 그 위원회는 정권에 계속 개입했다.
민병대 위원회에는 다른 반파쇼 단체도 가입하고 있었다. 나는 좌파 자유당의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했다. 우리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지 지식인들처럼 넥타이를 매고 재킷을 입고, 거기에 만년필을 꽂은 채 회의석상에 참석하였는데, 마침 그곳에서 아나키스트 대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면도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연발권총과 다이너마이트를 달고 있는 탄띠를 찬 전투복 차림이었다. 그들의 인솔자는 외모와 말투, 행동거지가 마치 거인과도 같았다. 그가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였다.
하우메 미라비트예(Jaume Miravitlles) 1
나는 전에 한 번 신문에 논설을 쓴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파시스트와 FAI의 사람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광폭한 사아니, 두루티는 그 기사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찾아와 그의 큼직한 두 주먹을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당신이 미라비트예 선생이오? 조심하시오! 불장난 같은 것은 하지 마시오! 그러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고.”
이런 식으로 반파쇼 민병대 중앙위원회는 긴장과 협박을 조성하며 일에 착수하였다.
하우메 미라비트예 2
7월 21일, 아나키스트 지역위원회가 새로운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지역총회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파시스트들에 대한 최후 승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자유공산주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총회는 CNT-FAI가 다른 노조조직과 민병대 중앙위원회에 가입된 정당들과 서로 협력하기로 한 결의를 승인하였다. 바호 요브레갓 지역구만 이 협력체제에 반대했다.
실제로 아나키스트 노조연합의 조종을 받고 있던 중앙위원회는 전에 바르셀로나의 요트 클럽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에서 결의된 사안을 추진하였다.
스테픈 존 브라데마
CNT-FAI는 이제 처음으로 불가피한 권력재편의 문제에 봉착하였다.
“우리는 카탈루냐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권력을 독점해야 합니까? 아니면 평의회와 협조해야 할 것입니까?”
이 문제를 두고 아나키즘 운동의 최고위원들이 고심을 하였다. 그들은 한 달 이상 그 문제를 거론했지만 해결방안을 찾지 못했다.
마리아노 바스케스, 가르시아 올리베르, 두루티와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는 현재의 힘의 관계를 고려할 때 아나키즘 독재가 무리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정권을 장악하면 다른 단체들이 우리를 공박할 것이고, 우리가 마드리드 중앙정부를 장악하게 되면 외국의 모든 정부들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협력 체제를 선택해야 하지만 우리와 무관한 정부가 구성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에스글레아스(Esgleas), 에스코르사(Escorza) 그리고 산티얀은 우리의 생각에 반대했다. 정권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정권이 실제로 CNT-FAI의 수중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CNT-FAI가 아라곤에서 민병대를 통제하고 후방에서는 사회 안정과 경제를 통제하고 있는 마당에 정부와 타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FAI의 일원 중에 가장 극단적인 행동파이며, 특이한 모습을 한 에스코르사는 음흉한 웃음을 띠면서 이렇게 비꼬듯 말했다. “당신들은 광주리에 암탉을 두고서 계란이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논쟁하고 있구먼. 그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오. 우리는 오히려 여우들이나 조심해야지요. 여우를 막는 데는 총이 제일입니다. 우리는 농토를 집단농장화하고 산업을 노조의 손에 넣기 위해서 평의회 정부를 이용해야 합니다. 도시 노동자들은 자동적으로 CNT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농촌 노동자들은 집단농장의 일원이 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관례적 정치조직 기구와 당들을 타도해야 합니다. 생디칼리슴이 새 사회의 토대가 될 것입니다.”
산티얀은 처음에는 정부와의 어떤 협력도 반대한다는 완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양심 없이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장관이 되자마자 정부에 대하여 무조건 협력을 지지했다. 에스글레아스와 에스코르사의 지지를 받았던 페데리카 몬트세니는 정부와의 협력에 끝까지 반대했다.
이런 논쟁으로 2개월을 보내면서 혁명의 열기는 식어갔다.
마누엘 베나비데스
당시 CNT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너무 과신하여 대업을 극단으로 몰고 간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은 CNT가 선도하였고, 또 자신들만이 계속 진행시킬 수 있었던 혁명을 새로운 기관들의 조종에 맡김으로써 혁명의 열기를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분열된 형태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도 나오게 되었다. “이제 다시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들을 모두 삼켜버렸다는 말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소박한 문구는 현실에서 정치가들이 CNT 대원들을 중립화시켜 스페인 혁명에 일격을 가하는 데에 좋은 수단으로 쓰였던 것이다.
카노바스 세르반테스
정부 청사에는 혁명적 상황을 여전히 무기력하게 수수방관만 하던 음성적인 정부내각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카탈루냐 대통령 루이스 콤파니스는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에 법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을 여러 번 변호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CNT 내부에도 그를 추종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민병대 위원회에 참석했을 때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CNT-FAI 위원들과 이들을 비난한 콤파니스 사이에는 종종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곤 했다. CNT-FAI의 태도가 때로는 너무 강경하여 혁명의 승리가 위험스럽게 보인 적도 많았다. 하루는 두루티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정부 대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대통령께 멋진 안부 인사를 전하시오.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은 게 그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고 말이오! 그가 만일 계속해서 우리를 비방하면 결국 무슨 일인가 당할 것이오.”
하우메 미라비트예
민병대 위원회의 1차 회의가 끝난 뒤 두루티와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사회주의통일당의 사무총장인 코모레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볼셰비키들이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소.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마누엘 베나비데스
그때 민병대 위원회는 모든 일에 찬성했으며, 모든 문제를 토론에 부쳤다. 토론의 내용은 이러했다. 후방에서 혁명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일, 전방부대를 창설하고 장교를 양성하는 일, 전신전화학교와 암호해독학교를 세우는 일, 요양소와 의복공장을 설립하는 일, 경제 · 입법 · 사법부의 새로운 편성, 평화의 산물로부터 투쟁의 산물로의 전환, 선전 작업, 마드리드 중앙정부와의 관계, 모로코와의 연락 유지, 지방경제 문제, 국민 보건제도, 경계선 및 해안방위 문제, 금융권의 문제, 민병대에 봉급 지급, 부양가족과 미망인에게 지급하는 연금 문제 등등이었다.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민병대 위원회는 그날 20시간 동안 토론했다. 기존의 정부가 권력 유지를 위해 관료들에게 비싼 보수를 지불해야 했던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다. 동시에 국방성, 내무성, 외무성이 구성되었다. 모든 일이 단 한 번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민중 의지의 참된 표현이었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3
트로츠키파의 판단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의 법칙과 그 문제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평화로운 시기에 살아가고 있는 듯이 자신들의 문제를 노조에만 국한시키려 했다. 그들은 대중들과 정당, 정부기구 등 노조 외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현실적 혁명가들이었다면 우선 도시와 농촌의 모든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어느 노조에도 가입하지 않은 기식 민중들을 포함하는 소비에트와 평의회를 조직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소비에트에 소속된 혁명적 노동자들은 틀림없이 투쟁에서 선도적 역할을 떠맡았을 것이다. 역시 그랬더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이 어느 누구도 감히 극복하기 어려운 세력임을 자각했을 것이다. 그 결과로 부르주아지 국가기구는 허공에 뜬 상태가 되어 단 일격에 분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정책’의 필요성을 외면하고 노조 안에서 피신처를 찾았던 것이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레바퀴에 달린 다섯 번째 바퀴에 불과했다. 아무도 다섯 번째 바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이 오자 그들은 곧 그 자리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변명 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방식의 독재도 우리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아나키즘은 이미 반혁명적 학설에 불과할 뿐이다. 권력 장악을 포기하는 것은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착취자들에게 권력을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혁명의 본질은 권력에 있으며,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계급의 강령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 대중이 권력을 잡는 일을 준비시키지 못하면 대중에게 봉기를 선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나키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 그들이 필요하다고 여긴 조치를 취했다면 그때는 아무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그들의 강령이 실현될 수 있다고 스스로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레프 트로츠키(Lev Trockij)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사람
회의는 오래 끌지 않았다. 두루티는 중앙위원회가 관리기구라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논쟁을 벌였던 사안은 협상을 통해 표결에 부쳐졌다. 관료적인 서류들까지 있었다. 두루티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 멀리 교외에서 총성이 들렸다. 그는 오래 참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단원들을 편성하여 아라곤 전선으로 출동했다. 나는 그들이 바르셀로나 거리를 통과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광경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그들ㄹ이 입고 있는 제복의 색깔은 뒤죽박죽이었다. 그들은 사방에서 모인 자원병들이었다. 옷은 천을 덧대어 기워서 너덜너덜했다. 거의 히피족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히피족과 다른 것은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무장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하우메 미라비트예
출정
선봉대
민병대 위원회의 첫 임무는 아라곤 전선에 무장대원을 파병하는 일이었다. 바르셀로나의 반동군부가 타도된 지 사흘 만에 3천 명의 지원병들이 파세오 데 그라시아Paseo de Gracia와 폐광지역에 모였다. 그들은 두루티와, 한때 정부에 충성한 해병 장교, 페레스 파르라의 지휘 아래 아라곤으로 출정했다. 두루티가 이끄는 용감한 대원들은 행군 도중에도 계속 그 수가 늘어났다. 아나키즘 신문은 이 용사들의 행진 장면을 1면 기사로 실었다.
동원된 민병대의 수를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아나키스트들은 수를 가늠하는 것조차 반대한다. 루돌프 로커는 노동자 민병대원의 수가 2만 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중 1만3천 명은 CNT-FAI의 대원들이고 2천 명은 사회주의노조 UGT의 대원들이며 3천 명은 인민전선에 투입된 당파들의 당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8천 명으로 구성된 두루티의 대원들은 계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아바드 데 산티얀의 보고에 의하면 두루티가 아라곤 전선으로 출발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바르셀로나에서 총 1만5천 명의 지원병이 모집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여러 당파와 노조조직의 단체로 구성된 원정대에 가담했을 것이라고 한다.
존 스테픈 브라데마
당시 신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반파쇼 민병대 위원회는 쿠데타 군을 공격하기 위해 무장한 노동자 여단을 사라고사로 출정키로 결정하였다. 위원회는 출정할 대원의 수를 6천 명으로 계획했으나 그 열기가 너무 고조되어 카탈루냐 광장에 모인 지원병의 수는 1만 명이 넘었다.”
이와는 반대로 아바드 데 산티얀은 이렇게 확언한다. “일반적 열기에도 불구하고 두루티―페레스 파르라 대원은 거의 한 번도 우리가 예측했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보는 통찰력이 부족했다. 이용 가능한 모든 힘, 즉 전투에 투입될 인원, 무기, 작전과 계획을 전혀 고려치 않고 사라고사로 출정한 선봉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고, 무턱대고 자신들이 우세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출동했을 때 민병대원의 수는 불과 3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호세 페이라츠 2
출정이 확정되기 훨씬 전, 그러니까 4월 14일에 바르셀로나 그란 비아Gran via 폐광구역에는 약 2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여러 종류의 박격포를 가져온 포병과 자동무기를 다루는 사람들, 전신전화기구를 다룰 줄 아는 전화국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소총만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들이었다. 7월 24일 오후에 출정이 시작되었다.
리카르도 산스 4
그들이 아라곤으로 출정했을 때 나도 함께 가려고 트럭에 타고 있었다. 당시 확성기를 매단 자동차가 바르셀로나 전 구역을 순회하면서 주민들에게 생필품의 원조를 호소했다. 왜냐하면 민병대가 빵 한 조각 준비하지 않고 출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감격적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점심을 먹다 말고 사방에서 수프, 고기, 야채, 정어리 통조림 등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왔다. 순식간에 트럭이 가득 찼다. 우리는 민병대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민병대원이 이름 지은 ‘정어리 통조림 트럭’을 타고 아라곤으로 갔다. 두루티는 내가 타고 가는 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그에게 귀띔을 해준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가 자동차에서 내려 트럭 안으로 시선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노려보고는 계속 차를 타고 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밀리엔느 모린
사라고사 진군
두루티는 사라고사를 점령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라곤의 중심도시가 파시스트의 수중에 들어있는 것은 CNT의 혁명에, 그리고 내전의 종결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사라고사는 아라곤 아나키즘의 핵심지역이었다. 사라고사 아나키스트들이 1933년 12월에 일으킨 봉기는 이미 혁명의 잠재성을 드러내 보인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라고사는 아나키스트들이 카탈루냐, 바스켄 지방의 기지를 이용하여 비스카야, 아스투리아의 동지들과 쉽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혁명 두 달 보름 전에 사라고사에서 CNT 민족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는 스페인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선례가 없었던 대규모의 시위운동을 이끌었다. 스페인 전국에서 모인 여성과 남성을 포함한 1만 명의 노동자들이 연대시위투쟁을 벌이기 위해 투우장에 모였다. 그들은 플래카드를 붙이고 흑 · 적색기를 매단 특별열차를 타고 왔다. 열차는 승차 정원을 넘겼다. 당시 CNT와 FAI의 열기가 사라고사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적들조차도 이젠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의 전술적 계략이 특이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반혁명분자들이 모든 세력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막강한 정규군과 광신적인 전쟁 지원병 부대인 나바라Navarra의 장교들이 가세하였다. 그들은 이미 지난 세기의 시민전쟁에서 반동적인 짓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 외에도 이 도시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가운데는 제2공화국에 빌붙은 전형적 비겁쟁이였던 시장과 수비대 사령관 그리고 교활한 늙은이 카바네야스(Cabanellas)가 있었다. 카바네야스는 자신을 언제나 공화주의자로, 프리메이슨의 결사단원으로 간주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프랑코에게 빌붙기 전까지의 이야기일 뿐이다. 변절의 대가로 그는 부르고스Burgos 지역 군사혁명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두루티의 원정대는 사라고사 아나키스트들이 섬멸되기 전에 그들을 구하기 위해 사라고사로 강행군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직도 생사를 건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에게 이미 완전히 진압당한 상태였다. 두루티가 사라고사의 진입로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벌써 묘지처럼 변해 있었다. 적들은 원정대를 기다리며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호세 페이라츠 1
두루티와 그의 대원들은 레리다Lérida를 통과하여 부하랄로스Bujaraloz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사라고사까지는 4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두루티는 적의 접근을 쉽게 파악하기 위해 넓은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도로 감시초소에 작전지휘소를 설치했다. 왼쪽 측면에서 에브로 하천까지 이르는 작전구역을 확보하였다. 그 구역에 낙오한 적의 잔류병들이 없는지 철저한 수색작전이 신속히 이루어졌다. 두루티는 전방초소를 도시의 시계가 잡히는, 사라고사에서 대략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잡았다.
두루티가 사라고사 내의 혁명세력들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진군이 차단된 대원들의 무장상태도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외곽에서 출동명령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군들이 시를 완전 장악하여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래서 쿠데타군은 쉽게 방어군을 조직할 수 있었다.
두루티가 사라고사를 점령했다면 전쟁을 쉽게 공화주의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끝났을 것이다. 사라고사 주둔군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두루티가 그들에게 승리할 경우 두루티는 로그로노Logrono와 비토리아Vitoria를 거쳐 아틀란티스 해안에 인접한 빌바오까지 갈 수 있는 길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라고사가 함락되었다면 테루엘Teruel도 열흘을 버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투쟁에서 패배한 명백한 원인은 너무 경솔하게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점이었다. 다른 원정대와 마찬가지로 두루티의 경우도 아라곤을 공격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들에게는 출동 예비대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무기와 실탄의 공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두루티는 몇 명의 첩보원을 사라고사에 침투시켰다. 그들은 적의 감시선을 뚫고 몰래 침투했다. 그들은 도시의 방어선이 아주 엉성하므로 간단한 공격만으로도 충분히 도시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런 상황보고를 중앙참모부에 계속 타전하였다. 그러나 중앙참모부는 어떤 공격도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격준비에 필요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시간만 끌었다. 아라곤 전선의 지휘자들은 중앙참모부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리카르도 산스 3
한 지방 목사의 일기
내전이 발생했을 당시 나는 우에스카Huesca 지방의 아귀날리우 시에서 담임 목사직을 맡고 있었다. 공화국이 선포된 이후 교회에 적을 두고 있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미 좋지 못한 평을 받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까마귀’라고 불렀다. 나는 콤파니스의 유명한 연설을 라디오에서 들은 후 곧 목사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가 피신해야 할 날은 기어이 오고 말았다. 7월 27일이었다. 나는 완전무장한 젊은이들을 가득 태운 차가 시장의 광장에 멈추어 서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내 오토바이를 타고 산으로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민병대원들이 마을마다 수색하여 목사들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사살되거나 강물 속에 던져졌다. 이 사건에 대한 거의 모든 책임은 민병대에게 블랙리스트를 넘겨준 마을위원회에 있었다. 민병대는 그 블랙리스트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처형했던 것이다.
나는 바르바스트로 마을 입구에 설치된 검문소를 통과하다가 검문을 당했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국민민병대의 운전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내게 소리 지르는 사람보다 더 큰소리로 떠들었다. 운전병으로 검문소를 간신히 통과했다. 그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때부터 나는 도망중인 목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탈영한 운전병이기조차 했다…….
나는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면서 칸다스노스로 갔다. 그곳은 내가 태어났던 곳이다. 가족이 살고 있는 집으로 몰래 들어갔다. 다행히도 아들 녀석이 마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권한도 한계가 있었다. 그도 무장대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밀고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체포되었다. 민족위원회에 적을 두고 있던 나의 한 친구가 즉결 총살을 막아, 내가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이름은 티모테오(Timoteo)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읍사무소 발코니 위로 밀어올렸다. 발코니 앞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였다.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아주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졌다. 마을 주민들은,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좌익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내가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를 변호해 주었다. 이것이 재판절차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나는 아직 안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을에 있는 무장한 낯선 사람들이 내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티모테오는 부하랄로스에 있는 두루티와 연락을 취했다. 모든 파견대가 그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두루티가 그에게 말했다. “잘 듣게, 만일 자네가 그 사람을 안전하게 하고 싶다면 그를 여기로 데려오는 수밖에 없네.”
그럭저럭 때는 8월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부하랄로스로 갔다.
나는 두루티 앞으로 안내되었다. 그가 물었다. “어느 것을 더 원하시오? 집으로 돌아가고 싶소, 아니면 여기 우리 대원들에게 남고 싶소?”
“제게 뭐 선택권이 있습니까?”
“물론 있지요.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고 싶소. 만일 당신이 집으로 돌아간다면, 멋대로 행동하는 대원들 가운데 어떤 대원이 당신을 도중에 살해할지 모른다는 사실이오. 이번처럼 또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오. 그러나 당신이 여기 남는다면 적어도 안전할 것입니다. 그건 내가 보장하지요.”
당연히 나는 그의 원정대에 남기로 결정했다. 두루티는 내게 서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즉시 나를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벌써 빨간 머리의 아가씨가 앉아 사무를 보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선생을 도울 것이오. 그러나 그녀의 스커트 아래는 만지지 마시오.” 그가 농담했다. 그곳에서 나는 원정대원들의 이름을 정리하고 새로 도착한 지원병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물론 고참이나 신참들도 내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곧 알게 되었지만 내가 두루티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나에 대해서 뭔가를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헤수스 아르날 페나(Jesús Arnal Pena) 1
야전사령관 없는 전투
내가 두루티를 다시 만났던 1936년 당시 그는 이미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위대한 정치가의 기질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는 정치가에게 어울리는 지적 수준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가 대중들 앞에 나설 때에 그는 훌륭한 선동가였지 유명한 연설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건강한 상식을 겸비하여 현실적 가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줄 아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스페인 대중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남쪽 십자성의 환상은 그 자체가 어떤 신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전투력은 다만 그가 야전사령관이 아니라는 점에 한계가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는 군사전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대원의 지도자로서 용기뿐만 아니라 판단력도 잘 발휘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뛰어난 자제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저 파시스트이겠거니 하는 추측만으로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처형하게 한 그런 지도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사물을 정확히 꿰뚫어볼 줄 알았다. 그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온갖 의심이 난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내가 그 한 예로써 기억하고 있는 것은 두루티가 항의를 하던 한 외국인을 처형 직전에 보호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루티는 자발적으로 원정대에 지원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나는 믿을 만한 아나키스트들에게 두루티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소작인들은 서로 다툴 수가 있네. 자네들은 마을과 공장으로 돌아가게. 유능한 조직가들이 현장에 부족하다네. 자네들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게. 여기 전선은 자네들이 없어도 우리만으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네.”
가스톤 레발
분명 그는 야전사령관은 아니었다. 우리들 중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확실히 우리는 도시 게릴라전을 구상하였다. 바르셀로나와 다른 도시, 우리가 알고 있던 주민들의 마음속,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은 어디든 그곳은 우리의 매복 장소였다. 경찰서 감시초소와 무기고, 항만의 맞은편 모퉁이에서 움직이는 신문배달부는 우리의 동지였다. 우리는 그 지역 구석구석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고지 위에는 참호와 참모본부의 지도가 있다고 했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며 또 알고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장군들의 쿠데타가 있기 전까지는 우리에겐 그런 것이 전혀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위대한 전술가가 아니었듯이 두루티도 마찬가지였다.
리카르도 산스
정확히 말하자면 아나키스트들의 동료가 아닌 나의 한 동행인이 두루티의 원정대를 방문한 후 넌더리를 내고 돌아갔다. 물론 두루티는 바르셀로나 아나키스트 프롤레타리아트가 그에게 위임한 작전권을 갖고 대원들을 이끌었고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을 만큼 용감했다. 그는 다른 원정대보다 훨씬 깊숙이 사라고사로 진입하였다. 결국 연대장 비얄바(Villalba)의 지휘를 받고 있던 고등사령부가 두루티에게 그런 행동은 인명을 경시하는 행위라고 지적하면서 두루티를 설득한 끝에 간신히 두루티의 공격을 늦출 수 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자에 가까웠던 나의 친구의 이야기였다. 그의 그러한 결론에 대해 의심이 가는 바가 없진 않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전선에서 목격한 바에 의하면, 적어도 나머지 원정대는 자신들의 목숨을 그런 위험에 내맡길 만큼의 과잉열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마도 카탈루냐 사람들이 사라고사를 장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루티는 극단적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의미한 희생과 다른 원정대가 보인 우유부단한 태도 사이에서 중립적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아라곤 전선의 모든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만일 두루티 원정대의 투쟁이 전투적으로 적절하게 이용되었더라면, 두루티 원정대의 무모한 진격은 유용한 투쟁전술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전선을 목격한 이후 나는 당시 모든 정치집단들이 현실을 읽는 감각이 몹시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사라고사를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놓기를 바랐다. 사실 그런 희망을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통합마르크수주의 노동당(POUM)의 추종자들이, 고의적으로 배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작전 중에 사라고사에서 사보타주를 선동했다는 혐의를 정부에 돌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나키스트들은 사라고사의 정복을 수없이 계획했고, 따라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정부가 그것이 실현될 것을 미리 간파한 것은 너무나 뻔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정복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위로부터의 배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태만과 무능에 있었다. 민병대의 그런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장교와 정치가들을 중심으로 한 영웅적인 노력들이 필요했다.
프란츠 보르케나우
복수의 천사
우리가 행군하며 지나쳤던 여러 마을과 소도시의 주민들은 그들 자신의 지역은 열성을 다해 지켰지만 전선으로는 단 한 사람도 보내지 않았다. 민병대원은 주로 바르셀로나에서 보충되었다.
낡고 쇠퇴한 지방도시 세르베라Cervera는 이전에 목사들의 세미나가 열렸던 곳이다. 나는 열여섯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말쑥하게 생긴 한 청년에게 과거의 신분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당시 그곳 민병대의 보초병이었다. 그는 매력적인 웃음을 띠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 목사들과는 바이바이했지요. 잘했던 거지요!” 그곳의 모든 교회도 예외 없이 불타 내려앉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허물어진 담장뿐이었다. 방화사건은 CNT의 지시에 의해 원정 중이던 민병대에 의해 일어났다. 현지에는 프랑코의 세력들과 평의회 추종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투쟁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가 전선에 가까이 왔다는 것이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거리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도로의 교통은 평화 시보다는 한산했다. 급식을 보급하는 몇 대의 트럭이 지나갔지만 실탄을 적재한 트럭이 우리를 지나 전선으로 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빈 트럭들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구급차라고는 한 대도 보지 못했다.
사라고사 전선의 남부지역의 중요한 도로들은 모두 레리다로 통하기 때문에 그곳은 교통이 분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활기라고는 거의 없었다. 서른에서 마흔 대 정도의 트럭과 자동차가 광장에 주차해 있었고, 거리에는 서너 명의 민병대원이 걷고 있었다. 민병대는 고작해야 2~3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지방 지사의 사무실에는 군중들이 법석댔다. 그곳 민병대원들은 아나키스트들의 지도자인 두루티와 그의 원정대에 대하여 열광적으로 떠들어댔다. 그와 그의 대원들은 카탈루냐 전투의 민중적 영웅이 된 반면에 다른 카탈루냐 원정대에게는 성가신 존재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의 원정대는 여러 마을에서 파시스트들과 목사, 그리고 부자들을 사살할 때 다른 어떤 원정대보다 더 냉정하게 행동한 사람들로 알려졌다. 카탈루냐의 모든 민병대가 자신의 희생이나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라고사로 용감하게 출정했다고들 했다. 지사의 관청을 지켰던 보초병들 가운데 벌써 몇 명은 두루티의 지휘 아래서 투쟁하였다. 신참들은 소박한 웃음을 띠었다. 그것은 결코 새디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투에서 이겼던 투쟁담을 늘어놓으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규격 실탄형으로 만들어진 덤덤탄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들 중에 한 명이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포로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실탄들은 포로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것이 스페인 내전의 한 양상이었다. 중립적인 외국 특파원들이 심각한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양쪽에 대하여 알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했다.
프란츠 보르케나우
“러시아에 있는 여러분은 올바른 국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 편입니다.” 흑 · 적색 셔츠를 입은 한 보초병이 신분증을 검사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자유공산주의를 도입할 것입니다.”
“자유공산주의!” 이 말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나는 이 말을 매우 자주 들었다. 그것은 그들의 요구였고 맹세였던 것이다.
가끔 발생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나키스트들의 행동을 설명할 때는 그들 가운데 노상강도들도 득실거린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기도 했다. 사실 아나키스트들 속에 상습적인 강도와 도둑들이 침투해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권력에 관계하는 당파는 언제나 믿을 만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폭도들도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당시에는 아무나 아나키스트라고 사칭했다. 1936년 9월, 내가 발렌시아에 있었을 때, 1백 명으로 구성된 ‘철갑원정대’가 테루엘 전선에서 왔다. 그들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사령관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발렌시아에서 해야 할 일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법원 문서실을 방화하고 형무소에 진입하여 수감 중인 형사범들을 석방시키려고 했다. 아마 거기에는 그들의 동료들도 수감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형사범들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CNT는 1936년 가을에 카탈루냐의 세 개의 노동자 구역을 자신들의 계열에 통합하였다. CNT와 FAI의 조직원들은 대부분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좋지 못한 일은 그들이 비록 독단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독단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실의 삶을 그들의 이론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했다.
그들 중에 혜안을 가진 사람들은 아름답게 들리는 팸플릿의 선동과 거친 현실 사이의 모순을 지적할 줄 알았다. 그은 어제까짐나 해도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진리로 여겼던 것을 폭탄과 총알의 세례를 받으면서 단번에 뒤바꾸려고 했다.
일나 에렌부르크 1
혁명 초기의 며칠 동안 레리다의 모든 교회가 불탔다. 두루티의 원정대가 아라곤 전선으로 진군하면서 그 도시를 통과했던 그날 민병대가 성당을 방화했던 것이다. 방화자들은 레리다 출신의 동료들이 성당의 파괴를 꺼리자 그들을 비겁자들이라고 욕했다. 성당은 이틀 동안 불타올랐다.
익명 1
‘적색 목사’, ‘두루티의 비서’라는 소문이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비록 사실이 아니지만. 나는 아나키즘을 싫어했다. 그리고 두루티는 비서를 둔 적이 없었다. 나는 원정대의 사무실에서 그저 원정대원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단순한 서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백한다면 두루티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고 살인자니 강도니 떠들지만 그들은 중상 모략하는 이들일 뿐이다. 나는 그러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내 친구를 변호할 것이다.
그와 그의 대원들이 레리다 성당을 방화했다는 소문이 다시 일고 있다. 그런데 언제 성당이 불탔던가? 그것은 8월 25일이었다. 그러나 원정대는 7월 24일에 이미 레리다를 통과했고, 한 달 뒤 성당을 방화하기 위해 그곳으로 되돌아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 있다. 사실은 1백 명으로 구성된 극단적인 급진주의자들이 바르셀로나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레리다를 통과했다. 그들은 신전을 불태우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이 두루티의 선봉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소식이 이미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진 상태였다. 매우 노련했던 두루티는 그들을 불러 이렇게 호통 쳤다. “레리다에서 행동한 이 용감한 자들은 정말 잘났구만!” 물론 그 책임자들은 가장 엄한 처벌을 받았다.
헤수스 아르날 페나 1
세 명의 기자
8월 말과 9월 초 사이, 나는 카르멘(Karmen)과 마카세예프(Makasseev)를 데리고 두루티의 전투사령부를 찾아갔다. 당시 두루티의 꿈은 사라고사를 정복하는 일이었다. 전투사령부는 에브로 하천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동행인들에게 두루티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어서 우리들을 환대할 것이라고 미리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두루티는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끄집어내고서 이렇게 말했다. 아스투리아 봉기를 다룬 논설에서 내가 아나키스트들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당장 쏘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좋아,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하지만 나는 자네가 손님 대접을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네.” 두루티는 아나키스트이며 성미도 불같았다. 그러나 그도 어쩔 수 없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말에 당황하였다. “좋아, 아무튼 자네는 나를 찾아온 손님이지. 그러나 자네의 논설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지불하겠네. 여기서가 아니라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손님 대접이라는 스페인의 전통적 예절 때문에 당장 나를 죽이지 못해 화가 잔뜩 나서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가 소리쳤다. 소비에트연방은 자유공산당의 구가 아니라 책에 나오는 그저 그런 국가일 뿐이며, 수많은 관료를 거느린 관료주의 국가일 뿐이라고 했다.
카르멘과 마카세예프는 무엇인가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권총이 눈앞에 나타나자 달리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 시간 후에 나는 그들에게 설명했다. “모든 일이 잘 되었어요. 그가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한다고 했습니다.”
식탁에는 민병대원들이 앉아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흑적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푸른 훈련복을 입고 있었다. 모두가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앉아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웃었다. 아무도 우리와 두루티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중 한 명이 음식과 포도주 잔을 옆으로 돌렸다. 그는 두루티의 접시 옆에 광천수 한 병을 갖다놓았다. 내가 농담을 했다. “자네는 언제나 절대적 평등을 주장했지. 그런데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는데 자네만이 광천수를 마시는구만.” 그 말에 두루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소리를 질렀다. “이 병 치우고 우물에서 떠온 샘물을 가져오게!” 그는 한참 동안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그들에게 광천수를 부탁한 것은 아니네. 그들은 내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을 알고 어디를 가든 광천수 한 상자를 가지고 다닌다네. 물론 이것도 사실은 안 되는 말이지. 자네 말이 전적으로 타당하네.” 우리는 말없이 계속 식사를 했다. 그때 그가 말했다. “모든 일을 한꺼번에 바꾸기란 어려운 법일세. 원칙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네,”
밤에 우리는 진지를 시찰했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가 허공을 채웠다. 트럭을 탄 원정대가 우리 옆을 지나갔다. 두루티가 말했다. “이 트럭이 무슨 일을 하는지 왜 자네는 내게 묻지 않는가?” 나는 군사비밀을 간파할 의도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때 그가 웃었다. “비밀이라고? 우리가 아침에 에브로 하천을 건널 것이라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비밀이라니!”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계속 이야기했다. “왜 내가 도강하기로 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내가 말했다. “자네는 이미 자네의 위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자네는 원정대의 사령관이 된 셈이니까.” 두루티가 다시 웃었다. “그것은 이번 작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네. 어제 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녀석이 파시스트들의 점령지에서 우리에게로 달려왔었네. 그 꼬마가 이렇게 물었네. ‘도대체 뭐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저씨들이 공격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두루티도 용기를 잃었다구요!’ 이해하겠는가? 꼬마까지 그렇게 말한다면 다른 인민들이야 더 말할 게 뭐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우리가 이제 공격해야 한다는 뜻이지. 작전은 저절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네.” 나는 흡족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자네 자신이야말로 아직 순진한 어린애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여러 번 두루티를 찾아갔다. 그의 원정대 대원의 수는 1만 명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조주의자는 아니었고, 실제 상황에 대한 불만을 거의 매일 고백했다. 그는 군기가 없이는 어떤 전투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최초의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그것을 비통하게 생각했다. “전쟁이란 못할 짓이다. 전쟁은 집뿐만 아니라 가장 소중한 원칙들까지도 파괴한다.” 물론 그는 이 말을 대원들에게는 하지 않았다.
하루는 여러 명의 민병대원들이 감시초소를 이탈하였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인접한 마을로 내려갔던 것이다. 두루티가 노발대발했다. “자네들이 원정대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모른단 말인가? CNT의 신분증을 내놓게!” 규율 위반자들은 아무 말 없이 호주머니에서 노조신분증을 꺼냈다. 그런 그들의 행동이 두루티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네놈들은 아나키스트도 아니야. 개똥같은 놈들이라고! 원정대에서 쫓아내 네놈들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어!” 그 청년들은 내심 그래주길 바랐던 것 같았다. 항의를 하는 대신 그들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자네들이 입고 있는 옷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나 있겠지? 당장 바지를 벗어! 그건 인민들이 만든 옷이야!” 그 민병대원들은 조용히 바지를 벗었다. 두루티는 그들을 팬티바람으로 바르셀로나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 누구든지 이놈들을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아주 비열한 놈들로 여길 테니까!”
일냐 에렌부르크 1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공화국에 충성을 바쳤던 군 장교나 경찰 간부들에 대해서 아주 우습게 생각했다. ‘조직된 무규율’의 원칙을 내세웠던 원정대 내부에는 장교라는 신분이 없었다. 그래서 고문이라는 신분은 쉽게 무시되었다. 그들은 무기를 다루는 일에만 신경을 쓰는 단순한 기술자의 자격밖에 가지지 않았다. 정규전이 발생하면 그들은 거기에 적합한 지시사항만을 개진했을 뿐이다. 그들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전투력을 올바르게 배치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게 한다거나 동지들의 경험 이상의 것을 조언해 주는 정도였다. 프랑코 군대가 공격하면 아나키스트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용기와 열정을 다 쏟아 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힘에 밀려 전략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마을을 철수할 때는 파시스트들에게 전략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산타마리아의 주민들은 꺼리지 않고 자유공산주의를 논의했고 민병대에게 보급품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작전상 중요한 진지가 위협을 받았을 때, 가령 사라고사에서 우에스카에 걸친 전선지대에서는 치열한 투쟁이 벌어져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불개입협정을 근거로 하여 무장을 하지 않은 공화파들이, 아나키스트들을 공격하기 위해 국제 파시즘이 요구했던 대포, 기관총, 폭탄과 비행기를 맨손으로 지켜냈다는 주장을 영국 통신원인 나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존 랭든 데이비스(John Langdon-Davies)
1936년 8월 14일 부하랄로스
“당신들의 현재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두루티는 손에 지도를 펴들고서 부대 편성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지금 피나Pina 전철역에서 적의 저지를 받고 있습니다. 피나 마을은 우리 손에 들어 있지만 전철역 앞에는 적들이 진을 치고 있소. 내일이나 모레쯤 우리는 에브로 하천을 건너 전철역을 쳐서 이곳을 우리 수중에 넣을 계획이오. 그러고 나서 우측 방향을 열어나가 에브로 하천 5구역을 장악하고 사라고사 장벽 앞에 다다를 것입니다. 벨시테가 항복하면 그곳은 곧 우리의 후방이 될 것이오. 그런데 당신은……” 그가 머리로 트루에바(Trueba)를 가리켰다. “당신은 아직도 우에스카에 있소?”
“우리는 우측에서 당신들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우에스카에 대기 중입니다.” 트루에바가 겸손하게 말했다. “분명한 것은 당신의 작전이 신중하게 이루어질 때만 원조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두루티가 침묵을 지켰다. 잠시 뒤 화가 난 투로 말했다. “돕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그것은 군사적 전략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투쟁적인 면에서도 내가 계획한 작전이오. 거기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것이오. 당신이 우리에게 1천 명 정도 증원한다고 해서 우리가 사라고사의 승리를 당신과 반반으로 나누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라고사는 자유공산주의가 지배하든지 아니면 파쇼가 지배할 것이오. 그러니 사라고사는 내게 맡기고 당신은 전 스페인이나 생각하시오!”
