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아나르코 생디칼리즘
Subtitle: 이론과 실천
Date: 1938
Source: Retrieved on April 26, 2009 from www.spunk.org

시작하며 : 역자의 한마디

생디칼리슴은 대중이 자주적, 자발적으로 결성한 ‘조합(신디케이트)’과 그를 기반으로 경제적 영역에서의 투쟁을 통하여 사회혁명을 쟁취하고자하는 사상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보통 생디칼리슴이라 표기하거나, 노동조합주의라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디케이트’는 협소하게 노동조합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생디칼리슴이 노동조합만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본 한국어판 번역에서는 생디칼리슴을 생디칼리슴이라고 생소하게 음차하거나 그 운동의 영역을 ‘노동조합’만으로 제한하는 ‘노동조합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넓은 의미로써 조합주의, 혹은 혁명적 조합주의라 번역하였다.

1. 아나키즘 : 그 목표와 목적

아나키즘 vs. 경제적 독점과 국가권력 ;

근대 아나키즘의 선구자들 ;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저작 ;

피에르 조지프 프루동의 정치적 · 경제적 분권화 사상 ;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 소유』 ;

집산주의자이며 아나키즘 운동의 창시자 미하일 바쿠닌 ;

아나르코 코뮤니즘의 대표적 인물 크로포트킨과 상호부조 철학 아나키즘과 혁명 ;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통합으로서의 아나키즘 ;

아나키즘 vs. 경제적 물질주의와 독재 ;

아나키즘과 국가 ; 역사의 한 경향으로서의 아나키즘 ;

자유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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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은 현대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명확한 지적知的 조류이다. 아나키즘을 믿는 이들은 경제적 독점과 사회 내부의 모든 강제적인 정치적·사회적 여러 제도의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 질서 대신 협동 노동에 기초한 모든 생산력의 자유 연합(그 유일한 목적은 사회 모든 구성원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만족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 동맹 내부에서 특권을 가진 소수파의 특권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아나키스트는 정치적·관료주의적 여러 제도처럼 죽은 기구를 지닌 현재의 국가 조직 대신에 자유 커뮤니티들의 연합을 바란다. 자유 커뮤니티들은 그 공통의 경제적·사회적 이익을 위해 서로 결성되고, 상호 합의와 자유계약에 따라 자신들의 모든 사항을 결정할 것이다.

현대사회 시스템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깊이 연구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과제는 소수의 공상적 혁신자의 유토피아 사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 현대사회의 적응 장애를 철저하게 파헤친 논리적 귀결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기존사회 여러 조건의 모든 새로운 단계가 그 적응 장애 자체를 보다 명확하게, 게다가 불건전하게 표현하고 있다. 근대의 독점 기업·자본주의·전체주의 국가는 다른 귀결로는 도달할 수 없는 발전의 최종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경제 시스템의 어마어마한 발전은 특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 손에 사회적 부를 막대하게 축적시키고 대다수의 대중을 계속 빈곤하게 만들고 있으며, 현재의 정치적·사회적 반동의 길을 준비하고 모든 점에서 반동의 편을 들고 있다.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인간사회의 일반적 이익을 희생하고, 그 결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조직적으로 좀먹어 온 산업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최소한의 필요 물자를 확보하고 보다 높은 지적 문화의 혜택을 접할 수 있는 수단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사람들은 망각하고 있다. 산업이 모든 것이며 인간은 무가치하다는 그곳에서 무자비한 경제적 독재 체제가 시작된다. 노동자는 정치적 독재 체제와 마찬가지로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 경제적 독재 체제와 정치적 독재 체제는 상호 증가하는 것이며, 같은 원천에 의해 육성되고 있는 것이다.

독점 기업에 의한 경제적 독재 체제와 전체주의 국가에 의한 정치적 독재 체제는 동일한 정치적 과제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 지휘자들은 사회생활의 무한한 표현 전체를 기계가 지닌 기계적 템포로 환원하고, 모든 유기적인 것을 생명이 없는 정치적 장치 설비로 합치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근대사회 시스템은 전 세계의 사회 생명체를 내부로는 서로 적대하는 모든 계급으로, 외부로는 공통의 문화 공동체를 서로 적대하는 여러 민족으로 분단시켜 왔다. 그리고 여러 계급도 여러 민족도 서로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 대립하며 그 끊임없는 전쟁이 공동체의 사회생활을 계속적인 발작 상태로 고정시키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무서운 후유증은 그 자체로 경제적 권력·정치적 권력을 바란 현재의 투쟁의 결과일 뿐이며, 이 견디기 어려운 조건이 지닌 논리적 귀결일 뿐이다. 이 조건은 가능한 한 빠르게 새로운 방향의 사회 발전을 취하지 않으면 반드시 전 세계적 대재앙을 이끌어내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가 오늘날 연간 예산의 50퍼센트에서 70퍼센트를 이른바 국방비와 과거 전쟁에 의한 부채의 보상비로 낭비해야만 한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현상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국가가 개인에게 제공하는 보호라는 것은 분명 어마어마한 희생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만 한다.

영속적으로 성장하는 무자비한 정치적 관료제 권력이 인간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감시하고, 보호한다. 그리고 인간의 연대적 협동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물을 두고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전부 배제한다. 모든 생활 가운데서 대부분의 대중, 그렇다, 전 세계 대중 대부분의 행복을 소수의 사람들의 이기적인 권력욕과 경제적 이익에 바치는 시스템, 이는 반드시 모든 사회적 연결을 찢어놓고 모든 사람 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이끌게 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시스템은 거대한 지적 반동·사회적 반동의 단순한 선도자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이 반동은 근대 파시즘에서 그 표현을 찾아내고 과거 수세기에 걸친 절대군주제의 권력에의 집착을 아득하게 능가하며,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하고 있다. 마치 여러 종교의 신학 시스템에 있어서 신이 모든 것이고 인간은 무無인 것처럼 이 근대 정치신학에 있어서는 국가가 모든 것이고 인간은 무인 것이다. “신의 의지”의 배후에 특권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의 의지가 늘 숨겨져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국가의 의지”의 배후에는 제멋대로 이 의지를 해석하고 대중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 천명天命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이기적 이익이 있을 뿐이다.

아나키즘 사상은 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찾아낼 수 있다. 단지 지금도 이 분야에 있어서 역사적 저작에 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중국의 현인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나 그 후에는 그리스 철학자들, 쾌락주의快樂主義·견유학파犬儒學派·그 밖에 이른바 “자연권”의 주창자들, 특히 플라톤의 대척점이자 스토아학파를 만든 제노가 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어서 영지주의Gnosis의 칼포크라테스(Carpocrates)의 가르침에도 아나키즘 사상을 드러내는 표현이 보이며,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의 중세시대에는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교 학파에 틀림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종파의 대부분은 가장 야만적인 박해의 먹잇감이 되었던 것이다. 보헤미아 종교 개혁사에 있어서는 페트르 헬치츠키(Petr Chelčický)가 아나키즘 사상의 강력한 추진자이며, 『신앙의 그물Net of faith』이라는 저서 가운데서 훗날 톨스토이가 교회와 국가에 대해 행한 것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위대한 인도주의자 중에는 라블레(François Rabelais)가 있다. 그는 행복한 ‘텔렘의 수도원Abbey of Thélème’(『가르강튀아La vie de Gargantua et de Pantagruel』에 있어서 모든 권위주의적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인생상人生像을 그리고 있다. 리버테리언 사상의 선구자는 그 외에도 있지만 여기서는 라 보에시(Étienne de La Boétie)·실반 마레샬(Sylvain Maréchal)·특히 디드로(Denis Diderot)가 그러했다고 적어두겠다. 디드로는 많은 저서를 썼는데, 독자는 거기서 모든 권위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난 진정 위대한 정신이 지닌 말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가장 최근에는 인생에 대한 아나키즘적 인식에 명확한 형태가 주어져서 당면한 사회 진화 프로세스와 그 인식이 결합되듯이 되었다. 이것을 처음 행한 것은 착상이 뛰어난 윌리엄 고드윈의 저서,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일반 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고찰An 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 and Its Influence on General Virtue and Happiness』(런던, 1793년)이었다. 고드윈의 책은 영국에 있어서 정치적·사회적 급진주의 여러 개념의 오랜 기간에 걸친 진화가 성숙한 과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진화는 조지 부캐넌(George Buchanan)에서 리처드 후커(Richard Hooker)·제러드 윈스턴리(Gerard Winstanley)·앨저넌 시드니(Algernon Sidney)·존 로크(John Locke)·로버트 월리스(Robert Wallace)·존 벨러스(John Bellers)로, 그리고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리처드 프라이스(Richard Price)·토마스 페인(Thomas Paine)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고드윈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적인 여러 악의 원인은 국가의 형태가 아닌 그야말로 국가의 존재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국가가 진짜 사회의 캐리커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국가는 국가의 영원한 보호 아래 있는 인간을 단순히 자기의 캐리커처로 꾸며낸다. 국가는 일관되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연스런 경향을 억지로 억누르고 내부 충동과 모순된 것들을 간직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좋은 신민臣民이라는 공인된 양식의 모습에 인간을 끼워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발달을 방해받지 않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발적으로 평화와 자유를 추구하는 스스로의 선천적 요구에 적합하게끔 환경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고드윈은 동시에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인간은 적절한 경제 조건이 있고 개인이 타인의 착취대상이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공생할 수 있다. 이 사고야말로 정치적 급진주의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 완전히 놓치고 있던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대표자들은 후에 자신들이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국가권력에 대해 늘 커다란 양보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고드윈의 무無국가사회라고 하는 사상의 전제는 모든 자연스러운 부와 사회적 부를 사회적으로 소유하는 것, 그리고 생산자가 자유롭게 협력하는 것으로 경제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그야말로 훗날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창시자였던 것이다.

고드윈의 저서는 영국의 선진적 노동자 집단과 보다 계몽된 자유주의적 인텔리겐치아의 일부에 굉장히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영국에 있어서 청년 사회주의 운동의 출현에 공헌했다는 점이다. 청년 사회주의 운동의 가장 성숙한 해설자는 로버트 오언(Robert Owen)·존 그레이(John Gray)·윌리엄 톰슨(William Thompson)이었다. 이 운동은 독일이나 다른 나라들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에 걸쳐 틀림없이 자유의지주의자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키즘 이론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지적 재능에 가장 뛰어나고 명확하게 근대 사회주의가 자랑할 만한 가장 다면적인 저술가였다. 프루동은 자기 시대의 지적·사회적 생활에 완전히 뿌리내렸고, 그것이 그가 다룬 모든 문제에 대한 그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훗날 추종자들 중 많은 이들조차 그렇게 하였듯이 시간의 제약 가운데 태어난 그의 특수한 실천적 여러 계획에 있어서 프루동을 판단하면 안 된다. 당시 많은 사회주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프루동은 사회부적응의 원인을 깊이 이해하고, 또한 가장 광범위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시스템에 대한 신랄한 적대자이며 사회진화 가운데 새롭게, 보다 고차원적인 지적·사회적 생활의 제반 형태를 보고, 이 진화는 어떠한 추상적 일반 공식으로도 구속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프루동은 자코뱅파 전통의 영향력에 적대적이었다. 프랑스 민주주의자와 당시 대부분 사회주의자의 의견은 이 전통에 지배되어 중앙집권국가·중앙집권 경제정책에 의한 자연스러운 사회진보 프로세스로의 간섭이라는 완전히 동일한 판단을 지니고 있었다. 프루동에게 있어서 이것들 두 암癌의 성장을 사회에서 배제하는 것은 19세기 혁명이 지닌 커다란 과제였다. 프루동은 코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재산을 착취적 특권이라고 비난했지만 (자유계약으로 서로 제한했던 산업의 제반 집단에 의해 효과적이 된) 만인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는 인정했다. 다만 그것은 이 권리가 타인을 착취하는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만들어지지 않는 한, 그리고 자신 개인의 노동의 풍요로운 산물이 만인에 대해 보증되는 한에 있어서였다. 상호부조에 기초한 이 조직은 평등한 서비스와 교환으로 서로에게 평등한 권리의 향유를 보증한다. 생산물을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평균 노동 시간이 산물의 가치의 척도가 되고 상호교환의 기반이 된다. 이렇게 해서 자본은 그 고리대금업 같은 권력을 박탈당하고 노동 업적과 완성에 결합된다. 만인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됨으로서 자본은 착취의 도구가 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한 경제형태는 정치적 강제기구를 쓸모없게 한다. 사회는 자유로운 공동체들의 동맹이 되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자력으로, 혹은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필요에 따라 조정한다. 그 중에서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 가운데에―그 한계로가 아니라―그 안전과 승인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 안에서 가장 자유로워지고 가장 독립된 주체성으로 풍부해지면 풍부해질수록 사회에 더 좋은 것이다.” 프루동이 가까운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연합주의 조직은 한층 더 발전의 가능성에 대해 어떠한 명확한 제한도 설정하지 않고 최대한의 개개인의 활동과 사회적 활동을 제공한다. 프루동은 연합에 관한 이 관점에서 시작하여 동시에 당시 싹트기 시작한 국가주의의 정치활동에의 열망과도 싸웠다. 특히 마치니(Giuseppe Mazzini)·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렐레벨(Joachim Lelewel) 같은 강력한 옹호자에게 볼 수 있는 국가주의와 싸웠다. 이 점에 대해서도 프루동은 그 동시대인의 대부분보다도 명확했다. 프루동은 사회주의의 발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특히 라틴 국가들에 사회주의의 존재를 인식시켰다. 조시아 워렌(Josiah Warren)·스티븐 펄 앤드류스(Stephen Pearl Andrews)·윌리엄 B. 그린(William B. Greene)·라이샌더 스푸너(Lysander Spooner)·프랜시스 D. 탠디(Francis D. Tandy)·가장 저명한 벤자민 R. 터커(Benjamin R. Tucker)와 같은 미국에 있는 유능한 해설자들에게서 보이는 이른바 개인적 아나키즘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그 대표자 중에서 프루동의 견해의 깊이에 다가선 사람은 없었다.

막스 슈티르너[본명 요한 카스파어 슈미트(Johann Caspar Schmidt)]의 저서 『유일자와 그 소유』는 아나키즘의 독특한 표현이었다. 이 저서가 금세 세상에서 잊히고 아나키즘 운동 그 자체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50년 뒤에 예기치 못하게 부활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슈티르너의 저서는 걸출한 철학적 저서이다. 그것은 인간이 우여곡절을 겪고 이른바 고차원적 권력에 의존하게 된 유래를 탐구하며, 이 조사에서 얻은 지식으로 겁내지 않고 추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것은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반란의 책이다. 아무리 극찬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권위를 숭배하지 않고, 따라서 자립적 사고를 강력하게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하일 바쿠닌은 정열적인 혁명 에너지를 가진 용감한 아나키즘 전사였다. 바쿠닌은 프루동의 교의敎義 위에 서 있으면서 그 교의를 경제적 측면으로 확장했다. 제1 인터내셔널의 집산주의파와 함께 그는 토지와 모든 생산수단의 집단소유를 지지하고, 사유재산권을 개별 노동의 온전한 산물에 한정하려고 했다. 바쿠닌은 동시에 공산주의의 적대자였다. 당시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볼셰비즘이 다시금 이어가고 있는 것과 같다. 베른에서 열린 ‘평화와 자유의 동맹’ 회의(1868년)에서의 네 가지 연설 중 하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사회의 모든 세력을 국가에 통합하고 국가에 미쳐있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국가를 폐기하기를 바란다―권위와 정부의 보호라는 원리의 완전한 폐기다.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고 문명화한다는 구실로 이 원리는 오늘까지 항상 인간을 노예화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파괴해 왔다.”

바쿠닌은 단호한 혁명가이며, 기존의 계급투쟁이 평화적으로 조정된다는 따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최소한의 사회개혁에서조차 맹목적이고 집요하게 적대적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 결과, 기존 사회 시스템이 가진 모든 교회적·정치적·군사적·관료적·법률적 제도를 폐기하고 그 대신 일상생활에서의 필요물품을 제공하기 위해 자유노동자협회의 연합을 도입하는 것이야말로 국제적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 구원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동시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바쿠닌도 혁명이 목전에 닥쳤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모든 독재나 과거의 여러 조건으로의 역행에 대해서 와야만 하는 혁명을 지켜야만 하기에 자신의 막대한 에너지를 ‘인터내셔널’ 내외의 모든 참된 혁명적·자유의지주의적 요소를 연합하는 일에 쏟아 붓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매우 특수한 의미로 근대 아나키즘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중요한 옹호자였다. 그는 근대 자연과학의 업적을 아나키즘의 사회학적 제반 개념의 발전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그 독창적인 서적 『상호부조Mutual Aid』를 통해 이른바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에 도전했다. ‘사회진화론’의 해설자들은 생존경쟁이라는 다윈(Charles Darwin)의 이론을 사용해 약자에 대한 강자의 투쟁을 모든 자연 경과의 철칙(인간마저 그 대상으로 하는)이라는 지위로까지 끌어올려서 기존 사회 제반 조건의 필연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현실적으로 이 개념은 생명표가 만인에게 퍼지지 않았고 불필요한 이는 이를 그저 감수해야만 한다는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주의의 교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이 보여준 것은 이런 무제한적인 전쟁으로서의 자연개념은 현실생활의 캐리커처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에는 온 힘을 다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야수 같은 생존경쟁뿐만 아니라 사회적 본능과 상호부조의 진화에 의한 약한 종족의 사회적 결합·종족보존으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로 인간이 사회의 창조자가 아니라 사회가 인간의 창조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에 앞선 사회에서 사회적 본능을 이어받아 왔기 때문이다. 사회적 본능만으로도 타 종족이 지닌 신체적 우위성에 대항하여 자신의 제1환경 내에서 자신을 보존할 수 있고, 예상 밖의 높은 발달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해왔다. 생존경쟁에 있어 이 제2의 경향은 제1의 경향보다도 훨씬 앞서 있다. 마치 사회생활을 전혀 갖지 않고 신체적 장점에만 의존해 온 종족이 일관되게 퇴화를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이 관점은 오늘날 자연과학과 사회연구에 있어서 일관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인간진화에 관한 사색에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열어젖혔다.

사실은 최악의 전제정치 아래에서조차 자유합의와 연대적 협력이 동료와의 관계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사회생활을 제외하고서는 그러한 일들이 완전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국가가 지닌 가장 강한 압제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하루도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성질에서 유래한 이런 자연스러운 여러 행동의 형태는 오늘날 경제 착취와 정부의 보호가 지닌 여러 효과에 일관되게 방해를 받고, 왜곡되어있다. 이것이 인간사회에 있어 짐승과 같은 형태의 생존경쟁인 것이며, 상호부조와 자유 협동에 의해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득히 먼 옛 시대부터 계승되어 인간에게도 초래된 개인적 책임의 의식이나 그 외의 귀중한 선善의 의식·모든 사회윤리나 사회정의 사상의 기원이 된 타인을 향한 연민의 능력, 이것들이 가장 잘 발달하는 것은 자유 속에서이다.

바쿠닌과 마찬가지로 크로포트킨 역시 혁명가였다. 다만 크로포트킨은 엘리제 르클뤼(Élisée Reclus) 등의 사람들처럼 혁명을 진화 단계의 한 특수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새로운 사회적 열망은 그 자연발달 가운데서 권위에 의해 과도하게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이 인간생활의 새로운 요인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되기 전에 폭력에 의해 낡은 껍질을 분쇄해야만 한다. 프루동이나 바쿠닌과는 반대로, 크로포트킨은 생산수단 뿐만 아니라 노동의 산물에 관해서도 지역사회 소유를 옹호했다. 현재의 기술을 가지고서 개인의 노동 가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한편으로 근대의 노동 방법을 이성적으로 방향 설정함으로써 확실하게 모든 사람을 꽤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이것은 조제프 데자크(Joseph Dejacque)·엘리제 르클뤼·에리코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카를로 카피에로(Carlo Cafiero) 등이 그 이전에 이미 주장하였고, 오늘날 대다수의 아나키스트가 옹호하고 있지만 크로포트킨이야말로 그 가장 뛰어난 해설자였다.

여기에서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원시 그리스도교를 이어받아 복음서에 적혀있는 윤리적인 제반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지배자가 없는 사회라는 사상에 이르렀다.[1]

모든 아나키스트의 공통점은 자유로운 인간성의 발달을 방해하는 모든 정치적·사회적 강제기구로부터 사회를 자유롭게 한다는 바람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호주의·집산주의·공산주의를 그 이상의 발전을 허용하지 않는 닫힌 시스템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자유로운 지역사회를 보호하는 수단에 관한 단순한 경제적 제반 전제라고 보아야만 한다. 미래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경제 공동 형태가 평행해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있어서는 모든 기회를 갖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발전이 자유 실험과 실지적 시험에 결합되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이 아나키즘의 여러 가지 방법에 있어서도 참이다. 현대 대다수의 아나키스트는 사회 변환은 폭력적인 혁명적 소요 없이는 올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동란動亂이 지닌 폭력은 지배계급이 새로운 사상의 실현에 어느 정도 적대할 수 있느냐 하는 저항의 세기에 따라 다르다. 자유와 사회주의의 정신으로 사회를 재조직한다는 사상에 영향 받은 여러 집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올 수밖에 없는 혁명의 출산의 고통은 누그러질 것이다.

근대 아나키즘은 프랑스대혁명 중 그리고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유럽의 지적 생활 가운데서 특징적인 표현을 이끌어낸 두 가지 큰 조류의 합인데, 그것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다. 근대 사회주의가 발전한 것은 사회생활을 깊이 관찰한 사람들이 정부 형태에 있어서 정치적 제반 조직과 정치적 제반 변혁으로는 ‘사회문제’라고 불리는 커다란 문제의 뿌리에는 전혀 손을 댈 수 없다고 것을 차례로 명확하게 보게 되었던 때였다. 사회주의의 지지자는 대중이 재산 소유 여부에 의해 계급으로 분단되어있는 한 아무리 뛰어난 이론적인 여러 전제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사회적 평등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진정한 공동체라는 생각을 사전에 배제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 독점의 철폐와 생산수단의 공유에 의해, 즉 모든 경제적 조건과 그에 관련한 사회적 제반 제도의 완전한 교환―사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고, 인간의 노동이 착취의 수단이 아닌 모든 이의 충족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기능하는 상황―에 의해 사회적 정의라는 조건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인식이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여러 가지 힘을 결집하기 시작하고 운동이 되자, 곧 대번에 견해의 상이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국가마다 다른 사회 환경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신권정치에서 제국주의, 독재주의까지의 모든 정치적 개념이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 여러 당파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편, 사회주의 사상의 발전에 계속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정치사상의 두 가지 큰 조류가 있다. 자유주의―이것은 여러 앵글로 색슨 국가와 특히 스페인에서 선진적 정신을 강력하게 고무시켰다―그리고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에 있어 훗날 표현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이것은 프랑스의 자코뱅주의에 가장 유력한 대표자가 있다―이다. 자유주의는 그 사회이론화에 있어 처음에는 개인에서 출발하여 국가의 활동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려 했으나 민주주의는 루소의 ‘일반 의지’라는 추상적 집단 개념에 입각해 그것을 국민국가 가운데에서 조정하려고 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탁월한 정치개념이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원래의 지지자들 대다수가 낡은 의미에서의 소유권을 지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경제 발전이 민주주의의 제반 원리를―무엇보다 자유주의의 원래의 여러 원리를―실제로는 만족시킬 수 없는 방향을 취하면 양쪽 모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신조는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이며, 자유주의의 신조는 “나의 길을 갈 권리”이다. 두 가지 모두 자본주의 경제의 여러 현실에서 난파하고 말았다. 전 세계 몇 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소수의 소유자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고, 구매자를 찾지 못하면 가장 비참한 빈곤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상 이른바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 따위는 위선적인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법은 사회적 부를 가진 사람들이 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같은 이유로, 허기를 면하기 위해 타인의 경제적 독재에 따라야만 할 때에 “나의 길을 갈 권리” 역시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다.

아나키즘과 자유주의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사상은 개인의 행복과 번영이야말로 모든 사회적 제반의 준칙이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유주의 사상의 위대한 대표자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제약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아나키즘 지지자는 이 생각을 궁극적인 논리 귀결로 가져가며 사회생활에서 모든 정치권력 제도를 배제하고자 한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자유주의의 기본개념에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통치한다”는 말을 정착시켰지만, 아나키스트는 소로(Henry David Thoreau)와 함께 “가장 좋은 정부는 전혀 통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처럼 아나키스트는 모든 경제 독점 폐지·토지와 모든 생산수단 공유·모든 사람이 구별 없이 생산수단을 이용하는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개인적·사회적 자유는 모든 사람의 평등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운동 그 자체로서, 아나키스트는 자본주의에 대한 전쟁은 동시에 모든 정치권력 제도에 대한 전쟁이어야만 한다는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경제 착취는 역사적으로 정치적·사회적 억압과 항상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왔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불가분적인 것이며,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사회 내부에서 소유하는 이들의 집단과 소유하지 못한 이들의 집단이 서로 반목하는 한, 소유하는 소수의 사람은 자신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를 필요로 한다. 사회 공정에 관한 이 전제가 소멸하고, 모든 것의 보다 높은 질서―어떠한 특권도 인정되지 않고, 사회적 여러 이익의 공유를 그 기본 전제로 하여야만 한다―에 지위를 양보하면, 인간에 대한 지배는 경제적·사회적인 모든 것의 관리 운영에 그 영역을 내줄 수밖에 없게 된다. 생시몽(Henri de Saint-Simon, Claude Henri de Rouvroy)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을 통치하는 기술이 소멸하는 시대가 찾아온다. 새로운 기술, 즉 모든 것을 관리 운영하는 기술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이 주장했던 이론이 파기된다.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태의 국가는 계급이 없는 사회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이행단계이며, 모든 계급투쟁을 없애고 계급 그 자체도 폐기한 뒤 국가를 해소하여 캔버스 위에서 지워 없앨 것이라고 한다. 이 생각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성질과 정치권력이라는 요인이 가진 역사상 중요성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으며, 역사의 모든 현상을 그저 그 시대의 생산양식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여기는, 이른바 경제적 물질주의에의 이론 귀결에 불과하다. 이 이론의 영향 아래서 사람들은 제반 국가형태와 그 외 모든 사회적 제반 제도를 사회의 ‘경제조직’ 위에 있는 ‘사법적·정치적 상부구조’라고 여기게 되며, 그 이론을 통해 모든 역사적 단계의 열쇠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실제로는 역사의 모든 단면에서 정치권력 쟁취 투쟁에 의해 한 나라의 경제발전이 수 세기에 걸쳐 저해되고, 강제로 일률적인 형태를 강요받았던 무수한 실제 사례가 있다.

교회군주제의 발흥 이전, 스페인은 산업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나라였으며 거의 모든 분야의 경제 산업에 있어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군주제가 승리한 뒤 한 세기 뒤에는 산업 대부분이 소멸해 버렸다. 당시 남아있던 이들은 가장 비참한 조건으로 연명할 뿐이었다. 대부분의 산업은 가장 원시적인 생산방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산업은 붕괴하고, 운하와 수로는 황폐해지고, 나라의 광대한 일대는 사막이 되어버렸다. 오늘날까지 스페인은 이 후퇴에서 다시 부흥하지 못했다. 정치권력을 추구한 카스트의 정열은 수 세기에 걸쳐 경제발전을 휴면 상태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유럽의 군주형 절대주의는 정해진 생산방법에서 조금이라도 일탈하면 과도하게 처벌하고 새로운 기술혁신을 허용하지 않는 바보 같은 “경제법령”과 “산업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수세기에 걸쳐 여러 유럽 국가들의 산업 진보를 가로막고 자연스러운 발전을 방해해 왔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일관되게 세계적 경제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하고 정치 놀음을 하는 장군들과 정치 패거리들에게 전 세계의 미래를 양도했던 정치권력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근대 파시즘이 경제 발전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현실이 되었다. 정치권력을 추구한 특정 정당의 열정은 그 나라를 경제의 진정한 사회주의적 재구축을 저해하고 모든 것을 갈아 넣는 국가 자본주의의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순진한 관점에서 보자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단순히 진정한 사회주의로의 길에서 잠깐의―하지만 불가피한―이행단계였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오늘날 그것은 무서운 전제정치로 성장하여 파시스트 국가의 압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계급투쟁과 더불어 여러 계급이 없어지기까지 국가는 분명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은 모든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질 나쁜 농담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든 특정 형태의 인간 노예를 전제로 삼고 있다.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해 노예의 존재가 요구되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 자국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종류의 인공적 대립과 같이, 국가는 그 내부에서도 사회를 카스트·계층·계급으로 분단시킨다. 이것이 국가의 유지에 있어 본질적인 조건인 것이다.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특권을 보호하고 새로운 특권을 만들어내는 일 뿐이다. 여기에 국가의 모든 의의가 소요된다.

