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맥케이
원시주의에 대한 반론들
원시주의 유토피아를 확보하는 문제에 관하여
<자유>지에게
나의 아이디어에 관한 카렌 고아먼의 요약(2010년 1월 4일호)는 놀랍게도 내가 쓴 것과 너무나도 달라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단지 나의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시주의의 지지자들은 가끔 우리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첫 번째 답신에서 혁명을 수행한다는 어려움을 겪어낸 인민들이 과연 모든 것을 (당신들의 “흑녹회보” 1호에서 말한 양)이전과 같이 내버려둘까 의심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나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합니다. 카렌 고아먼이 나를 “현대 산업 사회”의 옹호자라고 낙인찍는 것은, 내 입장을 다소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시주의적” 경구들 모두를 한 번 보십시오. 첫 번째 “회보”는 원시주의가 “석기시대를 우리 유토피아의 모형으로 두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카렌은 이제와서 “우리 선사시대의 15만년”이 “모형이자 예시”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소규모 토지기반 문화” 원시주의가 농민 공동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채집과 수렵”을 하는 부족들을 요구한다고 말합니다.(“자영농과 소농들”이 “Wildfire지의 작가들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원시주의자들은 석기시대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러고 싶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농민의 삶이 “고된 일을 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를 “추구합니다.” 아마도 제르잔[1]이 옳았고, 언어는 사악한 것이니 그에 맞서 싸워야 했나봅니다.
그리고 “흑녹회보” 1호 전체는 “문명이 그 자유의지에 따라 무너질 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이,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순간에 파괴된다는 것 말입니다. 원시주의자들을 압박하면, 즉각적 혼란과 그로 인한 대규모 기아사태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결국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사실을 지적하면, 화를 냅니다!
카렌은 레토릭과 현실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녀는 내가 “인민들이 군사적/산업적 생산으로 가득한 수십년간 만들어진 핵폐기물과 산성폐기물을 관리하는 것”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기술자들이 산업주의의 유산을 관리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사람들의 눈 바깥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사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산성 폐기물과 핵폐기물을 관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라는 겁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관리할 것입니까? 흑녹회보는 노동자 자주경영을 반대합니다. 그리고 (폐기물)관리의 수단으로 기술과 산업이 필요할 것인데, 그것도 반대합니다. 그러니까 이 과업이 어떻게 수행될 수 있겠습니까? 폐기물을 다른 지역에 버릴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카렌은 이런 식으로는 환경을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있겠지요. 썩어가는 산업폐기물더미는 인간이 만든 장벽 따위로 멈출 수 없을테니까요.
카렌의 답신에서 보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답변이 원시주의적 유토피아에 도달할 방법이라는 기본적 문제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카렌은 “소규모 토지기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해서 영국에서 살아가는 5,800만 인민들을 어떻게 먹여살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 문화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도 말입니다. 이것이 내 비판의 요체입니다. 그리고 이 비판에 대해, 어떠한 “원시주의자”들도 인지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답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원시주의자들이 노동자 자주경영도, 연방주의도, “산업사회의 지속”도 거부하고 있음을 바라볼 때, 나는 원시주의가 대규모 기아와 가난을 동반하지 않고 이루어질 방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원시주의”는 원시주의자들이 말하는 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이상향에 도달하는 실질적 방법을 논의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나는 도저히 원시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원시주의자들이 실질적 방법을 논의하지 않는 것은, 그 방법이 그들이 “전통적” 아나키스트들을 헐뜯어온 모든 내용들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노동자 자주경영이나 연방주의나 산업의 활용과 같은 “이행기”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전통적” 아나키스트들이 “산업사회의 지속”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의 총체적 변혁을 원하는 것임도 인정해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변혁이 하룻밤에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산업/기술의 배제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 것 뿐입니다.
카렌이 내가 그녀의 유토피아에서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것이라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나에게 거기서 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주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기술수준을 원하는지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은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산업”이기에 우리가 (다른 방식을 선택할 여지 없이)원시주의적으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미안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는 말은 약간 권위주의적으로 들립니다. 적절한 기술의 사용이 “대안”을 제공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말입니다.
이안 맥케이
"흑녹회보“ 2호 비판
<자유>지에게
“대형 사회”라는 기사에, 그 기사를 쓴 “Wildfire Collective" 구성원의 서명이 없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도 그런 잡설에 내 이름을 서명하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너무 강하다고요? 압니다. 하지만 그 자가당착적이고 피상적인 기사를 읽어야 하는 독자들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 말은 정당합니다.
우리의 익명동지(WF라고 부르겠습니다.)는 아나키즘을 적대하는 모든 오래된 주장들을 가져와서, “원시주의”를 위한 주장으로 이름을 바꿔놓으신 것 같습니다. “아나키즘은 복잡한 사회에서는 작동할 수 없다”고요? 그러시겠죠. “조직은 정부와 같다”고요? 암요. “사회는 국가와 같다”고요? 물론이죠! “현대사회는 관료제를 요구한다”고요? 굉장해요! “아무도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엄청나네요! 아나키스트가 아나키즘에 대한 편견들을 확인해주는 것을 읽느라 얼마나 우울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대안은? 대안이 적시되어있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우리는 가능한 최소규모로 운영되는 “소규모 토지기반 문화”를 확보할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서구인들이 이러한 농경생활로의 귀환을 환영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차라리 자본주의와 국가의 불평등과 압제를 선택하지 않을까요? 원시주의와 같은 적들만 있다면, 현 체제는 동맹을 구할 필요조차 없을텐데요.
그리고 이제 엄청난 자가당착 하나를 구경합시다. WF는 “왜 인민들의 행동이 그들이 사는 지역 주변의 자원에 의하여 정의되어야만 하는가”라고 지적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소규모 그룹 역시 필연적으로 그 방식으로 정의될 것이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유하는 미래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떠한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소규모 그룹들이 “사는 지역 주변의 자원으로 정의”되어 다른 이들에게 없는 자원을 가지지 않는다면, 무엇을 공유하면 되는 겁니까? 그러면 이 그룹들은 “외적 필요에 의존할 것”이고, 이는 나쁩니다. WF는 수일을 걷지 않고는 소통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지만, “진정으로 세계적이고 탈계급적인 인간 관계를 확립”하겠다고 말합니다. 대체 그들은 왜 “문화적 판게아”에 반대하는 겁니까? 그들의 “소규모 그룹”들은 주변에서 “문화들” 따위는 보지 못할텐데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누가 광산에서 일할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궁금증을 봅시다. 그들은 여기에 “나는 아니야!”라고 말합니다다. 역설적으로 WF는 자급자족적 소규모 그룹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선택지를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더 역설적인 것은 WF가 다른 아나키스트들이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단조로운 세계화를 추구하고, “서구 모델” 이상을 보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남반구” 사람들이 스스로 원하는 사회의 형태를 선택할 자유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서구에서 발생한 성공적 아나키스트 혁명은 “문명을 그 ‘놀라움’을 거부한 자들에게 수출”한다는 의미에서 제국주의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수 세계”의 사람들이 삶의 조건에 불만이 있고, 개선을(이를테면 정수장치나 기본의약품의 확보 등에서) 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나는, 진정한 아나키스트라면, 그들에게 원시주의적 판타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기술과 산업 수준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WF의 미래에 대한 상은 모순적임과 동시에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전통적 아나키즘에 대한 비판은 어떠하냐고요? 그것 역시도 부족합니다. WF는 런던에 대하여 말하면서, “도시는 도시로 존재하는 한 아나키스트적이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도시의 인구 규모와, 도시 유지에 필요한 자원과 조직을 듭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 묻습니다. 대체 어떻게 런던을 제거할 계획입니까? WF는 런던 규모의 도시를 남긴다는 것은 “빌어먹을 광기”라고 말하지만, 런던에 살고 있는 800만에게 무슨 “빌어먹을 광기”가 닥쳐올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대체 왜 이들이 런던을 떠나야 하는지? 어떻게? 어디로? 영국에 사는 나머지 5,000만은 말할 것도 없고, 런던의 800만명 전체가, “원시주의”가 요구하는 삶을 따라 잉글랜드 섬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겁니까?