그는 곧 조용해지더니만 다시 우리와 악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우리가 악의를 갖고 그를 찾아온 것은 아니나 그의 빈정거림에 대해서는 우리도 빈정거림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는 모두가 평등했지만 아무도 감히 그와 논쟁을 벌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국제 정세뿐만 아니라 스페인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과 전략, 전술적인 일들에 대해서 매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우리가 러시아 혁명에서 어떤 정치적 활동을 했는지 내게 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원정대의 무장은 잘 갖추어져 있고 실탄도 많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다만 일을 이끌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고백했다. ‘테크니코Técnico’는 그저 조언자 역할만 하면 되고 모든 일은 자신이 결정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거의 매일 스무 번씩 연설을 하여 지칠 대로 지쳐 있다고 했다. 교육은 매우 더디게 진척되고, 민병대는 경험도 없으면서도 군사교육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탈영이 늘고 있어 이제 대원은 1천2백 명 정도뿐이라고 했다.
그는 엉뚱하게 갑자기 우리가 점심을 먹었는지 묻고는 밥솥이 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우리는 민병대의 식량을 축내고 싶지 않다면서 점심을 사양했다. 그때 두루티는 마리나(Marina)에게 식량 배급표를 하나 주었다.
헤어지면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잘 있어요, 두루티 선생. 내가 선생을 만나러 다시 사라고사로 오겠소. 당신이 여기서 패하지 않고, 또 바르셀로나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패하지 않는다면, 선생은 한 6년 후면 볼셰비키가 돼 있을 것이오.”
그가 웃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넓은 등을 돌리고는 때마침 거기에 서 있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였다.
미하일 콜코프(Michail Kol'cov)
한 전투 지원병의 일기
8월 17일 월요일
사령부가 농가로 옮겨감. 농가 앞에는 넓은 옥수수 밭이 있다. (군대 이동치고는 우습다!) 오전에 자동차를 타고 피나로 갔다. 젊은 운전병은 약혼녀를 옆에 태우고 있었는데 가던 도중에 내내 서로 키스를 해댔다. 나는 우리 대원들이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행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꾸민 이야기 같을 것이다(애국적인 교과서에 나오는…… 학교에는 병원도 있었다). 18번지에 있는 한 농가에서 다시 식사를 했다. 나도 총을 지급받았다. 길이가 짤막한 예쁜 기관총이었다. 오후에 적의 무자비한 폭격이 있었다. 나는 보리스에게 소리쳤다. “소총 소리는 한 방도 듣지 못했어.” (연습 사격하는 소리 외에는 진짜 소총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또 한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무시무시한 폭음이었다. “폭격기야!” 우리는 소총을 들었다.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바깥으로 나와 옥수수 밭으로 숨으라고 했다. 우리는 엄폐물을 찾았다. 나는 퇴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사격을 했다. 몇 분이 지난 후 모두 다시 일어섰다. 비행기가 너무 높이 떠 있어서 사격이 미치지 않았다. 절반이 계속 사격을 가했다. 한 사람은 강 수평으로 발사하였다. (그것도 권총사격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포탄 한 발을 발견했다. 아주 작았다. 파괴된 지면의 구멍은 지름이 약 50센티미터 정도였다. 별로 놀랍지 않았다.
태연한 농부들은 들판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수는 아까보다 줄어들어 있었다.
루이 베르토믹스(파견대원)가 말했다. “자, 강을 건넙시다.” 문제는 적군의 시체 세 구를 화장하는 일이었다. (15분 간 논의한 끝에) 우리는 거룻배를 타고 갔다.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시체 하나를 찾았다. 파랗게 부풀어 썩어 있었다. 끔찍했다. 불태웠다. 다른 사람들은 계속 나머지 시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휴식을 취했다. 침투조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본대는 다른 강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침투조는 새벽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엄폐물이라고는 거의 없는 강가로 돌아갔다. 외딴 농가가 보였다. 파스쿠알(Pascual)이(그는 병참 담당원이었는데) 말했다. “참외를 따먹는 게 어떨까?” (아주 진지했다.) 잡목 사이로 계속 걸었다. 덥고 약간 짜증스러웠다. 나는 모두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 농가를 습격하는 것이 하나의 수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흥분되었다. (모든 일이 쓸데없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붙잡히면 사살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두 패로 나누었다. 그 파견대원과 리델(Ridel) 그리고 세 명의 독일인이 농가 쪽으로 기어갔다. 우리는 도랑에 숨어 있었다. (파견대원이 뒤에서 휘파람을 불면 그때 동시에 우리가 그 집 안으로 뛰어들기로 했다.) 기다렸다. 가만히 소리를 들었다. …… 매우 긴장된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동료들이 몸을 숨기지 않은 채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조용히 강을 건넜다. 실수하면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 작전의 책임은 파스쿠알이 지고 있었다. (카르펜티어 지랄도 우리와 함께했다.)
우리는 짚더미 속에서 잠을 잤다. (구석에 두 개의 기둥이 있어서 좋은 엄폐물이 되었다.) 위생병이 불을 끄려고 했다가 동료들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피나에 머물고 있는 동안 나는 이 작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안을 느꼈다.
8월 18일 화요일
도강계획은 늘 번복되었다. 오전이 지날 무렵에서야 한밤중에 강을 건너기로 결정하였다. 우리 대원은 사스타노(Sastano) 원정대가 도착할 때까지 며칠 간 강가의 진지를 지키기로 되어 있었다. 오늘은 준비작업으로 시간을 보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은 기관총 문제였다. 피나 병참 담당관은 우리에게 무기의 제공을 거절했다. 애쓴 끝에 간신히 ‘흑인단’을 이끌었던 이탈리아 대령의 도움으로 겨우 한 정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에 가서는 한 정을 더 얻어냈다. 시험사격을 해보지는 않았다.
침투조를 처음 구상한 사람은 대령이었지만 우리 침투조를 최종적으로 인정한 것은 병참부였다. 물론 침투조는 자원병으로 구성되었다. 저녁 전 여섯시에 베르토믹스가 우리를 불러 모아놓고 의견을 물었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생각을 말해 보라고 했다. 우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리델이 말했다. “도대체 왜 그래요? 우리 모두는 이 일에 동의했는데 뭘 또 묻는 겁니까?” 이 말이 전부였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위생병이 불을 끄려고 했다. …… 나는 옷을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새벽 두시 반에 일어났다. 배낭이 이미 꾸려져 있었다. 안경을 못 찾아 당황했다. 가져갈 짐이 분배되었다. (나는 지도와 식사도구를 분배받았다.) 명령이 하달되었다.
기도비닉을 유지한 행군이었다. 약간 흥분되었다. 두 번째 도강이었다. 루이가 힘을 북돋았다. 강을 건넜다. 그리고 기다렸다. 아침이 뿌옇게 밝아왔다. 독일인이 우리를 위해 수프를 끓이기로 했다. 루이가 움막을 찾았다. 짐을 거기에 내려놓게 했다. 나는 식사준비를 위해 경계병에서 제외되었다. 사주 경계병이 경계를 섰다. 나는 남아서 수프가 끓는 것을 지켜보았다. 움막을 정돈하고 야전 식사를 준비하였다. 노출되지 않도록 창문을 가렸다.
그 사이에 다른 대원들은 이전에 봐두었던 그 농가로 갔다. 거기에는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도 있었다. (잘 된 일이 아닌가!) 정보를 얻었다. 우리는 이미 정찰대에게 발각되었고, 강가는 감시를 받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강을 건넜을 때, 정찰 후발대가 우리를 발견하고 사령부로 철수했다는 것이다. 여기는 1백12명 정도의 군인들이 있으며, 그 중대장이 우리를 당장 덮칠 것이라고 청년은 확신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나는 독일 출신의 대원들에게 이 정보에 대하여 독일어로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물었다. “뭐라구요, 그러면 다시 강을 건너 복귀하는 것입니까?” “아니오, 우리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피나에서 미리 두루티에게 전화로 통보했더라면 좋았을 것이 아닌가?)
명령이 내려졌다. 농부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의 식사를 맡았던 독일인이 소금도 없고 기름도 채소도 없다고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베트로믹스가 화난 목소리로 (다시 농가로 뛰어드는 것이 위험해서인지) 침투조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가 말했다. “자네는 부엌에 가 있게!” 나는 감히 항의하지 못했다. 그의 모든 계획이 나한테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이 농가를 향해 다시 떠났을 때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그들 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있는 이곳도 그들의 상황만큼이나 위험했다.)
우리는 총을 들고 대기하였다. 그때 독일인이 리델과 카르펜티어가 보초를 서고 있는 (그들은 다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나무 아래 작은 참호라도 있는지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무기를 들고 (장전은 하지 않은 채) 그늘 속에 누웠다. 다시 기다렸다. 가끔 독일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분명 겁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 주위의 이 모든 것들은 질기게 존재하고 있다. 포로가 없는 전쟁이었다. 적에게 적발되면 사살되었다.
동료들이 돌아왔다. 농부와 그의 아들 그리고 그 청년이. 폰타나가 주먹을 하늘로 뻗으며 인사하면서 청년들을 응시했다. 그들도 인사를 했다. 농부의 아들은 마지못해서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무서운 강요라니……. 농부는 다시 돌아갔다. 그는 나머지 식구들을 데려오고 싶어 했다. 우리는 다시 앉았다. 정찰기가 날아왔다. 우리는 은폐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 루이가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나는 등을 땅에 대고 누워 나뭇잎과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화창한 날이었다. 적이 나를 급습하여 붙잡는다면 나를 죽이겠지…… 그들에게도 이유는 있어. 우리 쪽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했어. 나는 그들의 공범자이고, 도덕적으로도 마찬가지야. 완전히 조용해졌다. 우리가 일어섰다. 그때 또다시 정찰기가 나타났다. 나는 움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폭탄이 떨어졌다. 나는 움막에서 나와 기관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 했다. 루이가 말했다. “겁먹지 마라!” 그는 어깨에 총을 메고 독일인과 나를 부엌 쪽으로 밀어 넣었다. 기다렸다.
마침내 농부가 식구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딸 셋과 여덟 살배기 아들 하나)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다. (심한 폭격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도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우리를 약간 믿는 것 같았다. 그들은 뜰에 남기고 온 가축을 걱정했다. (우리가 나중에 피나로 가축을 보내주겠다고 위로했다.) 분명 그들은 정치적으로 우리 편이 아니었다.
시몬느 베일(Simone Weil)
여러 가지 잡일
한 번은 민병대원들이 당시 사라고사에서 상당히 높은 관직을 맡은 적이 있었던 사람을 우리에게 끌고 왔다. 그의 이름을 밝히고 싶진 않다. 그는 총살될 뻔했다. 두루티가 감시병들을 불러 물었다. “그 사람이 자신의 농장에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가 농민들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감시병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쁘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 그저 전에 부자였다는 걸로 해서 우리가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그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 사람을 내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이 사람, 이 마을 초등학교 선생으로 삼아 적당한 일을 할 수 있게 자네가 신경 좀 쓰게.”
헤수스 아르날 페나 1
8월 어느 날 오후에 레리다에서 사라고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았던 두루티의 지휘소를 바르셀로나의 여배우들이 방문했다. 그들은 민병대를 위해 위문공연의 밤을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두루티의 부인도 그들을 따라왔다. 두루티는 그 아가씨들을 바르셀로나로 돌려보냈다. 그가 부인에게 말했다. “여긴 할 일이 많소. 우선 전쟁에서 이겨야 할 것 아니오. 다른 대원들도 그들의 부인과 함께할 여유가 있을 때 당신도 오시오. 지금은 그럴 수가 없소.”
라몬 가르시아 로페스
우에스카 시를 포위하는 동안 두루티는 소형 브레게 정찰기를 타고 도시를 비행하였다. 휴일이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적색악마로 불리었던 조종사 에르기도(Erguido) 소위가 두루티에게 수류탄 몇 발을 투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두루티는 일반 시민에게 폭탄을 투하해서는 안 된다면서 거절했다.
헤수스 아르날 페나 3
8월에 보급계의 차가 두루티의 참모부에 들러 포도주 한 통을 내려놓았다. 두루티가 뜰에 서 있었는데 포도주 통을 보고 말했다. “자네들이 전선의 대원들을 위해서 포도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면 참모부도 그것을 마실 수가 없네.” 그는 권총을 뽑아 그 통을 박살냈다. 포도주가 길바닥 위로 전부 쏟아졌다.
라몬 가르시아 로페스
원정대에게 또 하나의 골칫거리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을 뒤쫓아 아라곤 전선까지 따라온 바르셀로나 창녀들의 문제였다. 성병은 적의 실탄에 의한 손실보다 더 큰 손실을 입혔다. 결국 두루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하랄로스에다 야전병원을 설치하게 했다. 그는 온갖 자질구레한 일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나는 그가 휴가차 바르셀로나로 가는 민병대원들에게 콘돔도 함께 가져가도록 지시한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결국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정대 주변을 힐끔거리며 돌아다니는 여자들을 당장 해산시켜야겠네.”
“기막힌 생각입니다, 지도관님. 그런데 어떻게?”
“수송부에 연락해서 자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트럭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각 대대마다 트럭을 타고 돌면서 주변에 있는 아가씨들을 몽땅 차에 태우게. 한 명도 남기지 말고! 그러고 나서 그들을 사리예나로 수송하게. 거기서 아가씨들을 기차에 옮겨 바르셀로나에 가서 내려놓도록 하게.”
“아, 지도관님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셨군요. 그런데 이런 일을 맡길 사람은 저 헤수스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는 모양이지요. 아마 지도관님은 내가 수송 도중에 그 아가씨들에게 십계명 가운데 제6계명에 관해서 짤막한 설교라도 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하시지요?”
“그런 것은 바라지 않네. 그저 골치를 썩이는 여자들을 데려가기만 바랄 뿐이야.”
그것은 명령이었다. 나는 달리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고집 부린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여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대대 주변을 서성거릴 것이 뻔했다. 틀림없이 그 여자들은 전에 내가 바르셀로나로 태워갔던 바로 그 여자들일 것이다.
헤수스 아르날 페나 1
또 다른 면
여러 나라 출신으로 구성된 스물두 명의 소 국제군단이 아라곤에서 가벼운 전투 끝에 파시스트였던 열다섯 살배기 소년을 체포해 왔다. 그는 계속 떨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옆에서 동료들이 죽어간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1차 심문에서 그는 프랑코를 절대적으로 추종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철저히 조사를 받았다. 그에게서 기적의 패[2]와 파시스트 단원증을 찾아냈다. 그는 두루티에게로 끌려왔다. 두루티는 한 시간 동안 아나키즘 이념의 좋은 점을 설명한 후, 죽음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민병대에 투항하여 그의 이전 동료들과 싸울 것인지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 소년에게 24시간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소년은 투항을 거부하여 결국 총살당했다. 두루티는 여러 면에서 존경을 살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 소년의 죽음을 내내 마음에 두고 괴로워했던 걸로 알고 있다.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적군과 백군이 서로 정복하였다가 빼앗기고 정복하였다가는 다시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마을이 하나 있었다. 결국 그 마을이 적군의 손에 넘어왔을 때, 적군 민병대는 두려움과 겁에 질려 창백한 모습을 한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실을 발견했다. 그 중에는 소년들도 서너 명 보였다. 민병대원들이 그들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 소년단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후퇴했을 당시 우리를 뒤따라오지 않고 파시스트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던 것으로 보아 파시스트 단원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 점은 그들을 당장 사살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민병대가 먹을 것을 주었다. 그때 민병대는 그들을 매우 인간적으로 다루었다.
마지막 이야기는 후방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두 명의 아나키스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그들이 목사 두 명을 체포했다고 했다. 목사 한 명은 다른 목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권총으로 사살했고, 남은 한 명에게는 도망가고 싶은 대로 도망가라고 말한 후에 그가 한 스무 발자국쯤 도망쳤을 때 총살했다고 자랑삼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재미있게 웃지 않는다고 그들은 나를 오히려 이상하게 여겼다.
매일 그런 일이 터지곤 했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진정한 투쟁의 목적은 상실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투쟁의 목적이 전체의 행복,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일이라면 논의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페인에서 인간의 삶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농민들 대부분이 찌들고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지방에서 형성된 모든 극좌파 조직의 본질적 목적은 농민들 삶의 질 개선에 있었다. 그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내전은 토지분배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진저리나게 가난하여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자부심을 지켜왔던 아라곤의 농민들은 결단코 도시 출신의 민병대에게 호기심의 대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일 민병대가 무례한 행동과 지나친 간섭, 모욕적인 언사만 하지 않았더라면,―아무튼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고, 그리고 아나키스트 원정대가 강도 행각과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 사형을 받는다는 걸로 알고 있었다―비무장 농촌 주민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빈부의 격차만큼이나 군부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는 언제나 겸손하고 종속적이며 두려움에 찬 태도를, 부자들에게서는 뻔뻔스럽고 우월적이며 거만한 태도를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시몬느 베일
1936년 9월의 아라곤 전선은 진지 사수전으로 굳어졌다. 그 덕분에 아나키스트 원정대는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마드리드 중앙정부의 개입이 없었기 때문에 원정대는 그런대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다. 그들은 보급품을 스스로 조달하였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정대는 카탈루냐 노조들과 항상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자금도 독자적으로 해결했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생필품을 마련했다. 곡식이 수확되면 마을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우리 보급계가 현지의 유통가격으로 밀을 구입했다. 우리는 트럭에 밀 가마니를 실어 발렌시아의 해안지방으로 가져갔다. 그곳은 밀의 가격이 좋아 이득이 남았다. 그곳에서 과일과 채소를 사서 돌아왔으며, 남은 돈으로 또 밀을 구입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하여 원정대는 참호전에 꼭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였다. 생필품과 목재, 의복과 담배였다. 전선은 매우 조용했다. 폭탄공격이 증가하고 있는 후방보다 더 조용했다. 많은 민병대원들은 전투를 마치 오락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가끔 진지를 떠나 이삼 일 정도 후방에 가기도 했다. 물론 두루티의 원정대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우리의 지도자는 원정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다.
후방으로 가는 도중에 민병대원들은 언제나 레리다 시를 통과했다. 그들은 그곳의 가게와 잡화점에 들러 가지고 싶었던 모든 것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말이 ‘징수한다’는 것이었지 그것은 약탈이나 다를 것이 없는 비합법적 형식이었을 뿐이다. 시 당국은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이런 징수행위 때문에 레리다에서는 누구도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민병대의 그런 행동은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 물건을 빼앗긴 사람들이 마침내 손에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식대로 그런 행동을 일삼는 완전 ‘통제 불가능한’ 그룹들이 형성되었다. 레리다에는 온갖 조직들이 난무하였다. CNT, UGT, POUM과 가두 검문소 반원들과 같은 단체들은 도시 약탈의 허가증과 다를 것이 없는 어음서에다 사인을 해준 셈이었다. 두루티의 원정대는 그런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였는데도, 발행된 어음서마다 두루티 원정대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두루티는 그런 ‘징수증’에 사인을 한 적이 없으며, 그런 명령은 내리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이런 작태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불렀다. “이런 강도짓 때문에 원정대가 욕을 먹는 것이라네. 당장 이런 짓거리를 중단시켜야 하네. 자네가 원정대의 대표자 자격으로 레리다로 가서 질서를 잡게. 내가 이 사건의 전말을 잘 알고 있는 보급부장 두 명을 자네에게 딸려 보내겠네. 매일 저녁 전화로 내게 보고하게.” “잘 알겠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제가 가야 합니까? 제가 가는 것은 정말 불가능합니다. 레리다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만일 옛날의 목사가 강제 징수행위를 중지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나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내 머리에 이삼 인치 총알을 박을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호위병들을 동반시켜 주겠네.” 두루티가 말했다. “나의 전 대대의 이름을 건 내 위임장을 가지고 가게.”
그래서 나는 보급부장 두 명과 호위병 두 명을 데리고 레리다 시로 갔다. 그들은 각자 자동소총과 권총을 휴대하였다. 우리는 ‘스위스 호텔’에 본부를 정했다. 우선 나는 카탈루냐 평의회 파견 대표자들과 회담을 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의 사무실은 압류당한 물건의 ‘영수증’으로 가득했다. 상인들과 상점 주인들은 막연한 희망에서이기는 하지만 언젠가 그들의 손해에 대한 배상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수증 가운데는 이상한 것들이 많았다. 한 예로 어떤 영수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러 가지 사유 상 많은 립스틱이 필요함. 파르레트 기병과 용.” 사인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영수증들을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명부를 작성하여 영수증을 발급한 여러 소재지를 방문했다. 이미 징수목록에 올라가 있는 물건들 중에는 아직 쓸 만한 것이 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전선에서 필요할 성 싶은 것은 비축물로 쓰기 위해 원정대가 있는 전선으로 보냈다. 그리고 어음 발행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전했다.
“두루티의 원정대는 그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 범행을 앞으로는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경고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만일 징수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 대대를 이끌고 레리다로 올 것이오. 그때는 훔친 물건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도둑을 색출할 것이오. 원정대가 재판할 것입니다.”
나는 범행자들 가운데 특히 한 명을 철저히 찾아 나섰다. 그는 보급문제를 위해 우리 원정대가 파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제멋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담뱃가게에서 비싼 ‘골든’ 담배 몇 박스를 혼자 삼켰던 것이다. 원정대에는 단 한 갑도 보낸 적이 없었다. 어디를 가면 그를 찾을 수 있을지 짐작이 가는 데가 있었다. 나는 자동소총을 든 호위병을 데리고 당시 귀했던 ‘골든’ 담배를 아가씨들에게 나누어주었을 그 파견병을 찾아 시내 사창가를 샅샅이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카바예로 거리에 있는 시간제 호텔에서 그를 찾아냈다.
그는 우리에게까지도 골든 몇 개비를 내놓을 만큼 뻔뻔스럽게 행동했다. 나는 그에게 두루티의 위임장을 내보였다. 그는 몹시 당황했다. “내일 아침 아홉시까지 골든인지 뭔지 하는 그 담배 박스를 상점 주인에게 돌려주게. 만일 앞으로 단 한 개라도 빼내면 자네를 체포하여 두루티의 지휘소로 데려갈 것이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자네가 더 잘 알 걸세.”
우리 조사단이 다녀간 후로 레리다에서의 ‘압수행위’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부당행위자들이 두루티에게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그가 개입함으로써 약탈행위에 제동이 걸렸던 것이다.
헤수스 아르날 페나 2
기관총
우리의 자동차가 부하랄로스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침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건장한 한 사나이가 아침 안개 속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얼굴빛은 올리브색이었고, 눈빛은 무어인의 빛이었다. 다른 한 민병대가 우리의 통행증을 검사하고 있는 동안 그는 도로 중앙에서 보초를 섰다. 그는 우리의 이 통행증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전선으로 가려면 그 통행증을 폐기처분하고 두루티가 직접 발행하는 특별허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통과하십시오!” 우리는 시동을 걸어 아직 잠자고 있는 마을을 지나 감시지휘소로 향해 나아갔다. 지휘소가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기관총을 정렬해 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무기들이 땅바닥에 놓여 있었다. 햇빛에 탄 얼굴, 검은 머리카락, 작지만 빛나는 눈을 가진 덩치가 크고 건장한 한 사나이가 그들에게 기관총을 거치하고 즉시 전방에 투입할 수 있는지 시험사격을 해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잠시 뒤에 사격준비가 갖추어졌다. 우리에게 다가온 덩ㅊ큰 그 사나이는 바로 두루티였다. 그가 타겟을 가리켰다. 몇 초 동안 기관총이 발사되었다. 5백 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 아래에 세워진 타겟이 산산조각이 났다.
“이처럼 자네들은 떨지 말고 정확히 적을 명중시켜야 하네.” 두루티가 말했다. “기관총을 버리고 도망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네. 만일 누가 기관총을 버리고 도망하면, 설령 파시스트가 그를 놓친다 하더라도 내 손으로 그를 총살시킬 것이네. 전 인민의 해방은 자네들의 정확한 조준사격에 달려 있는 거야. 잃어버린 기관총은 우리의 가슴을 향할 기관총으로 변한다네. 우리는 이 무기로 사라고사를 점령하고 팜플로나로 진군할 것이야. 그곳에서 나는 배신자 카바네야스의 머리를 내 차 냉각기 위에 얹어 계속 진군할 것이네. 우리는 행군을 멈추지 않을 걸세.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마을에 우리의 흑 · 적색 깃발이 휘날릴 때까지! 이런 맹세는 우리가 이미 바르셀로나를 출발할 때 한 것이지. 남자라면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자, 이제 이 총을 들고 경계를 잘 서게. 단 한 발의 총알이 남아 있을 때까지 우리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투쟁할 것이야.”
두루티의 곁에 서 있으면 단 10분도 지나지 않아 누구든지 그의 낙관론에 매혹되고 만다. 대중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그 낙관론 때문이었다. 그는 보기 드문 용기, 완벽한 정직성, 깊은 공동체의식 그리고 전술에 있어 예리한 판단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두루티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라스코 드 라 루비아(Carrasco de la Rubia)
당시 나는 카탈루냐 민병대 보급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본부로는 페드랄베스Pedralbes 막사를 이용하였다. 본부의 명칭은 ‘미하일 바쿠닌’이었다. 나는 매일 각 원정대의 지도자들과 전화 연락을 하면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은 인원의 증원과 전쟁물자, 의약품과 피복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나는 매일 가능한 한 많은 물량을 열차나 트럭에 싫어 전선으로 보냈다.
원정대의 지도자들 가운데 두루티가 요구하는 사항이 가장 많았다. 그는 매일 저녁 여덟시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아, 거기 리카르도 동지지요?”
“예, 거긴 아직 뭐 좀 남아 있지요?”
“남았다구요? 아무것도 없소! 내가 어제 요청한 보충 기관총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나보군요.”
“우리 무기고에는 한 정도 없기 때문에 보내줄 수가 없소. 내가 스페인-스위스 합작회사에다 주문을 해놓았습니다. 주문 후에 생산이 가능하답니다.”
“긴급히 필요합니다. 좀 다그치시오. 칼빈 소총은 얼마나 있소?”
“한 2백 정 정도 있소.”
“마침 잘됐군요. 2백 정 다 보내주시오.”
“다른 원정대는 어쩌구요.”
“그들도 그 칼빈 소총이 누구 손에 있는지 알게 되면 이해할 겁니다.”
“일부는 보내겠소. 하지만 2백 정 모두는 곤란합니다.”
“구급차는 어때요?”
“아직 다섯 대 남아 있습니다.”
“그 중 네 대를 우리에게 보내주시오.”
“곤란합니다. 잘 해야 한 대 보낼 수 있소. 그 이상은 어렵소. 대신 2백 명의 증원군을 보내주겠소.”
“증원군은 필요 없소. 지원병은 이곳 마을에서만도 매일 1백 명씩이나 찾아옵니다. 그들도 다 처리하기 힘듭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기관총과 박격포, 거기에 충분한 실탄뿐이오.”
“잘 알았소. 한 번 노력해 보지요.”
“하여튼 구급차는 잊어먹지 마시오. 그리고 소총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보내주시오.”
“알았습니다. 그럼 내일 또 연락합시다!”
“잠깐만! 보충 기관총 잊어버리지 마시오.”
“물론입니다. 하여간 당신은 탁발 수도승보다 더 심하군요. 내일 또 봅시다!”
고집을 부려서 두루티는 자신의 원정대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출 수 있었다. 그는 자체 내에 의무실, 참모실, 취사실을 구비하였다. 그리고 전쟁 소식과 논평을 송신할 수 있는 고주파 무선교신국과 이동 야전인쇄소를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정대의 민병대원들에게 무료로 배포된 자체 주간지, 「전선El Frente」을 펴냈다.
리카르도 산스 3
내전이 발생했을 때 우리의 조직 CNT는 이렇게 발표했다.
“여러분은 여기 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입니다! 모두가 다 전선으로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공장과 상업, 그 밖에 모든 일이 노동자들의 수중에 들어온 지금, 바로 지금이 조직을 새롭게 구성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여기 후방에 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처음 한 달 동안 바달로나Badalona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기다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젠 아무 말이나 거리낌 없이 해댔기 때문이었다. 그들ㄹ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모두 남아서 조직에만 가담하려고 했다. 전선에도 동료가 있지만 여기도 동료가 있다는 식이었다. 그것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점점 더 투쟁현장에 가담하고 싶어 전선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때 우리에게는 이미 기관총 스물네 정이 있었다. 그리고 산 앙드레 부대를 습격했을 때 가져온 소총도 상당 수 있었다. 우리는 무기를 포장했다. 트럭 두 대와 승용차 세 대를 끌고 무턱대고 두루티가 있는 전선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두루티는 아주 흡족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자네들은 우리가 후방에서 아직도 가져올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셈이네. 자네들은 도대체 어디서 이 기관총들을 구했는가?” “군 막사에서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말했다. “담장이 있었지만 다이너마이트 탄통을 부착하여 쉽게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때 일직 장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자네는 아직 참호 속에 들어갈 수 없네.” 두루티가 말했다. “자네는 여기서 할 일이 있네. 부하랄로스는 어디서든 전화 통화가 가능하니까, 자네는 여기 남아 정리를 좀 하게. 내 부관으로서 원정대에 남도록 하게나.”
그렇게 하여 나는 원정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그의 지휘소에서 5~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그는 물론이고 내게도 전화가 있어서 무슨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전화로 연락했다.
한 번은 두루티와 내가 발코니 위에 있었을 때, 난데없이 연병장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무슨 일인가!” 그가 말했다. “무슨 일로 저 사람들이 모였는가?” 사람들이 소리쳤다. “우리는 두루티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그러자 그가 발코니 아래로 소리쳤다. “집이 후방에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물론 그들 대부분은 바르셀로나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그러나 우리는 전선에 있을 것입니다. 각자 맡은 자리에 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승리할 때까지 아무것도 뒤바꾸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곧 다가올 인민의 재판대 위에 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다른 모든 일은 접어두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전쟁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내게 거슬렸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모든 일은 접어두다니요? 만일 당신들이 혁명을 날려 보낸다면 나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 어떤 투쟁에도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다.” “자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군.” 그가 말했다. “자네는 도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올해 내내 혁명만을 생각해 왔네. 처음 우리에겐 무기라고는 없었지. 그런데 무기를 확보한 지금, 내가 그 혁명을 날려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자네는 나를 잘못 알고 있네.”
사람들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리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언론들은 그가 말한 내용을 왜곡 보도하였다.
리카르도 리온다 카스트로(Ricardo Rionda Castro)
원칙의 문제
나는 밤에 부하랄로스에서 출발하여 피나로 갔다. 독일 폭격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기관총 잔해가 어둠속에서 반짝였다. 흑적색 두건을 쓴 투쟁가들이 암호를 물었다. 거기에는 아나키스트 두루티가 지휘하는 원정대가 있었다.
5년 전에 나는 정의와 자유의 문제를 두고 두루티와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바르셀로나의 한 작은 카페에 모였다. 그 카페의 이름은 조용하다, 라는 뜻의 ‘트랑킬리다드 카페’였다. 두루티는 결코 살롱 안의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였고 하루 종일 작업 선반대에 붙어 서 있었다. 그는 네 나라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그는 용감했지만 인간의 약점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념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과거에 논의했던 내용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나는 그를 만나 노동자의 본능을 알게 되었다. 피나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야전용 전화로 증원군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나에게 참호를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가 과거라고 말했던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투쟁가들은 항아리에서 물을 떠 마셨는데, 벽에는 플래카드가 하나 걸려 있었다. “네구산 포도주를 마셔라, 식욕을 돋울 것이다.”
두루티는 군대를 조직하였다. 살인 청부업자와 탈영병은 인정사정없이 사살되었다. 전투위원회에서 누군가가 원칙론을 펴기 시작했을 때, 두루티는 화가 잔뜩 나서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지금은 강령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쟁 중이란 말이오!” 그는 공산당과 공화파들의 통합을 주장했다. 그는 민병대에게 말했다. “지금은 논쟁을 벌일 시간이 없소. 우선 우리가 할 일은 파시즘을 근절하는 것이오.”
소도시 피나에서 두루티 원정대의 기관지인 「전선」이라는 주간지가 발행되었다. 신문은 포화 속에서 인쇄되어 나왔다. 그 신문에서 나는 조국의 수호라는 기사를 읽었다. “파시스트들이 외국산 폭탄을 구입하였다. 그들은 그 폭탄으로 스페인 인민을 섬멸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동지들이여 우리가 스페인을 방어합시다!”
바르셀로나 포드 자동차회사의 노동자들이 두루티의 원정대에 트럭을 지원해 주었다. 나는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이 소년 공산당원들을 포용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영원한 돈키호테의 후예들이 많은 것을 배운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반규율에 근거한 조직화’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규율을 지키자!’라는 말로 망치를 두드렸다.
그는 타는 듯한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표정은 부드러웠다.
그는 흥분하여 말했다. “우리는 현실적인 군대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의 참모진 중에는 외국 아나키스트들도 많았다. 그들은 모래주머니로 둘러싸인 움막 안으로 들어왔다. 움막 안에는 타자기가 한 대 있었다. 그들은 1890년대의 낡은 선언서를 갖고 왔다. 그들 중에 한 명이 두루티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우리는 게릴라전의 원칙을 고수해야 합니다.” 두루티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요! 만일 게릴라전이 필요하다면, 이젠 일반 동원령을 내릴 것이오. 우리는 군기를 엄격히 준수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으나 승리만은 포기할 수 없소.” 가로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비포장도로 위를 무기를 실은 트럭이 덜컹거리며 천천히 왔다.
일냐 에렌부르크 2
그는 파시스트를 목전에 두고 원칙문제로 논쟁을 벌여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산당과 공화당의 협상을 주장하면서 소비에트 노동자들에게 협조편지를 한 통 썼다. 파시스트들이 마드리드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는 자신의 신변이 가장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아나키스트들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곧 입증해 보일 것입니다!”
그가 마드리드로 떠나기 직전에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여전히 밝은 표정과 순박한 모습을 보였다. 승리가 눈앞에 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네도 알지.” 그가 말했다. “우리 둘은 친구라는 걸.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합할 수 있네. 아니 우리는 단합해야만 하네. 우리가 승리하면 곧 사람들은 우리의 단합이 잘된 것이라고들 말할 걸세. ……모든 인민은 그 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는 법이라네. 스페인 사람은 프랑스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고 러시아 사람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네. 우리가 무엇인가를 곧 구상해낼 거야…… 그러나 우선은 파시스트들을 섬멸하는 것이 중요하네.”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는 더 이상 자기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자네, 내면의 갈등이 무엇인지 아는가? 자네는 생각은 이렇게 하고 행동은 저렇게 하는 식이지. 그것은 비겁해서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나는 그를 잘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늘 하는 식으로 헤어질 때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시선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의 시선 속에는 강인한 의지와 순진무구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조화였다.
일냐 에렌부르크 1
두루티 :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도 파시스트들을 추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처럼 병기고와 실탄 제조공장이 있는 사라고사와 팜플로나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라고사를 정복해야 합니다. 대중들이 무장했습니다. 군대를 옛날의 강인한 군대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노동자라면 누구라도 파시즘이 승리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훤히 알고 있습니다. 굶주림과 굴종뿐이죠. 물론 파쇼들도 노동자들이 승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지요. 이런 이유에서 이번 투쟁은 용서 없는 전쟁인 것입니다. 비록 정부는 이런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말이죠.
예, 확실합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이 세상에는 파시즘과 죽기로 각오하고 투쟁할 정부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파쇼와도 서슴없이 손을 잡지요. 스페인 자유정부는 이미 오래 전에 이 땅에서 파쇼적 요소들을 청산했어야 합니다. 정부는 그렇게 하기는커녕 머뭇거리면서, 잔꾀를 부리며 시간을 벌려고만 합니다. 심지어 우리 정부 내에는 쿠데타 반동들을 정중히 모시고 싶어 하는 인간들조차 있습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르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가 웃었다.) 아마 우리 정부는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반동 군부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노동운동을 분쇄하기 위해서 말이죠…….
반 파아센(Van Paasen) : 그렇다면 만일 총봉기가 실패하는 날 닥칠 역경까지 당신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는 겁니까?
두루티 : 물론입니다. 저항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반 파아센 : 어느 쪽의 저항을 말하는 겁니까?