사회혁명으로 인해 생겨난 이 새로운 국가가 낡은 지배계급의 특권을 종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행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특권계급을 그 자리에 두는 것이다. 새로운 특권계급이 통치자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주장하고 있는―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모든 러시아 민중에 대한 소규모 당파의 독재 이외에 무엇도 아니지만―러시아 볼셰비키 관료제의 발전은 단순히 예로부터의 역사적 경험 중 최근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껏 몇 번이나 반복되어온 일이다. 이 새로운 지배계급은 새로운 귀족정치로 급속하게 성장하여 러시아 농민·러시아 노동자의 대다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이는 마치 다른 나라들에서 특권적 지위·계급이 민중으로부터 이탈해버리는 것과 같은 정도로 명확하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새로운 러시아의 정치위원 제도commissar-ocracy가 자본주의 국가의 강력한 금전적·산업적 과두정치와 같은 기반을 제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반론은 지탱될 수 없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특권의 크기나 범위가 아니라 평균적인 인간의 일상생활에 대한 즉시적인 영향이다. 무엇보다 중간 정도의 노동조건으로 일하고 인간답게 의식주를 충분히 얻을 수 있으며 무언가의 문화적 즐거움을 향유할 정도의 잔금을 손에 쥔 미국 노동자가 멜론(Andrew William Mellon) 가家 재벌이나 모건(John Pierpont Morgan Sr.) 일족이 소유한 수백만 달러의 자산에 대해 느끼는 것과, 억만장자는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행정 관료가 갖는 특권에 대해 느끼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주린 배를 채우는 데 충분한 빵을 손에 넣지 못하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사용해야만 하는 일이 많은 열악한 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더구나 생산능력을 극한까지 높이는 생산 속도 증강 구조 아래서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아무 부족함 없는 상류계급의 특권을 자본주의 제반 국가에 있는 계급적 동지들보다도 훨씬 예리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제專制 국가가 하층계급이 지닌 기존 제반 조건에의 불만을 무시하고, 이에 대해 어떤 종류로든 항의하는 행동을 하는 순간 그 생활이 위협받을 뿐일 때에 이러한 정황은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 존재하는 것보다 아득하게 큰 경제적 평등이 있다 하더라도 정치적·사회적 탄압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장도 있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 같은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형무소·수도원·군대에서조차 그 수용자들은 동등한 주거·같은 식량·같은 의복·같은 일을 제공받는 것처럼 충분히 높은 경제적 평등을 볼 수 있다. 페루의 고대 잉카 제국이나 파라과이의 예수회 국가(예수회는 파라과이에 대신정국가大神政國家를 설치하여 1767년까지 과라니 족族을 착취했다 -역자 주)는 모든 주민에게 평등한 경제 조건의 제공을 고정된 구조에 편입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그보다 더할 수 없는 독재가 만연했고, 인간은 조금 높은 수준의 의지를 지닌 자동 기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이 행하는 의사 결정의 태반이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프루동이 자유 없는 “사회주의” 따위는 최악의 노예제라고 여긴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회정의에의 정열이 적절하게 발달하고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정열이 인간의 개인적 자유 감각에서 성장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했을 때이다. 즉, 사회주의는 자유롭거나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의 양자택일인 것이다. 이 인식이야말로 아나키즘의 존재는 그야말로 정당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제도적 제반은 사회생활에 있어 동식물의 신체 기관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여러 기관은 제 마음대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사회적 환경에서 명확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출현한다. 심해어의 눈은 지상에서 생활하는 동물의 눈과는 전혀 다르게 형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요구를 만족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제반 생활 조건의 변화는 여러 기관의 변화를 낳는다. 하지만 기관은 그것이 달성되게끔 진화한 기능, 혹은 그에 관련한 기능을 늘 달성한다. 그리고 그 기능이 유기체에게 필요 없어지면 그 기관은 단계적으로 소멸하거나 발달하지 않거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관이 그에 부합하는 목적에 따르지 않는 기능을 획득하는 일은 없다.

사회적 제반 기관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도 자의적인 출현이 아닌, 명확한 목적을 달성하는 특수한 사회적 필요를 위해 존재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렇게 하여 이 근대 국가는 독점 경제 뒤에 진화하고, 그에 따른 계급 분단이 옛 사회 질서의 틀 가운데서 차례로 명확해지기 시작해온 것이다. 새롭게 발흥한 소유계급은 자신들의 인민 대중에 대한 그 경제적·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고, 다른 인간 집단에 대해 바깥에서부터 그것을 밀어붙이기 위해 정치적 권력의 도구를 필요로 했다. 이렇게 하여 특권을 가진 카스트·계급이 비非소유계급을 강제적 종속·억압하기 위한 정치권력 기관으로서, 근대 국가의 진화에 적합한 사회적 제반 조건이 생겨났다. 이것이 생애 전반에 걸친 국가의 정치적 업무이며 국가가 존재하는 본질적 이유이다. 국가는 이 업무에 항상 충실하다. 국가는 그 표면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기에 계속해서 충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가의 형식적인 형태는 역사적 발전 과정 안에서 변화해 왔다. 하지만 그 기능은 항상 동일한 채다. 국가는 기준 위에서만이라도 일관되게 계속 넓어지며, 국가의 옹호자들은 자신의 욕망에 보탬이 되는 사회활동 분야를 보다 능숙하게 만들어낸다. 군주국이든 공화국이든, 역사적으로 독재 정치에 의해 지탱되고 있든 자연 헌법에 뿌리 내리고 있든, 국가의 기능은 항상 동일한 채인 것이다. 동식물 신체기관의 기능이 제멋대로 바뀌지 않는―예를 들면 의지가 있다고 해서 눈으로 소리를 듣거나 귀로 사물을 보거나 할 수 없는―것처럼, 자의적으로 사회적 억압의 기관을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해방의 도구로 교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지금 그대로밖에는 존재할 수 없다. 대중 착취와 사회적 특권의 옹호자이자, 특권계급·카스트·새로운 독점기업의 창조자로 말이다. 국가의 이러한 기능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대사회 질서의 진정한 성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인간에 대한 새로운 사회 진화의 견해를 보여주는 작업 따위를 수행할 수 없다.

아나키즘은 모든 인간 문제에 대한 만능 해결책이 아니다. 흔히 듣는 것처럼 완전한 사회 질서를 가진 유토피아도 아니다. 원칙적으로 모든 절대적 틀과 개념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실 따위를 신봉하지 않으며, 인간 발달의 결정적 최종 지점 따위도 믿지 않는다. 다만 사회적 약속과 인간의 생활 제반 조건이 완전해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다. 항상 보다 고차원의 표현 형태를 바라며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도 어떠한 결정적 종착점을 지정하지 못한다면 고정된 목적지 역시 설정할 수 없다. 어떠한 종류의 국가든지 그것이 행하는 최악의 범죄는 사회생활이 지닌 풍부한 다양성을 강제로 결정된 형태로 밀어 넣으려 하고 하나의 특정 형태에 적합하게 하려는 일이다. 그것은 보다 폭 넓은 의견을 인정하지 않고 이전에는 자극적이었던 정황을 이미 끝나버린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국가의 옹호자들은 자신이 강력해졌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를 더욱 완전하게 자신들에게 봉사하게 만들 수 있게 된다. 모든 창조적인 문화적 제반 기력의 조작에 대해 더욱 비뚤어진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된다. 어떤 시대의 지적·사회적 발전에 대해서도 보다 불건전하게 영향을 주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이른바 전체주의 국가는 현재 모든 대중에게 산더미 같은 부담을 지우고 있으며, 대중의 모든 지적·사회적 생활 표현을 정치적 섭리가 설정한 생명 없는 양식으로 주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냉혹하고 짐승 같은 무력을 사용해 기존 제반 조건을 바꾸고자 모든 활동을 탄압하고 있다. 전체주의 국가는 현대의 무서운 전조이며, 과거 수 세기에 나타난 야만에의 회귀가 다다를 곳을 무서울 정도로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정치기구의 승리이며, 행정가들이 확립한 규칙에 따라 인간의 사고·감정·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지적 문화의 종언인 것이다.

아나키즘 사상은 제반 제도·사회 형태의 상대적 중요성만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고정화된 자기완성형 사회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적 발전이 지닌 명확한 경향인 것이다. 모든 성직자·정부의 제반 기구를 지적知的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 모든 개인과 여러 사회적인 힘을 자유롭게, 방해받지 않고 전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자유마저도 절대적 개념이 아닌 상대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항상 확대되는 것이며 다양한 방법으로 보다 광범위한 집단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에게 있어 자유는 추상적 철학 개념이 아닌, 만인에게 자연이 부여한 권력·능력·재능의 원전한 발달을 가져오며, 그것을 사회적인 중요성으로 변화 변화시키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가능성이다. 이 자연스러운 인간 발달이 교회나 정치의 보호에 영향 받지 않으면 않을수록 인간의 인격은 유능하고 조화로운 것이 되며, 그 인격이야말로 그것을 성장시킨 사회의 척도가 될 것이다.

역사에 있어 모든 위대한 문화적 시대가 정치적으로는 약한 시대였던 이유가 이것인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정치 시스템은 항상 여러 사회적인 힘의 유기적 발전이 아닌, 그들의 기계화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문화는 양립할 수 없는 적대의 한복판에 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다음과 같이 적으며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가진 것 이상으로 낭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만이 아니라 민족에도 해당된다. 권력·높은 정치high politics·농업·상업·의회주의·군사이권에 자기 자신을 낭비하고 개인의 진정한 자아를 가장 첫째로 구성하는 상당량의 이성·열심·의지·극기를 포기하고 있다면, 한 쪽을 지니기 때문에 다른 쪽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누구도 속아서는 안 된다―문화와 국가는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국가’ 따위는 그저 근대의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한 편은 다른 편을 먹이로 하며, 한 편은 다른 편을 희생해서 번영한다. 모든 위대한 문화적 시대는 정치적 쇠퇴의 시대인 것이다. 문화적인 의미에서 위대한 것은 어느 것이라도 비정치적이며 반反정치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강력한 국가기구는 보다 고차원적인 문화적 발전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인 것이다. 국가가 내부 부패 때문에 공격받을 때, 사회의 창조적인 여러 힘에 대한 정치적 권력의 영향이 최소한으로 억제되는 때에는 문화가 가장 잘 번영하게 된다. 왜냐하면 정치적 지배는 항상 통일성을 얻고자 분투하며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을 그 보호대상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정치적 지배는 창조적인 문화 발전의 열정과의 피할 수 없는 모순이다. 창조적인 문화 발전은 사회활동의 새로운 형태·새로운 분야를 추구하며 늘 탐구되어진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다양성·모든 사안의 자유로운 변화는, 문화 발전과는 정반대의 엄격한 형태·사문화된 규칙·사회생활의 모든 발현의 강제적 억압과 같은 정도로 극히 필요한 것이다.

모든 문화는 그 자연스러운 발달이 정치적인 제한에 의해 과도하게 영향을 받고 있지 않으면 영속적으로 발전적 충동을 새로이 하고, 그곳에서 영속적으로 증대하는 다양한 창조적 활동이 생겨난다. 모든 훌륭한 작품은 보다 커다란 감성과 더욱 깊은 영감을 추구한 열정을 일깨운다. 각각의 새로운 형태가 새로운 발전가능성의 예고가 된다. 하지만 몇 번씩이나 되뇌어져 온 것처럼, 국가는 어떠한 문화도 창조하지 않는다. 국가는 고정관념으로 안전하게 지탱되며, 모든 것을 현상 그대로 보존하려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모든 혁명의 이유였던 것이다.

권력은 파괴적으로밖에 작용하지 않는다. 모든 삶의 발현을 늘 법을 사용하여 억지로 구속하고 있다. 그 지적 표현 형태는 생명 없는 도그마이며, 그 물리적 형태는 짐승 같은 무력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알게 하지 못함으로써 지원자에 대해서도 무지의 낙인을 찍고, 원래대로라면 최선의 재능을 부여받았음이 확실함에도 지원자를 바보나 짐승처럼 교묘하게 가로챈다. 모든 일을 기계적 질서에 억지로 따르게 하고자 늘 분투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 자신을 일개 기계로 만들어 버리며,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근대 아나키즘이 생겨나고, 현재는 그곳에서 아나키즘의 도의적 힘을 끌어내고 있다. 자유만이 인간에게 위대한 모든 것을 행하게 할 수 있으며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이 사람을 교육하는 기술·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듯이 사람을 고무시키는 기술이었던 적은 결코 없다. 자유는 삶의 올바른 본질이다. 모든 지적·사회적 발달의 추진력이다. 인류의 미래가 지닌 모든 새로운 견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경제 착취와 지적·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인간 해방, 아나키즘이라는 세계철학이야말로 그 최선의 표현이다. 보다 고차원적인 사회문화와 새로운 인간성의 진화에 제일의 필요조건이 바로 이것이다.

2. 프롤레타리아트와 근대 노동운동의 시작

기계 생산과 근대 자본주의의 시대 ;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발흥 ;

최초의 노동조합과 그 생존 투쟁 ; 러다이트 운동 ;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조합주의; 정치적 급진주의와 노동자;

차티스트(인민헌장, Chartist)운동;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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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회주의는 당초, 사회생활의 상호관계를 보다 깊게 이해하는 데에만 머물고 있었다. 현재의 사회질서에 내재한 모순을 해소하고 인간과 그 사회 환경의 관계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고자 한 시도였다. 따라서 그 영향력은 한동안 지식인으로 구성된 작은 서클에 한정되었다. 대부분의 지식인은 특권계급 출신이었다. 대중의 지적·물질적 필요성에 대한 깊고 고귀한 동정심에 자극받아서, 이런 지식인들은 인류의 장래 발전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개척하고자 사회적 대립의 미궁에서 빠져나올 길을 탐색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문화적 문제였다. 따라서 그들은 이 새로운 식견을 받아들여 줄 것을 바라며, 주로 자신들의 동시대인의 이성과 윤리적 감각에 직접 호소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상은 운동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사상 그 자체는 단순히 구체적 정황의 산물이며, 특정 생활 조건에 관한 관념의 침전물이다. 운동은 사회생활의 즉각적·실제적 필요에서만 생겨나며 순수하게 추상적인 사고의 산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운동이 그 압도적인 힘을 획득하고, 승리를 내부에서 확신하는 것은, 단지 운동에 생명과 지적 내용을 부여하는 위대한 사상에 의해 활성화된 때뿐이다. 이렇게 가정하고서야 비로소 사회주의에 대한 노동운동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다. 이 운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낳은 사회 개조의 논리적 귀결로서 발전했다. 그 당면 목적은 하루하루의 양식을 바라는 투쟁이며, 노동자에게 있어 끊임없이 점점 파멸적이 되어가는 시대의 흐름에 의식적으로 저항하는 것이었다.

산업대혁명 덕에 근대 노동운동이 존재하게 되었다.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시작되어 그 후 다섯 대륙 전체로 확장되었다. 이른바 “제조” 시스템은 이른 시기에 어느 정도까지 노동 분업―다만 이 분업은 실제 기술적 체계가 아니라 인적 노동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의 길을 열었지만, 그 이래로 여러 가지 탁월한 발명이 이루어져 작업 도구 전체를 완전히 혁신했다. 기계가 개인의 도구를 능가하고, 생산 체계 전반을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만들었다. 방직기의 발명은 영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던 직물 생산 전체를 격변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털실과 면의 가공·염색 방법을 가져왔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획기적인 발명 덕분에 증기 동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동력은 기계 생산을 풍력·수력·마력馬力이라는 고전적인 원동력에의 의존에서 해방시키고, 처음으로 근대 대량 생산에 어울리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증기를 이용하여 서로 다르게 움직이는 여러 가지 기계를 같은 공간에서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근대 공장이 출현하고 그것은 수십 년 안에 소규모 작업장을 나락 끝, 운명의 갈림길까지 쫓아내게 되었다. 이것은 직물 산업의 맨 처음에 만들어졌다. 그 외 생산 부문도 곧 뒤를 이었다. 증기력의 이용과 주강鑄鋼의 발명은 단기간에 제철업과 석탄 산업을 완전히 격변시켜 그 영향력을 다른 작업의 흐름에도 급속하게 확대했다. 근대적 대공장의 발달에 따라, 결과적으로 산업도시들의 놀랄 만한 성장이 초래된 것이다. 버밍엄의 주민은 1801년에는 7만3천 명이었으나 1844년에는 20만 명이 되었다. 같은 시기, 셰필드Sheffield는 4만6천 명에서 11만 명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다른 신흥 대산업 중심지도 같은 비율로 증가해 갔다.

공장은 인간이라는 먹이를 필요로 한다. 빈곤한 시골 주민이 증가하여 도시에 유입되는 것으로 이 요구가 충족된다. 의회 역시 이를 도왔다. 악명 높은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은 소규모 농가에서 공유지를 강탈하여 농민을 거지로 만들었다. 공유지의 조직적 강탈은 이미 앤Anne 여왕의 통치하(1702~1714년)에 시작되었으며, 1844년까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경작 가능한 땅의 3분의 1 이상을 빼앗겼다. 1786년에는 그때까지 25만 명의 독립 지주가 존재했으나, 그 뒤 고작 30년이 되지 않아 그 수는 3만2천 명까지 줄어들었다.

새로운 기계생산은 이른바 국부國富를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규모로까지 증가시켰다. 하지만 이 부는 소수 특권자의 손에 있으며, 그 특권의 원천은 무제한적인 노동자 착취에 있었다. 노동자는 경제적 생활 제반 조건의 급속한 변화 때문에 가장 심각한 빈곤 상태에 내몰렸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굉장히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영국 공장 감시원의 보고에 적힌 것 같은 당시 노동자의 정황에 관한 음울한 기술記述·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첫 작품인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상황』에 큰 영향을 주었던 유진 뷔레(Eugène Buret)의 『영국과 프랑스 노동 계급의 빈궁De La Misère Des Classes Laborieuses En Angleterre Et En France』과 같은 책·현대 영국인 작가에 의한 수많은 저작, 이러한 저작을 읽으면 당시의 광경을 이해하고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아서 영(Arthur Young)이 대혁명 발발 직후의 유명한 프랑스 기행문 가운데서 시골에 있는 프랑스인들이 그 무서울 정도의 빈곤함 때문에 모든 인간성의 흔적을 잃고, 거의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버티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면, 근대 자본주의의 초기에 발흥한 대다수의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적·물질적 정황에도 완전히 동일한 것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막대한 수의 노동자는 유리창조차 없는 비참한 누추한 굴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하루 14시간에서 15시간, 위생설비도, 생활보호나 수용자의 건강에 대한 배려도 없는 생산현장의 착취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것은 임금賃金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임금은 가장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조차 만족시키지 못할 정도의 것이었다. 한 주의 끝에서, 자신이 지내던 지옥을 잊을 만큼의 돈이 노동자에게 남아있으면 그는 몇 시간이고 맛없는 술을 마셔댔다. 이것이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은 확실히 매춘·만취·범죄의 막대한 증가를 불러 일으켰다. 누구도 가엾게 여기지 않을 정도인 대중의 정신적 퇴폐와 도덕적 타락에 대해 읽으면, 인간의 철저한 비참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장 노예의 비참한 상황은, 이른바 현물급여제現物給與制에 의해 더욱 억압적이 되었다.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물품 등의 일상필수품을 공장주가 소유한 가게에서 구입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건네지는 상품은 많은 경우 비싸고 쓸모가 없었다. 물론 이런 경우 그 상품은 구입한 때보다도 싼 가격으로 교환되었다. 근대의 저술가들은 이렇게 하여 어머니가 제 아이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 장의사와 무덤 파는 사람에게 얼마를 지불해야 했는지를 가르쳐 준다.

이런 인간 노동력의 무제한적인 착취는 성인 남녀에 한정되지 않았다. 새로운 작업 방법 덕분에 몇 번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기계를 조작할 수 있게 되었고, 배우는 데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아이들을 파괴했다. 3~4세의 아이들이 취업하고, 경영자가 소유한 생산적 유폐 상태에서 청년시대를 진절머리 나게 보내야만 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어떠한 법적 제한도 가해지지 않았으며, 아동 노동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처참한 장 중 하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경영이 윤리적인 배려를 고려하지 않고, 대중을 무제한으로 착취하는 일에 막연히 순응하고 얼마나 무정하게까지 진전하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건강할 수 없는 공장에서의 장시간 노동은 최종적으로 아동의 사망률을 끌어올렸다. 그것은 리처드 칼라일(Richard Carlile)이 전적으로 타당하게 “베들레헴에서 벌어진 유아 학살의 잔혹한 반복”이라고 쓸 정도였다. 그때가 되어서 비로소 의회는 법률을 제정했다. 하지만 공장 경영자는 오랫동안 이 법률을 교묘히 빠져나가거나 그저 위반하거나 했다.

국가는 경영자의 착취욕에 무거운 짐이 되는 제한을 가하지 않으려 최대한의 지원을 했다. 국가가 싼 값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목적을 위해 1834년의 악명 높은 “구빈법救貧法”이 고안되었다. 영국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가슴 속에 어느 정도라도 마음이 남아있던 모든 사람이 이 법률에 격노했다.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Elizabeth Tudor) 치하에서 1601년에 창안된 원래의 구빈법은 영국 수도원을 탄압했던 귀결이었다. 수도원은 항상 그 수입의 3분의 1을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다. 하지만 귀족 지주들이 수도원 소유물의 대부분을 손에 넣자, 그들은 수입의 3분의 1을 자선을 베푸는 데에 계속 사용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을 돌봐주고, 그 존재가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인간적 생존 수단을 찾아낼 의무가 있다는 법률이 교구민敎區民에게 강요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가난에 빠지고 자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 사회에게 지원을 바랄 권리가 인정되어 왔었다. 이 자연스러운 배려가 이 법률에 사회적 성격을 주었다.

하지만 새로운 법률은 빈곤에 범죄의 낙인을 찍고, 진위가 의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불운을 나태한 탓으로 돌렸다. 이 새로운 법률은 맬서스주의 학설의 결정적 영향 하에 성립했다. 소유계급은 맬서스주의에 의한 인간 혐오의 가르침을 새로운 계시라며 환영했다. 맬서스의 인구 문제에 관한 유명한 저작은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에 대한 응답으로 여겨졌다. 맬서스는 가난한 사람이 불청객으로서 사회에 억지로 끼어 들어와 있고, 따라서 특별한 권리를 주장하거나 타인에게 동정 받을 수 없다고 제멋대로 선언했다. 그러한 견해는 물론 산업 유력자의 이익의 씨앗이며 한없는 착취용을 지탱하는 도덕적인 기둥이 되었다.

이 새로운 법률은 교구 당국자의 손에서 가난한 사람의 생활 유지 대책을 빼앗아 국가로부터 임명된 중앙 기관 아래에 두었다. 금전이나 설비에 의한 물질적 지원 대부분이 사라지고 구빈원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악명 높고 증오 받던 기관이었으며, 서민들에게는 “구빈법의 바스티유”라고 불렸다. 운명에 떠밀려 구빈원에 감호된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상태를 포기 당했다. 구빈원은 그야말로 형무소였다. 개인적 불운 때문에 그 사람은 벌을 받고 굴욕을 당해야했다. 구빈원에서는 철통같은 규율이 만연하고, 모든 반대는 엄벌에 처해졌다. 누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정한 작업량을 가지고 있었다. 작업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 벌로 음식이 제공되지 않았다. 식사는 진짜 형무소 이상으로 조악하며 불충분하고, 처우는 잔혹하고 짐승 같았으며, 아이들은 자살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이 생이별 당하고 정해진 시간에 행정 관리의 감시 하에서만 서로 만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 공포스러운 장소에서 사는 것을 견디기 어렵게 해야만 한다는 듯이 모든 노력이 행해졌다. 극도의 빈곤 상태만이, 이 장소를 최후의 피난처라고 생각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구빈법의 진면목이었다. 기계 생산 덕분에 몇 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과거의 생활수단을 잃었다―직물산업만 해도 근대 대규모 공장 때문에 8만 명 이상의 수직공이 거지가 되었다. 이 새로운 법률은 값싼 노동력이 경영자가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그와 함께 일관되게 억지로 임금을 계속해서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비참한 조건 아래, 역사에서 선례를 보지 못한 새로운 사회계급이 탄생했다. 근대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그때까지의 소규모 직공은 주로 현지 지역의 수요에 응해 일을 하고, 비교적 만족할 수 있는 생활 조건을 향수하고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큰 충격에 의해 곤란에 처하는 일 등은 좀처럼 없었던 것이다. 직공은 도제로서 일하고, 한 사람의 직공이 되어 그 뒤에 명인이 되는 일도 많았다. 자신의 직업에 필요한 도구는 기계의 시대와는 달리, 소유하고 있는 자본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획득할 수 있었다. 그 일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었으며, 더욱이 자연의 다양성―창조적 활동을 자극하고, 사람에게 내적 만족감을 보증하는―을 제공하고 있었다.

