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인민봉기
Subtitle: 파리 코뮌에서 광주 봉기까지
Date: 2003
Source: Northeastern Anarchist #7, August 2003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공헌을 마땅할 만큼 고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을 현대에 맞추어 추론하려는 시도가 필수적일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의 운명에 관해 이러한 작업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크로포트킨 자신도 볼셰비키 혁명의 발달과 퇴행을 분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혁명운동 전개에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적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크로포트킨은 현대의 아나키즘적인 사고방식에 매우 중요하지만, 그는 여전히 일부 관심 있는 그룹 밖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광주는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중심이지만, 무려 2,00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1980년의 봉기는 많은 사람들이 겨우 이해하는 수준에(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두 경우 모두 유럽중심주의에 의해 소외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크로포트킨이 러시아를 떠나지 않고 같은 책과 문건을 썼다면 오늘날 러시아 밖에서는 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크로포트킨을 여러 가지로 비판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비판되어야 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의 종전협약에 대한 지지이다. 그의 유럽중심주의적 편향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늘에 와서는 『상호부조론』에서 분석된 해당 방면에 대한 표현을 읽을 때,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그는 “미개인”이나 “야만인”과 같은 구식의 언어를 사용한다. 게다가 『혁명가의 회상』에서는 “아시아적 책략”, “… 혐오스러운 오리엔트 방식” 그리고 “오리엔트적 향락은 혐오시 되었다” 등의 삐딱한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크로포트킨의 시대에는 이러한 편견들이 거의 일반적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어쨌거나 국제주의자였다. 그가 편집한 스위스 신문인 「반역Le Révolté」의 역할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새로운 형태의 삶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오래된 불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 이것이 혁명적 언론의 주된 임무가 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혁명을 만드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혁명가의 회상』, p.418.)

크로포트킨의 혁명에 대한 개념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혁명과 서유럽에서의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운동, 특히 1789년에서 1793년 사이의 혁명, 그리고 1871년의 파리 코뮌과 관련하여 혁명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크로포트킨에게 자유 코뮌은 진정한 혁명의 종착점이자 수단이 되었다. 그는 인민의 책임과 권리를 앗아가고자 하는 대의제 정부와 그 관료들을 혐오했다. 그는 장군들 마냥 자리에 앉아 가두투쟁에 지침을 내리는 자들을 수차례 쏘아붙였다.(『혁명가의 회상』, p.282.) 오늘의 시위 중에는 집에 앉아 있다가 다음날이면 활동가를 위한 “안내서”를 써내던 작자들에게 그가 뭐라 말했는지는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당대의 무장 시위에 참여했고, 비겁함을 운동 내부에서 극복할 과제라고 보았다(『혁명가의 회상』, p.419.).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믿음은 무궁무진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의 인민들이 보여준 자발적인 조직”에 감탄하면서, 도시의 각 구역이 독자적인 군사 및 시민 위원회를 선임하였지만, “저녁에 열린 총회에서 중요한 모든 문제들이 대중적으로 언급되었다”고 썼다(『프랑스 대혁명』, p.313.). 크로포트킨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구들이 공공안전위원회의 손발로 변질되어가는 것(즉, 국가의 기구가 되어가는 것)을 관찰한다. 40,000개의 혁명위원회가 국가에 의해 삼켜졌을 때, 혁명은 살해당했다.

혁명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수천 명의 희생은 진정한 혁명의 형태, 즉 “자주적인 코뮌”을 크로포트킨에게 보여주었다. 크로포트킨은 여러 저술을 통해 민주공화국과 대의정부가 기존의 사회질서를 모두 혁파하기보다는 개인의 몫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존 제도의 개혁을 원하는 중산층 급진주의자들의 야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이라고 이해했다(『빵의 쟁취』, pp.44, 213-14.). “대의제 정부는 그 목적을 달성하여 궁정의 통치를 종식시켰다.”(『아나키즘적 코뮌주의』, p.68.). “절대 군주제는 농노제도에 대응한다. 대의정권은 자본 통치의 제도에 대응한다.”(『아나키즘적 코뮌주의』, p.52.)