두루티 : 물론 부르주아들이죠. 혁명에서 승리하더라도 당장 부르주아들이 일제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입니다. 우리는 혁명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인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든 독일과 중국의 노동자들을 파쇼의 잔인한 손에 맡기는 소비에트연방의 스탈린과 같은 인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우리는 혁명을 완성할 것이니까요. 여기 스페인에서 말입니다. 그것은 최근에 터진 유럽의 전쟁이 끝난 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이행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통해 적군 못지않게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궁지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독일과 이탈리아 노동계급에게 파쇼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교훈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현 정권이 자유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습니다. 아마 제국주의적 상황의 내부모순이 우리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프랑코는 전 유럽이 갈등 속에 휘말리게 하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공격할 독일군을 스페인에 주둔시키는 데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자신의 정부로부터도 도움을 기대하지 않아요.
반 파아센 : 그러나 당신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산더미 같은 폐허의 잔해 위에 앉게 될 것입니다.
두루티 : 우리는 옛날부터 움막과 동굴 같은 데서 살았소. 그리고 얼마 동안 더 계속 그런 곳에서 살 각오도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건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말하면 스페인, 미국 그리고 세계 방방곡곡의 궁전과 도시들을 세운 사람은 바로 우리 인민이라는 것이오. 우리 노동자는 새롭게 세울 수 있소. 보다 새롭고 보다 훌륭하게 말입니다. 때문에 폐허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대지는 우리가 물려받는 유산이니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르주아지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들의 세계를 산산조각 낼 테면 내라지요.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매 순간마다 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세계는 성장하고 있는 겁니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2
후방 지역
새롭게 변모한 도시
8월 5일, 우리는 안전하게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정거장에는 택시 대신 전통마차가 서 있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시내로 갔다. 콜론 산책로는 한산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의 중심가 가운데 하나인 람블라스 거리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에 혁명으로 변한 도시의 생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마치 신대륙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다음은 내가 받은 첫인상이다. 평상복 차림으로 어깨에 총을 걸친 노동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나 정규군은 보이지 않았다. 람블라스 거리에는 세 사람에 한 명 꼴로 소총을 들고 다녔다. 무기, 무기 그리고 또 무기였다. 청색 제복으로 깨끗하게 차려입은 민병대 무장 프롤레타리아들도 가끔 눈에 띄었다. 그들은 벤치에 앉아 있거나 람블라스 거리 중앙을 배회하였다. 오른쪽 어깨에 소총을 메고 왼쪽 팔로 아가씨의 어깨를 감싸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도 가끔 보였다. 그들은 도시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순찰대를 구성하였다. 호텔과 행정 관청, 상가 입구에는 보초가 서 있었다. 아직도 돌과 모래주머니로 빈틈없이 쌓은 바리케이드 뒤에는 보초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로부터 탈취한 고급 승용차를 전속력으로 몰고 다녔다. 차에다가 그들 조직의 첫 대문자를 흰색 페인트로 그려 넣었다. CNT-FAI, PSUC, POUM. 이 중 하나를, 혹은 전부를 써넣은 이들도 있었다. 간단히 그저 UHP(Uniaos, hermanos proletarios : 프롤레타리아 형제들이여 단합하라!)만 쓴 자동차가 제일 많아 보였다. 이 구호는 1934년 아스투리아 봉기 때 나온 것이었다. 무장한 사람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산책을 하거나 행진하는 모습,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광경, 공장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중 수적으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 부류가 아나키스트들이었다. 그들은 흑 · 적색 깃발과 휘장만 보아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부르주아지’의 흔적은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람블라스 거리 어디에 정장을 한 부인들과 유행을 의식하는 귀부인들의 모습이 보였던가! 모자 같은 것 따위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남녀 노동자들뿐이었다. 과거에는 정부가 모자를 쓰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지금은 모자를 쓰는 행동이 ‘부르주아적’ 잔재로 보일 수 있고,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할 수 없다.
람블라스 거리의 사람들은 전에 못지않게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복은 푸른색, 붉은색, 검정색 스카프와 목도리 그리고 민병대의 얼룩 제복으로 다양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에 여기를 거닐었던 부유한 카탈루냐 여성들의 현란한 장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사람들은 시민전쟁을 주도한 지방도시가 바로 바르셀로나라는 사실을 거의 믿으려 하지 않는다. 평화 시의 바르셀로나만 알고서 그곳 정류장에 내린다면 그 도시가 많이 변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지역 경계선의 통과는 보우Bou 역에서 이루어진다. 잠시 머무는 여행객이 그렇듯이, 사람들은 역전에서 벗어나, 활기 있고 평화로운 이 도시의 거리를 배회한다. 카페가 열려 있다. 보통 때보다 사람들이 좀 덜 붐빈다. 상점들도 마찬가지다. 돈은 아직도 옛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만일 경찰들이 많이 보이고, 소총을 들고 여기저기 다니는 젊은이들만 보이지 않았더라면 여행객에게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실제로 혁명이 발생했고, 책에서나 읽었고 어린 시절 꿈에서나 봄직한 1792년, 1871년, 1917년의 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건의 하나를 사람들이 실제로 직접 체험했다는 사실을 곧 인정할 것이다. 이번의 결과가 더 성공적인 것이라면 좋으련만!
그러나 실제로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권력이 민중의 손에 넘어갔다는 점뿐이었다. 푸른색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비상시기가 온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오래 가지 못했던 (언제나 복종만 해왔던 사람들이 이제 모든 일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시기 중에 한 시기가 온 것이었다. 이런 때에는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만일 무장하지 않은 주민들이 있는 곳에 열일곱 살짜리 소년의 손에 장전된 소총을 쥐어준다면…….
시몬느 베일
1936년 8월 8일
자동차의 속도는 비행장이 있는 프라트Prat에서부터 늦춰졌다. 이곳은 바르셀로나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다. 비행장 입구에는 도로를 가로지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산디노 만세!’ 도로에는 솜주머니와 돌, 모래로 쌓은 바리케이드가 이전보다 더 높아졌다. 바리케이드 위에는 적색 깃발과 흑 · 적색 깃발이 펄럭였다. 그 옆에는 테가 넓고 둥근, 꼭대기가 뾰족한 밀짚모자와 베레모 혹은 두건을 쓴 무장대원들이 서 있었다. 복장도 가지각색이었다. 아예 상의를 벗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몇 명이 우리 운전사에게 달려와 신분증을 보자고 했고, 다른 대원들은 소총을 흔들며 인사했다. 몇몇 바리케이드의 보초병들은 부인들이 가져다준 점심용 빵을 먹고 있었다. 도시락은 돌 위에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수프를 몇 스푼 떠먹고 나서는 다시 포문으로 기어 들어가 탄통과 총검을 가지고 놀았다.
도시 가까이 갔을 때 우리는 그 도시의 변두리 첫 번째 거리에서 이미 작렬하는 듯한 인간 용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날은 그곳 사람들이 운명과 용기의 세월을 경험한 날 가운데 가장 흥분된 날처럼 보였다. 상상할 수도 없는 대소동의 날이었다.
바르셀로나가 승리에 도취하여 이렇게 흥분한 적이 전에 언제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종려나무가 멋지게 늘어선 거리, 넓은 도로와 해안의 산책로, 보스포루스Bosporus 해안에 위치한 현란한 비잔틴과 터키 양식의 궁전을 옮겨다놓은 듯한 환상적인 별장들이 있는 바르셀로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가 바로 스페인의 뉴욕이다. 또 여기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공장지역, 조선소, 제철공장, 전기회사, 자동차공장, 섬유회사, 대형 양화점과 의류회사, 인쇄소, 전차 정류장과 대형 차고들이 있다. 구름을 찌를 듯이 삐죽하게 솟은 은행 건물, 극장, 카바레와 유원지,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어둡고 비좁은 빈민가, 범죄자들이 득실거리는 ‘중국인 거리’, 이처럼 냉혹하게 양쪽으로 분열되어 있는 이 풍경은 시내 한복판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온다. 빈민가와 어두운 거리는 마르세유와 스탐블Stambul의 어느 항만 배수구보다도 더 지저분하고 위험한 곳이다. 이곳을 흥분한 사람들이 꽉 메우고 있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모든 것이 뒤집혀져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의 흥분은 극에 달해 있었다. 나도 이런 분위기가 뿜어내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내 심장이 나도 모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소총을 손에 든 젊은이들, 머리에는 꽃을 꽂고 손에는 번쩍이는 칼을 든 부인들, 혁명의 띠를 어깨에 두른 노장들, 바쿠닌과 레닌 그리고 자우레스(Jaurès)의 초상화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모인 군중들의 틈새를 비집고 겨우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와중에도 노래 소리, 악사들의 연주 소리, 신문팔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영화관 앞을 지나갔다. 영화관 주변은 불에 타고 사격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두집회와 노동자 민병대의 축제행렬, 잿더미로 변한 교회와 여러 색의 플래카드를 지나갔다. 온갖 색이 엉켜 흐르고 있는 네온사인과 만월의 달빛과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으면서 우리는 간혹 카페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카페의 테이블이 보도에도 나와 있었다. 우리는 겨우 대로로 빠져나와 번화가인 람블라스 거리에 있는 ‘동양’ 호텔에 도착했다.
미하일 콜코프
이전의 아나키스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즉 그들은 앞 세기의 신화와 모험의 세계를 꿈꾸며 살고 있었다. 나는 거의 문맹과 다를 바 없는 페르난 누녜스Fernán Núñez 출신의 한 농촌 노동자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늘 이런 질문을 했다. “왜 당신네들은 제2, 제3의 국제노동자동맹을 두고 논쟁을 벌입니까? 제1국제노동자동맹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는 미하일 바쿠닌이 동시대의 동지였던 셈이다.
바르셀로나 노동자들 가운데는 아나키스트들이 많았다. 7월 19일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과 어깨에 어깨를 걸고 콜론 호텔로 출정하였다. 그들은 꽃으로 둘러싸인 그 호텔의 담장 앞 보도블록 위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비무장 민중들이 군대와 싸워 이겼다.
“사라고사로 가자!” 이 구호는 택시의 차체에도 붙어 있었다. 얌전하던 아가씨들도 바느질을 내팽개치고 힘에 겨운 무거운 소총을 끌고 다녔다.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은 스페인-스위스 무기제조 합작회사를 습격하여 권총으로 무장하고 투쟁대열에 나섰다. 그들은 기타를 치면서, 혁명가를 불렀다. 그들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사라고사의 파시스트들에게는 탱크와 비행기가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창고와 지하실에는 아직도 19세기의 기운이 감돌았다. 벽에는 ‘반규율의 조직’이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두 발의 축포가 울렸을 때 아나키스트들은 인류의 새 창조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한 아나키스트가 내게 말했다. “우리의 깃발이 왜 흑 · 적색인지 아십니까? 붉은색―그것은 투쟁을 상징하며, 검정색―그것은 인간 정신의 어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일냐 에렌부르크 2
탈취
7월 19일 이후 며칠 사이에 발생한 상황은 거의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가장 큰 호텔 한두 개를 제외하고 모든 건물은 노동계급의 조직에게 탈취 당했다. (여러 신문들은 건물들이 불타 내려앉았다고 보도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꽤 큰 점포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은행들이 폐쇄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은행의 입구에는 평의회가 관리한다는 공고문이 나붙었다. 도망간 기업주들은 다행히도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공장을 노동자들이 인수했다. 곳곳의 회사 정문에는 탈취사실을 공고하여 CNT가 경영을 넘겨받았거나 여타의 조직들이 탈취한 건물을 조직위원회의 본부로 사용한다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프란츠 보르케나우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지의 사무실과 빌라를 노동자 조직의 사무실로 이용하였다. 수도원은 학교로 사용되었다. 수녀원에는 노동자 대학까지 신설되었다. 농민위원회가 만든 민중 레스토랑을 민병대와 조직의 노동자들이 마음껏 이용했다. 상인들이 인플레이션을 노리고 비축해 두었던 생필품을 압수하여 민중들에게 배분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생산 부문에서였다. 수많은 기업가와 고급 기술자들, 이사들, 부동산 소유자들, 행정 관리들이 추방되었다.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노동자들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섬유 노동자 조직의 보고에 의하면 기업가들 중에 절반이 그들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40퍼센트는 ‘사회활동의 영역에서 멀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10퍼센트는 노동자들의 피고용자라는 새로운 관계 하에서 계속 일하겠다고 이미 선언했다고 한다. 노동자 자문기관 및 위원회가 기업을 통제하고 개인 소유의 상사와 회사를 압수했다. 중요한 생산수단 기구는 노조와 농장 협의회 그리고 도시 행정청에 위임되었다. 다만 소비성 상품을 생산하는 회사만 개인 소유로 남겨두었다.
운수회사, 석유회사, 포드자동차, 스페인-스위스 합작 자동차 부품공장, 조선소, 발전소, 백화점, 극장과 영화관, 철도, 무기 생산 관련 금속공장, 농업 생산물 수출회사 그리고 대형 포도주회사는 물론 사회화되었다. 압류조치에 대한 법적 형식절차는 그때그때마다 달랐다. 기업은 지방자치의 재산으로 공유화된 경우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본래의 소유자와 새 계약이 체결될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그저 단순히 압류되기도 하였다. 외국상사는 국유화되었고 기업 카르텔은 추방되었다. 모든 경우, 두 개의 거대한 노조조직인 아나키스트 노조와 사회주의 노조가 임명한 통제위원회의 관리 아래서 노동자 스스로 사업 경영을 떠맡았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계획도 수립되어 공장 안에 보건소와 학교가 세워졌다. 상품의 유통은 노조들과 협의하여 조절되었다.
앙리 라바세이(Henri Rabasseire)
오늘 내가 방문하여 목격한 공장의 활기는 분명 CNT가 이룬 집단경영화의 성과였다. 시민전쟁이 발생한 이후 3주, 그리고 총파업이 끝난 후 2주 만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공장은 다시 가동되었다. 나는 매우 질서 있게 가동되고 있는 한 공장을 방문했다.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들은 체계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회화가 이루어진 이후 여기서 버스 두 대가 수리되었다. 이전에 시작하다가 중단되었던 신축건물이 완공되었고, 새 모형의 차들이 생산되고 있었다. 자동차에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었다. ‘노동자의 경영으로 생산된 자동차’. 생산관리 담당원은 신축건물을 완공하는 데에 5일이 걸렸으며, 그것은 평상시보다 공기를 이틀이나 단축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 공장에서 받은 긍정적 인상을 이처럼 일반화하는 것이 물론 조급한 결론일지는 모르지만, 당시 노동자들의 분위기가 아무리 좋았다고 하더라도 노동자 집단이 공장을 인수하여 며칠 만에, 아무런 문제없이 생산을 재가동했다면 그것은 분명 뛰어난 업적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카탈루냐 일반 노동자들의 재능과 바르셀로나 노동자 조직의 능력을 대변해준 것이었다. 이때 잊지 말아야할 사실은 공장에는 재벌의 총수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나는 공장의 급여명세서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총수, 경영진, 공장장과 기사라는 관리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라졌다’는 것은 그들이 살해되었다는 것의 완곡한 표현이다.) 공장위원회의 회원들이 무심코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 회사 간부의 개인적인 친구들에게 ‘연금 지불’ 폐지 건에 대해 함구하고, 한 달 봉급의 상한선을 1천 페세타로 정하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안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공장으로 볼 때는 상당한 절약을 의미한다고 했다. 사회화 이후에도 봉급은 인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란츠 보르케나우
모순
나는 몇 번이고 내 귀를 의심했다. PSUC(카탈루냐 사회주의통일당)의 대표자들이 오늘 나에게 설명하길 스페인에서는 혁명 같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나와 함께 장시간 토론을 벌였던 그 사람들은 카탈루냐의 옛 사회민주당원들이 아니라 외국 공산당원들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스페인은 선례가 없는 특이한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즉 정부가 자신의 군부와 싸우는 것, 그것이 스페인 상황의 전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노동자들이 무장했고 국가 행정기관은 혁명위원회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법적 절차 없이 사형 당했고, 예전엔 임금을 받고 일했던 노동자들이 공장과 농장을 탈취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것이 혁명이 아니면 무엇을 두고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모든 일에는 아무런 정치적 의미가 없으며, 정치적 내용이 없는 투쟁은 비상사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현재의 운동을 ‘시민적 혁명’이라고 규정하는 마드리드 중앙공산당의 태도를 비아냥거리면서 문제는 혁명적 과정이라고 논박했다. 그러나 PSUC의 공산주의자들도 중앙당의 그러한 논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지난 15년 동안 혁명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때에도 세계 도처에서 발생한 혁명적 상황을 폭로했던 (그래서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던) 바로 그 공산주의자들이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래 처음으로 유럽에서 발생한 이 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했다.
프란츠 보르케나우
1936년 8월 10일
오후에 나는 가르시아 올리베르를 방문했다. 당시 그는 카탈루냐의 모든 민병대를 관장하고 있었다. 참모부는 해양박물관 건물 안에 있었다. 훌륭한 건축물이었다. 회랑은 웅장하고 강당은 넓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구식함대의 모형과 무기 모형, 탄약통 모형 등이 유리벽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로 붐볐다.
올리베르는 깨끗하게 정리된 안락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회의실 안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조각상도 놓여 있었다. 그는 하바나 담배와 코냑을 권했다. 얼굴색은 갈색이었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빛에 그을린 까만 얼굴에는 흉터가 있었다. 탄띠에는 묵직한 권총이 꽂혀 있었다.
처음에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 말수가 적은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갑자기 혼잣말을 하듯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험이 풍부하고 열정적이며 노련한 연설가처럼 보였다. 이야기는 주로 아나키스트 노동자의 용기를 칭송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바르셀로나 가두투쟁 때의 위기를 극복했고, 바로 그들이 지금은 반파쇼 민병대의 전위대들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언제나 혁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켜 왔고, 앞으로도 혁명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칠 각오가 서 있다고 단언했다. 목숨 그 이상이라도. 그래서 그들은 반파쇼 부르주아지 정부와도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물론 올리베르는 아나키스트 대중들을 그렇게 끌어들이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자신의 동지들은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을 훈련시켜 총 인민전선을 수행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며, 또 그것이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올리베르 자신은 시위 때 타협자요 아나키즘 원칙의 배반자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모든 점을 감안했기 때문에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독점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CNT와 FAI는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약간은 신경과민처럼 보일 정도로 여러 가지 일들을 부정했다. 아나키스트들이 많은 무기를 감추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그들이 민병대만 지지하고 정규군에 반대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아나키스트들이 POUM과 연합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것, 아나키스트 대원들이 상점과 가정을 약탈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흑 · 적색 깃발을 이용하여 범죄 집단들이 그런 짓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인민전선에 반대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그들의 성실성은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나타났다고 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소비에트연방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며 그들은 러시아 노동자들을 사랑하며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러시아 노동자들이 스페인을 도울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아나키스트들도 소비에트연방을 도울 것이라고 했다. 소비에트연방은 그들의 계획에서 스페인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의 이러한 힘을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나라에는 아나키즘 운동이라고는 없으며, 그 운동의 중심이 분명 스페인일 것이라는 주장도 틀린다고 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에 있는 사람들이 왜 바쿠닌을 존경하지 않는단 말인가? 지금 사람들은 바쿠닌에 대해 상당한 존경을 보이고 있으며, 그것은 스페인과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아나키스트들이 마르크스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사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그의 친구 두루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주선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두루티는 현재 전선에 나가고 없다고 했다. 그는 사라고사 입구에 있다고 했다. 내게 전선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다. 물론 나는 전선으로 갈 작정이었다. 만일 통행증만 얻을 수 있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출발할 예정이었다.
나는 올리베르에게 통행증을 발급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올리베르는 기꺼이 발급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가 부관에게 이야기하자마자 부관은 바로 그 자리에서 타자기로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올리베르가 증명서에 사인을 했다. 그가 내손을 잡고 러시아 노동자들이 스페인 노동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어제 포도주를 저장하고 있는 ‘페드로 도메크’사의 지하실을 털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아마 그 범행을 저지른 자는 FAI 회원의 이름을 빌려 독자적으로 행동한 폭도일 것이라고 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와의 협력을 거절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미하일 콜로프
걷잡을 수 없는 상황
7월 혁명 이후의 상황에서 우리는 혁명이란 대중들의 의식 속에 욕구와 목표로서 이미 잠재되어 있던 것을 실현하는 것일 뿐이라는 해묵은 테제를 재확인하였다. 대중의 명확한 의식화만이 대변혁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개인적 한풀이나 소외된 자들의 욕망 분출과 같은 사소한 사건들이 난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혁명이 터지기 몇 주 전에 우리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하여 FAI의 내부회의에서 토론을 하였다. 당시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만일 조직력으로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다면 혁명은 모든 도덕의 제방을 무너뜨려 인민을 무서운 야수로 변하게 만들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렇게 될 경우 혁명은 약탈과 방화, 살인이 난무하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대중들의 행동이 위대한 도덕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우리가 책에서 보았던 무장한 인민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7월 혁명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의 관점을 수정하고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주장이 타당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 사흘간의 과정에 관한 한 우리는 비난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사흘간은 썩 훌륭했다. 그러나 그 이후 대중들이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 것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가 어떤 상황을 발생시킬지에 대한 고려나 그것이 회복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고 대중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하였다. 우리는 대파국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지만 그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민병대 위원회가 제동을 걸려고 시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제동이 아래에서부터 직접적이고 자발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한 별 효과가 없게 마련이었다. 제동은 오직 의식이 한 단계 높아진 인민 자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무의식적 행동의 결과에 대한 한 좋은 본보기가 바로 인민 급식소였다. 인민 급식소는 즉시 각 도시마다 설치되어 누구에게나 필요한 만큼의 음식을 무료로 배급하였다. 급식소는 수 주 간 기능을 발휘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민중들에게 공급할 식량을 비축했다. 그러나 민중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더 많은 식량을 요구했고 우리가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었을 때, 급식 담당원들은 창고나 상점에서 필요한 것을 임의적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들은 전선의 민병대에 보낼 식량은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그들의 ‘압류 행위’가 지방 경제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그것이 위원회를 악몽처럼 가위 눌렀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하고 항상 분노를 샀다. 의식의 결핍은 개개 당파나 조직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반적 현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혁명을 그저 전리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만 이해했던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탈취한 공장을 다시 복원하여 산업과 지방경제의 현장에 노동을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FAI,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개입하다
7월 30일 바르셀로나. 우리는 일체의 폭력과 독단을 적으로 간주한다. 어떤 유혈사태도 정의를 세우려는 인민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며 이에 대해서 우리는 단호하게 조처할 것이다. 우리는 무책임한 행동을 중단하지 않고 전 바르셀로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간다면 누구든 예외 없이 총살할 것임을 엄숙히 선포한다. 이 조처에 대한 우리의 각오는 우리가 냉혈동물일 만큼 단호하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만일 또다시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범죄행위로 간주할 것이다.
바르셀로나 인민의 명예와 CNT, FAI의 이름을 걸고서 그런 월권적인 폭력행위를 종식시킬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폭력행위를 근절할 것이다!
「노동자연대」
스페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 스페인에 다녀온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이야기를 확산시키면서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 그곳에 직접 가서 혁명과 내전의 상황을 구경하고 기사를 한줌 쥐고 돌아오고 싶어 하는 것이 요즘 유행하고 있다. 스페인의 사건에 관한 르포를 찾기 위해서 더 이상 신문 조각이나 잡지를 뒤적일 필요가 없다. 피상적인 것 말고 실제로 스페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선 사회적 변혁은 그것이 개개인의 일상적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 의거해서만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민중’의 일상적 삶을 올바르게 간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민중의 일상적 삶은 나날이 변하게 마련이다. 거기에는 강요와 자발성, 이상과 필연이 뒤섞여 있다. 객관적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행동가나 관찰자로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혼란이 발생한다. 이 점은 내전의 본래적 속성이기도 하지만 가장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스페인에서 발생한 사태를 정밀 검토한 결과에 근거하여 내릴 수 있는 최초의 결론인 셈이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가 러시아 혁명에서 경험한 그 모든 것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충분히 입증된다. 혁명이 사회적 과정을 통하여 명확하고도 강렬한, 한 단계 높은 의식을 자동적으로 촉발할 것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혁명이 내전의 성격을 띨 경우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난다.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원칙과 현실의 관계가 일체 사라지고 만다. 행동과 제도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준마저도 깡그리 사라져 버린다. 그리하여 사회변혁은 마치 공놀이와 같은 단순한 우연의 일로 변하게 된다. 스페인에서 잠시 머물면서 목격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인데 어떻게 일관성 있는 보고가 가능하겠는가? 그런 경우 아무리 잘돼 봤자 몇 가지의 인상에 불과하며, 이런 인상에 근거해서는 어떤 학설도 내세울 수 없는 일이다.
시몬느 베일
아마 내가 선량한 많은 동지들에게 충격을 줄지도 모르겠다. 내가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진정 자유를 말하려면 설령 기쁨을 줄 수 없는 것이라도 생각한 바를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우리 모두는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피레네 산맥 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투쟁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 편을 도우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토록 많은 노동자와 농민이 그곳에서 자신들의 피로써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비슷한 경험은 이미 유럽에서 한 번 했었던 바이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었다. 그 경험도 많은 피를 대가로 지불하였다. 당시 레닌은 주민과 차이가 나는 군대와 경찰, 관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국가를 모든 세계에 요구했다. 그러나 레닌과 그의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해 가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내전의 과정에서 그들은 가장 억압적이고 관료적인 군사기구와 경찰기구를 세웠던 것이다. 불행한 민중은 이 기구에 의해 고통을 받았다.
레닌은 권력을 장악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기구인 정당의 지도자였다. 이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레닌과 그의 동지들의 정직성에 대해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레닌이 선전했던 이상적인 목표와 그가 만든 당의 구조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에 카탈루냐의 우리 아나키스트 동지들의 정직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의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페인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억압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며,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이런 형태야말로 바로 아나키스트들의 인간적 자유 이념에 배치되는 것이다. 내전의 필연성과 그 분위기가 내전의 실현을 촉발했던 본래의 희망을 오히려 억압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군대식 강제와 노동현장에서의 억압, 언론과 방송이 확산시키고 있는 거짓을 증오한다. 그리고 우리는 계급차별과 독단과 잔인성을 혐오한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도 군대식 강제가 난무하고 있다. 자원병의 물결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군사동원령이 법제화되어 방위의무가 일반화되어 버렸다. 우리의 동지들로 구성된 FAI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평의회 방위위원회조차도 옛 군법을 민병대에 적용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산업 부문에서도 강제 규칙이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동지들이 중요한 경제 장관직을 떠맡고 있는 카탈루냐 정부도 노동자는 정부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만큼의 많은 잔업을 해야 한다고 확정했던 것이다. 그러한 규정을 준수하지 않는 노동자는 반동으로 여기고, 거기에 상응하는 조치를 받을 것이라는 법령까지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산업생산 활동에서 사형 언도와 같은 것이다.
7월 19일 이전의 구시대 경찰은 힘을 완전히 상실했다. 내전 첫 3개월 동안 조사위원회가 활동하였다. 조사위원회에는 정치적으로 책이미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총살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노조 측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측으로부터도 통제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에야 비로소 인민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인민재판소는 실제적 쿠데타군뿐만 아니라 그저 그렇게 분류된 사람들도 재판해야 한다. 이러한 개혁조치가 어떤 효과를 가져 올 것이라고 장담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이다.
7월 19일부터 조직적인 거짓 비방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시몬느 베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사회적 위계질서로부터 억압받아 온 민중의 편에 선 정치집단에 호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정치집단이 더 이상 호감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았을 때 끝이 났다. 내가 어느 정도 기대를 걸었던 마지막 정치집단은 스페인의 CNT 조직이었다. 나는 내전이 발생하기 전에 스페인에 갔었다. 그 나라를 충분히 이해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의를 달기에 만만치 않은 스페인의 민중을 사랑할 만큼은 이해하였다.
아나키즘 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서 나는 민중이 자신의 장점과 단점, 합법적 요구와 비합법적 희망을 자연스럽게 표출한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CNT와 FAI는 놀라운 복합조직이었다. 각각 스페인에서 환영을 받고 있었고 대표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긴밀한 사항에서는 서로 대립성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한쪽은 냉소주의, 도덕 파괴주의, 열광과 몰인정주의를 표방했고 다른 한쪽은 형제애와 인간애를 표방하면서 소박한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적 품위를 강조하였다.
전자의 경우 무질서와 폭력에 호소하는 취향이 있었고 후자의 경우 이상을 현실로 실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후자의 경향에 의해 CNT가 나아갈 방향이 결정되었던 것 같다.
1936년 7월 나는 파리에 있었다. 나는 전쟁을 싫어한다. 그런데 전쟁에서 항상 가장 끔찍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후방에 있는 사람들의 심리상태였다. 내 의지와는 반대로 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그래서 매일 매시간 한쪽의 승리와 다른 반대쪽의 패배를 기대한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파리의 후방이 아닌가라고 나 스스로에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원병으로 지원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행 기차를 탔다. 그때가 1936년 8월 초였다.
한 가지 불행한 사태 때문에 나는 바르셀로나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다. 이삼 일 정도만 바르셀로나에 머물렀다. 그 후 나는 에브로 해안에 위치한 아라곤으로 갔다. 그곳은 사라고사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였다. 야귀에스Yagües 부대가 그 강을 건넜다. 그 후 나는 야전병원으로 사용한 시트게스Sitges의 저택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갔다. 스페인의 체류는 모두 합쳐 봐야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스페인을 떠나야만 했다. 떠날 때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 전쟁에 가담해야겠다는 내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전쟁은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가난하게 살아왔던 농민 대중이 지주계급과 그들의 하수인들, 그리고 교회 신부들을 상대로 하여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 유럽 열강들이 서로 대결하는 속성을 띠었던 것이다. 열강은 러시아와 독일, 이탈리아였다.
시몬느 베일
물자 부족
제2원정대가 아라곤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체 아나키스트 조직들의 몇몇 중요한 정치가들과 최초의 난상토론을 벌였다. 우리 민병대 위원회는 아라곤 전선에 배치된 민병대의 중대와 대대, 연대를 지휘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가장 능력 있는 동지들을 전선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정치가들은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전후 시대를 대비하여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아껴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결과를 본다면 작전지휘본부를 우연의 법칙에 맡긴 꼴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 단위 부대들의 투쟁력이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잘 훈련된 장교를 전선에 거의 배치하지 않았다. 그런 장교가 있었지만 기껏해야 그들을 장군의 참모나 전술 고문관으로만 투입했을 뿐이었다. 우리 민병대는 직업군인이 되는 것을 싫어했고, 직업군인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전의 직업군인의 모든 행태를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도력이 있는 사람을 전선으로 파병하기를 꺼렸던 다른 당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조직의 거의 모든 지도부도 자신의 안녕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 모두는 아직 쓰러지지도 않은 곰의 가죽 분배 몫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후방에서는 정치모리배들의 장사판이 준동했다. 그들이 보인 행태는 혁명 이전의 직업정치가들의 그것보다 종종 더 역겨웠다.
우리는 그런 행태를 묵과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전선 투쟁력을 강화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라곤에서 우리는 허약한 감시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전선의 길이에 비해 열악하게 무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아라곤 전선의 무기는 기껏해야 3만 정의 소총뿐이었던 것에 비해 후방의 조직들과 당파들은 대략 6만 정 정도의 소총과 많은 실탄을 구비하고 있었다. 후방의 실탄 보유량이 전선부대의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우리는 자체 조직들의 수중에 있는 전쟁 물자를 전선의 민병대에게 넘겨줄 것과, 많은 대원들을 전쟁에 투입해 줄 것을 우리의 조직들에게 수십 번 요청했다. 후방의 안전은 여성들과 아이들도 돌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직은 다른 정파들이 우리의 배후를 공격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마당에 자체 조직원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도 반박하였다. 우리는 우리쪽 사람들이 먼저 무기를 내놓고 스스로 전선으로 가겠다고 동의한다면 다른 모든 조직에게도 무기를 내놓도록 설득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우리 자체 조직이 가장 불신하고 있는 다른 그룹들의 문제는 조직에게 위임하겠다고 했다. 남아있는 기동경찰과 보안경찰 그리고 지방경찰의 무장도 해제하여 그들을 전선으로 보내겠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별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후방지역 투쟁가들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두루티가 바르셀로나에 돌아왔을 때마다 수많은 무기들이 무의미하게 거리를 누비고 있는 것을 보고는 격분해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사바델Sabadell에 기관총이 10정 정도 보관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무기를 민병대에 제공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그러나 거절당하자 기관총을 강제로 압수하기 위해 사바델에 1개 중대 병력을 보냈다. 다행히도 그가 시기적절하게 우리에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개입했기 때문에 유혈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 무기의 일부가 제공되었다. 그 무기들은 공산주의자들의 것이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의 우리 쪽 동지들만 해도 대략 40정 정도의 자동소총을 은밀히 보관하였고, 그것은 아라곤 전선 전 구역에 투입된 수량보다 더 많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별반 의미가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다른 정파들이 얼마나 많은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는지 우리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마침내 그들이 자동소총을 두루티에게 보냈지만 실탄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실탄이 도착했을 때는 화기가 망가져 있었다. 두루티가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결국 그가 직접 바르셀로나로 갔다. 그는 정부뿐만 아니라 CNT에게도 원조를 요청했다. 무기가 없다는 답변을 듣자 그는 우리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권총들을 끄집어내었다. 우리도 자기 몸을 방어해야 하지 않느냐고 항변하자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여기 후방에 있는 자네들이 무엇 때문에 권총이 필요한가? 내놓게, 아니면 함께 전선으로 가세!” 이런 식으로 그는 자기 쪽 사람들인 아나키스트들을 다루었다.
마누엘 에르난데스
전쟁 물자가 부족하여 두루티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그는 전화에 대고 목이 쉬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좀 더 많은 실탄과 소총과 화포를 요구했다. 후방에 독촉을 했지만 답변이 없었다. 만일 우리가 칠팔월에 2만 5천~3만 명이 아니라 동원 가능한 최대 인원인 6만~8만 명을 소집하여, 보유한 모든 무기와 함께 그들을 아라곤 전선으로 보냈더라면 승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전에 교육부 장관을 지냈던 프란시스코 바르네가 한 번은 부하랄로스에 있던 두루티를 방문하고 돌아간 것이 기억난다. 때마침 그는 그곳에서 벌어진 적의 침투작전을 함께 목격했다. 그리고 그는 실탄이 떨어진 민병대가 수류탄만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두루티가 울분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다. 만일 적이 실탄이 떨어진 원정대의 상황을 알았더라면 원정대의 저지선을 쉽게 뚫고 민병대를 포로로 잡았을 것이다. 아라곤 전선에서 그런 상황은 매일 거듭되었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내전 동안 우리가 구입한 모든 무기의 대금은 CNT가 지불했다. 마드리드 정부에는 아예 기대도 걸지 않았다. 라르고 카바예로가 인색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국가의 재정을 담당한 인물은 바로 네그린이었기 때문이다. 네그린의 역할에 대해서는 구구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는 애초부터 아나키스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 자들의 편에 서 있었다는 점만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수단이 여러 가지였지만 한 가지 점에서 공통성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무기조차도 가능한 한 적게 제공하는 것, 그리고 방어하기가 각장 힘든 전선의 구역을 우리에게 떠맡기는 것,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 조직 내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루티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CNT 노선에 동의했고, 카탈루냐와 아라곤 지역위원회뿐만 아니라 아라곤 방위 고문단의 노선에도 동의하였다. 노선에 대한 의견충돌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은 두루티가 엘사에서 사라고사로 진군하려고 했을 때였다. 이에 반대한 사람은 두루티의 옛 친구인 가르시아 올리베르였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당시 카탈루냐 민병대 위원회의 비서직을 맡고 있었다. 두루티는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1
권유
두루티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동지들에게 말한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전선에서는 규율을 위반하고 후방에서는 부르주아화가 이루어진다면 파시스트들이 승리할 것은 너무도 뻔합니다. 우리는 지금 즉시 이런 사태를 중단시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전선에서 한 가지 명령을 내리려면 온갖 사설을 다 늘어놓아야 하는 형편입니다. 아무도 지시에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후방에서는 신흥 부르주아들이 호화저택을 짓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카페와 카바레, 무도장 등은 초만원입니다. 마치 우리가 최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이 말입니다. FAI의 우리 동지들조차 점차 이런 구역질나는 놀이에 가담하려는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 라이노
두루티가 낡을 대로 낡은 자동차를 타고 좀처럼 가지 않던 후방지역을 방문했다. 11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라디오 연설을 했다.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람블라스 거리에서 중계 방송되는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전에 그는 10월 혁명 열아홉 돌 기념행사 차 소비에트연방을 방문했던 스페인 특사와 함께 스탈린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었다. 두루티만큼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채택된 강령을 따르는 몇몇 아나키스트들은 가장 저명한 지도자인 두루티가 POUM이 주장하듯이 이미 ‘스탈린식 관료주의자들’을 용인하기까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프랑크 옐리넥
두루티 연설문 제1호
나는 인민의 심장을 족쇄로 채우려 했던 군부의 조직을 넉 달 전에 아주 용감하게 분쇄한 카탈루냐 인민에게 고합니다. 대성당의 첨탑이 눈에 들어오는, 사라고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아라곤 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여러분의 친구와 동지들을 대표하여 내가 여러분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마드리드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혁명적 인민을 굴복시킬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십시오! 우리는 아라곤 전선을 사수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마드리드의 동지들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마드리드로 진격할 것입니다. 카탈루냐 민병대는 지난 7월 투쟁에서 파시스트를 굴복시켰던 것처럼 마드리드 거리에서도 자신들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노동계급 조직들은 지금의 주요 과제가 바로 파시스트들을 근절하는 일이라는 점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카탈루냐 인민이 모든 음모와 경쟁의식 그리고 내부갈등을 종식시켜 줄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가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자각한다면 해묵은 원한과 정치적 음모 술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카탈루냐 인민은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결코 전선의 투쟁가들에게 뒤쳐져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마지막 남은 우리의 힘을 총동원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원병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카탈루냐 노동자들이 전선으로 달려갈 때만 후방의 사람들에게도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법입니다. 모든 도시 노동자들의 적극적 동원이 필요합니다. 전선의 우리는 우리 뒤에 누가 서 있고, 우리가 누구를 의지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차원 높은 목적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누구의 편인지 보여주려는 민병대도 있습니다. 신문이 민병대를 위한 기금을 모금하게 한다든지, 도움을 요청하는 플래카드를 벽에 내거는 것은 민병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민병대에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파시스트들이 유포하는 전단에서도 그와 유사한 국호를 내거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위험한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돌처럼 단단한 블록을 형성해야 할 것입니다.