WF는 만약 런던이 “남는다면”, “‘교외’에 살아가는 자들이 그 괴물을 먹여 살릴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요? WF는 런던에 살고 있는 800만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WF에게 런던의 800만 인구 전체가, 전체 인민대중의 적인 겁니다. 보아하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지 모를 누군가에 의하여 도시에서 쫓겨난 수백만 도시 인민을, “‘교외’에 살아가는 자”들이 얼마나 반겨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대규모 기아사태 같은, 인민의 요구와 열망같은 조그마한 문제를 왜 신경 써야 하겠습니까. 원시주의 유토피아로 나아가야 하는데요.
런던 규모의 도시를 자유의지주의적 방식으로 재조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WF의 주장의 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WF는 모든 대의원들이 만날 장소가 어디가 되어야 할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왜 모든 대의원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두 만나야만 한다고 상상합니까. 대부분의 문제들은 당사자들의 수준에서 해결될 수 있고, 광범위한 논의를 필요로 하지 않을 텐데요. 대부분의 소통은 직접적일 겁니다. 공동체 A가 사업장 A에 연락하여 생산물을 요청하고, 사업장 A는 사업장 B에 연락하여 자재를 요청하고. 이렇게 말입니다. 광범위한 협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방들의 대의원들만 필요할 것이기에, 거대한 수가 한번에 만날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WF는 “북반구의 사람들이 남반구의 공동체를 설득하여 원자력 사용을 자제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을 깊게 고민하고 있는데, 세상에는 e-mail이라는 것이, 전화라는 것이, 편지라는 것이, 문서수발이라는 것이, 비행기에 대표단을 태워보낸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아니면 불매운동이나, 파업같은 직접행동도 가능할 것이고? 최소한 시위행진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니면 해당하는 연방 총회에서 항의의 의사를 밝힌다던가?
그러니까 “우리 공동체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리게 하겠는가?”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과 똑같이 하면 됩니다. 선출되고, 위임되고, 소환가능한 대의원을 통해서요. 불가능하다고요? 프랑스 혁명기에는, 스페인 혁명기에는, 최근의 아르헨티나 반란에서는. 원시주의적 방법보다 잘 기능했던 것 같은데요? 이러한 체계는 타인과의 합의를 도출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포함할 겁니다. 하지만 자유라는 것은 당신이 언제나 휘두를 수 있는 미성숙한 열망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유는 자유의지주의자들이 열망하는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사랑하는 원자화되고 협소하며 패배적인 개인주의에 불과합니다.
인민에 의한 자주관리는 산업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WF는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것이 “기술과 기능을 소수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반대입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용하는 기술과 기능을 통제하는 것은 사용자들이 통제하는 것보다 더 다수가 통제하는 것입니다. WF가 “강요된 분업”이나 “노동자 자주착취”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언어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맞습니다. 생산은 이루어져야 하고, 각각의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을 포함한 서로 다른 과업들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강요된 분업”이라면, 그렇지 않은 생산은 없습니다. WF의 “소규모” 그룹에서도 똑같을 겁니다. 아니면, 식량을 얻기 위한 노동은 “강요된” 것이 아닌가요? 그 노동을 하지 않으면 굶어죽으니까요? 그게 맞다면, 흔해빠진 자본주의적 임노동 옹호가 되겠네요.
비원시주의 아나키스트들은 생산이 “지속적으로 원자재를 필요로 하는 것”임을 압니다. 맞습니다. 이는 생태를 파괴하겠죠. 하지만 WF가 원하는 대로 문명이 붕괴한다면, 생태는 파괴될 겁니다. 원자로는 멜트다운될 것이고. 버려진 산업에서는 산성 폐기물과 원유 유출이 생기겠죠. 산업 사회의 유물들은, 지배계급이 그러한 것처럼,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사회 변혁의 과정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WF가 그토록 거부하는 “산업적 발전”이 그 역할을 다할 때입니다. 기술은 사용하는 자에 따라, 기술의 가장 불쾌한 측면을 줄이거나 심지어 없앨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활동의 결과물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변화를 만들겁니다. 맞습니다. 태양광 판넬을 만드는 데에는 자원이 소모됩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것이 모든 집에서 석탄을 때는 것보다는 생태를 덜 파괴하겠죠. 이것이 “진보”입니다. 반-진보의 신도이신 WF씨는, 자원을 절약하고 오염을 줄이는 진보들에도 반대하시겠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원시주의의 다른 문제가 드러납니다. 원시주의는 진보를 숭배하는 자본주의의 거울상입니다. 원시주의와 자본주의는 반인간이라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아나키스트들은 진보를 더 복잡한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위계적 사회에서의 “진보”는 그 안에 내재한 권력에 의하여 모양이 잡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는 진보가 자본주의자들이나 기술혐오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립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보”에 대해 유사종교적으로 반대하는 것보다는, 생각을 하고, 특정한 기술과 생산의 구체적인 형태가 가지고 있는 비용과 효용을 점검하고, 그것을 개선하거나 변화시킬 방도를 고민하고, 필요하다면 그 중 일부를 완전히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아나키스트들이 오랫동안 주장하여 온 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며 창조하는 인민들이 이것을 행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WF는 원시주의의 핵심 문제를 드러냅니다. 원시주의자들에게 기술, “대형 사회”, “문명”은 중립적인 것입니다. 원시주의자들에게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선천적으로 “악한 것”이지, 그것에 영향을 받는 인민들의 열망이나 그것들이 구성하고 있는 체계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들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지할 때에야 우리는 출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 자주관리가 “자주착취” 따위가 아니고, 기술과 생산을 생태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바라봅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투쟁과 혁명에 스스로 조직하고 대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사회를 인간화하고 자본주의와 국가라는 야만에 의하여 왜곡된 문명을 “문명화”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회는 현존 문화, 기술, 기능 최선치들만을 모아내어, 다양한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경험하는 개인들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WF는 “좌파들은 원시주의자들이 <매드 맥스>적 디스토피아를 원한다고 주장한다”며 불평합니다. 이 기사가 증명하는 바, 나는 “좌파”들이 여기서는 옳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안 맥케이.
Wildfire Collective와 원시주의
<자유>지에게.
“Wildfire Collective"(이하 ”WC")의 두 구성원들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두 편지 모두가, 원시주의의 빈곤을 강화합니다. 이들은 내가 제기한 문제에 답하기보다는, 나에 대하여 인신공격을 가하고, 나의 주장을 왜곡합니다. 이들은 내가 “독설가이며, 거짓과 반쪽진실을 말한다”고 비난합니다. 이들의 편지에서 모욕과, 창조와, 회피와, 자가당착을 제외하고 나면, 적혀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 편지의 대부분은 단순히 나의 주장에 대한 역겨운 왜곡입니다.
“Wildfire 1"(이하 ”WF1")은 내가 “만들어낸 쉼표를 통해 두 가지 입장을 추가삽입하”였고, 그것이 “부정직하며 잘못된 대변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내 편지의 문맥을 보면, 나는 내가 그들의 원문에서 인용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고, 나의 독자들도 그것을 압니다.
“조직은 정부와 같다”는 주장을 바라볼 때, 대체 WF1이 불평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회보”의 2호는 분명히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는 바, 내가 “상상 속 ‘소환 가능한’ 미래의 정치인이 되기를 원해 마지 않는다”는 발언에서, 나는 이것을 더욱 확신합니다. 이 말을 한 사람과, 내가 조직이 정부와 같다고 “추가삽입”하였다고 공격하는 사람이 동일한 사람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의 동지는 자신의 편지에서 “소환가능한 대의원단은 통치의 다른 형태”라고 주장하고, 개인이 참여한 집체적 결정마저 “노동자 민주주의에 짓눌려 사라질 것”이라 폄하합니다. 작업장이 되었건 “소규모”공동체가 되었건, 조직이 있다면 결정이 이루어져야 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결정에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결정이 100%의 동의로 이루어져야 한다면, 99% 구성원들의 의견이 “외로운 목소리”에 “짓눌리는 것” 아닙니까? 이는 협동에 관한 굉장히 독창적인 접근을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정확히 당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당신이 억압당하는 것이라는 견해 말입니다. 나의 “추가삽입”이 “부정직하기보다는 올바른 것이 아닙니까?
WF1은 내가 “다수 세계에서의 ‘제국주의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제안한다고 말합니다. WF1은 <자유>지의 독자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합니까? 이들은 나의 답변을 읽었고,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인용”한 것은, 당신이 “전통적” 아나키즘에 대항하여 세워놓은 허수아비를 따라 말한 것 뿐, 그따위 헛소리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문맥을 읽어보면, 이것이 사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WF1이 나의 글에서 따옴표를 삭제하여 인용구를 수정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되겠지요. 대체 얼마나 부정직해질 수 있는 겁니까?