1871년 파리 코뮌과 관련하여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파리 코뮌의 봉기는 따라서 모든 진정한 혁명가를 괴롭히는 질문에 해결책을 가져왔다. 프랑스는 1793년~1794년, 강력한 자코뱅 조치를 통해 l'egalite de fait, 즉 진정한 경제적 평등을 도입하려고 했을 때와 그리고 1848년 “민주사회주의 공화국을” 실시하려고 했을 때의 두 번에 걸쳐 일종의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했고, 그 방식은 중앙정부를 통해 그것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매번 실패하여왔지만, 이제 새로운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자유 코뮌은 그들 자신의 영역에서 혁명을 해내야만 한다.”(『현대 과학과 아나키즘』, p.164.)

크로포트킨에게 자유 사회의 정치적 형태는 분명히 독립적 코뮌이었다. “독립적 코뮌이야말로 사회혁명이 반드시 취해야 할 형태다. 모든 나라와 전 세계가 그것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구성원들이 물품의 소비, 교환, 생산을 공동화하기로 결정하면, 그들은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현대 과학과 아나키즘』, p.164.) 크로포트킨은 파리 코뮌과 카르타헤나, 바르셀로나 코뮌에 대한 이해에서 코뮌의 의미를 정치적 형태로 구체화하여 미래에 투영했다.

“운동 그 자체뿐 아니라 코뮌 혁명이 정신에 남긴 인상과 그 경향을 분석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미래의 사회 발전 과정에서는 더 진보된 인간의 집단이 독립적인 삶을 시작하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징후를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집단은 국가 내의 후진적 부분을 선진화하기 위하여 법과 무력으로 그들의 의견을 강요하거나, 실제로는 중위결(좌파는 우경화되고 우파는 좌경화되어야 당선인을 만들 수 있다는 다수결의 원칙-역자 주)이 될 수밖에 없는 다수결의 원칙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예시를 만들어낼 것이다. 동시에 코뮌 내의 대의제 정권의 실패는 단순히 영토를 넓히기보다는 자치와 자율행정이 더 진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자치와 자율행정이 효과적이 되기 위해, 그것들 역시 자유로운 공동체 안에서 삶의 다양한 기능에 포함되어야 한다.”(『아나키즘적 코뮌주의』, pp.51-2.)

후기 작품에서 크로포트킨은 1871년 이후 “… 자유 코뮌은 그 이후 현대 사회주의 사상이 실현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상호부조론』에서, 그는 진화와 인간사에서 코뮌적 협력이 가져왔던 형태를 추적한다.

1917년 이후 그는 다시 러시아로 이주했다. 볼셰비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음에도 그는 러시아로 파병된 반혁명적 외국군을 깎아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혁명에 관한 짧은 성명 두 장만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 코뮌에 대한 지지를 다시 한 번 표명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자연적으로 분리된 부분을 중앙 통제 하에 재결합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연방의 각 부분이 스스로 자유 코뮌과 자유 도시의 연합이 될 때가 올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또한 서유럽의 특정 지역이 곧 같은 과정을 따를 것이라고 믿는다.”(크로포트킨, 〈서유럽의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당대의 모든 혁명과 관련하여, 그는 독립된 코뮌의 형태로 드러나는 진정한 자유를 그 목표로 확립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을까? 어떤 수단이 사용될 수 있었는가? 크로포트킨에게 있어 대답은 명확했다. 봉기가 그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전위당이나 다른 어떤 조직된 작은 집단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가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봉기와 자유 코뮌은 크로포트킨에게 필수적이었다. 대중 동원을 위해서는 중앙의 집회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없었다.

“팔레 루아얄은 정원과 카페를 갖춘 개방된 공간이 되었고, 모든 계급 출신의 수만 명이 매일 소식을 교환하고, 그 시간의 팸플릿에 대해 토론하고, 군중들 속에서 미래의 행동에 대한 열망을 새롭게 하고, 서로를 알고 이해하려고 했다.”(『프랑스 대혁명』, p.61.)