소규모 가내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자본주의 시대의 시작에는 이미 여러 도시의 돈 많은 지배자에게 제품 대부분을 판매했다고는 하지만 현대적 의미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산업, 특히 직물산업은 그 중심지가 농·산촌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소규모 직공은 자신이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아주 작은 토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토지를 유지하는 것은 간단했다. 기계에 의한 지배 이전에는 신흥 자본주의도 수공업 단계와 아직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확대될 가능성은 당분간 한정되어 있었다. 공업제품에 대한 수요는 원칙적으로 공급보다도 컸기 때문에 노동자는 중대한 경제위기에서 보호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적 기계 산업이 그 역할을 다하기 시작하면서, 불과 몇 년 만에 모든 것이 변화했다. 근대 기계생산은 생산에 앞서 대량 수요에 의존한다. 그 결과 외국 시장의 정복에 의존하게 된다. 새로운 기술혁신 하나하나가 영속적으로 규모를 키워나가며, 생산능력을 끌어올려 산업자본을 의심 없이 자본주의의 주인으로 만들며 상업과 금융을 지배하게 했다. 여러 이론가가 자유경쟁을 불변의 법칙으로 간주하며 산업생산의 계획적 관리 따위는 논외로 쳐버렸다. 그 때문에 이르든 늦든 여러 원인에 의해 산업제품의 공급이 수요를 능가하는 때가 필연적으로 찾아왔다. 이때는 갑작스러운 생산 정지, 이른바 공황을 초래했다. 이것은 여러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있어 파멸적이었다. 공황 때문에 노동자는 무엇 하나 할 수 없게 되고, 결과적으로 생활수단이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의 진정한 성질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는, 이른바 “과잉생산”이라는 현상이다―공장과 창고가 상품으로 가득 차 있는 한편, 실제 생산자는 치열한 비참 가운데서 괴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인간 따위는 무無이며, 생명이 없는 소유물이 전부라고 하는 공포의 시스템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발전 중이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이 시스템의 경제 변동을 정면으로 뒤집어썼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구성원은 자신의 손에 의한 노동 이외에 아무것도 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공장과 일반 직공 사이에 존재했던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연결 관계는 근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가 사회적 관계를 한 번도 가졌던 적이 없는 계급의 착취 대상에 불과했다. 공장소유자에게 있어 그 사람은 이미 인간 따위가 아닌, 그저 “수단”으로서의 존재일 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사회적 입장을 상실한 뒤에 당시의 산업대혁명에 의해 여러 도시에서 대량으로 청소된 쓰레기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뿌리를 잘리고, 사람은 같은 운명에 처한 막대한 수의 박살난 존재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근대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강철의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육체와 혈액을 지닌 기계, 기계 인간이었다. 타인을 위해 부를 창출하면서, 이 부를 실제로 생산했던 사람들은 비참한 가운데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업의 대중심지에서 불운한 동료들과 밀집해서 사는 일은 그 사람의 물질적 존재에 특수한 특징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고와 감정에, 원래는 몰랐던 새로운 개념을 차례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굉음을 내는 기계와 악취를 뿜어내는 굴뚝이라는 새 세계에 이식되어, 사람은 자기 자신을 거대한 메커니즘의 단순한 바퀴나 톱니바퀴의 이라고 느꼈다. 그 메커니즘에 대해 개인으로서의 자신은 무력하다고 느꼈다. 이 상태로부터 언젠가는 벗어나기를 바라는 등의 용기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노동을 파는 것 이외에 살아갈 방법을 가지지 못한 전형적 무산자에게 있어 모든 도망칠 길은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만이 아니다. 그 자손도 같은 비운을 걸어야하는 운명에 있었다. 자신을 염치없는 이권의 비정한 도구로 취급하는 막대한 권력에 비해, 모든 사회적 연결을 잃은 그 사람은 개인적으로 그저 무無에 불과했다. 다시금 무언가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운명을 얼마간이라도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자신과 같은 유의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자신을 덮친 운명을 정지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락으로 가라앉고 싶지 않다면 이르든 늦든 그런 생각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될 터였다. 이것이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동맹을, 전체로서의 근대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무산대중의 이 운동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선동가”라고, 속 좁은 반동가와 탐욕스러운 경영자는 당시 그렇게 주장하려 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이 운동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과 함께 운동의 대변인에게 생명을 부여한 것은 사회적 제반 조건이었다. 자신들의 생활을 지키고, 억지로라도 보다 인간적인 생활환경을 손에 넣기 위해 노동자가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그것이 노동자의 결합이었다. 조직적 임금노동자의 여러 단체에 의한 최초의 제의는 18세기 전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가운데서도 가장 심한 폐해를 폐기하는 것, 그리고 기존 생활 제반 조건의 몇 가지를 개선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1350년 이래, 영국에는 견습 제도·임금·노동시간을 국가가 규정한다는 데에 기초한 법률이 존재하고 있었다. 옛날 공예회사의 동맹은 상품생산과 상품처리권에 관련한 여러 문제에만 관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초기 자본주의와 “제조업”이 확장되며 임금이 차례로 하락하기 시작함과 함께 최초의 노동조합 조직이 이 경향과 싸우기 위해, 임노동자로 구성된 새로운 계급 안에서 발달했다. 하지만 조직노동자의 이러한 노력은 즉석에서 경영자의 일치단결한 저항에 마주쳤다. 경영자들은 옛 법률을 유지하고 노동자의 “비합법” 조직을 탄압하고자 탄원서를 가지고 정부에 쇄도했다. 그리고 의회는 곧바로 이 요구에 응했다. 1799~1800년의 이른바 “단결금지법”을 가결하고,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모든 단결을 금지하고,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엄한 벌칙을 가했던 것이다.

노동자는 산업자본에 의한 착취에 무조건으로 넘겨졌다. 그들은 양자택일에 직면했다. 법률에 복종해서 그것이 불러올 모든 결과를 저항 없이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노예상태에 자신들을 몰아넣은 법률을 부술 지였다. 용감한 노동자들에게 있어 그 선택에 직면했을 때 어느 쪽을 결정할 것인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이 이상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을 조롱거리로 삼는 법률을 거부하고, 모든 수단을 써서 그 조항의 뒷면을 적으려 했다. 당초 노동조합 조직은 순수하게 현지 지역형 성격을 지니고 특정 산업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그 법적 존재권이 박탈당하자 이른바 공제조합이나 그와 비슷한 무해한 단체로서 전국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 유일의 목적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실제 투쟁조직에서 주목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식조직의 내적 핵核은 노동자 중에서도 전투적인 분자로 구성된 비밀의 공모 동포단이었다. 그것은 결연한 노동자의 그룹이며, 규모는 클 때도 작을 때도 있었다. 그들은 마음 깊이에서 비밀을 엄수하고 상호부조를 맹세함으로 이어져 있었다. 영국 북부의 산업지구, 특히 스코틀랜드에 있어서 많은 수의 이런 비밀조직이 존재해 고용주와 계속해 싸우고, 노동자의 저항을 고무하고 있었다. 이런 투쟁의 대부분은 극도로 폭력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문제의 성질 때문이다. 노동자의 비참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경제적 제반 조건은 파멸적으로 발전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활 표준을 개선하고자 하는 가장 온건한 시도마저도 가차 없이 기소되었다. 법조문을 한 줄, 한 글자 위반한 것만으로 무서운 벌이 주어졌다. 1824년에 노동조합 조직이 법적으로 인정된 다음에도 오랫동안 기소가 끊이지 않았다. 양심을 지니지 않은 판사는 고용주의 계급 이익을 음으로 양으로 옹호하고, 반항적인 노동자들에게 수백 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제반 조건을 쟁취할 때까지, 매우 긴 시간이 경과했다.

1812년, 노동자 비밀조직은 글래스고Glasgow에서 직물공의 총파업을 일으켰다. 그 후 수년 간 북부 잉글랜드 전체가 파업과 노동자의 소란으로 몇 번씩이나 동요했다. 이는 최종적으로 1818년 랭커스터셔Lancastershire에서의 방직공과 직물공의 대 파업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이 대 파업에서 노동자는 임금 인상이라고 하는 통상의 요구에 더해 공장법의 개혁과 여성·아동 노동에 대한 인도적 규정도 요구했다. 같은 해에는 스코틀랜드의 탄광노동자에 의한 대 파업도 행해졌다. 이 파업은 탄광노동자의 비밀조직이 계획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의 섬유산업 대부분은 노동 정지 때문에 주기적으로 활동 불능이 되었다. 파업은 방화·기물 파손·치안 문란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 때문에 정부는 몇 번이나 산업지구에 민병대를 투입해야만 했다.

그 뒤 모든 나라에서 그렇게 된 것처럼, 당시의 영국에서도 노동자의 분노는 기계 도입에 향했다. 기계의 사회적 중요성에 대해 노동자는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기계는 자신들 빈곤의 직접원인이었다. 1769년에는 기계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그 후, 증기 동력의 응용이 기계 산업, 특히 직물산업에 있어서 생산을 급속하게 전진시키기 시작하자 자신의 손을 사용해 일하고 있던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생존수단을 박탈당하고, 최악의 비참에 빠져 기계 파괴는 일상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른바 러다이트주의의 시대였다. 1811년, 노팅엄에서는 200대 이상의 방직기가 파괴되었다. 아놀드Arnold에서는 양말을 짜는 기계가 도입되어 수백 명의 양말 직공이 거리로 내몰렸지만, 노동자는 공장을 습격하여 1대 당 40파운드의 투자에 상당했던 60대의 새로운 기계를 파괴했다. 같은 종류의 행동이 모든 곳에서 반복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람들의 궁핍이 꾸준히 증가하고 경영자와 정부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며 동정도 하지 않는데 법의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러드(러다이트) 왕”[2]은 모든 곳의 산업 영역에 충실하게 등장했다. 가장 잔혹한 법률조차도 그 파괴활동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멈출 용기가 있다면 멈춰봐라! 할 수 있으면 해봐!” 이것이 노동자 비밀조직의 표어였다. 기계의 파괴가 끝난 것은 노동자 사이에 전반적으로 새로운 이해 방법이 생긴 때였다. 노동자는 이러한 수단으로는 기술의 진보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1812년, 의회는 기계의 파괴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이 경의 유명한 정부고발장을 발표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 잔학한 법률을 실행한다면, 의회는 규정하라, 배심원은 항상 12인이어야만 한다고.” 그는 야유를 담아 이처럼 요구한 것이었다.[3]

당국자들은 지하운동 지도자의 목에 4만 파운드의 현상금을 걸었다. 1813년 1월, 18명의 노동자가 러다이트주의의 죄로 유죄판결을 언도받아 요크 주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호주의 유형지로 추방된 조직노동자의 수는 무서운 비율로 증가했다. 하지만 운동 그 자체는 더욱 성장하고, 특히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에 커다란 재계 위기business crisis가 생겼을 때 성장했다. 해고된 병사와 수병이 실업자의 군세에 가담했던 것이다. 이 상황을 한층 절박하게 만든 것이 곡물 수확량의 감소와 1815년의 악명 높은 곡물법이었다. 빵의 가격이 인공적으로 상향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 노동운동의 가장 첫 단계는 대부분이 폭력적이었음에도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적 단계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경제적·사회적 경과를 불러일으키는 실제적 원인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해는 사회주의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폭력적 방법은 단순히 노동자 자신에게 주어진 잔인한 폭력의 귀결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젊은 운동이 사용했던 방법은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에 향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가장 유해한 돌출물을 폐기하는 것,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적절한 인간적인 생활수준을 확립하는 것에 향해 있었을 뿐이었다.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일당”이 최초의 노동조합의 슬로건이었다. 온건하고 전적으로 정당한 노동자의 요구에 대해 고용자가 극도의 야만을 가지고 저항했을 때, 노동자는 기존 조건 아래서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의 커다란 역사적 의의는 그 현실의 사회 목표로서가 아니라 우선 첫째로 그것이 그저 존재했다고 하는 데에 있다. 경제적 제반 조건의 압력 때문에 대산업 중심지로 몰리고 전통을 뿌리 뽑힌 대중에게 이 운동은 다시 발판을 제공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대중의 사회적 감각을 부활시켰던 것이다. 착취자에 대한 계급투쟁은 노동자의 연대를 눈뜨게 하고, 노동자의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무제한 착취경제의 피해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자신들의 생활을 지키고, 침해받은 인간적 존엄을 지킬 가능성을 가진 방향을 노동자에게 제시했다. 노동자의 자신감을 강하게 하고, 다시 미래에 확신을 가지게 했다. 자기 단련과 조직적 저항 가운데서 노동자를 훈련하고, 당시의 생활에 있어 사회적 요인으로써의 자신의 강함·자신의 중요성의 의식을 노동자로부터 발달시켰다. 이 운동의 위대한 도덕적 사업이 이것이었다. 상황의 필요성이 이 운동을 낳았던 것이다. 사회 제반 문제에 대해 무감각하며 동료의 곤경에 동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시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뿐인 것이다.

그리고 1824년,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하는 법률이 폐지되고, 정부와 통찰을 지녔던 중산계급 사람들이 드디어 가장 엄격한 박해조차도 이 운동을 파괴할 수 없다고 확신했을 때, 노동조합 조직은 예상외의 속도로 전국에 퍼졌다. 초기에는 국소적이었던 그룹이 결합해 더욱 큰 조합이 되고, 그 결과 운동에 진정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정부는 반동적으로 전환했지만, 이제 와서는 이 발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노동조합 신봉자의 희생자 수를 늘릴 뿐, 운동 그 자체를 저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랜 프랑스 전쟁 다음에 영국에서 새로운 정치적 급진주의가 증가했다. 이는 당연한 듯이 영국 노동계급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버뎃(Francis Burdett)·헨리 헌트(Henry "Orator" Hunt)·메이저 카트라이트(Major Cartwright)·특히 윌리엄 코벳(William Cobbett)과 그 신문 「폴리티컬 레지스터Political Register」지는 가격을 2펜스로 낮추자 발행부수 6만을 달성하고 이 새로운 개혁운동의 지적 선두를 담당했다. 이 신문은 곡물법·1799~1800년의 단결금지법·특히 부패한 선거 시스템을 주로 공격하였다. 이 선거 시스템은 중산계급의 대부분에게조차도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온 나라에 걸쳐, 특히 북부의 산업지역에서 대규모 대중회의가 민중을 움직였다. 하지만 카슬레이(Castlereagh) 정권 아래서의 반동정부는 어떠한 개혁에도 반대하고 처음부터 개혁 진행과정을 무력으로 짓눌러 버리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1819년 8월, 정부에 대해 집단 탄원서를 작성하고자 6만 명의 사람들이 맨체스터 주 피터스필드에 몰려들었을 때, 이 집회는 민병대에 의해 해산되고 40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피털루Peterloo”의 학살을 선동했던 사람들에 대해 온 나라에서 격한 감정의 폭발이 일어났지만, 그에 대해 정부는 악명 높은 6개의 언론통제법으로 응했다. 이 법률로 집회의 권리·보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일시 정지하고, 개혁주의자는 가장 가혹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아서 시슬우드(Arthur Thistlewood)와 그 동료들이 영국 내각의 의원을 암살하려고 계획했다는 이른바 “카토 가街 음모Cato Street Conspiracy”가 개혁운동에 대해 극도로 엄하게 대처하는 좋은 기회를 정부에게 제공했다. 1820년 5월 1일, 시슬우드와 네 명의 동지는 교수대에서 자신들의 시도에 대해 대가를 치렀다. “인신보호”법은 2년간 유보되었고, 영국은 시민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반동정권에 넘겨지고 말았다.

운동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그리고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고, 영국 개혁운동도 부활했다. 하지만 이때의 운동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의회의 개혁을 바라는 투쟁에 다시 불이 붙었던 것이다. 1832년에 제출되었던 선거법 개정안은 노동자의 정열적인 지지 덕분에 거머쥐었던 승리였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요구 대부분이 이 개정안에서 충족되었다고 여기고 보통선거권을 목표로 한 한층 더 큰 개혁의 모든 시도에 반대하여 노동자를 빈손인 채로 퇴장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의회는 수많은 반동적 법률을 제정하고, 그 법률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권은 다시 심각하게 위협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법률 가운데서도 빛나는 예가, 이미 언급했던 1834년의 악명 높은 구빈법이었다. 노동자는 자신들이 팔아넘겨지고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감정이 중산계급과의 완전한 결별을 이끌었던 것이었다.

이 시점부터 새로운 개혁운동은 발전중인 인민헌장운동(차티즘) 가운데 중점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운동을 프티 부르주아 계급의 상당 부분이 지지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 분자가 도처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인민헌장운동은, 물론 그 기치에 유명한 여섯 항목의 헌장을 명기하였다. 이 헌장은 급진적 의회 개혁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것은 동시에 노동자의 사회적 요구 전체를 도용한 것이며, 모든 직접 공격을 사용해 헌장을 현실로 변환하려 하였다. 따라서 인민헌장운동에서 가장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의 한 사람, J. R. 스티븐스(Joseph Rayner Stephens)는 맨체스터에서의 대 집회 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이었다. 인민헌장운동은 보통선거권의 도입에 의해 해결되는 정치적 문제 따위가 아니다. 헌장이 노동자에게 있어 좋은 가정·풍요로운 식량·인간적 연대·단시간 노동을 의미하고 있는 이상, “생계의 문제”로서 간주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에서 유명한 열 시간 노동 법안Ten-Hour bill을 요구한 프로파간다가 이 운동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인민헌장운동과 함께 영국은 혁명적 기간에 돌입했다.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 쌍방은 내전이 가까웠다고 확신했다. 온 나라에서 개최되었던 막대한 규모의 집회가 이 운동의 급속한 확산을 증명하고, 수많은 파업과 도시에 있어 끊이지 않는 동란이 이 운동에 무서운 측면을 부여했다. 공포에 떤 고용주들은 산업 중심지에 있어 “사람들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무장 동맹을 수많게 조직했다. 이것이 동시에 노동자가 무장하는 시작점이 되었던 것이다. 1839년 3월 런던에서 행해지고, 그 뒤 버밍엄으로 이동한 인민헌장회의는 가장 솜씨가 뛰어난 연설가 중에서 15명을 나라의 여러 곳으로 파송하고, 사람들에게 운동의 목적을 알려 인민헌장의 청원서에 서명을 모으는 것을 결의했다. 그 집회에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출석하여, 인민대중 가운데서 이 운동이 어떻게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나타냈다.

인민헌장운동에는 수많은 지적이고 헌신적인 대변인이 있었다[유명한 사람만을 들자면, 윌리엄 러벨(William Lovell), 퍼거스 오코너(Feargus O’Connor), 브론테어 오브라이언(James Bronterre O'Brien), J. R. 스티븐스, 헨리 헤더링턴(Henry Hetherington),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헨리 빈센트(Henry Vincent), 존 테일러(John Taylor), A. H. 보몬트(A.H. Beaumont),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가 있었다]. 더욱이, 상당한 발행부수를 지닌 언론을 훌륭하게 다루고 있었다. 예컨대 「빈자의 수호자The Poor Mans Guardian」와 「북극성Northern Star」과 같은 신문이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인민헌장운동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정한 목적을 지닌 운동이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불만의 배수로였다. 하지만 이 운동은 동요를, 특히 노동계급의 동요를 확실히 이끌어내고 노동계급은 원대한 사회적 목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회주의도 인민헌장운동의 한가운데에 정력적으로 전진했다. 윌리엄 톰슨이나 존 그레이의 사상, 특히 로버트 오언의 사상이 잉글랜드 노동자 가운데서 더욱 크게 퍼지기 시작했다.

유럽 대륙에서 최초로 산업 자본주의가 확립된 프랑스·벨기에·라인 지방에 있어서도 같은 현상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필연적으로 노동운동의 첫 단계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처음에는 같은 원시적인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서히, 하지만 보다 좋은 이해로 계속 변환해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운동에 침투, 숭고한 제반 개념을 부여하고 새로운 사회전망을 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동맹은 양쪽 모두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하지만 여러 사회주의학파 각각에 어떠한 정치사상이 영향을 미쳤었는지가 개별 운동의 특징과 그 미래의 전망을 결정했던 것이다.

사회주의학파의 가운데는 이제 막 태어난 노동운동에 대해 전혀 무지하거나 계속해서 완전히 냉담하거나 한 이들도 있었지만, 다른 학파는 사회주의의 실현에 있어 필요한 준비단계로 보고 이 운동의 진정한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은 열심히 일하는 대중에 대해 노동자의 당장의 요구와 사회주의의 목적이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노동자의 일상투쟁에서 활동적 역할을 다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역할에 틀림없다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투쟁은 시대의 필요성에서 생겨난 것이며, 임금노예의 완전 철폐로 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해방의 중요한 의의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당장의 생활의 필요성에서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앞으로 생겨날 모든 것의 맹아를 운동 내부에 익어가게 하고, 이것들이 생활의 새로운 목표를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은 모두 생생한 존재의 제반 현실로부터 생겨난다. 신세계는 추상적 사상이라는 진공상태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는다. 매일의 빵을 요구한 싸움, 고통스럽고 그칠 줄 모르는 싸움 가운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고, 그 시간을 신경 써 가면서 생활필수품을 확보해야만 한다. 기존에 대한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새로움은 자신을 형성하고 열매를 맺는다. 이 시간의 성과the achievements of the hour를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동료에 있어 보다 좋은 미래를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용주와 그 협력자에 대한 일상투쟁에서, 노동자는 차례로 투쟁의 깊은 의미를 배워간다. 당초, 노동자는 기존 사회질서 내부에서 생산자의 입장을 개선한다는 즉각적 목적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점차 악의 근원―독점경제와 그에 정치적·사회적으로 부수하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일상투쟁은 가장 좋은 이론적 의논보다도 더욱 뛰어난 교육적 소재인 것이다. 매일의 빵을 요구한 이 영속적 투쟁 이상으로 노동자의 정신과 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활필수품을 요구한 끊임없는 투쟁 이상으로 노동자가 사회주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봉건제 지배의 시대, 농노는 빈번하게 봉기했다. 처음에는 봉건영주로부터 어떤 종류의 양보, 즉 황량한 생활기준의 개선을 탈취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이 봉기가 대혁명에의 길을 준비하고, 이 혁명이 봉건적 특권의 철폐를 실제로 초래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사회 내부에 있는 막대한 수의 노동은 미래의 위대한 사회혁명의 도입부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혁명으로 사회주의가 생생한 현실이 될 것이다. 농민의 끊임없는 반란―텐(Hippolyte Adolphe Taine)에 의하면 1781년부터 바스티유 감옥의 동란까지, 이러한 반란이 프랑스의 거의 전국에서 약 500회 일어났다고 한다―이 없다면 농노와 봉건제의 모든 구조는 악덕이라는 생각이 대중의 머리에 떠오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사회주의가 근대 노동계급의 경제적·사회적 투쟁을 지지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 물질적 기원이나 실제의 결과만을 기반으로 투쟁을 평가하고, 가장 깊은 심리적인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분명하게 틀린 것이다. 사회주의의 여러 교의敎義는 사상가 각각의 정신 가운데 태어났지만, 노동과 자본의 일상투쟁에 의해 처음으로, 살과 피를 손에 넣고, 고유한 특징을 획득했다. 이 특징이 사회주의의 여러 교의를 대중운동으로 만들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문화적 이상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3. 조합주의의 선구자

로버트 오언과 영국 노동운동 ;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 ;

윌리엄 벤보우(William Benbow)와 총파업 사상 ;

반동의 시대 ;

프랑스에서의 노동자 조직의 진화 ;

국제노동자협회 ;

노동조합주의의 새로운 개념 ;

노동자평의회(the labour councils)의 사상 ;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한 의회정치의 도입과 인터내셔널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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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운동에 침투하자, 그 초기에 현대의 혁명적 조합주의와 틀림없이 관련된 여러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경향이 최초로 발전한 것은 자본주의 거대 산업의 모국母國 잉글랜드이며, 일정 기간, 일부의 진보적인 영국 노동계급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단결금지법의 철폐 후, 노동자의 활동은 자신들의 노동조합 조직에 폭넓게 특징을 부여하는 데에 주로 향했다. 현실 경험으로부터, 순수하게 지역사회형의 조직은 일상의 양식을 요구한 투쟁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초의 이러한 활동은 굉장히 깊은 사회구상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정치 개혁운동에 영향을 받은 경우, 노동자는 자신의 경제상황을 즉시 개선하는 것 외에 무엇도 목표로서 시야에 넣지 않았다. 영국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이 명확하게 보이게 된 것은 1830년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그 출현은 주로 로버트 오언과 제자들이 행한 활발한 프로파간다 때문이었다고 일컬어진다.

이른바 개혁 국회가 소집되기 수년 전에, 노동계급 전국조합the National Union of the Working Classes이 설립되었다. 그 가장 중요한 구성분자는 방적 산업 노동자였다. 이 조합의 요구는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모든 노동자에게 그 노동에 충분히 알맞은 대가를.

2. 현재상태에서 자동으로 발생해야만 하는 수단을 사용해 고용자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라.

3. 의회 개혁 및 남녀 모두에 대한 보통선거권을.

4. 경제적 제반 문제에 관해 노동자에게 교육을.

이러한 요구 가운데, 당시 나라 전체를 매료했던 정치적 개혁운동의 강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로버트 오언의 교의에서 빌려온 표현이 있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1832년, 개혁법이 제출되었다. 이 법안은 많은 영국 노동계급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정치적 환상을 파괴했다. 이 법안이 법률이 되었을 때, 중산계급은 귀족의 지주에 대해 대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했지만, 노동자는 다시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불 속의 밤을 줍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결과, 환멸이 확산되고,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계급과 동맹을 맺어봤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착실하게 확산되어 갔다. 그 이전에 계급투쟁이 소유계급과 비 소유계급 간의 상반된 경제적 이익에서 자발적으로 출현한 것이었다면, 이것은 이제 노동자들의 마음에서 확실한 확신으로 구체화되어 그들의 활동에 결정적인 방침을 내주었다. 노동계급의 사고가 이렇게 전환된 것은 이 시기에 출판된 노동자 신문의 많은 발언에서 확실히 나타나 있다. 노동자는 자신들의 진정한 강함은 생산자로서 자신들의 특징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개혁운동에 참가하는 것은 대실패였다고 날카롭게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사회에 있어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중요하다는 이해를 새롭게 획득하고,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로버트 오언의 선전활동이 노동자의 이 확신을 굉장히 강하게 했다. 그는 당시, 조직 노동자에게 계속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언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자신의 방안의 확고한 기반은, 노동조합 조직의 일관된 성장에 있다고 인식하고 이것이 높은 희망과 함께 그를 채우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자본과 노동의 기존 투쟁은 임금을 둘러싼 통상의 싸움으로 진정될 수 없다고 말이다. 다만 실제로는 이러한 통상의 투쟁이 노동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중요성을 결코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역으로, 그는 입법기관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으며 자신들의 일은 자신들의 손으로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노동자에게 확신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사상은 영국 노동계급의 진보적 부분에 의욕적 청취자를 얻고, 처음에는 건축조합 가운데서 강하게 나타났다. 건축 노동자조합에는 수많은 해당 지역의 노동조합이 결집해 있었고, 이는 당시 노동자조직 가운데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능동적인 조직 중 하나이며, 경영자에게는 고민의 씨앗이었다. 1831년, 오언은 맨체스터의 조합대표자 회의에서 자신의 사회재구축 계획을 제시했다. 이 계획은 일종의 길드 사회주의를 의미하며, 노동조합 관리 하에 생산자 협동조합의 확립을 호소했다. 이 계획이 채택되어, 그 뒤 바로 건축 노동자조합은 오랜 기간에 걸친 중대하고 격렬한 투쟁에 참가했지만, 그 결과 불행하게도 이 조직의 존재가 중대하게 위협받고, 오언이 제시한 방향성으로 향하는 시도는 모두 좌절되었다.

하지만 오언은 이 일로 낙담하지 않았다.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활동을 계속했다. 1833년,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조직의 대회가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서 오언은 노동자 스스로에 의한 사회 재구축 계획을 철저하게 설명했다. 대표단의 보고로부터 이러한 생각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창조적 정신이 영국 노동계급의 진보적 집단을 얼마나 활기차게 했는지를 명확히 볼 수 있다. 「빈자의 수호자The Poor Mans Guardian」는 다음과 같이 굉장히 적절하게 대회 보고를 요약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대표단 대회에서 목표로 했던 것은 그때까지의 모든 단결이 지니고 있던 미미한 목적과는 전혀 다르다. 대표단의 보고는 사회 전체의 변혁―기존 세계질서의 완전전복을 의미하는 변혁―을 노동계급이 의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노동자는 사회의 저변에서가 아니라 정점에 있고자 한다―오히려, 저변도 정점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회의 직접적인 결과가 1834년 초의 영국·아일랜드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 Union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GNC)의 설립이었다. 소란스러운 시대였다. 나라 전체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파업과 직장폐쇄로 흔들리고, 노동조합에 조직된 노동자의 수는 급격하게 80만 명까지 증가했다.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GNC)의 설립은 분산되어 있던 조직을 하나의 대연합에 집결시키고자 하는 시도에서 생겨나, 이것이 노동자의 행동에 효과적인 힘을 크게 부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방향에서 행해졌던 모든 노력과 구별했던 것은 그 자세였다. 순수한 노동조합주의도, 정치적 개량주의자와 노동자의 협조 노선도 아니었다.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은 필요한 조건 개선에 대해 가능한 한 모든 원조를 하기 위한 투쟁조직으로서 착안되었으나,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 전체를 전복하고, 만인의 이익이 아닌 만인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을 계획한 모든 생산자의 협력적 노동으로 변환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은 이러한 열망이 표출되고 현실로 변환시키기 위한 틀이 될 터였다.

조직가들은 이러한 연합에 모든 공업·농업에 관계된 노동자를 결집시키고, 그 전문 생산 부문에 따라 노동자를 그룹으로 나누려고 했다. 개별 산업은 각각 하나의 전문 부문이 되고, 각각의 생산 활동에 관한 특수 조건과 관련 경영 기능에 관계된다.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서라도, 여러 부문에 있는 노동자는 협동 공장을 설립하려 하고, 경영비도 포함해 소비자에게 생산물을 원가에 판매하고자 했다. 보편적 국제기관은 여러 산업을 유기적으로 하나로 묶어 상호 이익을 조절하는 역할을 달성했다. 여러 협동 공장 산물의 교환은 이른바 노동시장을 통해, 그리고 특별한 교환 통화, 즉 노동전표labour tickets의 사용을 통해 달성되리라고 간주했다. 이러한 제반 기관이 안정되어 확산되어 감으로 자본주의적 경쟁을 현장에서 몰아내고, 그 결과로서 사회의 전면적 재편성을 달성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협동조합형 농업사업과 공업사업은 자본주의 세계에 있어 노동자의 나날의 투쟁을 보다 쉽게 돕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이 그 요구의 골자로 한 일곱 가지 중 세 가지에 나타나 있다.