WF1의 소아적 언급은 정말로 답변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저 내가 “뎀을 원하지 않는 사파티스타”처럼 자본주의적 진보의 요구를 거부하는 이들을 지지함을 밝히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말하였듯이,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진보”는 권력과 부의 불평등에 의하여 규정됩니다. 나는 이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모든 진보가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관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요. 그리고 나는 전 세계가 “원시주의적”이기를 원하는 누군가가 나를 “제국주의자”나 “권위주의자”라고 부를 용기가 있다는 역설에 놀랍니다. 그것도 분명하게 “(남반구의 기술과 산업 수준에 관해)진정한 아나키스트라면, 그들에게 원시주의적 판타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기술과 산업 수준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힌 이후에 말입니다.
WF1은 내가 “‘서구의 진보’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항하는 파업을 조직”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재미조차 없습니다. 아마도 그가 던진 질문, 그러니까 “북반구의 사람들이 남반구의 공동체를 설득하여 원자력 사용을 자제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답변을 남긴 것을 보고 말한 것 같습니다. 이는 내 주장에 대한 완전한 왜곡일 뿐 아니라, 매우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나는 (남반구)사람들이 우리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설득할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고, WF1은 논의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의 동지들 역시 이에 대하여 불만을 표합니다. 그들은 직접행동이 “놀고 싶어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다수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강제”하기 위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불평합니다.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가 사람들이 “원자력을 사용하게” 내버려두면 되는겁니까?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 억압적이니까요? 제발 하나만 해주세요. 그의 글은 이 자가당착적 문단을 “불매운동이 실패할 때”, 나는 내 “스페인 내전의 영웅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반노동’ 분자들을 총살하고” 다닐 것이라고요. 그리고 이처럼 중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이러한 고발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 당연한 참고문헌(시드먼의 “노동에 반대하는 노동자”)를 읽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레퍼런스 있나요?
WF1은 내가 생태파괴적 기술을 다루는 방식 역시 왜곡합니다. 그는 또 다시 문맥없는, 수정된 인용구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내가 “생태파괴를 수용하거나, 생태파괴를 마주하거나의 미래”만을 상정한다는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아마 여기서 “생태 파괴”라는 것이, 내가 적었던 인간의 자원 이용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사용한 문맥을 볼 때, 나는 내 논리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산은, 가장 생태주의적인 생산이라 할지라도, 자원을 사용하고, 오염을 촉발할 것입니다. 이것은 “원시주의”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집을 짓고 난방을 하며 토지를 경작하기 위하여 나무를 베는 것은 “생태 파괴”를 촉발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환경과 상호작용함에 있어, 우리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삶의 질을 유지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지점을 편지에 명확하게 적었기에, WF1도 알것입니다.
WC는 이 해결책을 거부합니다. 왜 WF1이 나의 입장을 왜곡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그가 나의 논지, 즉 “WF가 원하는 바 문명의 붕괴는 (지배계급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 산업사회의 잔재”를 마주할 것이라는 논지를 무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WF1은 이를 거부하는 것 같고, 원자력 발전소들이 멜트다운하도록, 산성 폐기물이 수원과 토양에 스며들도록 내벼려두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는 혁명 이후에 그 생산을 지속하지 않더라도, 혁명적 상황 속에서 ‘산성’ 생산을 멈추고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왜 내가 그것을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잠깐, 했잖아? 나는 “우리는 사회의 변혁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루어야”하고, 그러면서도 “특정한 기술과 생산의 구체적인 형태가 가지고 있는 비용과 효용을 점검하고, 그것을 개선하거나 변화시킬 방도를 고민하고, 필요하다면 그 중 일부를 완전히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주장을 그대로 가져다가 나를 공격한다고요? 부정직하네.
이상하게도 WF1은 이 멈춤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노동자 자주관리를 거부하는 이상, 나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단순합니다. WC가 “원시주의” 사회가 즉시 발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수백만이 굶주려 죽는 동안 “운좋은” 소수가 살아남아 병원이나 책이나 전기같은 폭압에서 자유롭게 닭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원시주의”가 장기적으로, 산업을 멈추고 런던과 같은 도시를 해체하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다면, 이 과업이 노동자 자주통제 없이, 인민들의 자주적 조직간의 국제적 연결 없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행기가 느리다면, 그 기간 동안 어느 기술을 유지하거나/수정하거나/폐기할지 논의를 해보면 안될까요? 그냥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WC는 이를 선택지로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그 선택지를 제시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즉각적인 “문명의 붕괴”를 원하지, 장기간에 걸친 진보적 변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문명의 갑작스러운 붕괴가 죽음과 거대한 생태 파괴를 촉발하지 않을 도리를 제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처럼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회보”들은 이것을 제안하는 겁니까?
논리는 그들의 강점이 아닙니다. WF1의 동지들은 그들의 회보가 “미래를 위한 청사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회보가 주장하는 “소규모 토지기반 문화”가 미래를 위한 제안이 아니었다고요? 그는 원시주의가 “사회적 관계가 강제되는 않는 모형”을 거부한다고 첨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원시주의 유토피아를 달성할 방법은 논의하지 못합니다. 그는 도시를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지에 대해서도, 런던의 8백만 거주민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도 설명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습니다. “소규모 토지기반 문화”를 바탕으로, 영국인 5,800만명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은, 어느 원시주의자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WF1은 그가 “대규모 기아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는 나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당신들의 첫 번째 회보에서 말한 것처럼 “문명이 무너지면” 어떤 결과가 도출되겠습니까?
WC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전까지, 그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들이 “통치”의 새로운 형태라며 거부한 노동자 자주통제, 국제적 관계, 연방적 조직이 없이 어떻게 산업을 안전하게 멈춤과 동시에 대규모 기아를 회피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답을 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 답도 회피할까요?
단순합니다. 우리는 혁명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시작할 것임을 직시해야합니다. 아나키즘은 이를 인정하고, 사회 변혁의 수단을 제안합니다. 원시주의자들은 이러한 작은 문제들을 회피합니다. 그들의 레토릭이 아무리 극좌적으로 들리더라도, 원시주의에는 혁명적 관점이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WF1이 나와 “원시주의간의 오랜 전투는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웃어보도록 합시다. 그는 “<흑기>지와 <녹색 아나키스트>지의 독자편지 페이지들이 이와 비슷한 ‘구호들’로 오염되었다”고 주장합니다. WF1씨는 진실된 토론이나 제대로 인용하는 것에 서툰 만큼이나 문건화에도 서툰 모양입니다. 나는 <녹색 아나키스트>나 <흑기>지에 원시주의에 관하여 단 한 글자도 게시한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안 중요했는데요. WF1은 내가 “우스꽝스러운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잠재적 거짓을 노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나의 주장을 왜곡하고, 단순한 인용구조차 제대로 인용하지 않는 것을 보십시오. 누가 거짓을 말한다고요? 하지만 최소한 WC가 진실이나, 사회혁명의 문제에 관한 논의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아. 5,800만 영국 인민들이 “원시주의” 아래에서 어떤 꼴이 될 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별로 없었지요.
이안 맥케이
<녹색 아나키스트>의 테러리즘 찬양에 관하여
<아나키>지에게.
존 카터와의 인터뷰( <아나키>47호)에서, 그가 마이카가 “스코틀렌드에서 1998년 5월로 예정되었던 LGSC 연설 투어를 취소시키는데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러한 일은 발생한 적이 없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스코틀랜드 아나키스트 네트워크(SAN) 가 조직하고 있던 이 회의 투어는 마이카가 <녹색 아나키스트>지의 몇몇 기사들(특히 그 악명높은 “비합리주의” 관련 기사들)을 보여준 이후에 연기되었습니다. <녹색 아나키스트>지가 지속적으로 우리가 마이카 때문에 회의 투어를 취소했다고 주장해왔음을 강조해야겠습니다. 더구나, <녹색 아나키스트>는 우리 글래스고의 아나키스트들이 마이카의 주장에 의심없이 따르는 “양떼”와 같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스코틀랜드의 운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주장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역설적으로, 마이카를 따른 유일한 사람들은 마이카의 소망을 SAN의 결정사항이라 여긴 <녹색 아나키스트>뿐입니다.