대중 동원을 위한 집회소가 중요성을 드러낸 한 예는 1789년 6월 10일이었다. 파리 시민들을 상대로 사용하기 위해 총을 장전하는 것을 거부한 11명의 군인들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4,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즉시 팔레 루아얄에서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갔다. 그런 대군을 보고 간수들은 호응했고, 군중을 막기 위해 전속력으로 말을 타고 달려간 용기병들은 재빨리 군도를 벗고 인민들의 대오에 합류했다.(『프랑스 대혁명』, p.69.)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호전성에 감탄하면서, 크로포트킨은 가게를 장악하고 있는 군중들은 약탈을 하지 않고 그들의 집단적인 영양보충과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것만 가져갔다면서 도둑질은 끝났다고 언급했다(『프랑스 대혁명』, pp.75, 106.). 반란이 파리에서 프랑스의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모든 유럽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움직였다”고 크로포트킨은 그 반란이 어떻게 프랑스를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단결시켰는지 추적했다(『프랑스 대혁명』, pp.95, 177.).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스페인의 카르타헤나와 바르셀로나에서 비슷한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는 봉기 그 자체가 사람들이 일어나게 하도록 고무시켰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이 현상을 에로스 효과라고 이해한다. (내 책 『신좌파의 상상력: 1968년에 대한 세계적 분석』을 참조하라) 크로포트킨은 봉기는 종종 절망의 산물이지만 혁명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들이 파업을 일으키거나 그들이 싫어하는 일부 관료들에 대한 작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성공에 대한 희망도 없이 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음식을 얻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단순히 상황이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두 번, 아니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의 유사한 반란이 앞서 왔으며 모든 혁명에 선행해야 한다. 이것들이 없이는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크로포트킨, 『현대 과학과 아나키즘』)

그는 이후에 봉기가 혁명의 종착점을 결정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열쇠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혁명의 성격은 그것이 선행하는 봉기의 성격과 목적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으로 명시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나는 이제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1980년 광주항쟁으로 눈을 돌린다. 1980년대 한국과 아시아 민주화 운동에 중심적 중요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광주 항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먼저 간단한 요약을 할 것이고, 그 후에 내가 자유 코뮌과 폭동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견해에 특히 중요한 봉기의 요소들을 묘사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도주의자였던 크로포트킨은 봉기할 만큼 용기 있던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죽음과 부패에 대해 이해하였다. 그는 투옥과 추방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통치에 대한 자신의 원칙적인 반대를 유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희생이 잊히는 것을 거부했다. 정부의 잔혹성에 대한 그의 설명을 읽다보면, 그것이 파리에서 일어났는지 광주에서 일어났는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무엇을 하든지 너는 죽을 것이다! 팔짱을 끼고 끌려간다면, 죽을 것이다! 자비를 구걸하면, 죽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든, 오른쪽, 왼쪽, 뒤로, 앞으로, 위로, 아래로, 어디로 가건, 죽을 것이다! 너는 단지 무법자가 아니라 인간이 아니다. 네가 몇 살이건 간에, 성별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너를 구할 수 없다. 너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기 전에 먼저 아내, 누이, 아들, 딸들, 심지어는 요람에 있는 아기가 괴로워하는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네 눈앞에 부상자가 구급차에서 끌려나와 총검에 꿰이거나 개머리판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그는 부러진 다리나 피를 흘리는 팔에 의지하여 살아서, 고통스럽고 신음하는 쓰레기 다발처럼 시궁창에 던져 넣어질 것이다. 죽음! 죽음! 죽음!”(크로포트킨, 〈파리 코뮌〉, 1895년)

광주 봉기

지난 2세기 동안, 1871년의 파리 코뮌과 1980년의 광주 민중 봉기라는 두 사건은 수천 명의 일반인들이 자발적인 능력으로 스스로를 다스린 독특한 봉화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두 도시 모두 비무장 시민들이 “법과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잘 무장된 군대의 존재에 맞서 도시를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보유하였다. 수십만의 인민이 봉기하여 전통적인 형태의 정부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대중 기관을 구성하였다. 해방의 기간 동안 범죄율이 급감했으며,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친밀감을 느꼈다.