전선의 우리는 여러분에게 단 한 가지만을 원합니다. 후방의 여러분이 우리에게 책임의식을 가져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후방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조직들이 여성들과 아이들을 돌봐주길 요구합니다.
그런데 일반동원령을 두고 사람들을 위협하여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오해하는 사람은 우리를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질서를 꾀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전선에 초대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의 도덕과 규율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후 우리는 창끝을 돌려 후방의 도덕과 규율이 어떤 것인지 눈여겨볼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심해도 좋습니다! 전선에는 혼란이나 규율 의식의 결핍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책임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히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잠을 자도 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카탈루냐의 경제를 여러분의 손에 맡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방심하지 말고 여러분의 규율을 엄격히 잘 지켜줄 것을 부탁합니다. 우리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제1내전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제2내전의 맹아가 발아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자신의 당이 제일 막강한 당이며, 그래서 다른 당에 자기 당의 강령을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파쇼의 독재에 대하여 우리의 단합된 힘과 통일적인 조직, 그리고 통일적인 규율로 맞서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파시스트들의 진군을 저지해야 합니다, 파쇼를 저지하자! 지나갈 수 없다(¡NO PASARÁN!)! 이것이 전선의 구호입니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3호
두루티 연설문 제2호
지금 이 순간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더 짧은 노동시간이나 더 높은 임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필요한 만큼 충분히 일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 모든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할 의무입니다. 특히 CNT 회원들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모든 조직에게 모든 분파투쟁과 책동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전선의 우리는 정직을, 특히 CNT와 FAI의 정직을 요구합니다. 우리 간부들이 솔직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투쟁을 독려하는 편지를 우리에게 보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피복과 음식, 무기와 실탄을 보내는 것으로도 부족합니다. 이번 전쟁은 초현대식 기술적 수단이 동원된 것이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 전쟁은 카탈루냐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우리 간부들은 전쟁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카탈루냐 경제를 이 상황에 맞게 조직화해야 합니다. 우리 경제에 질서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4호
두루티는 바르셀로나에서 “여러분은 안심하고 잠을 자도 됩니다”라고 연설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우리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제2내전의 맹아가 발아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어쨌든 마드리드의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도 안심하고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긴박한 위기와 대결을 벌여야 했지만 말이다. 참모부가 무능했든지 아니면 배신했을지도 모른다. 헤수스 에르난데스 교육부 장관은 한 참모부 장교가 카바예로와 대화를 나누면서 민병대는 아무튼 실직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며, 그들은 하루에 단 10페세타로 일하는 셈이 된다고 말했다고 공개적으로 나중에 밝혔다. 이런 천박한 냉소주의는 이후에 발생한 사건들에 의해 여지없이 논박되었다.
프랑크 옐리넥
농민들
해방
우리는 아라곤의 황량한 고원에 위치한, 어느 한 전형적인 마을에 진을 치고 있던 CNT의 원정대를 따라갔다. 우리는 그 마을을 산타마리아라고 불렀다. 마을은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1백 가구가 모여 사는 그 마을에는 동사무소와 감옥이 있었다. 쓸 만한 땅은 거의 없었고 농부들이 일구는 보잘것없는 땅뙈기도 오리 모양을 한 하천에만 의존하여 겨우 경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하천조차도 7월이 되면 말라버린다. 나무라고는 올리브 몇 그루와 무화가 비슷한 나무 몇 그루가 전부였다. 토착민들의 말에 의하면, 날씨는 석 달ㄹ이 겨울이고 아홉 달은 지옥이라고 했다.
마을 주민들은 부유한 지주들만 빼놓고 모두가 반파시스트들이다. 그곳에서 지주들은 부자로 통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농장에서 일 년에 약 2천 마르크의 소득을 올리기 때문이다. 지주들은 대개 사라고사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특히 7월이 되면 신속히 도시로 사라졌다. 공무원 한두 명, 시장과 치안경비대의 경찰간부가 그 부류였다. 이 부류에는 작은 공장과 발전소, 그리고 유착기를 가진 ‘자본가’도 끼어 있었다. 물론 마을 성당의 신부도 포함된다. 신부를 제외하고 그들에게는 아들이 한둘 있었다. 그들의 자식들은 사라고사에서 옷을 사 입고 반나절 카페에 앉아 그들에게 접근하는 온갖 아가씨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바르셀로나나 사라고사에서라면 이 도령들은 분명 볼품없는 존재들이지만 이 마을에서는 멋쟁이 행세를 했다. 그들 대부분은 파쇼 단체인 팔랑헤에 가입해 있었다. 법과 제도는 분명히 그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들은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으며, 그래서 반동적인 생각을 쉽게 말로 내뱉었다.
바로 그 마을에 두루티의 원정대가 행군해 들어갔던 것이다. 열정에 비해 장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이 행한 첫 번째 일은 정화작업이었다. 그들은 산타마리아에 존재해 왔던 파시즘의 잔재를 말끔히 청소할 계획이었다. 정화대상 명단에 오른 자들 중에 제때 사라고사로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이 좋게 이야기하더라도 사살되었다. 당사자들은 말없이 조용히 있었다. 그 다음 원정대는 동사무소에서 모든 토지대장과 재산등본을 마을 공터로 끄집어내어 불태웠다. 그 조치는 실제로 중요했다. 그것은 의식적인 조치였다. 모든 주민들이 모였고 원정대의 지도자는 그들에게 자유공산주의의 원칙을 설명했다. 그때 보수집단들에게서조차 공감을 얻어낸 적이 있었던 스탈린주의의 위험에 대해 비꼬는 말이 한두 마디 나왔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로 들끓으면서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존 랭든 데이비스
두루티의 선봉 원정대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원정대의 정책 고문관들은 우선 파견 판사를 해임시켰다. 마을 문제를 세 가지 질문으로 해결했다. “파견 판사는 어디에 있는가? 토지대장을 보관하고 있는 토지등기소가 어디에 있는가? 감옥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고 나서 그들은 법원 서류와 토지대장을 불태우고 구속자들을 석방하였다.
마누엘 베나비데스
마을이 하나로 뭉쳐 보급품을 트럭에 가득 실어 전선으로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의 가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축 중에 제일 살찐 놈을 잡기도 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아라곤 지방 주민들의 태도였다. 본래 이 지역에는 향토애 같은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이 지역 주민들이 카탈루냐와 나바라 사람들이 아라곤에서 전투를 벌이는 일에 반대했더라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역 농민들은 바르셀로나에서 출정한 원정대에게 그들 나름대로 성대한 잔치를 열어 환영해 주었고, 낙오병들에게는 힘을 북돋아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원정대에게 빵과 포도주밖에 대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했다. 만일 민병대가 대접을 사양했다면 아마 그들은 모욕을 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프랑크 옐리넥(Frank Jellinek)
나는 내 오토바이를 타고 남쪽으로 갔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마을을 통과하여 계속 다른 마을로 갔다. 농민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나무에는 ‘달빛만 먹고 자란 나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청명한 날 곧 끔찍한 전투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오토바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계속 났기 때문에 약간 불안했다. 전날 저녁에 오토바이를 차고에 세우면서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공산당 민병대에게 손질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는 엔진을 한 번 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주 기초적인 것만 손봤기 때문에 가속 페달을 있는 힘껏 밟아야 겨우 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1단 기어를 넣고 시속 35킬로미터로 가까스로 달려왔던 것이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검문하는 위병소 앞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말했다. “여기 이 마을에 오토바이를 수리할 수 있는 기술자가 있습니까?”
그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 무지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스페인 마을 어느 곳에든 그런 것 정도는 쉽게 수리할 수 있는 기술자가 있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나는 친구 후작에게 내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교회가 불타 내려앉는 그런 급박한 시기에도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 여전히 스페인 사람들의 기질, 그러니까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서 남 돕기를 좋아하는 그런 기질을 갖고 있더라는 말을 듣고는 만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바리케이드를 지키고 서 있던 그 보초가 청색 작업복을 입고 있는 한 청년에게 소리쳤다. “후안, 여기 이 동지를 기계운수 산업부로 안내해 주게.” 후안이라는 청년과 나는 오토바이를 마을 거리 아래로 밀고 내려갔다. 기계운수 산업부는 거리 모퉁이에 있었다. 한 달 전 이곳에는 마을 교회가 있었다.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벽의 칸막이마다 이제 트럭이 주차해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두 사람이 아직 벽에 달라붙어 있는 도금된 조각상과 인조대리석을 피켈과 삽으로 떼어내고 있었다. 석회가루가 날렸다. 내가 그들이 하는 일을 주시하자 그 민병대원들도 그들의 작업에 대하여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은 듯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신도들을 위해 어지간히도 튼튼한 건물을 세웠군요.” 마침내 한 명이 말했다. 그는 기둥을 뜯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이젠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산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았거든요. 이것이 노동자의 집이라면 곡괭이 한 방에 그냥 내려앉았을 겁니다.” “어쨌든 교회 덕분에 이제 차고가 생긴 게 아닙니까.” 내가 말했다. “예, 멋진 차고입니다, 동지.” “영원히 차고로 남아있을 것 같소? 어떻게 생각합니까?” “영원은 아니죠. 우리가 적을 끝장낼 때까지만 차고로 사용될 겁니다. 저쪽 건너편을 보시오, 동지.”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맞은편 공터에서 서너 명의 사람들이 열심히 도랑을 파고 있었다. “저기에다 상설시장을 세우려고 합니다. 곧 수도도 설치할 겁니다. 전에는 여자들이 거리에서 물건을 구입해야 했지요. 파리들이 우글거렸답니다. 이제 깨끗한 시장이 들어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위생에도 좋은 거지요, 안 그렇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두 기술자가 내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어놓았다. 그들은 아주 친절하게 나사마다 기름을 쳐주었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내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동지.” 그 기술자가 말했다. “간단한 일이었거든요. 그냥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두 시간씩이나 시간을 보냈는데, 간단한 일이라뇨. 제가 반파쇼 기부금으로 민병대에 기부하겠으니 받아주십시오.”
이 말에 그들은 동의했다. 나는 5마르크를 마을금고에 맡기고 떠났다.
존 랭든 데이비스
집단화
8월 13일, 마을 주점에서 일상적인 농민집회가 열렸다. 그것은 어제 집회에서 거론한 문제를 계속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몇 명의 아나키스트들이 농민들을 소집하여 타르디엔타 마을을 코뮌으로 만들자고 제의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의견이 분분하여 다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몇 명의 농민들이 트루에바(Trueba)를 찾아가 투쟁위원회의 특권으로 그 문제를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부터 매우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농지 관리 및 토지와 곡물의 분배 문제였다. 파시스트적 지주들로부터 압수한 거의 모든 토지를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들과 농장 노동자들이 공동관리하고, 향후 업적에 따라 배분하자는 제의가 있었다. 여러 가지 다른 원칙들도 제기되었다. 식구 수에 따라 분배율을 정하자는 의견도 나왔던 것이다. 뒤에서 침묵만 지키고 바라보고 있던 아나키즘파와 트로츠키파가 나섰다. 그들은 농민 경제의 집단화가 우선적으로 마련되어야 하고, 둘째로 토지위원회를 통하여 지주들의 농장에서 곡물을 압류하고, 셋째로 5~6헥타르의 농지를 소유한 중간 농민들의 부동산과 농지를 공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명령이나 협박에 의해 몇몇 부락에서는 집단경제가 이루어직로 있었다.
돌로 된 바닥과 목재기둥으로 세워진 나지막한 강당은 마지막 자리까지 꽉 찼다. 석유램프가 그을음을 내며 타고 있었고, 영화 상영을 위해 전등은 꺼져 있었다. 땀에 찌든 퀴퀴한 살 냄새와 독한 담배 냄새가 사방에서 풍겼다. 창이 없는 베레모를 쓴 3백여 명의 사람들이나 종이부채를 손에 든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쿠바의 카자흐 마을에 와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트루에바의 짤막한 연설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 투쟁이 파쇼적 지주와의 투쟁이며, 공화정과 농민의 해방, 그리고 그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삶과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권리 쟁취의 싸움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아라곤의 농민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없다, 코뮌이 되면 그 누구도 농민을 배제하거나 농민을 대신하여 의사를 결정할 수 없으며 오직 농민들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지역 민병대의 대표적인 투쟁위원인 그는 발생할 수 있는 어떤 독재적 조처에 대해서도 민병대와 함께 농민들을 보호하겠다, 등을 선언했다.
모두가 만족하여 소리쳤다. “바로 그거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강당을 나설 때 트루에바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물론, 공산주의자이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통합사회주의당의 당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왜냐하면 현재 나는 투쟁연합과 인민전선의 지역 대표자이니까요.”
그는 키가 크지 않고 땅딸막했지만 다부졌다. 탄광 노동자 생활도 했고, 그 후 요리사가 되기도 했다.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는 아직 젊었다. 군복 차림에 가죽 탄띠와 권총을 차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안건이 나왔다. 그것은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을 타르에딘타 출신의 농민들과 농장 노동자들로 한정하자는 것과, 회의에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되 대표는 농민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는 안이었다. 후자의 안이 받아들여졌다.
타르에딘타 신디케이트(농장 노동자와 농민들의 연합) 의장이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는 집단농장화에 관한 어제의 결정은 다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수 농민들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따라서 그 결정에 대해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이 동의했다.
강당 뒤쪽에 서 있던 누군가가 어제 희뿌연 담배 연기 뒤에서 그 일을 결정할 때 신디케이트를 비난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소리쳤다. 이 발언자는 어제의 그 비난자가 출석해 줄 것을 요구했다. 회의실이 소란해졌다. 동조하는 불만의 목소리와 박수, 휘파람 소리, ‘옳소!’라고 외치는 소리가 뒤섞였다. 아무도 그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중년의 한 농부가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우선 개별적으로 일을 하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거론하자고 제안했다. 박수가 쏟아졌다. 이어서 등장한 두 연설자의 생각도 같았다.
몰수한 토지에서 나온 그 해 수확물의 배분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토론이 벌어졌다. 어떤 이들은 집집마다 동일하게 배분하자고 했고, 어떤 사람은 신디케이트가 식구 수에 따라 배분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들판에는 전투 때문에 아직 추수하지 못한 곡식이 있었다. 적의 사격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밀을 수확하려는 사람에게는 능력껏 거두어들이는 만큼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하자고 한 청년이 제안했다. 다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때 트루에바가 말을 끊었다. 그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곡식 몇 자루 때문에 불필요한 위험에 우리를 내맡겨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는 민병대가 농민의 안전을 지켜줄 때 사격구역의 곡식을 공동으로 수확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수확물은 업적과 필요에 맞게 배분되어야 한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트루에바의 제안에 동의했다.
벌써 여덟시가 넘었다. 모든 회의가 끝났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나 무엇인가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당황하였다. 그는 흥분하여 격양된 말투로 타르디엔타 주민들에게 연설했다. 그는 어쨌든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모든 것을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분배 문제를 두고 어제부터 유혈투쟁을 벌이고 있는 꼴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어제의 결정을 받아들여 당장 자유공산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대지주들의 토지뿐만 아니라 대농과 중농의 것도 몰수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휘파람과 욕지거리와 박수가 뒤엉켰다. ‘옳소!’하고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연설자의 뒤를 이어 다섯 명의 아나키스트가 계속 공세를 퍼부었다. 회의는 완전히 난장판으로 변했다. 어떤 이들은 박수를 보내며 찬동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침묵만 지켰다. 모두가 지쳤다. 신디케이트의 의장이 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첫 번째 연사로 나섰던 아나키스트가 표결에 부치자는 의장의 제의에 반대했다. 그는 이런 일을 투표로 결정할 사안이냐고 따졌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공동의 유대와 의견의 통일을 위한 노력과 그것의 추진, 열정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투표를 하게 되면 누구나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발동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투표―그것은 바로 이기주의의 산물이 아닌가! 우리는 투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농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미사여구를 동반한 그 위협적인 연설이 농민들을 선동한 셈이다. 다수가 그 아나키스트 연사의 주장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분위기를 가라앉혀 다시 투표 같은 것을 실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회의는 궤도를 이탈하여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트루에바가 묘안을 제시했다. 그는 지금 당장 의견이 합일점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살림을 개별적으로 꾸려나가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고, 집단화를 실행하고 싶은 사람은 내일 아침 아홉시에 다시 회의를 열 것이니 그때 참석하라고 말했다. 모두가 그의 묘안에 만족했다. 다만 아나키스트들만 화를 내며 돌아갔다.
미하일 콜코프
8월 14일 금요일과 15일 토요일(두루티의 원정대)
피나 농민들과의 대화.
질문: 농민들이 집단경제에 동의했는가?
첫째 대답(아주 단순하게) : 우리는 위원회의 결정에 따를 것이다.
한 노인 : 동의한다. 요컨대 소목장이나 의사에게 갚을 돈을 벌기 위해 지금처럼 돌아다니지 않고, 필요한 만큼 충분히 벌수만 있다면…….
질문 : 농장을 공동화하는 것이 나은가, 개별화 하는 것이 나은가?
대답 : 공동화가 더 좋다. (자신감은 없어 보였다.)
질문 : 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대답 : 밤낮 일을 했지만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농민들은 대부분 문맹이었다. 자식들은 머슴살이를 하였다. 열네 살짜리 계집애들은 이미 2년 전부터 세탁부로 일해 왔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이가 없는 듯 모두 웃었다.) 월 20페세타(스무 살 처녀가 받는 한 달 월급), 혹은 17페세타 혹은 16페세타의 월급을 받으면서 맨발로 돌아다녔다.
질문 : 사라고사의 부자 지주들은 어땠는가?
대답 : 신부에게 자선금을 내놓는 부자는 한 명도 없었다. 신부에게 가축은 갖다 바쳤다.
질문 : 사람들이 신부를 좋아하는가?
대답 :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질문 :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는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연령이 매우 다양하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미사에 참석한 경험이 없었다.
질문 : 부자들을 많이 증오하는가?
대답 : 그렇다. 특히 하층 민중들의 증오심은 더 심하다.
질문 : 공동노동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대답 : 아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불평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질문 : 모두가 똑같이 열심히 일하겠는가?
대답 :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가 강제로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다.
질문 : 도시 생활이 농촌 생활보다 나은가?
대답 : 배로 낫다고 생각한다. 노동은 훨씬 적게 하는 반면에 입는 옷은 우리보다 좋다. 유흥장도 많곡, 여러 가지 면에서 낫다.
도시 노동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다. …… 농촌에서 도시로 떠난 사람은 일자리를 얻어 3개월이 지나면 멋진 새 옷을 사 입고 고향을 방문한다.
질문 : 도시 사람을 부러워하는가?
대답 :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병사 : 도시에서 일 년을 근무하고 나면 어떻게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질문 : 왜 그런가?
병사 : 음식이 나쁘다. 지칠 정도로 훈련을 받고 구타를 당한다. (반항하면 총살이다.) 뺨을 때리기도 하고, 총 개머리판으로 구타하기도 한다. 구타 방법은 여러 가지다. 부자 자식들에겐 고급 소시지가 배급된다.
질문 : 병역의무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병사 : 물론이다. 그게 폐지된다고 해서 애석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부를 두둔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침묵을 지켰다.)
농민들의 반응 :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바쳐야 하는 소작농이다. 소작료를 지불할 수 없었던 많은 농민들이 농지에서 쫓겨났다. 하루 2페세타의 날품팔이로 일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농민 계급 이하로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몬느 베일
마을 이야기
모네그리요Monegrillo 마을을 점령한 후 몇 명의 민병대가 한 폐가에 들어가 주인 없는 옷가지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진 옷을 그곳에 벗어놓고 왔던 것이다. 그들이 막사로 돌아와 그 사실을 보고하면서 가져온 물건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극 순간 그들은 도둑으로 취급당했다. 두루티가 그들을 끌어내어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두루티는 그들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가 말했다. “자네들은 나의 대원이야. 이번 한 번만은 용서하겠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을 다시 보게 되면 그때는 총살하겠어. 강도나 도둑은 내게 필요 없네.”
헤수르 아르날 페나 3
나의 안내자가 두루티 원정대의 정책에 대해 내게 설명했을 때 나는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그들은 농민 사이에 유행하고 있던 공화정에 대한 일반의 기대에 어긋나는, 그래서 미움을 살 비밀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농민들의 침묵 항의 때문에 피나 마을을 떠나야할 정도였다. 민병대가 숙영지를 구하고 보급품을 압수할 때, 그리고 ‘파시스트’를 처형할 때 엄정하고도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이 틀림없었다. 총살 행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두루티 대원이 가는 곳이면 항상 총살이 자행되었다. 그것은 마치 하루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그들은 특별한 자랑거리라도 되듯이 내 친구에게 처형 장소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까지 하였다.
프란츠 보르케나우
8월 18일은 부하랄로스의 수호성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리는 날이다. 그날 이 마을에서는 전통적인 교회 헌당식이 열린다. 축제 전날 저녁에 그곳 주민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해했다. 교회 헌당식이라는 것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행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두루티를 찾아왔다.
“순전히 내 생각입니다만!” 그가 말했다. “전에 여러분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념제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내일 우리는 동지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념제를 열도록 합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까?”
그는 종교문제에 관한 한 내게 맡겼다. 한 번은 그가 내가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했던 라틴어 성서까지 내게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헤수스 아르날 페나 1
한 번은 모네그로스Monegros 마을의 농민들 몇 명이 두루티의 지휘소를 찾아왔다. 그들은 교회 종을 몇 번 치게 해주는 대가로 설탕과 초콜릿을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두루티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라가시니(N. Ragacini)
전선이 조용했기 때문에 두루티는 후방의 문제에 신경을 쓸 여유가 생겼다. 그의 지휘권 내에서는 농민들의 문제가 특히 중요했다. 모네그로스 시역에서 그는 농민들과의 협상을 통해 대규모 농장집단화의 구성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런데 꼭 필요한 모든 지역 간의 연결 도로망이 없었기 때문에 두루티는 도로 건설 작업반을 조직하였다. 그는 전선 지원병 가운데 투쟁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대원들을 이 작업반에 투입하였다. 작업반은 농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새로 건설한 도로는 레리다와 사라고사를 연결하는 주요 동맥선인 에브로 하천을 낀 피나에서 외딴 마을인 모네그리요까지 이어졌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 도로를 ‘집시 도로’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두루티가 자신의 작전구역에 집시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떠돌이 인민들을 도로 건설에 동원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집시들의 떠돌이 생활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기이한 것으로 보였지만 집시들 자신은 그것을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였다.
두루티는 힘이 닿는 데까지 농민들을 도왔다. 원정대의 트럭과 트랙터를 전선으로 보내지 않아도 될 경우에는 그것을 농민들의 개간 사업에 투입하였다. 원정대의 트럭은 밀과 퇴비를 실어 날랐다. 저수지에 물이 말랐을 때에는 물을 수송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리카르도 산스 3
두루티의 원정대가 아라곤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 그들은 집시들의 거처를 목격하였다. 집시들은 온 가족을 거느리고 들판에서 거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선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극저 마음 내키는 곳으로 떠돌아다녔다. 그 점이 원정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프랑코의 첩자로 이용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던 것이다. 두루티는 그 문제로 고민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집시들에게 가서 말했다. “여러분, 우선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시오. 우리와 같은 복장으로 말입니다.” 당시 민병대는 모두 공장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찌는 듯한 7월의 더위 아래서도! 그런데 집시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넝마를 벗어 던지시오! 노동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여러분도 입을 자격이 있는 겁니다.” 두루티가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챈 집시들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노동복을 입은 여러분은 지금부터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티가 계속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이곳 농민들은 집단농장을 만들었고, 마을에 넓은 길을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 있는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함께 일하러 가십시오!” 남아있는 다른 도구들도 집시들에게 주었다. 가끔 두루티는 도로 건설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직접 나서서 살펴보기도 했다. 그는 집시들의 손을 빌릴 수 있었던 것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두루티 나리가 저기 온다!”라고 집시들은 안달루시아 사투리로 서로 숙덕거렸다. 그리고 그들은 손을 들어 올려 반파쇼식 인사법으로 인사하였다. 두루티를 향해 둥글게 쥔 주먹을 뻗어 올렸다. 두루티는 그들이 그것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가스톤 레발
마지막 시도
9월 말경, CNT 지역위원회가 부하랄로스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는 아라곤의 전투 대원들과 아나키스트 백인조 부대, 원정대의 각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모든 당과 조직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고문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고문단’은 전쟁 때문에 몰락한 지역경제를 회복시키고, 통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경제를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고문단’은 카탈루냐 민병대가 아라곤에서 행하고 있는 권력남용 행위를 통제하고, 가끔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점령군처럼 나타나는 민병대의 기습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두루티가 고문단의 발족에 찬성하였다. 고문단의 발족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CNT는 마르크스주의자들(POUM, PSUC)의 선전에 대응하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농장집단화가 위법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회의에서 장래 이루어질 지방의 혁명정부를 위하여 호아킨 아스카소를 고문단의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아라곤의 아나키스트들은 즉시 그 지역 사회주의자들 및 소수의 공화주의자들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공화주의자들은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우선 좀 지켜보자는 태도를 보인 반면에, 사회주의자들은 적개심까지 드러내면서 고문단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CNT는 고문단을 구성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1936년 10월 15일에 고문단의 첫 회의가 프라가Fraga에서 열렸다.
아라곤의 아나키스트들은 카탈루냐 동지들이 항상 기피해 왔던 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권력이 분산되어서는 안 되며 독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전쟁에 의한 황폐도 불사한다고 했다. 이때 그들은 POUM, PSUC, 그리고 투쟁의 한몫을 담당하고 있던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의 존재를 무시했다. 또한 그들은 그것이 마드리드 중앙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한 의도는 심지어 카탈루냐 CNT 본부의 의지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계획을 CNT 민족위원회에 통보하지 않았고, 자문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이미 결정된 기정사실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아라곤 ‘고문단’은 공동 비방의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아라곤 고문단이 은폐된 아나키즘 독재자, 분파주의자의 경향이 있다고 맹공하였다.
그 후 아라곤 고문단은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정부와 오랜 협상 끝에 다른 당파들의 대표자들도 고문단에 등용한다는 것과, 고문단의 권한은 제한되며 중앙국가의 권위가 우선한다는 조건 하에 마침내 인정을 받았다. 그때가 1936년 12월이었다.
세자르 로렌소
아라곤 지역방위 고문단의 선언
우리는 여러 원정ㄷ애나 개별 단위 부대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불평의 목소리가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라곤 고문단은 어떤 무뢰한 집단들의 무책임한 짓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고문단은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을 도왔던 반파쇼적 형제들이 아라곤의 농민들로부터 그런 증오를 사는 일을 막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인민들의 권리가 계속 짓밟히는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어떤 정치적 분파로부터 지원을 받았건 원정대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우리 지역에서 마치 점령군처럼 행동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우리 인민들에게 낯선 정치적 사회적 강령들을 강제로 주입시키려 했다.
인민들이 뽑았던 마을 위원회가 쉽게 해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대원들이 무장해제당하는 때도 있었다. 신체 구금과 옥살이 혹은 총살로 위협받기도 했다. 위원회를 무력으로 통제하던 사람들의 정치 신조에 복종하는 새 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고민도 하지 않고, 그리고 통제받는 일도 없이 생필품과 가축, 온갖 종류의 물건들을 압수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우리는 씨를 뿌려야 했지만 씨앗도 비료도 장비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마을들이 철저히 파괴되어 갔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원정대의 사령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1. 긴급을 요하는 물품과 가축 그리고 장비는 제공 가능한 방위 고문단에 요청할 것. 비록 전투상황이 아무리 긴박할지라도 물리적인 힘에 의한 독단적 몰수행위는 일체 금지할 것.
2. 반파쇼 원정대는 천부적으로 자유롭고 독자적인 개성을 가진 인민의 고유한 정치적 사회적 생활방식에 일체의 간섭을 삼갈 것.
우리는 마을 주민들과 그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1. 고문단의 명확한 승인 없이는 지금 소지하고 있는 무기를 누구에게도 제공하지 말 것. 고문단이 새 위원을 구성할 때까지는 기존의 위원회를 절대 해체하지 말 것.
2. 고문단이 동의하지 않은 어떤 몰수행위도 받아들이지 말 것. 단 원정대 사령관의 입회하에서 이루어지는 긴급 특별조치는 예외로 함.
3. 위 사항을 위반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즉시 고문단에 신고할 것. 이때 그 관련자들의 이름을 알릴 것.
우리는 이런 지시와 요구를 예외 없디 모든 원정대가 준수해 줄 것을 희망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자유로운 인민이 자신의 해방과 해방군을 증오하는 비극적인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언제나 우리 스스로 희망했던 혁명 때문에 인민의 삶이 파괴된다면 그것은 작지 않은 비극일 것이다.
아라곤 지역방위 고문단 의장 : 호아킨 아스카소
1936년 10월 프라가에서
호세 페이라츠 2
짧은 해설 5
적에 대하여
적은 어디에 있는가? 역사에서 적은 언제나 시야에 잡히지 않게 몰래 나타난다. 기관총 뒤의 유리창 너머에서 움직이는 까만 점, 바리케이드 저편에서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 사무실의 늙은이, 참호 속에 비치는 실루엣이 적의 모습이다. 적은 대개 익명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적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결코 망상이 아니다. 혁명과 전쟁은 싸움의 성격이 다르다. 군사적 적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도 전복하려는 사람에게는 동지와 적이 명확히 구분되는 주 전선이 없다.
스페인 혁명은 프랑코와 그의 파쇼적 충복 장군들만을 상대로 한 싸움은 아니었다. 혁명의 첫 시작 때부터 적들은 혁명의 내부 진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들은 1936년 7월에 그들의 정치적 숙적들과 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연대가 오래가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였다. CNT-FAI 동맹단은 파시스트와 대항하여 싸웠다. 동맹단은 상황을 역전시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토끼몰이 식으로 사냥했던 군대와 경찰의 잔병들과 투쟁했다. 이젠 루이스 콤파니스가 정부 청사에 앉아 그가 오랫동안 체포하려고 했던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스페인 공화국은 내전 내내 공화국의 정통성과 헌법의 준수를 내세웠다. 사람들은 쿠데타 장군들이 생각하는 ‘폭도들’과 공화국 수호자들이 생각하는 ‘애국자들’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저항의 주요 세력인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국가를 철저히 경멸하여 국가를 상대하여 전력을 다해 투쟁하였다. 다만 본래의 ‘공화주의자들’, 즉 시민 중도파들과 그 동맹자인 사회민주당만이 무장대결을 공화국의 사수전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기존의 국가권력과―파시스트들의 주장에 맞서―계급의 지배도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은 적과의 타협도 전혀 꺼리지 않았다. 반면에 스페인 도시 ·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 전위대인 CNT-FAI 동맹단에게는 현안을 일소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의 투쟁은 공격적이었다. 투쟁의 목표는 새로운 사회의 실현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이끌어가기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허약한 소부르주아지와 그 당파들의 국가는 청산될 수밖에 없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충실히 고수하면서, 국가라는 제도 전체를 무너뜨리고 스페인에 자유제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물론 이때 그들은 소수파인 스페인 공산당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스페인 공산당은 처음부터 시민적 공화주의자들의 편에 서 있었다. 진영 내의 이러한 모순들 때문에 서로간의 중재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내전 속의 내전이 언제나 위협하고 있었다. 반면에 프랑코는 자기 진영 내의 대립(군사 혁명정부와 팔랑헤, 보르본 왕조의 추종자들과 카를로스 당파 사이의 대립)을 적당히 얼버무려 평정하였다. 외부를 향해서는 강력한 통일을 외쳤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나라. 한 사람의 지도자.”
장군들은 스페인 인민이 자신들에게 대항투쟁을 벌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자신감은 군대라는 물리적 힘의 우세에 근거하였다. 그들은 그 우세한 힘으로써 막강한 군대와 경제적 수단, 총기와 탄약, 비행기와 탱크를 열거하면서 프랑코에 대한 저항은 예견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모든 혁명은 적이 군사력에서 우세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국가권력을 힘으로 전복시킬 각오가 선 인민은 언제나 고도의 훈련을 받은 중무장한 군대와 대결한다. 그러나 부대가 아직 ‘신뢰할’만하고 상사에게 복종하고 있는 한, 혁명의 기회는 없다. 따라서 투쟁의 출정에는 혁명군의 정치력이 결정적이다. “특정한 단계에서 모든 혁명의 운명은 군인들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쓴 러시아 혁명사에서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병사들이 군중 속에서 총검을 내리고 민중과 합류하면 할수록 봉기자들이 실제로 들고 일어났다는 확신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 혁명은 그런 병사들이 막사로 되돌아가서 동료들이 묻는 질문에 들려주게 될 단순한 시위운동만은 아니다. 혁명은 생사를 건 싸움이며 우리가 민중과 연결될 때 민중은 승리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프랑코가 승리한 계기를 물리적 힘의 우세, 외국 강대국들의 지원, 국내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강제력에만 의거해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파시즘이 스페인에서 강한 이데올로기적 계기로 작동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요소가 스페인 혁명의 실패에 끼친 영향이 종종 과소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이데올로기는 원시적일 만큼 단순하다. 그것은 자신의 운동을 먹고 사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천을 통해 검증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즉각적인 판단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장 단순한 방식에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기도 하다. 아나키스트들은 불투명하여 예측이 불가능한 전환의 시대를 고려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통적 관점과는 언제나 멀리 서 있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직접성을 갖고 자유제국으로의 비약적 발전을 확언하는 그 무조건적 확신은 자신들을 강하게 만들고, 그 확신이 명확히 검증되기까지는 추종자들에게 환상의 날개를 달아준다. 그러나 혁명의 첫 단계의 승리를 쟁취한 뒤에도 자유제국의 건설에는 끝없는 난제들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자마자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약점으로 나타난다. 실천에 의해서만 그 이데올로기가 실행됨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약속이 이행될 수 없을 때, 대중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미래에 대한 기대는 위축되고 만다.
바로 이때 아나키스트들의 원칙 고수는 자기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CNT-FAI 동맹단의 지도부는 부패하지 않았다. 이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노동자들이었다. 조직은 그들에게 어떤 보수도 지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보스나 타협자, 관료가 되고자 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과 자신들의 운동에 무조건 요구했던 도덕성이 그들의 운명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엄격한 도덕성은 따가운 의심을 촉발하기도 하였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과정에서 전술적 첫 걸음이 요구되었을 때조차도 그 소심성 때문에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동맹정책의 문제들로 인해 성장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인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택일적 비타협성 속에 함몰되어 있었다.
반면에 파시즘의 약속들은 애초부터 실행이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사회적 현실의 문제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스페인 민족의 명예가 요구하는 것이나 성모 마리아의 소망이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늘은 이데올로기의 수혜자들을 멸시하지 않는 법이다. 이데올로기가 내세우는 가치들이 초월적인 것이면 것일수록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자의 뻔뻔함은 대개 더 심해지게 마련이다. 프랑코의 그리스도교는 화포와 비자금을 은폐하기 위한 간판일 뿐이었다. 그의 민족정신의 본질은 그가 내전을 국제화하여 자신의 사병私兵과 같은 무어족 용병들에게 스페인 민중을 내맡긴 점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파시즘의 수단을 동원하여 조국의 테러적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모든 전통적 규범과 정의의 사상을 철폐시킬 것을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자행하였다.