그래서 왜 회의 투어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냐고요? 단지 마이카가 제기한 문제를 논의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이카는 투어의 취소를 원했고, 다른 동지들은 그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불운하게도, 우리가 마이카의 명령을 따르는 양떼라는 <녹색 아나키스트>의 추정이 투어를 효과적으로 취소시켰기에, 이 문제는 의미가 없어져버렸지요. 우리 모두가 동의했던 것은, 일반 대중에 대한 테러리즘을 찬양하고 있는 문제의 기사가 결코 아나키즘이, 그리고 당연하게도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이 “옳은 생각”이었다는 것은 매우 권위주의적인 입장입니다. 그리고 권위주의는 아나키즘의 숙적이지요. 나는 이러한 입장은 유나바머의 정치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아나키즘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인용해보겠습니다.
“194. 혁명가는 산업 체제가 심각한 압박에 놓이고 대중이 산업 체제를 명백한 실패로 인정하기 전까지는,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일체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 그러므로 혁명가들은, 산업 체제 자체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사람들이 그 모든 고통은 혁명가의 정책이 아니라 산업 체제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때까지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 기술에 항거하는 혁명의 주체는 외부자들이어야 하며, 위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혁명가들”의 목적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군요. 그것도 혁명적일 수는 있겠다만, 아나키즘은 아닙니다. 아나키즘은, 정치권력 확보에 반대합니다. 아나키즘은 정치권력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유나바머는 아나키스트 전통이나 아나키스트 운동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요즘의 아나키즘은 정치권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분파도 포함합니까? 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확보하려고 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아나키스트겠군요. 그리고 이렇게 보면 이 부분도 이해가 갑니다.
“193. 우리가 생각하는 혁명이 반드시 정부에 대한 봉기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폭력은 포함될 수도 있고 배제될 수도 있다. 단 우리의 혁명은 절대 정치적 혁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정치가 아니라, 기술과 경제에 혁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유나바머가 “정치권력”을 추구한다면 정부에 대항하는 봉기를 포함한 혁명은 위험합니다. 유나바머가 옛 주인님들에게 했던 것처럼 당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나바머가 결코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여온 <자유>지는 옳았고, 이것에 반박하던 코너의 시도는 잘못된 것이었던 겁니다.
다른 모든 전위당론자들처럼, 유나바머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의 중요성을 간과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89. 혁명가들은 최후의 투쟁 전에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적극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지닌 소수이지, 다수가 아니다. 다수는 대개의 경우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혁명을 향한 마지막 진격의 날이 올 때까지, 혁명가의 임무는 다수의 얄팍한 지지를 얻어내는 일이 아니라 깊이 헌신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핵심 집단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다수에 대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존재함을 알리고 수시로 그것을 되새겨 주는 일로 층분하다. 물론 헌신적인 소수의 집단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가진 소수가 다수를(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신세계로 영도할 것입니다. 귀에 익은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했던 것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적극적이고 결연한”(최소한 그래야 하는) “소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적극적이고 결연한 것은 아나키스트적 사고의 영향력을 키워 사회를 더 나은 것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사회운동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수의 “지지”따위를 얻기 위하여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수 대중이 스스로를 위하여 행동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건설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아나키즘적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치권력의 획득”을 추구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유나바머의 말들은 그가 얼마나 아나키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는 국가에 대항하는 대중운동을 거부하고, 다수 대중으로부터의 “지지”가 없더라도, 전위가 나아가 권력을 쟁취하는 것을 꿈꿉니다. 여기서 최선이 민주적 정부고, 차선이 독재입니다.
유나바머가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을 부정한 이상, 그가 “혁명가들”이 “산업 사회의 사회적 스트레스와 불안정성을 증가”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은 놀랍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마 “최후의 진격”에서, 새로운 주인님들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도울)다수대중을 “최후의 진격” 전까지 무시하는 이상, 혁명이 실질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녹색 아나키스트>가 왜 테러리즘을 지지하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테러리즘은 “사회적 스트레스와 불안정성”을 분명히 증가시키니까요. 그리고 이것이 다수대중의 의지에 반하는 혁명을 촉발할테니까요. 잊지 맙시다. 다수대중은 “생각이 없습니다.” 사회적 반란과는 다르게, 유나바머의 “혁명”은 강제로 사회를 자유롭게 하는 소수의 행동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의 촉매가 되는 것으로써, “산업사회의 불안정성”을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으로 바꾸면, 레닌주의가 되지 않습니까? 유나바머 혁명은, 자유로운 사회를 향한 주체적 반란이 아니라, 인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나바머의 유토피아로 향할 것을 강요하는 수동적 반동입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녹색 아나키스트>의 테러리즘 지지는, 그들은 아나키즘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권위주의와 전위당으로 향하게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대규모 기아”가 “대규모 정부”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작자들은 결코 자유의지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자유를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나키스트라고 자칭하는 작자가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자유가 수백만의 아사를 뜻한다면, 대중은 당연히 정부를 선호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덧붙이겠습니다. (존 코너를 인터뷰한 이가 말한 것처럼)“정치적 아나키는 원시 사회에서 말고는 존재해본 적이 없”다는 말은 흥미로운 점을 지적합니다. 만약 (아나키즘적 원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원시사회가 아나키가 가능한 유일한 형태라면, 우리는 지금 왜 국가주의적이고 산업주의적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만약 원시 사회가 선천적으로 아나키즘적이었다면, 최초의 통치는 어떻게 발생했을까요? 그리고 아나키즘적 원시주의자들이 목표로 하는 미래의 원시사회에서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녹색 아나키스트>가, 그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모두에게 가하는 모욕적 장광설로 이 편지에 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녹색 아나키스트>역시 그들의 정치에 감히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을 모욕하는 것에서 긍정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하면, 그들의 정치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겠지요. 무엇보다, <녹색 아나키스트>를 비판하는 모든 자들은 “노동자주의자”나 “좌익 아니키스트”나 “아나키즘적 리버럴”이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만약 아이들을 폭탄으로 살해하는 것이 “옳은 생각”이라고 찬양하지 않는 것이 나를 “좌익 아나키스트”로 만든다면, 나는 테러리스트의 치어리더가 되느니 “좌익 아나키스트”가 되겠습니다.
<아나키>지, 힘내십시오! 언제나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연대를 담아
이안
밥 블랙과 원시주의자들
<아나키>지에게
존 코너와 밥 블랙 모두가 너무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고 있기에, 누구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모르겠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블랙씨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코너씨, 안심하십시오. 조만간 당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할테니까요!
블랙씨는 “‘연기되고’ 재계획되지 않은 일은 취소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번 편지에서 말했듯이, <녹색 아나키스트>는 투어가 취소되었다고 생각했고, 결국 논의는 무의미해진 겁니다. 절반은 투어가 취소되었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절반은 다른 이들의 테러리즘 찬양을 두려워하는 와중에 투어를 조직하기는 어렵습니다. <녹색 아나키스트>로부터 출발한 모욕과 오염의 파도들이 소통을 의미없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블랙씨는 “기사 <비합리주의>가 절망적 테러리즘을 찬양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기사는 옴진리교와 오클라호마 폭탄테러가 “옳은 생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개적으로 이 테러리즘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블랙씨가 “좌익 아나키스트”들이 “지적이 일관되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똥묻은 개가 겨묻은개를 욕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블렉씨는 나를 “좌파 검열가”라고 부르며, 내가 “아나키스트들에게 중요한 것일 수 있는 문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문서는 아나키스트가 쓴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비판적 독해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블랙씨는 우리를 계몽하려 합니다. 블랙씨가 사용하는 어휘체계는 나의 어휘체계와 다른 것 같습니다. 나는 유나바머가 아나키스트라는 주장과, 그의 “혁명”에 관한 정치와 이론에 대하여 비판적 독해를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내가 어떻게 “좌파 검열가”가 되는 겁니까? 나는 “좌파”가 아니고 아나키스트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그 문건’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나키스트들은 ‘그 문건’을 읽지 말아야 한다거나? 아닙니다. 나 스스로 그 문건을 읽었고, 그것에 내재한 정치가 다소 권위주의적이라고 보았고,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아나키즘이 아닙니다)와 그 연관성을 확인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 연관있는 부분들을 인용하여 나의 주장을 뒷받침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검열”이 됩니까. 모욕을 주려는 블랙씨의 열정이, 그의 영리함을 앗아간게 분명합니다.