파리와 광주에 있는 코뮌의 해방된 현실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며, 그렇기에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는 널리 전파된 신화와 모순된다. 오히려 이러한 해방의 순간 동안 시민들의 행동은 자치와 협력의 선천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엄청난 잔혹성과 부당성을 가지고 행동한 것은 정부의 무력이었지, 통치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가 자신의 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된 이후 광주에서의 사건들이 전개되었다. 박정희의 죽음이 가져다 준 행복감 속에서 학생들은 거대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지만 전두환 장군은 권력을 장악하고 시위가 계속되면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 위협했다. 광주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은 실내에 머물렀다. 미국의 승인을 얻어, 새 군사 정부는 비무장지대의 최전선에서 광주에 교훈을 주기 위해 가장 노련한 공수부대원들을 투입했다. 이들 부대는 광주에 도달한 순간부터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18일 오전 열린 1차 대치에서는 특수 설계된 진압봉으로 무방비 상태의 학생들의 머리를 깨트렸다. 시위대가 안전을 위해 발버둥을 치자 공수부대원들은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한 무리의 군대가 각각의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깨트리고, 그의 등을 짓밟고, 그의 얼굴을 발로 차곤 했다. 그들이 공격을 마쳤을 때, 그들 미트 소스에 담긴 옷 더미처럼 보였다.”(이재의 외,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46) 시위대는 트럭에 부려졌고, 거기서 병사들은 계속해서 그들을 때리고 발로 찼다. 밤이 되자 공수부대원들은 몇몇 대학에 병영을 차렸다.

학생들이 맞서 싸우자 군인들은 총검을 겨누고 수십 명을 더 체포했고, 그들 중 다수는 벌거벗겨졌고, 강간당했고, 더더욱 잔혹한 일을 당했다. 한 병사는 붙잡힌 학생들에게 총검을 휘두르며 “이것은 내가 베트남에서 베트콩 여인들의 젖가슴 40개를 베던 총검이다!”라고 외쳤다. 공수부대의 과잉반응에 전체 대중이 충격에 빠졌다. 공수부대원들은 통제 불능이 되어 사람들을 잔혹하게 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려는 경찰서 정보국장을 칼로 찔러 죽이기까지 했다(이재의 외,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79).

심한 구타와 수백 명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계속해서 다시 뭉쳤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다음날 시 전체가 봉기했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시위대는 학생의 수를 적어보이게 할 정도로 불어났다(『5·18 광주민주화운동』, p.127). 대중운동의 자발적 탄생은, 도시와 비도시의 전통적 분열을 초월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등, 냉담한 잔혹성에 다시 한 번 의지했다. 심지어 부상자와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택시와 버스 운전사들도 칼에 찔리고, 구타를 당했고 때로는 목숨을 잃었다. 몇몇 경찰들은 몰래 포로를 풀어주려 했고 그들 역시 총검을 맞았다(이재의 외,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113). 많은 경찰들이 그저 집으로 돌아갔고, 경찰서장은 군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에게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리기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돌, 몽둥이, 칼, 파이프, 쇠창살, 망치로 18,000명의 전경과 3,000명 이상의 공수부대원들을 상대로 저항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도시는 침묵하기를 거부했다. 5월 20일, “투사회보”라는 신문이 처음으로 발행되었고, 공식 언론과 달리 정확한 소식을 제공했다. 오후 5시 50분, 5,000여 명의 군중이 경찰 바리케이드를 넘어 몰려들었다. 공수부대가 그들을 다시 몰아세우자 도로 위에 다시 연좌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경찰들을 군대와 더 갈라놓을 대표자들을 선발했다. 저녁이 되자 당시 인구가 70만 명인 도시에 20만 명 이상의 대오가 모였다. 거대한 군중은 노동자, 농부, 학생들, 그리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9대의 버스와 200대가 넘는 택시들이 시내 쇼핑 지역인 금남로에서 대오를 선도했다. 다시 한 번 공수부대원들이 맹렬히 공격했고, 이번에는 온 도시가 반격했다. 밤사이에 승용차와 지프, 택시 등 차량들이 불이 붙은 채로 군대로 밀고 들어갔다. 군대는 거듭 공격했지만 저녁에는 민주광장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기차역에서는 많은 시위대가 목숨을 잃었고, 민주광장과 인접한 도청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M-16으로 군중을 향해 무차별사격을 개시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검열된 언론은 그 학살을 보도하지 못했다. 대신 이들은 기물파괴와 경미한 경찰행위에 대한 허위보도를 보도했다. 군대의 잔혹성은 언급되지 않았다. 심야뉴스마저 상황을 보도하지 않은 후, 수천 명의 사람들이 MBC 건물을 에워쌌다. 곧 방송국 경영진과 이를 지키는 군대가 후퇴하고, 군중은 안으로 밀려들었다. 방송 시설을 가동시킬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 건물을 불태웠다. 군중들은 영리하게 표적을 선정했다.