“대지는 생활필수품에 있어 제일의 원천이며,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생산 계급은 많든 적든 화폐 자본가에게 계속 종속되게 된다. 그 결과로써 통상通商 무역의 변동에 계속해 종속되게 되는 이상 본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모든 파업에 있어 경험이 풍부한 농업 지도자의 지도 아래 사람이 자기 생존의―모든 것은 아닐지라도―대부분을 부양하게끔 사용할 수 있도록, 자금이 허용하는 한 대지를 얼마간이라도 임대 계약으로 반드시 확보하도록 조합은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조치는 모든 직업의 노동의 가격을 끌어내리는 효과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조업에 있어 현재 과잉된 공급을 없애는 것으로 노동의 가격을 증가시키는 경향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파업에 있어서 여러 위원회는 진지하게 다음을 추천한다. 실행 가능한 곳에서는 그 노동조합원 동지 가운데서 수요가 있다면 그들은 상품의 제조·산업에 종사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개별 지부는 작업실이나 작업장을 제공해야만 한다. 작업장에서는 그 지부의 이익이 되는 상품을 제조할 수도 있겠으나 필요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적절한 배치되어야만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실행 가능한 곳에서는 개별 지구나 지부는 일반적인 내부에서 사용하는 식량과 상품을 저장할 곳을 한 개 이상 확립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는 도매가격보다 조금 높은 가격으로 가장 좋은 상품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의 발기인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동맹으로서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을 착안했다. 협동조합 사업에 실제로 참가하는 것으로 노동자는 산업의 운영에 필요한 이해를 획득하게 되며, 그것으로 적어도 생산자 자신이 경제생활 전체를 운영하고, 모든 착취를 끝낼 때까지 노동자는 자신의 관리 하에 있는 사회적 생산의 범위를 영속적으로 넓혀가기에 최적인 것이다. 이런 생각은 노동자 모임이나 특히 노동자 신문에서 놀랄 만큼 명확히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선구자The Pioneer」라는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이 운영했던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의 기관지를 살펴보면, 철저하게 근대적인 울림을 지닌 주장을 몇 번이나 맞닥뜨린다. 이것이 명확히 표현되어 있는 것은 하원下院의 민주적 재건을 기치로 하고 있던 정치개혁자와의 논의에 있어서이다.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은 정치개혁자에 대해, 사회주의적 의미에서의 사회 경제 변혁은 하원을 쓸모없게 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이런 종류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든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노동자 위원회와 산업연합이 하원의 역할을 달성하고, 거기서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생산과 소비에 관한 제반 문제에 대해서만 관여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기업가가 행하고 있는 기능은 이런 조직에 빼앗긴다. 모든 사회적 부의 공유와 함께 정치적 제반 제도는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국부國富는 더 이상 생산된 상품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상품에서 얻는 개인적 이익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앞으로 하원은 그저 통상원通商院이 될 것이다.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은 노동자로부터의 경이적인 반응에 맞닥뜨렸다. 수개월 내에 그 구성원은 50만 명을 훨씬 뛰어넘어, 당초 그 실제의 목적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던 것은 노동자 가운데서도 가장 지적으로 활발한 사람들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적어도 이러한 규모의 조직이 지역 그룹보다도 자신들의 요구에 한참 큰 힘을 빌려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 시간 노동을 요구한 선동이 영국 노동계급의 모든 부분에서 단호하게 파악되어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은 모든 에너지를 사용해 이 요구를 집행하기로 했다. 오언 자신, 그리고 그 친한 친구인 도허티(John Doherty)·필든(John Fielden)·그랜트(Block Grant)는 이 운동에서 탁월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의 투사들은 법제화에 전혀 희망을 갖고 있지 않고, 열 시간 노동 쟁취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모든 노동자 단체의 단결된 경제적 행동뿐이라는 것을 노동자에게 납득시키고자 했다. “공장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합을 통해 자신들 스스로 단시간 노동법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그들의 슬로건이었다.

영국의 조직 노동자는 모두 총파업에 공감했다. 1832년 초, 이 새로운 운동의 가장 활동적인 투사 중 한 사람 윌리엄 벤보우는 『그랜드 내셔널 홀리데이와 생산 계급의 회의』라는 팸플릿을 출판했다. 이것은 막대한 부수가 발행되어, 총파업의 사상과 노동계급에게 있어서의 총파업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온전히 논해졌다. 벤보우는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신의 노동력을 강제적으로 파는 것이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원인이라고 한다면, 조직적으로 노동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해방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전쟁 수단은 물리적인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최강의 군대보다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 조직적 불공정 시스템의 실추를 초래하기 위해 노동자는 이 강력한 무기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지성을 가지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벤보우는 수많은 기획을 제출했다. 그 중에는 여러 장소에 현지 위원회를 확립함으로써 파업의 폭발이 자연스러운 힘으로 충만하게 하고, 전국에서 총파업을 행할 준비를 한다와 같은 것이 있었다. 당시 그의 생각에 대해 노동자는 굉장히 성실한 반응을 드러냈다.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의 급속한 성장, 그리고 그 이상으로 거기에서 생겨난 정신 때문에 고용주는 이 새로운 단결에 대한 은밀한 불안과 맹목적 증오로 가득 찼다. 이 운동이 더욱 퍼져 지역 그룹을 만들어내고 통일할 기회를 손에 넣기 전, 바로 그 발생 시에 숨통을 끊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들은 느꼈다. 모든 부르주아 신문은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의 “범죄적 취지”를 비난하고, 나라를 대참사로 이끌고 있다며 입을 모았다. 의회에는 모든 산업의 공장주들의 “비합법 단결”에 반대하는 법률을 요구하는 청원이 쇄도했다. 특히 노동쟁의에서 여러 부문의 노동자가 협력하는 것에 반대했다. 많은 고용주는 그 종업원 앞에 이른바 “서류”를 놓고 조합을 탈퇴하든지 직장폐쇄를 당해 길거리로 쫓겨나든지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다.

의회는 확실히 옛날처럼 “단결금지법”을 다시 제정하지는 않았지만 정부는 기존 법률의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엄하게 노동자의 “난동”을 단속하고자 재판관을 장려했다. 그리고 막대한 규모로 실행했다. “단결금지법” 취소 이전의 지하 활동시대에서 많은 조직이 선서 등의 관례적 의식을 계속 유지해 왔는데, 많은 경우에 이것이 법률 조항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구실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수백 명의 노동자가 아주 사소한 위법행위로 엄벌에 처해졌다. 당시 가장 두려워할 만한 판결 중 하나가 도체스터Dorchester에 있는 6명의 농업 노동자에게 선고되어 매우 격한 분개를 불러 일으켰다.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의 주도로 도체스터 부근의 작은 마을 톨퍼들Tolpuddle에 있는 농업 노동자가 조합을 만들어 일주일 동안 7실링에서 8실링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그 직후, 6명의 농업 노동자가 체포되고 7년간 호주 유형지행이라는 무서운 형벌을 언도받았다. 그들이 범한 유일한 죄는 조합에 가입했다는 것이었다.

즉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은 실로 시작부터 오랜 기간에 이르는 중요한 임금 전쟁에 참여하고, 거기에 일관되게 혹독한 고소를 당해왔다. 그 때문에 대중을 교육하는 위대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어쨌든 아직 교육을 행할 시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구성원은 싹트기 시작한 인민헌장운동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의 즉각적 요구 중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총파업을 실행하자는 호소를 계속했다. 이는 1842년에 랭커셔 주·요크셔 주·스태퍼드셔 주의 모든 산업, 도자기 제조 지대,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탄광 지구를 엮은 대 운동으로 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이 운동이 지녔던 원래의 중요성은 차츰 감소했다. 오언은 정확했다. 그는 인민헌장운동이 정치 개혁에 너무나도 비중을 두고, 커다란 경제적 제반 문제에 대해 거의 이해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대륙에 있어 1848년에서 1849년의 불행한 혁명도 인민헌장운동의 몰락을 이끌어 순수한 노동조합주의가 다시 영국 노동운동의 현장을 수년에 걸쳐 지배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동맹은 노동자 일부를 자본주의 경제 질서 전복 기획에 향하게 하고, 새로운 사회발전의 길을 열어젖혔다. 지배권을 이제 막 획득한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의 대립은 이미 대혁명의 폭풍 속에서 확실히 모습을 드러냈다. 대혁명 이전에 노동자는 동업조합Compagnonnages에 가입했는데, 이는 15세기에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숙련공의 결사이며, 중세에서 전해져 온 특별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구성원은 상호지원을 서약하고 자신의 사명에 관한 사업에 대해 분주하게 일함과 동시에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파업이나 보이콧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길드의 폐지와 근대산업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단체는 차츰 중요성을 잃고,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조직으로 이행되었다.

1790년 8월 21일의 법률에 의해 기존법의 틀 가운데서 자유롭게 단결할 권리가 모든 시민에게 양도되었다. 노동자는 이 권리를 이용해 고용주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했다. 많은 지역사회 파업 운동이, 특히 건축 산업에서 발발했다. 노동자 조직이 차례로 강력해지고, 파리만 해도 조합원이 8만 명에 달함에 따라 고용주는 큰 걱정을 하게 되었다.

정부의 기념식전에서 고용주들은 노동자의 이러한 단결을 비난하고, 이 “새로운 폭정”에 대한 국가의 보호를 요구했다. 노동자의 단결은 고용주와 종업원의 자유계약권을 간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부는 이 요구에 관대하게 대응해 기존 노동 조건에 변경을 초래할 목적을 지닌 모든 단결을 금지했다. 국가 안에 국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금지는 1864년까지 계속 시행되었다. 영국에서 그러했듯이, 프랑스 노동자도 비밀 조직이라는 수단에 호소했다. 노동자의 바람을 공연히 요구할 권리를 법률이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상호이익사회mutualités라는 유해한 공제조합이 이 관계 가운데서 덮개로서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이 비밀 저항조직sociétés de resistance을 덮어 감추는 합법적 망토로서 퍼져나갔다. 이들이 엄격한 고발에 견뎌야만 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을 파괴할 수 있는 법 따위는 없었다. 루이 필리프(Louis Phillipe)의 법 아래에서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한 여러 법률은 한층 더 강화되었지만 이조차도 비밀 저항조직의 착실한 성장을 저지하는 것도, 그 지하 활동의 결과로서 몇 번이나 반복된 대 파업 운동의 발전을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중에서도 1831년 리옹에서의 직공 투쟁은 유럽 내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엄격한 필요성이 이러한 노동자를 몰고 가고, 고용주에 의한 강탈에 대한 절망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민병대가 간섭했기 때문에 명백히 반란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는 “노동하며 살 것인가, 싸우며 죽을 것인가!”하는 중대한 문구가 새겨진 깃발을 들어올렸다.

1830년대에는 이런 노동자 단체 중 많은 수가 사회주의적 사상을 숙지하게 되고, 1848년 2월 혁명 후에는 이 지식이 프랑스 노동자협회 운동의 기반을 낳았다. 이는 노동조합의 흐름을 가진 협동조합 운동이며, 건설적 활동을 행함으로 사회 재건을 위해 힘썼다. S. 잉글랜더는 이 운동의 역사에 있어 이러한 협회의 수는 약 2천정도 존재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루이 보나파르트(Louis Napoléon Bonaparte)의 쿠데타에 의해 이 희망에 가득 찼던 시작은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러했듯 돌연 끝을 맞았다.

전투적으로 건설적인 사회주의 신조를 부활시킨 것은 국제노동자협회(인터내셔널)의 창설뿐이었다. 그 후 사회주의 신조는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인터내셔널은 유럽 노동자 단체의 지적 발전에 터무니없이 강력한 영향을 끼쳐, 오늘날조차도 라틴 국가들에서는 그 매력적인 흡인력을 잃지는 않았다. 인터내셔널은 1864년에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가 협력하며 출현했다. 이것은 국제동맹 가운데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최초의 위대한 시도였다. 이것이 노동계급의 사회적·경제적 해방의 길을 열 터였다. 이것은 부르주아 급진주의 정치조직의 모든 형태와 처음부터 달랐다. 원재료와 생산도구의 소유자에게 노동자가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사회적 비참·지적 열화劣化·정치적 억압으로 드러나는 예속의 원천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 헌장 안에서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이야말로 모든 정치 운동이 종속해야만 하는 대 목표라고 선언된 것이다.

그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 목적을 위해 유럽 사회운동의 여러 정당을 단결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 동맹의 조직 구조는 연합주의의 원칙에 기초했다. 이것이 각각의 정당이 자기 자신의 신념에 따라, 또 각국 고유의 조건에 기초해 이 공통 목표를 향해 활동할 수 있도록 보증했다. 인터내셔널은 정의定義를 마친 사회 구조를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운동의 표현이며 그 이론적 제반 원칙은 일상생활의 실제 투쟁에 있어 천천히 성숙하고, 그 힘찬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차츰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이다. 맨 처음 필요했던 것은 여러 나라의 노동자를 서로 가깝게 하고, 그 경제적·사회적 예속은 어떤 장소에서도 같은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에 노동자의 연대는 국가의 이익이 된다는 것과 연결하는 것이 아닌, 노동계급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의 연대 표명은 국가라는 인공적 경계선을 넘어서 전해져야만 한다는 점을 이해받는 일이었다.

산업 전쟁의 시대에 외국의 파업 분쇄 수입을 저지하고, 국제적 징수를 통해 전 세계 전투적 노동자에게 물적 지원과 정신적 지원을 공급하고자 한 인터내셔널 지부의 실천적 활동은 가장 훌륭한 이론이 행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노동자 간에 국제적 의식을 발달시켰다. 지부는 사회철학에 대해 실천적인 교육을 노동자에게 제공했다. 사실 중대한 파업 뒤에는 반드시 인터내셔널 구성원 수가 급증하고, 국내 결합 및 동질성의 확신이 일관되게 강해져 갔다.

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위대한 교사가 되어 국제적 노동자의 세계와 함께 자본주의 세계와 대결했다. 노동자의 세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연대의 결속 가운데서 이제껏 이상으로 확실하게 결합했다. 최초 두 차례의 인터내셔널 대회는 1866년에 제네바·1867년에 로잔Lausanne에서 열렸고 비교적 온건한 분위기였다. 이들 두 차례의 대회는 천천히 명확해지고 있는 운동의 첫 시험적 시도였고, 확실한 표현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 벨기에 · 스위스 같은 나라들에서의 대 파업 운동은 인터내셔널에게 전진할 강력한 추진력을 부여하고 노동자의 정신에 혁명을 일으켰다. 1848년부터 1849년의 혁명 붕괴 후에 중대한 커다란 좌절에 고통 받고 있던 민주주의 사상이 이 시대에 강력하게 부활한 것이 이 변화에 적지 않게 공헌했다.

1868년의 브뤼셀 대회는 그 이전 두 차례의 대회와는 전혀 다른 정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 세계 노동자가 새로운 생활에 눈뜨고, 자신들의 활동 주제에 끊임없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대다수의 승인을 얻어 이 대회는 토지나 그 외 생산수단을 집산화하는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철저하게 토론하고자 여러 국가의 지부를 불러 모아, 다음 대회에서는 명확한 결의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결의와 함께 인터내셔널은 솔직하게 사회주의적 성격을 취하게 되었고, 다행히도 라틴 국가들의 노동자가 지닌 두드러진 자유의지주의적 경향에 의해 완전한 것이 되었다. “노동자는 정력적인 개입에 의해 조직적 대량 살인을 멈춰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따라서 절박한 전쟁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자는 총파업을 준비하라”는 결의도 당시 인터내셔널에 만연한 정신의 증명이었다.

1869년의 바젤 대회에서 노동자 대동맹의 관념 발전이 절정에 달했다. 대회는 노동계급의 경제적·사회적 제반 문제가 직면한 과제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에 관해 채용된 브뤼셀 대회의 결의를 승인하고, 노동자 조직의 문제는 열어두었다. 하지만 바젤 대회에서 행해진 흥미로운 논의는 명확하게 보여준다. 인터내셔널의 진보적 지부는 이미 이 문제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 이상으로 조직 문제에 대해 매우 명확한 결론에 다다라 있던 것이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노동조합 조직의 중요성에 관한 발언에서 특히 명확히 드러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유진 힌스(Eugène Hins)가 벨기에 연합의 이름으로 대회 전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해 전혀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 견해는 1830년대의 오언과 영국 노동운동이 지녔던 몇 가지 생각과 매우 닮아있다.

이 점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당시 여러 국가 사회주의학파가 노동조합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거나 잘 해봐야 하위 조직으로밖에 보지 않고 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프랑스의 블랑키주의자는 노동조합을 단순한 개량운동이라고 보았다.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블랑키주의자의 당면 목표가 사회주의 독재였기 때문이다. 페르디난트 라살(Ferdinand Johann Gottlieb Lassalle)은 자신의 활동 전체를 노동자의 유일 정당을 위해 이용하고자 방향을 정하고 모든 노동조합 사업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했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진화 따위는 방해된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크스와 당시 독일에 있던 그 친구들이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가운데서 특정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주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외에는 불가능한 이상 자신들의 역할은 노동조합을 소모시켜 자본주의와 함께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바젤 대회에서 이 생각은 처음으로 철저하게 비판적인 검증을 받았다. 힌스가 대회 전에 제출한 벨기에 보고서에는 스페인 지부 · 스위스의 쥐라 지부 · 프랑스의 상당수 여러 지부의 대리인에 의해 여러 견해가 표명되었다. 노동자의 노동조합 조직은 기존 사회 내부에서 존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와야만 할 사회주의 질서의 사회적 세포라는 데까지 간주되었고, 따라서 이를 위해 노동자를 교육하는 것이 인터내셔널의 과제였다. 이에 따라 대회는 다음 결의를 채택했다.

“본 대회는 선언한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여러 직종에 있어 저항 조직을 확립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만 한다. 노동조합이 형성되면 바로 같은 직종의 노동조합이 통지하여 전국 산업동맹 형성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동맹은 그 산업에 관계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공통으로 실시되어야 할 조치에 대해 자문하고, 그 대책이 실행되는 것을 보고 최종적으로는 현재 임금 시스템이 자유 생산자의 연합에 전환되는 것을 볼 의무를 져야한다. 본 대회는 전 세계 노동조합 동맹의 연대를 조정하도록 총무회에 명한다.”

위원회가 제안한 결의안에 찬성하며 힌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역사회 노동자협회와 산업별 총 동맹이라는 이중의 조직형태를 취함으로써 한편에서는 여러 위원회의 정치적 관리라, 다른 한편에서는 현재의 정부로 전환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대표는 과거의 정부와 함께 이것을 마지막으로 영구히 배제될 것이다.”

이 새롭고 유익한 생각은 다음의 인식에서 생겨났다. 모든 새로운 경제형태는 사회 유기체의 새로운 정치형태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정치적 표현을 실현하는 것은 그곳 외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도 특수한 정치적 표현형태를 지녀야만 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주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형태는 노동자평의회제도가 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라틴 국가들에 있는 노동자는 인터내셔널의 주된 지지자이자 경제 투쟁조직과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집단에 기초해 그 운동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바젤 결의의 정신에 따라 활동했다.

국가·정치공작원·소유계급의 옹호자들에게 인식되었던 것처럼, 그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고자 분투했던 것이 아니다. 국가와 모든 정치권력을 전복하고자 분투했던 것이다. 그들은 확실한 본능을 가지고 국가와 정치권력은 모든 전제정치와 착취의 예비적 필요조건이라고 여겼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모방하려 하지 않고 정치정당을 수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즉, 정치권력의 탈취를 목표로 한 전문적 정치가라는 새로운 계급의 밥상을 차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생활의 완전한 재구성을 달성해야만 한다고 한다면 재산의 독점과 함께 권력의 독점도 파괴해야만 한다. 이것이 그들의 이해였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빛을 보게 되었다는 이해에서 더욱 나아가 그들은 모든 것의 운영을 보다 잘 이해하고자 했다. 그리고 정치정당의 국가정치에 대해 그들은 노동자의 경제 정책으로 대항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경향에 기초해 사회를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여러 공업 부문 · 농업 생산 분야에서 행해야만 하는 것들을 이해했다. 이 이해에서 노동자평의회제도라는 사상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혁명 발발 시에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 대다수를 떨쳐 일어서게 한 것은 바로 이것과 같은 사상이었다. 비록 제1인터내셔널의 여러 지부만큼 러시아에 있어 명확하게 체계적으로 깊이 생각되었던 것은 아님에도 말이다. 차리즘Tsarism 아래, 러시아의 노동자는 이것에 필요한 지적 준비가 없었다. 하지만 볼셰비즘은 이 보람찬 사상을 돌연 종결시켰다. 왜냐하면 독재 체제에 의한 전제정치는 평의회제도라는 건설적 사상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 즉 생산자 자신에 의한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건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조합하려는 시도는 동정심 없는 관료제 밖에 이끌어내지 못하고, 러시아 혁명은 매우 파멸적인 것이 되었다. 평의회제도는 전혀 다른 전제에서 생겨난 이상, 어떠한 독재에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평의회제도에 있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의지,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는 대중의 창조적 에너지가 구현된다. 하지만 독재체제에서는 위로부터 불모의 강제만이 오래 생존한다. 이 강제는 어떠한 창조적 활동에도 고뇌하는 일 없이, 맹목의 복종이야말로 모든 이에 대한 가장 높은 차원의 법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둘이 공존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독재체제가 승리를 얻었다고 드러났다. 따라서 소비에트(평의회)는,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소비에트라는 이름과 원래 의미의 어둡고 끔찍한 캐리커처일 뿐이다.

노동자평의회제도는 건설적 사회주의가 사용한 경제수단의 대부분을 포함한다. 모든 자연적 필수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생산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에서 성장한 사상의 보람찬 발전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실로 이 사상은 사회주의 현실의 구체적 기반을 제공하는 노력에서 출현했다. 모든 유능한 인간이 건설적으로 일함으로써 이 기반이 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독재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계승된 것이며, 이 프랑스 자코뱅주의의 전통적인 침전물은 이른바 바뵈프주의자Babouvist들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운동에 섞여 들어와 그 후 마르크스와 그 신봉자들에게 계승되었던 것이다. 평의회제도의 사상은 사회주의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사회주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독재는 사회주의와 어떤 관련도 없으며, 잘 해도 가장 불모인 국가 자본주의의 황무지를 이끌어내는 일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독재는 국가권력의 결정적 형태이다. 비상사태의 국가이다. 국가라는 사상의 옹호자와 마찬가지로 독재의 옹호자도 진보라고 여겨지는 것이나 일시적 곤궁 상태를 위에서 민중에게 강제해야만 한다는 전제를 낳는다. 이 전제만으로 독재는 사회혁명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이 된다. 사회혁명에 적합한 요소는 민중의 자유로운 발의와 건설적 활동이다. 독재는 유기적 발전의 부정·아래에서 위로의 자연스러운 구축의 부정이다. 그것은 정열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피후견인이라고 선언하며 겨우 한 줌의 사람들에 의해 대중 위에 가해진 후견 제도이다. 그 지지자가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고무했다고 하더라도 제반 현실이 지닌 철의 논리가 항상 그러한 사람들을 극도의 전제정치 진영에 끌어들여 버린다. 러시아는 이에 대한 매우 교훈적 실례이다. 개인의 독재뿐만 아니라 한 계급의 독재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는 다르다는 구실에 진지한 비판자는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이는 어리석은 이를 속이기 위한 세련된 트릭에 불과하다. 한 계급의 독재 같은 것 따위는 전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 계급의 이름으로 말을 할 책무를 가로맡은 특정 정당에 의한 독재만이 항상 포함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르주아 계급이 민중의 이름으로 전제적 행위를 정당화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노동자평의회 제도의 사상은 국가라는 사상, 그것의 현실적 전복이었다. 따라서 모든 독재형태―독재는 국가권력의 최고 발전을 항상 꾀해야만 한다―에 대해 공연하게 적대한다. 제1인터내셔널에 있어 이 사상의 선구자들은 사회적·정치적 자유가 없는 경제적 평등 따위는 생각할 수 없다고 인식했다. 이런 이유로 모든 정치권력 기관의 철폐야말로 사회혁명의 제일 과제여야만 하며, 그로써 새로운 형태의 착취가 생길 수 없도록 해야만 한다고 단호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믿고 있었다. 노동자의 인터내셔널은 서서히, 모든 유능한 노동자를 그 진영에 결합시켜 적절한 시기에 소유계급의 경제적 전제專制를 전복하고, 그와 함께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정치적 강제 제도도 전복하여 새로운 질서로 그것을 전환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이라고. 인터내셔널의 자유의지주의적 그룹 전체가 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바쿠닌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것을 표현했다.

“인터내셔널 조직은 새로운 국가나 독재자를 수립하는 것이 아닌, 모든 개개의 지배권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상, 국가조직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지녀야만 한다. 국가조직은 권위주의적이고, 인공적이고, 폭력적이며 민중의 자연 발달 및 관심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립하고 있다. 마치 그것과 같은 정도로 인터내셔널은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모든 면에서 이러한 관심과 본능으로 조화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대중조직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현실의 일상생활에 관한 여러 직업을 기반으로 하고, 여러 종류의 일·직업에 준하는 조직·동업단체를 기반으로 한다. 인터내셔널이 여러 농업 분야를 포함한 모든 산업을 대표했을 때, 그 조직, 인민대중의 조직은 완성될 것이다.”

이 사상의 직선상에 부르주아 의회에 적대하는 노동회의소의 사상이 생겨났다. 이는 벨기에 인터내셔널리스트 집단이 추진했던 사상이었다. 이러한 노동자회의는 모든 상공업의 조직 노동자를 대표하고자 했다. 생산수단을 조직 노동자가 접수할 준비를 실천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사회주의 원칙에 기초해 사회경제와 경제조직에 관한 모든 문제에 관여하고자 했다. 이 정신 안에서 생산자의 지적 훈련을 행하려고 했다. 더욱이 이런 조직은 노동자의 이익에 관해 부르주아 의회에서 꺼내 온 모든 문제에 대해 노동자의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정책을 노동자의 견해와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막스 네틀라우(Max Nettlau)는 『프루동에서 크로포트킨까지의 아나키즘Der Anarchismus von Proudhon zu Kropotkin』이라는 책에서 그때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던 바쿠닌의 원고 한 소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 한 소절은 이 문제에 대한 바쿠닌의 견해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직업 부문이나 이러한 회의소에서 행한 사회과학에 관한 이 실천적이고 생생한 연구 전부는 합의되고 숙려된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증명 가능한 확신을 앞으로 낳게 만들 것이며, 지금까지도 낳게 해 왔다. 그 확신이란 다음과 같다. 본격적이고 최종적이며 완전한 노동자의 해방이 가능해지는 것은 하나의 조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본의 수용, 즉 원자재와, 토지를 포함한 모든 노동수단을 노동자 전체가 수용하는 것이다. 직업 부문으로 이루어진 조직, 즉 인터내셔널에 있어 연합주의, 그리고 “노동회의소”에 의한 그 대표는 커다란 학원―인터내셔널의 노동자가 이론과 실천을 결합시키며 경제과학을 배울 수 있는, 그리고 배워야만 하는 장소―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부르주아 세계로 전환되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활발한 배아를 낳는다. 이 조직과 대표는 사상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미래 그 자체의 제반 사실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스위스 쥐라·프랑스·스페인에서 일반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대연맹이라는 사회주의에 특이한 사회적 특징을 부여했다. 유럽에서 노동자 정당이 발전함과 함께 이것은 꽤 오래간 거의 완전히 잊혀갔고, 스페인만이, 이 나라의 최근 사건이 명확히 드러내듯 전향자를 이겨낼 힘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여기서는 저명한 사람들만을 들 수밖에 없지만 제임스 기욤(James Guillaume)·아데마르 슈비츠게벨(Adhémar Schwitzguébel)·유진 발린(Eugène Varlin)·루이스 핀디(Jean-Louis Pindy)·세자르 드 페페(César De Paepe)·유진 힌스·헥토르 데니스(Hector Denis)·기욤 드 그리프(Guillaume De Greef)·빅토르 아르노울드(Victor Arnould)·R. 파르가 펠리세르(R. Farga Pellicer)·G. 센티뇽(G. Sentiñon)·안셀모 로렌초(Anselmo Lorenzo)와 같은 사람들이 스페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인터내셔널에서 훌륭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인터내셔널의 지적 발전 전체는 그 내부에 있는 자유의지주의적 일파의 열의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아야만 하며, 독일이나 스위스의 국가 사회주의 당파로부터도 영국의 순수한 노동조합주의로부터도 어떤 자극도 받고 있지 않다. 이것이 사실이다.