바로 그가 내세운 구호의 총체적 비합리성은 파시즘을 이데올로기로 미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이전에 이탈리아와 독일이 그랬듯이 프랑코는 스페인에서 무의식적인 세력들을 동원하였다. 좌파는 이 무의식적인 세력들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계급 내에서도 불안과 적개심이 살아 움직였던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이 선전했던 미래에 대한 약속은 국가와 교회, 가족과 사유재산과 같은 제도를 소멸하는 이상적인 현세의 세계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먼 미래에나 가능할지 모르는 약속일 뿐 당장 실천으로 옮겨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또한 그러한 제도는 증오의 대상이었기도 하지만 신뢰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나키스트들의 미래는 동경심을 각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기초적 세력 안에 잠재되어 있는 불안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반면에 파시즘은 과거를 피난처로 제공하였다. 물론 이런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였다. 계몽주의 이후에 스페인을 그토록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만들었던 근대 세계에 대한 증오는 스페인 인민을 허구적 중세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정체성이 위협받자 스페인 인민은 권위주의적 국가라는 제도의 틀에 집착했던 것이다.
아나키즘 이론가들은 이런 메커니즘의 개념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의 지평은 언제나 다음의 바리케이드까지만 미쳤던 것이다. 그들은 파시즘이 작동한 국제적 세력분쟁만큼이나 파시즘의 내부조직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바쿠닌의 시대 이후부터 세계 혁명을 이야기해 왔고 스스로를 인터내셔널로 생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민주주의자들이 무솔리니와 히틀러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세계 전쟁에 개입이 아닌 개입과 같은 코미디를 연출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아해 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팸플릿에서 자본의 국제적 조직에 관하여 읽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은 어느 정도까지는 민족의 신비화를 숭배하고 싶어 했다. 결국 그들의 수십 년 간의 투쟁체험의 현장은 자신의 마을, 공장, 알고 있던 도시의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이 내세웠던 극단적인 탈중앙화의 조직형태는 종종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안목의 감상적 협소화라는 대가를 지불하기도 하였다. 국제적 수준에서 투쟁을 평가하도록 오랫동안 가르쳐왔던 소비에트 정책의 작동을 아나키스트들은 무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공화주의적 스페인에 대한 소비에트연방의 무기 원조는 총량의 범위에서 볼 때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특정한 계기에서 그것은 결정적인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 원조에 요구된 정치적 대가는 천문학적일 만큼 엄청났다. 공산당이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은 나날이 증가하였다. 소비에트 위원회와 첩보원들이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에 나타나 군사와 경찰 정책의 ‘고문관’ 역할을 하였다. 스탈린은 장기놀이판의 말을 다루듯이 스페인 혁명을 조종하였다. 그는 스페인 혁명을 러시아 외교정책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나키스트들은 당황하여 국제공산당을 책에 등기도 되지 않은 집단처럼 대했다. 그들이 그것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CNT-FAI 동맹단은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궁지에 몰렸다.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무장 해제되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을 때, 혁명의 시작은 끝이 되고 말았다.
민병대
환상적인 그림책
지금 카탈루냐를 찾는 외국인들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민병대이다. 가지각색의 제복을 입고 알록달록한 휘장을 두른 그들의 모습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런 남녀 민병대는 마치 환상적인 그림책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보인다. 민병대는 바로 옆 대원조차 복장이 다를 만큼 제멋대로였다. 정규군의 획일성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형형색색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민병대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통 스페인 군대 가운데 카탈루냐 공군과, 해체 중에 있는 소규모 단위의 부대만이 공화국에 충성하고 있었다. 인민들을 억압했던 연대는 해체되었고 병사들은 귀향 조치되었다. 극소수의 장교들만 아직 복무중이며 반파쇼 투쟁전선에 파견되었다.
경찰 군경에 들어간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중에 상당수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혁명은 자원병들에 의해 지원을 받았다. 자원병들은 노조조직원, 여러 당파의 당원들, 정부 측 사람들 등으로 다양했다. 그들은 각기 자체 원정대를 구성하였다. 노조와 정당 사무실은 민병대의 연락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원병으로 몰려왔다. 자원병을 신청하기 위해 남녀 지원자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부적격 판정을 받고 돌아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선봉 원정대가 트럭과 승합차를 타고 적을 향해 출동하였다. 아직 명확한 전선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실탄과 보급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급품 수송대가 트럭을 타고 되돌아갔다.
소수의 민병대만이 전투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그들의 무장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대원들 대부분이 권총만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탄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야전 행군 장비는 말할 것도 없이 부족하였다. 수많은 민병대원들이 샌들을 끌고 돌아다녔다. 두 개의 레이스가 달린 전통 스페인 전투모는 나중에 가서야 볼 수 있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적색과 흑색의 레이스를 달았고,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적색,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청색을 달았다. 노동자들의 청색 작업복이 일종의 제복이었다.
무장 프롤레타리아트가 이전의 파업과 집회에서 신뢰했던 정치집단들 가운데 여전히 신뢰성을 발휘하고 있던 정치집단의 간부들이 장교(인솔자를 군사용어로 말한다면)로서 활동하였다. 물론 그들도 제대로 된 전투훈련을 받지 않았다. 그들에게서는 전술의 초보단계도 기대할 수 없었다. 민병대가 호를 파고 철조망을 설치하는 기술과 폭탄을 장착하는 방법, 엄폐물을 적절하게 찾는 일 따위는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습득하였다. 그들을 교육시킨 사람들은 세계대전의 경험이 있던 외국 혁명가들이었다. 세계 혁명을 지원하고 파시즘과 투쟁을 벌이기 위해서 스페인을 찾는 외국 혁명가들의 수가 점차 늘어났다.
처음에는 전투작전이나 전략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노동자들은 오직 가두투쟁과 바리케이드 투쟁에만 의존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돌을 쌓은 바리케이드로는 현대식 무기를 방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실은 그들이 한 지역을 방어할 때, 특히 그곳이 자신들의 마을일 때 절실히 깨달았다. 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투경험이 부족해서 투쟁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전술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작전지휘소, 참모부, 통신망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모든 원정대는 자체 병참부를 관리하였다. 그들은 실탄이나 보급품이 필요할 경우 대표자 몇 명을 바르셀로나로 파견하여 보급을 받게 하였다.
전투대원들은 전투에서 지켜야 할 너무나 간단한 원칙조차 어기기 일쑤였다. 그들은 야간기습 때 혁명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대포를 최전방의 보병 공격선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종종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 민병대원이 나에게 설명하기를, 한 번은 단위 부대원 전체가 점심을 먹은 후에 포도를 따먹기 위해 포도원에 갔다 오니 진지가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가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원병으로 구성된 민병대는 스페인 전체의 정규군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파쇼의 정예군을 막아내면서 아라곤의 절반을 점령하였다.
H. E. 카민스키
8월 초에 프랑스에서 첫 지원병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이었다. 그들은 국제 반파시즘 투쟁에 가담하기 위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스페인 통일전선에 가입하여 아라곤 전선에서 투쟁하였다. 이어서 이탈리아의 여러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이 스페인 아나키즘, 사회주의, 노조연합, 자유주의의 공동노선을 지원하였다. 이탈리아 자원병들은 가리발디 여단을 조직하고 있었다. 이 여단의 투쟁임무는 우에스카 지방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과 자유사회주의자들이 투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1936년 9월에 국제적 투쟁가들로 구성된 ‘사코-반세티’가 조직되었다. 이 원정대는 두루티의 부대와 연대 투쟁하였다. 이 국제 민병대의 조직원 수는 3천 명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국에서는 그들에 관해서 거의 알지 못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된 국제 여단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외국 투쟁가들을 국내로 끌어들이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인원이 아니었다. 인원은 노조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사회주의 UGT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단체 모두에게 부족했던 것은 무기였다.
공산당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스페인 공산당의 경우, 그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원정대라고는 두서너 개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국 공산당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투쟁부대의 힘을 강화시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데 관심을 두었다.
7월 19일 이후 3개월 동안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이 카탈루냐 전 지역을 장악하였고, 카탈루냐―프랑스 국경선은 FAI가 지키고 있었다. FAI 대원들은 외국의 동지들을 받아들였고, 수많은 공산주의자들도 국경선을 통과시킬 생각이었다. 반파쇼 민병대의 조직가는 아나키스트 가르시아 올리베르였다. 그는 나중에 라르고 카바예로 정권에 들어가 법무장관이 되었다. 올리베르는 외국에서 들어오는 자원병을 차단하기 위해 국경선을 완전히 폐쇄하라고 명령했다.
아우구스틴 조우취 2
군기
민병대에게는 강요와 엄격한 군기 같은 것이 거의 불필요했다. 누구나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알지도 못하는 막연한 적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이 잘 알고 증오하는 부르주아지 적에 대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파시스트들이 부상당한 동지들이나 포로들을 관대히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복이나 타협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였다. 내전에서 이런 정치적 민병대에게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명예를 얻는다거나 지방을 점령하는 것도 아니며, 식민지나 제국주의의 무역로를 확보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신체와 생명의 자유였다.
적은 군부와 파시즘의 조직원들과 자본가들이었다. 그들은 자비를 고려할 가치조차 없었다. 반면에 포로로 잡힌 그들의 용병대는 용서를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잘못 이용되었고, 강요를 받은 것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제는 있었다. 적들의 장교들과 팔랑헤 당원들이 병사들 뒤에서 권총으로 돌격을 강요했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적의 병사들 가운데는 민병대에 들어와서 투쟁하고 싶은 열망에서 투항하고 탈영하는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최전선에서 적을 교란하는 데에는 선전이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하였다. 내전에는 자체의 법칙이 있었다.
H. E. 카민스키
가을에 나는 미국의 여성 아나키스트로 유명한 골드만 부인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출발하여 두루티가 있는 전선으로 갔다. 당시 그의 휘하에는 대략 9천 명 정도의 남자 대원들이 있었다. 그는 아나키즘의 한 장군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장군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내가 평생 동안 아나키스트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대원들에게 몽둥이를 들어 군기를 강요해야 할 것 같소?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에서는 군기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나도 알지만, 그 군기라는 것도 우리가 투쟁하고 있는 목적에서 나오는 정신적 군기여야 합니다.” 이 점에서 그는 세상의 어떤 장군과도 달랐다. 그는 대원들과 함께 생활했다. 같은 짚더미 위에서 잤고,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삼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녔다. 그리고 먹는 음식도 똑같았다. 그의 대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사관학교 출신의 사단장들은 군기가 없다면 사단을 지휘 통솔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루티는 직업장교가 아니라 바로 기술공이었지요.”
아우구스틴 조우취 1
두루티의 원정대에 소속된 젊은 민병대 가운데 몇 명이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고 싶어 원정대를 탈영했다. 도중에 그들은 두루티를 만났다. 두루티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권총을 뽑아들고 그들에게 걸어갔다. 그는 그들에게 벽을 향해 서게 했다. 그때 마침 옆에 서 있던 다른 한 민병대원이 두루티에게 그들의 구두를 한 켤레 달라고 부탁했다. “자네 눈으로 보게, 저들이 어떤 구두를 신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골라보게. 그들과 함께 썩도록 신발까지 땅에 묻을 필요야 있겠는가?”
물론 두루티는 탈영병들을 실제로 사살하지는 않았다. 그가 늘 하던 대로 말했다. “아무도 여기 강제로 남아있게 하지는 않겠네. 겁이 나면 가고 싶은 대로 가게.” 그러나 그의 말은 너무도 단호하고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가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남아있게 해달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자유스페인 誌」
소비에트적 선례 : 두 개의 양식으로 된 한 통의 편지
발신 : CNT-FAI, 반파쇼 민병대, 두루티 원정대의 지휘소.
수신 : 소비에트연방 프롤레타리아트
동지 여러분, 나는 수세기 동안 억압받고 멸시받았던 우리 계급의 해방을 위해서 20년 전에 투쟁하였던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수천 명의 귀하의 형제들에게 아라곤 전선 형제들의 안부를 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20년 전 러시아 노동자들은 노동자 국제동맹의 상징인 적색 깃발을 동구에 휘날렸습니다. 당시 여러분은 국제노동자계급에 희망을 걸고서 그것이 여러분들이 시작한 위대한 계획에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했지요. 세계 노동자들은 여러분들을 배신하지 않고 힘이 닿는 대로 여러분을 도왔습니다.
오늘 서구에서는 새로운 혁명이 탄생하여 우리 모두의 상징인 깃발이 다시 펄럭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한쪽은 차르 왕정에 의해서, 또 다른 한쪽은 독재군주에 의해서 억압받았던 우리 양쪽의 인민은 형제애로 뭉쳤습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의 노동자들인 여러분이 우리의 혁명을 지지해 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자칭 반파시스트들이요 민주주의자들이라고 일컫는 정치가들을 우리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 노동자 형제들만 믿을 뿐입니다. 우리는 20년 전에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던 것처럼 오직 노동자들만이 스페인 혁명을 옹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믿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과 같은 노동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아래서도 우리의 원칙을 기만하지 않을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징인 우리의 작업도구, 망치와 낫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에 무기를 들고 아라곤 전선에서 파시즘과 투쟁하는 모든 동지들을 대신하여 인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동지 부에나벤투라 두루티로부터. 1936년 10월 22일, 오세라에서.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3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고함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상을 지지하는 수많은 국제혁명가들이 러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들은 독방과 정치범 수용소 그리고 형무소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많은 동지들이 여기 최전선에서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 스페인으로의 출정을 허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는 왜 그런 동지들이 구속되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러시아가 스페인으로 보내려 했던 증원군과 무기가 어째서 정치적 거래의 대상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 거래는 스페인 혁명가들로 하여금 행동의 자유를 포기하게 만들 뿐입니다.
스페인 혁명은 러시아 혁명과는 다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페인 혁명은 ‘한 당에 권력을, 다른 모든 당은 감옥으로’라는 구호에 따라서 진행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통일전선을 기만하지 않고 거기에 실제로 유용할 한 가지 구호로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즉 ‘모든 분파들은 노동을, 공동의 적과는 투쟁을! 어느 체제가 더 바람직한지는 인민이 택할 것이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5
1936년 8월 14일
부하랄로스 거리는 온통 흑 · 적색 깃발의 물결이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두루티의 사인이 찍혀 있는 현수막이나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두루티가 명령하였다…….’ 시장의 광장은 ‘두루티 광장’으로 불렸다. 두루티와 그의 참모부는 적으로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국도 거리 감시초소에다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아주 위험한 처지였지만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용기를 실천하고 싶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병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 아니면 승리를!’, ‘죽기를 각오하고 사라고사를 점령하리라!’, ‘세계의 명예를 얻고 죽으리라!’ 이러한 구호는 깃발과 플래카드, 팸플릿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 유명한 아나키스트는 처음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올리베르의 편지에서 모스크바 「프라우다」지의 기사를 읽은 후부터 더욱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는 「프라우다」지의 기사를 읽은 후 즉시 국도 위의 민병대를 순시하면서 그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의도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어투는 극히 침통하였지만 환상적일 만큼 열정적이었다.
“우리는 우리들 가운데 단 1백 명만 살아남더라도 사라고사로 진군하여 파쇼들을 섬멸하고,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의 깃발을 내걸고 자유공산주의를 선포할 것입니다. 내가 제일 먼저 사라고사로 진입하여 자유공산당을 선포할 것이오. 우리는 마드리드 정부에도 바르셀로나 정부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평화를 원한다면,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것이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마드리드로 진군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 러시아와 스페인 볼셰비키들에게 우리가 결국 혁명을 완성시키는 것을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당신들에게는 독재자가 있고, 당신들의 적색군에는 연대장과 장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정대에는 사령관도 부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병사들입니다. 나도 한 사람의 병사일 뿐입니다.”
그는 아마포로 만든 청색 외투를 걸치고 흑 · 적색 천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다. 키가 크고 건장했다. 새치가 드문드문 보였다. 두루티는 그의 주변을 압도할 만큼 건강했지만 눈빛은 지나칠 정도로 감성적이어서 거의 여성적인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가끔 그는 치명상을 입은 동물의 눈빛을 발하고는 했다. 그것 때문에 나는 그의 의지력이 약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아무도 의무감 때문에 혹은 군기 때문에 우리 원정대에 봉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해방투쟁을 원하고, 해방을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두 민병대원이 가족을 방문하고 싶다며 바르셀로나로 휴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무기를 인수하고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내게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한 명이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남고 싶다고 했지요. 그러나 나는 그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모든 사람을 이렇게 대할 것입니다. 비록 12명만 남더라도 말이죠! 혁명군은 그런 식으로는 조직될 수 없는 겁니다. 주민들은 우리를 도울 의무가 있어요. 우리는 모든 독재자와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모두의 해방을 위해서! 우리를 돕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타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해방의 길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라도 타도할 것이오! 어제 나는 부하랄로스 마을위원회를 해체하였습니다. 그 위원회는 투쟁을 지지하지 않고 해방의 길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거기에도 독재 냄새가 나는 것 같군요.” 내가 말했다.
“시민전쟁에서 우연히 적이 침투된 인민조직체를 볼셰비키가 해체했을 때, 사람들은 볼셰비키를 독재라고 비난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해방이라는 일반적인 단어를 내세우며 변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공공연하게 선전했던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원정대에는 사령관도 없고 군기도 복종도 없다면, 당신의 원정대는 도대체 어떤 군대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심각한 투쟁을 생각지 않거나, 아니면 당신의 원정대에도 복종이라는 군기가 있으면서 이름만 달리 붙이고 있는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조직화된 무규율만 있을 뿐이오. 누구나 자기 자신과 전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비겁자와 탈영병 그리고 약탈자는 총살감입니다. 위원회가 그들을 재판합니다.”
“그것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저 자동차는 누가 탑니까?” 모든 사람들이 내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국도의 넓은 도로 위에 대략 15대 정도의 낡은 고물 자동차가 서 있었다. 포드와 아들러 회사의 찌그러진 자동차였다. 그 자동차들 가운데 고급 가죽시트가 내장된 은빛 승용차가 한 대 있었다. 그것은 스페인-스위스 합작회사의 고급 승용차였다.
“저건 내 차요.” 두루티가 말했다. “모든 전선으로 신속히 달려가기 위해서 잘 나가는 승용차가 한 대 필요해서 구했던 거지요.”
“물론 그렇겠지요.” 내가 대꾸했다. “가능하다면 사령관은 좀 더 멋진 승용차를 타야 할 겁니다. 단순히 어떤 사병이 저런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면 우스운 꼴이겠지만, 당신 같은 사람이 걸어 다닌다거나 고물 포드 차로고역을 치러야 한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 밖에도 나는 당신의 명령문들을 보았습니다. 부하랄로스의 모든 거리가 당신의 명령으로 판을 치더군요. 모두 이런 말로 시작했습니다. ‘두루티가 명령했다…….’”
“예, 누구라도 그렇게 명령했을 겁니다.” 두루티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그저 자발적인 전술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내가 대중들에게서 얻고 있는 일종의 권위의 표현이지요. 물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이런 말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요…….” 그는 내내 뒤에 서 있는 트루에바에게 시선을 보냈다.
“공산주의자들도 결코 개개인의 인격이나 개인적인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권위가 결코 대중운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며, 때때로 그것이 대중을 단합시키기조차 하여 대중의 힘을 강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령관입니다. 단순한 일개 사병 역할을 그만 하십시오.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원정대의 투쟁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하지 못합니다.”
“죽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두루티가 말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아나키즘이 어떤 것이며, 이베리아 아나키스트들이 어떤 사람인지 러시아와 세계만방에 보여줄 것이오.”
“죽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소.” 내가 대꾸했다. “승리로써 증명해야 하오. 소비에트 인민들은 진심으로 스페인 인민들이 승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나 반파시즘 투쟁가들과 마찬가지로 정말로 아나키스트 노동자들과 그 지도자들이 승리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대중들을 둘러보며 더 이상 프랑스 말이 아닌 스페인 말로 외쳤다. “여기 이 동지는 CNT와 FAI의 투쟁가인 우리에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뜨거운 인사와 자본가들에 대한 우리의 승리를 위한 희망을 전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CNT, FAI 만세! 자유공산주의 만세!” “만세!”하고 군중들이 따라 외쳤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고 훨씬 더 친근해 보였다.
미하일 콜코프
군사조직화
8월 1일, 마드리드 중앙정부는 1933년에서 1935년에 제대한 예비군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평의회가 이 동원령에 동의했다. 그러자 카탈루냐의 중요 정치세력들은 정부의 발표에 즉각 반발하였다. CNT는 전통적 방식으로 획일화된 정규군의 조직을 거부하였다. 1만여 명의 청년과 군인들이 8월 4일에 올림피아 극장에 모여 결코 군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우리는 민병대에 가입할 것이다. 우리는 전선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군부의 영내에 상주하는 군인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장인민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어떤 규율과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존 스테픈 브라데마
9월 4일, 새 정부의 대통령이 된 사회주의자 라르고 카바예로는 외신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선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혁명에 관해서는 그 후에 언제라도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9월 27일에 카탈루냐 정부의 개각이 단행되었다. 정부는 여전히 평의회 협의회로 불리었다. 세 명의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가 협의회에 들어갔다. 정부의 선언은 이러했다. “우리는 전쟁에 우리의 모든 노력을 집중할 것이며, 전쟁을 조속히 승리로 매듭짓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입니다. 단일 최고사령부를 조직하고 모든 전투부대와 협력하여 일반적인 병력의무를 기초로 한 민병대를 조직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대의 군기를 강화할 것입니다.”
평의회 협의회가 구성됨과 동시에 반파쇼 민병대 중앙위원회가 해체되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더 이상 위원회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평의회를 대표할 것입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선언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산티얀은 이러한 정책 변경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전쟁에 희생되었다. 결국 우리는 전쟁의 목적마저 희생시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전쟁에 혁명을 희생시켜 버렸던 것이다. …… 그 때문에 민병대 위원회는 카탈루냐의 자율권, 전쟁의 합법성과 참된 스페인의 부활을 담보물로 바쳤던 셈이다. 언론은 우리에게 지칠 줄 모르고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반복 주입하였다. ‘여러분이 인민통치 자체를 지지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는 한 우리는 카탈루냐로 어떤 무기도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외국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어떤 외국환도 발행해 주지 않을 것이다. 산업 원자재도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병대 위원회를 해체하고 평의회 정부의 내각에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방위 내무위와 또 다른 중요한 장관직을 맡았다. 그것은 전쟁에 패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호세 페이라츠 1
산티얀은 스페인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소수의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철학을, 베를린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공화국 시절 그는 다섯 번이나 체포되었고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내가 투쟁에 가담하여 그 결과를 두고 싸워야했던 것이 내 인생의 비극이지요. 나는 언제나 평화주의자였으니까요.” 그가 말했다.
7월 19일 가두투쟁 당시 그는 가장 극렬한 선동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민병대의 창단은 상당 부분이 그의 업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민병대는 자기 임무를 다하였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혁명적 군대로 변모해야 합니다. 이젠 아나키즘 투쟁이 아니라 단지 전쟁이라는 유일한 방법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만, 우리의 원칙에 대해서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할 겁니다. 아나키즘은 전쟁과 전쟁의 운명을 배제하려고 하지만 그 반대가 되고 말죠. 아나키즘과 전쟁은 모순관계입니다.”
H. E. 카민스키
8월에 부하랄로스의 두루티 지휘소에서 방송된 라디오 방송에서 ‘우리는 승리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두루티의 선언을 CNT와 FAI 선전부는 한동안 선전하였다. 아나키스트 민병대는 군대화에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그들의 반대자들은 군사화에 대한 합리성을 선전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이 위대한 게릴라 투쟁가가 혁명을 전쟁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고 선전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엉터리 그 자체였다. 두루티의 성격과 신념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선전이 억지 주장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가 전선부대에 도입한 혁명적 변혁은 그러한 주장과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호세 페이라츠 1
민병대의 성격은 혁명이 몇 달 지나면서 완전히 변하였다. 민병대는 더 이상 밤사이에 무장한 순수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할 수 없었다. 민병대는 저절로 군사조직으로 변하였다. 민병대가 정규군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1백 인 단위 부대는 중대로, 원정대는 연대로 변했던 것이다. 이전에 불렀던 명칭은 문서상에서일 뿐이었다.
장교들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대표자’로 불리고 있었다. 모든 분대(소대), 1백 인 단위 부대(중대), 대대와 원정대(연대)는 각기 대표자를 선출하였다. 각 대표자들은 아래에서 위로 선출되었다. 하급대표자들이 상급대표자를 뽑았다. 그러나 장교들의 권한은 점차 확대되었다. 그들의 권한이 언제나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선출방식이 차츰 과거의 잔재와 비슷해지면서 선거체제가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군기가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믿었다. 민병대는 이론상 예전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내세웠지만 실제로 자원병이란 허구에 불과했다. 모든 군대에서 행해지는 계급질서가 서서히 형성되어 갔다. 나는 참호 속에서 복무규칙을 읽어보았다. 그 규정은 규칙 위반자에 대한 처벌에 관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원병에게는 어떤 형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물론 민병대는 정부가 일시적으로 다시 효력을 발동시켰던 과거의 군법조문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미 군사재판소가 다시 설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범죄적인 행위는 소대 자체의 대표자들에 의해 처리되었지만 중범에 해당하는 경우 원정대장 앞에서 재판이 행해졌다. 사형 선고까지 내려졌던 것이다. 적의 습격 때 잠을 잔 통신병은 사형에 처해졌다.
탈영병에 대한 처벌규정은 공문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자원병들에게 귀향할 권한을 부여하고자 했던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외국인들에게만 그 선택권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스페인 자원병이 전선을 떠나고 싶어 할 때 민병대는 일차적으로는 그에게 권고하고, 그 후에는 조직위원회에 신고하라고 했다. 그래도 만일 귀향하겠다면 고향에서의 생활을 어렵게 하겠다고 협박까지 하였다. 그래도 막을 수 없을 때는 그들에게 교통수단을 제공하지 않았다.
H. E. 카민스키
시간이 흐르면서 일종의 카탈루냐 군대는 마드리드 중앙정부보다 카탈루냐 평의회에 더 종속되었다. 온갖 규율의 구호는 결국 인민을 기만하는 데 이용되었다. 카탈루냐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다. 아나키스트 민병대를 군사조직화하면 무기를 보내주겠다던 중앙정부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중앙정부는 마침내 이루어진 군사조직화를 이용하여 민병대 군사조직을 억압하는 기구로 변질시켰다. 정부는 목적을 달성한 반면에 아나키스트 단위 부대는 무장 면에서 열악하기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호세 페이라츠 1
종말의 시작
기자 : 민병대에 과거 군대의 계급질서와 같은 복무규칙이 다시 적용될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두루티 : 아닙니다. 과거에는 같은 나이 또래의 청년들을 소집하여 단위 부대의 최고사령부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군기와는 다른 것이죠. 군기에 대해서 말하자면, 가두투쟁에는 군기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장한 대원들이 행하는 지루하고 힘든 원정에는 군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자 : 그렇다면 이제 와서 군기를 강화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두루티 :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엄청난 수의 다양한 단위 부대를 갖고 있었지요. 각 부대는 자체 내에서 부대장을 두었으며, 부대 조직도 매일 엄청나게 변했지요. 각 부대는 자체 장비과와 병참부 그리고 보급계를 두고 있었습니다. 각 부대는 일반 주민을 상대로 자체 내에서 정책을 펴나갔고 전쟁에 대해서도 독자적으로 파악했지요. 그런데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개선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더 나은 개선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기자 : 그렇다면 사병계급과 인사규정, 형벌과 월급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두루티 :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가 아나키스트들이니까요.
기자 : 그러나 최근에 마드리드 정부는 과거의 군법을 다시 시행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두루티 :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정부의 결정은 민병대에 비참한 인상을 심어주었지요. 그런 군법 부활의 발상은 현실을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본 데서 생겨난 거지요. 그런 법조문은 민병대의 정신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양쪽의 정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만은 사실이지요. 그러니 한쪽이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기자 :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군사조직화가 혁명을 위험에 빠뜨릴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두루티 :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속결전으로 이끌어 승리를 거두어야만 합니다.
두루티는 웃으면서 이 말을 하였고 작별인사로 우리와 악수를 하였다.
A. u. D. 프루도메욱스(Prudhommeaux)
내전은 현대의 모든 기술이 동원된 대규모의 전쟁으로 점차 그 양상이 변해 갔다. 그러나 민병대의 병력증강은 항상 인원보충으로만 그쳤다. 그들은 그저 이름난 혁명가들에게만 의존할 따름이었다. 당시 민병대를 제외하고 정규군은 강제로 병력을 동원 · 조직하여 같은 또래의 청년들을 병역의무라는 이름하에 소집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동원령에 의해 소집된 병사들은 민병대의 자원병들과는 현격한 대조를 보였다. 일반 사병들은 정치적 지원을 받고 있던 자원병들에게 부여된 권리와 같은 것을 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군사조직화는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다수의 민병대는 군사조직화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이 단계에서 혁명의 종말이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그들은 러시아 아나키스트 마흐노의 사례를 익히 알고 있었다. 자원병 군대의 지휘자였던 마흐노는 볼셰비키들에 의해 강제 망명을 해야만 했고, 그의 민병대는 해체되었던 것이다. 마흐노가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1934년 파리 망명지에서 죽고 난 후, 러시아 아나키즘은 그 기세가 한풀 꺾였던 것이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도 군대가 새로 조직됨으로써 그와 같은 운명을 걷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신념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지들에 의해 움직이는 소규모의 단위 부대만으로는 현대전을 치를 수 없다는 사실과, 아무리 독립성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부대와의 공동전선을 형성하지 않고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간파했던 것이다.
H. E. 카민스키
인민군과 병사협의회
두루티 원정대 내의 국제적 아나키스트 그룹인 독일 동지들은 민병대의 군대화를 현실적 문제로 거론하였다. 민병대의 군대화에 적용할 기본법을 전선 투쟁가들이 고심하여 완성시켰다. 우리는 거기서 채택한 법안을 과도기적인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임시기간에만 적용하기로 하였다. 지루하게 계속되는 목전의 혼란상태를 매듭짓기 위하여 가능한 한 빨리 새로운 규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다음과 같은 사항이 준수되는 한에서만 인정하기로 하였다.
1. 경례에 관한 규정을 철폐한다.
2. 모든 대원들에게 동일한 봉급을 지급한다.
3. 전선신문에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
4. 자유토론을 보장한다.
5. 대대급의 병사협의회를 구성한다(각 중대마다 대표자 세 명을 둔다).
6. 어떤 대표자도 부대장이 될 수 없다.
7. 중대 대표자들 중 2/3가 제안하면 병사협의회는 전 대대 병사회의를 소집해야 한다.
8. 연대급에서도 병사협의회를 구성하고 협의회 대표자들은 총회를 소집할 수 있다.
9. 대표자는 여단 참모부에 감시단 역할을 한다.
10. 병사대표 조직을 전 군에 편성한다.
11. 참모부에도 대표자들로 구성된 일반 병사협의회가 참여한다.
12. 야전 군사재판은 오직 병사들로만 구성한다. 단 장교가 재판을 받을 경우에만 장교를 배석하게 한다.
이 결정은 1936년 12월 22일에 가결되어 12월 29일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FAI 총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A. u. D. 프루도메욱스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들이 그들의 뜻대로 군사조직화의 형태를 스페인 혁명가들에게 강요하는 일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반대로 우리의 동지들이 군대를 해체시키는 데에 성공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서로가 풀어야할 절박한 숙제였다. 그러나 우리의 과제는 군사적 ‘전선’이나 주요 투쟁노선을 해체하고 사회적 혁명을 스페인 전역으로 확대시킬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파시스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그들은 많은 전쟁물자, 엄격한 군기, 일사불란한 군사조직을 갖고 있으며 주민들에 대한 경찰 테러까지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견고한 전선과 병력이동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진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결전을 강행할 수 있는 중장비도 갖추고 있어서 전술 면에서도 민병대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반면에 인민들에게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은 파쇼의 그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것들이다. 인원의 우위, 정치적으로 이름난 개개 집단들의 적극적 지도와 공격의지, 전국 노동자 대중들의 공감대 형성, 적의 지역에서의 파업과 사보타주 같은 경제투쟁이 전부다. 적들의 군사력을 능가하는 것이라고는 정신적 육체적 힘을 바탕으로 한 기습작전과 같은 게릴라전뿐이다.
그러나 스페인 인민전선 가운데는 전략전투계획이라는 구호 아래 일반 병역의무와 흡사한 군사조직을 갖춘 부대도 있다. 그들은 파시즘 군대와 엇비슷하게 닮아가면서 군국주의를 통해 군국주의와 투쟁하고, 바로 군국주의의 수단을 동원하여 적을 타도한다는 강령을 내세우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정규전에서 볼 수 있는 군사전과 물량전을 전개하였는데,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자신들의 동지들 중에서도 볼셰비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적색군’을 창설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입장에서든 그런 태도는 우리에게 위험한 것으로 비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페인의 직업군인이 아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게릴라전을 펼치는 민병대이다.
스페인 반파시스트
짧은 해설 6
아나키스트들의 패배에 관하여
스페인 공화정은 1931년의 공화국 선포로부터 1939년 3월의 과도기에 이르기까지는 언제나 부르주아지적 국가였다. 마드리드에는 ‘적색’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1936년 7월의 스페인 혁명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철저히 분쇄하지도, 그대로 인수하지도 않았다. 혁명은 우선 국가기구의 기초를 뒤흔든 다음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나갔다. 유일하게 조직화된 혁명의 추동세력은 아나키즘 노동자운동뿐이었다. 내전에서 거둔 초기의 승리는 아나키스트들이 동원한 세력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첫 순간부터 스페인의 자유구역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타협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대립하였다. 한쪽 진영은 혁명적 민주주의세력이 통치하였다. 이들의 정치적 힘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고문단과 위원회가 발휘하였고, 군사적 힘은 민병대에 있었으며, 경제적 생산방식은 농업과 산업에서의 집단생산이었다. 반대 진영에는 구 공화국의 부르주아지 세력이 있었다. 이 세력은 행정부와 정규군을 가지고 있었고, 자본주의적 사유재산과 생산구조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전투를 수행하는 방식도 서로 정반대였기 때문에 노선의 통일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각자는 자기의 방식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전통적 국가기구의 집행자들은 작전 전문가인 장군들을 앞세워 위계질서를 갖춘 군대를 수단으로 하여 재래식 전투를 벌이려고 한 반면에, 7월 19일의 승리자들은 정치적으로 동원한 민병대와 게릴라전으로만 최후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혁명적 인민전쟁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출정상황의 결과는 복수지배체제였다. 이 체제는 1936년 6월부터 그 해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이 체제는 서로 양립할 수 없었다. 그 모순은 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결과는 내전 속에서의 내전이었다. 이 내전은 처음에는 서로의 상반된 감정을 은폐한 냉전의 방식으로 진행되다가 마침내 노골적인 싸움의 양태로 변하였다. 이 싸움에는 다음과 같은 세력들이 대립된 진영을 이루었다. 한쪽 진영은 공산주의에서 이탈한 좌파그룹들로 구성된 통합마르크스주의노동당(POUM : Partido Obero de Unificación Marxista)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CNT-FAI 동맹단이었고, 다른 한쪽 진영에는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끌었던 공화국의 시민 당파들과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대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스페인 공산당이 있었다. 스페인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을 우파의 입장에서 극복하여 보통 시민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획득한 당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선전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로부터 하달된 지령만을 따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때 스페인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CNT-FAI의 지도부는 이러한 1936년 가을의 상황헤서 어떤 방법으로도 성장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파쇼의 공격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진영 내부의 반혁명세력에 의해 고립되었기 때문에 아나키즘 강령의 소박한 전통적 원칙을 수정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지도부는 이런 현실 앞에서 한 걸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정치적 매개물, 즉 원칙 고수와 전술적 유연성 사이의 중개물을 무조건 무시한 것은 그들이 범해 온 해묵은 오류였다. 그것은 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혁명으로 바로 통하는 ‘올바른 좁은 길’을 벗어나기만 하면 더 이상 붙잡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CNT-FAI는 내부에 정적을 둔 것이 패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원칙 고수는 무한한 반대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대중운동의 혁명적 주체들이 아나키즘의 지도부로부터 빠져나갔다. 급속도로 와해되는 이 과정의 몇몇 단계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936년 9월 8일 : CNT의 대표 후안 로페스(Juán López)가 발렌시아에서 아나키스트들의 협력활동과 정부의 프로그램에 대한 이들의 지원상황을 마드리드 중앙정부에 보고하다.