그는 “옳은 생각”이라는 것이 “극적 은유”였다고 주장합니다. 개소리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봅시다.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리스트들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더 이상의 관공서를 날려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최소한 200명의 정부 관료들은 더 이상 압제에 나설 수 없다.
“옴진리교는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공격 1년 전에 사린가스를 시험하면서 잡혀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충분히 비밀스럽지 못했다. 그들은 사린가스를 생산할 기술이 있었지만, 집행은 효과적으로 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들은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이들의 소독기술은 효과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하게도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나 일본 통근자들에 대한 학살 시도가 옳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동의입니다. 다르게 말하는 것은 단지 완전하고 순전한 넌센스일 뿐입니다.
블랙씨는 그가 이 기사가 “멍청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죠? 만약 그것이 단지 “극적 은유”일 뿐이었다면, 왜 “멍청”한겁니까? 아마도 이것이 은유가 아니어서가 아닐까요? 멍청하다는 것은, 자신의 정를 솔직히 표현한 글을 출판하고, 누구도 거기에 대하여 답하거나, 그들이 아나키스트가 아니라는 당연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보면 블랙씨는 옳습니다. <Fifth Estate>가 멍청한 기사를 출판하는 것과 <녹색 아나키스트>가 “비합리주의자”를 출판하는 것의 차이를 봅시다. 이 중 하나는 멍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근자들에게 독가스를 뿌리려 시도하거나 사람들을 폭파시키는 것이 “옳은 생각”이라고 합니다. 블랙씨는 이 둘의 차이를 알까요? 만약 모른다면, 그는 인간성을 잃어버린 겁니다. 만약 블랙씨가 정말로 내가 “비합리주의자”에 대하여 반박하는 것이, 단지 “불쾌해서”라고 생각한다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는 노엄 촘스키나 머레이 북친이 “정치권력”을 인정한다고 맹비난하면서도(이것은 옳습니다) 유나바머는 아나키즘의 측면에서 “일관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유나바머의 선언이 명확하게 “혁명가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할 것이라고 적시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확한 정치권력 수인이며, “혁명가”들의 집권에 대한 요구입니다. 블랙씨의 위선 역시 명확합니다. 블랙씨는 (본인에게 필요할 때마다)영어를 이해하지 않습니다. 테러리즘에 대한 지지는 “은유”가 되고, “정치권력” 획득에 대한 지지는 “일관성이 없는” 아나키즘이 됩니다. 블랙씨는 <녹색 아나키스트>가 “분명하게” 아나키스트라고 말합니다. 특정한 조류에 관한 논의를 할 때마다, 블랙씨의 그 유명한 비판적 기능은 정지합니다. 이것이 블랙씨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 필요성입니다.
블랙씨는 나의 “이별사”가 내 발등을 찍는다고 말합니다. 내가 답하고자 했던 것은 진지한 질문이었습니다. 블랙씨는 분명하게 나를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답신에서, 나는 그의 세 번째 주장에 동의합니다. 모든 형태의 아나키즘은 국가주의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나는 아나키즘이 잘 작동할 것이라고 보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주장은 질문을 부릅니다. 대체 왜 최초의 원시 사회는 그것이 국가로 타락하는 것을 예견하고 대응하지 못한 겁니까? 이들 역시 “미래의 원시주의자들”만큼이나 영리하였을 텐데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국가의 등장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미래의 원시주의자들이 그러할 수 있다는 기대가 합리적입니까? 원시사회의 본성이 자기 파괴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블랙씨는 나를 클론 양에 비교하며 글을 끝맺습니다. 즐거울 따름입니다. 내가 아나키즘에 대한 “존중”을 원하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아나키즘이 본질적으로 혁명적이고 반강권적이기를 원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유나바머와 <녹색 아나키스트>를 비판한 것입니다. 블랙씨가 생각하는 것 보다 모략질을 즐기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나는 “아나키즘이 함축된 원시주의를 학습하고, 그 방식으로 사고하”고 싶습니다.그래서 나는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왓슨의 <북친을 넘어>를, 다른 저작들을 읽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블랙씨가 분명히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대체 블랙씨는 왜 나를 양이라 바라보는 걸까요. 아마도 내가 그나 <녹색 아나키스트>에 동의하지 않고, 그 대신 그들의 사상과 정치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닐 겁니다. 네.
자. 이제 존 코너의 편지를 읽어봅시다. 나는 그의 필명이 톰 오코너인 것이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존 코너의 정치는 톰 오코너[2]의 농담만큼이나 끔찍하니까 말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아나키스트들이 (<녹색 아나키스트>가 임명한>) 양치기를 따르는 양때라는 멍청한 주장은 무시하겠습니다. <녹색 아나키스트>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면, 자유사상가이고 이데올로기로 규정되지 않는 혁명적 인간이겠지요. 만약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나 활동에 질문을 던지면, 양인 겁니다. 그렇게 칩시다. 그저 코너가 말하는 새로운 멍청한 주장들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코너는 내가 <녹색 아나키스트>가 “레닌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서 시작합니다. 아닙니다. 글을 숙독해주세요. 나는 분명히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와 레닌주의가 “유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가 <녹색 아나키스트>가 <Wildfire Collective>에 속한 “적극적이고 결연한 소수”라고 생각한다고 썼습니다. 아닙니다. 글을 숙독해주세요. 나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FC의 사상이 <녹색 아나키스트>가 테러리즘을, 아나키스트들이 “적극적이고 결연한 소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썼습니다. 안타깝게도, 코너의 편지 뒷부분이라고 더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편지를 자명한 거짓말로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분위기를 잡기에 좋은 것은 없지요.
<녹색 아나키스트>는 “수당청구자에게 복지 개혁에 관한 유인물을 돌리는 것”은 “종교적인 정치행동”이며, <녹색 아나키스트>가 하는 것보다 더 “대중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고, 기만적이며,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녹색 아나키스트>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에게 그들에게 부과될 국가의 계획을 알리고, 그것에 저항하여 스스로를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일은 “대중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고, 기만적이며, 헛된” 것입니다. 암요. 다행스럽게도, 많은 사람은 그 반대로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민들을 사실과 주장들을 제시함으로써 설득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개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니까요.