인터내셔널이 이러한 일반 노선을 추구하고, 그 헌장에서 규정된 것같이 다른 연합의 결정권을 최선으로 존중하던 동안은 조직 노동자에 대해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런던 총무회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이용해 별도의 국가별 여러 연합을 이용해 의회행동에 전력을 기울이게끔 하기 시작하자 사태는 변해버렸다. 이것은 1871년의 불행한 런던 대회에서 처음 생겨났다. 이 행동은 인터내셔널의 정신뿐만 아니라 헌장마저도 확실히 위반하고 있었다. 이 행동은 인터내셔널의 모든 자유의지주의적 일파의 단결된 저항에 마주할 뿐이었다. 이전에는 이 문제가 대회의 고려사항으로 다뤄진 적이 그때까지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런던 대회 직후에 쥐라 연맹은 역사적인 송빌리에 회람回覽을 발표하고, 런던 총무회의 오만한 억측에 대해 단호하고 명확한 언어로 항의했다. 하지만 1872년의 헤이그 대회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비난받아야만 하는 방법을 사용해 인위적으로 대다수가 만들어지고, 인터내셔널을 선거 기구로 변환한다는 런던 대회가 시작한 일에 영예를 부여했다. 오해를 풀기 위해 블랑키주의자인 에드워드 바이양(Edwouard Vaillant)은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탈취를 옹호했던 총무회의 결의안에 찬성할 때, “이 결의안이 대회에서 채택되어 인터내셔널의 성서로 편입되자마자 그에 따르는 것이 모든 구성원의 의무가 되고, 위반한 이는 추방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마르크스와 그 지지자들이야말로 인터내셔널의 명백한 분열을 직접 불러일으키고, 노동운동의 발전에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의회정치의 시대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귀결이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사회주의 운동의 지적 정체와 도덕적 타락을 이끌었던 것이다.

헤이그 대회 직후 인터내셔널에 가맹했던 가장 중요한 정력적인 여러 연합의 대리인이 상티미에St. Immier에서 반反권위주의자 대회를 열고 헤이그에서 채용된 결의는 모두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 이후 사회주의 진영은 혁명적 직접행동의 지지자와 의회정치의 대변인으로 분열하고, 시간이 흐름과 함께 이 분열은 끊임없이 커지고 이어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마르크스와 바쿠닌은 그저 사회주의의 근본적 제반 원칙에 관한 두 개의 다른 생각 사이에서 행해진 투쟁에 있어, 적대하는 두 부류의 가장 드러나는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투쟁을 단순히 두 사람의 인격의 불일치로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틀렸다. 이것은 두 가지 사상의 대립이었으며, 이 대립이 이 투쟁에 진정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지금도 계속 부여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의견의 대립에 대해 이러한 악의에 가득 찬 개인적 특징을 부여한 것은 최악이었다. 인터내셔널은 모든 당파에게 열려있었다. 그리고 다른 관점을 해명하는 것은 계속적인 토의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상학파를 하나의 특정한 학파에―더 정확히는 인터내셔널 내 하나의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던 학파에―복종시키려고 하는 것은 노동자 대동맹을 분열시키고 몰락시키는 일에 불과하며 모든 대지에서 노동운동에 이다지도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 전도유망한 맹아를 파괴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보불전쟁은 사회주의 운동의 초점을 독일로 옮겼다. 독일의 노동자는 혁명적 전통을 지니지 않고, 서쪽 여러 국가의 사회주의자가 지니고 있던 풍부한 경험도 없었다. 이 전쟁이 사회주의의 몰락에 크게 공헌했던 것이다. 파리 코뮌의 패배와 프랑스 반동의 시작은 수년 안에 스페인과 이탈리아에도 퍼져, 노동자평의회 제도라는 보람찬 사상을 배경으로 밀어냈다. 이러한 나라들의 인터내셔널 지부는 오랜 기간 지하조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고, 그 강함 전부를 반동에 저항하는 데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가 발흥한 것만이 망각상태에서 제1 인터내셔널의 창조적 사상을 구하고, 다시 한 번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4.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과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대 정치적 사회주의 ;

정당과 노동조합 ;

연방주의 대 중앙집권 ; 독일과 스페인 ;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 ;

사회의 재구축에서 정당의 무력함 ;

스페인의 C.N.T, 그 목표와 방법론 ;

스페인 노동조합의 생산적 작업과 농민단체 ;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국가 정치 ; 우리 시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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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제1인터내셔널의 태동기에 모양을 갖추었고, 노동자들의 위대한 동맹의 자유주의분파로부터 가장 지지받았던 사회적 열망의 직계 후손이다. 현대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대변하는 것은 1922년 재건된 국제 노동자 협회에 참석중인 여러 나라의 연맹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페인의 강력한 노동조합 총연맹(C.N.T.)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이론적 가정은 자유주의적, 혹은 아나키즘적 사회주의에 근거하고, 그 조직의 형태는 1900년부터 1910년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크게 성장한 혁명적 조합주의로부터 가져왔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원내 노동자계급정당들로 대변되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사회주의의 정반대편에 서 있다. 제1인터내셔널 시기에는 이러한 정당들이 독일, 프랑스, 스위스에서 겨우 태동하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전술의 결과를 진단할 수 있다.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주의로의 길에서 노동운동이 조금이라도 나아가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방법론 덕분에 사회주의는 거의 완전히 무너지고 중요하지 않은 무언가가 되었다. 옛 격언 “교황을 차지하는 자, 그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로 드러났다. 국가를 차지하는 자, 그 때문에 무너졌다. 의회 정치 참여는 사회주의 노동조합운동에 서서히 퍼지는 독과 같았다. 그것은 생산적 사회주의 활동의 필요성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고, 가장 심각하게도, 구원이 위로부터 온다는 끔찍한 환상을 사람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자기결정에 대한 열망을 앗아갔다.

때문에 옛 인터내셔널의 창조적 사회주의 대신에, 이름 말고는 진정한 사회주의와 닮은 점이 전혀 없는 대체품이 자리를 잡았다. 사회주의는 인민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해체하도록 준비시켜 민족국가의 인공적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적 이상으로써의 성격을 서서히 잃어갔다. 사회주의 운동의 새 장의 지도자들의 머릿속에서는 당의 표면적 목표와 민족국가의 이해관계가 점점 섞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 둘 사이에서 어떠한 결정적 차이도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노동운동은 서서히 민족국가의 도구화되어 다시금 이전의 균형상태로 돌아갔다.

이 해괴한 전향을 지도자들의 국제적 배신 같은 것이라 여기면 곤란하다. 지도자라는 존재들은 언제나 전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상이 점진적으로 동화되는 것은 현대 노동자 정당의 실질적 활동을 위한 조건이자 그를 통하여 그 정치적 지도자들의 학술적 태도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한 때는 사회주의 투쟁을 목표로 하였던 이 정당들은 국가의 정책에 따라 조금씩 그들의 사회주의적 강령을 희생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적 사회질서의 안녕을 위한 피뢰침이 되었다. 그들이 장악하고자 했던 정치적 권력이 오히려 점차 그들의 사회주의를 장악했고, 이제는 사회주의가 거의 남지 않았다.

여러 국가의 노동자 정당에서 핵심적 강령으로 대두한 의회주의는 사회주의 진영에 부르주아적 태도와 권력욕으로 가득한 정치인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사회주의 원칙을 내부에서 부패시켰다.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주의는 그 창조적 주도권을 상실하고, 특출한 요소 없는 평범한 개혁 운동이 되었다. 사람들은 선거에서의 성공에 만족하고, 더 이상 사회적 재건과 노동자들의 교육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이 가장 중요한 과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결정적 과제에 대한 끔찍한 태만의 결과는 세계대전 후 유럽 각지에서 발생한 혁명적 상황에서 드러났다.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옛 체계의 붕괴는 사회주의자들의 손에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마지않던, 사회주의 실현의 전제조건이라 칭하던 권력을 안겨주었다. 러시아에서는 국가사회주의의 좌익세력이 권력을 확보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지 않고 관료적 국가 자본주의의 가장 원시적 형태를 구성하여 오래전 부르주아 혁명을 통하여 철폐된 줄로만 알았던 정치적 전제주의를 부활시켰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의 형태로 온건한 분파가 권력을 쥐었다. 독일의 사회주의는 의회의 일상적 사업에 너무 오래 유착되어 있었기에, 그 늪 속에서 더 이상 어떠한 창조적 행동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자이퉁」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신문조차 “유럽의 역사에서 이처럼 창조적 개념이 부족하고 혁명적 열기가 부족한 혁명은 없었다”고 말해야 할 정도였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정치적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방향에 어떠한 건설적 노력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성과를 지킬 만큼의 도덕성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국가를 파시스트들에게 들어 바쳤고, 그 파쇼들은 노동운동을 한순간에 부수었다. 정치적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국가에 너무나도 몰두해서 사회주의의 건설적 활동에 대한 감을 잃었고, 마치 갤리선의 노예와 같이 매일의 현실 정치라는 황폐한 일상에 매여 있었다.

현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정치적 사회주의의 개념과 방법론에 대한 직접적 반동이라 하겠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전쟁 전부터 대다수의 조직된 노동자들이 제1인터내셔널의 원칙에 충실하게 남아있었던 스페인은 물론, 프랑스, 이탈리아, 그 외의 다른 국가들의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노동자의 생디칼”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에서 생산자들이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즉각적으로 개량하고자 설립한 생산자 조합을 의미했다. 하지만 혁명적 조합주의의 탄생은 이 단어에 더 넓고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정당이 현대 입헌 국가 내에서의 결정적 정치행동을 위한 단결된 조직이며, 어떠한 형태로건 부르주아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합주의자에게 노동조합, 생디칼이란 현존 사회 내에서 생산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사회주의에 따른 사회적 삶을 재건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집행하는 노동자의 단결한 조직이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⑴ 투쟁하는 노동자의 조직으로서, 사용자에 대항하여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보호한다. ⑵ 노동자의 지적 교육기관으로써 그들이 생산과 경제적 삶의 관리에 익숙해지게 하여 혁명적 상황이 도래하였을 때 노동자들이 사회경제적 기구를 스스로 장악하고 사회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할 수 있도록 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정당이 사회주의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위 두 임무를 결코 수행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정치적 사회주의가 강력한 조직을 구성하고 수백만 표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조합을 대체할 수 없다고 믿는다. 법률은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매일의 빵의 쟁취를 위한 투쟁에 어떠한 보장도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한 곳들, 이를테면 독일식 사회민주주의가 큰 인기를 얻은 프랑스의 북부 산업지구에서, 작센이나 실레지아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다수의 도시 행정부를 장악했지만 이곳 노동자들의 임금은 가장 낮고 노동조건은 가장 끔찍하다. 이러한 일들은 자주 일어나곤 한다.

정부와 의회는 가끔 경제적, 사회적 개혁을 스스로 결의하곤 한다. 그리고 그 개혁이 결의될 때, 그간 진행되어왔던 개선들은 법 무더기 속에 쓰레기처럼 버려지곤 한다. 산업혁명기 초반 아동노동의 끔찍한 결과를 목격한 영국 의회의 의원들은 소소하게 입법을 시도하여 사소한 개선을 만들어냈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것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우선 그 의원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사용자들의 초법적 사보타주를 막아내지도 못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90년대 중반에 시행한, “시칠리아의 유황광산에서 일하는 유황광산에서 일하는 여성은 광산으로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법 또한 비슷했다.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시달린 나머지 법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이상, 이 법도 사문화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여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는데 성공하고, 그들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한 후에야 사악은 퇴치되었다.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비슷한 예시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법률적 개혁마저도, 원외에 그 개혁을 모든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투쟁적 대중이 존재하지 않는 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1848년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제약하는 입법이 시행되었음에도, 영국의 공장주들은 산업위기를 기회삼아 노동자들이 11시간, 심지어 12시간씩 일하게 만들었다. 근로감독관들이 이에 대하여 개별 사업주들에게 법적으로 조치하였지만, 사업주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더 나아가 정부는 근로감독관들에게 법의 명문에 집착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렇게 경제적 상황이 나아진 후에도 노동자들은 10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을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다시 진행해야 했다. 1918년의 11월 혁명이 독일 노동자들에게 가져다 준 몇몇 경제적 개선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일 8시간 노동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산업에서 사용자들은 법을 무시하고 그 권리를 다시 빼앗아갔다.

정당들이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데 완전히 무능하다면, 사회주의 공동체를 유기체적으로 건설하거나 그 길을 준비하는 데에는 더욱 무능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러한 성과를 내기 위한 실질적 요구조건들을 전혀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독일은 이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노동운동의 창끝은 정당이 아니라 매일의 투쟁으로 단련되고, 사회주의적 영혼이 스며든 노동조합이다. 노동자들이 생산자로써 사회 구조를 떠받치고, 사회의 존재를 보장하고 있는 영역이 경제의 영역이기에,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사회적 힘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영역 또한 경제의 영역이다. 다른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외지에서의 원정과 같고, 그들의 힘을 열망하는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투쟁에 낭비하는 것이다. 의회정치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은, 헤라클레스가 그 발을 어머니 대지로부터 떼어낸 이후 교살한 그리스 신화의 안타이오스와 같다. 노동자들은 생산자이자 사회적 부의 창조자로서 활동할 때에만 그 힘을 자각할 수 있다. 자유의 영혼으로 불타고, 사회정의의 이상으로 움직이는 노동자와 그 동료들이 형성하는 연대와 단결은 무적의 방진을 구성하여 어떠한 공격도 견뎌낼 수 있게 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에게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는 동안만 나타나는 과도기현상 따위가 아니다. 노동조합은 사회주의 사회의 맹아다. 노동조합은 사회주의의 학교이다. 모든 새로운 사회구조는 옛 기관에 바탕으로 새로운 기관을 구성한다. 전제조건이 없이는 사회적 진화 또한 불가능하다. 혁명 역시도 마찬가지로 현재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단초를 발전시키고 성숙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초를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아직 시간이 있는 지금 이 맹아를 잘 심고 가능한 강하게 길러내어 다가오는 사회혁명과 그 유지를 보조하려 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교육 작업 역시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에게 사회주의 교육은 사소한 캠페인성 선동이나 소위 “오늘의 정세”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사회문제의 본질과 자신의 문제를 연결할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지도하고, 노동자들의 행정역량을 발전시켜 경제의 재조직자로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준비시키고, 이를 진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도덕적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 교육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경제투쟁 조직 이상으로 이 목적에 잘 복무하는 사회적 구성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조직을 통해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사회적 활동에 분명한 방향을 확보하고, 필요에 따른 즉각적 투쟁에 대한 내성을 기르고, 그들의 인권을 지켜낼 수 있다. 체제지지자들과의 이 직접적이고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은 모든 사회 변혁의 필수조건인 ‘운명적 동료들과의 활발한 연대’, 그리고 ‘자기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을 발전시킨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교육적 작업이 독립적 사고와 독립적 활동을 지향하기에, 그들은 모든 노동자 정당의 성격인 중앙 집중적 경향성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중앙집권주의는 위로부터의 인공적 구조로써 모두의 행동을 일부 소수집단의 난동으로 취급하면서, 황폐한 관료적 반복만을 신경 쓴다. 그리고 그렇기에, 중앙집권주의는 개별적 신념을 무너트리고, 기계적 질서와 관료적 경직을 통해 모든 개인의 주도권을 박탈하며 어떠한 독립적 활동도 용인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은 아래로부터 위로 연합한 연방주의 원칙에 근거하여, 모든 구성원의 자기결정권을 그 어떤 것보다 위에 두고, 공통의 이해관계나 공통적 신념과 같은 유기적 합의만을 인정한다.

연방주의가 세력을 분산시키고 조직적 저항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은 흔하다. 보다 정확하게는, 노동자 정당과 그 영향을 받은 노동조합들이 이 비판을 질릴 때까지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하여도, 현실이 이론보다 더 많은 것을 발화한다. 히틀러 집권 전 독일의 노동조합처럼 모든 노동운동이 완전히 중앙 집중화되고, 조직기술이 극한으로 발전한 국가는 다른 어디에도 없다. 강력한 관료계층이 전 국가를 통제했고, 조직 노동자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표현을 결정했다. 최근의 선거에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모두 합쳐 1,200만 표를 확보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정권을 확보하였을 때, 600만 조직노동자는 그 재앙을 타파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독일을 심연으로 끌어내렸고 수개월 뒤 그들의 조직을 산산조각 내었다.

하지만 제1 인터내셔널 이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조직노동자 사이에서 유효하고, 자유의지주의적 선동과 첨예한 투쟁이 조직노동자의 저항을 단련한 스페인에서는 강력한 C.N.T.가 프랑코와 그 동료들의 범죄적 계획을 담대하게 저지하고, 그 영웅적 저항에 자극받은 스페인 노동자와 농민들은 파시즘과의 투쟁에 나섰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인 노동조합의 영웅적 저항이 없었다면, 수주 안에 파시스트 반동이 전국을 지배하였을 것이다.

C.N.T의 연방주의적 조직기술과 독일 노동자의 중앙집권적 기술을 비고해보면, 전자의 단순함에 놀라게 된다. 작은 노동조합에서는 모든 업무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더 큰 연맹은 공식적 대표자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 대표자들은 짧은 임기에 국한되고, 동종업계 노동자들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C.N.T.의 서기장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1차 인터내셔널 이래 스페인에서 유지되어온 전통이다. 이러한 단순한 조직형태는 C.N.T.를 선봉에서 투쟁하는 조직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스페인 노동자들이 관료체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였고, 그들이 C.N.T.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연대와 강고함의 강인한 정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였다.

국가적 중앙 집중화는 사회적 생활의 단결을 목적으로 하기에, 정치적·사회적 균형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조직 형태이다. 하지만 적합한 순간의 즉각적 행동이, 지지자들의 독립적 사고와 활동이 필요한 운동에 있어, 중앙집권주의는 결정력을 약화시키고 모든 즉각적 행동을 억압하는 저주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예를 들어 독일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모든 지역적 파업이 우선 수백 마일은 떨어진 곳에 있어서 지역 상황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중앙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면, 조직기구의 타성이 기습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을 집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렇기에 활기차고 지적으로 깨우친 집단이 이 비활동적이고, 그 비활동에 대해 비난받는 조직에 복무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전체 운동을 침체시키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무엇보다 조직은 끝을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끝난다면, 조직도 끝나야 한다. 조직은 그 구성원들의 영혼과 활기찬 주도권을 앗아가고, 관료집단에 의해 무색무취의 지배를 가져온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란 결국 노동조합 조직은 노동자들이 그 사용자들과의 투쟁에서 정점을 확보하고, 동시에 혁명적 국면에서 노동자들이 경제적, 사회적 생활을 재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렇기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조직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건설되어야 한다. 각 지역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직종에 따라 조합에 가입하고, 이 조합에는 ‘중앙’을 두지 않아 노동자들이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도시나 교외지역의 노동조합들은 연계하여 소위 노동자 카르텔을 구성한다. 노동자 카르텔은 지역적 선전과 교육 센터를 구성하고, 노동자들을 계급으로써 결집시키고, 분파주의의 발흥을 억제한다. 지역적 노동문제 발생시, 카르텔은 조직 노동자 전체의 연대를 기반으로 공동작업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조직한다. 지역 노동자 카르텔은 연합하여 전국총연맹을 구성하고, 이를 통하여 지역 조직 간의 영구적 연계를 유지하고, 서로 다른 조직을 구성하는 노동자들 사이를 자유롭게 조정하여 협력의 전선을 만들고, 더욱 강한 카르텔이 약한 카르텔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위해 협력하고, 지역 그룹들에게 조언과 지도를 제공한다.

나아가 모든 노동조합은 전국의 동등한 노동조합과 직종에 따라 연방적으로 동맹하여 산별동맹을 구성한다. 이 동맹은 지역 그룹들의 협력적 활동을 구성하고, 필요시 연대파업을 준비하며, 노동자-자본가 간 일상적 투쟁의 요구를 충족한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총연맹과 산별노조총연맹이라는 두 극점을 모든 노동조합들이 순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직의 형태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매일의 빵을 위한 투쟁에서 직접행동을 취할 수 있게 하는 것 뿐 이니라, 혁명 이후 사회주의적 계획에 따른 사회적 삶의 재조직을 노동자들 외부의 개입 없는 스스로의 힘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경제 질서는 정부의 법령이나 조례로 만들어지지 못하며, 오직 생산의 각 분야에 있는 노동자들의 연대에 기초한 협동으로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모든 공단의 경영을 노동자들 스스로가 장악하여, 각 사업장, 공단, 산업영역을 전체 경제 유기체의 독립적 구성원으로써 확립시키고, 이를 통하여 생산물의 생산과 분배를 자유로운 상호합의에 근거하여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노동자 카르텔은 각 공동체에서 사회적 자본을 장악하고, 지역 주민의 필요를 판단하고, 지역 소비를 조직할 것이다. 노동조합총연맹을 통해 전국의 총괄적인 필요를 계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이에 따라 생산을 조정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생산에 필요한 도구, 기계, 원자재, 운송수단 등들을 장악하고, 각개 생산 집단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은 산별노조의 책무가 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조합원들에 의해 직접 선출된 노동자 평의회에 의한 지도를 기반으로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스스로 조직

산별노조 · 농업 동맹에 의한 국가 총생산의 조직

각개 노동조합에 의한 소비의 조직

이러한 관점에서 또한 실제적 경험이 최고의 예시를 보여준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사회주의에 있어 경제적 문제는 정부에 의해, 심지어 그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음을 목도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독재는 2년간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 무능함을 숨기고자 법령과 명령을 쏟아내었다. 만약 세계가 법령에 의해 해방될 수 있었다면, 러시아의 모든 문제는 진작 없어졌을 것이다. 볼셰비키는 정부를 향한 광신도적 열정에 따라 협동조합을 억누르고, 노동조합을 국가 통제 아래에 두고, 소비에트들의 자주성을 처음부터 빼앗는 등, 사회주의적 사회질서의 가장 소중한 맹아를 폭력적으로 파괴했다. 크로포트킨은 “서유럽국가의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러시아는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없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의 대중이 구체제에 질린 나머지 신정부의 실험들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말이다. 노동자평의회가 정치적, 경제적 생활을 통제하는 것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러시아는 일당독재로 지배되고 있는 이상, 노동자와 농민의 평의회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기에 볼셰비키는 평의회를 전제군주제의 시대에 지주 대표자들의 의회가 하던 것과 마찬가지인 암묵적 역할로 격하시켰다. 지난 2년간 그러했던 것처럼, 러시아에 언론의 자유가 없는 이상, 노동자 평의회는 자유롭고 소중한 조언자가 될 수 없다. 더 끔찍한 것은 선거 전에 어떠한 선거운동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선거 자체가 일당독재의 압력 아래에서 시행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평의회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의회(소비에트)의 정부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경제적 기반 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진보한 순간 결정적인 퇴보에 도달했다. 혁명은 단지 죽은 기반 위의 죽은 원칙이 되었다.”

이후의 역사는 크로포트킨이 모든 지점에서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의 러시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다. 독재는 고통 받는 대중의 경제적·사회적 해방으로 귀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가장 사소한 자유까지 억압하고, 제약이 없는 전제정을 발전시켜 모든 권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았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볼셰비키 체제 아래에서 경제적으로 쟁취한 것은,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에서 형태를 가져온 인간 착취의 가장 끔찍한 형태인 스타하노프 운동[4]이었다. 스타하노프 운동 아래, 노동자들은 그 생산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사실상 갤리선 노예로 격하되어 자기 노동에 대한 통제를 거부당하고, 죽고 싶지 않으면 상사의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하지만 강제노동은 결코 사회주의가 될 수 없다. 강제노동은 사람을 공동체로부터 괴리시키고, 노동의 즐거움을 파괴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파괴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없이 사회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독일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겠다. 사회민주당과 같은 정당이 사회주의를 실현할 것이라고는 어느 합리적인 사람도 기대하지 않는다.(사회민주당의 기관지 「전진Vorwärts」은 1918년 11월 혁명 전야에 “독일인들은 공화국을 위해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은 경솔해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사회민주당에게 권력이 주어졌고, 그들은 그 권력으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사회민주당의 압도적 불능은 오늘날 독일이 제3제국의 태양 아래 모이는 데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스페인, 특히 카탈루냐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 노동조합들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독특한 예시를 보여준다. 그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고집스러운 주장을 사실로 확인시켜주었다. 사회주의로의 전진은 오직 노동자들이 스스로에게 필요한 체계를 구성했을 때에만, 그들이 사회주의적 교육과 직접행동을 통해 준비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인터내셔널로부터 언제나 노동운동의 중점이 정당이 아닌 혁명적 노동조합에 놓여있던 스페인이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1936년 7월 19일, 파시스트 장성들의 음모가 공개적 반란으로 드러났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C.N.T.(전국노동자총연맹)와 F.A.I.(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의 영웅적 저항으로 무력화되었다. 기습적으로 적을 카탈루냐에서 제거하고 그들의 음모를 분쇄한 이후, 카탈루냐 노동자들은 거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에 의한 토지의 집산화와 공장의 장악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C.N.T.와 F.A,I.가 주도하여 촉발된 이 운동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사회당 다수가 조직된 U.G.T.(노동자 총연맹)과 함께, 아라곤과 레반테, 스페인 전역을 휩쓸었다. 파시스트들의 반란이 스페인을 사회혁명으로의 길로 이끌었다.

이 사건은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방법을 알 뿐 아니라, 수년간의 사회주의적 교육을 통해 확보한 건설적 정신 역시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C.N.T.와 F.A.I.를 통해 드러나는 스페인의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에 있어, 1차 인터내셔널 이래 노동자들이 자유를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삼고, 지적 독립성을 존재의 근간으로 삼게 하기 위한 교육을 진행하여왔다는 사실은 큰 이점이 된다. 스페인의 자유의지주의적 노동운동은 독일처럼 경제적 형이상학이라는 치명적 개념의 미궁에 빠져 스스로의 지적 상승을 해하지 않았다. 스페인의 노동운동은 부르주아 의회의 황폐하고 틀에 박힌 작업을 진행하는 데 동력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사회주의는 인만의 관심사이자 대중 스스로의 활동으로부터 발현하는 유기적 성장이 되었고, 그 근거를 경제조직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C.N.T.는 다른 나라의 노동조합들과는 다르게 단순히 산업노동자들의 동맹이 아니다. C.N.T.는 농민과 농업노동자들의 조합, 지식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조합 역시 같은 열에 포괄한다. 만약 스페인의 농민들이 도시노동자들과 어깨를 걸고 투쟁에 나선다면, 그것은 C.N.T.와 그 선구자들에 의한 사회주의적 교육의 결과라 하겠다. 이 투쟁을 현장에서 목격한 모든 분파의 사회주의자들, 진정한 자유주의자들과 반파시스트 부르주아들은 지금까지 C.N.T.의 창조적 역량을 재단했고, C.N.T.의 건설적 노동자들을 칭송해왔다. 그들 모두는 C.N.T.의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그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자연스러운 지성, 숙고, 빈틈없음, 그리고 무엇보다 전례 없는 관용을 칭송했다.[5] 노동자, 농민, 기술자, 과학자들은 협동작업을 위해 모였고, 3개월 만에 카탈루냐의 경제적 삶을 새롭게 규정했다.