“오전 1시에 시민들이 세무서로 몰려가 집기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인민의 생명과 복지를 위해 써야 할 세금이 군대와 사람을 죽이고 때릴 무기 생산에 쓰였다는 이유였다. 경찰서와 다른 건물은 지키면서 방송국과 세무서에 불을 지른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5·18 광주민주화운동』, p.138)

세무서와 언론사 건물 2곳 외에 노동청과 도청 차고, 경찰 차량 16대가 불에 탔다. 새벽 4시쯤 기차역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는 격렬했다. 병사들은 다시 군중을 상대로 M-16을 사용했고, 선두에 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 시체 위에서 군대와의 전투를 계속했다. 믿을 수 없는 용기를 보여준 인민이 우세했고, 군대는 급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21일) 오전 9시, 금남로에는 다시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한 소규모 단체는 “일부 사람들이 아시아자동차(군납업체)에 가서 차량을 압수해야 한다”고 외쳤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이를 행했고,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수에 맞추어 7대를 가져왔다. 더 많은 운전자들이 오가면서, 곧 장갑차들을 포함한 350대의 차량이 민중의 손에 들어갔다. 이 차량을 몰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시위자들은 민중들을 결집시켰고 또한 이웃 마을을 돌면서 반란을 확산시켰다. 몇몇 트럭들은 코카콜라 공장에서 빵과 음료수를 가져왔다. 협상가들은 군중 중에서 선발되어 군대로 향했다. 갑자기 총성이 이 분위기를 뚫고 들어왔고, 평화로운 합의에 대한 희망을 끝냈다. 10분 동안 군대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이 대학살에서 수십 명이 숨지고 500여 명이 다쳤다.