코너는 내가 “저항이 ‘다수’에 의하여 승인되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다수”라고 말할 때, 이것은 나 자신과 다른 “SAN 종자들”을 의미한다는 비아냥을 더합니다. 오류적이고, 따분하며, 멍청합니다. 먼저, 내 글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내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기에, 그가 인용할 것도 없던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물론 코너께서는 내가 “좌익 아나키스트”인 것을 알고 계시기에, 근거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다음으로, 코너의 거짓말들 속에서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가 얼마나 꼬였는지가 드러납니다. 나는 “비합리주의자”에서 찬양된 바 대규모 테러리즘(그러니까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나 옴진리교 같은 것 말입니다. 잊지 맙시다. <녹색 아나키스트>는 이것들이 “옳은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코너는 이러한 행동들이 “극도의 억압이라는 조건 하에서 조정되지 못한 저항”의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비합리주의자”가 “레비아탄 적 구조”를 “해소하는 것을 논의하는” 기사였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를 집고 넘어갑시다. <녹색 아나키스트>에서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녹색 아나키스트>에 동의하여 옴진리교와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가 “옳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좌파”고, “노동자주의자”고, 등등으로 비아냥이나 듣습니다. 다음. 코너는 “조정되지 못한 저항”의 예시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과정과 동일하다고 바라봅니다. 그는 내가 이러한 행동을 “일반 대중에 대한 테러리즘”이라고 “중상모략”하고, 그것이 “특정한 억압된 인간이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라고 바라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행동”이라는 것이, 관공서를 폭파시키고 통근자들에게 독가스를 뿌리는 것이었음을 잊지 맙시다. 코너가 하는 말들(과 그 정치)가 광기어린 것임은 명확합니다. 그의 언명들은 지난 2년간 바뀌지 않았습니다. <녹색 아나키스트>는 여전히 그러한 행동들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녹색 아나키스트>가 유대인 학살이나, 작년 런던에서 발생한 네오나치들의 “두려움 없는” 사제폭탄 테러의 중요함을 천명할 때는 언제일까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는 바 나는 “정통성과 대표성”을 “고려”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나는 “권력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집중하고 이양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혁명의 경찰관’이라는 전형적인 좌파의 역할”에 “빠져드는” 것도 같습니다. 대체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었습니까? 오히려 나는 공개적으로 정치권력의 파괴를 부르짖었습니다.(“아나키즘은 정치권력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아나키즘은 정치권력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는 유나바머야 말로 정치권력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코너는 <아나키>독자들의 지성이, 나의 글을 저렇게 오독할 정도로 낮다고 멸시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나는 <흑기>지의 “<녹색 아나키스트>가 ”대규모 기아“가 ”대규모 사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는 중상모략”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물론, 내가 쓴 말은 ““대규모 기아”가 “대규모 정부”보다 낫다”였습니다.) 이들은 이 “중상모략”에 대한 신경질적 이야기들을 또 다시 보여줍니다. 정확하게 말합시다. 나는 <흑기>지의 주장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회의에서 내 귀로 들은 바를 썼습니다. 물론 내가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그 방에 가득 차있던 사람들 뿐입니다. <녹색 아나키스트>구성원 여러분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말씀드리자면, 제가 바로 그 스코틀랜드 억양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기억을 조금 더 돋우어 드릴까요? 그 발언을 한 사람의 핸드폰이 회의 중간에 울렸습니다. 그리고 도날드 루움 동지가 원시주의 사회에서의 전염병 위험에 대해 질문한 것은 기억하시나요? 그 질문에 대한 <녹색 아나키스트>구성원의 멋진 대답은요? 우리는 원시주의 사회에서 전염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왜냐하면 인간의 공동체는 아주 작을 것이라, 질병들이 단지 한 공동체만을 쓸어내고 더 이상 퍼지지 못하여 전염병이라 분류되지도 못할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녹색 아나키스트>구성원들은 대체 어떻게 현재의 60억 인구가 수렵과 채집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지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과도한 인구는 그냥 연기처럼 “사라지나” 보죠? 아니면, 아마도, 여기서 대규모 기아가 등장하는 겁니까? 제발 이 질문들에 명확히 대답해 주세요. 60억명이 원시주의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적정 인구수준에는 어떻게 도달하게 됩니까?
<녹색 아나키스트>는 역사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히 내가 “진실을 가지고 논다”고 말할 용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굉장합니다!
코너가 “대규모 사회”가 “대규모 기아”를 촉발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연구 결과는 다르게 나오는데요.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연구는, 계급사회와 그 생산물 분배, 사적소유가 대규모 기아를 촉발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식량의 충분함 여부와는 무관하게 기아는 발생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식량은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기아가 발생하는 지역에서 수출됩니다. 대규모 기아를 촉발하는 것은 “대규모 사회”가 아니라, 특정한 소유관계, 특정한 분배형태를 가지고 있는 특정 형태의 사회, 즉 계급사회입니다. 이를테면, 만약 노동자들이 토지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한다면, 기아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적소유가 없다면, 사람들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생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녹색 아나키스트>의 너무나도 급진적인 “원시주의”가 현대사회에서 왜 기아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현대사회에서의 기아는 “대규모 사회”와는 무관하고, 오히려 자본가들과, 토지와 권력의 분배와,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적 체제와 더 큰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아의 진정한 요인에 대한 분석은 “대규모 사회”는 필연적으로 위계적이라는 모호한 어구로 가려집니다. 자본가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기아는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고, 단지 “대규모 사회”의 불가피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코너는 내 질문 중 어느 것에도 답하지 못합니다. 원시 사회의 선천적으로 아나키적인 본성에 대하여 답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것이 “수없이 많이 답해야 했던” “지루한” 질문이라며 웅얼거릴 뿐입니다. 제발, 유관 기산, 책이나, 답변의 요약본이나, 뭐라도 주면 안되는 걸까요? 아. 물론 안되지요. 코너 동지의 글의 주된 목적, 그러니까 감히 그에게 동의하지 않고, 그의 권위주의적 핵심을 지적하는 자들을 모욕하고 비아냥대는 것에 반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쟁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을 원했다는 이유로, 너무하십니다.
코너는 그의 글을 참으로 놀라운 신경질적 혁신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는 내가 이안 헤븐스[3]가 아닌지 “정말로” 궁금해합니다.(진짜로요. 진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내 친구들과 동지들은 이것을 읽으며 끝도 없이 웃었습니다.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맞습니다. 어떻게 증명하면 될까요? 스코틀랜드에 있는 내 동지들, 그러니까 프레디 배어나 척 먼슨 같은 사람들에게, 아니면 <아나키>지나 <Organize>지의 독자 리스트에 있는 동지들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 아니면 5년쯤 전 글래스고에서 만난 적 있던 제이슨 맥퀸에게 물어봐도 됩니다. 당시 그는 <여기, 지금>과 <역정보>집단의 구성원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나를 기억할 겁니다.(그에게 온라인에서 만났던 “아나코” 캐피탈리스트에 대해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만약 맥퀸이 나를 기억한다면, 그는 내가 글래스고 출신이며,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이안 헤븐스가 아님을 확인해줄겁니다. 맥퀸이 <아나키>지를 통해 그것을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코너의 정신 송 신경질적 환상을, 그것이 다른 자들에게 전해지기 전에 부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다시 부탁하지만 머레이 북친에 관한 런던 아나키스트 포럼 회의에 참석했던 <녹색 아나키스트>구성원에게 물어봐 주세요.(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걸 보면, 아마도 거기에 누가 있었나도 기억하지 못할수도 있겠습니다.
<녹색 아나키스트>가 이안 헤븐스에 관한 <일요 타임즈>의 기사를 사용한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 기사는 순수한 중상모략입니다. 저널리스트 래리 오하라의 걸작 기사는 이안 헤븐스의 책 <Turning up the Heat : M15 after that cold war>가 M15가 사주하여 쓴 책이라고 합니다. 이 기사는 Spunk가 “폭탄 제조 매뉴얼을 잘도 광고했다”고 합니다. 현실은, 이것은 기자들이 만든 훌륭한 오보라는 것입니다. 이 기사는 Spunk가 제공하는 파일 하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파일에는 아나키스트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링크들을 포함하고 있었죠. 이를테면 alt.society.anarchy같은 뉴스 그룹 말입니다. 이 그룹들은 완전히 개방적이어서, 아무나 그곳에 포스팅할 수 있습니다. 기자들이 일컫는 바 “폭탄 제조 매뉴얼”이나 다른 정보들은 이 메일링 그룹 중 하나에 적혀있습니다. 기자들이 그 교활한 기사를 쓴 방식은 매우 영악합니다. 이 기사는 거짓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진실을 경제적으로” 다루어, 인터넷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Spunk가 “폭탄 제조 매뉴얼”을 제공했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지요. 반쪽자리 진실은 완전한 거짓말이 되었고, 코너가 이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 멍청한 기사는 인터넷의 심장에 아나키스트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기 위하여 작성되었고, 이안 헤븐스의 직업을(네. 우리들 대부분처럼, 이안은 임노동자입니다.) 앗아갈 뻔 했습니다. 그는 Spunk와 인터넷에서의 아나키스트 활동을 지키기 위하여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만약 코너가 일요 타임즈의 개소리 말고, 실제로 발생한 일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Spunk가 테러리즘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텐데 말입니다. 물론 나는 코너가 일요타임즈 기사를 들고 와서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코너가 얼마나 공고하게 진실에 발을 딛고 있는지, 그리고 감히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와 활동에 감히 질문하는 “양떼”들을 비아냥대기 위하여 코너가 얼마나 저열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코너가, 자신의 취향에 맞다면 개소리를 늘어놓는 기자들마저도 즐겁게 인용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지요. 정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면, 코너씨의 요구에 따라, 왜 ACE와 SAN이 Spunk 및 그 구성원(이라 코너가 여기는 자)들로부터 “관계를 끊지 않는지”를 얘기해보겠습니다. 그 답은 명확합니다. 우리가 “관계를 끊”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코너와 달리 일요 타임즈의 유사 저널리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이 아닌 일요타임즈의 기사(와 코너의 양떼와 같은 그에 대한 반복) 때문에 관계를 끊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마 코너는, 그는 진실을 모두 알고 있었고, <녹색 아나키스트>가 당하는 처우에 대한 아날로지로서 활용하기 위해 거짓을 말했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불쾌하고 부정직한 일이지만요. 슬프게도, 아날로지는 실패했고, <녹색 아나키스트>는 “비합리주의자”를 출판했습니다. 일요타입즈가 이안 헤븐스와 Spunk를 엿먹이는 동안에요.