1936년 9월 26일 : CNT, 카탈루냐 지방정부에서 중요하지 않은 세 개의 장관직을 접수하다.
1936년 10월 1일 : CNT, 민병대 중앙위원회의 해체에 동의하다.
1936년 10월 9일 : 지령에 의해 모든 지역 고문단과 위원회가 카탈루냐에서 해체되다. CNT, 이 조치에 동의한다고 선언하다.
1936년 12월 초 : 마드리드에서 CNT 대원들과 통일공산당 사이에 무력충돌 발생하다.
1936년 12월 4일 : CNT, 마드리드 중앙정부에 관여하다. 아나키스트들, 서열 2위의 고위 장관직을 맡다(사법부와 보건부, 상공부).
1936년 12월 15일 : 최고안보위가 정치경찰을 집중 배치하다.
1936년 12월 17일 : 모스크바 「프라우다」지가 사설을 게재하다―“이미 카탈루냐에서는 트로츠키파들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를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이 숙청은 소비에트연방에서 실행된 것과 같은 수준에서 이행될 것이다.”
1936년 12월 24일 : 마드리드에서 무기소직가 금지되다.
1936년 12월 말 : 공산당이 POUM(통합마르크스주의노동당)에 대하여 공격의 포문을 열기 시작하다.
1937년 2, 3월 : CNT-FAI의 지도부와 조직원 사이에 심대한 의견대립이 발생하다. 아나키즘 운동권 내부의 혁명적 야당파가 CNT 내에 ‘두루티의 동지들’이라는 자체 투쟁단을 조직하다.
1937년 4월 말,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을 무장 해제시켜 경찰의 권력독점을 회복하려는 정부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로써 CNT-FAI가 연출한 드라마의 마지막 장, ‘피의 5월의 바르셀로나’가 시작된다. 최초의 유혈전투가 벌어진다. 노동자와 경찰은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려고 한다. 5월 3일, 공공연한 가두투쟁이 전개된다. 무장한 공산당원들이 전화국을 습격하여 CNT가 이를 접수한다. 이어서 어떤 지령도 기다리지 않고 바르셀로나 전 지역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한다. 노동자들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거점들을 장악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한다. CNT의 지도부는 시 전체를 수중에 넣는다. 중앙정부는 5천 명의 기동경찰대를 급파한다. 5월 7일, 기동경찰대가 바르셀로나에 진입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스페인 노동계급의 혁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 혁명운동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 혁명운동에서 사망한 노동자는 5백 명이 넘었다. CNT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적의 공격을 기다리다가 거기에 적절한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가르시아 올리베르)
이 투쟁의 실패로 스페인 아나키즘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CNT는 음지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면서 스페인 혁명의 마지막 잔류자들이 제거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FAI는 5월이 되어서야 불법단체로 규정되었다. 공산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던 우리베(Uribe) 장관은 POUM에 금지령을 내려 마드리드 정부의 위기를 해결하였다. 라르고 카바예로가 공산주의자들에게 극좌파로 보였기 때문에 퇴진되었다. 그의 자리를 네그린(Negrín)이 대신했다. 그런데 네그린은 어떤 집단화에도 단호히 반대하는 인물이었으며, 사유재산 보유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1937년 6월에 POUM의 수뇌부가 체포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마녀사냥은 트로츠키파의 지도자인 앙드레 닌(Andrés Nin)이 소비에트연방 내무 인민위원회의 첩보원에 의해 암살되었을 때 절정에 달했다. 정부는 8월에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금지시켰다. 공산당이 모든 요직을 차지한 새로운 부처인 국가안전기획부(SIM)는 자체 내에 형무소와 집단수용소를 설치하였다. 곧 이 수용소에는 아나키스트들과 ‘극좌파들’로 가득 채워졌다. 같은 달 8월에 중앙정부는 아라곤 방어위원회의 해체를 명령하였다. 아라곤 방어위원회는 스페인에 남아있던 최후의 혁명적 무력기구였다. 위원회의 의장인 호아킨 아스카소(Joaquín Ascaso)가 체포되었다. 공산당 제2연대는 아라곤 마을위원회를 공격하여 농업의 집단생산제를 해체하였다. 1937년 9월에 CNT-FAI 방어위원회의 건물이 대포와 장갑차를 동원한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점령당했다.
1938년, 대지주들이 귀향하여 토지의 반환을 청구하였다. 집단농장은 후퇴하였고 카탈루냐 공장 내에서의 노동자들의 조정자 역할도 중지되었다. 기업 경영자들과 감독 직원들이 그들의 옛 자리를 다시 차지하였다. 외국 투자가들에게는 새로운 배당금이 지불되었다. 일반 사병의 급료는 10페세타에서 7페세타로 줄었지만 장교들의 봉급은 25페세타에서 100페세타로 올랐다. 견장의 착용과 경례의 의무, 기합과 같은 옛 관습이 다시 부활하였다. 하극상에는 사형 언도가 내려졌다. POUM과 CNT-FAI의 전투대원들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혁명은 일소되어 부르주아지 국가권력이 회복되었다. 혁명의 내전은 패배로 끝났다. 1939년 3월 말에 스페인 공화정 정부의 인사들은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이제 우리가 고찰한 바의 전체적 결과는 무엇인가?
바쿠닌주의자들은 심각한 혁명의 상황에 직면하자마자 지금까지의 강령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들은 정치참여의 거부, 특히 선거참여의 거부라는 의무의 교시를 희생시켰다. 그 다음 그들은 국가의 폐기라는 아나키즘의 원칙을 따른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여러 자치 국가들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그들은 즉각적이고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을 목표로 하지 않는 혁명에는 노동자들이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강령을 저버리고 명백히 순수한 시민운동에 참여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혁명정부의 건설을 또 다른 기만이며, 노동계급에 대한 새로운 배신행위일 뿐이라는, 그들이 최초로 공언한 신조를 위반하였다. 그들은 몇몇 도시의 정부위원회에 느긋하게 입각하였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다수의 부르주아지에게 밀려나 정치적으로 배제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소수파에 머물고 말았다.
바쿠닌주의자들이 부르짖던 극단적 혁명의 구호가 나오자마자, 그들은 진압당하거나 애초부터 전망이 없는 봉기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혹은 뻔뻔스럽게도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착취하였고, 심지어 군홧발로 짓밟게 했던 부르주아지 당과 손을 잡기도 하였다.“
1873년에 내려진 이 판결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부터 기원한다. 이것은 곧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엥겔스가 말하는 ‘부르주아지 당’이 바로 스페인 내전에서 공산당이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반어적 표현의 본래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마드리드 방어전선
수도 방문
1936년 가을에 나는 「노동자연대」의 마드리드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9월 중순경에 두루티가 내전중 처음으로 마드리드를 방문하였다. 나의 형 에두아르도가 그와 동행하였다. 그들은 도착한 바로 그날 저녁에 알칼라Alcalá 거리에 있는 신문사 사무실을 찾아 나를 방문했다.
두루티는 전형적인 가죽 모자를 쓰고, 역시 가죽으로 만든 탄띠가 달린 조끼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나는 그 유명했던 아나키스트 ‘고릴라’를 그때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다. 그는 키가 크고 건장했다. 머리카락은 검은 색이었다. 그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되었고 예리했다. 태도는 완고하고 당당하였다. 그렇게 강인한 외모와는 달리 행동에는 다소 천진난만한 끼가 있었다. 그의 몸동작은 더딘 듯했지만 힘이 있었다. 피부는 햇빛에 그을려 있었다. 손은 크고 억셌다. 입가에는 언제나 정감이 가는 온화한 웃음이 맴돌았다. 나는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단순한 자연스러움 때문에 첫눈에 그에게 매혹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머리카락은 곱슬이었고 새까맸다. 입 모양은 컸고 입술은 두터웠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표정은 조용하고 밝아 매우 인상적이었다. 걸음걸이는 느리다 못해 마치 꼿꼿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카스티야 고지 지방의 전형적 후손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아리엘(Ariel)
마드리드 사람이면 누구라도 자신이 인터뷰하는 장면이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리는 것을 원했다. 신문에 얼굴이 실리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두루티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연극적인 행동을 몹시 싫어했다. 마드리드에서도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솔직하게 행동하였다.
“이 모자와 가죽조끼를……” 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나의 모든 대원들을 위해 만들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옷을 입을 것입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을 때 우리는 형제같이 될 것입니다.”
그가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을 때 그의 크고 하얀 이가 마치 길들여진 늑대의 이처럼 드러났다.
“나는 아라곤 전선의 동지들에게 무기를 마련해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무기를 정부가 제공한다면 우리는 이삼 일 내로 사라고사를 장악할 것입니다.
여기는 무기가 없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나는 우리가 원하는 정도의 무기를 제공할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대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금을 금으로 지불받기를 원하고 있죠. 그런 부르주아지들은 돈이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적 활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금을 쌓아놓고 있지요. 도대체 금이란 게 왜 필요한 겁니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구요? 그 사람들은 늘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내일 국무상에 들어가 협상을 벌일 작정입니다. 그들이 무기의 구입비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다면 우리는 어디서 그것들을 확보할 수 있는지 그들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스페인 은행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금은 도대체 어디에 쓸 것인지 물을 겁니다.“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그란Gran 가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 레스토랑은 식당 노조가 운영을 맡고 있었다. 간단한 식사를 하였다. 두루티가 바르셀로나와 아라곤 전선의 투쟁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듯이 여러 번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국무성으로 갔다. 거기서 두루티는 라르고 카바예로와 회담하였다. 그 후 그는 해군성의 안달레시오 프레에토를 방문했다. 당시 정부는 러시아의 원조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그 무렵만 해도 ‘스페인의 레닌’으로 통하고 있었다. 두루티는 협상에서 기만을 당했던 셈이다.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그에게 약속을 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이 무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온갖 이유를 들먹였다. 그러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약속이 빈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아리엘
한 번은 이 일화에 책임이 있는 라르고 카바예로가 자신의 새 내각의 한 장관직에 두루티를 임명하기 위해 그에게 마드리드로 오라는 전화를 걸었다. 이미 그의 내각에는 아나키스트들도 입각해 있었다. 두루티는 카바예로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카바예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두루티에게 그와의 회담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물었을 때 두루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40대 중년의 인물을 만나겠거니 생각했지요. 그런데 내 앞에 불쑥 나타난 사람은 늙은이였죠. 나는 그가 평범한 보통의 정치가겠지라고 늘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그가 얼마나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었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두루티는 장관직을 거절하였다. 그는 최전선에 남아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실 그는 전선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그의 원정대는 그의 명령이라면 맹목적으로 따를 만큼 광신적이었다.
어느 마을의 안토니오
모두가 한결같이 우리는 전쟁을 치를 능력도 공격할 힘도 없을뿐더러 우리 자신마저 방어할 기력도 없다고 말하던 그 순간에, 패배는 말할 것도 없고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바로 그 순간에 부에나벤투라 두루티가 마드리드로 왔다. 막강한 그의 원정대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원정대는 싸움에서 한 번도 후퇴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아라곤 지역의 1백 평방킬로미터 이상을 점령하였던 부대였다. 그들은 우리 마드리드의 부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두루티는 당시에 공식적으로 토론할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해서 그때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그는 사라고사를 계획대로 공격하려면 2백만 발의 실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우리 편집장에게 협상안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지금도 그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것이다. 회담이 끝난 후 두루티는 자신의 전략적 구상과 민병대의 혁명적 특성 그리고 군기문제에 대한 중요한 생각을 인터뷰에서 밝혔다.
두루티 : 적들의 활동과 그 의도에 대해서는 약간의 상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겁니다. 적은 마드리드 점령에 한판의 승부를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들은 수도를 정복하겠다는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드리드를 공격하려는 적의 전투력은 우리 방어선 때문에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이 불확실한 공격을 감행하려면 적은 다른 전선에 있는 보충병을 투입할 수밖에 없지요. 그때 우리가 적이 철수한 지역을 공격하면 마드리드 방어를 간접 지원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적을 제압하고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아주 분명한 사실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도시는 말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요새화함으로써 지켜진다는 점입니다. 곡괭이와 삽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무기인 것입니다. 마드리드에는 빈둥거리며 지내는 사람이 수없이 많아요. 그들을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힘이라도 헛되이 허비해서는 안 될 일이죠. 아라곤의 막강한 우리 대원들은 단 한 평의 땅도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호를 팠던 것입니다. 우리 민병대는 후퇴를 적의 공격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것은 진지를 사수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기 보호충동이 패배를 자초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죠. 이 강한 충동을 유용하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민병대는 이 충동을 저항력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우리가 저항력을 기르려면 진지구축을 면밀히 검토해야 하죠. 그래서 나는 이곳 중부전선에서도 경계철조망과 옹벽을 설치하여 안전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드리드를 요새화하여 방어전투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면 적은 여기에 총 전투력을 쏟을 것이고, 이때 우리는 다른 전선에서 승리를 이끌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기자 : 당신의 원정대에 관해서 이야기 좀 하시죠?
두루티 : 나는 우리 원정대에 만족합니다. 대원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때가 오면 그들은 전투를 훌륭하게 치를 것입니다. 이 말은 민병대가 단순히 전쟁의 도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니고 말구요.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그들에게 투쟁을 선동하는 맹세 같은 것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농지를 얻고 공장과 교통수단, 빵과 새로운 문화를 쟁취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그들의 미래는 우리의 승리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혁명을 실천하고 있는 겁니다. 내 생각입니다만, 이것은 바로 우리의 상황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모든 인민들과 관계있는 이 혁명적 실천은 바르셀로나와 같은 후방뿐만 아니라 최전선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점령한 마을마다에서 일상생활의 변혁이 즉시 일어났죠.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출정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열정이 필요했어요. 나는 혼자 있을 때면 늘 우리가 계획하여 실천한 일이 얼마나 힘이 있었던가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물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 것인지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군대처럼 쉽게 물러설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원정대가 패배하면 혁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겁니다. 우리는 야영지 주변의 주민들도 예외 없이 투쟁에 동참시켰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초기지에서 저 멀리 후방의 바르셀로나까지 동지가 생긴 것입니다. 모두가 전쟁과 혁명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강점이지요.
기자 : 우리가 전에 한 번 논의한 적이 있었던 군기문제로 대화의 주제를 바꿔보겠습니다.
두루티 : 좋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지만 극소수만이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어요. 군기를 지킨다는 것,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자기 자신의 책임과 다른 사람의 책임을 동시에 완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나는 어떤 영내 군기에도 반대합니다. 그것은 야만화되어 증오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 기능 작용밖에 하지 않아요. 잘못 이해하고 있는 자유에 대해 얘길 좀 해야겠군요. 겁쟁이들이 자유 운운하지만 그건 생명을 경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CNT 내에서는 군기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아나키스트들은 신뢰감이 가는 동지들의 결정에 대해서 존경심을 갖고 있어요. 투쟁기간에는 선출된 대표자의 말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작전이라도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대원들이 동의하지 않을 때는 회의를 소집하여 그 대표자의 직위를 해제하고 새로운 대표자를 뽑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민병대 가운데 투쟁 때 잔꾀를 부려 피신처를 찾는 대원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원정대의 입을 통해 들어 잘 알고 있어요. 그들은 어머니가 사망했다,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가 있다, 어린 자식이 열병을 앓고 있다, ……등등의 온갖 핑계를 대지요. 그러나 내게는 그런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약이라고는 고작 가정용 구급약뿐이죠. 잔꾀를 부리는 놈들 때문에 불필요한 일을 며칠씩이나 해야 한다는 걸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사기를 저하시키는 그런 탄원서들은 쓰레기통에 처박아야죠! 물론 자원병으로 왔기 때문에 집으로 보내달라는 사람을 강제로 붙잡아둘 수는 없습니다. 우선 설득을 해봅니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분명히 말하지요. 우리가 그들을 믿어왔는데, 지금 우리를 교묘히 속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떠나겠다면 원정대의 재산인 무기를 압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죠. 그래도 그들이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할 수 없이 돌려보내야죠. 그러나 걸어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동차는 투쟁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니까요. 민병대원들은 자존심이 강했기 때문에 그런 상태까지 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죠. 그들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는 놀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며, 내가 원정대의 지휘자이고 이미 우리 대원들은 주요 투쟁전선에 투입되어 영웅처럼 투쟁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동지들에게 만족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나에게 만족하길 바랄 뿐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그들의 아내나 애인은 전선에서 이틀 동안 면회할 수 있습니다. 면회 후 친지들만 고향으로 돌아가죠. 우리는 매일 신문을 구독합니다. 보급품도 매우 좋습니다. 우리에게는 원하는 만큼의 책도 있어요. 전선이 조용할 때는 동지들의 혁명정신을 부단히 새롭게 각성시키기 위해서 토론도 벌입니다. 한가할 때가 없죠. 언제나 할 일이 있는 거지요. 특히 진지를 보강하는 것이 늘 해야 하는 일거리죠. 지금 몇 시나 되었죠? 새벽 한 시! 이 시간이면 아라곤 전선의 내 동지들은 호를 파는 시간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투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7
전에 우리는 함께 비행기를 타고 마드리드로 간 적이 있었다. 내가 왜 앙드레 말로우(André Malraux)의 비행기를 타고 갔는지 모르겠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비행기는 호두껍데기 만큼이나 작았다. 비행기가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흔들렸다. 마드리드에서 우리는 경찰서를 지나게 되었다. 두루티는 거기에 들러 장난삼아 예전의 행적이 담긴 그의 서류들을 좀 보자고 했다. 스페인 경찰은 나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는 친절마저 보였다. 그들은 파리에서 가져온 내 서류까지 꺼내놓을 정도였다. 우리는 그것이 아주 재미있었다.
에밀리엔느 모린
파병
두루티가 그의 원정대와 함께 마드리드로 파병될 것이라는 나의 막연한 추측이 사실로 나타났다고 이제 말할 수 있다. CNT 민족위원회는 이미 그 계획을 알고 있었다. 민족위원회의 총무였던 마리아노 바스케스(Mariano R. Vázquez)가 두루티에게 말했다. “마드리드가 자네를 필요로 하는 때가 온 것 같네. 제5연대가 그곳에서 첫 전투를 개시하였네. 곧 국제여단도 도착할 것이라고 하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네가 자네의 힘과 대원들의 전투력을 발휘해 줘야겠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정치적으로 뒤로 밀려날 걸세.”
페데리카 몬트세니 1
나는 두루티를 마드리드로 파병하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하였다. 자동차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가던 도중에 이 문제를 두고 페데리카 몬트세니와 논의하였다. 그를 마드리드로 보내는 것은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혁명보다 그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는 그의 모험심과 용기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소수의 원정대만으로 그를 수도 마드리드에 파병하는 것이 내게는 무모한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그의 지휘 아래 5만 명의 민병대 원정군을 파병할 수 있다면 사정은 좀 달라지겠지만,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2
두루티가 마드리드로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라곤 전선의 모든 지휘자들이 논의한 끝에, 포위된 수도를 지원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다른 부대원들도 합병된 원정대를 두루티의 지휘 아래 마드리드로 파병하기로 결정되었다.
두루티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라고사에 대하여 결정적인 공격을 감행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런 공격을 하기에는 실탄과 무기가 부족하였다. 결국 마드리드 원정대 파병이 단행되었다. 파병에 6천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화포도 몇 대 지원되었다. 그것으로 두루티는 만족해야 했다. 사회민주당원들은 그의 지휘 아래 투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 1
마드리드의 미아하(Miaja) 장군이 두루티 원정대를 겁쟁이들이라고 부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가 실제로 그랬고, 그리고 투루티의 대원들이 마드리드에서 약한 투쟁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알아두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곳에 파병된 대원들 대부분이 전선 투쟁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글거리는 마녀의 솥에 들어간 것이었다.
두루티의 파병대의 구성원 대부분은 아라곤 전선의 두루티 원정대에서 차출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두루티가 마드리드로 인솔해 간 대원들은 아나키즘 조직들이 바르셀로나에서 단기간에 모집하여 편성한 자원병들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두루티가 아라곤에서 그의 대원들과 보낸 마지막 저녁을 기억하고 있다. 저녁식사 후에 그는 자신의 출발하게 된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대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누가 함께 갈 것인가?”
나 자신은 애초부터 그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두루티는 그가 신뢰하고 있던 대원들 중에 불과 서너 명만 호위병으로서, 그리고 마드리드로 데려갈 보충병들의 인솔자로서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헤수스 아르날 페나 2
당시 내게는 결혼할 딸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달로나에 있는 집으로 갔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하루 휴가를 얻었던 것이다. 그때는 교회 신부가 필요 없었다. 우리가 직접 모든 서류를 작성하였는데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조촐한 연회를 마련하였다. 내가 축사를 해야만 했다.
“나는 여러분이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인민이 권력을 잡았으니 지금 이 순간처럼 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계속 축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동지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리온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자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네.” “자네들도 봐서 알겠지만, 지금은 내 딸애의 결혼식 중이라네.” “바르셀로나에서 두루티가 전화를 했는데, 자네가 필요하대. 파병대가 바로 오늘 마드리드로 출정한다네.” “뭐, 마드리드라고? 난 금시초문인데.” 결혼식을 이럭저럭 끝낸 나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권총을 들고 그들이 타고 온 승용차로 그곳을 떠났다.
리카르도 리온다 카스트로
마드리드로 출발하기 전에 두루티가 파병대원들에게 말했다. “마드리드의 상황이 암담합니다. 거의 절망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출정합시다. 우리에게 남은 일이라고는 마드리드에서 죽는 것뿐입니다.”
라몬 가르시아 로페스
우리는 무시무시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비에트연방의 무기 원조에 힘입어 대단한 힘을 발휘하였다. 우리는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 한때 당했던 것과 유사한 운명이 우리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에게도 닥치지나 않을까 항상 염려했었다. 그런 걱정 때문에 두루티는 모든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어디에서든지 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파시스트들과의 모든 조약을 저지해야만 했다. (공화파들은 혁명 초기부터 줄곧 평화협상을 시도하려고 했다.)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우리가 없었더라면 전쟁을 3년도 채 끌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루티와 그의 파병대의 도착은 마드리드 방어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원정대가 시가지 행진을 했을 때 흥분했다. 두루티가 온다, 두루티가 와!
페데리카 몬트세니 1
위험
두루티가 도착하자마자 그곳 투쟁사령부는 미아하 장군과 그의 참모장 비센테 로하스(Vicente Rojas) 대령에게 연락하여 파병대의 도착을 알렸다.
바로 그날 두루티는 도시 중앙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있던 방어전선을 순찰하였다. 그는 방어진영의 상태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지휘자의 입장에서 국방 책임자인 라르고 카바예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이 전혀 가망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아직 마드리드가 파시스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지 않은 것은 그들이 단지 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이곳 도시는 적들의 공격에 무방비상태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군요. 여러 각개 지역에서는 용감하게 싸우고 있지만, 주요 거점에서는 적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적이 특히 대학가와 천사의 언덕, 카라반첼 거리 등, 모든 곳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군요.”
국방장관은 두루티에게 정부의 입장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전권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새 국제여단이 진군 중이며, 비행기와 장갑차로 방어군을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리카르도 산스 4
나는 정부의 책임자인 동지 라르고 카바예로에게 두루티를 장군에 임명하여 수도 방위를 그에게 맡길 것을 제안했다. 나는 사람들이 미아하 장군을 비난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어쨌든 마드리드의 운명은 반파시스트 운동가들과 혁명의 손에 맡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두루티가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리라고 확신했다.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2
공화국 정부가 11월 6일, 포위된 수도를 포기하고 발렌시아로 피난했을 때 공화국 정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각의 수장이었던 라르고 카바예로의 잉크에서 그렇게 쉽게 흘러나왔던 그 영웅주의적 선언이 이런 식으로 귀결되고 보니 주민들 사이에서 사퇴라는 말이 심상찮게 나왔던 것이다.
만일 아나키스트들이 그것을 원했더라면, 결국 중앙정부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마드리드 코뮌이 선포되는 순간이 도래했을 것이다. 이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아닌지는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그렇게 하는 것이 노동자 대중들과 전선 투쟁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러시아는 물론이고 러시아의 조종을 받았던 단체들로부터 적개심을 샀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부가 임시청사를 발렌시아로 옮겨간 후, 코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마드리드에 도래하였다. 통일과 군기라는 용어 대신에 돌격, 책임의식, 열정과 같은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웅주의적인 말들을 믿지 않고, 모범을 보이는 설득력에 더 동조하였다. 사람들은 이제 방어를 위해서는 실제적인 작업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관들이 없는 것이 오히려 투쟁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비쳤다.
A. u. D. 프루도메욱스
마드리드에 도착하자마자 두루티는 모든 기회주의자들과 말만 떠벌리는 사이비 혁명가들을 노골적으로 신랄하게 비난하는 라디오 연설을 하였다. 그는 마드리드의 모든 주민들에게 무기와 삽을 나눠주고는 호를 파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일에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밤사이에 그는 주민들에게 코뮌이니 정부니 하는 말만 앞세우는 일을 하지 않게 하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통쾌한 흥분이 도시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사실 정부는 방어능력이 없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거나 시민 방어조직을 구성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그런 조치를 취함으로써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릴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두루티와 CNT 방어위원회는 마드리드의 시민들을 책임감 있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마드리드의 급진적인 노동계급이 속해 있던 CNT가 시민 방어여단을 편성하였던 것이다.
A. u. D. 프루도메욱스
병사들이 정부정책을 의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은 맥 빠진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카바예로나 네그린 그리고 마르티네스 바리오를 위해서 투쟁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뿐더러 그들로 구성된 정부를 위해서도 싸울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자원병으로 지원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앙드레 마르티(André Marty)는 아나키스트 국제여단 막사 앞에 중무장을 하고 보초를 서게 되었다. 그는 두루티가 1만여 명의 아나키스트 파병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이동하던 것을 알바세트에서 목격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드러난 사실에 의하면, 파병대는 3천 명에 불과했다. 파병대는 우리 국제여단에 대해 전혀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용감무쌍한 듯했지만 사실은 어느 누구의 털끝도 하나 건드릴 용기가 없었다. 공산주의자 마르티는 병적일 만큼 그들을 불신했다.
루이스 피셔(Louis Fischer)
파쇼 일당들이 마드리드에 접근했을 때 두루티는 5천 명으로 구성된 막강한 단일 부대로 급히 대응하였다. 그는 마드리드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면 통일적인 중앙명령기국에 조건 없이 따르겠다고 이미 선언한 상태였다. 두루티는 스페인 혁명투쟁에서 교훈을 얻어 점차 공산당 노선을 밟아가고 있었다. 그는 소비에트 언론의 한 대표자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 나 스스로는 볼셰비키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스탈린의 초상화를 내 지휘소 안에 걸어놓을 각오까지 서 있습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연방에 보낸 두루티의 서한은 막강한 조직으로 구성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열렬한 지지와 깊은 신뢰를 받았다.
국제공산당
파병대는 세 대의 임시열차와 긴 행렬의 파병 트럭을 타고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그라나다 막사에서 숙영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자원병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새로 구입한, 화력이 좋은 윈체스터 소총으로 무장하였다. 그러나 탄창이 없어서 다루기가 불편했다.
리카르도 산스 3
회의
11월 13일 오후 늦은 시간에 두루티 파병대가 마드리드에 진입하였다. 파병대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대원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그들은 숙영지를 그라나다 거리에 정하고 야간 차량행군으로 지친 피로를 풀어야 했다.
병사들이 숙영지를 정하자마자 적들이 대학가의 건물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별 저항도 받지 않고 교도소와 몬클로아Moncloa 광장으로 계속 진입할 것 같은 낌새가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미아하 장군은 두루티에게 사령부로 와달라는 전화를 걸었다. 장군은 피로에 지친 원정대의 상태를 전혀 생각지 않고, 당장 원정대를 전선에 투입할 것을 두루티에게 요청하였다. 두루티는 파병대의 조직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답변하였다. 그는 장군에게 성급한 출동이 야기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아하 장군도 두루티의 거절에 대해서 이해는 했지만 달리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참모장은 장군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는 원정대가 파시스트들의 결정적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서 비록 미명의 새벽이지만 전선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루티는 논쟁을 중지하고 그라나다 거리에 있는 막사로 차를 몰고 가서 대원들을 집합시켜 상황을 설명했다. 원정대는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전선으로 즉각 출동했던 것이다.
리카르도 산스 4
1936년 11월 14일, 두루티를 선두로 하여 카탈루냐에서 파병대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3천 명의 남자 대원들로서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하랄로스의 환상적인 두루티 원정대와는 외관상 보더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곧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보다시피 나는 사라고사를 장악하지 못하였고, 적들도 나를 살해하지 못하였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네. 모든 가능성은 아직도 열려 있겠지.”
그는 수척하였다. 그는 군인의 태도를 취하였고 외모는 완전한 투쟁가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의 부관에게 회의석상에서의 말투가 아니라 완전히 사령관의 목소리로 이야기하였다.
두루티는 나에게 전투고문장교를 한 명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에게 산티(Santi)를 추천했다. 그는 산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받아들였다. 산티는 두루티 부대에 들어간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던 셈이다. 산티가 왔을 때 두루티가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공산주의자이지. 좋아, 우리 잘 지내보자구. 자네는 항상 내 곁에 있을 것이네. 우리는 함께 먹고 잠도 한 방에서 잘 것이네. 잘 지내보자구.”
산티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자유시간은 가질 수 있겠지요? 전쟁 중에도 자유시간은 자주 있게 마련이거든요. 내가 그런 자유시간을 가지는 건 말리지 않길 바랍니다.”
“도대체 그 자유시간에 뭘 하려고 그러는 겐가?”
“자유시간에 간부님의 병사들에게 기관총 사격법을 가르칠 예정입니다. 총 솜씨가 너무 엉망이더군요. 나는 몇몇 분대를 교육시켜 기관총 소대를 편성하고 싶습니다.”
두루티가 웃었다. “나도 그걸 배우고 싶네. 나한테도 기관총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게.”
바로 그때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마드리드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제 법무장관이 되어 있었다. 두루티와 올리베르, 이 두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은 미아하와 로호(Rojo)와 회담하였다. 그들의 아나키스트 부대는 마드리드를 구하기 위해 카탈루냐에서 왔으며, 아마 마드리드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마드리드를 구하고 나면 그곳에 남는 것이 아니라 카탈루냐로 돌아가서 사라고사 장벽을 향해 진군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아나키스트들이 어떤 일을 해내는지 보고 싶다면 두루티의 파병대에게 특수임무를 맡기라고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가 생겨날 여지가 있고, 다른 당들이 그 책임을 아나키스트들에게 돌릴 수 있는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호는 야영지에 있는 부대를 그냥 그대로 두자고 제안했다. 그 부대가 새벽에 파시스트들을 공격하여 남서쪽에 위치한 병기고에서 그들을 내몰게 하자는 것이었다. 두루티와 올리베르가 동의하였다. 그런 동의가 있고 난 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파병대가 임무를 훌륭히 해내리라고 확신했다.
미하일 콜코프
11월 15일에 나는 마드리드에 있었다. 나는 전투사령관직을 맡고 있던 고리예프(Goriev)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국방성을 찾아갔다. 어떻게 하면 장군을 만날 수 있는지 당직 장교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자기를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물어보았다. “러시아 장군을 보았습니까? 러시아 장군이 어디에 있나요?” 고리예프 장군이 있는 곳은 철저히 비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은 비밀을 싫어했다.
저녁 늦게까지 나는 고리예프의 사령부에 앉아있었다. 장군은 당일 전선 상황의 마지막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루티와 그의 파병대는 이미 출동하였다. 장군은 코카서스 혈통인 키가 큰 한 적색군 장교를 부관으로 동행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마드리드 중심부로 통하는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가르비타 언덕에 있는 진지를 사수하였다. 고리예프 장군은 그들이 새로 들어온 부대였지만 중요한 지점을 맡겼던 것이다.
자정이 막 지난 후에 그 코카서스 출신의 사람이 들어와서 아나키스트들이 겁을 먹고 소규모의 모로코 부대를 피해 퇴각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대학가는 프랑코의 공격에 무방비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두루티는 파병대에게 투쟁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사건으로 그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나는 저녁에 그란비아 호텔에서 그를 자주 만났다. 그의 경호원들이 연발권총의 방아쇠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대기하면서 그의 신변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
루이스 피셔
두루티 파병대는 마드리드를 구하겠다는 약간 지나친 과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그 일을 신속히 해치우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빨리 아라곤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적이 맹공을 퍼부을 것이 예상되는 바로 그 전선을 맡겠다고 자청했던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적을 격퇴시키고 싶어 했다. 그들에게 카사 구역이 방어 작전 지역으로 주어졌다.
나는 11월 18일인가 19일에 두루티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마드리드 전선의 몇몇 부대장들이 참석한 상황회의에 참석차 미아하 장군의 참모실에서 서로 만났다. 이 회의에서 두루티는 자신의 부대를 교체시켜 아라곤으로 돌려보내고 싶다고 주장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장교들은 충동한지 채 사흘도 되지 않은 부대를 교체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전선에서는 절대다수의 병사들이 전쟁 초기부터 단 하루의 휴가도 얻지 못하였고, 또한 요구하지도 않고 투쟁하여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루티가 주장하는 대로 파병대를 철수시키기로 동의했다. 우리는 그들이 마드리드에 도착하기 전에도 마드리드를 지켰듯이, 앞으로도 그들 없이 마드리드를 꼭 방어할 것이었다.
두루티는 끊임없이 자신의 아라곤 전선의 단위 부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군기와 명령권의 성격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는 자신이 주장한 그 이념에 희생된 용감한 투쟁가, 강하고도 선량한 그 사람의 비참한 심경을 이해하였다. 그는 마드리드를 계속 방어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며, 그 사실을 자신의 대원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우리는 공동회의를 마치고 우의를 다지면서 헤어졌다. 각자 자기 부대로 돌아갔다.
엔리케 리스테르(Enrique Lister)
악랄한 야만인들
물론 우리도 마드리드로 갔다. 그 거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던가? 한 얼간이 같은 이가 네다섯 명에게 우향우, 좌향좌 하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우리는 참을 수가 없어서 당장 한마디 했다. “잘들 노는구만, 여기서 연습하지 말고 당장 전선으로 가!” 물론 우리는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겁을 내면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정부조차도. “저치들은 물불 가리지 않는 무서운 패거리야!”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떠들어댔다. 한 번은 우리가 지휘소 본부를 나왔을 때의 일이었다. “자, 식전이니까 요기부터 좀 하자구.” “어디 가서 먹는단 말인가?” “저기 위쪽 통신소에는 갓 잡아온 바닷가재가 있대.” “뭐라구요, 바닷가재를요?” 식당 주인이 소리쳤다. “대체 어디서들 오셨소?” “우린 두루티의 파병대에서 왔소!” 그러자 주인은 당장 바닷가재를 내놓았다. 식당에서 나왔을 때 거리에서 부상을 입은 한 여자를 보았다. 어느 창문에서 누군가가 사격을 했던 것이다. 다른 한 여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저기 위에 저격병이 숨어 있어요, 파시스트에요.” 우리는 당장 계단 위로 올라가 한 녀석을 붙잡아 창밖으로 집어던졌다. 정부는 “그들은 가장 악랄한 야만인들이다!”하고 비방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의 비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활동했다.
리카르도 리온다 카스트로
마드리드에서 두루티 파병대는 소위 FAI 폭탄을 즐겨 사용했다. 그것은 무게가 일 킬로그램 정도 나갔으며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무서운 수류탄이었다. 그 수류탄은 가두투쟁에 적격이었다. 개활지 전투에서는 별 쓸모가 없었다. 너무 무거워서 원거리 투척이 불가능했다.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부분 공중에서 터졌다. 그러나 지붕 테라스나 발코니에서 투척할 때는 아주 좋았다. 파괴력이 좋았기 때문에 마드리드에서는 적의 탱크를 공격할 때도 사용되었다. 두루티는 ‘미구엘(미카엘) 천사’ 거리에 위치한 지휘소와 저택 차고에다 3만5천 발의 FAI 폭탄 상자를 피라미드처럼 쌓아놓았다. 이 무기고에 대해 낌새를 차린 이웃 사람들은 적의 공습 때 폭탄이 터질까봐 국방성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그러고도 한 달이 지난 후에야 FAI 폭탄은 주택에서 멀리 떨어진, 좀 더 안전한 지하 창고에 보관되었다.