사람들은 재빨리 반응했다. 총격이 발생한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첫 번째 경찰서가 무기를 압수당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동 팀을 구성하고 경찰과 예비군 병기고를 급습하여 두 개의 중심 지점에 집결했다. 화순 광부들의 도움으로 시위대는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기폭장치를 확보했다(『5·18 광주민주화운동』, p.143). 여성 섬유노동자들은 버스 7대로 나주로 가서 수백 개의 소총과 탄약을 확보하여 광주로 다시 가져왔다. 장성군, 영광군, 담양군에서도 비슷한 무기 탈취가 일어났다. 이 운동은 화순, 나주, 함평,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한국 남서부의 16개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5·18 광주민주화운동』, p.164). 반란의 급속한 확산은 자치와 자주에 대한 인민의 역량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였다. 일부 시위대는 봉기를 전주와 서울로 확산하기를 희망하며 출발했으나 고속도로와 도로, 철도를 봉쇄한 군대에 의해 퇴각 당했다. 광주로 향하던 화순군과 용광군의 무장 시위대는 군 헬기가 처리했다. 군이 언론을 그렇게 엄격하게 통제하고 여행을 제한하지 않았다면 반란은 전국적인 봉기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시에 존재했던 그 어떤 정권보다 더 민주적인 구조가 탄생했다. 광주공원과 유동분기점에서 모여 전투부대와 지도부를 구성했다. 기관총이 도청(군 지휘부가 있던 곳)에 실려 왔다. 오후 5시 30분이 되자 군대는 후퇴했고, 오후 8시에 되자 인민들이 도시를 통제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비록 그들의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무기는 군대의 무기에 비해 훨씬 열세였지만, 사람들의 용맹과 희생은 군대의 기술적 우월성보다 더 강력함을 증명했다. 자유 코뮌은 6일간 지속되었다. 매일의 시민 집회에서는 수 년 동안 지속된 좌절과 일반인들의 깊은 열망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지역 시민 단체들은 질서를 유지했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 행정, 즉 인민에 의한, 그리고 인민을 위한 사회 행정을 만들었다. 공교롭게도 파리 코뮌이 100년 전에 파괴된 바로 그날인 5월 27일, 광주 코뮌은 영웅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진압되었다. 1980년에 잔인하게 진압되었지만, 그 후 7년 동안 그들은 계속 투쟁했고, 1987년에 마침내 남한의 민주적인 선거 개혁을 쟁취하는 전국적인 봉기가 조직되었다.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과 마찬가지로 광주 민중들은 1894년 동학반란과 1929년 학생반란에서 1980년 봉기에 이르기까지 남한에 혁명의 도래를 거듭 예고했다. 파리 코뮌이나 전함 포템킨처럼 광주의 역사적 의미는 한국적(또는 프랑스적, 또는 러시아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이다. 광주의 의미와 교훈은 동서남북 어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른 초기 혁명의 상징처럼 1980년 민중 봉기는 전 세계적인 파장을 가져왔다.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민주적 기본권이 억압된 수십 년이 지난 상황에서, 반란과 폭동의 물결이 그 지역을 변화시켰다. 유럽의 1989년 혁명은 잘 알려져 있지만, 유럽 중심주의는 종종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이해를 방해한다. 광주봉기 이후 6년 만에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독재가 타도되었다. 아퀴노와 김대중 미국에서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고, 광주의 경험은 마닐라에서의 행동에 영감을 주었다. 아시아 전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사람들의 운동이 나타났다. 1987년 대만에서는 계엄령의 종결을 쟁취했다. 버마에서는 1988년 3월에 민중 운동이 폭발하여 학생들과 소수 민족들이 랑군 거리로 나왔다. 끔찍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네윈 대통령이 26년간의 통치 끝에 사임하도록 강요했다. 그 다음 해, 중국의 학생 운동가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들의 외침을 활성화시켰지만, 천안문 광장에서 격추되고 그 후 그들은 몇 년 동안 쫓겼다. 네팔이 그 다음 차례였다. 1990년 4월부터 시작된 7주간의 시위는 국왕이 정부를 민주화하도록 강요했다. 그 다음 폭발을 경험한 나라는 태국으로, 1992년 5월 한 유력 야당 정치인의 20일간의 단식 투쟁으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군부가 거리 시위를 진압했을 때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고, 잔혹성 때문에 수신다 크라파윤 장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학생들은 “인민-권력 혁명”을 요구했고 수하르토를 전복시킬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대학에서 미국 특파원이 실시한 인터뷰에서는 인민-권력의 구호는 공공 공간 점령의 전술적 혁신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 차용되었다고 이야기되었다.

크로포트킨과 광주

광주 봉기는 크로포트킨의 분석틀을 세 가지 방법으로 검증하고 있다.

