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의 서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각각 편집하는 과정에서 서문을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서문만을 옮긴다.

―도서관 업로드자 주―

서문 밑에 별도로 도서관에 업로드된 나머지 에세이의 링크를 첨부합니다.


21년 전 나는 위대한 아나키스트 존 모스트(John Most)의 연설을 처음 들었다. 당시, 아니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너무나 멋진 말솜씨로, 집회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그가 던진 이 예언적인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오로지 낡은 옛 신념들을 벗어던지고 아나키즘이라는 새로운 진리와 그 아름다움을 보라고 외치고 있었다.

당시 내가 가장 갈망한 일은 존 모스트처럼 말을 잘하는 것이었다. 그런 갈망이 있어서인지 나 역시 대중들 앞에 서게 되었다. 물론 젊은 청춘의 순수한 열정 때문에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때는 어린 시절인 것 같다. 이때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중한 시기는 정말 짧은 기간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넘기면, 미래의 선전선동가로 성장한다. 이때의 마음은 나약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이를 잘 극복하면 성숙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주변의 수많은 환경에 갇혀 좌절하게 된다.

나는 연설의 영향력에 대해 지대한 신뢰를 보냈으나 이제는 아니다. 연설로 사람의 사상이나 심지어 감성조차 각성시키기에도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으로 나는 연설로 하는 선전은 기껏해야 사람들을 잠자는 상태에서 흔들어 깨우는 정도의 수단밖에 안 된다고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연설식 선전으로는 지속적인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정적인 신문 보도기사 때문에, 아니면 뭔가 재미가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집회에 참석한다. 이 사실은 사람들의 내면에 뭔가를 진정 배워야겠다는 충동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글이라는 표현 양식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진보적인 이념에 지대한 관심이 있지 않다면 그 누구도 성가시게 진지한 책과 씨름하지 않을 것이다. 선전 분야에서 오래도록 일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아무리 교육을 해도 배우는 자는 자기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것만 수용한다는 사실이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이것이 진리임을 대부분의 근대 교육학자들이 인정했다. 어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스트나 혁명가는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직 할 일은 그런 사상의 씨앗을 심는 것뿐이다. 씨앗이 살아 성장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그 인간의 토양이 얼마나 비옥한가에 달려있다. 물론 뿌린 지적 씨앗의 품질이 좋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집회에서 청중들은 수많은 비본질적인 요소들에 관심을 빼앗긴다. 아무리 웅변술이 뛰어난 연사라도 청중들의 소란스러움을 피할 수 없다. 그 결과 청중들의 마음을 뒤흔들지 못하게 된다. 아니, 연사 자신조차 불만족스럽게 된다.

저자와 독자의 관계는 보다 친밀하다. 그래서 진정 책이 우리 곁에 있기를 바란다. 입으로 표현하는 것에 비해 글로 표현하면 중요한 것을 잘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 · 사회적 중요성을 지닌 다양한 주제에 관한 내 생각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고 싶었다. 이 책은 나의 21년간의 정신적 투쟁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수많은 변화와 내적 교정을 거쳐 나온 것이다.

내 책을 읽을 독자들이 내 말을 들은 청중들만큼 많을 거라고 낙관하는 건 아니다. 재미를 느끼려는 많은 독자들보다 정녕 무언가 배우고자 하는 소수에게 이 책이 선택되기를 바란다.

이 책과 관련해 이 이야기는 꼭 해야겠다. 몇 가지 점에 대해 미리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반드시 제기될 다음 두 가지 이의에 대해 미리 말해둔다. 그 두 가지는 이 책의 여러 장 중 〈아나키즘〉과 〈소수 대 다수〉와 관련된 것이다.

“아나키즘 하에서 어떻게 세상이 운영되는지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이 질문을 나는 수천 번도 더 들었다. 아나키즘은 무슨 철제 주물처럼 고정된 프로그램이나 방법에 따라 일관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항상 새로운 세대에게 과거는 투쟁하고 극복해야 할 짐으로 남게 된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아나키즘은 후손들에게 자체의 필요와 조화를 이루도록 무언가 특별한 시스템을 개발하도록 요구하지는 않는다. 어떤 인종도 외적 제약조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다가올 상황에 대해 일사천리로 적용될 행위체계를 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가? 매순간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우리는 정신을 차려 미래를 옥죄는 경향에 맞서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쓰레기더미에서 잘못된 것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한다면 후손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위대한 유산을 남겨주게 될 것이다.

독자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안타까운 경향은 한 작품에서 하나의 문장을 골라내 그 저자의 이념이나 개성을 대변하는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체는 ‘초인’을 믿었기 때문에 약자를 증오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초인’에 대한 비전을 어떤 약자와 노예도 생기지 않는 안전한 사회상태에 대한 요청이라고 판단한다면 약자를 증오한다는 식의 미천한 해석은 생길 수 없다.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슈티르너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하라. 악마는 뒤처진 자를 잡아간다”는 식의 개인주의 이론의 사도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슈티르너의 개인주의는 위대한 사회적 잠재력이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점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만약 사회가 자유로워진다면 그것은 해방된 개인들을 통해 자유로워질 것이다. 해방된 개인들의 자유로운 노력으로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인식 하에 나는 이 책 〈소수 대 다수〉의 장에서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대중을 창조적 요소로 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이 나는 인민의 적으로 추방당할 것이다. 인민을 미혹하려는 미끼로 너무나 일반적으로 유행하는 그런 선동적인 수법을 내가 쓰느니 차라리 추방당하는 길을 나는 택하겠다. 억압받고 낙담한 대중의 질병은 실제로 아주 건강한 편이다. 나는 오히려 작금에 일반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환자를 죽이지도 않고 회복시키지도 않는 그런 미봉책의 처방을 거부한다. 사회적 악을 다루는 데 지나친 것은 없다. 지나치고 극단적이라는 것이 대개는 참된 것이다. 다수에 대해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의 잠재력을 신뢰한다. 개인의 잠재력이 자유로워져 공통된 목적을 위해 개인 간의 결사가 이루어질 때 혼돈스럽고 불평등한 이 세상에서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나의 모든 생각은 이 책이 말해줄 것이다.

엠마 골드만


아나키즘 - 그것은 진정 무엇을 옹호하는가

소수 대 다수

정치적 폭력의 심리

감옥: 사회적 범죄와 교화의 실패

애국심: 자유에의 위협

프란시스코 페러와 근대학교

청교도의 위선

여성 매춘

여성 참정권

현대 연극: 강력한 급진사상의 전파 수단