리카르도 산스 3
1936년 10월, 나는 카탈루냐에서 의사진을 이끌고 마드리드로 갔다. 바르셀로나 의사연합의 회장이 우리에게 마드리드로 가서 현지 의사들 몇 명과 함께 리츠Ritz 호텔 21호실에 군인 병실을 마련할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출신성분으로 보든, 교양과 정신상태로 보든 모두가 부르주아지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우리가 가장 선량한 지식과 양심에 따라서 그들을 돕고 싶어 하며, 우리는 결코 배신자일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우리를 신뢰하고 존경했다.
비록 나는 그들의 이념에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내 전 생애에 걸쳐 아나키스트들만큼 아량이 넓고 이기심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들의 도덕률은 매우 특이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한 남자가 한 여자 이상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아주 이상하게 여겼다. 한 번에 두 여자를 거느리는 것을 부도덕한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결혼에서도 부르주아지적 부부생활을 적극 반대하였다. 예컨대 남편이 아내와 뜻이 맞지 않으면 당장 다른 여자에게 구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두 여자와 동시에 함께 지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산에 있어서도 그들은 그들 특유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부르주아지의 재산몰수에는 찬성했다. 그러나 강도짓이나 절도는 그들에게 절대 금지사항이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나는 마드리드에 있는 두루티 원정대의 지휘소로 호출되었다. 그곳 바닥에는 죽은 민병대원 한 명이 눕혀져 있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발레나였다. 그를 묻으려면 내가 사망진단서를 발행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어떻게 하다 죽었는지 내가 물었다. 그들은 아주 냉담하게 말했다. 가택수색 때 그가 시계 하나와 팔찌 두 개를 훔쳤기 때문에 그의 머리에 총알 두 발을 쏘아야만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마드리드에서는 계속 총살이 있을 것이고, 이제 재판소는 더 이상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덧붙인다면 가택수색은 아나키스트들 자체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CNT의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다. 그러나 누가 노획물의 일부라도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넣을 때는 가차 없는 고통이 따랐다. 그런 사람은 현장에서 총살되었다. 그것이 아나키스트들의 도덕이었다.
마르티네스 프라일레(Martínez Fraíle)
나는 마드리드 전투 중에 프란초스 다리가 폭파되기 스물네 시간 전에 두루티를 만났다. 우리는 병사들에게 급식을 배급하였다. 약간의 빵과 쇠고기였다. 두루티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웃으며 당시 내 직무에 대해 비꼬는 투로 말했다. “이런 게 진짜 장관의 음식이군!” 불만이 많은 한 대원이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장관들은 이 따위 음식을 먹지 않아요. 그 양반들은 여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니까요.” 두루티가 더 큰소리로 웃었다. “여기 이 장관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 민병대원은 장관이라는 사람도 여기 참호 속에서 소금에 저린 쇠고기를 넣은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2
전투
1936년 11월 19일, 군중들이 분노하여 대학가로 돌진하였다. 그들은 더 많아진 증원군과 함께 대포와 수류탄 투척기를 끌고 갔다. 그 공격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특히 모로코 용병들이 많았다. 대학가 건물 사이의 광장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두루티는 대패하였고 적이 시내로 진입할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는 아나키스트들이 퇴각한 바로 그 장소에서 새로운 공격을 감행하여 패배의 치욕을 씻으려고 했다. 쉴 틈 없는 폭격과, 무방비 상태의 주민들에 대한 실상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는 커다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엄격했던 그의 모습에는 굴욕에 대한 분노감이 역력했다. 그는 마치 필사적인 해방의 탈출을 시도하기 위하여 긴장한 고대 로마의 노예 검객처럼 보였다.
1936년 11월 21일, 다시 온종일 비가 내렸다. 정오에 나는 공격하는 공화주의 부대와 함께 대학 부속병원과 ‘산타 크리스티나’ 양로원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두 건물은 수류탄과 사격으로 정면공격을 받았다. 모로코 용병들과 ‘정예군’은 200미터 정도 후퇴하였지만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빼앗긴 건물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교통로가 파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포복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반쯤 세워진 벽돌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병원 건물이 엉망진창으로 파괴되었다. 건물 천장과 바닥에 총알구멍이 나 있었고 기구들이 넘어져 부서져 있었다. 침대가 뒤집혀져 있었고 바닥에는 벽돌 조각과 파편들이 널려 있었다.
지하 시체안치소에서 늙은 수위를 만났다. 세 번의 쌍방공격으로 적의 손에서 아군의 손으로 번갈아가며 정복된 이 건물에서 그는 아무 탈 없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는 전투병들에게 시체를 보호할 수 있도록 시체를 안치소로 옮겨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해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절대로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니었다.
이 보잘것없는 시체안치소가 이렇게 초만원을 이룰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장 조용하고 학술적이던 이 장소가 가장 처참하고 불행한 전쟁터로 쓰일 줄이야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불쌍한 마드리드! 예전에 사람들은 이 도시를 아무런 걱정도 위험도 없는 행복한 도시로만 여겨왔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도 이 도시를 건드리지 않고 멀리서 비켜 갔었다. 그런데 지금 보름이 지나면서 4년의 전쟁을 경험한 유럽의 중심도시들보다 더 쓰라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 도시가 전쟁터로 변할 줄이야!
우리가 지치고 땀에 젖어 더러워진 몸으로 서로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만족하면서 제2전선으로 기어서 되돌아가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달려와서 서쪽 옆 공원의 부대에서 두루티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왔다.
얼마 전에 나는 그를 국방성 계단에서 만났었다. 그때 나는 그에게 ‘산타 크리스티나’ 양로원에 함께 진입하자고 제안했다. 두루티는 머리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부대에 가서 부대원들이 비를 맞지 않도록 준비해야겠다고 말했다. 내가 농담을 했다. “대체 부대원들이 설탕으로 만들어졌는가?” 그는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래, 설탕으로 만들어졌네. 물이면 녹아버리지. 어쨌든 둘 중 하나는 남겠지. 그들은 마드리드에서 죽어가고 있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미하일 콜코프
1936년 11월 13일에서 19일 사이에, 두루티가 마드리드로 인솔해 온 대원들 가운데 60퍼센트가 적들 앞에서 쓰러졌다. 그 중 그의 참모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생존자들도 이미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녹초가 된 상태였다.
리카르도 산스 2
군기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정신상태에서 파병대는 마드리드에서 아무것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기본적인 군기마저 없었다. 저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결점을 파악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다른 이데올로기를 내세웠던 부대들은―나는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데―달리 행동하였다. 그들의 군기는 매우 엄격하였다. 물론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겁쟁이는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대단히 용감했지만 군기라는 점에 있어서는 엉망이었다.
마르티네스 프라일레
짧은 해설 7
영웅에 관하여
스페인 아나키즘의 역사는 정확성을 애호하는 사람을 쉽게 혼란스럽게 만든다. 자료들을 찾다보면, 서로 상충하는 여러 자료들을 보게 된다. 가령 1919년에 CNT는 얼마나 많은 회원들을 확보하고 있었는가라고 물을 때, 그 답이 70만 명, 혹은 1백만 명, 혹은 55만 명과 같이 서로 다르다. 말하자면 여타의 통계자료에 비해 그다지 틀리지 않는 듯한 이 세 개의 자료는 서로 다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내전이 발발했던 1936년의 경우에는 1백만에서 1백60만 사이를 육박한다. 일 년 뒤, 「노동자연대」라는 신문의 편집부는 근거가 빈약한 자료를 갖고서 아카데믹한 지적 호기심을 채우려는 연구가들의 흥을 깨어버렸다. “이런 빈약하기 그지없는 통계치는 그만두자! 그것은 우리의 뇌를 마비시키고 우리의 피를 응고하게 만든다.”
이 소설의 영웅(주인공)에 접근하면 사실성에 대한 혼선은 더욱 난무해진다. 두루티의 전기에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의 부정확성은 풀 수 없는 소문의 꼬리를 물게 만든다. 두루티는 다토(Dato) 수상의 암살기도에 가담했는가?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나라들을 방문하였는가? 거기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누가 레리다Lérida 성당을 방화했는가? 1936년 가을에 두루티는 공산주의자와 접촉하였는가? 이런 식의 물음에는 대답을 전혀 할 수 없거나, 아니면 무수히 많은 대답들이 나올 수도 있다.
스페인 내전에 관환 권위 있는 참고문헌도 두루티에 대해서는 몇 쪽만을 언급할 뿐이다. 이 문헌이 제공하는 자료들도 빈약하기 그지없고, 자료들 사이에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영국인 후크 토마스(Huhg Thomas)의 보고서에 의하면, 두루티는 4개국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으며, 1936년 말에 그의 단원은 1천 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적군파의 오발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반면에 프랑스인 피에르 브뤼에(Pierre Broué)는 사형 판결에 관한 한 아르헨티나에서 내려진 단 한 번의 사형 언도만을 알고 있다. 그는 두루티 단원의 전투원의 수를 3천 명으로 잡는다. 그리고 그는 두루티가 부하의 손에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견해 차이 때문에 역사가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자료 비판에 아무리 열을 올려봤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 있는 단서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자료 비판을 발판으로 하여 상이한 견해들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계보를 그려낼 수는 있다. 이러한 계보에 근거하면, 출처가 불분명한 선전 팸플릿이 어떻게 어설픈 과학적 논문에 인용되어 그 논문이 일종의 권위를 얻게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논문이 종종 중요한 논술자료로, 권위 있는 논문과 사전으로 둔갑한다. 인쇄활자에 대한 맹신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주 인용되는 것은 사실로 통용된다.
CNT나, 특히 FAI와 같은 조직의 역사는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사안을 ‘지도자의 위치에 선’ 정치가들에게 넘기지 않고 직접 다룰 때는 회의보고 내용이 대개 기록되지 않는다. 특히 거리에서 발생한 사건은 기록되지 않기 일쑤이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의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린 오랜 불법 활동도 마찬가지다. 스페인의 계급투쟁은 뉴스 잡지의 돈벌이감이 결코 아니었다. 두루티와 같은 사람들이 활동한 지하조직은 망원 카메라로도 잡을 수 없었다. 유용한 목적에 쓰기 위하여 스페인 경찰의 문서실이 폐쇄 보관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두 가지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당대 CNT의 선전물과 생존자들의 기록물들이다. 당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 입을 떼는 사람조차도 많은 것을 고려한다. 30년 내지는 60년이라는 시간차 때문에 기억이 희미하다. 그러나 비록 팸플릿이 낡아버렸고, 1920~1930년대의 잡지들이 절반은 소실되었지만, 본래의 목적은 여전히 살아 움직였다. 그것들은 직접적 선동, 자기변호, 탄원 등의 용도로 쓰였다. 그것은 경찰의 고소를 기각시키는 데 활용되며, 동지들의 무죄를 확실하게 변호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무장 강도단, 성공한 암살과 습격사건 따위와 같은 소문들이 여전히 떠돌고 있다. 이야기가 모순되는 것은 그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 수동적인 독자라면 이러한 자료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독서란 사실을 구분하고 판단하며 편들기를 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이 소설의 내용에 접근해 갈수록, 스페인 아나키즘 역사 위에 어슴푸레하게 비치던 본래의 여명은 차츰 밝게 변할 것이다. 그러나 체험의 현장으로 데려가는 모든 것을 읽은 후에도 두루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군중 속의 미지의 한 사람으로만 남아 있다. 두루티에 관한 보고에는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는 웅변가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론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장군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공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당 간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야전사령관의 모습을 띠지 않았다.” “그의 세력은 조직적인 노동이 아니었다.” “우리의 운동에는 많은 두루티가 있었다.” “그는 작전 전문가도, 지식인도, 전략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점에 관한 한, 자신 있게 진술할 수 없다. 두루티의 특수한 면을 개인의 특징으로 돌릴 수 없다. 세부적인 일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사적인 행동일지라도 깊숙이 파고들면 사회적 제스처가 나오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쓰인 글은 오인되어서는 안 될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프로필에 집착한다. 이러한 묘사는 인물을 심리학적으로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윤곽만을 그려낼 뿐이다.
두루티에게는 어떤 감정이입도 허용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대중들은 언제나 두루티를 재인식해 왔던 것이다. 그의 개인적 존재는 완전히 사회적 성격 속에서 영웅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영웅의 역사는 부르주아지적 발전 소설과는 다른 법칙을 따르고 있다. 그 내용의 변화는 단순한 사실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하는 욕구에 의해 조종된다. 영웅담Legende에는 일화와 모험, 신비적 사건들이 집합되어 있다. 영웅담은 필요한 것은 이용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한다. 이런 방식을 빌려 영웅담은 완강하게 변호될 일종의 적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러한 영웅담을 분해시켜 영웅의 실체를 ‘폭로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던 적들은 집단의 이야기가 갖는 끊이지 않는 무수한 소문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이런저런 구체적 예를 들먹이면서 행하는 과학적인 논박조차도 한 영웅의 이야기에 누를 입히지는 못한다. 영웅담의 이러한 속성 덕분에 영웅은 뻔뻔한 현실 정치꾼들도 누리기 어려운 특별한 정치적 특권을 얻게 된다. 따라서 정치꾼들은 영웅을 비방하기보다는 그의 권위를 이용해 먹으려고 한다. 이런 악용은 무엇보다도 영웅이 이미 작고한 상태여서 걸릴 것이 없을 경우 더 심해진다.
영웅담의 연극은 그 본질적 특징을 띠면서 연출된다. 대체로 영웅의 출신성분은 보잘것없다. 그는 무명에서 일약 모범적인 개인 투쟁가로 등장한다. 그에 대한 소문은 그의 용기와, 웅변술 그리고 의리감을 확산시킨다. 그런 소문은 절망적인 상황, 이를테면 쫓기는 망명의 상황에서는 더 무성해진다. 다른 사람은 쓰러지는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위기를 모면한다. 그는 총알을 피했다는 식의 소문이 나돈다. 그러나 완전한 영웅은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탄생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죽음에 관한 숱한 수수께끼 같은 소문이 나돈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영웅의 종말은 어떤 징조로 작동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무감을 갖게 한다. 바로 이 순간부터 영웅담이 만들어진다. 그의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의 이름을 본떠서 거리 이름이 정해진다. 그의 화신이 장벽 위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로써 그는 부적符籍의 신이 되는 것이다. 어떤 문제의 해결을 곧 부적의 덕으로 돌린다. 흔히 이것이 남용되기도 한다. 만일 스페인 혁명이 성공했더라면 두루티도 공식적인 민족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패배는 그의 행운을 가로막았다. 그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즉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영웅, 피착취자, 피억압자, 도망자의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그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반역사적 인물로 취급당하고 있다. 그의 무덤은 바르셀로나의 교외에 있는 한 공장의 음지에 자리 잡고 있다. 쓸쓸한 그의 비석 위에는 언제나 몇 송이의 꽃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석공은 비석에 그의 이름을 조각해 넣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사람이 작은 칼로 이 묘비에 서투른 필체로 무엇인가를 새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두루티라는 이름이다.
죽음
슬픈 소식
나는 대원들과 함께 전선에서 돌아왔다. 몬클로아 광장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손짓을 했다. “리온다, 이리 좀 오게.” “누구, 나 말인가?” “그래, 자네 말고 누구 말이겠는가!” 내가 그쪽으로 갔을 때 그가 말했다. “리온다, 빨리 가보게. 두루티가 위독하다네.” 나에게 말한 그 사람은 두루티의 보초병 가운데 한 사람인 라몬 가르시아였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은 홀쭉하였으며, 근시안이었다.
리카르도 리온다 카스트로
나는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다. 두루티의 운전병이 급히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는 이미 오후가 저물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훌리오 그라베스(Julio Graves)였다. 그는 성격이 대쪽 같았지만 몸집은 보통 덩치의 젊은이였다. 그는 혁명투쟁 때부터 바르셀로나에서 사이좋게 지낸 나의 형 에두아르도의 안부를 물었다. 그에게 에두아르도가 옆방에 누워있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그 운전병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도 아닌데도, 그는 황급히 서두르는 모습이었고, 슬퍼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가 당시 우리가 겪은 날들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날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형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 두 사람이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갑자기 그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일어나서 그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무슨 일인가?” 내가 물었다.
“두루티가 치명상을 입었어. 벌써 죽었는지도 몰라.”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동지 훌리오 그라베스가 이 말을 덧붙였다.
오후 다섯 시였다. 우리 셋은 즉시 리츠 호텔로 달려갔다. 그 호텔에는 카탈루냐 민병대를 위한 병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직 극소수만이 그 슬픈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나는 그 병원에서 산타마리아 의사를 만났다. 그는 두루티 원정대와 함께 아라곤 전선에서 마드리드로 왔던 아나키스트였다. 흰 가운을 입은 그 외과의사는 키가 크고 깡마른 사람이었다. 그가 나에게 두루티의 상태를 설명해주었다. 두루티의 생명은 구할 수 없다고 했다.
두루티가 누워있는 방에서 한 간호원이 나왔다. 호흡을 돕기 위해 벌써 두 번이나 폐에 호스를 밀어 넣었다고 했다.
나는 CNT 민족위원회를 찾아갔다. 벌써 몇 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동지들은 침묵을 지켜야할 필ㄹ요가 있다고들 말했다. 밤이 깊어갔지만 바르셀로나에 전화를 걸어 이 비보를 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의 지도부가 회의를 소집하였다. 우리는 회의의 결론은 기다려야만 했다. 회의에서 그들은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 마드리드의 방어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루티는 죽은 후에도 우리가 그의 이름을 빌려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스페인의 국민적 영웅의 이름으로.
아리엘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시 반쯤 된 어느 오후에 그들은 스페인 아나키스트의 지도자를 우리 병원으로 옮겨왔다. 내 생각에 그는 아주 위험한 치명상을 입은 것 같았다. 당시에는 적절한 처방과 기술을 갖춘 현대식 외과의술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었다. 치명적인 부상인 경우에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솔직히 말했다. 나는 전문가로서 내 판정에 확신했다. 동료 의사인 바스토 박사도 내 견해에 동의하여 수술을 말렸다.
총상에 의해 흉곽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늑골이 부풀어 올라있었다. 그 내부 상처가 심각하였고 특히 심장 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환자가 출혈로 사망할 것이 틀림없었다.
마르티네스 프라일레
내가 도착했을 때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의사가 만류했다. 그래도 그가 몇 마디 중얼거렸지만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위원회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시 너무 많은 위원회가 있지 않았던가! 우리가 마드리드에 도착했을 때 그는 늘 그 이야기를 하였다. 길모퉁이마다 위원회가 하나쯤은 있었다. 모두 내몰아야 할 위원회였다. 위원회가 너무 많아!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리카르도 리온다 카스트로
우리의 동지 두루티가 어떻게 죽음을 당했던가.
우리의 불행한 동지는 아침 여덟시 반경에 파병대의 전방초소를 순찰하기 위해 전선으로 갔다. 도중에 그는 전선을 이탈한 몇 명의 민병대원들을 만났다. 그는 자동차를 세우게 하였다. 그가 차에서 내리던 순간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몬클로아 광장에 있는 한 작은 호텔의 창문에서 그 총알이 발사되어 날아온 것이 분명했다. 두루티는 단 한마디 말도 못하고 곧바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탄환이 그의 등을 관통했다. 부상이 치명적이어서 생명을 건질 방법이 없었다.
「노동자연대」
의구심
그날 밤의 분위기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모두가 흥분한 상태여서 서로 감적이 격해 있었다.
두루티의 임종을 앞두고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조직 내부에서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 결과 동지들간의 충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확산되었다.
마르티네스 프라일레
리츠 호텔의 홀은 CNT 회원들로 붐볐다. 많은 사람들이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그들이 묻는 질문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뒤에 만사나(Manzana)와 보니야(Bonilla)가 왔다. 그들은 우리 부대가 전선에서 철수하길 종용했다. 그들은 만약 두루티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 알려지게 되면 틀림없이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우리 부대를 발레카스 구역에 있는 막사에 집결시켜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두루티의 죽음은 21일에야 마침내 알려졌다. 그날 우리의 목격자들은 두루티가 죽게 된 상황에 대해 침묵을 지켜달라던 마리아네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라몬 가르시아 카스트로
물론 두루티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는 전선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도중에 차에서 내리다가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CNT가 발표한 첫 공식보도에 의하면 적측의 저격범인 치안경비대의 한 경찰이 발코니에서 마우제르 권총으로 그를 저격했다고 했다. 그러나 거의 정확히 심장 부위에 맞은 걸로 보아 그 발표는 신빙성이 없었다.
우리는 그 발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 다닌 것이 아니라 항상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다녔다. 그때 총알의 방향을 왜 찾지 못했을까? 우리는 의심했다.
하우메 미라비트예 1
내가 마드리드에 도착한 그날, 나는 살아남은 파병대의 병사들이 쉬고 있던 그라나다의 막사를 찾아갔다. 그들은 모두 연병장에 집결해 있었다. 당시 아나키스트 여성장관이었던 페데리카 몬트세니가 나와 함께 갔었는데 그녀가 먼저 연설을 하였다. 그녀는 대원들에게 내가 두루티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고 설명했다.
대단한 소란이 벌어졌다. 두루티의 죽음은 별도로 하더라도 어제만 해도 막사를 나서 산책을 하던 두 명의 동지가 들판에서 살해된 것이다. 민병대원들이 소리쳤다. “안 됩니다, 산스. 이젠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무슨 일이오?” 내가 물었다. 민병대 가운데 한 명이 대답했다. “산스 동지, 우리가 흥분한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두루티를 살해한 무리가 파시스트들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 적이 있어요. 우리의 적들은 공화국 내부에 있는 겁니다. 그들은 두루티가 매수당하지 않고 비굴한 짓도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살해한 겁니다. 당신도 조심하지 않으면 똑같은 일을 당할 것입니다. 혁명의 이념을 옹호하는 자는 제거될 것이 뻔합니다. 여기서는 그것이 문제지요. 혁명이 계속될까 봐 걱정하는 무리들이 있어요. 어제 두 명의 동지가 산책을 하다가 등 뒤에서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당신이 마드리드에 계속 남아 있다면 그놈들은 당신마저 살해할 겁니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빨리 이곳을 벗어나 아라곤으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곳에는 배후에서 우리를 공격할 적들은 없어요.”
모두가 이런 식으로 아니면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파병대가 아라곤으로 돌아갔다. 그 나머지만 마드리드에 계속 남아 있었다.
리카르도 산스 3
그가 죽은 뒤 곧바로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그를 살해했다고들 했다. 그들은 라디오 방송을 들었는지 우리에게 물었다. 두루티의 파병대는 더 이상 붙잡아둘 수 없으며, 그들은 무기를 내팽개치고 귀향하고 싶어 한다는 보도가 나왔다고 했다. 그들 모두는 살해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은 파시스트 라디오 방송이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암살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렇게 소문을 퍼뜨린 자는 파시스트의 하수인이었던 케이포 데 야노(Queipo de Llano)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태도를 바꾸어 공산주의자들이 그 살해의 장본인이 아니라 바로 두루티의 보초병들이 장본인이라고 헛소리를 하였다.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 있겠는가! 마드리드에서는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참모부도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수군거리면서 엉터리 소문을 입에 올리곤 했다. 우리는 매우 화가 났다.
당시 나는 직접 우리 CNT 신문사를 찾아가서 말했다. 우리는 전쟁 중이므로 더 이상 이런 혼란이 야기되어서는 안 되니 기사를 교정해서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 소문은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 일을 시작하였다.
리카르도 리온다 카스트로
이처럼 교활하게 꾸며진 암살사건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도 배제할 수 없었다. 각 당들과 집단들 사이에 횡행하고 있는 철저한 경쟁이 바로 그 사실을 확인시켜준 셈이었다.
두루티는 확실히 마지막까지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친 소수 혁명대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전 생애는 전설처럼 되었다. 그러한 감정을 바로 인민들이 강하게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온갖 소문이 횡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두루티가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비록 모호한 것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받아들였다.
쿠데타 군부의 라디오 방송은 우리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그들은 온갖 세력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혼란에 빠뜨렸다. CNT와 FAI 위원회는 이런 라디오 방송의 권모술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보도로 대응했다.
“노동자 여러분! 소위 말하는 제5열quinta columna의 음모가들은 우리의 동지 두루티가 배신적인 음흉한 살인공격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열한 음모공작을 경계하라고 모든 동지들에게 알려드립니다. 파시스트들은 파렴치한 음모공작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투쟁하고, 깊이 생각하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막강한 통일전선을 흔들어놓으려고 합니다. 동지들이여! 두루티 동지는 결코 배신적인 행위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해방군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책임을 용감하게 다하면서 투쟁하다가 쓰러졌을 뿐입니다. 깰 수 없는 우리들의 견고한 블록을 파괴하기 위해 파시스트들이 퍼뜨린 세간의 유언비어를 믿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마십시오! 거짓 소문을 퍼뜨려 형제 살해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하는 흑색선동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그런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자들이야말로 혁명의 적들입니다.
이상은 CNT 민족위원회와 FAI 반도 위원회에서 보도 드렸습니다.”
호세 페이라츠 1
11월 23일 발렌시아에서 CNT와 FAI 민족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의 동지 두루티의 죽음에 대해 온갖 소문과 추측들이 나돌고 있다. 위원회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여 이런 것들을 거부하여야 한다. 우리 동지는 파시스트의 총알을 맞고 죽은 것이지, 소문처럼 어떤 특정 당파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반파시스트 연합세력들과 연대한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바로 파쇼 무리와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스페인 아나키즘 노동계급의 최고조직은 우리 작전의 성공을 저해하고, 반동의 야수들에게 항거하는 스페인 노동계급의 정당한 부대를 분열시킬 수 있는 발언들을 일체 삼가줄 것을 모든 이들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이 선언이 모든 동지들에게 확신을 주리라고 기대한다. 스페인에 있는 파쇼를 타도하기 위해 전진하자!!
민족위원회.
「노동자연대」
두루티의 의문의 죽음
나는 그의 죽음이 암살에 의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두루티가 사망하자마자 스페인 아나키즘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이 마드리드에서 사라졌다. 밤사이에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졌다. 갑자기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박해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누구로부터 사주를 받은 것이었는지는 명백했다.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그 장본인이었다. 당시 밤에는 극우파의 회원증을 가지고 마드리드 거리를 활보하는 것보다 CNT-FAI의 회원증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더 위험했다.
마르티네스 프라일레
그라비타 언덕에서 아나키스트들이 패배한지 며칠 만에 두루티가 쓰러졌다. 암살당했던 것이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에게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면서, 카바예로 정부와의 협력을 지지했기 때문에, 아마 그 자신의 대원들이 그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이념의 공화국을 스페인에 세우는 데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대부분 최전선에 나가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혹은 부르주아지 공화주의자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카바예로 정권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카바예로 정부는 ‘의미가 없었다.’
루이스 피셔
두루티가 너무 마음을 놓고 행동하였기 때문에 희생된 것이 틀림없다. 그는 오후에 대학가 전선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너무 조용했다. 바로 그 때문에 위험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방심하여 겁 없이 돌아다녔다. 그의 승용차가 대원들의 투쟁전선 가까이에 멈추어 섰다. 그 맞은편에는 대학 부속병원이 있었다. 그 건물은 6, 7층 정도 되는 건물이어서 사격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우리 대원들은 아래층을 점거하고 있었던 반면에 적은 위층을 점령하고 있었다.
감시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적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자동차가 멈추는 것을 보고는 탑승자들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엄폐물도 없이 탑승자들이 개활지에 내려섰을 때 적은 기관총사격을 퍼부었다. 두루티는 치명상을 입었고 그를 수행한 두 명의 동승자들도 중상을 입었다.
리카르도 산스 3
두루티가 쓰러진 다음날 떠돈 소문은, 서너 명의 대원들이 전선에서 겁을 집어먹고 탈영하던 중, 두루티가 제지하자 그들 가운데 한 명이 그에게 총을 쏘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사망한 이 마당에서도 죽음의 원인에 대한 소문이 그런 식으로 퍼졌기 때문에, 용감한 투쟁가이고 지휘자였던 그를 잃은 우리의 슬픔은 한층 더 했다. 그의 부대가 적들을 진지에서 물리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적이 그들을 격퇴한 꼴이 되고 말았다. 두루티의 죽음으로 그의 부대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대가 마드리드의 모든 전선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엔리케 리스테르
두루티의 운전병이 사건의 전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는 나를 마드리드 「노동자연대」의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것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모든 사실을 내게 말해주게.” 내가 동지 훌리오 그라베스에게 부탁했다.
“할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네. 점심식사 후에 우리는 대학가 전선으로 차를 몰고 갔지. 그때 만사나 동지가 우리를 안내했네. 우리는 쿠아트로 카미노 광장에 도착했지. 나는 이글레아 거리를 돌아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네. 그리고 작은 여관들이 서 있는 그 거리의 끝을 지나 우회전하였지. 그 구역은 두루티의 부대가 몬클로아 광장과 교도소 장벽 앞 전투에서 패배한 후 새로 정한 진지였네. 그때는 가을 오후의 햇살이 거리에 쏟아지던 맑은 날이었어. 우리가 교차로에 도착했을 때 한 민병대 그룹과 마주쳤지. 두루티가 그 청년들이 전선을 이탈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거야. 그가 내게 차를 세우라고 명령했네.
우리는 적의 사격권 안에 멈추어 섰던 거지. 부속병원을 점령하고 있던 무어족 부대가 그 광장을 경계구역으로 맡고 있었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한 여관의 모퉁이에 차를 세웠지. 두루티가 차에서 내려 탈영병 쪽으로 걸어갔지. 그가 그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네. 그들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지. 그는 거친 목소리로 그들을 나무라면서 초소로 돌아가라고 욕을 하는 투로 명령했지. 그 민병대원들은 지시에 따라 돌아갔네.
두루티가 다시 자동차 쪽으로 몸을 돌렸지. 그때 갑자기 사격의 불꽃이 격렬하게 튀었지. 적갈색의 수많은 군중들이 바로 우리 맞은편의 부속병원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거지. 총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네. 두루티가 차 문을 막 잡으려는 순간 쓰러졌네. 총알이 가슴을 관통했던 거야. 만사나와 내가 급히 차에서 내려 그를 뒷좌석에 눕혔네.
나는 최대한 빨리 차를 돌려 전속력으로 시내로 되돌아가, 카탈루냐 파병대 병원으로 그를 옮겼지.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자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이게 전부야.”
아리엘
우리는 전적으로 추측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저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나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 말해준 것이다. 물론 그는 소식에 정통한 사람이기는 하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프랑스 공산당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아우구스트 레쾨르(Auguste Lecœur) 씨가 공산주의자들이 두루티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그의 친구들에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했다는 점뿐이다. 토레스(Thorez)에 의하면 아우구스트 레쾨르는 스탈린의 문제로 제명되기까지 프랑스 공산당에서 서열 제2인자였으며, 지금은 반스탈린주의자가 되었다.
가스톤 레발
바르셀로나 아나키스트들의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ze) 축일의 밤[3].
11월 23일 파리에서.
「파리의 메아리Echo de Paris」 지誌에 의하면, 마드리드에서 저항군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카탈루냐 아나키스트 지도자 두루티는 볼셰비키들이 퍼뜨린 소문처럼 국민군과의 투쟁에서 쓰러진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마드리드 귀족의 저택에서 약탈한 노획물의 배분문제를 두고 계속 갈등을 일으켰다. 이 싸움에서 두루티는 자신이 이끄는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돌아가 마드리드는 운명에 맡기겠다고 공산주의자들을 협박하였다. 그날 저녁에 두루티는 자신의 집 앞에서 한 공산당 그룹의 습격을 받고 쓰러졌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특파의 「파리의 메아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카탈루냐 도시의 아나키스트들은 이에 분개하여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지도자 두루티가 마드리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자 아나키스트들은 일종의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과 같은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결국 소름끼치는 폭력행사가 아나키스트 연합의 지도력에 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지도부는 긴급포고를 통해 피의 테러행위를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인민의 파수대」
스페인 공산당 총비서의 전보
우리는 우리 공동전선의 동지요 절망적인 노동계급의 아들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을 사수하기 위해 정열과 열정을 다 쏟았던 동지 두루티의 죽음에 깊은 고통의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범죄 집단 파시스트 강도들의 탄알이 젊고 풍부한 삶을 희생시켜 우리로부터 그를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강토를 피로 물들인 파시스트 도당들을 근절할 때까지 마드리드 사수에 하나가 됩시다! 스페인 모든 전선의 통일투쟁을 위해 투쟁합시다! 우리 영웅을 위하여 복수합시다! 인민의 승리를 위하여!
호세 디아스(José Díaz)
「노동자 연대」
나중에 두루티의 미망인이―혹은 CNT의 중앙위원회였는지 모르겠다―두루티의 기념전시회를 위해서 그가 살해된 그날 입었던 셔츠를 내게 보내주었다. 나는 총알이 관통한 구멍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는 감식 전문가를 불러놓았다. 우리는 두루티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탄이 관통할 때 탄 흔적이 셔츠의 직물에 명확히 남아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당시 우리는 마드리드 아나키스트들의 정신상태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두루티가 마드리드에서 더 이상 게릴라의 지도자가 아니라 정규군의 지휘자처럼 행동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책임감을 망각한 아나키스트 원정대의 지도자들에게 가차 없는 조치를 내렸던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그들 중 몇 명에게 총살명령까지 내렸다. 그런 점에 미루어 우리는 당시 그가 내부의 보복행위에 의해 암살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우메 미라비트예
두루티가 죽고 난 뒤 일 년 동안 카탈루냐 광장에서는 마드리드의 영웅적 수호자를 기리기 위한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품 가운데는 두루티가 사망할 당시에 입었던 셔츠도 있었다. 셔츠는 유리 상자 속에 전시되어 있었다. 실탄이 관통하면서 천을 태워 생긴 구멍을 정확히 관찰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 구멍은 6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는 생겨날 수 없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저녁 나는 법의학 기관의 전문가들에게 셔츠를 정밀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한결같이 그들은 멀어봤자 1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며칠 뒤 나는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프랑스 여인인 두루티의 부인을 만났다.
“남편이 어떻게 해서 사망했다고 보십니까?”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부인께서는 진실을 잘 알고 계시죠.”
“나는…… 나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어요.”
“사건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습니까?”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죽기 전에 공식발표를 할 것입니다. 치안경비대의 한 경찰이 그곳 높은 창문에서 그에게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누가 그를 살해했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 양반의 측근 중에 한 명이지요. 그건 보복행위였죠.”
하우메 미라비트예 2
두루티는 19세기에 시작되었던 아나키즘 기류 속에서 호흡하면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바쿠닌의 후계자로 여겼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에 철저히 물든 사람에게는 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프랑코 장군의 추종자들로부터 승리를 거두기 위하여 공화국을 도운 위대한 지성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라곤 전선은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의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대응하자는 헛된 희망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 투쟁에서 유용하게 쓰였을 엄청난 양의 자동소총을 파병대에게는 지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카탈루냐 정부와 연대책임을 맡고 입각했을 때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거의 절반이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투쟁의 입장은 분명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가두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라디오 방송국과 다른 통신사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그들이 반권위주의라는 원칙을 내세웠더라면―공산주의자들이 공화국을 통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적에게 문을 열어줄 수도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공산주의자들이 스페인에서 승리하게 되면 분명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그 시점에서 모스크바에 기대를 걸 수 없는 불리한 여건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양측의―한쪽은 마르크스의 상속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바쿠닌의 상속자들이었다―‘순수 이데올로그’들은 우선 전쟁에서 승리를 구현하고 싶어 했던 덜 순수한 사람들과 타협을 해야만 했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은 두루티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는 공산당과 중앙정부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마드리드로 가겠다고 이미 선언한 상태였다. 그는 바깥 거리에서 프랑코 군대의 유탄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호위병들을 데리고 그란 가에 있는 한 지하 식당에 들어갔다. 마드리드 주민들은 그때까지 그렇게 완전무장한 투쟁가들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대원들이 마침내 그들을 도울 것이라는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두루티는 호위병들을 남겨두고 혼자 공산주의자들을 만나러 갔다. 15분 후에 그는 공교롭게도 ‘두루티의 동료들’이라고 자칭한 아나키스트 집단의 프락치들에게 대로大路에서 살해되었다.
만일 내전의 역사가들이 두루티가 전선에서 알 수 없는 무리들에 의해 피살되었다고만 설명한다면 그것은 사건을 완전히 오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시 공화주의 정권과 공산당은 사건을 그런 식으로 유포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두 집단은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두루티가 프랑코의 참호에서 발사된 유탄에 맞아 희생되었다고까지 주장했던 것이다.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그는 백주에 도로에서, 그것도 등 뒤에서 총을 맞았던 것이다. 수많은 목격자들이 그의 종말을 지켜보았다. 그의 죽음은 아나키즘적 사고방식이 갖는 의미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한 가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도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루티의 동료들’은 그가 살해되기 훨씬 전에 이미 조직되어 있었다. 이 조직은 ‘진정한’ 아나키즘 정신을 표방하여 공산당의 어떤 권위주의적 경향에도 반대했다고 한다. 보시다시피, 두루티가 자신의 ‘동료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논리적 추리일 뿐이다. 그의 죽음은 바쿠닌과 칼 마르크스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최후의 산물이었다.