아마도 나는 “레닌주의자”라는 단어를 “카마티안적 방식으로 엘리트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무리’”라고 사용했나봅니다. 이상합니다. 나는 “레닌주의”라는 단어를, 레닌과 볼셰비키의 사상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흥미롭지만, 코너는 다시금 내가 의미한 것과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체 “카마티안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단어를 사용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나는 <녹색 아나키스트>가 “레닌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유나바머의 정치가 레닌주의와 유사한 것이라고(새로운 사회의 촉매가 되는 것으로써, “산업사회의 불안정성”을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으로 바꾸면, 레닌주의가 되지 않습니까?) 말했습니다. 그리고 혁명의 촉매로서 주체를 발굴하기보다는 수동적인 것을 찾는 그 유사성이 <녹색 아나키스트>가 테러리즘을 옹호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명확히 이렇게 작성하였지만, 코너는 이를 오독하고 있습니다.
코너에 의하면, 나는 “히스테리적이고” “신사상에 오염된 노동자주의자”인 모양입니다. 알려주어 감사합니다. 코너(와 블랙)이 내가 첫 번째 글에서 표현한 희망을 날려준 것에도 감사합니다. 나는 그 글에 대한 답변이 “ <녹색 아나키스트>가, 그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모두에게 가하는 모욕적 장광설로 이 편지에 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녹색 아나키스트>역시 그들의 정치에 감히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을 모욕하는 것에서 긍정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라는 희망을 밝혔습니다. 나의 희망은 유토피아적이었습니다. 코너의 답변 수준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코너는 <흑기>지마저 비난하고 모욕했습니다. 아마도 논쟁에 함축된 정치를 다른 비아냥의 틀 안에 가두기 위해서일 겁니다. <흑기>지가 “신사상에 오염된 노동자주의자”들이라는 주장을 놓고 볼 때, <녹색 아나키스트>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신사상주의자”거나 그에 “오염된”자들인가 봅니다. 알려주어 감사합니다. 사실에 무관하게 모든 비판을 한 깃발 아래 몰아넣는 것은 유용하지요. 물을 흐릴 수 있으니까요. 아마 이것이 <녹색 아나키스트>의 목적일 겁니다.
최소한 코너의 편지는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가 “비합리주의자”를 게제할 당시에서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녹색 아나키스트>가 “기사 <비합리주의>가 절망적 테러리즘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블랙씨의 말은 코너의 말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테러리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테러리즘을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 “옳은 생각”이라고, 파업이나 점거와 같은 혁명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코너가 보기에는 이 모든 것이 같은 혁명의 일부입니다. 그는 테러리즘의 “나머지 모두에게 자치적이고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하는 “해방”을 위한 행동들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나머지 모두”는 아마도, “조정되지 않은 행동들” 뒤에도 살아남은 자들인가 봅니다.) 죽은 통근자들, 노동자들, 아이들이 어떻게 “자치적이고 참된 삶”을 살 수 있는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그 실질에 따라 대량 살상과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들을 “중상모략”하는 것입니까? 코너가 보기에 이것들은 “저항”의 일부입니다. 코너는 내가 지난 글에서 한 비판을 확정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합니다.
코너는 SAN이 “반파시스트적이고 반국가주의적인 발언의 자유를 저주하고 억누르”려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발언의 자유를 어떻게 “억누르”고 “저주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들의 말들을 금지하거나 검열했습니까? 아닙니다. <녹색 아나키스트>는 당시에도, 지금도, 그들의 잡지를 출판하고, 편지를 씁니다. 대체 어떻게 SAN이 그들을 “억누를”수 있습니까? 그들과의 투어를 조직하지 않는 것 하나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SAN은 IWW를, IWA를, <아나키>지를, <자유>지를, <흑기>지를 “저주하고 억누르”고 있는 것이겠습니다. 코너의 억압에 대한 정의는 이상합니다. 누군가가 하고 싶은 말을 전파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으면 발언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왜 SAN이 투어를 연기했는지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파시스트나 망령들에 의해 조종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출판한 기사를, 대량 학살을 “옳은 생각”이라 찬양한 기사를 읽은 것 뿐입니다. 코너의 신경질적 짜증이 이 사실을 비아냥과 모욕 아래에 가두고자 하지만, 이것이 진실입니다. 기사를 읽고, 대량 학살이 왜 “옳은 생각”인지를 읽어보고, 그리고 우리의 반응이 인간적이고 자유의지주의적인 반응이었는지를 판단하면 될 것입니다.(아차, 또 다시 “히스테리적”이 되고 있군요.)
나는 그저 내가 글을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해야하겠습니다. 코너의 답변은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와, 그들의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토론” 기술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코너는 “비합리주의자”와 거리를 두기보다는, 여전히 일본의 사이비신도들과 미국 파시스트들의 테러리즘을 “조정되지 않은 저항”의 예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자들은 여전히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기사는 블랙씨가 말하는 것처럼 “멍청한” 기사일 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의 요체를 명확히 대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저번 글에서 주장하였듯, 이 요체는 아나키즘적이지 않습니다.
<아나키>지의 밝은 미래를 기원합니다.
연대를 담아,
이안
밥 블랙, 옴진리교, 그리고 오클라호마 폭탄테러
<아나키>지에게
해야할 일은 많지만, <아나키>51호에 기고한 밥 블랙과 스티브 부스의 글에 대한 답변을 하겠습니다. 무엇을 쓰건,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나나 나의 정치에 대한 그들의 가설들이 모두 틀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나키>의 독자들은 나의 답변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요.
밥 블랙은 대량 학살은 “전술일 뿐 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술을 고안한 사람은 전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시행되기 전까지 전술은 사상이며, 시행된 후에는 행동이 됩니다. 블랙이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는 “그들(옴진리교와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범)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사상은 없다”고 말합니다. 블랙씨의 상상력의 부재야말로 놀라울 뿐입니다. 아마도 그 공통된 “사상”은, 그들의 전술인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비합리주의자”가 찬양하는 그거요. 아니라고요? 확실합니까? 블랙은 영어라는 언어와 독자의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겁니다.
블랙은 <녹색 아나키스트>와의 투어에 참가하여 그들과 대면으로 논의하는 것이 “문제를 다루는 아나키스트적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투어를 연기상태에서 취소상태로 만들고,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우리가 (<녹색 아나키스트>가 임명한)지도자를 따르는 “양떼”라고 공격한 것은 <녹색 아나키스트>인데요? 불쌍한 <녹색 아나키스트>. 다른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정치를 비판하다니! 문제를 다루는 아나키스트적 방법이 단순히 뇌를 멈추고 새로운 정보와 무관하게 이전 결정에 따르는 것이었는지는 몰랐습니다.
나는 투어를 취소할지 말지의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던 회의를 기억합니다. 이 회의에서는 우리가 “비합리주의자”를 온전히 논의하기 전까지 투어를 연기하자는 결정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다음으로 본 것은 <녹색 아나키스트>가 그들의 기관지에 우리가 투어를 취소하였으며, SAN이 양떼라는 기사를 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를 다루는 아나키스트적 방법인 모양입니다. <녹색 아나키스트>가 원하는 것을 생각없이 행하기보다, 그들의 정치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의 반응을 고민하는 것이 왜 양떼인지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난 글에서 작성하였듯, 다른 아나키스트들의 정신적 독립성이라는 것은 <녹색 아나키스트>와 블랙과 같은 그 지지자들에게는 “양떼”와 같은 것이니까, 이해합니다.