오늘날 카탈루냐 토지의 4분의 3이 집산화되었고, 노동조합에 의해 협동경작 된다. 각각의 공동체는 자신의 형질을 가지고 있고, 그 내적 활동을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조정하지만, 그 경제적 문제를 연맹을 통해 결정한다. 그렇기에 공동체 안에서는 자유기업체제의 가능성도 보존되어 새로운 가능성과 상호 자극의 여지를 둔다. 토지의 나머지 1/4은 소규모 자영농에게 속한다. 자영농들은 집산농장에 참여하거나, 그들의 가업을 이어가거나 중에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많은 경우, 그들의 토지는 가족 규모에 따라 넓어지기도 했다. 아라곤에서는 절대 다수의 농민들이 집단 경작에 참여했다. 아라곤에는 400개 이상의 집단농장이 있었고, 그중 10개미만을 사회당의 U.G.T.가 통제했고, 나머지는 C.N.T.의 농민 조합이 주도했다. 농업은 크게 진보하여 1년 만에 비경작지의 40퍼센트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레반테, 안달루시아, 카스티야에서 역시 조합이 관리하는 집단농장은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많은 소규모 공동체에서 사회주의적인 삶의 형태는 자연스러워졌다. 주민들은 더 이상 화폐 교환을 하지 않았고, 그들의 집단 산업의 생산물을 충분히 누리고 잉여분을 전선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보낼 수도 있었다.

농촌의 집단농장에서 개인의 노동에 대한 보상은 유지되었고, 새로운 체계의 추가적 건설은 모든 인민의 전력을 요하던 전쟁이 종결된 이후로 미루어졌다. 노동에 대한 보상은 가족의 규모에 따라 결정되었다. 매우 흥미로운 C.N.T.의 일일 경제 상황 고시는, 집단농장을 건설하고, 그 농장에 기계와 화학비료를 새롭게 도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스티야의 집단농장들은 지난 수년간 오직 이 목적만을 위하여 2백만 페세타를 사용했다. 토지의 집산화라는 위대한 임무는 U.G.T.의 농촌 연맹이 운동에 가담하면서 더욱 쉬워졌다. 많은 공동체에서 모든 업무는 C.N.T와 U.G.T.의 위임 대표단에 의하여 운영되었고, 두 조직의 화해는 두 조직의 노동자들의 동맹관계로 귀결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들이 가장 놀라운 성과를 낸 것은 산업의 영역에서였다. 산업의 영역에서 그들은 산업 행정 전체를 장악했다. 이 1년 동안 카탈루냐의 철도는 완전히 근대화되었고, 서비스는 지금껏 없던 영역까지 향상되었다. 동일한 진보가 모든 운수 체계에서, 섬유산업에서, 기계공업에서, 건축에서, 중소영세사업장에서 실현되었다. 하지만 전시산업에서 조합이 성취한 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소위 휴전조약에 의해 스페인 정부는 해외로부터 전쟁 물자를 수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파시스트 반란 전의 카탈루냐에는 단 하나의 방위산업체도 없었다. 그렇기에 제일 처음 고려해야 했던 것은 존체 산업을 전쟁 수요에 맞추어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조합은 이미 모든 여력을 다해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고 있었기에, 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명분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노동자라는 요인을 제외하고는 설명될 수 없는 활기와 기술적 효율성으로 그 일을 해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 12~14시간씩 틀어박혀 이 작업을 완수했다. 현재의 카탈루냐는 매일 밤새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283개의 대공장을 가지고 있어서, 전선은 꾸준히 보급을 받을 수 있다. 오늘의 카탈루냐는 대부분의 전쟁 수요를 만족하고 있다. 안드레스 올트마레스 교수가 그의 논문에서 논하였듯, 방위산업분야에서 카탈루냐의 노동조합들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 프랑스가 14개월 간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7주간 성취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불행한 전쟁은 카탈루냐에 스페인 전역으로부터의 전쟁난민을 불러왔다. 그 수는 오늘날 백만에 달한다. 카탈루냐 병원의 환자 중 50% 이상은 카탈루냐 사람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모든 수요를 맞춰내었다. C.N.T.의 교사 조직은 모든 교육체계를 재조직했다. 예술품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이 생겨났다. 그리고 언급할 수도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해내었다.

C.N.T.는 동시에 전선에서 싸우는 12만 명의 시민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조직도 C.N.T.-F.A.I.가 한 것만큼 많은 것을 희생하지 않았다.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C.N.T.-F.A.I.는 프란시스코 아스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등 그들의 위대한 투사들을 상당수 잃었고, 그들의 위대함은 그들을 스페인 인민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이러한 조건의 결과로, 조합들이 아직 사회 재건을 완수하지 못하고 소비의 조직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전쟁, 파시스트의 손에 장악된 주요 원자재, 독일과 이탈리아의 침공, 해외 자본의 적대적 태도, 러시아와 스페인 공산당과 손잡은 스페인 내부세력의 반혁명적 맹공. 이 모든 것들이 조합이 위대하고 중요한 작업을 승전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게 하였다. 하지만 토지와 산업단지를 스스로의 통제 하에 넣음으로써, 그들은 사회주의로의 첫 발을, 가장 중요한 첫 발을 떼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자본가 없이도 생산을 유지하고 심지어 이윤을 갈구하는 기업가들보다 생산을 더 잘 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스페인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결과가 무엇이 되건 간에, 이 위대한 증명은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대체 불가능한 성과로 남고, 미래의 사회주의 운동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 영웅적 예시가 될 것이다.

만약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만국의 노동계급들에게 이 새로운 건설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를 심고, 그들 또한 경제주의적 투쟁 조직을 통해 경제위기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게 하고자 한다면, 모든 곳에서의 투쟁의 형태가 같아야 할 필요는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모든 나라에는 그 전통, 고유한 심리적 특성 등 역사적 맥락에 따라 내적으로 발현한 특수한 상황들이 있다. 연방주의의 가장 뛰어난 점은, 연방주의 아래에서는 이 중요한 문제들이 충분히 고려되고, 단결된 형태를 고집하여 자유사상을 침해하거나 인간의 내적 성향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영국을 그 예시로 들어 혁명의 순간에 노동자들이 사회경제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세 가지 위대한 운동이 있었다고 평한바 있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공고한 목표를 가지고, 분명한 계획에 따라 함께 작업하였던 그 세 가지는 조합주의, 협동적 조직, 그리고 지역자치주의적 사회주의였다. 노동자들은 사회의 해방이 그들 스스로의 임무일 뿐 아니라, 그 전제조건을 건설하는 것을 정치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업에 그들이 스스로 참여했을 때만 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들은 해방을 위한 즉각적 조건이 각국의 상황에 따라 즉각적 전제조건들이 다르더라도, 자본주의적 착취의 결과는 모든 곳에서 동일하므로, 국제주의적 연대가 필수적임을 이해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이 민족국가의 이해관계에 복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대다수의 국가에서는 그러했다. 조직 노동자들은 자신들만의 투쟁을 밀어붙여야 한다. 노동자들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자신의 이득이 존재하고, 그 이득은 국가나 유산계급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회당과 독일 노동조합에서 흔히 일어난 일처럼, 노동자들과 사용자들의 협력은 오직 노동자들을 라자로[6]로 전락하게 만들어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데 만족하도록 만들 뿐이다. 협력은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무엇보다 각각의 이해관계가 같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각국의 부르주아가 다른 국가로부터 무언가 이득을 편취하였을 때 약간의 콩고물이 노동자들에게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자들의 자유와 타인의 경제적 압제에 대한 대가로만 얻어지는 것이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의 노동자들은 그들 국가의 부르주아들이 식민지 인민들을 제약 없이 착취하여 얻어낸 이득의 콩고물을 주워 먹는데 참여하곤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식민지 인민들이 깨어날 때가 온다. 그리고 그 때, 저 노동자들은 지금껏 즐겨온 작은 이득을 더욱 크게 상환해야만 할 것이다.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것임을 더 명확히 보여준다.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국가가 새로운 시장을 타인의 비용으로 개척함으로써 고용이 늘어나고 임금이 높아지는 작은 이득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국경 너머에 있는 노동자 동지들은 실업과 낮아진 삶의 질로 그 이득을 대신 지불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국제 노동운동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며, 인터내셔널의 어떠한 훌륭한 결의안도 이 균열을 메울 수 없을 것이다. 이 균열을 통해 노동자들을 임금노예제의 멍에에서 해방하는 것은 점점 더 멀어진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이 아니라 자국의 부르주아지의 이득과 영합하는 이상, 그 노동자는 논리적으로 그 관계의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시장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유산계급의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독일의 사회주의 언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외 영토 병합을 한결같이 주장했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노동당들이 전쟁 전부터 밀어붙여왔던 학술적 태도와 방법론의 불가피한 결과라 하겠다. 만국의 노동자가 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함께 행동하는 것을 학습할 때에만, 국제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유효한 기반이 놓일 것이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한 시대적 해결책 역시 가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인간을 경제적 착취, 정치·사회적 노예화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청치혁명은 자본주의적 사회질서의 최소한의 기반조차도 대체할 수 없다. 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너무나도 타락하여 더 이상 파시즘의 위협에 대해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은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 정치적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정치의 메마른 통로에서 스스로를 완전히 상실하여 더 이상 대중의 참된 사회주의와 공감할 수 없고, 단지 소소한 개혁을 대변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음도 명백해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현대적 거대국가의 발전은 세계적 재앙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다. 지난 세계대전과 그 경제적, 사회적 결과는 오늘날 점점 더 재앙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모든 인간 문명에 대한 결정적 위험으로 자라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알 수 있는 다가오는 시대에 대한 불길한 징조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가 고려하는 것은 인간의 경제적 삶을 지면에서부터 재건하고, 그것을 사회주의의 정신으로 갱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업무를 할 수 있는 것은 가치를 생산하는 유일한 존재, 새로운 미래가 등장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존재인 생산자들 스스로밖에 없다. 모든 노동자를 경제적 착취의 족쇄로부터 해방하고, 사회를 정권의 기구와 절차로부터 해방하고, 인간 조직의 자유로운 연합을 통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협동작업과 행정으로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한 임무가 있을 것이다. 도시와 지방의 노동 대중을 이 위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준비시키고, 그들을 투사로 묶어내는 것이야말로 현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었을 때, 그 모든 목적이 끝난다.

5.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여러 방법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정치적 행동 ;

정치적 권리의 중요성 ;

직접행동 vs. 의회주의 ;

노동자들에게 파업의 의미 ;

동조파업 ; 총파업 ; 보이콧 ;

사보타주 ; 자본의 사보타주 ;

사회 보호의 수단으로써의 사회적 파업 ;

반군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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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국가의 정치구조에 관심이 없고, 결과적으로 정치적 투쟁에도 관심이 없으며, 그 활동을 순수하게 경제적인 요구에만 집중한다는 비판은 흔하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오류이며, 노골적인 무지, 혹은 의지적 왜곡의 소산이다. 원칙과 전술에서 현대 노동당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을 구분 짓는 것은 정치적 투쟁의 영역이 아니다. 그 결정적 요인은 투쟁의 형태와 그 목표에 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지배자가 없는 미래사회에 관하여 이상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은 오늘날에조차도 국가의 활동을 제약하고, 국가의 영향력을 사회적 삶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전술이야말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을 노동자 정당의 목표와 방법론으로부터 구별 짓는 것이다. 노동자 정당들의 활동은 국가와 정권의 영향권역을 꾸준히 넓혀, 사회의 경제적 삶조차 덮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길은 그저 국가 자본주의의 시대를 예비했을 뿐이고, 사회주의의 투쟁 목표와는 반대일 뿐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현대국가의 정치권력에 대한 태도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자본주의적 착취를 대하는 태도와 정확하게 동일하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지지자들은 세계의 사회적 불공정이 불가피한 부작용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에 근거한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의 노력이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착취형태를 철폐하고 이를 사회주의적 질서로 대체하는 것을 향하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현재하는 조건에서 자본가의 이윤율을 낮추고 생산자의 노동력에 대한 지분을 최대한 높이고자 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국가를 통해 드러나는 정치적 권력에 대하여도 동일한 전술을 사용한다. 그들은 현대의 국가가 그저 자본주의적 경제 독점, 계급 분할의 결과로써 정치권력의 모든 압제적 수단을 통해 이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고 본다. 하지만,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착취 체계의 정치적 보호도구로써의 국가가 사라질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반동의 공격으로부터 지금껏 쟁취한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현존하는 정치 질서내의 투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 나아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권리를 더욱 확대하고자 노력한다.

노동자들이 현존하는 사회에서 경제적 조건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노동자들은 그 국가의 정치적 구조에 무감각해질 수 없다. 매일의 빵을 위한 투쟁을 위해, 그리고 사회적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노동자는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이 권리와 자유를 위해 스스로 투쟁하여야 하고, 온 힘을 다하여 얻어낸 권리와 자유를 방어해야 한다. 그렇기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당대의 정치적 투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스페인 C.N.T.의 영웅적인 전투야말로, 저러한 주장에 일말의 진실도 없다는 최고의 증거가 아닌가.

하지만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집행하는 정치적 투쟁의 중점은 입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 속에 있다. 정치적 권리는 의회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권리는 의회 외부에서 와 의회를 강제한다. 그리고 정치적 권리가 아무리 법제화된다고 해도, 그것이 권리가 안전하다는 보장은 되지 못한다. 사용자들이 기회가 올 때마다, 노동자 조직이 약점을 보일 때마다 노동자와 만든 모든 합의사항을 무효화하려하는 것처럼, 인민이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정부 또한 모든 권리와 자유를 제약하고 폐지할 것이다. 언론, 집회, 단결의 자유가 오랫동안 보장되어 온 국가들에서 조차, 통치기구는 그 자유를 제약하거나 사법적으로 재해석하고자 꾸준히 노력한다. 정치적 권리는 그것이 종이에 적혀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행사가 인민의 습관으로 내재화되어 그것을 공격하는 것이 대중의 폭력적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 믿을 때에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의회 안에서의 “야당”이나 헌법에 대한 플라토닉한 구애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인간으로써의 존엄을 방어할 방법을 아는 자만이 존경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사생활 뿐 아니라 정치생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인민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치적 권리와 특권들은 정부가 호의로 베푼 것이 아니라, 인민들 자신의 힘으로 얻어낸 것이다. 정부는 이 권리를 성취하는 것을 막거나, 혹여 성취한다하더라도 그것을 신기루처럼 흐트러트리기 위해 모든 실력을 행사해왔다. 지배계급으로부터 이 권리들을 빼앗기 위해서는 위대한 대중운동과 혁명 전체가 필요했다. 이러한 운동과 혁명이 없이 지배계급은 이 권리를 결코 자발적으로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300년 동안 전제군주들로부터 조금씩 권리를 빼앗아 온 끝없는 투쟁의 역사를 보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지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조직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얼마나 힘들게 투쟁하였는지를 보라. 프랑스에서 노동조합의 조직은 1886년까지 금지되어있었다.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이 없었다면, 프랑스 공화국에는 아직까지도 단결권이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조직을 기정사실화하고 의회에 직접행동으로 맞선 후에야 정부는 이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노동조합을 합법화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인민에게 특정한 권리를 주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왜 그 권리를 주었는지가 중요하다.

물론, 레닌의 말과 사상을 받아들여 자유를 “부르주아적 선입견”이라 바라보는 사람에게 정치적 권리와 자유는 노동자에게 어떠한 가치도 없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 권리들을 주었던 무수한 투쟁, 모든 반란, 모든 혁명 역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게 진실이라면, 레닌은 차르정권을 무너트릴 필요도 없었다. 니콜라이 2세의 검열관도 자유가 “부르주아적 선입견”이라는 데에 동의했을 텐데 말이다. 나아가 위대한 반동 이론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와 루이 보날드(Louis Bonald) 같은 이들은, 레닌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른 어휘로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전제정권의 체제수호자들은 이들에게 매우 감사했다.

하지만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이 권리들이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결코 잊지 않는다. 그들이 부르주아 의회 참여를 거부한다 해도, 이것은 그들이 정치적 투쟁 전반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노동자들에게 의회는 가장 미약하고 가장 희망이 없는 정치투쟁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의회체계는 갈등을 조정하고 협업을 통해 이득을 편취하는 가장 좋은 수단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현재의 경제적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질서유지에 최적인 정치조직을 유지하는 데에 공통의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통의 이득이 있기에 모든 정당간의 공통합의는 가능하고, 선호된다. 하지만 노동계급에게는 상황이 다르다. 그들에게 현존하는 경제 질서는 경제적 착취의 원천이다. 또한 국가의 조직된 힘은 정치적, 사회적 복종의 대상이다. 가장 자유로운 선거조차 유산계급과 무산계급간의 대조를 철폐할 수 없다. 선거는 오직 사회적 불평등의 체계를, 노예가 스스로 주인을 섬길 권리를 법률적으로 인가할 뿐이다.

노동자가 의회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의 저항의 힘을 불구로 만들고, 현존 체계에 대한 전쟁을 불능의 운명에 빠트린다는 것은 실질적 예시를 통해 충분히 보여 왔다. 의회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최종목표에 조금도 다가가게 하지 못했다. 심지어 의회정치 참여는 노동자들이 반동의 공격에 맞서 그들의 권리를 지켜내지도 못하게 하였다. 독일의 가장 큰 영방국인 프러시아의 경우, 히틀러가 집권하기 직전까지 사회민주당이 정부 내 제1당이었고, 중요한 부처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프란츠 폰 파펜은 힌덴부르크에 의하여 라이히스칸즐러(총리)로 임명된 이후 헌법을 침해하고 소위 한 명과 12명의 병사들로 프러시아 행정부를 해산할 수 있었다. 사회당은 무기력했고, 이 공개적 호헌에 대하여 제국 고등법원에 제소하기만 할 뿐, 이 쿠데타의 흑막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반동세력은 사회당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였다. 폰 파펜의 쿠데타가 제3제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런고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결코 정치적 투쟁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이 투쟁 역시 직접 행동의 형태로, 노동계급이 통제할 수 있고,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힘의 수단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사소한 임금투쟁마저도 이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용자들은 궁지에 몰렸을 때, 금세 경찰을 부르고, 심지어 유산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구사대를 조직하곤 한다. 그렇기에 유산계급에게 정치적 투쟁은 중요하다. 공동체적 생활에 영향을 주는 모든 사건은 정치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중요한 경제적 행동, 이를테면 총파업은 결과적으로 정치적 활동이다. 나아가 이 정치적 행동은 의회주의적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파시즘에 맞서고 있는 전투나, 수십 년간 오직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조합주의자들만이 수행하여왔고,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던 반군국주의적 선전선동과 같은 것 말이다.

진실은 사회주의 노동자당들이 결정적인 정치개혁을 얻고자 할 때, 그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실력으로 그 개혁을 수행하지 못하고 노동계급의 경제적 투쟁에 기대야 했다는 것이다. 보편선거권을 얻기 위한 벨기에, 스웨덴,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총파업이야말로 그 근거라 하겠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차르가 헌법에 서명하도록 강제한 것은 1905년에 노동자들이 수행했던 위대한 총파업이었다. 수십 년간 계속되어온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영웅적 투쟁도 이것을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단결된 경제적 행동은 이것을 금세 이루어내었다.

정치적 투쟁의 중요한 지점은 정당이 아니라 노동대중의 경제적 투쟁 조직에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것을 인지하였기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모든 활동의 중심을 대중에 대한 교육과 대중이 경제적, 사회적 힘을 활용하는 것에 둔 것이다.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 모두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접행동이야말로 역사 속의 모든 결정적 순간에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게 한 유일한 방법론이었다. 부르주아들은 납세거부, 보이콧, 혁명과 같은 직접행동을 통해 전제왕정과 투쟁했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었다. 끔찍하게도 현대 부르주아지는 그 조상들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잊고, 해방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의 “불법적 수단”에 대하여 살육으로 답하고 있다. 마치 법이 단 한순간이라도 피지배계급이 멍에를 떨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던 듯 말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말하는 바, 직접행동은 노동자들이 경제적, 정치적 압제자들에 대항하여 전개하는 즉각적 전쟁을 의미한다. 다음이 그 놀라운 방법론들이다. 단순한 임금투쟁부터 총파업까지 넓은 의미로의 파업투쟁, 보이콧, 다양한 형태의 사보타주, 반군국주의적 선전선동, 그리고 오늘날의 스페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인민의 무장저항투쟁.

이러한 전투기술 중 조직된 노동 거부인 파업이 가장 자주 사용된다. 산업시대에서 파업이 노동자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봉건시대에 자주 발발했던 농민 봉기의 의미와 동일하다. 단순하게 말하면, 파업은 노동자들이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거나 사용자들의 양보로 얻어낸 권리를 지키는 데에 필수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단순히 즉각적인 경제적 이득 방어 수단만은 아니다.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그들의 저항의 힘을 학습하는 과정이자, 그들이 현존체계에 대한 물러섬 없는 투쟁을 통해 확보한 모든 권리를 목격하게끔 하는 수단이다.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조직과 마찬가지로, 일상적 임금투쟁 역시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임금투쟁은 노동자들에게 필요하다. 임금투쟁 없이 노동자들은 빈곤의 심연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사회적 문제는 임금투쟁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하지만 임금투쟁은 노동자들 사회문제의 진정한 핵심에 익숙해지도록 하여 경제적, 사회적 노예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준비하게끔 하는 최고의 학교다. 노동자들이 사용자에게 노동력과 지혜를 판매해야 하는 한, 노동자들이 장기적으로는 결코 생활을 유지할 만큼 벌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생활임금은 언제나 같지 않고,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점차 바뀌고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의 문화적 중요성이 여기에서 나온다. 생산자들의 경제적 연대는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제공하는 무기를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방향성과 깨우침을 제공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써, 실질적 학교이자 경험의 대학이 된다. 일상적 투쟁의 실질적 경험과 발견에서 노동자들은 조직을 촉발하고, 이해를 확장하고, 지적 전망을 확대할 수 있다. 삶의 경험으로부터 오는 꾸준한 지적 상승을 통하여 새로운 필요를 가진 개인들, 지적 생활을 위해 다양한 영역을 요구하는 개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의 등장이야말로 임금투쟁의 위대한 문화적 중요성이라 할 수 있다.

참된 지적 문화와 삶의 고등한 이득을 위한 요구는 인간이 일정한 수준의 물질적 삶의 조건을 확보하기 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조건이 없이는 고등한 지적 열망은 성취할 수 없다. 끔찍한 빈곤에 위협되고 있는 인간은 결코 고등한 문화적 가치를 이해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수십 년간의 투쟁을 통해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쟁취한 다음에야, 지적이거나 문화적인 발전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의 이러한 열망을 혐오한다. 스페인의 유명한 대신, 후안 브라보 무리요가 자본계급을 대변하여 한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생각하는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하는 짐승이다.”

일상적 경제 투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연대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 간의 연대는, 다양한 사회계급의 연합체인 정당의 이합집산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같은 조건에 처한 인간들 사이의 협력과 매일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그 힘을 더해가는 상호부조의 감각은, 대부분이 정신적 가치에 국한되는 정당의 추상적 원칙과는 매우 다르게 작용한다. 상호부조의 감각은 공동체의 의식에서 활기를 띄고 성장한다. 그리고 점차 올바름에 대한 새로운 감각으로, 피억압계급의 해방에 필요한 윤리적 전제조건으로 변모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연대를 촉진하고 강화하는 것, 그리고 모든 파업운동에 심오한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동조파업은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무기 중 하나이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동조파업이 다른 그 어느 나라도 이르지 못한 영역까지 발전했다. 동조파업을 통해 경제적 전투는 노동자들이 계급으로써 진행하는 신중한 행동으로 변모한다. 동조파업은 특정 직종의 파업투쟁 승리를 돕기 위한 다른 노동영역에의 파업 확장을 의미한다. 이 경우 노동자들은 파업대오의 투쟁을 보조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산업 전체를 무력화하여 전반적인 경제생활을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국가적, 국제적 카르텔과 트러스트의 형성을 통해 점점 사적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변해가고 있는 오늘날, 대부분의 경우 동조파업과 같은 전쟁의 형태는 노동자들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산업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내적 변형에 힘입어 동조파업은 이 시대의 노동자들에게 대체 불가능한 수단이 되었다. 사용자들은 카르텔과 보호 기제를 그 어느 때보다 광범위하기 키워 스스로의 이익을 보고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 역시 국내에서, 국제적으로 동맹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이 성장한 동맹이야말로 시대의 요구에 맞는 대중의 연대를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오늘날 제한된 파업은 그 최초의 중요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현대의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경제적 투쟁에서는 전체 산업을 포괄하는 거대한 파업이 점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심지어 사회주의적 이론과는 거리가 먼 수공업 노동자들조차도 이것을 알았기에, 미국에서는 전미노동총연맹의 옛 방식에 저항하는 산별노조들이 빠르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 노동자의 직접행동은 총파업을 통해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적 저항을 통해 생산의 모든 영역을 멈추는 것 그 자체와, 그에 뒤따르는 모든 결과를 통해서 말이다. 총파업은 노동자들이 집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고, 노동자들의 힘을 사회적 요소로써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마르세유에서의 프랑스 노동조합 총회(1894년)와 C.G.T.(노동조합총연합)의 총회에서 절대다수가 총파업을 선포했다. 그리고 독일의 노동자 정당들은 총파업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활동에 격렬히 반발하고, 이것이 “유토피아적”이라 매도했다. “총파업은 총 광란이다.” 이것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이 당시에 언명한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수년간 위대한 파업운동들이 발발했다. 스페인에서, 벨기에에서, 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에서, 러시아에서, 그 외 국가에서 발발한 파업운동은 이 “유토피아”라 명명된 투쟁은 온전히 가능하고, 일부 혁명적 광신자들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물론, 총파업은 모든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총파업이 적합한 명분을 가지고 다수 대중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총파업을 통해 수일 만에 사회주의적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 믿는다는 우스꽝스러운 비난이 있다. 물론 그것은 사악한 반대자들의 멍청한 상상으로써, 다른 수단으로는 공격할 수 없는 이론의 신뢰도를 떨어트리기 위해 왜곡된 것이다.

총파업은 여러 목적을 가질 수 있다. 1902년 2월의 바르셀로나 총파업이나 광산 노동자들이 끔찍한 트럭체계를 철폐하고 사용자들이 광산의 위생환경을 확립하게 만든 1903년 10월 빌바오 총파업과 같이 동조파업의 최종단계일 수도 있다. 총파업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일반적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 또한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1886년 미국에서 시도된 총파업은 모든 산업에서 일 8시간 노동을 확보하였다. 1926년 영국노동자들의 위대한 총파업은 사용자들이 집단적으로 임금을 삭감하려는 시도에 맞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 총파업은 정치적 목적을 가질 수도 있다. 정치범 해방을 요구하던 1904년 스페인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모로코 전쟁의 종전을 요구하던 1909년 카탈루냐 총파업, 소위 “카프 폭동”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를 끌어내린 1920년 독일의 총파업의 예시를 보라. 1903년 벨기에의 대중파업들이나, 1909년 스웨덴의 총파업은 보통선거권을 확보했고, 1905년 러시아의 총파업은 헌법을 만들었다. 스페인에서는 1936년 파시스트 반란에 맞선 노동자, 농민의 파업운동을 “사회적 총파업(huelga general, 우엘가 헤네랄)”로 발전시켜 무장저항을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폐지하고 노동자들 스스로의 손으로 경제적 삶을 재조직해내었다.

총파업의 중요성은 그것을 통해 한방에 전체 경제 체계를 멈추고 그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나아가 총파업은 사회의 모든 노동자들의 준비가 갖추어져야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혁명에 모든 시민들이 참가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장 중요한 산업의 조직노동자들이 일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전체 경제 메커니즘을 불구로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경제 메커니즘은 매일같이 석탄, 전기, 원자재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활기차고, 조직된, 매일의 투쟁 속에서 학습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노동계급을 마주할 때, 지배계급은 필수적인 양보를 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로서 총파업에 동의하지 않았던 장 조레스조차도 총파업의 가능성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재앙의 가능성이 부상하면서, 이것이 유산계급을 걱정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민의 권리를 박탈하고자 하는 그들의 움직임을 멈추었다고 인정해야했다.