익명 2
전쟁 중에 어떤 사람이 넓은 도로에서 피살되었다면 그 죽음에는 적 아니면 내부의 요원이 관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국민군이 막 퇴각한 지역에 치명적인 사격이 쏟아졌다. 저격범이 정확히 두루티를 알아보고 의식적으로 그를 사살했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두루티는 눈에 띄는 어떤 휘장도 제복에 달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격수는 두루티가 도중에 만난 탈영 민병대원들에게도 사격을 가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두루티는 프랑코의 적쪽을 향해 서 있었다. 따라서 두루티가 등 뒤에서 쏜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격은 위쪽에서, 그러니까 그때까지 적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맞은편 건물에서 가해졌던 것이다.
나중에 이 문제를 두고 공화주의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두루티가 공산주의자들 손에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개연성은 없었다. 다만 그의 죽음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엄청난 전략적 이득을 본 것만은 사실이다. 두루티는 당시 점차 확산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아나키즘 운동의 그 유일한 제어력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두루티의 동료들’이라는 조직은 그가 사망한 후 수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명칭이야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운동 중에 사망한 동지나 철학자 혹은 정치적 지도자들의 이름을 그들의 조직에 붙이는 것을 관례로 여겨왔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빌려 그렇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두루티의 동료들’이라는 최초의 조직은 두루티가 활동했던 파리에서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두 번째 조직이 스페인에서 구성된 셈이다. 이 조직은 CNT의 타협적인 정책과 공산주의자들의 압력에 CNT가 주저하고 있는 형태에 맞서 투쟁했다. 두루티가 공산주의자들과 모종의 ‘타협을 모색하려고’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두루티가 죽기 전까지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에게 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페인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었던 것은 두루티가 죽고 난 후의 일이었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가 죽음의 총알을 맞기 전에 러시아 여성 아나키스트였던 엠마 골드만과 나눈 대화에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힌 적이 있었다. 아나키즘 투쟁의 방향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있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스페인 노동자들이 우리들의 해방투쟁 방식과 여사께서 알고 있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방법 가운데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들은 매우 올바른 길을 택할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골드만은 만일 공산주의 세력이 막강하여 노동자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두루티가 대답했다. “우리가 언젠가 프랑코를 제거한다면 공산주의자들과도 주저 없이 한 판 벌일 예정입니다. 그런 일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전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과도 대립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알베르트 멜처(Albert Meltzer)
나는 두루티의 보초병이 등 뒤에서 그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믿지 않았고 그런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것은 유언비어였다. 그의 대원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짓이라는 소문이 무성해지기도 했다. 그런 소문도 나는 믿지 않는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두루티를 살해하였다는 그 거짓말은 몇몇 기자들과 역사가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인데,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의 꼭두각시들이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즘 운동을 왜곡하는 온갖 공작을 다 벌였다. 또 다른 집단들도 그런 유언비어를 계속 퍼뜨렸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입방아 찧는 것을 재미로 여겼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1
목격자들
그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지금도 정확한 날짜뿐만 아니라 그 시간과 세부적인 일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미구엘(미카엘) 천사’ 27번가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두루티의 지휘소가 있었다. 그 지휘소는 알폰소 13세의 조카였던 소토마이요르(Sotomayor) 대공의 도시궁전이었다. 11월 19일 오후에 전선에서 한 전령이 왔다. 그의 보고는 부속병원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즉시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때가 오후 네 시쯤 되었다. 우리는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병원 가까이 지나갔다. 운전석에는 운전병 훌리오가 앉았고 그의 옆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두루티가 앉았다. 그는 뒷좌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뒷좌석에는 만사나와 보니요 그리고 내가 앉았다.
우리는 시내를 지나 몬클로아 광장에 도착한 후 다시 로잘레스 산책로를 거쳐 앙드레 베야노 거리 모퉁이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총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어서 멈추었다. 자동차는 적의 사격에 아주 멋진 목표물인 것이다. 그래서 훌리오가 차를 세우고 상황을 정찰하기 위해서 차에서 내렸다. 두루티가 그의 뒤를 따라가겠다면서 나란헤로라는 자동화기를 손에 들었다. 차문을 열고 그 화기로 차의 발판을 두드렸다. 그때 총알이 발사되어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나도 이미 차에서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차에는 단 한 사람만 타고 있었다. 우리는 두루티를 들어올렸다. 많은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의식이 또렷했다. 우리는 그의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계속 닦았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를 자동차에 눕히고 민병대 의무대가 있는 리츠 호텔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렸다.
두루티를 의사들에게 넘겼다. 그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였다. 새벽 두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분명했다. 나는 계속 그곳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에 그가 무슨 말을 더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그 불행한 사고를 당한 지 열한두 시간 후인 새벽 네 시경에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두루티의 죽음이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는 차마 믿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목격자들이었다. 감히 그 비보를 알릴 엄두가 나지 않았으며, 아무도 진실을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적이 쏜 실탄을 맞고 사망했을 거라는 오보가 나돌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생각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이 사건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우리 쪽에서는―그의 보초병이 그를 살해했을 거라고도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건을 제5열에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소문이 확산되었다. 아무도 그 사고가 두루티의 실수에 의한 우발적 사고였다는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라몬 가르시아 로페스
나는 처음부터 두루티가 암살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충분한 증거물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의 셔츠가 증거물이었다. 셔츠를 보니 사격이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분명히 두루티의 미망인도 공식보도를 의심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여러 사람들과 그 사건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물론 에밀리엔느의 친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두루티가 자동차에서 내렸을 때 자동소총, 일명 나란헤로로 불리는 소총이(나는 어째서 그 소총이 ‘오렌지나무’라고 불리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저절로 발사되어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CNT의 태도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식의 죽음에는 반어적 경향이 따라붙게 마련이었다. 대중들은 사실의 보도를 거의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비서가 타자기를 다루듯이 무기를 다루던 그런 사람이 그런 실수를 했다고 누가 믿겠는가! 분명한 사실은 아나키스트들이 두루티에게 형성된 그런 신화를 너무나 평범한 사실의 해명으로 파괴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일뿐더러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하우메 미라비트예 1
그러나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누가 그렇게 되도록 우리 모두에게 맹세를 시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침묵을 지키면서 우리의 부모들과 아내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어떤 이야기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두루티의 그러한 죽음은 한편으로는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두루티가 자신의 대원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침묵의 맹세는 당시 장관이었던 페데리카 몬트세니와 CNT 민족위원회의 비서였던 마리아노 바스케스가 제의하였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산타마리아 의사는 총알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실탄이 기껏해야 5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사된 것만은 확실하다고 나에게 장담하였다.
헤수스 아르날 페나 3
많은 사람들은 바로 지금도 그 사건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나만큼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동지들이 그 사건에 대해서 나누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두루티의 마드리드 참모장이었던 만사나의 집에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운전병 에스탄시오가 있었고, 그 당시 같이 동승했던 나머지 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그들은 그가 오발로 사망했다고 했다. 두루티가 그때 이렇게 앉아서 (리온다가 두루티의 자세를 취했다) 소총의 총신을 위로 향하여 잡았다고 했다. 그가 소총을 들고 차에서 내리려 했을 때, 바로 그때 방아쇠 장치가 발판에 ‘탁’하고 부딪혀 총알이 발사되어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고 하였다.
나는 소총에 관해서 훤히 알고 있다. 나는 스물두 살 때부터 권총을 몸에 지니지 않고 집을 나서본 적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는 특히 저녁과 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권총을 몸에 지니지 않고 집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권총을 손에 들거나 탄띠에 차고 다녔다. 언제든지 나를 방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두루티는 항상 별로 조심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결점이었다. 나는 그 점을 그에게 자주 지적하곤 했다. 그래도 그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만사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총신이 자기 쪽으로 향하게 잡아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내릴 때는 말할 필요도 없다. 만사나는 두루티의 문제가 바로 그 점에 있다고 나에게 말했었다. 나란헤로 자동소총은 위험한 무기이며, 쉽게 발사된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두루티의 소총, 바로 그 문제의 소총을 보관했기 때문에 그 총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로 망명할 때까지 그 소총을 보관하였다. 국경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 총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도 리온다 카스트로
두루티의 유품
그는 아무것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쉽게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모두 인민들의 것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나는 그에게 입혀 묻을 옷을 한 벌 찾고 있었다. 우리가 찾은 것이라고는 고작 닳아 해진 낡은 가죽조끼 하나와 카키색 바지 한 벌, 구멍 난 낡은 구두 한 켤레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놓은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양복바지의 단추 하나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리카르도 리온다 카스트로
두루티의 짐꾸러미에서는 이런 소품들이 발견되었다. 갈아입을 셔츠 한 벌, 권총 두 정, 망원경 하나와 선글라스 하나. 이것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전 재산의 목록이었다.
호세 페이라츠 1
두루티의 죽음은 마드리드에 깊은 감동의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시신은 동료들에 의해 CNT 지역 민족위원회로 옮겨져 입관되었다. 11월 21일 새벽 네 시에 관을 자동차에 실었다. 발렌시아를 향해 운구할 때 자동차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행렬이 지나는 도시마다 주민들이 도로로 나왔다. 취바Chiva에서는 장관들이 운구행렬을 맞이하였다. 그들은 가르시아 올리베르, 알바레스 델 바요(Alvarez del Vayo), 후스트(Just), 에스플라(Esplá), 히랄(Giral) 장관이었다. 모든 마을의 주민들은 흑 · 적색 기를 내걸고 관 위에는 화환을 얹었다. CNT 발렌시아 근동 지역위원회의 대표자들은 동지의 유품을 실은 자동차에 화환과 꽃다발을 실었다.
근동지역과 카탈루냐의 모든 마을의 주민들은 고인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11월 22일 밤 한시 직전에 운구차가 CNT-FAI 사무실이 있는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였다. 꽃과 흑 · 적색 깃발에 싸인 관은 아나키스트 사무실 현관에 준비된 관대 위에 놓여졌다. 관과 그 관을 덮고 있던 깃발 위에는 두루티 삶의 내용이었고, 그것을 위해 그가 쓰러졌던 글이 쓰여 있었다. CNT-AIT-FAI.
「두루티」 6호
장례식은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 날씨는 구름이 끼어 침울하였다. 도시 전체가 집단적 히스테리에 빠진 듯했다. 전투복 차림의 아나키스트 의장대를 앞세운 장례행렬이 지날 때, 사람들이 도로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들은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 50만의 인파가 도로를 메웠다.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두루티는 바르셀로나 주민들에게 아나키즘 사상가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이상한 침묵이 도시를 덮고 있었다. 전신주에는 흑 · 적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태양도 빛을 잃었다. 나는 그날만큼 조용하고 엄숙한, 그리고 슬픈 날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우메 미라비트예 2
한때 스페인 기업가연합의 사무실이었던 거대한 건물이 이제는 ‘CNT-FAI 빌딩’이 되어 있었다. 그 건물은 CNT 카탈루냐 지역위원회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건물은 바르셀로나의 항구를 연결시켜 주는 넓은 현대식 도시 전철이 있는 라예타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두루티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몇 달을 이 건물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보냈다. 이 기간에 그는 건물 내에 마련된 라디오 방송국을 통하여 스페인 인민에게 마지막 연설도 했던 것이다. 바로 그 인민의 거리를 통과하여 그의 시신은 몬주익으로 운구 되었다.
CNT 바르셀로나 지역연합의 요청에 의해 이제 그 거리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가街로 불리고 있다.
「두루티」 6호
그가 마드리드로 출발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공항까지 그를 배웅하러 나갔다. 그것이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나는 매일 마드리드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은 그가 외출하고 없다고 했다. 나중에 나는 그때 바로 그가 사망한 것임을 알았다.
나는 그때 그 장소에 없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사건이 우연한 사고라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무도 그렇게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전선에서 쓰러졌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전사자가 된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두루티와 같은 사람은 침대에서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불행한 우발적 사고였다고 나에게 말해준 사람은 사이가 먼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의 친구들인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였다. 그들은 그의 투쟁동지들이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에밀리엔느 모린
짧은 해설 8
혁명의 노병들에 관하여
스페인 혁명이 좌절되고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혁명의 자취를 더듬으려는 사람은 한때 바르셀로나의 가장 권위 있는 일간지였던 「노동자연대」를 매일 읽어야 한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서류철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색 바랜 신문지를 찾기 위하여 암스테르담의 헤렌그라흐트 가街에 있는 한 지하 창고를 뒤적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건물 4층에서 스페인 혁명에 대하여 기록해 놓은 모든 서류 다발들을 뒤적여야 한다. 국제사회사연구소는 혁명의 승패에 관한 글들을 소장하고 있다. 편지와 팸플릿, 지령문건과 목격자의 증언, 파손된 서류 뭉치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것들은 서글픈 역사의 기억들을 되살려낸다. 여기서는 사라진 활자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자들의 자취도 찾아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약력과 기억들, 주소를 알아낼 수 있다. 또한 그것들은 우리들을 멕시코 수도의 한 적막한 교외로,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한 외딴 마을로, 파리의 어떤 골방으로, 바르셀로나 노동자 공단지역의 빈민촌으로, 아르헨티나의 수도에 있는 한 허름한 사무실로, 프랑스 가스코냐 지방에 있는 어떤 헛간으로 안내한다.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가구 목수 플로렌티노 몬로이는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이 지방 저 지방으로 옮겨 다닌다. 그는 양로 수당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지방의 늙은 귀족들의 장식 가구들을 수리해주고 받는 돈으로 연명하고 있다.
파리의 한산한 교외인 쇼시르로이Choisy-le-Roi의 셰브륄Chévreuil 가 6번지 약국의 뒷간 방에서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작은 인쇄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들은 지방 장날을 위한 영화 포스터나 무도회 초대장을 찍어낸다. 물론 자신들을 위한 잡지와 팸플릿을 만들기도 한다.
한때 가장 강력했던 카탈루냐 민병대의 일원이었고, 나중에는 한 작은 출판사에서 CNT의 가장 예리한 비판가로서 활약했던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이 라틴 아메리카 어디에선가 일하고 있다. 그는 남을 돕기를 좋아했고, 파이프 담배를 한시도 입에서 떼지 않았던 침착한 사람이었다.
노동자연합의 일원이었고, 발렌시아의 섬유공장 노동자였던 리카르도 산스는 2백 마르크의 연금으로 가로느Garonne 마을의 한 허름한 농가에서 혼자 살고 있다. 30년 훨씬 전에 그는 두루티의 추종자로서 아나키스트 민병대의 한 연대를 통솔하였다. 그는 자신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두루티의 데드 마스크, 옷장 속에 보관하고 있는 사진들, 벽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원판의 서적들과 같은 혁명의 유물들을 보여준다. 이 원판 서적들은 자신의 인쇄소에서 찍어낸 것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작고했다. 그레고리오 호베르는 중부 아메리카 어디에선가 아직 살아 있다고들 한다. 다른 사람들은 실종되었다.
툴루즈Toulouse의 한 옛 공장 마당에는 망명 중에 세워졌던 CNT의 본부 막사가 있다. 2층의 낡은 발코니에 서면 ‘대륙 간 사무국’이 눈에 들어온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나온 진귀한 팸플릿 책자와 호기심을 끄는 ‘이상의 도서관’이라는 소설책이 있는 한 작은 책방 옆에, 페데리카 몬트세니가 그녀의 사무실을 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수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연설문과 사설들을 쓰느라고 바쁘다.
이들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지리적 조건에 의해 서로 멀리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지만 아주 가까이 있는 듯하다. 그 세계는 서로가 문자로 정한 규칙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서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좋아하는 경향을 서로 알 수 있는 암호를 가진 세계처럼 보인다. 옛 동지들의 세계는 좌절이나 시기, 알력이나 소외, 모든 망명한 이민자들의 불명예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의 평균연령은 높다. 그래서 나쁜 소문이든 기쁜 소식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가벼운 여흥에 불과하다.
그들은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다. 옛 기억들은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의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각자는 그 결정적인 해에 맡았던 자신의 역할을 외우고 있었다. 물론 백발의 노인들에게 찾아오는 감각의 마비가 그들의 기억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강직한 태도는 쟁취했다가 잃어버린 혁명의 정신을 아직도 상실하지 않고 있다. 이들 남녀 투사들이 한평생 몸 바쳐 투쟁했던 스페인 아나키즘은 사회의 어느 변두리에 위치하는 어떤 종파도 아니었으며, 지성적 유행풍조나 부르주아지적 불장난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운동이었다. 선언문이나 구호로 짐작건대, 옛 아나키즘은 오늘날 학생운동에서 볼 수 있는 네오 아나키즘Neo-Anarchismus과는 별 관계가 없다. 파리의 5월과 여타의 곳에서 학생운동의 이념들을 목격한 이 80대의 노인들은 착잡한 심정으로 아나키즘의 르네상스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한평생 자신들의 손으로 노동을 해왔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매일 공장과 건축현장으로 일하러 간다. 그들은 대개 작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각자는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다. ‘레저 사회’의 구호나 여유 있는 생활의 유토피아란 그들에게 낯설다. 그들의 작은 방에는 불필요하게 남아도는 물건이라고는 없다. 그들은 소비와 상품―물신주의를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사용가치만이 중요하다.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지는 못한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소비욕구를 논박하지 않고 침묵하지만, 그것을 철저히 경멸한다.
그들에게는 문화를 대하는 젊은 세대들의 태도가 낯설기만 하다. 반면에 젊은 세대들은 이들 상황의 체험자들이 ‘교양’ 냄새를 풍기는 일체의 것에 대하여 비웃는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 노장의 노동자들에게는 문화란 일종의 유익한 사물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글자를 터득하기 위해 피와 땀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고 어두운 방에는 텔레비전 대신에 책들이 있다. 설령 그들 가운데 부르주아지적 출신성분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예술이니 학문이니 하는 따위는 내팽개쳐야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들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코미디와 록 음악에 의해 의식이 결정되는 젊은 세대들은 ‘현장투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은 원조 아나키스트들이 제기했던 ‘성의 해방’에 대해서도 묵과한다.
다른 세대에 살았던 이들 혁명가들은 비록 몸은 늙었지만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경박한 것을 모른다. 그들이 비록 도덕을 말없이 실천하고 있지만 태도만큼은 모호하지 않다. 그들은 지금의 세계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폭력에 친숙해 있지만 폭력의 쾌락에 대해서는 깊이 혐오한다. 그들은 고독하게 살면서 세상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그들의 망명의 문턱을 넘자마자, 남을 돕기를 좋아하고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그들의 따뜻한 연대감이 느껴지는 그들만의 세계가 열렸다. 그들을 알게 될 사람들은 그들이 전혀 무뚝뚝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찾는 젊은 방문객들보다 훨씬 더 다정다감하다. 그들은 결코 우울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공손한 태도는 프롤레타리아적이다. 그들의 기품은 결코 굴욕당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가지는 의연한 자세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다. 누구도 그들의 일을 ‘도운’ 적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으며, 생활보조금을 타서 쓴 일도 없다. 복지정책도 그들에게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청렴하다. 그들의 의식은 흠이 없다. 이것은 오염되지 않은 의식의 한 전형이다. 그들의 신체상태는 출중하다. 그들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다. 신경쇠약증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신경안정제가 필요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련한 존재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패배의 경험조차도 그들을 나쁜 길로 이끌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신념에 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이 옛 투사들은 그들 뒤에 등장한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에필로그
후세대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티의 죽음은 희망의 종말과도 같았다. 그들이 혁명을 위해 투쟁했다고 믿는 동안 그들의 도덕은 건강했다. 오로지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만이 중요했지만 모든 것이 전혀 변하지 않고 옛날 그대로였을 때 그들에게는 만사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두루티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실현해 주리라고 믿었다. 두루티의 죽음은 차라리 공포였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공장과 집단농장에서 혁명적 분위기의 종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1
두루티의 장례식에서 행한 루이스 콤파니스의 두 가지 조사弔辭
동지 여러분, 이 엄숙한 순간에 나는 여러분이 단결하고 규율을 잘 지키고 그리고 용기를 가지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이 순간에도 눈물이 쏟아지고 있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그렇지만 왜 눈물을 보여야 합니까? 자신의 임무를 다하여 우리에게 귀감이 된 한 사나이의 죽음 때문에 우리가 울어야 합니까? 차라리 우리는 겁쟁이들과 극악무도한 자들을 위해 슬퍼해야할 것입니다. 눈물을 거두고 팔을 높이 쳐들고 우리의 길을 계속 걸어갑시다. 내부에 머물지 말고 전진합시다. 두루티의 이름이 귀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그 길은 아직 험하고 고됩니다. 전진! 전진합시다!
「노동자연대」
겁쟁이든 영웅이든 죽기 마련이듯이 두루티도 죽었습니다. 다만 두루티는 고인이 싫어했던 한 비겁자의 손에 죽었을 뿐입니다. 죽음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도 불현 듯이 찾아오지만 감히 어떤 살인자도 해를 입힐 수 없는 두루티와 같은 사람에게도 찾아오는 법입니다. 두루티, 우리는 당신의 용기를 찬양합니다. 그대의 이름이 인민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구호는 이것뿐입니다. 전진하라! 의무가 부르는 그 자리에 서서 각각 파시즘과 투쟁하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라! 뒤돌아보지 말고 전진하라!
「인민의 신문」
두루티의 이념에 동조하든 안하든 그것과는 별도로 그가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그는 훈련받은 스페인 인민군의 일원으로서 아나키스트였다.
두루티의 일대기는 바로 스페인 아나키즘 전체의 발전을 정확히 웅변해준다. 반동적인 경찰과 마찬가지로 관제언론도 언제나 두루티를 상습적 범죄자로 간주하였고, CNT와 FAI에 대해서는 그들이 마치 단순한 살인집단, 강탈자들, 방화자들의 조직인 양 취급하였다. 그러나 사실 스페인 아나키즘 운동은 관념론적 특징을 강하게 띠었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금연주의자요 채식주의자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과도한 성생활과 같은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마드리드 어디에서든 FAI와 CNT의 대형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바와 카페의 폐업을 선언하였다. 아나키스트의 자기희생은 당시 마드리드에서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은 아나키스트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말은 CNT-FAI의 이념이 좋은 점이 없다거나, 당시 엄청난 희생을 요구한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CNT와 FAI가 전체적 힘을 동원할 수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루티의 죽음은 스페인의 모든 민중세력들에게는 엄청난 손실이었던 것이다.
두루티는 스페인의 두 산업노조조직의 통일을 위하여 백방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훈련된 스페인 인민군을 잘 대변한 가장 중요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인민전선의 모든 당파들뿐만 아니라 정부와 스페인의 모든 공화주의자들까지도 그의 죽음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후크 슬레이터(Hugh Slater)
그들의 지도자, 두루티는 누구인가? 몬테비데오에서 두루티는 갱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범죄에 대해 남겨진 기록에는 그가 사라고사 추기경의 살해와 관계되어 있다고 적혀 있으며, 히혼은행을 습격하여 5만 페세타를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스페인과 칠레 경찰은 전국에 그의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칠레 경찰은 두루티가 칠레의 한 은행 지점을 습격했다는 죄목으로 수배령을 내렸던 것이다. 쿠바 경찰도 이와 유사한 죄목으로 그를 수배하고 있었다.
1925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루티는 은행을 습격하였다. 그는 그 후 에 프랑스에 가 있었는데, 프랑스 경찰은 그가 스페인의 알폰소 국왕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그를 수배했다.
스페인에서 공화정이 공포되었을 때 두루티는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자신의 부하가 등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문제는 노획물의 분배였다. 마드리드 정부의 그 잔인한 여성 공포정치가, 파시온아리아(Pasionaria)는 거창한 그의 장례식 때 그를 해방투사의 전형으로 추켜세웠다.
디미트로프와 또 다른 사람들이 스페인에서 해방시켜 준 그들은 하등 인간들이었다. 카를 마르크스 사단인 철갑원정대는 그들의 편에 서서 덤덤탄으로 그들의 포로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칼 게오르크 폰 슈타켈베르크(Karl Georg von Stackelberg)[4]
1936년 11월, 작은 아나키즘 노조조직원이었던 우리는 소비에트연방을 방문하였다. 그 나라의 노조는 혁명 이후 그들이 수행했던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우리의 관심사는, 내전과 국제 파시즘이 우리에게 몰고 온 그 어려운 상황을 러시아 노조원들과 인민들에게 설명하는 데에 있었다.
우리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의 대표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두루티가 이미 그곳에서 낯선 사람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소비에트연방 언론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는 내전에서의 그의 행적뿐만 아니라 1900년 7월 이전까지의 행적도 다루고 있었다. 당시에 이미 러시아 언론인들은 바르셀로나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를 방문하였고, 그때 그와 가졌던 몇 가지 인터뷰 내용까지 출판하였다. 러시아 인민들은 두루티가 아나키스트였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경우는 아주 특별했다. 왜냐하면 그 러시아 기자들은 다른 아나키스트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기사로 싣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파시온아리아, 디아스(Díaz), 미헤(Mije)와 같은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스페인에서보다 러시아에서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에는 공산주의 신문들만 있었고 다른 모든 신문들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기 쪽 사람들과만 늘 접촉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두루티만은 예외로 다루었던 것이다.
키예프Kiev 인민 행정 및 군 당국자들, 학계 대표자들이 그 도시의 최고급 호텔 대강당에서 우리를 위한 환영 행사를 열었다. 우크라이나의 공직자들 모두가 참석하였다. 키예프의 수비대장을 맡고 있던 한 노장 볼셰비키가 환영인사를 했다. 환영인사를 마치고 두루티에 관한 정보를 참석자들에게 알리면서 그는 ‘스페인의 위대한 유격대원’을 위하여 잠시 묵념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 공직자들만 두루티를 칭송한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구역에 거주하는 몇 명의 노동자들을 방문하였다. 우리는 1918년 투쟁에 참가했던 한 금속 노동자를 만났다. 그는 조그마한 목조가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대가족을 부양하면서 정말 비참하게 생활했다. 그는 스페인 전쟁에도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옷장에서 낡은 책을 한 권 꺼냈다. 누렇게 변색된 코로렌코(Korolenko)의 작품이었다. 그는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를 그 책 속에 끼워놓았었다. 「프라브다Pravda」 지에 실린 두루티의 사진과 그의 전기에 관한 기사였다. “무엇하러 그것을 간직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에게 물었다. “그가 진실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는 노동자들을 기만한 그런 사기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계속 책장을 넘겼다. 또 다른 신문 초록이 있었다. 그 종이는 더 낡았다. 낡은 사진의 주인공은 옛 아나키스트 지도자 네스토르 마흐노였음을 우리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노동자는 러시아 혁명 때 마흐노의 활동과 그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마흐노는 가장 위대한 러시다 혁명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설명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가 단지 노상강도였다고만 가르치고 있죠. 두루티가 죽고 없는 지금 그들은 그에게도 그렇게 할지 모르니 조심하세요.”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익명 3
두루티가 죽고 없는 오늘날 그를 탕아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부류들 가운데는 부르주아지들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조차 끼어 있다. 갑자기 그에게서 장점을 찾아내려 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목적에 그를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스페인 목사들은 그를 적색 그리스도교 신자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가 살아있을 때 그들은 그를 공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르셀로나 교회의 은밀한 지하실에 숨었던 것이다. 그곳은 가장 안전한 요새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총질을 했었다. 움직이는 모든 것에다가. 그리고 부르주아지들은 끊임없이 외쳐댔다. 아나키스트들이 교화를 방화한다고! 그때는 우리 몸을 보호하기에도 바빴다. 그가 생존해 있던 당시에는 그를 범죄자로 몰아세웠던 그들이 이제는 그를 성자로 만들고 싶어 하다니!
에밀리엔느 모린
나는 신문에 게재된 기사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의 영웅의식을 보았다. 물론 카페의 한 구석에서, 집에서 혹은 감옥에서 그를 알았던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두루티의 재량으로 수백만 페세타가 쓰였지만, 그는 늘 안쪽에 가죽을 덧댄 구두를 신고 다니던 것을 나는 보았다. 그는 돈이라고는 한 푼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선공에게 구두를 맡겼던 것이다. 우리가 그를 바에서 만났을 때, 그는 커피 한 잔 주문할 비상금도 수중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감자 껍질을 벗기기 위해 흔히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부인이 바깥에서 노동을 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남성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남자가 가정 일을 한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날에는 사회를 억압하는 세계와 투쟁하기 위해 그는 권총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그는 그 일을 마치 전날 저녁에 어린 딸 콜레트의 기저귀를 갈아주었던 것처럼 확실하게 처리하였다.
프란시스코 페리세르(Francisco Pellicer)
많은 사람들은 만일 두루티가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한 당과 반대 당 사이의 투쟁이 아니었다. 우리의 전쟁은 국제적 갈등이었다. 만일 스페인 군부가 이탈리아와 독일과 같은 국제 파시즘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쿠데타의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은 물론이고 감히 그것을 획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카르도 산스 1
우리는 그를 영웅이나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도자나 총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두루티의 역할을 두고서 영웅숭배와 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는 단지 인간에게 없어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가치와 용기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우리 시대에 체 게바라(Ché Guevara)가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두루티는 결코 이론가가 아니었다. 즉 그는 다른 사람들이 투쟁하고 있는 동안 탁상공론만 하는 그런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실천가였다. 그는 거리로 나가 투쟁하였고 가장 큰 위험이 있는 곳에 항상 서 있었다.
페데리카 몬트세니 1
나는 두루티가 선천적인 아나키스트였음을 어느 날 갑자기 알아차렸다. 그는 지방 출신이었고, 외모에서 촌티가 풍겼다. 그는 자주 생각에 잠겨 자신의 일에 골몰했다. 하지만 그는 지성인은 아니었다. 이론적인 교양은 나중에 가서 터득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카스티야 고지의 레온 시 출신으로서 시골 사람들이 지닌 그런 힘과 강인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파디야(Padillas)와 피사로(Pizarros)와 같은 옛날의 정복자들을 닮았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많은 양의 독서를 하였다. 특히 우리의 고전 아나키스트들, 안셀모 로렌소(Anselmo Lorenzo), 엘리제 르클뤼(Elisée Reclus), 리카르도 멜라(Ricardo Mella)를 많이 읽었다. 특히 프랑스 아나키즘 철학자였던 세바스티앙 포레(Sébastien Faure)를 즐겨 읽었다. 그의 교양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 기초만은 항상 확고했다.
그 밖에도 그는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경우 이념은 시간 때우기 식의 여흥이 아니었다. 그는 이념을 실천으로 옮겨놓으려 했다. 이것을 후세 사람들은 그의 영웅의식이라고 불렀다. 확실히 그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치 유혹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선량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일관된 생각은 언제나 연대의식이었다.
그의 잠재적인 의지는 모든 점에서 뛰어났다. 그러한 의지는 수감되어 자포자기한 사람들을 도운 감옥소에서도 잘 나타났다. 두루티는 육체적 의미에서든 도덕적 의미에서든 우울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가담했던 가두투쟁과 파업, 압제타도와 같은 위험한 상황의 투쟁에서 그는 단호히 대처했고,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실패했을 때에도 굴복하지 않고 바로 다음의 투쟁을 구상하였다.
우리는 마치 그러한 투쟁에는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가담하지 않은 듯이 두루티의 일생만을 지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우리 운동에는 수천의 이름 없는 두루티들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루티만을 알고 있고 다른 이름 없는 두루티는 알지 못한다. 투쟁에서 그들은 대단히 용감했고 단호하게 행동했다. 그들도 두루티나 아스카소처럼 적지 않은 위험을 경험하였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동지들을 그 전쟁에서 잃었던가! 1919, 1920년 이래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쓰러졌으며, 마르티네스 아니도의 탄압 아래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생명을 잃었던가! 당시 적어도 5백 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들은 우리의 가장 훌륭한 동지들이었다. 우리가 고인들을 애도하고 숭배하려면 많은 일을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귀감으로 삼아 우리의 현실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귀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일이다.
나는 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본다. 우리는 숫자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우리 쪽에 이성과 정당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말과 글 그리고 행동으로써 매일 새롭게 입증해 보여야 한다. 우리의 출판물이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지 않을뿐더러 그 양도 극히 보잘것없다. 우리는 망명 중에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모국어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프랑스로 망명한 동지는 극히 적은 수이다. 이 상황을 극복해야만 한다. 우리는 현재의 난관을 뛰어넘어야 한다.
후안 페레르
두루티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살았다.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나는 그러한 그를 자주 부러워했다. 그의 생활은 정말 올바른 삶이었다. 그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물론 그가 죽고 없는 지금에는 모든 사람이 그가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칭송하려 한다. 그들은 그가 살았을 동안에는 그를 범죄자인 양 몰아붙였던 것이다. 지금은 부르주아지조차도 그를 훌륭한 인물로 여기고 있으며, 신부들은 그의 시신을 미라로 보존하고 싶어 한다. 죽은 혁명가는 언제나 훌륭한 혁명가인 모양이다.
코레테 마르로트(Colette Marlot)
그가 여기 이 방에 언제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는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입을 다물도록 주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매우 겸손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CNT에 관해서 말하고, 의미 있는 것을 이야기하되 나에 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마누엘 에르난데스
물론 두루티는 마음이 착했지만 행동은 단호했다. 그런데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이념은 옳았으며, 아무도 그것에 이의를 달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가장 현명하다고 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예, 물론 여러분의 생각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유토피아일 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대응했다. 그렇지 않다, 여기 오늘날에조차 우리 이념의 일부분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다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려면 우리는 자본주의 권력과 국가의 억압기구를 계산해야 한다. 그런 권력은 공산주의 내부에도 계속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 권력을 타도하든 이에 맞서든 할 것이다. 이 권력에 맞서려는 사람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선량할지라도 야수처럼 투쟁할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은 강요된 투쟁이다. 우리는 지난 싸움에서 강요된 투쟁을 선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후안 페레르
나는 가능하다면 빨리 스페인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그것은 가족 때문이 아니라 계속 활동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가 젊었을 당시와 똑같은 투쟁이 있다. 당시도 그랬지만 내 나이 일흔다섯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나의 고정관념일 수 있지만 어쨌든 나는 레온 시로 돌아갈 것이다.
파시즘은 우발적 사태였으며 역사의 단절일 뿐이다. 나는 착각하고 있지 않다. 프랑코가 죽더라도 역시 그와 다를 바가 없는 다음 타자가 등장할 것이다. 아마 더 악한 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여러분은 알는지? 역사는 언제나 그렇지 않던가! 우익정권이든 좌익정권이든 아니면 중립정권이든 간에 여러분은 결국 그 정권이 나쁘다고 하여 바꾸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얻는 것은 무엇인가? 더 나쁜 정권일 뿐이다. 만일 달라졌다면 세계가 이미 파라다이스로 변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반대였다. 장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투표하고, 투표하고, 또 투표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동일할 것이다. 하지만 1백만 명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는 프랑코가 제거되어 내가 레온 시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리고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플로렌티노 몬로이
물론 스페인 망명자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직을 잘 갖추었다. 그들은 매달 회비를 내고 있다. 아나키즘 신문도 계속 나오고 있다. 나는 그 신문에 실린 기사의 내용 모두를 기꺼이 믿고 싶다. 그러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너무 단순하고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어는 대체로 딱딱했다. 내가 생각한 바를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그들의 주장에 따를 수 없다. 그들 대부분은 스페인으로 돌아가―그렇게만 된다면―1936년에 자신들이 중단했던 그때 그 일을, 거기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만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 버린 것은 지나간 것이다. 똑같은 혁명을 우리는 두 번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에밀리엔느 모린
[1] 편집자 주 - 「크로니카」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발행된 신문이다. 1963년 7월 29일 발행인 엑토르 리카르도 가르시아Héctor Ricardo García에 의해 설립된 이 신문은 커다란 헤드라인과 황색 저널스러운 접근으로 유명해졌다. 가르시아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신문이 너무 평온했기 때문에, 우리는 중앙아메리카에서 보는 것과 같은 크고 충격적인 헤드라인이 필요했습니다.”
[2]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메달. 1830년 파리에서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뒤 제작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준성사 성물로 취급하여 사용한다―편집자 주
[3]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그리스도교 역사상 1572년 8월 24일(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 부터 10월까지 있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추종자에 의한 개신교 신도들을 학살한 사건을 뜻한다-편집자 주
[4] 나치의 선동가-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