⑴ 독립적 코뮌과 자산의 자유로운 분배

5월 21일 군대가 도시에서 쫓겨난 후, 모든 사람들은 기쁨과 안도를 나누었다. 시장과 상점이 다시 문을 열어 영업을 시작했고, 평상시처럼 음식, 물, 전기 등을 이용할 수 있었다. 어떤 은행도 약탈당하지 않았고 강도, 강간, 절도와 같은 일반적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관棺과 가솔린, 담배는 품귀했다. 어떤 사람들은 군대에서 더 많은 관을 조달하려고 시도했고, 시민군은 휘발유를 배급했고, 사람들은 새로 참가한 무장한 동료들과 함께 담배를 나누어 피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담배를 공유하는 것은 공동체 경험의 중요한 부분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여전히 담배를 갖고 있는 가게 주인들은(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도록)한 번에 한 갑씩 팔거나 나눠주는 경우가 많았다. 병원에서는 혈액 공급이 부족했지만, 필요성이 알려지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헌혈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술집 작부들과 매춘부들 역시 자신들에게도 헌혈을 허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여 헌혈하였다. 기부를 통해 수천 달러가 빠르게 모금되었다. 이 모든 예는 도시 전체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단결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며칠 동안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를 청소하고, 밥을 짓고, 시장에서 무료 급식을 제공하며, 예상되는 반격을 경계했다. 모두가 해방광주에 기여하고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자발적으로 새로운 분업이 나타났다. 시민군들이야말로 책임감의 표상이었다. 사람들은 이 민병대를 “시민군” 또는 “우리의 동지”라고 불렀다. 그들은 민중을 보호하고 그들을 돌보았다. 세계 전역의 군대에서 하는 것과 같은, 괴물 같은 행동을 유도하는 세뇌나 군사적 광기도 없이, 시민군의 남녀들은 모범적인 방식으로 행동했다. 대중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질서를 구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중·고등학생들을 무장 해제시켰고, 이는 투사회보가 책임을 지고 집행했다(이재의,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71). 최후의 공격이 임박하자 지도부에서는 무장세력 중 고등학생들이 살아남아 투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귀향하라고 주장했다. 많은 시위를 거친 젊은 투사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떠났다.

⑵ 대의제 정부가 아닌 민주광장에서의 총회가 최고 의사결정기구였다는 것

도청 광장 분수대 주변에서는 매일 집회가 열렸고, 그곳에서는 민의가 직접 공식화됐다. 5월 16일 ‘민주광장’으로 개칭한 이 공간은 해방 광주 이전부터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모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너무 많은 친구들과 이웃들의 피를 통해 얻은 권리였다. 본능적으로 광주 사람들은 광장을 영적인 고향으로 인식하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그곳에 모여들었다. 매일의 집회는 모두가 발언권을 갖는 새로운 종류의 직접 민주주의의 배경이 되었다. 여성들의 공적 역할은 그들이 겪었던 일상적인 종속성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 어린 욕구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분수대는 이제 통합의 중심이었다. 여성 노점상, 초등학교 교사, 서로 다른 종교의 신앙인, 주부, 대학생, 고등학생, 농부 등 모든 계급의 인민들이 연설했다. 그들의 성난 연설은 봉기의 엄청난 에너지의 발현인 공동의 의식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봉기 기간 내내 강한 연대감을 형성하며 함께 뭉쳐져 있었다. 그 순간, 도시는 하나였다.”(이재의,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105)

해방 광주에서는 5번의 집회가 있었고, 각각 많은 수가 참석했다. 최초의 대규모 집회는 군대가 후퇴한 다음 날 군대의 패배를 축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회였다. 다음날(23일)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에서는 군중이 15만 명으로 불어났다. 대회는 인민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5월 24일에는 10만 명 이상이 모였고, 5월 25일에는 5만 명(수습위원회 사퇴 요구), 5월 26일 마지막 집회가 끝난 뒤에는 3만 명이 모였다. 이 마지막 집회에서 새로운 구국과도정부救國過渡政府에 대한 요구가 나왔다.

⑶ 자발적 조직

전투의 열기 속에서 발현하고, 도시를 운영하고, 그리고 군대의 반격에 대한 최후의 저항에까지, 자발적으로 등장한 자기 조직의 능력은 새로운 눈을 뜨이게 한다. 20세기 후반 이라는 시기적 조건 속에서, 높은 문해율文解率과 언론, 그리고 보편 교육(남한의 모든 남성이 받은 군사교육을 포함한다)은 그 어떤 권력의 중추에 자리 잡은 조그만 엘리트집단이 통치하는 것보다도, 수백만 민중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이 더욱 현명할 수 있게끔 한다. 우리는 광주 봉기의 사건들을 통해 자치를 위한 이러한 자발적인 능력(엘리트 통치의 치명적인 부조리와 함께)을 관찰할 수 있다.