전체 사회의 위기가 닥치거나, 오늘날의 스페인처럼 전체 인민을 반동세력의 미개한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발생할 때, 총파업은 대체할 수조차 없는 가치를 가진 무기가 된다. 총파업을 통해 전체적인 공중의 삶을 무너지면, 지배계급의 대변인과 국가의 공무원들의 상호 합의가 어려워진다. 이러한 경우에는 군대를 사용하는 것조차 정변에 대응하기 위한 군대 사용과는 아주 다른 작업이 된다. 정변의 경우, 정부는 군대에 의존할 수 있기에 수도와 국가 내 요지에 군대를 배치하여 위협에 대응하면 된다.

하지만 총파업은 필연적으로 군사력을 분산시키게 된다. 총파업 투쟁 저지의 요점은 산업의 주요 거점과 운수 체계를 노동자들로부터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군대의 기강이 흐트러진다는 뜻이고, 고정된 대형 속에서 움직일 때 가장 강력한 군대의 힘이 흐트러진다는 의미이다. 소규모의 군대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강경한 대중을 마주했을 때, 군인의 일부가 자신이 총구를 향하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부모형제라는 내적 성찰에 도달할 가능성 역시 있다. 군국주의라는 것은 주되게는 심리적 문제이고, 그 끔찍한 효과는 언제나 개인이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생각하지 않을 때, 자기 사람들에 대한 유혈의 압제자가 되는 것보다 더 고등한 일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을 때 현현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은 정치적 반란의 바리케이드의 자리를 대체한다. 총파업은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는 산업체계의 논리적 귀결로 다가온다. 그리고 동시에 총파업은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힘을 재조직하고 그 무기를 적절히 사용하는 법을 배우게 하여, 노동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시인의 예언가적 환상을 통하여 이러한 현상을 예견했다. 그의 인상적인 저서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에서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건에 선행한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연달아 발생하면서 점점 강경해진 총파업이었다고 말한다. 그 총파업을 통해 구체제의 가장 깊은 근간이 흔들렸고, 마침내 구체제의 옹호자들이 고통 받는 대중의 새로운 체제에 저항을 포기하게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의 전체적 발전은 오늘날 사회에 중대한 위험으로 자라났다. 이 발전은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총파업이라는 수단을 더욱 넓게 퍼트리게 하고 있다. 조직노동자들의 의회 참여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든 국가에서 분명해지면서, 조직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이익과 임노동제의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직접 행동의 또 다른 중요한 무기는 보이콧이다. 보이콧은 노동자들이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기에 유효하다. 노동조합이 합의하지 않은 노동조건으로 생산된 물건 구매를 조직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간헐적으로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다. 특히 소비재에 대해서는 말이다. 동시에 적절히 선전된다면 보이콧은 대중의 여론을 노동자들의 편으로 돌리는 데에 매우 유효하다. 노동조합의 인증마크는 보이콧 활성화에 유효한 수단이다. 심지어 제3제국의 지배자들조차 보이콧이 거대한 인민대중의 손에서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경험한 바 있다. 독일 노동운동 탄압에 대항하여 진행된 독일 물건에 대한 국제적 보이콧은 독일 수출무역에 중대한 타격이 되었고, 만약 노동조합들이 대중의 여론을 끊임없는 선동으로 환기시켰다면 더욱 큰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생산자-노동자들에게 보이콧은 노동조합을 적대하는 개별공장주들에 대한 투쟁 수단을 제공한다.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카디스에서 항만노동자들이 독일 선박의 하역을 거부하여 그 선장들이 북아프리카 항구에 하역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 만약 다른 국가의 노동조합들이 같은 일을 하였다면, 아마도 그 어느 정치적 집회들보다 거대한 결과를 얻어내었을 것이다. 보이콧은 노동자들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이고, 이 무기에 노동자들이 익숙해질수록 그들의 일상적 투쟁에서 더욱 성공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무기들 중 사용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며 “불법”이라 저주하는 것은 태업투쟁일 것이다. 이 작은 경제적 전투는 착취와 정치적 압제의 체계만큼이나 오래된 수단이다. 태업투쟁은 다른 수단이 실패하였을 때 노동자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수단이 된다. 노동자들은 태업을 통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업무를 방해한다. 일반적으로 태업은 사용자들이 임금을 삭감하거나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등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려 할 때 발생한다. 태업은 나막신을 뜻하는 프랑스어 ‘사보’에서 유래하여, 나막신으로 두드리는 양 일을 대충 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사보타주의 중요성은 이 경구로 요약된다. “최저임금에는 최저노동을.” 사용자 역시 같은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사용자는 상품의 가격을 그 질에 따라 매긴다. 생산자에게 상품은 노동력이고, 그 가격은 높을수록 좋다.

하지만 사용자는 생산자의 노동력에 대한 가격을 낮추도록 강제하는 위치를 가지고 있고, 그로부터 이익을 편취한다. 그리고 이때 사용자는 생산자가 스스로를 방어할 것을 상정하지 않으며, 그 상황이 태업투쟁을 가능하게 한다. 영국 노동자들은 이를 혁명적 조합주의라는 이름이 불리기 한참 전부터 태업투쟁을 실천해왔다. 영국 노동자들은 스코틀랜드의 동지들로부터 최초이자 가장 효과적인 태업의 형태였던 “카‘카니(ca’ canny, 천천히)”를 보고 배웠다. 오늘날에는 모든 산업 내에 노동자들이 생산을 방해할 방법이 존재한다. 현대적 분업이 존재하는 모든 산업에서, 한 업무 부문의 작은 방해마저도 전체 생산 공정을 멈출 수 있다. 그렇기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철도 노동자들은 소위 “준법 투쟁(grève perlée, string-of-pearls-strike)”를 통해 운수 체계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던져 넣었다. 이것을 위해 그들은 그저 운송업법을 준수하기만 하였고, 이렇게 하자 어떤 열차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생각하지도 못할 좋지 않은 정세라 할지라도,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또한 사용자들은 특정한 정세를 활용하여 노동자들에게 더 가혹한 생활조건을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이후 놀랍게도 급격하게 정착한 소위 연좌농성은 사보타주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철야로 농성하며 대체인력의 투입을 방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혹, 사보타주는 파업 전에 기계를 망가트려 대체인력의 업무를 어렵게 하거나, 더 나아가 상당기간 불가능하게 하도록 작용하곤 한다. 이 영역에서만큼 노동자들의 상상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곳은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사보타주는 사용자에게 향하는 것이지, 소비자들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다. 1897년 툴루즈 C.G.T.에 관한 보고서에서 에밀 푸제(Emile Pouget)는 이것을 강조했다. 부르주아 언론의 모든 기사들은 빵에 유리를 넣어 굽는 제빵 노동자나 우유에 독을 타는 농업 노동자를 운운하며 사보타주가 사악한 행동이라고 여론을 호도했다.

소비자들을 사보타주 하는 것은 언제나 사용자들의 권리였다. 그들은 저질 식량을 팔고, 무너져가는 빈만가를 짓고, 가장 질 낮고 싼 재료로 비위생적인 공동주택을 짓는다. 수백만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그들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대량의 식량을 파기한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의 생활을 최저점으로 끌어내려 스스로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군수자본은 외국에 전쟁 장비를 판매하여 그들 스스로의 국가를 무너트리곤 한다. 이것들이야말로 자본가들의 사보타주라 하겠다.

또 다른 형태의 직접행동으로는 사회적 파업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근 미래에는 더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현 체제의 가장 치명적인 결과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은 생산자들의 즉각적 이익을 보호하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회적 파업은 사용자들의 공적 책임을 강제하기 위하여 도입된다. 무엇보다 사회적 파업은 노동자들 다수로 구성된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노동조합의 임무는 생산자로써의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에 전적으로 제한되었다. 사용자가 합의된 노동시간과 임금을 준수하는 한, 이 임무는 수행된 것이다. 한 마디로, 노동조합은 오직 그 조합원들의 노동의 조건에만 관심을 둘 뿐, 어떠한 노동을 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이론적으로는 분명히 사용자와 고용인의 관계는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계약에 기초한다. 그 목적은 생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계약은 양자가 그 목적에 동등하게 참여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현실에서 노동자는 생산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생산의 결정은 사용자가 독점하고 있다. 그 결과로 노동자들은 전체 사용자의 이익을 위해 전체 공동체를 상처 입히는 수천가지 일을 하도록 격하된다. 노동자들은 저질의, 심지어 위험한 자재로 생산물을 제작해야만 한다. 노동자들은 형편없는 집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상한 음식을 판매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소비자를 속이기 위한 수없이 많은 일들을 해야만 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미래의 노동조합에게 중요한 임무라 믿는다.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사회에서 노동자의 위치를 향상시키고, 큰 틀에서 그 위치를 공고하게 할 것이다. 이미 이 영역에서의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1902년 바르셀로나의 건설노동자들은 노동자 기숙사를 저질 자재와 폐자재로 건축하는 것을 거부했다. 1906년, 파리의 대형 식당의 주방노동자들은 싸구려 썩은 고기로 조리하는 것을 거부하며 파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례가 있다. 이 사례들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사회적 사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독일 군수 노동자들은 1919년 에르푸르트 대의원대회에서 더 이상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을 것이고, 더 필요한 것을 생산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 결의안은, 2년 뒤 노조 중앙에 의해 폐기될 때까지 유효했다. 죄메르다Sömmerda의 노동자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로서 마지막까지, 결국 그들의 입지를 “자유노조”가 차지할 때까지 이에 저항했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모든 민족주의적 야망에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특히 라틴 국가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그들의 활동력 상당부분을 반군국주의적 선전활동에 투여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군복을 입고 있는 노동자들을 그들의 계급에 충실하도록 만들고, 파업의 시기에 그들이 총구를 부모형제들에게 향하지 않도록 하려한다. 이것은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희생을 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지배적 권력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반군국주의적 선전활동은 전쟁의 위협을 총파업을 통해 종식하는 데에 큰 틀에서 기여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전쟁은 오직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인민에 대한 조직적 살해를 막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정당하다고 믿는다. 이 영역에서 노동자들은 모든 수단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 수단을 사용하기 위한 열망과 도덕적 건강함만이 필요할 뿐이다.

노동운동을 그 내적 경직성으로부터 치료하고, 정당의 공허한 슬로건을 노동운동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를 통해 노동운동은 지적으로 진보하고, 내적으로 창조적 조건을 구성하여 사회주의의 실현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 목표가 실질적으로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내적으로 확신하고, 이를 윤리적 필요로 발현하여야 한다. 사회주의의 위대한 최종목표는 매일의 실질적 투쟁으로부터 나와서 그 투쟁들에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여야 한다. 시대적 필요에 의해 발발한 가장 작은 투쟁 안에도, 사회해방의 위대한 목표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투쟁들은 목표로 가는 길을 닦고, 그 투사들에게서 의지와 실천으로 드러날 내적 열망을 강화할 것이다.

6.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진화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와 그것이 유럽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 ;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조합주의 ;

제3인터내셔널에서의 조합주의자 ;

국제노동자협회 재창설 ;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

포르투갈에서 ; 이탈리아에서 ; 프랑스에서 ; 독일에서 ; 스웨덴에서 ; 네덜란드에서 ; 남아메리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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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현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제1 인터내셔널 당시부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노동운동의 주류였던 스페인을 제외하면,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에 근거하고, C.G.T.의 영향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프랑스 노동계급 내에서 분열을 반복하며 통합 노동조합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한 정치적 사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 노동계급 내에서 자발적으로 발전했다. 파리 코뮌의 몰락과 인터내셔널의 불법화 이후 프랑스의 노동운동은 무색무취해졌고, 부르주아 공화주의자인 J. 바베렛(J. Barberet)의 영향력 아래로 떨어져 “자본과 노동 사이의 조화”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879년의 마르세유 총회 전까지 어떠한 사회주의적 경향도 발현하지 못하였고, 총회 이후 노동자 연맹Fédération des Travailleurs은 소위 집산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집산주의자의 단결도 오래가지 못했다. 1882년 생테티엔Saint-Étienne에서의 총회는 집산주의 운동을 분열시켰다. 쥘 게드(Jules Guesde)의 분파는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고, 프랑스노동자당을 창당했다. 반면 한때 아나키스트였던 폴 브루스를 따르는 분파는 프랑스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을 결성했다. 프랑스노동자당은 주로 전국노동조합연합의 지지를 받았고, 프랑스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은 프랑스노동단체연합의 지지를 받았다. 잠시 후 장 알레망의 지도 아래의 소위 알레망주의자들이 프랑스노동단체연합으로부터 등장하여 몇몇 거대 노조 안에서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들은 의회주의를 완전히 기각했다. 그 외에는 중앙혁명협의회로 단결한 블랑키주의자들이 있었고, 장 조레스나 밀레랑 등 사회경제학회에 소속된 독립적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알레망주의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당들은 노동조합을 정당의 구인 알선소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실질적 기능이 무엇인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양한 사회주의 분파간의 지속된 알력은 자연스럽게 노동조합들로 전이되었다. 그 결과 한 분파의 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할 때, 다른 분파의 노동조합원들은 대체인력으로 투입하곤 했다. 이 끔찍한 상황은 서서히 노동자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아마 이 개안에는 1883년부터 파리와 리옹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아나키스트들이 펼쳐온 반의회주의적 선전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1894년의 낭트 총회는 모든 노동조합동맹들 간의 이해를 확보할 길과 수단을 만들어내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 결과로 다음 해 리모주의 총회에서 C.G.T.가 창립되어 스스로를 모든 정당들로부터 독립되어있다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노동조합은 최종적으로 프랑스 노동운동을 불구로 만들고, 해방을 위한 싸움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빼앗은 정치적 사회주의를 완전히 포기했다.

그때부터 1902년까지, 오직 C.G.T.와 노동단체연합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노조 집단만이 존재했다. 1902년 노동단체연합은 몽펠리에에서의 총회를 거쳐 C.N.T.에 가입했다. 이를 통하여 노동조합의 실질적 단결이 이루어졌다. 조직노동을 통합하려는 노력은 총파업에 대한 격렬한 선전활동으로 계승되었다. 마르세유 총회(1892년), 파리 총회(1893년), 그리고 낭트 총회(1894년)에서는 이미 절대 다수에 의하여 총파업을 선언한바 있다. 총파업의 개념을 노동조합 운동 내에 소개한 것은 1886년부터 1887년까지의 미국 총파업운동에 크게 감명 받은 아나키스트 목수 토르틀리에(Tortelier)였다. 그리고 이후 알레망주의자들이 총파업의 개념을 수용하였다. 쥘 게드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총파업에 반대했다. 그리고 두 운동은 C.N.T.의 특별한 대표자들을 배출했다. 픽토르 그리퓌에(Victor Griffuelhes)가 알레망주의자였다. 노동단체연합의 열정적이고 매우 지적인 서기였던 페르낭 펠루티에, C.G.T.의 공식 기관지 「민중의 소리La Voix du Peuple」의 편집자였던 에밀 푸제, 폴 델잘(Paul Delesalle), 이브또(Georges Louis François Yvetot) 등은 아나키스트였다.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등이 추종하는바 널리 퍼진 의견에 따르면,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는 조르주 소렐(Georges Eugène Sorel), 에두아르드 베르트(Édouard Berth), 위베르 라가르델(Hubert Lagardelle) 등에게 학술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이 자들은 한 순간도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에 소속되거나 그 내적 발전에 언급할 만한 영향을 준 적이 없다. 나아가 C.G.T.는 오직 혁명적 노동조합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C.G.T.의 절반가량의 성원들은 개혁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오직 정당과의 연결을 거부하기 위한 이유로만 C.G.T.에 가맹했다. 하지만 C.G.T.의 혁명세력은 조직 노동의 가장 활기차고 활동적인 요소들을 우군으로 두고 있었고, 무엇보다 조직 내 최고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혁명세력은 C.G.T.의 성격을 구성했고, 혁명적 조합주의의 개념적 발전을 결정한 것은 오직 그들이었다.

이로써 옛 인터내셔널의 이상은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리고 이로써 프랑스 노동운동의 혁명적 영향력이 프랑스를 한참 넘게 만든 노동운동의 동요기가 촉발되었다. 위대한 파업투쟁들과 정부에 의한 수없이 많은 고발들은 C.G.T.의 혁명적 열정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강화된 열정으로 혁명적 조합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은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보헤미아(현재의 체코 지역-역자 주),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 등지로 확산되었다. 영국에는 프랑스 조합주의의 영향을 받아 톰 만(Thomas Mann)과 가이 보우만(Guy Bowman)에 의하여 조합주의 교육 연맹the Syndicalist Education League이 창설되어 운수, 광산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고, 그 영향력을 위대한 파업투쟁으로 보여주었다.

국제 노동운동 안에서 프랑스 조합주의의 영향력은 당시 모든 사회주의 노동자당들이 내적 위기를 드러내면서 크게 강화되었다. 소위 수정주의자들과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쟁은, 특히 정당들의 의회주의적 활동을 통해 수정주의자들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들마저 자연스럽게 수정주의적 경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보다 사려 깊은 많은 요소들이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정당들은 조건에 의해 강요되어, 때로는 의지에 반하여, 조합주의자들의 총파업에 일정 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선구자인 도멜라 뉴엔하이스(Domela Nieuwenhuis)는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총회에 조직된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준비함으로써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을 떨쳐내자는 안을 제시했다. 이 주장은 특히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t)에 의하여 격렬하게 거부되었다. 하지만 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국가적, 국제적 사회주의자 회의체들은 이 의제를 점점 더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1899년, 파리의 사회주의자 총회에서는 미래의 수상인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이 총파업을 격렬히 부르짖었고, 총회가 이를 수인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전에는 총파업을 가장 격렬히 반대하던 프랑스의 게드주의자들조차 노동대중 안에서의 영향력을 지키고자 1904년 릴에서 개최된 총회를 통해 총파업을 수인했다. 물론 이러한 양보를 통해 얻어낸 것은 없다. 의회주의와 직접행동 사이에서의 시소게임은 그저 혼란만을 야기했을 뿐이다. 네덜란드의 도멜라 뉴엔하이스와 그 추종자 같은 솔직한 사람들, 프랑스의 알레망주의자들은 총파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불가피하게 내면화하고, 의회주의적 활동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했다. 반면 다른 이들에게 총파업의 이상에 대한 양보는 어떠한 명확한 이해도 없이 진행된 그저 입 발린 말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총리였던 브리앙의 경우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총파업을 지지하는 스스로의 언명을 담은 C.G.T.의 유인물 배포를 금지하는 비극-희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유럽 조합주의와는 별개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약칭 I.W.W .-역자 주)의 운동이 발흥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미국의 상황에 전적으로 기인하여 발전했다. 그럼에도 I.W.W.의 운동은 조합주의와 직접행동이라는 방법론, 그리고 산업 · 농업 조직들을 통하여 노동자가 스스로 진행하는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건에 대한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1905년 시카고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미국 노동운동의 다양한 급진적 요소들은 유진 뎁스(Eugene Victor “Gene” Debs), 빌 헤이우드(William Dudley “Big Bill” Haywood), 찰스 모이어(Charles H. “Charlie” Moyer), 대니얼 드 레온(Daniel De Leon), 윌리엄 트라우트만(William Ernst Trautmann), 마더 존스(Mary G. Harris Jones, Mother Jones), 루시 파슨스(Lucy Eldine Gonzalez Parsons) 등에 의해 대변되었다. 상당기간동안 I.W.W.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부 광부 연합이었다. 그 이름은 콜로라도, 몬태나, 아이다호 등에서 발발한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노동쟁의를 통해 알려졌다. 1886년부터 1887년까지의 일 8시간 노동을 위한 위대한 운동 이 1887년 11월 11일, 스파이스(August Vincent Theodore Spies), 파슨스(Albert Parsons), 플레처, 엥겔(George Engel), 링(Louis Lingg)의 다섯 아나키스트들의 비극적으로 처형으로 끝나면서, 미국의 노동운동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I.W.W.의 창립은 이를 통하여 노동운동을 다시 혁명적 궤도로 돌려놓는, 그 전까지 완수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 속에 이루어졌다. I.W.W.와 유럽 조합주의 운동의 가장 큰 차이점은 I.W.W.가 대니얼 드 레온의 영향 속에서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규정한 반면, 유럽 조합주의는 1차 인터내셔널의 자유의지주의 진영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I.W.W.는 서부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동부의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영향력을 사용하여 많은 대규모 파업을 지도하여 모두의 입에 “워블리(I.W.W.의 별명 -역자 주)”가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서부 주들에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격렬한 투쟁을 주도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생명을 잃고, 자유를 희생했다. I.W.W.의 성원 수천 명이 수감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광신도 자경단들에 의해 타르와 깃털로 뒤덮이거나 린치 당했다. 1916년의 에버렛 학살The Everett massacre, 1915년 노동 시인 조 힐(Joe Hill)의 사형, 1919년 센트랄리아 학살the Centralia affair, 그 외 무방비한 노동자들이 희생된 비슷한 사건들은 I.W.W.의 희생의 역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대전의 발발은 마치 자연재해처럼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라예보의 암살사건 이후 모두는 유럽이 대 전쟁을 향해 전속력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C.G.T.의 지도부들은 독일 노동조합 지도부에게 양국의 조직노동자들이 다가오는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독일 노동 운동의 지도부는 언제나처럼 직접적인 대중행동에 반대했고, 의회에서의 오랜 활동으로 혁명적 동력을 잃은 지 오래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독일 노동운동 지도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두려운 재앙을 예방할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종전 후 인민들은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다. 유럽은 가득한 상처로 피 흘리고, 열병의 단말마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중부유럽에서는 구체제가 붕괴했고, 러시아에서는 누구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회혁명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상황은 모든 국가의 노동자들을 깊이 감동시켰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혁명적 상황이 시작됨을 느꼈고, 이 상황에서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고통 받는 대중들의 희망은 이후 수년간 떨쳐질 것임을 느꼈다. 노동자들은 기존의 체계가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막아내지 못했고, 오히려 지난 4년간 인민들을 도축장으로 내몰았고, 존재의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이 창조한 경제적, 정치적 혼란을 떨쳐낼 것을 약속한다면, 어떠한 방식도 찬양할 수 있었다. 오직 이 이유로 그들은 러시아 혁명에 최대의 희망을 두었고, 러시아혁명이 유럽 인민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 믿었다.

1919년 볼셰비키 당이 러시아의 정권을 장악한 후 세계의 혁명적 노동자조직들을 러시아로 초대하고, 그 총회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결성하고자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몇몇 국가에만 공산당이 존재했다. 반면,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독일, 영국,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에는 조합주의 조직이 있었고, 이 중 일부는 상당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레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사회주의 노동자 당들로부터 조심스레 독립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이 조합주의 조직들로부터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렇기에 1920년 여름, 3차 인터내셔널의 창립총회에는 거의 모든 조합주의 조직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들이 출석했다.

하지만 조합주의 조직의 대표단들이 러시아에서 받은 인상은 그들의 계산을 벗어났고, 대표단들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이 가능하거나 선호할만한 것이라 보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미 최악의 형태로 현현하고 있었다. 감옥은 모든 학파의 사회주의자들로 들어차 있었고, 그 중에는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지배계급의 등장은 참된 사회주의적 재건이라는 임무와는 결코 걸맞지 않았다.

조합주의자들은 조직적 독재 기구를 가지고 유럽의 노동운동을 볼셰비키 국가의 대외정책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창립된 제3인터내셔널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볼셰비키들, 특히 레닌에게 해외의 조합주의 조직, 특히 라틴국가의 조직들과 관계를 확립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볼셰비키는 제3인터내셔널 외부에 혁명적 노동조합들의 국제적 동맹체를 설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조합주의 대표단들은 이 제안에 동의했고 코민테른의 국장이었던 로소프스키(Solomon Lozovsky)와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로소프스키는 이 새로운 조직이 제3인터내셔널에 소속할 것과 각국의 노동조합들이 해당 국가의 공산주의 조직 산하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만장일치로 부결되었다. 어떠한 것도 합의할 수 없었기에, 결국 그 다음해인 1921년 모스크바에서 국제 노동조합 총회를 개최하고, 이 문제를 그 총회에서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12월, 모스크바 총회에 관한 입장을 정하기 위한 국제 조합주의자 대회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총회는 그들이 국제적색노조에 가입하기 위한 일곱 가지 조건에 합의했다. 이 일곱 조건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모든 정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조직은 오직 생산계급 스스로의 경제직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관점의 유지였다. 1921년 모스크바의 총회에서 조합주의자 조직은 소수였다. 전 러시아 노동조합 중앙위원회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고, 모든 결과를 내놓았다.

1921년 10월,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F.A.U.D.(독일자유노조)의 13차 총회에는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미국 I.W.W.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그 회의에서 1922년 봄, 베를린에서 국제 조합주의자 총회를 소집할 것이 의결되었다. 1922년 7월에는 베를린에서 이 총회 준비를 위한 회의가 열렸다.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스페인, 그리고 러시아의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이 회의에 참가했다. 전 러시아 노동조합 중앙위원회도 대표단을 파견하여 총회 소집을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성과가 없자 회의를 탈회했다. 회의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을 선언하기 위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원칙은 총회 전에 공람되었다. 총회를 성사시키기 위한 모든 필요한 준비가 완료되었다.

국제 조합주의자 총회는 1922년 12월 25일부터 1923년 1월 2일까지 개최되었다. 회의에는 20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아르헨티나지역노동조합연맹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 2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칠레의 국제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600명의 조합원을 가진 덴마크의 조합주의선전조합Union for Syndicalist Propaganda, 12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독일의 자유노조Freie Arbeiter-Union, 22,500명의 조합원을 가진 네덜란드의 전국노동사무국Nationaal Arbeids Secretariaat, 50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이탈리아의 이탈리아노동조합Unione Sindacale Italiana, 3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멕시코의 노동자총연맹Confederación General de Trabajores, 2만 조합원을 가진 노르웨이의 노르웨이조합주의자연맹Norsk Syndikalistisk Føderasjon, 15만 조합원을 가진 포르투갈의 노동자총연맹Confederaçao Geral do Trabalho, 3만2천 조합원을 가진 스웨덴의 스웨덴노동자중앙조직Sveriges Arbetares Centralorganisation 등이 참여했다. 스페인의 C.N.T.는 당시에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에 맞선 강렬한 투쟁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대표단을 파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1923년 10월 사라고사에서 개최된 비밀 회합을 통대 총회 결의사항에 동의하고 있음을 재확인했다. 프랑스에서는 전후에 C.G.T.가 분열하여 친 소련파 C.G.T.U.가 창립되었고, 이들은 국제적색노조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C.G.T.U.내의 소장파가 단결하여 혁명적조합주의방어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10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여 베를린 총회의 사전 준비에 활발히 참여했다. 센느청소년연합Federation des Jeunesses de la Seine 또한 프랑스를 대표해 참석했다. 러시아 노동조합 내의 소수 조합주의자를 대표하여 두 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총회는 조합주의 조직 간의 국제적 동맹체를 창설하고, 그 이름을 국제노동자협의회라 칭하는 것에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국제노동자협의회는 베를린 사전회의에서 논의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원칙을 받아들였다. 이 선언의 2조는 다음과 같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모든 형태의 경제적, 사회적 독점을 적대한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그러한 독점을 철폐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써, 경제적 코뮌, 어떠한 정당의 부속품도 아닌 자유로운 노동자 · 농민 평의회를 통한 행정을 사용한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국가와 정당의 정치에 반대하고, 그를 대신하여 노동자의 경제조직을 세운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인간에 의한 통치에 반대하고, 물적 기반을 가진 행정을 추구한다. 결과적으로, 혁명적 조합주의의 목적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에서 모든 국가적 기능을 철폐하는 것이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모든 지배권의 독점은 모든 부의 독점과 더불어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모든 국가의 형태,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마저도 새로운 특권을 만들어낼 것이라 믿는다. 국가는 결코 해방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볼셰비키 및 그 지지자들과의 단절이 완성되었다. 이때부터 국제노동자협의회는 자신의 길을 걸었고, 창립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여러 나라에서도 기반을 얻었다. 국제노동자협의회는 자체적인 국제총회를 주관하고, 스스로의 회보를 발행하며, 여러 다양한 나라의 조합주의 조직 간의 관계를 조정한다. 국제노동자협의회는 조직노동자들의 모든 국제적 동맹체 중에서도 제1인터내셔널의 전통을 가장 충실히 지키고 있다 할 수 있다.