블랙이 나의 글을 오래 전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한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자기 방어”라고 보는 것 역시 이상합니다. 독자들도 곧 보게 되겠지만, 그 글의 대부분은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에 대한 논의와, “존 코너”가 나에 대하여 왜곡한 것들에 대한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블랙은 독자에 대한 존중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나봅니다. 이렇게 역사를 재창조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정말로 슬픈 일이지만, 블랙과 <녹색 아나키스트>는 그들의 정치에 대해 논의하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우리는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에 대하여 “일관되고” “헌신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수십년 전에 종교를 포기했고, 사람들의 말을 분석할 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블랙이 <녹색 아나키스트>가 피해자라고 바라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뿐이 아니라, 그들이 대량학살을 옳은 생각이라고 변호할 때조차도, <녹색 아나키스트>는 블랙이 전혀 모르는 영역에서 활동하고 정치를 만드는 사람들보다 “더 일관되고 헌신적인 영국 아나키스트”가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아나키즘 운동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기로 결정했다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스페인 혁명 당시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이 대량학살을 “전술”로 사용했다는 블랙의 발언은, 쟁점을 흐리려는 그의 열망을 보여줍니다. <녹색 아나키스트>가 “비합리주의자”를 옹호하기 위하여 옴진리교와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범을 “실천으로 선전하는” 아나키스트와 등치시킨 그 방식으로 말입니다. 블랙의 한심한 아날로지는 논쟁을 망칠 뿐 아니라, 독자의 지성도 망칩니다. 블랙과 <녹색 아나키스트>는 “무고한 부르주아는 없다”는 말을 본따 무고한 사람은 없고, 그렇기에 그들식의 “저항”에 있어 착취자와 피착취자,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군사 쿠데타 직후에 자경단이 파시스트와 친파시스트 세력을 죽이는 것과, 통근자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하고 노동자와 아이들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것이 동일한 모양입니다. 미국 아나키스트 운동 최고의 지성 중 하나가 이런 쓰레기같은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 두루티부대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총을 쏘았다면, 그들도 “옳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겠지요.
블랙이 우리가 <녹색 아나키스트>를 “파문”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미안하지만 아닙니다. <녹색 아나키스트>스스로가 해낸 일입니다. 그리고 물론 <녹색 아나키스트>들 역시 누구를 “파문”한 적이 없지요.(블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적대자를 사실과 무관하게 “좌익 아나키스트”라고 부를 뿐입니다.) 물론 이 “좌익” 운운은 결코 다른 아나키스트들에게 조직적으로 죄책감을 주어 그들을 하찮아보이게 하려는 수작이 아닐겁니다. 네. 물론 아니겠지요. 하지만 누군가를 비판함에 있어, 그 주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역사상 모든 권위주의자들은 그렇게 했지요.
블랙은 “그들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표현은 “스티브가 쓴 매우 잘못된 단어 선택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나키>의 같은 호에 실린 스티브의 글을 보면,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블랙이 뭐라고 말하면, <녹색 아나키스트>의 구성원이 같은 페이지에서 그 주장을 날려버립니다. “톰 오코너”가 그러했고, 이제 스티브 부스입니다.
부스는 내가 “조건반사적으로 평화주의적 비동의”를 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노동자에 대한 대량 학살이 “옳은 생각”인지 아닌지를 논의했고, 그것이 자유의지주의에 합치하는지 아닌지를 논의했습니다. 사회변혁의 유일한 수단이 비폭력이라는 말 같은 것은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투덜대면 되는데, 왜 사실을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그는 “비합리주의자”가 “전체주의에 대한 무장투쟁과 무장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 기사가 “미래에 가능한 아나키스트 무장투쟁의 형태”와, “그러한 행동이 오늘의 폭력적 사건을 닮을 것”임을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옴진리교와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범은 “옳은 생각”이었고, “미래의” “아나키스트” 투쟁은 이 모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원래의 기사와 스스로의 거리를 두려던 블랙의 시도는, 부스가, 톰 오코너가 그랬던 것처럼, 통근자들에게 독가스를 뿌리는 것이 “저항”(정확히 누구를 향한 “저항”? 노동대중? 그들이 적인 것인가?)의 유의미한 형태이자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에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실패해버립니다.
블랙은 “비합리주의자”가 잘못된 것이 되게 할 “시위운동”의 효과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미안하지만 아닙니다. 이러한 말은, 그가 여전히 옴진리교나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를 “저항” 운동의 수단이라고 바라보는 순간 무의미해집니다. 이것들은 저항운동의 수단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국가의 민간에 대한 폭격과 동일한 권위주의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 일부입니다.
부스의 다른 기사를 읽어보면, 그의 사상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www.insurgentdesire.org.uk/irrationalists.htm). 이 기사에서 부스는 “행동 뒤에는 사상과 동기가 있다. 그리고 수단이 있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다. 발생한 일에 대하여 도구를 비난할 수 있는가?”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숙적의 효율성으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거부하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수단은 특정한 사상과 목적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볼셰비키의 정치경찰(체카)은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담보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중앙집권과 당에 의한 지배를 요하는 볼셰비키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지요. 체카는 볼셰비키 권력의 방위를 담보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것이 혁명을 죽이는 데에 일조했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자. 이제 아나키스트 체카를 만들어보시죠. 이 “도구”가 그것이 만들어진 목적을 제외한 다른 어떠한 것에 복무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부스가 “옳은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한 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의 사상(“전술”, “수단”, “도구”)는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의 정치를 반영하여 선택된 것입니다. 이것들은 해방의 도구가 아닙니다. 우익 권위주의자들이 취한 행동이 그 창조주의 반혁명적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 행동들은 가해자가 자신의 정치가 무엇이라 밝히는지와는 무관하게 반혁명적으로 남습니다.(러시아 노동자들이 볼셰비키의 경영을 받건, 자본가의 경영을 받건, 그 본성이 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녹색 아나키스트>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녹색 아나키스트>의 정치가 근본적으로 권위주의적이라는 나의 분석을 공고히 하여줍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혁명적 전략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녹색 아나키스트>에 혁명적/자유의지주의적 정치가 결여되어있다는 것을 넘어, 그들에게 보편적 인간성조차 결여되어있음을 보여줍니다.
역설적으로, 부스의 분석을 액면가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비합리주의자”가 사용한 도구가 완전히 중립적인 것이며, 해방을 위해서도, 억압을 위해서도 사용되는 것이라 보아야 할것입니다. <녹색 아나키스트>는 이제 기술이, 전술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중립적이라 주장하기 시작하는 겁니까? 기술이 사상과 그 창조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않고, 그에 종속된 사람을 변모시키지 않는다고요? 그건 좀 놀라운 일이겠습니다...
부스는 내가 “무장투쟁을 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바라본다고 말하면서, 내가 “교조적 평화주의자”라고 주장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폭력의 문제나 아나키스트의 무장투쟁에 관하여 논의한 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할 때, 나는 부스가 일컫는 바, 내가 “AJODA 독자들이 나의 교리를 공유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로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라 말하겠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교리(그러니까 “평화주의”)를 AJODA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촉구할 수 있겠습니까? 톰 오코너가 나의 정치에 대하여 적은 안쓰러운 글과 마찬가지로, 부스의 글은 <녹색 아나키스트>가 타인과 그들의 사상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사실과 증거라는 사소한 것에 얼마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부스가 주장하는 바, 내가 “신사상주의자와 그 추종자”들에게 “일반적인 기술”을 사용하고 있으며, 내가 “마이카/톰셋 등”과 같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 역시 흥미롭습니다. 저번 글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모든 비판자들을 한 진영으로 몰아가는 것은 물을 흐려 실질적 문제를 논의에서 배제하는 데에 유용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부스가 그의 기사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답변”했습니까?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러한 테러리즘이 자유의지주의적 “저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안이라는 캐릭터”에 관한 글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웃기니까요. 다른 아나키스트들이 어찌 감히 그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합니다. 내가 영화에 나오는 가상 캐릭터의 필명을 사용했다면, 감히 <녹색 아나키스트>와 정치에 대해 논의할(수정합니다, 그들에게 낙인찍힐) 수 있었을 텐데요...
대체적으로,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회피하고, 그들에게 감히 질문하는 자들의 정치를 발명해주는 <녹색 아나키스트>의 능력은 2호 전 톰 오코너의 글에서 충분히 증명되었으니까요.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다른 장광설을 받아보게 될까요? 아마도 그들은 내 정치를 만들어내지 않고, 내가 실제로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입장을 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뭐랄까, 힘든 일이잖아요? 비아냥대는 것이 생각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연대를 담아
이안 맥케이
글래스고
[1] 역주 - 존 제르잔. 아나코-프리미티비스트 철학자. 언어의 사용이 인간과 자연의 사이를 벌려놓는다고 주장하며, 언어를 비판했다.
[2] 역주 - 영국의 코미디언
[3] 역주 - 영국의 활동가. Spunk 그룹을 창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