광주에서는 파리 국가수비대와 같이 권력에 대한 공격을 선도하는 기성무장단체가 없었다. 오히려 공수부대원들의 잔혹성에 대한 자발적인 저항의 과정이 그 상황에 맞선 인민들을 앞으로 몰아붙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다. 몇몇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거나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역사적 사건의 전개라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나타났다. 해방 광주는 정부의 강요나 정당에 의한 계획 없이 조직되었다. 크로포트킨은 금남로 집회에서 차량을 압수하자는 요청에 응한 자들을 팔레 루아얄의 군중들이 죄수를 석방시킨 것과 동일하게 대했을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기성 무장조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거의 모든 운동 지도자들은 체포되거나 은신해 있었다. 5월 17일 밤, 군 정보 요원과 경찰은 시내 전역의 운동가들의 집을 급습하여 운동 지도부를 체포했다. 체포되지 않은 지도자들은 은신했다. 김대중을 포함한 민주화운동의 국가적 지도자들은 이미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날 아침,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들 자신을 조직했다. 그 조직은 수백 명으로 시작되어 이윽고 수천 명이 되었다.

조직의 등장은 상당히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은 모두에게 명백했다. 정부조차 공개적으로 봉기를 “공동체 자치”라고 지칭했다. 22일 오전 10시30분쯤 복음주의 목회자 8명이 모여 상황을 진단했다. 그 중 한 명은 마침 광주에 있었던 미국 침례교 선교사 아놀드 피터슨이었다. 그는 나중에 목회자들의 평가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우리가 공감했던 감정은 “이럴 수는 없다”는 말로 요약된다. 한 도시의 시민들이 의식적인 계획이나 지도부 없이 봉기하여 정부를 내쫓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피터슨, 49 페이지)

들불야학, 광대(연극 활동가 단체),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같은 소수의 기존 단체들은 일간지 “투사회보”를 발행하여, 이들은 무장 저항을 강화하고 고무시켰다. 그들은 시장과 더 보수적인 시의회 의원들을 압도하는 데 성공했다. 새롭게 등장한 무장투사들과 연계하여 다양한 배경의 전투적인 개인들이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초점, 즉 지속적인 무력 투쟁에 헌신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기할만한 사항으로, 이 호전적인 단체의 많은 회원들은 이전에 파리 코뮌에 대한 연구 모임에 참여했는데, 그중 일부는 시인이자 활동가인 김남주와 함께 진행되었다(인터뷰, 1999년 11월 29일). 나는 2001년 봉기 참여자들과 29차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광주 봉기 이전 한동안 파리 코뮌에 집중했던 스터디 그룹의 일원이었음을 나타내는 사람이 많았다. 윤상원(해방광주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은 녹두서점에서 열린 1976년 김남주의 파리 코뮌 연설에 참석했다(인터뷰, 2001년 11월 7일). 봉기 당시 윤상원은 대학 내 다른 유력 인사들과의 토론에서 파리 코뮌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인터뷰, 2001년 6월 22일). 적어도 십여 명의 다른 핵심 활동가들이 파리 코뮌을 연구했었다.

광주 봉기에 앞서 활동가들이 파리 코뮌을 연구한 것은, 한 봉기의 유산이 지역적 차이를 넘어 인간이 압제에 대응하는 다른 봉기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심지어 폭동이 잔인하게 진압될 때에도―두 경우 모두 그렇듯이―그 경험은 새로운 욕망과 새로운 필요, 새로운 두려움과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고, 봉기의 참가자들과 그 봉기가 만들어낸 파문에 서 있는 이들의 심장과 정신에 영향을 준다.

결론

광주항쟁에 대한 이러한 간략한 발언을 통해,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여전히 새로운 혁명적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에서 얻은 그의 분석의 범주는 현대의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통찰이 현대와도 분명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특히 오류의 비용이 수천 명의 목숨이 될 수 있을 때, 혁명 이론은 이전의 혁명 물결의 유산을 의식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주어야 한다.

다행히도, 크로포트킨의 서술 중 오류로 드러난 것 중 하나는 억압의 피비린내 나는 집행인들은 “절대로 기소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크로포트킨의 혁명적인 팜플렛』, p.138.). 놀랍게도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 이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광주학살 주모자)은 모두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 역사상 그러한 유혈사태의 책임자들이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앞으로 기업의 지배와 전쟁, 군국주의라는 현재의 악몽을 대신할 자유, 번영이라는 크로포트킨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