국제노동자협의회의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조직은 스페인 C.N.T.다. C.N.T.는 유럽에서 역사를 만들고 있으며, 무엇보다 노동자 조직이 여태껏 수행해온 과업 중 가장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C.N.T,는 1910년에 창립되어 수년 안에 100만 노동자와 농민들을 조직했다. C.N.T.는 조직의 이름은 새로운 것이었지만, 그 목적과 방법론은 그렇지 않았다. 스페인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운동이 지하에서만 이루어져야 했던 오랜 반동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이런 시기가 끝날 때마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조직의 이름은 바뀔지 몰라도 그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스페인의 노동운동은 카탈루냐의 재단사 후안 먼츠(Juan Munts)가 바르셀로나에서 첫 번째 섬유노조를 만들었던 1840년에 시작되었다. 당시의 정부는 사파테로(Zapatero) 장군을 카탈루냐로 보내어 운동을 탄압했다. 그 결과는 1855년의 위대한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총파업 당시 노동자들은 “단결할 권리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문구를 새긴 깃발을 들고 공개적 반란에 나섰다. 반란은 유혈진압 되었지만 정부는 단결권을 주어야만 했다.

스페인 노동자 최초의 운동은 스페인 연방주의자의 지도자이자 프루동의 사도였던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Pi y Margall)의 사상에 크게 영향 받았다. 피 이 마르갈은 당대의 뛰어난 이론가였고, 스페인에서 자유지상주의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정치적 이론은 리처드 프라이스(Richard Price),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y),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등 초기 북아메리카 자유주의자들과 유사한 지점이 많았다. 그는 국가의 권력을 최소로 제한하고, 이를 사회주의 경제 질서로 점차 대체하기를 원했다. 1868년 아마데오 1세(Amadeo I)의 퇴위 이후 바쿠닌은 스페인 노동자들을 향해 놀라운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으로 사절단을 보내어 제1인터내셔널에서 스페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 위대한 노동자 동맹에 참여했고, 바쿠닌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개념을 수용하였고, 지금도 수용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스페인의 노동조합연맹은 인터내셔널 내의 가장 강력한 조직이었다. 스페인 제1공화국의 전복 이후, 스페인에서 인터내셔널은 탄압되었다. 하지만 인터내셔널은 지하운동으로 남아 신문을 펴냈고, 모든 폭정에 대하여 저항했다. 그리고 마침내 7년간 계속된 전대미문의 탄압 이후에, 노동자를 탄압하는 특별법이 철폐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에스파뇰라 지역 노동조합 연맹Federacion de Trabajadores de la Región Española이 등장하였고, 세비야에서 1882년 개최된 연맹의 2차 총회에는 7만 명의 조합원들이 소속된 218개의 노동조합들이 참여했다.

세계의 그 어떤 노동조합도 스페인 아나키스트의 노동운동만큼 거세게 탄압된 적이 없다. 수백 명의 지지자들이 사형당하거나 헤레스 데 라 폰테라Jerez de la Frontera, 몬주익Montjuich, 세비야Sevilla, 알칼라 델 바이에Alcalá del Valle 등지의 비인간적 고문기술자들로부터 끔찍하게 고문당했다. 정부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농업노동자 조직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위 마노 네그라(Mano Negra, 검은 손)라는 조직을 조작하여 유혈진압 했다. 몬주익의 소름끼치는 비극은 당대에 전 세계적 시위의 폭풍을 불러왔다. 경찰과 사용자들은 카미사스 블랑카(Camisas Blancas, 백색셔츠단)이라는 폭력단을 만들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암살하였다. 그들에게 암살당한 희생자 중에는 C.N.T.의 서기장인 살바도르 세귀(Salvador Segui)도 포함되어있었다. 이 희생자 목록은 길고, 고문으로 가득 찬 스페인 노동운동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바르셀로나 최초의 근대 학교 설립자이자 신무 라 우엘가 헤네랄(La Huelga General, 총파업)을 출간했던 프란시스코 페러(Fransisco Ferrer) 또한 이 열사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반동도 노동운동과 그 지지자들의 저항을 분쇄하지 못했다. 운동은 순수한 심장과 굽히지 않는 이상으로 무장하여, 적들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던 수백 명의 위대한 인물상들을 만들어냈다. 스페인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은 정치적 경력을 쌓을 수 없었다. 대신 활동가들은 줄기찬 위험과 수감, 때로는 죽음을 받아야 했다. 누군가가 열사들의 소름 돋는 이야기에 익숙해졌을 때, 그는 왜 스페인 노동운동이 파시스트 반동의 학살에 대항하여 인간의 권리를 방어하는 데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다.

현재의 C.N.T.-F.A.I.는 운동의 옛 전통을 체현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에 비하여 스페인의 동지들은 시작부터 그 활동의 기반을 노동자의 경제적 투쟁 조직에 두고 있었다. 오늘날의 C.N.T.는 250만의 노동자, 농민을 조직하고 있다. C.N.T.는 24만부를 출간하는 스페인 최대의 신문인 바르셀로나의 「솔리다레다드 오브레라(Solidaredad Obrera, 노동자연대)」, 마드리드 최대의 신문인 「카스티야 리브레(Castilla Libre, 자유 카스티야)」를 포함하여 36개의 일간신문을 펴낸다. 이를 제외하고도 C.N.T,는 상당수의 주간지를 펴내고 스페인 최대의 비평지 6개를 가지고 있다. 특히 지난 해, C.N.T.는 다수의 서적과 팸플릿을 펴내고, 다른 어떠한 운동조직보다 대중의 교육에 더 기여했다. C.N.T.-F.A.I.는 오늘날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파시즘과의 영웅적 투쟁의 척추이자, 스페인 사회재조직의 영혼이다.

포르투갈의 노동운동은 언제나 이웃한 스페인으로부터 강하게 영향 받았다. 포르투갈에서는 1911년 노동자총연맹Confederacçao Geral do Trabalho이 창립되어 국내 최대의 노동자 조직이 되고, 스페인 C.N.T.와 원칙을 공유했다. 포르투갈 C.G.T.는 언제나 모든 정당들과 날카로운 선을 그었고, 다수의 대규모 파업투쟁을 지휘했다. 포르투갈에서 독재가 승리한 이후 C.G.T.는 정치활동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오늘날에는 지하운동을 이끌고 있다. 얼마 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반동에 저항하는 소요는 그들의 활동에 영향을 받았다.

제1인터내셔널 당시부터 이탈리아에는 언제나 강력한 아나키스트 운동이 존재했고, 특정 지역에서는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1902년, 이탈리아사회당은 독일 노동조합 조직을 모델로 하여 노동자총연맹Confederazione del Lavoro을 창립하였다. 하지만 사회당은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사회당은 노동자총연맹 조합원 다수가 프랑스 조합주의자의 사상에 강하게 영향 받는 것을 방어하지 못했다. 몇몇 대규모 파업투쟁, 특히 파르마Parma와 페라라Ferrara의 농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의 승리는 직접행동의 지지자들에게 강한 추동력을 주었다. 1912년 모데나Modena에서는 총연맹의 방법론과 이탈리아 사회당의 부속품으로써의 활동에 동의하지 않는 다양한 조직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이탈리아노동조합Unione Sindicale Italiana이라는 새로운 조직이 구성되었다. 이 조직체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까지 벌어진 수많은 노동자 투쟁의 영혼이었다. 특히 이탈리아노동조합은 1913년 6월에 경찰이 안코나의 파업대로를 공격하며 벌어진 총파업과 내전, 소위 적색주간의 주역이었다.

다음해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U.S.I.는 위기에 봉착했다. U.S.I.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던 알체스테 데 암브리스(Alceste de Ambris)는 계속 애매모호하게 행동했고, U.S.I.내에서 찬전여론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1914년 파르마 총회에서 알체스테 데 암브리스는 소수파로 전락하였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조직을 떠났다. 이탈리아가 전쟁에 뛰어들면서 U.S.I.의 유명한 선전가들은 체포되어 종전까지 수감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탈리아에는 혁명적 상황이 발생했고,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다. 이에 이탈리아에서는 활발하게 호응했다. U.S.I.는 짧은 시간에 조직세력을 회복하여 60만 조합원을 확보했다. 중대한 노동소요는 이탈리아를 흔들었고, 1920년 8월의 집단 공장점거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당시 공장점거투쟁의 목표는 모든 독재를 거부하고 조직노동자의 경제조직에 근간한 자유 소비에트 체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에 U.S.I.는 그 서기인 아르만도 보르기(Armando Borghi)를 모스크바로 보내어 러시아의 상황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보르기는 환상이 깨진 채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U.S.I.를 손에 쥐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1922년 로마 총회에서는 공개적으로 볼셰비키와 결별하고 국제노동자협의회와의 제휴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는 동안 파시즘은 직면한 위험으로 발전했다. 강력하게 단결한 노동운동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태세가 되어있었고, 아직은 이 위험을 예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당과 그 부속품인 노동자총연맹의 안쓰러운 합작은 모든 것을 망쳤다. U.S.I.를 제외하고 투쟁의 전선에 남아있던 것은 오직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연합Unione Anarchia Italiana과 그 세계적으로 지지받는 이탈리아 아나키즘의 투사 에리코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였다. 1922년 파시즘에 대항하는 총파업이 발발했을 때, 민주정부는 파시스트 무리를 무장시켰고,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무력화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민주주의는 자신의 무덤을 팠다. 이탈리아의 민주주의자들은 무솔리니를 노동자들에 대하여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그들의 무덤이 되었다. 파시즘이 승리하면서, 이탈리아의 모든 노동운동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U.S.I.와 모든 사회생활의 개방성도 사라졌다.

전후 프랑스에서 소위 개혁주의 진영은 C.G.T.에서 우세를 점했다. 이에 C.G.T.의 혁명적 요인들은 조합으로부터 분리하여 C.G.T.U.를 창립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정부가 이 조직을 손아귀에 쥐는데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러시아의 방식을 모방한 지하 세포조직의 무원칙한 활동이 시작되었고, 심지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두 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파리노동조합사무실에서 총격당하기도 하였다. 이에 피에르 베르나르(Pierre Bernard)를 포함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C.G.T.U.를 탈퇴하고 혁명적 조합주의자의 노동조합 총연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Syndicaliste Revolutionaire을 창설하여 국제노동자협의회에 가입했다. 이 조직은 그 때로부터 활기차게 활동했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전쟁 전 C.G.T.의 이상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프랑스 노동자들이 러시아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스페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호응하여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는 다시금 강하게 부활할 수 있었고, 이 운동이 조만간 재탄생 것이라는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독일에는 전쟁 전 오랜 기간 동안 소위 지역주의라 불리는 운동이 존재했다. 이 운동은 구스타프 케슬러(Gustav Kessler)와 프리츠 카터(Fritz Kater)에 의해 1897년 창립된 독일 자유노조 협회Freie Vereigung deutscher Gewerkschaften에 근거하고 있었다. FVdG는 최초에 사회민주주의적 이상에 영감을 받아 창립되었지만, 일반적인 독일 노동조합운동의 중앙 집중화 경향에 반발했다. 프랑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가 부활한 것은, FVdG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사회민주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라파엘 프리드베르크(Raphael Friedberg) 박사가 총파업을 지지했을 때 더욱 크게 강화되었다. 1908년, FVdG는 사회민주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고 공개적으로 조합주의를 지지했다. 전후에 이 운동은 크게 강화되었고, 단시간 내에 12만 명의 조합원을 확보했다. 1919년 베를린에서 열린 총회에서 루돌프 로커가 작업한 원칙이 승인되었다. 이 원칙은 스페인 C.N.T.의 목적과 핵심적인 부분에서 동의하고 있었다. 1920년 뒤셀도르프 총회에서 FVdG는 그 이름을 독일자유노조Freie Arbeiter-Union Deutschlands로 바꾸었다. 독일자유노조는 선전활동에 매우 열심히 임하였고, 라인 유역 산업단지의 조직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위대한 행동들에 열심히 임했다. F.A.U.D.는 출판 사업 역시 활발하게 임했다. 그들은 방대한 양의 소책자를 포함하여, 크로포트킨, 바쿠닌, 네틀라우, 로커 등의 장편 저작들을 출간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자유의지주의적 개념들을 더 넓게 퍼트릴 수 있었다. F.A.U.D.는 주간 기관지인 「조합주의자Der Syndikalist」, 월간 이론지 「인터내셔널Die Internationale」 외에도 뒤셀도르프의 「창조Die Schöpfung」를 포함한 여러 지역지들을 발행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독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소멸했다. 운동을 지지하던 다수는 수용소에 수용되거나 망명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은 여전히 비밀리에 존재하고, 그 끔찍한 조건에서도 지하에서의 선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조합주의 운동이 오랜 시간 동안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스웨덴노동자중앙조직Sveriges Arbetares Centralorganization은 국제노동자협의회에 가맹했다. 스웨덴노동자중앙조직은 4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가지고, 스웨덴 노동운동의 다수를 점유하고 있었다. 스웨덴 노동운동의 내적 조직은 매우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스웨덴노동자중앙조직은 두 개의 일간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스톡홀름에서 알버트 젠센(Albert Jensen)이 펴내던 「노동자Arbetaren」였다. 스웨덴노동자중앙조직은 다수의 훌륭한 선전활동가들을 가지고 있었고, 청년조합주의자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스웨덴 조합주의자들은 스웨덴 전역의 노동자 투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달렌Adalen에서 거대한 파업투쟁이 발발하고, 스웨덴 정부가 최초로 진압을 위한 민병대를 투입하여 다섯 명이 총격 당했을 때, 스웨덴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응답했다. 조합주의자들은 이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정부는 결국 이 시위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조합주의 운동의 관점에서 네덜란드에는 전국노동사무국(Nationale Arbeeter-Sekretariat, 이하 N.A.S.)가 4만 명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N.A.S.는 점점 공산주의자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었고, 이에 네덜란드 조합주의 노동조합(Nederlandisch Syndikalistisch Vakverbond, 이하 N.S.V.)을 창설하여 국제노동자협의회에 가입하였다. 네덜란드 조합주의 노동조합의 핵심 부문은 어거스트 루소(August Rousseau)가 지도하는 금속노조였다. N.S.V.의 운동은 활발한 선전활동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알베르 데 용(Albert De Jong)을 편집자로 둔 「조합주의자Die Syndikalist」라는 훌륭한 기관지를 보유한다. 그리고 파울 아르투르 뮐러-레닝(Paul Arthur Müller-Lehning)이 편집자로 있던 월간 「원칙Grond-Slagen」 역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는 언제나 반 군국주의의 땅이었다. 사제였다가 아나키스트가 된 도멜라 뉴엔하우스는 그 순수한 이상주의로 모두에게 존경받았다. 그는 1904년에 반군국주의 인터내셔널을 창건하였지만, 그 영향력은 네덜란드와 프랑스에만 존재했다. 1921년 헤이그에서 열린 3차 반군국주의 총회에서, 전쟁과 반동에 대항하는 국제 반군국주의 사무국이 창립되었고, 지난 16년간 매우 활발한 국제적 선전 그룹으로써, 바르트 데 리흐트(Bartholomeus de Ligt), 알베르 데 용 등의 유능하고 이타적인 이들을 배출했다. 사무국은 상당수의 국제 평화주의자 총회를 주최했고, 여러 언어로 신문을 편찬했다. 1925년, 사무국은 국제노동자협의회의 국제반군사협의회Anti-Militarist Bureau against War and Reaction와 동맹했다. 그리고 두 조직의 연계는 반동과 전쟁의 태동에 저항하는 지침 없는 투쟁을 선도했다.

노르웨이, 폴란드, 불가리아에도 국제노동자협의회와 제휴하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단체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자유연합단체전국회의自由連合団体全国会議는 국제노동자협의회의 공식적 제휴단체가 되었다.

남아메리카, 특히 아르헨티나는 노동운동이 그 태동기부터 스페인 아나키즘의 자유의지주의적 이상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1890년 바르셀로나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제1인터내셔널을 경험한 스페인의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 투사인 펠리세르 파라이로(Pellicer Parairo)가 왔다. 파라이로의 영향력 아래에서, 189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노동조합의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는 아르헨티나 노동자연맹Federación Obrera Argentina이 결성되었고, 그 4차 총회에서 아르헨티나 노동자연맹은 아르헨티나지역노동자연맹(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 이하 F.O.R.A.)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때부터 F.O.R.A.는, 비록 오늘날과 같은 반동의 시기에는 지하로 들어가야 했을지라도, 큰 방해 없이 성장했다. F.O.R.A.는 아나키즘적 노동조합 조직이고, 지금껏 아르헨티나를 뒤흔든 위대한 노동자 투쟁의 영혼이라 하겠다. F.O.R.A.는 4만 명의 조합원으로 그 활동을 시작하여 세계대전 이후 30만까지 그 규모를 늘렸다.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Diego Abad de Santillán)이 그의 저작 『F.O.R.A.』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F.O.R.A.의 역사는 국제 노동운동의 관점에서도 가장 전투로 가득 찬 역사라 할 수 있다. F.O.R.A.는 25년 이상 일간지 「저항La Protesta」을 데 산티얀과 아랑고(Emilio López Arango)의 편집부 아래에서 편찬했고, 매주 국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최고의 지성들이 작성한 부록들을 이에 담았다. 호세 에바리스토 우리부루(José Félix Uriburu)의 쿠데타 이후 「저항」은 탄압받았지만, 오늘날까지도 일간은 아닐지라도 지하에서 출판되고 있다. 무엇보다, F.O.R.A.에 가맹한 규모 있는 노동조합들은 자체적인 기관지를 발행하고 있다. F.O.R.A.는 일찍이 국제노동자협의회에 가입했다.

1929년 5월, F.O.R.A.는 남아메리카 노동조합들의 총회를 소집하였다. 이를 보조하기 위하여 국제노동자협의회는 베를린으로부터 대외협력국장 어거스틴 수키(Augustin Souchy Bauer)를 파견했다. 총회에는 아르헨티나 F.O.R.A.를 제외하고도, 파라과의의 파라과이 노동자 센터Centro Obraro del Paraguay, 볼리비아의 라파스 지역 연맹, ‘횃불Federacion Local de la Paz, La Antorcha’, ‘빛과 자유Luz y Libertad’, 멕시코의 노동자 총연맹Confederación General de Trabajadores, 과테말라의 조합주의행동협의회Comité por Acción Sindical, 우루과이의 우루과이지역연맹Federación Regional Uruguaya, 브라질의 7개 노동조합, 코스타리카의 ‘자유를 향해Hacia la Libertad’가 배석했다. 심지어 이바네즈의 독재 이래 지하로 피신한 칠레의 I.W.W.도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 총회에서 아메리카 대륙 노동자협의회가 출범하였고, 국제노동자협의회의 아메리카 지부가 되었다. 이 조직은 최초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자리 잡았지만, 아르헨티나의 독재 정권 수립 이후 우루과이로 본부를 이전했다.

이것이 오늘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여러 국가에서 가지고 있는 힘이다. 우리 모두는 어디에서나 반동과, 현대 노동운동의 보수적 요인에 대항하여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 스페인 노동자들의 영웅적 전투를 통해, 오늘날 세계의 관심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으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지자들은 그들에게 성공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자후기 : 다시, 혹은 처음으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말한다.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흔히들 떠올리는 단어를 나열해보자. “ 방종”. “맹동”. “테러리즘”. “이상주의”. “영웅주의”. 몇 가지 더 있을 수 있겠지만, 좋은 단어가 떠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조합주의”라는 단어는 또 어떠한가. “경제주의”나 “타협주의”와 묶여 같이 읊어지는 단어다. 경영술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코포라티즘 그거 노무관리 수단 아닌가?’라는 반응을 할 것이고, 좌파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실상 욕설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 두 단어를 합친 것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혹은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이다. 주는 느낌이 좋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IWW나 CNT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봤자 (IWW가 주장하는 바)“원 빅 유니온(거대단일노조)” 개념을 이야기하거나, “총파업을 통한 사회변혁”이라는 정도를 이야기함에 그칠 뿐이다.

하지만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IWW나 CNT의 조직력이 절정에 달하였던 1920년대로 완결된 과거의 운동인 것이 아니다. “원 빅 유니온”이나, “총파업을 통한 사회변혁”이라는 단일한 방법론 아래에 존재하는 운동 역시 아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두 가지 원칙 위에 서있다. 하나. 모든 사회변혁운동이 그러하듯, 크로포트킨이 <빵의 쟁취>에서 지적하였듯, 사회 혁명의 목적은 인민 대중이 생존과 생활이라는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하나. 그 개별적 수요를 모두 충족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혁명의 쟁취가 다른 누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며 살아가는 대중 스스로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노동대중이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건설한 자발적 조직, 즉 노동조합을 변혁의 동력이라 바라본다. 노동대중이 자기 생산의 수단을 직접 소유하고, 생산의 방식을 직접 결정하고, 생산의 결과물을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혁명적인 것이라 바라본다.

그렇기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단일한 방법론과 교리 아래에 있을 수 없다. 모든 노동대중이, 노동대중의 조직이 놓인 상황이 같지 않기에 그 조직의 구성과 투쟁의 방법론 역시도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IWW가 혁명적 산별노조주의에 근거한 “원 빅 유니온”을 이야기한다면, CNT는 지역일반노조의 연방(연맹)적 결합체를 지향한다. CNT가 지역적 ·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을 통하여 산업을 마비시키는 방식을 통한 변혁을 이야기한다면, IWW는 아예 “총파업보다 가장 효과적인 시기에 집행하는 짧고 산발적인 파업투쟁의 연속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결국,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몇몇 주요 개념들일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과 그 투쟁을 통해 현장에서 “현장권력”을 확보해나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의 변혁은 결국 노동자 스스로의 투쟁으로 만들어내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결코 과거의 운동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자기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자기 삶을 바꾸려는, 현장에서 빼앗긴 권력을 다시 확보하려는 민주노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라고 부르건 말건, 그들의 조직과 활동과 운동 속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집단해고에 맞서 100일 가까이 투쟁하고 있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LG트윈타워분회 노동자들의 투쟁기금 모금을 위한 바자회에 출품하기 위하여 제책한 책이다. 그리고 우리는,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빛나고 있는 것을 본다. “착한 기업” LG는 그들을 해고했고, “촛불 정권”과 소위 진보적이라 불리는 180석 거대 여당은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선택한 것은, 정부에 대한 읍소도 아니고, 노동자 계급정당의 집권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입법을 청원하는 것도 아닌, 자기 현장을 지키기 위한 스스로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투쟁이, 그 어떤 정치인들의 감언이설보다도, 100만이 든 촛불보다도, 180개의 의석보다도, 사회적 합의보다도 더 크게 그들의 삶을 변혁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변혁들이 누적되고, 쌓이고, 하나될 때 그것이 곧 사회 혁명이라는 것이, 루돌프 로커가 이 책에서 말하는 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지난 백수십년간 주장하고 실천해온 바라 하겠다.

LG트윈타워분회 조합원 동지들의 힘찬 투쟁을 다시 한 번 응원한다.


바다 건너 해방된 이들은

(As the Libery lads O'er the sea)

자유를 샀느니, 그것도 값싸게, 피와 맞바꾸어

(Bought their freedom, and cheaply, with blood,)

우리들, 그래, 우리들도

(So we, boys, we)

싸우다 죽든지, 자유롭게 살든지

(Will die fighting, or live fee)

러드 왕 이외의 모든 왕을 쓰러뜨릴지니!

(And down with all kings but King Ludd!)

[1] 막스 네틀라우(Max Nettlau)의 저서에는 아나키즘의 여러 학설과 제반 운동의 역사에 대해 꽤 상세한 문헌 목록이 있다.

[2] 이 말의 기원은 어둠에 싸여 있다. 네드 러드Ned Ludd라는 이름의 직공이 그 유래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에는 어떤 역사적 근거도 없다. “잭 스윙Jack Swing”이나 “대 에녹Great Enoch”에 대해 입에 담고 있는 지방도 있으나, 이 모든 이름의 의미는 동일한 것이었다.

[3] 바이런 경은 러다이트주의에 강하게 공감하고 있었다. 그의 시 중 하나에서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4] 역자 주 : 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스타하노프는 광업노동자로써, 공정 혁신을 고안하여 당시 작업 기준량의 14배가 넘는 채광에 성공했다. 스탈린은 모든 노동자들이 스타하노프의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프라우다」의 선동으로 스타하노프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대충 소련판 천리마운동이라 하겠다.

[5] 아나키스트 운동과 어떠한 개인적 관련도 없는 외국 언론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제네바 대학의 교수인 안드레아 올트마레스(Andrea Oltmares)는 다소 긴 성명을 통해 “내전의 정점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이 일선의 정치적 조직가임을 증명했다. 그들은 모두의 책임감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유창한 언어로 대중의 일반적 행복을 위한 희생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사회민주자로서 나는 카탈루냐에서의 경험에 대하여 행복하게, 진심으로 칭송할 수 있다. 반자본주의적 변혁은 그곳에서 독재에 기댈 필요 없이 일어났다. 조합원들은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그들이 신뢰하는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물자의 생산과 분배를 스스로 통제했다. 노동자들은 아주 활기찼고, 그들은 스스로의 이득이 아니라 오직 모두의 행복만을 추구했다.” 무솔리니 집권 전에 제노아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유명한 반파시스트 카를로 로젤리(Carlo Roselli)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3달 동안 카탈루냐는 구체계의 잔재 위에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는 놀라운 균형감각, 현실인식, 조직능력을 보여준 아나키스트들에 기인한다. 카탈루냐의 모든 혁명세력은 조합주의-사회주의 아래에서 단결했다. 대규모 산업을 사회화하고, 영세사업자를 승인하고, 노동자 자주경영을 확립하고… 지금껏 무시되어왔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위대한 건설적 힘임을 증명했다. 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하지만 종종 파괴적이며 범죄적이라 치부되는 카탈루냐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내 의견을 표현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는 그들과 전선에, 참호에 함께 있었고, 그들을 찬미하게 되었다. 카탈루냐의 아나키스트들은 다가올 혁명의 전위에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그들과 함께 탄생했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즐겁다.” 잉글랜드 I.L.P.의 서기이자 카탈루냐의 5월(1937년) 이후 스페인으로 왔던 페너 브록웨이(Fenner Brockway)는 “나는 C.N.T.의 힘에 감명 받았다. 그들이 스페인의 노동자 계급 조직 중 가장 크고 가장 활기찬 곳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철도, 도로, 운수, 기계, 섬유, 전기, 건설, 농업 등 대규모 산업들은 C.N.T.의 손에 놓여있었다. 발렌시아에서는 U.G.T.가 더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현장의 노동대중은 C.N.T.에 속해있었다. U.G.T. 조합원들은 보다 ‘화이트칼라’ 노동자였다. 나는 C.N.T.의 건설적이고 혁명적인 작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노동자의 산업 통제에 있어 그들의 성취는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철도나 기계, 섬유의 예시를 보라… 일부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은 여전히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을 불가능하고, 질서가 없고, 통제 불능이라 부른다. 이것은 진실과 크게 다르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은 여태껏 노동계급이 진행한 가장 위대한 건설적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들은 앞에서 파시즘과 투쟁하면서, 뒤에서는 새로운 노동자의 사회를 건설하고 있다. 그들은 파시즘과의 전쟁과 사회혁명의 진행을 불가분이라 본다. 그들이 하는 일을 보고 이해한 사람들은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파시즘에 저항한다. 동시에 그들은 파시즘의 유일한 대안으로써 새로운 노동자의 질서를 창조하고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 노동자들이 진행하는 일 중 가장 거대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아나키스트들 간의 위대한 연대는 그들이 스스로의 힘에 기대고, 어떠한 지도에도 의존하지 않기에 성립한다. 그들의 조직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인민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단순히 대중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 말이다”라고 언급한다.

[6] 루가의 복음서 16:19~31, 공동번역 참조 -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